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루뭄바를 죽였는가 - 콩고민주공화국 초대 총리 살해와 그 배후
에마뉘엘 제라르.브루스 쿠클릭 지음, 이인숙 옮김 / 삼천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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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우리나라에도 이런 책이 나오다니! 역시 삼천리!
희대의 독재자 모부투 이야기도 실려 있다니 콩고 현대사
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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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살라딘
타리크 알리 지음, 정영목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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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타리크 알리가 저술한 이슬람 5부작 가운데 <석류나무 그늘 아래>에 이어 두 번째로 도전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아마 이렇게 두 권만 나오고 인기가 없어서인지 나머지 책들은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아쉽긴 하지만 어쩌랴, 그것 또한 한국 출판생태계의 숙명인 것을. 어제 헌책방에서 데려오자마자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미 이러저러한 책들을 통해 수차례 접해 왔지만, 지난 천 년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뽑은 최고의 인물 살라흐 앗 딘(살라딘)에 대한 타리크 알리의 전기적 혹은 연대기적 서술은 매력적이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소설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술탄이 이야기를 하면, 선발된 유대인 출신 서기 이븐 야쿠브(야곱의 이슬람식 이름으로 보인다)가 술탄을 위해 기록한다는 설정에서 <술탄 살라딘>은 출발한다. 카이로의 술탄은 바야흐로 위대한 원정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알 쿠스드(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지상명령이었다. 적을 섬멸시켜야 후환이 없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십자군전쟁으로 프랑크족에게 빼앗긴 알 쿠스드 탈환에 나서는 영웅의 면모는 정말 대단했다. 알 쿠스드를 정복한 프랑크족이 성지에서 이슬람,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 죽였다면, 살라흐 앗 딘은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그런 장면이 잘 나오지 않던가.

 

이븐 야쿠브(살라흐 앗 딘의 가신 샤디와 더불어 저자가 생산해낸 가공의 캐릭터다)는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인 위대한 술탄의 바알베크(헬리오폴리스) 유년 시절부터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었던 디마스크(다마스커스)에서 권부의 중심에 다가서는 장면은 물론이고, 역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술탄이 할리마의 유혹에 빠지는 장면, 동성애의 유혹에 빠져 기묘한 술수를 부렸다가 엄혹한 처벌의 위기에 빠진 유력한 쉐이크의 이야기가 마치 독자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방식으로 현란하게 전개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술탄의 옆자리에 앉아 벌어지는 세계사적 흐름은 물론이거니와 이전투구처럼 전개되는 인간사에 대한 판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내가 소설에 집착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살라흐 앗 딘이 등장하는 종래의 작품들의 경우 알 쿠스드 재정복이라는 과정에 매몰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웅의 정치적인 면들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타리크 알리는 <술탄 살라딘>에서 이슬람의 규방, 하렘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썰로 술탄의 인간성도 부각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아무리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술탄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위대한 전사이자 위선적인 권위와 직언을 마다하지 않는 샤디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당태종 이세민에게 위징이 있었다면, 술탄 살라흐 앗 딘에게는 샤디가 있었다.

 

이슬람 규방 문화에 대해서도 저자는 좀 더 다른, 그리고 진보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성적 쾌락을 위한 도구이자 자식을 생산하는 역할 뿐 아니라 근대적 개념에서 볼 때 팜므파탈의 성격을 지닌 캐릭터들이 속출한다. 빨간머리 매력녀 할리마를 비롯해서, 어지간한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뺨칠 만한 지적 능력을 가진 예맨 출신 술타나 자밀라의 경우를 보자. 연인 메무드를 잃고 술탄의 규방에 들었지만, 술타나 자밀라와 기묘한 사랑에 빠지는 할리마와의 관계에 투입된 유대인 개인서기 이븐 야쿠브의 곤란한 입장이 바로 이해가 됐다. 술탄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한 것은 좋았지만, 그것이 바로 야쿠브 자신에게 화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술탄은 예리하게 지적한다. 사방에 심어 놓은 비밀 첩자들 덕분에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든 술탄의 지모에 독자들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쿠르드족 출신의 술탄 살라흐 앗 딘은 자신의 아버지 아이유브와 어이없이 환관에게 살해당한 이슬람의 원조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의 봉신이었던 시르쿠 휘하에서 미래의 무슬림 세계를 통일한 위당대한 군주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시 이슬람 세계는 알 쿠스드에 자리잡은 예루살렘 왕국 프랑크족의 계속되는 반간계와 내분으로 극심한 분열을 겪고 있었다. 훗날 이베리아 반도의 알안달루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분열을 곧 융성했던 제국의 멸망을 의미했다. 디마스크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의 패자 누르 앗 딘의 명령을 받은 아이유브 패밀리는 먼 이집트 카이로 원정에 나선다. 숱한 고비를 넘기면서, 어이없는 식탐으로 죽은 삼촌 시르쿠를 대신해서 이집트의 칼리파로부터 와지르에 임명된 살라흐 앗 딘은 비로소 사분오열된 이슬람 세계 통일에 나선다. 이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주군 누르 앗 딘이 디마스크에 건재하고 있어서 주군의 견제와 프랑크족의 압박 그리고 빈번한 반란 때문에 카이로의 살라흐 앗 딘 정권은 풍전등화 같은 신세였다.

 

사방의 적으로 포위된 살라흐 앗 딘은 온갖 환난을 극복하고 시리아와 이집트의 술탄으로 우뚝 서는데 성공했다. 전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위대한 전략가로서도 탁월한 능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성지 알 쿠스드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저항할 신자들은 없었으리라. 카이로를 떠나 원래 자신의 근거지였던 디마스크에서 알 쿠스드를 향한 최후의 지하드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분열되었던 이슬람 세계는 살라흐 앗 딘의 깃발 아래 집결한다. 지하드의 순교자는 알라와의 계산 없이 바로 천국에 간다는 이론 뿐 아니라,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 싸웠다는 자부감 그리고 결정적으로 최후의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과 함께 싸웠다는 전승을 아들과 손자들에게 전해주고 싶다는 욕망도 한 몫 한 게 아니었을까.

 

타리크 알리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여성주의를 의식한 듯, 뛰어난 지성을 겸비한 술타나 자밀라와 그녀의 애인 할리마를 배치하는 세심함도 잊지 않는다. 특히 자밀라는 회의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카디가 알면 노발대발할 이단주의 사상도 마다하지 않고 지적으로 섭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규방의 자밀라와 술탄이 보여주는 뛰어난 정보력은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라고나 할까. 술탄이 참가한 거의 모든 전쟁에 종군한 자밀라의 미친 존재감은 작가의 뛰어난 문학적 성취로 판단된다.

 

사실 알 쿠스드 공략전은 그전에 술탄 부대와 프랑크 기사 간에 벌어진 하틴 전투로 판가름이 났다. 우유부단하다는 평가까지 받는 술탄 살라흐 앗 딘은 신중하게 전장의 모든 변수들을 고려해서, 프랑크 정예 부대를 물을 전혀 구할 수 없는 사막으로 유인해서 결국 궤멸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동안 수많은 신자들을 모욕한 샤티용의 레지날드를 직접 처단하는 과단성을 과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바람대로 알 쿠스드 공략에 성공해서 90년간 이어진 모멸의 시간을 끝장내는데 성공한다. 물론 성도 공략에 집중하고, 티레의 레몽 백작에 대한 아량 베풀기가 훗날 3차 십자군 원정 당시 파도처럼 몰아닥친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와 프랑스의 필립 부대에게 해안도시를 내주는 패착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편, 관대하고 포용력 넘치는 술탄은 심지어 십자군 병사들과의 약속도 꼭 지키고자 하는 중세 기사도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리처드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수차례 술탄과의 약속을 이교도와의 약속이라고 주장하면서 깨뜨리는 파렴치한 장면을 연출한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주인공 이벨린의 발리앙 역시 마찬가지다. 하틴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가 된 그를 술탄은 풀어 주었다. 이벨린은 살아 있는 동안 무기를 들고 술탄에게 대항하지 않겠노라고 서약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사도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었다

 

프랑크족과의 전쟁으로 장장 20년간을 보낸 술탄의 최후를 기록하며 이븐 야쿠브의 연대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슬람 역사상 불세출의 영웅이자 성도 알 쿠스드를 회복한 신자들의 사령관 살라흐 앗 딘의 마지막을 애도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어느 술탄도 살라흐 앗 딘 같은 추모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타리크 알리는 살라흐 앗 딘의 영웅적 모습은 물론이고, 부족한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저술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후기에서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했는데, 나같이 이슬람교에 대해 무지한 독자들이 보기엔 전혀 그런 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전작 <석류나무 그늘 아래>와 달리 아무래도 영웅서사가 중심이고,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할 만한 캐릭터가 등장해서인지 전작의 비극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전개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유대인 이븐 야쿠브는 역사를 기록하는 개인서기로서 술탄의 총애를 얻은 대신, 아내의 부정 그리고 알 쿠스드 함락한 분노한 프랑크 기사들에 의해 비극을 겪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쩌면 무슬림들의 염원이었던 성도 회복을 위한 부수적 피해가 아니었을까.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가 이븐 야큐브의 개인사를 통해 강력한 메시지로 변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타리크 알리의 이슬람 5부작 시리즈가 <석류나무 그늘 아래><술탄 살라딘>으로 끝난 게 너무 아쉽다. 예고된 후속작 <돌기둥 여인>은 물론이고, <팔레르모의 술탄><황금 나비의 밤>은 아무래도 영어책으로 구해서 읽어야 하나 어쩌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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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물방울 2018-11-10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저도 구해둔 석류나무 먼저 읽어봐야겠네요.

레삭매냐 2018-11-10 22:56   좋아요 0 | URL
순서 대로 읽는 것이 좋은 것 같아 역시나 :>

사회운동 평론 그리고 소설까지 못하는 게
없는 양반이네 그래...
 
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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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다시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읽었다. 말미에 나오는 충격적인 사건만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다시 읽어 보니, 처음에 읽었을 때 미처 눈에 띄지 않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이래서 재독을 하게 되는 건가.

 

<칠레의 밤>을 이끌어 가는 화자는 우루티아 라크루아 신부다. 재기 넘치는 젊은 신부는 오푸스 데이 소속의 보수적 성향의 사제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우루티아 신부는 페어웰이라는 문인 출신 외교관을 알게 되어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 우선 칠레가 자랑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네루다 아저씨와도 직접 대면하는 영광도 갖는다. 문학의 불멸성을 숭배하는 우루티아 신부는 이바카체라는 필명으로 문학 비평가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살바도르 레예스 선생이 들려주는, 8년 전만 하더라도 전혀 몰랐던 에른스트 윙거가 등장하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파리 시절의 에피소드는 또 어떤가. 누군가에게 윙거는 악랄한 나치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볼라뇨에게는 지식인이자 작가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바도르 선생은 윙거야말로 유럽 대륙에서 순수한 사람이라고 보증하지 않는가.

 

오스트리아 출신 제화업자가 헬덴베르크 언덕에 제국의 영웅들에게 바치는 기념비적인 묘지와 동상을 만들겠다는 꿈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황제의 호의에 힘입어, 제화업자는 쌩뚱맞게도 자신의 본업과는 전혀 상관 없는 대사업을 시작한 걸까? 결국 제국과 황제가 사라져 버리고, 두 번째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는 쑥대밭이 되지 않았던가. 제화업자의 종말은 충분히 예견가능했고, 왠지 베르너 헤어조크의 영화 <피츠카랄도>가 떠오르는 걸까.

 

어쨌든 우리의 주인공 우루티아 신부가 계속해서 언급하는 늙다리 청년이 도대체 누구지하는 생각과 더불어 오데임 씨와 오이도 씨의 후원 아래 유럽을 주유하는 일정도 등장한다. 인상적이었던 점 중의 하나는 우루티아 신부가 방문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의 성당마다 성당을 부식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된 비둘기들을 소탕하기 위해 투르코, 크세노폰, 타 괼, 로드리고라고 이름 붙인 매들의 활약이었다. 결국 비둘기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창조된 피조물인데 그렇게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게 과연 옳은가에 대한 질문에 나도 공감하는 바이다.

 

다시 칠레로 돌아온 우루티아 신부는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현장과 맞닥뜨리게 된다. 아옌데의 인민연합이 선거에 승리해서 평화적인 방식으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다. 물론 보수 기득권 계층과 군부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사보타주, 미국 CIA의 아옌데 정부 전복 모의 같은 반대파의 저항도 격렬했다며 볼라뇨는 달랑 4페이지로 칠레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었던 혁명의 시간들을 정리해낸다.

    

자 이제 볼라뇨의 소설이 클라이막스로 치달을 시간이 되었다. 자신의 스폰서였던 오데임 씨와 오이도 씨의 제안으로 우루티아 신부는 당시 칠레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던 이들에게 마크르스주의의 기초에 대해 강의를 시작한다. 놀라지 그들은 바로 쿠데타 주범이자 독재자 피노체트와 그 일당이었다. 피노체트는 자신이 칠레의 적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어디까지 가는지 알기 위해 자발적으로 우루티아 신부에게 적절한 보수를 쥐어주면서까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자신의 전임자인 아옌데와 기민당 출신으로 아옌데의 경쟁자였던 프레이, 알레산드리 모두 엉터리 지식인이었다고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모름지기 소설에 비밀은 없는 법. 자신의 멘터라고 생각하는 페어웰 씨에게 진상을 털어 놓자 모든 칠레인들이 우루티아 신부의 일에 대해 알게 된다.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우루티아 신부는 시집도 내고 서평과 평론활동에 매진한다. 그리고 뜬금없이 마리아 카날레스라는 부유한 작가지망생이 등장하는데,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칠레 문단계를 대표하는 살롱의 여주인으로 급부상한다. 그녀의 남편은 미국인 제임스(지미) 톰슨. 그런데 우루티아 신부는 어느날 기묘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한창 흥겨운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길을 잃은 손님 하나가 카날레스 저택의 지하실에서 고문당하고 있던 사람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낭설이라고 치부하고 싶었겠지만, 그것은 진실로 드러난다. 카날레스의 남편 지미 톰슨이 칠레 국가 정보국의 핵심 인사였고, 갖가지 테러 행위에 연루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 나중에 많은 시간이 흐르고, 우루티아 신부는 여전히 작가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카날레스를 찾아가 사건의 진상을 듣게 된다.

 

우리 시대 문학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우리 시대에는 볼라뇨처럼 과거에 있었던 부당한 사건들을 전면에 다루는 작가가 없는 걸까. 모든 작가가 사회참여적인 작품을 발표해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불편부당이야말로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듯 우리가 알고 싶은 것 대신 개인의 일상이나 사유를 한없이 파고드는 이야기들을 언제까지 읽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볼라뇨는 칠레 혁명 이후 멕시코와 스페인을 떠돌면서 진실의 모서리를 철저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공략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시, 소설 같은 글쓰기로 말이다.

 

우루티아 신부로 대변되는 칠레 가톨릭 세력은 쿠데타를 주도한 기득권 세력의 명백한 부역자였다. 아옌데 정부를 지지한 사회주의를 열망하는 대다수 민중의 열망을 저버리고, 헌정질서를 파괴한 피노체트의 편에 섰다. 그런 점에서 우루티아 신부가 유럽 각처의 성당에서 만난 많은 신부들이 매를 부려 비둘기를 사냥하는 장면과 묘하게 겹치지 않는가 말이다. 성당이라는 건축물을 지키기 위해 매를 부린다는 설정은, 가톨릭이 소중하게 여기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피노체트로 대변되는 무력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볼라뇨가 저술한 대로 칠레 전체가 유다의 나무로 변했다는 표현의 상징은 의미심장 그 자체였다.

 

제대로 된 볼라뇨 전작읽기를 시작하기에 <칠레의 밤>만한 작품이 없다고 생각한다. <안트베르펜>처럼 너무 가볍거나 모호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2666>처럼 버겁지도 않은 그야말로 안성맞춤 아닌가. 그나저나 드디어 대망의 조지 손더스의 <바르도의 링컨>이 도착했다. 볼라뇨 전작읽기는 당연히 이후로 미루어질 것이다. 아니 나의 모든 독서가 일단 <바르도의 링컨>을 다 읽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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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1-08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읽어봐야 할까봐요. 근데 저는 로마제국 쇠망사가 눈에 더 잘 들어오네요^^

레삭매냐 2018-11-09 08:59   좋아요 0 | URL
앗 그 책은 저에게도 숙제네요...

오래 전에 민음사 패밀리 세일에 가서
데려온 책인데... 아직까지도 읽을 생각
을 안하고 있다는.

아니 시작은 했던가 핫하

목나무 2018-11-09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벌써 재독을!!!!
제게 인상깊었던 건 살롱 여주인과 그 집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네요.
칠레의 역사에 대해 공부 좀 해야지 하며 읽었던 기억이...

레삭매냐 2018-11-09 12:16   좋아요 0 | URL
볼라뇨 전에 제가 좋아하던 칠레 작가가
루이스 세풀베다여서 그런지 칠레 역사
에 대해 애정이 가더라구요.

아무래도 좀 더 알면 애정이 가는 법인
가 봅니다 :>

어제 산 <술탄 살라딘>을 읽고 있는데
너무너무 재밌네요 ~

목나무 2018-11-09 12:23   좋아요 1 | URL
<술탄 살라딘> 이거 절판이네요. 너무너무 재밌다고 하니 근데 구입은 못하니 저는 우선 레삭매냐님의 리뷰를 기다리는 수밖에는요. ^^

레삭매냐 2018-11-09 12:27   좋아요 0 | URL
어제 비 줄줄 맞으면서 원정 나가서 사온
보람이 있는 책이네요...

타리크 알리 이슬람 5부작 가운데,
국내에 꼴랑 2권 나온 게 전부네요.

나머지 <돌기둥 여인>, <팔레르모의 술탄>
그리고 <황금 나비의 밤>은 영어책으로 사
서 쓰담쓰담해야 하나 어쩌나 고민 중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1 2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재독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을 듯한데. 레삭매냐님 리뷰 읽어보니 전체가 스캐닝 되는게 역쉬!!! 비둘기를 매로 사냥하는 건 저는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는 보편적인 느낌도 받았어요 그 평화를 깨는 매~ㅎ

레삭매냐 2018-12-22 09:23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좋은 책들은 모름지기 다시
읽어야 하는 법인 것 같습니다.

장정일 선생은 매와 비둘기에 대해
가톨릭 신부들과 좌파 진영으로 비유
를 하더군요.

라틴 아메리카 세계에 해악을 끼치는
좌파 세력 일소를 위해 신부들이 나서
야 한다는. 나름 일리가 있는 것 같습
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2 09:55   좋아요 1 | URL
두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번 읽을 가치도 없다는 그런 이야길 들은 듯 합니다 재독할 가치가 있는 책을 읽는게 진정한 독서가 아닌가! ㅎ장정일 작가의 관점과 제가 비슷하네요 므훗!
 
악의 비밀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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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볼라뇨, 내가 자신있게 최애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작가 중의 한 명이다. 오래 전에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으로 그를 알게 된 뒤로 계속해서 볼라뇨를 읽고 있는 중이다. 영화 <나우 유 씨 미>에서 우디 해럴슨이 그의 작품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는 장면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양키들도 볼라뇨를 읽는구나 하고. 아쉽게도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작년 여름에 다시 도전했지만 이번에도 완독에 실패했다. 메가 픽션 <2666>2편까지 읽고 3편까지 들어갔지만 결국 못 다 읽었다. 내년에는 볼라뇨 전작읽기를 선언해야 하나.

 

볼라뇨의 모든 책들이 출간되었다고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다. 이번에 볼라뇨가 죽은 뒤에 그의 작업 컴퓨터에서 나온 파일들을 바탕으로 소설집 <악의 비밀>과 시집 <낭만적인 개들>이 출간됐다. 후자는 아쉽게도 내가 시를 읽지 않아서 선택을 받지 못했다. 아마 훗날 전작읽기를 시작하게 되면, 그 때나 읽게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오늘 내게 도착한 <악의 비밀>은 아무래도 유고작이다 보니 급작스러운 결말, 이게 무슨 이야기지 하는 그런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무언가 이야기가 한참 시작되려다가 그만 두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긴 볼라뇨의 스타일이 원래 그런 게 아니었던가라고 생각한다면 이해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미완의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제대로 된 서사의 구색을 갖추고 있는 <대령의 아들>을 보자. 퀜틴 타란티노가 연상되는 전형적인 비급 영화 내러티브를 따른다. 대령의 아들인 레이놀즈 주니어와 좀비에게 물려 좀비가 된 그의 여자친구 줄리의 종횡무진 스토리가 펼쳐진다. 좀비로 변한 줄리는 연인에게는 식욕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좀비가 등장하는 마당에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서사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가 아닌가. 좀비 서사 자체가 황당함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줄리에게 물려 좀비가 된 건달 일당과의 대결도 비급 정신을 극대화하는데 한몫한다.

 

해변에서는 별의 별 일들이 벌어진다고 했던가. 저승사자를 연상시키는 노인장과 책읽기를 사랑하는 뚱뚱할 할머니가 등장하는 짤막한 이야기도 마음에 든다. 젊은이들이라면 바닷가에서 지긋하게 시간을 보낼 리가 없겠지. 무언가 새롭고 신나는 일을 찾아 떠날 테니. 하지만 어쩌면 곧 사신을 맞을 지도 모르는 노인장들에게 시간의 무화란 어떤 의미에서 동지 같은 것이 아닐까. 두꺼운 책으로 시간과 맞서 싸우는 할머니의 모습에 대한 스케치가 오랫 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기묘하게 보디빌딩을 하는 그야말로 근육질의 오빠가 야릇한 동성애 시츄에이션으로 빠져 드는 이야기는 또 어떤가. 여동생 마르타는 자신이 일하는 미용실 선배 언니와 오빠의 썸씽을 기대해 보지만, 고아가 된 남매의 운명을 그렇게 순탄하게 갈 모양이 아닌가 보다. 어느날 오빠의 친구들이 하숙생을 자처하면서 집에 들이닥치더니만 결국 사단이 나고 만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야만스러운 탐정들>에도 등장했던 볼라뇨의 문학적 분신 아르투로 벨라노의 멕시코 망명에 대한 이야기들도 분절처럼 등장한다. 다시 한 번 라틴아메리카를 하나로 만드는 언어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비록 국가적 정체성은 다르겠지만, 스페인어라는 동질성으로 뭉친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은 공포에서 비롯된다고 반항의 시인 볼라뇨는 지적하지 않았던가. 벨라노와 그의 친구 울리세스 리마라는 문청을 통해 문학권력을 형성한 기존의 문학가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그것도 물론 분더킨트정도 되는 문학적 성과와 실력을 갖춘 볼라뇨나 되니까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나의 최애작가 볼라뇨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중요 인물 보르헤스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자극한다. 그런데 정작 난 보르헤스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노라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책쟁이들에게 고전 텍스트 같은 인물이 바로 보르헤스가 아니었던가. 어쨌든 <7인의 미치광이>의 로베르토 아를트, 아르헨티나 환상문학을 대표하는 <모렐의 발명>의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그리고 로드리고 프레산의 <켄싱턴 공원>의 유혹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일단 당장 구할 수 있는 책들부터 구해야지 싶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책들도 감당 못하는 마당에, 고수가 알려준 비급 앞에 주저하는 내 모습이 참 그렇다.

 

조금 민망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올 여름 작고한 서인도 제도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V.S. 나이폴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성적 취향에 대한 비판도 눈길을 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도대체 뭘 보고 들었는지 나이폴은 페로디니스 장군은 슈퍼마초이고, 아르헨틴나 성적 관습에 대해 혹평일색이었다고 볼라뇨는 쓰고 있다. 딱 반 세기를 살고 지구별을 떠난 볼라뇨에게 시간이 좀 더 주어졌더라면, 그가 구상한 <소돔의 현자들>로 기가 막힌 소설을 하나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를 충족할 만큼 볼라뇨의 유고집이 완성도를 자랑하는 건 아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탈고, 편집과 같이 일반적 형태의 출판과정을 통해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에 내보낸 작품들이 아니지 않은가. 미완의 상태로 있다가 어쩌면 강제로 세상의 빛을 본 작품들이니 말이다. 제임스 설터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대가의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가 좋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세상을 떠난 천재작가의 에피타적인 작품들이라는 점에 나는 깊은 의의를 두고 싶다. 아무래도 볼라뇨 다시읽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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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1-06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라틴문학을 좋아하긴 하지만 볼라뇨는 어렵더라구요. 그런데 다시 읽기 시작이라뇨.ㅋ

레삭매냐 2018-11-06 22:30   좋아요 1 | URL
저도 적잖이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

이 냥반이 원체 잘난 분이시다 보니 다른 이
들도 다들 자기처럼 활자중독자마냥 많은
책들을 읽었다고 - 특히나 우리가 모르는 미지
의 라틴 문학에 대해서는 정말 조예가 깊습
니다... - 생각하고 오만 작가들을 총동원하지요.

그리하야 주석 읽다가 승질이 나서 진도를 못
뺄 때가 많은 것 같더라구요 저의 경우에는.

하나의 도전도 되고, 일단 시니컬한 볼라뇨
스타일이 저는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애정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꼽고 있답니다.

잠자냥 2018-11-07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걸 벌써 읽으셨군요. 저는 이 책 출간 소식이 반가웠으면 미완이라는 점 때문에 선뜻 손이 안 가더라고요. 볼라뇨 작품은 미완이 아닌 것도 미완처럼 느껴지는 작품이 종종 있어서.. 하하하. ^^;;

레삭매냐 2018-11-07 10:52   좋아요 1 | URL
그렇죠 !

그리하여서 출판사에서도 그 점을 강조하더라구요.
원래 볼라뇨가 그런 냥반이 아니더냐 !!!

읽다만 책들이 하도 많아서 다시 읽어야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메가 픽션 <2666>부터 -

목나무 2018-11-07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칠레의 밤> 읽고 반해서 볼랴뇨에 도전해보려 했으나..........
미완의 소설이라 저도 잠자냥님처럼 선듯 손이 안가서 그냥 넘겼는데.. 음....
다시 좋았던 <칠레의 밤>을 재독하는 게 나을까 싶기도 하고.. ㅎㅎ

레삭매냐 2018-11-07 10:54   좋아요 0 | URL
독설 볼라뇨 선생의 무한매력에 빠져
보실 것을 강력하게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짧은 소설은 짧은 소설 대로 또 긴 소설
은(사실 조금 곤욕이었습니다) 긴 소설대로
무척이나 매력적이랍니다.

어젯밤에 제목도 어마무시하게 살발한
<살인 창녀들>을 집어 들었으나 다른 책
보다 잠이 들어 버렸답니다. 늘 그렇듯이.

<칠레의 밤>도 걸작이지효.

카알벨루치 2018-11-07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칠레의 밤>을 강추하시니 저도 장바구니에 일단 담고...근데 보르헤스를 펼치니 글자가 너무너무 맘에 안들어 읽기가 너무너무 힘들겠다는 편견이 나를 뒤덮습니다 ㅜㅜ

레삭매냐 2018-11-07 13:40   좋아요 1 | URL
예전에 열린책들에서 볼라뇨 전집을 내놓을
적에 1빠로 나온 책이 바로 <칠레의 밤>이
었습니다.

오푸스데이, 내장사실주의 그리고 눈이 돌아
갈 정도로 현란하게 등장하는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이름들...

볼라뇨 중독자 명단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
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카알벨루치 2018-11-07 13:42   좋아요 0 | URL
👍👍👍☕️
 
생존의 비용
아룬다티 로이 지음, 최인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드디어 아룬다티 로이의 책을 하나 읽었다. 어제 퇴근길에 뭐 읽을 책이 없나 두리번거리다 예전에 사장한테 책 치우라고 욕먹고 박스에 담아둔 책탑 위로 불쑥 솟은 아룬다티 로이의 <생존의 비용>이 보였다. 일단 얇았고, 부담 없이 보여 나의 선택을 받았다. 바로 펴서 읽기 시작했다. 아 어쩔 수 없는 활자중독자의 삶이여.

 

문동에서 새로 나온 로이 씨의 <작은 것들의 신>은 아직도 읽을 생각을 하지 않고 직장에 내가 마련해둔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다. <생존의 비용>을 읽고 나니 왠지 그 책이 당장에라도 읽고 싶어졌다. 로힌턴 미스트리의 책들도 읽어야 하는데... 내가 언제 그런 독서 스케줄에 연연했던가 그냥 삘이 오면 읽는 거지. 지금이라도 살짝 꺼내서 맛이라도 봐야 하나 어쩌나 고민이다.

 

또 서설이 길어졌다. <생존의 비용>은 소설가 로이 씨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글쓰기로 인도 중부 마디아프라데시를 비롯한 3개 주를 가로 지르는 나르마다 강 유역의 나르마다 사로바르 댐건설 프로젝트의 실상을 비판한 글과 반핵운동가로 발표한 두 개의 글을 담고 있다. 댐건설과 연기폭탄(원자폭탄)의 공통점은 대량살상무기에 준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자 그럼 댐건설부터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1947년 이래, 자그마치 3,300여개 정도의 댐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10억에 달하는 전 인도의 인구(이 글이 쓰여진 게 20년 전이니 인구는 더 늘었을 것이다) 중 40%에 달하는 사람들이 고질적 식량과 식수 부족 그리고 위생문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에게 안정적 식수를 공급하고, 홍수를 막으며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는 차원에서 악질 채무업자에 버금가는 세계은행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차관을 내어 댐건설에 나서자는 게 그동안 인도 정부의 주된 정책이었다. 그런데 댐을 건설하게 되면서 그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어떡하구? 로이 씨는 댐건설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보수적으로 잡아도 5천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한국의 인구만한 사람들이 댐이 만들어지면서 조상 대대로 농사 지어오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상상이 되는가? 대국답게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다.

 

인도 정부의 공언대로 보다 큰 공공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정치적 구호일 따름이다. 그렇게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인도 카스트 계급의 말단을 차지하는 아디바시와 달리트 계급의 사람들은 날품팔이 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어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한 폭력적인 방법으로 주거지 이전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강제 퇴거 조치한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지? 한국에서도 1971년 8월 10일부터 12일까지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알려진 공권력의 폭력적 행사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세계은행의 차관으로 진행되는 댐건설 프로젝트는 수년 전에 우리가 직접 목도한 4대강 프로젝트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공공을 위한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시민들의 세금이 투입되고, 언론과 학계에 포진한 4대강 부역자들은 자연을 임의대로 평가하고 재단해서 일자리와 이러저러한 경제적 효과들이 나올 거라는 숫자로 시민들을 현혹시켰다.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비전문가가 뭘 아냐고 호통으로 대거리를 했었지 아마. 그런데 실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의 수혜자는 일반 시민들이 아니라 굴지의 대형 건설사와 환경평가 혹은 조사를 맡은 컨설턴트 그리고 각종 이권개입자들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력생산을 위해 댐을 만들었는데, 정작 그렇게 만들어진 전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불가촉천민들이었던가? 도시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두둑하게 챙긴 보너스로 고아 같은 고급 휴양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기득권층이었다.

 

반면 당장 굶어 죽게 된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저항에 나섰다. 댐이 건설되면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다는 이들이 나온 것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은 대중조직에 나서고, 수도 델리까지 행진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전 세계에 인도 정부의 만행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다. 이에 언론도 호응해서 일단 정부와 세계은행의 댐건설 합작 프로젝트는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하지만로이 씨에 따르면 파시즘에 가까운 형태의 폭압적인 통치를 일삼는 네루 집안이 좌지우지하는 인도 정부는 시간 끌고 버티기라는 새로운 전술을 도입했다. 그리고 보면 시간 앞에 장사는 없지 않은가. 시간은 모든 걸 파괴한다고 미셸 투르니에가 말했던가. 인도의 공고한 기득권 카르텔의 파상적 공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로이 씨는 연대와 투쟁을 강조한다. 우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나르마다 사람들이 세계화에 맞서 싸우는 장면은 전 세계적으로 진행 중인 국경을 초월한 글로벌리즘에 맞서는 투쟁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로이 씨는 모든 종류의 전사들이 필요하다는 선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영역의 전사들의 기의가 필요한 순간이다.

 

숨 가쁘게 달렸다. 다음은 반핵운동가로 변신한 로이 씨의 글이 이어진다. 그리고 보니 우리도 핵전쟁의 위협 속에 살고 있구나. 평화와 체제보장 그리고 전쟁억지력을 위한 핵보유라니, 20년 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핵무기 경쟁이 벌어지던 시기의 모습을 로이 씨는 절절하게 묘사한다. 그네들도 우리와 같은 모습이었을까? 북한에서 핵실험을 했다는 뉴스보다, 올 가을에는 어떤 색깔의 목도리가 어울릴까를 더 걱정하는 한국 친구들의 무덤덤함에 재한 외국인들이 기겁했다는 뉴스는 이제 새로울 것도 없다. 핵에 맞서기 위해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탈리오 법칙으로는 아무런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걸 보수 정치인들은 진정 모르는 걸까?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핵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그런 발언을 하는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알고 말하는지 의심스럽다.

 

힌두 축제를 자신의 소설에서 비판적으로 다룬 페루말 무루건 아저씨를 위협했던 호전적인 극우 힌두 민족주의자들에게 로이 씨 역시 대단히 불편했던 모양이다. 대단히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던 로이 씨는 연기폭탄과 비아그라를 구분하지 못하고 떠들어대는 언론에 대해서 일침을 가한다. “우리 것이 월등하게 강하고 힘도 세다.” 코카콜라가 서구 문화제국주의의 첨병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그렇다면 핵폭탄은 인도 오래된 전통이냐고 묻는 말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야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인도 지배계급이 만들어낸 핵폭탄은, 결론적으로 인도 시민들에 대한 그들의 배신을 상징한다고 로이 씨는 냉정하게 꼬집는다.

 

아직 로이 씨의 대표작 <작은 것들의 신>을 읽어 보지 않아 그녀의 작품세계가 어떻다고 말하는 건 무리겠지 싶다. 하지만, 사회운동과 반핵운동에 나선 깨어 있는 지식인이자 전사 로이 씨의 거침없는 글쓰기에 그만 반해 버렸다. 소설가지만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글쓰기로 사회참여에 나선 로이 씨에게 박수를 보낸다. 한국에는 왜 이런 작가가 없는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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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06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에 절대공감!
로이의 글들 읽으면서 왜 우리나라에는 이런 작가가없는 건지... 그런 생각 많이 했네요.
<자본주의: 유령이야기> <9월이여, 오라> 두 책도 강추합니다! ^^

레삭매냐 2018-11-06 18:08   좋아요 0 | URL
소설부터 읽으려고 하는데 오늘 하필이면
로베르토 볼라뇨의 유고작이 도착하는
바람에 만사 제쳐 두고 그것부터 읽고 있네요.

게다가 조지 손더스/앨런 홀링허스트 책도
대기 중이라...

11월과 12월에는 추천해 주신 아룬다티 로이
의 책을 읽어야지 싶네요 :>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