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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살라딘
타리크 알리 지음, 정영목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타리크 알리가 저술한 이슬람 5부작 가운데 <석류나무 그늘 아래>에 이어 두 번째로 도전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아마 이렇게 두 권만 나오고 인기가 없어서인지 나머지 책들은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아쉽긴 하지만 어쩌랴, 그것 또한 한국 출판생태계의 숙명인 것을. 어제 헌책방에서 데려오자마자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미 이러저러한 책들을 통해 수차례 접해 왔지만, 지난 천 년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뽑은 최고의 인물 살라흐 앗 딘(살라딘)에 대한 타리크 알리의 전기적 혹은 연대기적 서술은 매력적이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소설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술탄이 이야기를 하면, 선발된 유대인 출신 서기 이븐 야쿠브(야곱의 이슬람식 이름으로 보인다)가 술탄을 위해 기록한다는 설정에서 <술탄 살라딘>은 출발한다. 카이로의 술탄은 바야흐로 위대한 원정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알 쿠스드(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지상명령이었다. 적을 섬멸시켜야 후환이 없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십자군전쟁으로 프랑크족에게 빼앗긴 알 쿠스드 탈환에 나서는 영웅의 면모는 정말 대단했다. 알 쿠스드를 정복한 프랑크족이 성지에서 이슬람,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 죽였다면, 살라흐 앗 딘은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그런 장면이 잘 나오지 않던가.
이븐 야쿠브(살라흐 앗 딘의 가신 샤디와 더불어 저자가 생산해낸 가공의 캐릭터다)는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인 위대한 술탄의 바알베크(헬리오폴리스) 유년 시절부터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었던 디마스크(다마스커스)에서 권부의 중심에 다가서는 장면은 물론이고, 역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술탄이 할리마의 유혹에 빠지는 장면, 동성애의 유혹에 빠져 기묘한 술수를 부렸다가 엄혹한 처벌의 위기에 빠진 유력한 쉐이크의 이야기가 마치 독자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방식으로 현란하게 전개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술탄의 옆자리에 앉아 벌어지는 세계사적 흐름은 물론이거니와 이전투구처럼 전개되는 인간사에 대한 판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내가 소설에 집착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살라흐 앗 딘이 등장하는 종래의 작품들의 경우 알 쿠스드 재정복이라는 과정에 매몰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웅의 정치적인 면들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타리크 알리는 <술탄 살라딘>에서 이슬람의 규방, 하렘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썰로 술탄의 인간성도 부각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아무리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술탄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위대한 전사이자 위선적인 권위와 직언을 마다하지 않는 샤디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당태종 이세민에게 위징이 있었다면, 술탄 살라흐 앗 딘에게는 샤디가 있었다.
이슬람 규방 문화에 대해서도 저자는 좀 더 다른, 그리고 진보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성적 쾌락을 위한 도구이자 자식을 생산하는 역할 뿐 아니라 근대적 개념에서 볼 때 팜므파탈의 성격을 지닌 캐릭터들이 속출한다. 빨간머리 매력녀 할리마를 비롯해서, 어지간한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뺨칠 만한 지적 능력을 가진 예맨 출신 술타나 자밀라의 경우를 보자. 연인 메무드를 잃고 술탄의 규방에 들었지만, 술타나 자밀라와 기묘한 사랑에 빠지는 할리마와의 관계에 투입된 유대인 개인서기 이븐 야쿠브의 곤란한 입장이 바로 이해가 됐다. 술탄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한 것은 좋았지만, 그것이 바로 야쿠브 자신에게 화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술탄은 예리하게 지적한다. 사방에 심어 놓은 비밀 첩자들 덕분에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든 술탄의 지모에 독자들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쿠르드족 출신의 술탄 살라흐 앗 딘은 자신의 아버지 아이유브와 어이없이 환관에게 살해당한 이슬람의 원조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의 봉신이었던 시르쿠 휘하에서 미래의 무슬림 세계를 통일한 위당대한 군주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시 이슬람 세계는 알 쿠스드에 자리잡은 예루살렘 왕국 프랑크족의 계속되는 반간계와 내분으로 극심한 분열을 겪고 있었다. 훗날 이베리아 반도의 알안달루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분열을 곧 융성했던 제국의 멸망을 의미했다. 디마스크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의 패자 누르 앗 딘의 명령을 받은 아이유브 패밀리는 먼 이집트 카이로 원정에 나선다. 숱한 고비를 넘기면서, 어이없는 식탐으로 죽은 삼촌 시르쿠를 대신해서 이집트의 칼리파로부터 와지르에 임명된 살라흐 앗 딘은 비로소 사분오열된 이슬람 세계 통일에 나선다. 이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주군 누르 앗 딘이 디마스크에 건재하고 있어서 주군의 견제와 프랑크족의 압박 그리고 빈번한 반란 때문에 카이로의 살라흐 앗 딘 정권은 풍전등화 같은 신세였다.
사방의 적으로 포위된 살라흐 앗 딘은 온갖 환난을 극복하고 시리아와 이집트의 술탄으로 우뚝 서는데 성공했다. 전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위대한 전략가로서도 탁월한 능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성지 알 쿠스드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저항할 신자들은 없었으리라. 카이로를 떠나 원래 자신의 근거지였던 디마스크에서 알 쿠스드를 향한 최후의 지하드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분열되었던 이슬람 세계는 살라흐 앗 딘의 깃발 아래 집결한다. 지하드의 순교자는 알라와의 계산 없이 바로 천국에 간다는 이론 뿐 아니라,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 싸웠다는 자부감 그리고 결정적으로 최후의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과 함께 싸웠다는 전승을 아들과 손자들에게 전해주고 싶다는 욕망도 한 몫 한 게 아니었을까.
타리크 알리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여성주의를 의식한 듯, 뛰어난 지성을 겸비한 술타나 자밀라와 그녀의 애인 할리마를 배치하는 세심함도 잊지 않는다. 특히 자밀라는 회의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카디가 알면 노발대발할 이단주의 사상도 마다하지 않고 지적으로 섭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규방의 자밀라와 술탄이 보여주는 뛰어난 정보력은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라고나 할까. 술탄이 참가한 거의 모든 전쟁에 종군한 자밀라의 미친 존재감은 작가의 뛰어난 문학적 성취로 판단된다.
사실 알 쿠스드 공략전은 그전에 술탄 부대와 프랑크 기사 간에 벌어진 하틴 전투로 판가름이 났다. 우유부단하다는 평가까지 받는 술탄 살라흐 앗 딘은 신중하게 전장의 모든 변수들을 고려해서, 프랑크 정예 부대를 물을 전혀 구할 수 없는 사막으로 유인해서 결국 궤멸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동안 수많은 신자들을 모욕한 샤티용의 레지날드를 직접 처단하는 과단성을 과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바람대로 알 쿠스드 공략에 성공해서 90년간 이어진 모멸의 시간을 끝장내는데 성공한다. 물론 성도 공략에 집중하고, 티레의 레몽 백작에 대한 아량 베풀기가 훗날 3차 십자군 원정 당시 파도처럼 몰아닥친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와 프랑스의 필립 부대에게 해안도시를 내주는 패착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편, 관대하고 포용력 넘치는 술탄은 심지어 십자군 병사들과의 약속도 꼭 지키고자 하는 중세 기사도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리처드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수차례 술탄과의 약속을 이교도와의 약속이라고 주장하면서 깨뜨리는 파렴치한 장면을 연출한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주인공 이벨린의 발리앙 역시 마찬가지다. 하틴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가 된 그를 술탄은 풀어 주었다. 이벨린은 살아 있는 동안 무기를 들고 술탄에게 대항하지 않겠노라고 서약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사도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었다.
프랑크족과의 전쟁으로 장장 20년간을 보낸 술탄의 최후를 기록하며 이븐 야쿠브의 연대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슬람 역사상 불세출의 영웅이자 성도 알 쿠스드를 회복한 신자들의 사령관 살라흐 앗 딘의 마지막을 애도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어느 술탄도 살라흐 앗 딘 같은 추모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타리크 알리는 살라흐 앗 딘의 영웅적 모습은 물론이고, 부족한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저술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후기에서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했는데, 나같이 이슬람교에 대해 무지한 독자들이 보기엔 전혀 그런 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전작 <석류나무 그늘 아래>와 달리 아무래도 영웅서사가 중심이고,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할 만한 캐릭터가 등장해서인지 전작의 비극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전개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유대인 이븐 야쿠브는 역사를 기록하는 개인서기로서 술탄의 총애를 얻은 대신, 아내의 부정 그리고 알 쿠스드 함락한 분노한 프랑크 기사들에 의해 비극을 겪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쩌면 무슬림들의 염원이었던 성도 회복을 위한 부수적 피해가 아니었을까.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가 이븐 야큐브의 개인사를 통해 강력한 메시지로 변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타리크 알리의 이슬람 5부작 시리즈가 <석류나무 그늘 아래>와 <술탄 살라딘>으로 끝난 게 너무 아쉽다. 예고된 후속작 <돌기둥 여인>은 물론이고, <팔레르모의 술탄>과 <황금 나비의 밤>은 아무래도 영어책으로 구해서 읽어야 하나 어쩌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