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석류나무 그늘 아래
타리크 알리 지음, 정영목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지난 토요일 아민 말루프의 <동방의 항구들>로 독서 모임을 하면서 동지들에게 <석류나무 그늘 아래>를 읽어 보았냐고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아민 말루프가 낯선 레반트로 우리를 인도했다면, 타리크 알리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던 시기의 이베리아 반도를 소설의 무대로 삼았다. 에스파냐는 내가 그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소설로나마 방문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다.
1499년, 레콩키스타라는 이름으로 알안달루스를 정복한 카스티야-아라곤 군주연합의 기독교 전사들은 가르나타(그라나다)에서 불의 벽을 쌓았다. 700년이 넘도록 이베리아 반도의 주인으로 군림했던 무어인들과 평화로운 공존 대신 말살정책을 선택한 톨레도의 대주교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가 획책한 무어인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희대의 분서 사건이었다. 책을 불태운 이들이 사람이라고 태우지 못할까. 토르케마다로 불리는 종교재판관들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불길한 전조였다. 오래 전에 읽은 프롤로그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제 다시 미완의 책을 집어 들었다. 타리크 알리가 저술한 <석류나무 그늘 아래>는 수많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하지만 우리가 꼭 한 번은 읽어야할만한 그런 책이었다.
격변기에 우리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기 마련이다. 수백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서 평화롭게 지낸 무어인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연대 대신 분열을 택한 무어인 지배자들은 국토회복과 이교도 척결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기독교 전사들에게 참패를 당했다. 그들이 그렇게 유일하고 위대한 신이라던 알라는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다. 비참하게 조상의 종교를 버리고 가짜 기독교도로 개종해서 일신의 안위와 땅과 재산 그리고 가족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간단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그렇게 순식간에 바꾸는 게 가능할까? 저자는 책 속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지만 가톨릭 종교재판관들은 결코 개종자들에게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관용을 베풀지 않았을 것이다. 이교도와의 공존은 처음부터 그들의 계획에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알후다일 가문의 조상, 특히 기독교 전사와의 결투로 전설이 된 이븐 파리드의 후손들은 격변기에 적응을 해야했다. 이교도 출신 아스마 부인에게서 난 총명했던 미겔(미칼)은 쿠르투바(코르도바)의 주교로 변신했고, 자라는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보다 계급이 낮다는 이유로 결국 방탕한 삶을 살다가 마리스탄에 갇혀 수십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결국은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맨스에 대한 절절한 사연이 등장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만큼이나 자신들이 정복해서 결국은 자신들의 고향이 된 알후다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들의 비극적 운명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닐까.
알후다일을 이끄는 가장 우마르는 그렇기 때문에 한동안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흔들리기도 한다. 사악한 가톨릭 사제 시스네로스의 마수 앞에 알후다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내 주바이다와 자유로운 가풍을 대대로 이어가고 싶었으나 시대는 그들에게 알라가 약속한 지상의 복락을 허용하지 않았다. 가문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등장하는 동안, 가톨릭 세계의 무어인들에 대한 압박은 점증한다. 이것을 자기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 혈기 넘치는 이븐 파리드의 증손자이자 알후다일의 장남 주하이르 알팔(종마)은 23세의 젊은 청년답게 분기탱천해서 일곱 번째 천국으로 갈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젊은이들이 조직한 가르나타에서 봉기가 시스네로스가 무어인들을 탄압하기 위한 결정적 계기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가 과연 알고 있었을까?
언제라도 위기가 촉발될 지 모를 상황에서도 사랑의 꽃은 피어난다. 우마르와 주바이다의 자랑거리 딸 힌드는 아랍 여성의 그것과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교리 논쟁에서는 어쩌면 신성모독일 지도 모를 그런 주장을 펼치기도 하고, 사촌 미겔의 아들 후안과 결혼을 시켜 후일을 도모하자는 가족의 결정에도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결국 과거를 가지고 있는 알카히라(카이로) 출신 지식인 이븐 다우드와 결혼하게 된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결혼식을 치르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모로코의 페즈에 신접살림을 차리게 되는데, 우마르의 또다른 아들 야지드를 데리고 가지 않은 게 천추의 한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레콩키스타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저항할 수 없었던 알후다일로 대변되는 이베리아 반도의 아랍세력은 곧 안알달루스 이슬람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처지였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카스티야발 가톨릭 세력 앞에 무어인과 유대인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 이단 세력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신세였을 것이다. 그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기존의 질서와 관습 그리고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도 개종해서 투항하는 방법이 있었다. 훗날 역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가톨릭 사제들은 가짜로 개종한 무어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가혹한 종교재판으로 그들의 정신을 말살하는 게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나타에서 벌어진 불의 벽 사건이 주는 교훈은 명백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무어인들의 출발지였던 마그레브로 돌아가야 했다.
다른 선택은 수백 년간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운 조상들의 뒤를 이어 저항에 나서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럴 만한 동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가르나타의 술탄은 평화로운 공존을 약속한 이사벨에게 속아 아무런 저항 없이 가르나타를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았던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터키 술탄의 지원 아래, 지하드를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주하이르 알팔은 혈기 넘치는 친구들의 지원 아래 실제로 증조부의 칼을 들고 저항운동에 나섰다. 문제는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의 지원 받기에 알안달루스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술탄의 다음 목적지는 너무 먼 알안달루스가 아니라 비엔나였다.
가르나타에서 주하이르와 친구들이 벌인 봉기는 그들에게 일시적 민족적 자긍심의 부활을 가져다 주었을 지는 몰라도, 후과는 비극적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구체제의 기사도 정신을 놓지 못하고 카스티야 진압군을 대표하는 돈 알론소와 결투에서 승리한 주하이르 알팔에 대한 보복으로 소년장수 코르테스(저자 타리크 알리의 변용이라고 역자는 해석한다)는 알후다일을 습격해서 일족을 몰살시킨다. 평화로운 공존을 잠시나마 꿈꾼 무어인들에게 코르테스는 혹독한 교훈을 안겨 주었다. 가르나타 사령관 돈 이니고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시스네로스 주교에게 이교도들은 공존이 아닌 말살의 대상일 따름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기억의 완전한 추방은 현재진행형이다. 역사는 희비극으로 반복된다고 했던가. 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나크바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나와는 다른 생각과 종교를 가진 타인에 대한 적대적 종족절멸정책은 유서 깊은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우마르 시대에만 하더라도 알후다일의 번영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도시라는 형태의 정치권력이 부상하고, 카스티야 세력이 내분으로 분열된 알안달루스 무슬림 세력들을 각개격파하면서 시작된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난세에 주하이르, 쿨숨, 힌드 그리고 야지드로 대변되는 우마르와 주바이다 자식들의 운명이 각각 상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성에 앞선 감정적 선택은 일족에게 장례식 화환이었다. 어쩌면 주하이르가 도모한다는 미래도 바꿀 수 없는 과거의 반복일지도 모르겠다. 결말에 등장하는 코르테스가 지휘하는 카스티야 군대의 압도적 병력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우마르들의 모습은 정말 장렬하고 처연했다.
지난 이틀 동안 나를 16세기 초 미지의 세계 알안달루스로 인도했던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를 리뷰를 쓰면서 다시 생각해 본다. 제목에 등장하는 ‘석류나무 그늘’은 평화와 자유 그리고 풍족함이 넘치던 시절의 알후다일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다. 분열과 분노 그리고 증오의 정치가 조장되는 오늘날, 저자 타리크 알리가 구상한 우리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문학적 이상향에 대한 대서사시는 언어나 문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비극이었다. 올해 내가 만난 최고의 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다만 절판되어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게 흠일 따름이다.
[뱀다리] 오늘 아침부터 읽기 시작한 알제리 출신 작가 아시아 제바르의 <사랑, 판타지아>에서는 마그레브 지역에 살았던 무어인의 고난이 등장한다. 이베리아 반도 카스티야인의 역할을 이번에는 제국주의 프랑스 군대가 맡았다는 게 다를 뿐, 서구인들의 시선에서 본 ‘바르바리안’에 대한 핍박과 차별의 역사는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