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흑인과 훈장 창비세계문학 33
페르디낭 오요노 지음, 심재중 옮김 / 창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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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에 우리동네 책잔치에서 <창작과 비평> 정기구독을 하면 책을 두 권 준다고 해서 데려온 책 중의 하나가 바로 페르디낭 오요노의 <늙은 흑인과 훈장>이었다. 참고로 다른 하나인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은 재작년에 읽었다. 우리 독서 모임 동지인 대장물방울이가 지난 주말에 읽었다는 인스타 포스팅을 보고는 나도 분발해서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내 느낌은 비참함이었다. 카메룬 출신 지식인 페르디낭 오요노는 1956년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 신분으로 이 소설을 발표했다. 그러니까 4년 뒤, 카메룬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전의 일이었다. 여전히 카메룬의 프랑스 식민 지배하에 있었다. 우리의 주인공 메카 로랑 씨는 착실한 기독 교도로 개종하여 자신의 땅도 모두 가톨릭 사제단에 기증하고, 아내 켈라라 사이에서 난 보석 같은 두 아들도 유럽에서 벌어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이에 프랑스 식민정부에서는 메카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훈장을 수여할 예정이라고 사령관의 특별 호출로 그에게 알린다. 음베마족 출신의 늙은 영주는 프랑스어라고 하고 “예” 한 마디에 할 줄 모른다. 우선 식민통치자들과 소통을 위한 언어부터 장벽에 갇힌 셈이다.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훈장이 수여된 적이 없던 모양이다. 메카 뿐 아니라 일족 모두에게 훈장 수여는 영광이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식민지 우두머리 고등판무관에게 훈장을 받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는 게 문제의 시발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재즈 스타일의 서구식 복장과 구두까지 장만해서 훈장수여식에 참가한 메카는 그야말로 땡볕 아래 머리통이 익는 그런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훈장을 받을 때까지 둘러쳐진 원 안에서 절대 움직이지 말고 있어야 한단다. 더위, 짜증 그리고 당장이라도 쌀 것 같은 요의가 그를 괴롭힌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상황이야말로 식민지 카메룬을 옥죄는 제국주의 프랑스의 실체가 아니었을까. 언제 카메룬의 음베마족들이 제국주의자들에게 화려한 건물과 도로 그리고 철도를 깔아 달라고 부탁했던가? 그리고 그렇게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해서 지어진 관청이나 백색 건물들을 흑인들에게 공여한 적이 있었던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질 좋은 카카오를 수탈해서 초콜릿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지, 노동집약적 생산품인 카카오 재배나 수확, 건조를 담당하는 이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흑인들이 부자가 되는 걸 방해하고, 같은 백인인 그리스인들에게 이권을 주고 메카가 받게 되는 성 크리스토프 메달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나폴레옹이 개발한 희대의 상품 레지옹도뇌르 훈장은 깍쟁이 그리스인 피피냐키스에게 돌아가지 않았던가.

 

결정적으로 자신의 매제 엥감바가 가져온 염소를 잡아 잔치를 벌일 테니, 고등판무관도 참가해 달라는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피피냐키스의 유럽식 파티에 백인 우두머리가 참가했을 때 프랑스 식민주의자들과 흑인 음베마족의 공존은 물건너 갔다. 식민 지배자들이 보이는 위선의 극치라고 해야 할까. 축하연이 열린 양철로 만들어진 아프리카의 집에서 독주에 취해 널브러졌다가 잠이 깬 메카가 아수라장 가운데 훈장을 잃어 버리는 장면도 주목할 만하다. 그가 그렇게 애지중지한 메달이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게 곧 이어진 비극의 전주곡처럼 다가온다.

 

한밤중에 원주민 구역이 아닌(분리정책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백인 거주지역에서 얼씬거리다가 무쇠 같은 손을 가진 원주민 위병에게 사로 잡혀 그야말로 봉변을 당한다. 자신이 착실한 기독교인이며, 백인 선교단에 땅을 기증하고, 두 아들이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해서 위대한 프랑스 혁명기념일(7월 14일!)에 성 크리스토프 메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위병들은 전혀 믿으려 들지 않았다. 또 어떻게 보면, 지금은 더 가속화되었지만 농경사회 시대 노인들의 지혜는 더 이상 젊은 세대에게 아무런 참고사항이 되지 않는다는 걸 절절하게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모욕과 매타작이나 더 당하지 않는 게 메카로서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백인 경찰서장 ‘새 모가지’ 바리니 씨가 그의 신원을 보증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돌풍의 잔해가 널린 음베마족의 거주지가 보였다. 그것은 마치 프랑스 식민지배가 끝나고 마침내 독립을 찾았더니, 무질서와 혼란이 지배하는 탈식민주의 국가들의 불길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혹한 식민지 수탈로부터 탈출했더니, 폭력적 내전과 독재 같은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력으로 그런 혼란으로부터 국가와 내 삶을 재건해야 하는 임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독립 이전에 페르디낭 오요노 같은 지식인을 비롯한 카메룬 사람들은 과연 알고 있었을까? 이런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었다면, 분명히 그래도 예전에 프랑스가 지배하던 시절이 좋았지라고 말하는 이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경제위기를 부추기는 보수언론 플레이에 놀아나는 것처럼 말이다.

 

결말에 도달해서 메카가 자신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 노예가 되는 길이었다는 고백하는 장면을 살펴 보자. 종교 역시 소설 <늙은 흑인과 훈장>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작동한다. 현재 2천 4백만 인구 중의 45% 가량이 가톨릭/개신교도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프랑스와 독일의 식민 지배 때문일 것이다. 메카의 아버지는 자기 부족의 땅을 지키기 위해 백인들과 투쟁한 전사였다. 그런데 그 아들은 아버지가 피땀으로 지킨 땅을 백인 선교단에게 기부했다. 백인들은 음베마족의 친구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친구가 될 생각이 그야말로 1도 없었다.

 

위선의 태양 같은 방데르메이에르 신부는 프랑스 사업가들의 이윤을 돕기 위해 원주민들의 아끼르 술 대신 포도주나 리큐어를 마시라고 대놓고 미사 시간에 떠들지 않았던가. 원주민들에게 영혼의 안식이 되는 술과 성적 타락을 상징하는 매춘을 종교적 차원에서 비난하지만, 정작 인류에게 무지막지한 재앙이었던 연기폭탄(원자폭탄)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던가? 그런 이율배반적인 태도야말로 메카로 대변되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 위기를 겪게 되었을 때 다시 조상전래의 관습으로 돌아가는 만든 원동력이었다. 메카의 불행 앞에 아내 켈라라를 비롯한 음베마족의 여인들이 땅을 뒹굴며 통곡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진을 빼자 강가의 악어떼처럼 기진했다는 저자의 서술을 보라. 그야말로 현장 리포트처럼 느껴지지 않던가.

 

알제리 정복사를 다룬 아시아 제바르의 <사랑, 판타지아>를 읽던 중에 만난 책이라 그런지 탈식민주의에 대한 공통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시아 제바르의 책이 로맨스와 역사의 교차라고 한다면, 페르디낭 오요노의 스타일은 좀 더 직접적이면서 블랙코미디 방식의 역설을 전방위적으로 구사한다. 식민지 출신 소르본 대학 출신의 27세 청년이 이런 작품을 발표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오요노 선생의 다른 작품의 출간은 아무래도 기대하지 힘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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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괴수 무벰베를 찾아라 - 와세다 대학 탐험부 특명 프로젝트
다카노 히데유키 지음, 강병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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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년 만에 다카노 히데유키의 <환상의 괴수 무벰베를 찾아서>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일본 인문학의 위력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동양에서 가장 먼저 서구 문물을 받아 들여 개화에 나선 일본은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이 나서서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앞장섰다. 탈아입구라는 당대의 구호는 훗날 제국주의 침략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 역시 일본 인문학의 세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낭만주의 같은 어휘만 하더라도 전적으로 일본에서 번역된 말이 아니던가.

 

다카노 히데유키의 콩고 드래곤 프로젝트(CDP)의 모험을 다룬 <환상의 괴수 무벰베를 찾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 또 삼천포로 빠졌다. 와세다 대학 탐험 동아리 멤버들은 콩고 텔레호에 출몰한다는 모켈레 무벰베라는 괴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11인조 대원들이 팀을 꾸려 머나먼 콩고로 출발한다. 그런데 이 모험이 무려 30년 전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한다. 가기 전에 비디오 카메라 같은 괴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면 촬영할 각종 기자재들을 일본 굴지의 기업들로부터 협찬 받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윤창출에 혈안이 된 기업들이 콩고에 가서 이름도 해괴한 모켈레 무벰베라는 괴수를 찾는 프로젝트에 소중한 자산을 기증한다고? 갑질과 부동산 투자로 불로소득이 일상화된 2018년 대한민국에서는 씨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다. 그런 무모한 계획을 세운 일단의 이십대 청년들의 패기도 그렇지만, 그런 청년들의 모험을 후원한 기업들의 미래에 대한 투자가 나에게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두 개 팀으로 나뉘어 파리와 나이로비를 거쳐 콩고의 이웃 자이르의 킨샤사에 집결한 탐험 대원들은 콩고의 수도 브라자빌에서 정부 관리들을 상대로 장기 체류와 탐험 허가를 받는데 수일을 소요한다. 사회주의 독재국가의 관료 시스템에 대한 다카노 히데유키의 냉철한 분석이 돋보이는 서술이 이어진다. 젊은 나이에 콩고를 대표하는 학자가 된 아냐냐 박사(이후 닥터로 통칭한다)와 삼림청 직원에게 일당을 지급한다는 조건으로 마침내 허가를 받는데 성공한 일행은 임폰도와 에페나 그리고 텔레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알려진 보아에 도착한다. 수상쩍은 일본인 탐험대로부터 돈을 뜯기 위한 프로젝트에는 정부 관리 뿐, 아니라 보아 마을의 사람들도 가담한다. 우여곡절 끝에 모켈레 무벰베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텔레 호수에 도착한 탐험대. 고난과 역경 그리고 사기로 점철된 여정을 뒤로 하고, 감격에 젖기도 전에 바로 24시간 감시 체제를 돌리기 시작한다.

 

텔레 호수를 찾은 와세다 대학 CDP팀의 실패는 사실 처음부터 예고된 실패였다. 우선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에베레스트에 도전하는 산악가들이 현지인 셰르파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처럼, CDP팀 역시 현지 보아 마을 출신 가이드와 포터들에게 의존해야만 했다. 수달, 침팬지 그리고 고릴라까지 잡아먹는 투혼을 보여준다. 열대 지방에 적응되지 않은 대원들에게 말라리아는 치명적이었다. 어느 대원은 탐험 기간 내내 말라리아에 걸려 누워 있기도 하지 않았던가. 가네코 씨는 텔레 호수에서 철수한 뒤, 케냐에서 말라리아 때문에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결국 경험을 통해 리더 다카노가 깨닫게 된 것이지만, 모켈레 무벰베 혹은 디조노라 불리는 미확인 괴수의 실체는 인근 부족의 전승 혹은 신화에 기인한 게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인근 피그미족이 모켈레 무벰베의 고기를 먹고 모두 전멸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전승 속에 현대인들로서는 알 수 없는 비밀이 숨어 있던 건 아니었을까.

 

사실 40일간의 정글생활을 하는 동안 CDP 대원들을 가장 괴롭혔던 건, 고질적인 식량부족이나 치명적인 말라리아가 아니라 모켈레 무벰베를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과 24시간 괴수를 추적해야 하는 무려와 권태였다. 전자의 경우야 처음부터 예고된 사실이었지만 후자는 정글 라이프에 적응하지 못한 현대인들의 실존적 문제가 아니었을까.

 

, 다음은 다카노 씨의 콩고 탐험기가 품은 비유와 상징에 대해 생각해 보자. CDP는 확실히 처음부터 황당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단의 와세다 대학 출신 청년들은 그런 황당한 계획이 세워지자 기대 이상의 촘촘하면서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했고, 실천에 옮겼다. 1980년대는 태평양전쟁 패전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일어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룬 국가 일본이 승전국 미국과 소위 경제전쟁의 방식으로 맞짱을 뜬 시대였다. 플라자 합의로 장기간의 불황의 서막이 막 시작되려던 순간이긴 했지만, 우리 민족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정신적 자신감이 일단의 청년들로 하여금 콩고 탐험에 나서게 된 든든한 뒷배경이 아닐까 싶다. 일단 국가 차원의 어젠다가 세워지면 거의 맹목적으로 벌떼처럼 달려들어 이룩해낸 일본의 저력이 엿보였다. 하지만 고도 경제성장 이후, 국가가 지향하는 방향성을 상실하고 오늘날까지 표류하고 있지 않은가. 다카노 일행이 확인하려고 했던 모켈레 무벰베처럼 말이다.

 

그런 복잡한 셈법을 차치하고서라도, 다카노 히데유키의 모켈레 무벰베 탐험기는 충분히 유쾌했다. 젊은 날에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찾아 그런 황당무계해 보이는 탐험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아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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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1-04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 디자인과 제목을 보고서는 아이들 책인줄 알았어요. 근데 레삭매냐님 글을 읽고 나니까 어쩐지 숙연.......

레삭매냐 2018-11-04 21:15   좋아요 1 | URL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꿈이 조물주 위의
(강남) 건물주라는 말에 할 말이 없더군요.

꿈이 거세되고, 순치되어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삼는 세태에 다카노 씨는 무슨 말
을 해줄 지 궁금하네요.

2년 전에 한국에 와서 강연을 했다고 하는
데 그 때 뵈러 갔었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책물고기 묘보설림 4
왕웨이롄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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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링허우 세대의 작가 왕웨이롄 작가의 <책물고기>에 첫 번째로 등장한 단편을 읽는 도중에 소금호수에서 죽은 자오형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중에 우유니 소금사막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나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를 읽거나 보면 연상되는 건 국경을 초월한 그 무엇이 아닐까 싶었다.

 

표제작 <책물고기>[書魚]에서는 그놈의 휴대폰 때문에 점점 더 책을 멀리 하게 되고 있는 현 세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현대소설의 시작이라는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고, <변신>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 책물고기, 다른 말로는 책벌레 혹은 응성충이라는 내가 전에 접해 보지 못했던 낱말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다.

 

지난여름 폭염 속에 비가 내렸을 때, 책등이 운 것을 보고 속상해 했던가. 그렇다고 해서 그 많은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거풍을 시킬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그냥 그런 감성을 희귀한 증상이자 벌레인 응성충을 만난 작중 나레이터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하는 단상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소설집 <책물고기>에서 나를 강력하게 사로 잡은 이야기들은 3번의 <아버지의 복수>와 4번의 <걸림돌>이다. <아버지의 복수>는 낙하산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주인공 유웨이의 아버지의 내력에 관한 이야기다. 북방 출신으로 광저우 토박이가 되길 원하는 화자의 아버지는 조국에서 만든 페이타 샴푸를 광저우 웨슈구를 누비며 가족을 부양했다. 광저우 사람들은 아버지처럼 북방에서 온 사람들을 “베이라오”라는 경멸적인 말로 불렀다. 갖은 노력을 해도 세일즈맨인 아버지는 광저우 토박이들의 어휘와 사투리를 익힐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 역시 위기에 처한 인물의 정체성 위기에 관한 이야기일까. 가족을 위해,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는 아버지들의 신산한 삶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읽을 수가 있었다.

 

결국 자신보다 더 싼 몸값의 베이라오들에게 자리에서 밀려난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로 전업을 하면서 비로소 광저우 사람보다 더 광저우 사람같은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세일즈맨이라는 직업이 자신의 말만 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라는 화자의 냉철한 분석이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만나게 된 고객들과 쌍방 소통에 나서게 되면서 아버지는 비로소 광저우 사람이 된 것이다! 유웨이는 아버지가 집착하는 그런 광저우가 싫어서 부러 멀리 베이징으로 대학진학을 하고, 직장도 베이징에서 얻게 된다. 휴가를 얻어 집에 돌아오니 쇠락한 옛집을 허물고 재개발에 나선다는 방침에 저항하는 열혈전사가 탄생한 장면을 아들은 목도한다. 그리고 그 전사를 바로 유웨이의 베이라오 출신 아버지였다. 붉은 천에 일필휘지로 쓴 시를 몸에 두르고, 집을 부수기 위해 돌진해 오는 불도저에 맞선 아버지는 자신이야말로 그 어떤 광저우 사람보다 더 광저우를 사랑했노라는 말로 자신의 광저우 사랑을 증명해 보인다.

 

<걸림돌>도 <아버지의 복수>에 이은 수작이다. 한 때 작가를 꿈꾸었지만 작가 대신 편집자가 되어 선전과 광저우를 오가는 주인공 리샤오콴이 기차를 타서 앉을 자리를 찾던 중에 만난 75세의 쑤뤄산 할머니왕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비범한 이야기가 탄생할 거란 걸 직감했다. 샤오콴도 자신의 가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지만, 쑤 할머니의 그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외국인이지만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쑤 할머니는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이었다. 어때 이 정도의 비범한 만남이라면, 속꺼풀 속에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가 숨어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기본이 아닐까.

 

마치 탁구공을 치열하게 주고받듯이 쑤 할머니와 샤오콴 사이에서 자신들의 속 깊은 이야기가 오고간다. 비록 짧은 기차여행이지만, 여행이라는 일탈으로부터의 해방이 주는 릴랙스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한 마음으로 이어주었던 게 아닐까. 1938년 수정의 밤과 최종해결책이 횡행하던 시절로부터 7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걸림돌”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황동판을 들고 선전을 향하는 쑤 할머니의 모습은 마치 구도자의 그것처럼 다가왔다. 샤오콴이 던진 아우슈비츠가 “죽음의 본질”까지 바꾸지 않았느냐는 대사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기차가 선전역에 도착해서 바퀴의 느림이 느려지는 순간이 영원해지길 기원하는 왕웨이롄의 그 마음에 절절하게 와 닿는 것 같다. 불야성 홍콩을 바라고 목숨을 건 탈출을 하던 샤오콴의 조부모들의 모습은 지중해 바다를 건너는 시리아 난민들의 그것과 겹쳐 보인다.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또 한편으로는 이해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

 

마지막 이야기 <베이징에서의 하룻밤>은 남방의 대학시절 만나 첫사랑을 공유한 중년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거대한 수도에서 유능한 의사로 성공한 의대생과 역시 소설가로 활동 중인 문청이었던 청춘들의 회고담. 어떻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이야기지만 이야기꾼 왕웨이롄은 기존 중국 문혁시절의 작가들과는 다른 톤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철저하게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일체의 정치색을 배제한 인류 공통의 감정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에 대해 서투르고,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철부지 시절의 추억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치 화인처럼 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어쩔 수 없이 어긋나는 관계는 이별로 이어졌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하게 단절되지 않고 연락이 이어졌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건 아마 남자 주인공 자화의 루제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연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이제는 중년이 된 자화의 고백들...

 

두 번째로 만나게 된 묘보설림 시리즈는 이번에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다양한 장르의 서사물 홍수의 시대에, 어떻게 보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숭앙하는 바링허우 세대 작가의 고전적 작법을 구사하는 왕웨이롄 작가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올드스쿨 스타일의 독자다 보니 이런 우직한 승부가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닐까. 작가의 말처럼 불행과 희망의 교차점에서 글쓰기의 영광이 도래하는 호시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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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02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묘보설림 시리즈란 게 있었단 말이죠!
중국소설은 손이 잘 안가던데 이 소설은 우선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8-11-02 21:40   좋아요 0 | URL
글항아리에서 인문서적만 내는 줄
알았는데, 소설도 내더군요.

묘보설림이라고 고양이 걸음으로 소설
의 숲을 걷는다라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시리즈랍니다.

왕웨이롄 작가의 책은 흥미로웠습니다.
 


지나고 나서 결산해 보니, 아니 10월에도 엄청 달렸구나. 나름 슬럼프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 같진 않네. 슬럼프는 개뿔.

 

기대를 많이 하고 시작한 톰 미첼의 펭귄 이야기는 기대보다 못해서 좀 실망했다. 비를 다 줄줄 맞으며 도서관에 가서 빌려다 읽었는데... 아쉬웠다. 간만에 인스타를 통해 재밌겠다 싶었는데 실제로는 기대와 달라서 실망. 그래도 펭귄 녀석을 자연에 돌려보내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자연을 누비다 만난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질질 끌던 귄터 발라프의 <버려진 노동>도 다 읽었다. 요즘 하인리히 뵐의 소설들을 읽고 있는데 의외로 이 두 사람이 친구지간이었다고 하니 놀랍다. 그나저나 제발트의 마지막 책에 대한 리뷰는 언제 쓰나 그래. 아무래도 다시 읽어야지 싶다. 그래야 생생한 리뷰를 쓰지.

 

꽤 오랫동안 읽고 싶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브루투스의 심장>도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확실히 재밌긴 하더라. 얼마나 사람들이 빌려다 읽었는지 거의 헤어져 있었다. 게이고 작가의 문학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재미 하나는 인정해야지 싶다.

 

연초에 읽다가 내팽개쳐 두던 리처드 플래니건의 <굴드의 물고기 책>도 다시 읽었다. 제법 읽었는데 왜 도중에 그만 두었을까. 하긴 생각해 보니 <먼 북>도 다시 읽어서 절반 정도 읽었는데 지금 멈춰져 있는 상태긴 하지. 내친 김에 달려 주어야 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어제 열린책들에서 나온 <블랙 어스>를 읽다가 이거 아무래도 내 스타일이 아니네 싶어서 접었다. 어지간해서는 이런 일이 없는데 내 스타일도 아니고, 꾸역꾸역 읽을 자신이 없어서 포기선언을 했다. 오늘 반납해야지.

 

대신 도서관에서 재개정판으로 나온 장자크 상페의 만화들을 읽었다. 두 권 빌려서 바로 다 읽었다. 리뷰도 날림으로 파바박 작성했다.

 

마지막 주말에는 아민 말루프의 <동방의 항구들>로 독서모임을 가졌다. 내 삶의 유일한 낙이로다. 내친 김에 나의 서가에서 수년째 고이 모셔 두었던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를 집어 들었다. 결론은 지난 달에 읽은 책에 최고의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절판되어 아쉬울 따름이다. 타리크 알리의 <술탄 살라딘>도 구매한 기록이 있는데 책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천상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어야지 싶다. 읽어 보고 싶은데.

 

오늘 왕웨이롄의 <책물고기>가 도착했다. 단박에 50쪽을 읽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새 소설집도 나왔는데, 당장 질러야지. 이달에 내가 읽을 책은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 그리고 문동에서 나올 조지 손더스의 <바르도의 링컨> 이렇게 두 권이다. 물론 이런 저런 책들을 읽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두 책만 읽어도 이달에는 만족할 것 같은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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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길 2018-11-01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 결산... 멋지네요. ㅎ

레삭매냐 2018-11-01 16:47   좋아요 0 | URL
마구잡이 독서의 결과인 걸요, 감사합니다.

목나무 2018-11-01 1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초에 <먼 북으로 가는 길> 중간쯤 읽다가 사정상 쉬게 되었는데 다시 처음부터 읽으려니 엄두가 안납니다. ㅎㅎㅎ;;;
그나저나 10월도 무지 달리셨네요! 레삭매냠의 독서 결산 볼 때마다 저는 점점 작아집니다. ㅋㅋ

레삭매냐 2018-11-01 16:50   좋아요 1 | URL
저도 읽다 말고 다시 시작해서 절반 정도
읽었는데, 다른 책들 때문에 완독을 못했네요.

불끈, 힘내서 마저 읽어 보려구요 !!!

무신 말쌈을 ~
방향성 없는 독서인의 ‘닥치는 대로 읽자‘인 걸요.

카알벨루치 2018-11-01 19:23   좋아요 2 | URL
<먼 북...>은 먼distant 북book이어서 그럴수도...ㅋㅋㅋㅋㅋㅋㅋ전 그거 리뷰대회 참가할거라고 샀다가 뚜껑도 안 열었네요

목나무 2018-11-01 21:48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님! 재치 만점! ㅋㅋㅋ
혹시 몇 년 후에 다시 리뷰대회 할지도 모르니 <먼 북>은 그때에 시도하는 걸로..ㅎㅎ

대장물방울 2018-11-01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큭 도대체 어떻게 28권을 읽을 수 있는 겁니까 심지어 얇은 게 별로 없어

레삭매냐 2018-11-01 16:52   좋아요 0 | URL
뭔 소린겨,,, 만화가 네 개나 있는 걸 -
ㅋㅋㅋ

그나저나 아시아 제바르 책은 재밌나?

난 오늘 아침부터 <사랑, 판타지아> 읽기
시작했는데 흥미롭더구만 기래.

대장물방울 2018-11-01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재밌게 읽었어요. 알제리 역사가 배경인데 프랑스 식민지 이후 독립 전쟁, 내전까지 두루 다루고 있어서 역사적 배경 지식이 있으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겠더라구요

대장물방울 2018-11-01 20:34   좋아요 1 | URL
ㅋㅋ 그리고 저도 사랑, 판타지아 읽으려고 사왔어요. 석류나무도 구함 크하핫

레삭매냐 2018-11-02 10:21   좋아요 0 | URL
아마 합정에 가서 업어온 모양이군 흠...

알제리 독립전쟁에 이러저러한 책들이 제법
있더라구. 문지에서 나온 프랑스 작가의 책
도 사긴 했는데 완독 못했지.

어제 그놈의 <책물고기>가 도착하는 바람에
<사랑, 판타지아>가 뒤로 밀렸네. 일단 이
책부터 읽고 나서 아시아 제바르는 낭중에.

뒷북소녀 2018-11-02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게 뭐예욧? 이게... 세상에... 심지어 가을인데... 이렇게 많이 읽으셨다니.
저는 겨우 6권 읽었는데... 대단하세요.레삭매냐님. 존경합니다.

레삭매냐 2018-11-03 22:14   좋아요 0 | URL
헤헷 꾸역꾸역 읽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

11월에는 릴랙스하게 가는 것으로.

페크pek0501 2018-11-03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 결산... 저도 많이 읽은 해에 해 보고 싶네요. 월이 아니라 1년으로... ㅋ

레삭매냐 2018-11-03 22:15   좋아요 0 | URL
강박적 독서의 산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자중독자처럼 읽어댔나 봅니다. 이달
에는 좀 쉬엄쉬엄 읽어 보겠습니다.
 
석류나무 그늘 아래
타리크 알리 지음, 정영목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지난 토요일 아민 말루프의 <동방의 항구들>로 독서 모임을 하면서 동지들에게 <석류나무 그늘 아래>를 읽어 보았냐고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아민 말루프가 낯선 레반트로 우리를 인도했다면, 타리크 알리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던 시기의 이베리아 반도를 소설의 무대로 삼았다. 에스파냐는 내가 그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소설로나마 방문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다.

 

1499년, 레콩키스타라는 이름으로 알안달루스를 정복한 카스티야-아라곤 군주연합의 기독교 전사들은 가르나타(그라나다)에서 불의 벽을 쌓았다. 700년이 넘도록 이베리아 반도의 주인으로 군림했던 무어인들과 평화로운 공존 대신 말살정책을 선택한 톨레도의 대주교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가 획책한 무어인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희대의 분서 사건이었다. 책을 불태운 이들이 사람이라고 태우지 못할까. 토르케마다로 불리는 종교재판관들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불길한 전조였다. 오래 전에 읽은 프롤로그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제 다시 미완의 책을 집어 들었다. 타리크 알리가 저술한 <석류나무 그늘 아래>는 수많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하지만 우리가 꼭 한 번은 읽어야할만한 그런 책이었다.

 

격변기에 우리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기 마련이다. 수백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서 평화롭게 지낸 무어인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연대 대신 분열을 택한 무어인 지배자들은 국토회복과 이교도 척결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기독교 전사들에게 참패를 당했다. 그들이 그렇게 유일하고 위대한 신이라던 알라는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다. 비참하게 조상의 종교를 버리고 가짜 기독교도로 개종해서 일신의 안위와 땅과 재산 그리고 가족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간단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그렇게 순식간에 바꾸는 게 가능할까? 저자는 책 속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지만 가톨릭 종교재판관들은 결코 개종자들에게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관용을 베풀지 않았을 것이다. 이교도와의 공존은 처음부터 그들의 계획에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알후다일 가문의 조상, 특히 기독교 전사와의 결투로 전설이 된 이븐 파리드의 후손들은 격변기에 적응을 해야했다. 이교도 출신 아스마 부인에게서 난 총명했던 미겔(미칼)은 쿠르투바(코르도바)의 주교로 변신했고, 자라는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보다 계급이 낮다는 이유로 결국 방탕한 삶을 살다가 마리스탄에 갇혀 수십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결국은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맨스에 대한 절절한 사연이 등장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만큼이나 자신들이 정복해서 결국은 자신들의 고향이 된 알후다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들의 비극적 운명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닐까.

 

알후다일을 이끄는 가장 우마르는 그렇기 때문에 한동안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흔들리기도 한다. 사악한 가톨릭 사제 시스네로스의 마수 앞에 알후다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내 주바이다와 자유로운 가풍을 대대로 이어가고 싶었으나 시대는 그들에게 알라가 약속한 지상의 복락을 허용하지 않았다. 가문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등장하는 동안, 가톨릭 세계의 무어인들에 대한 압박은 점증한다. 이것을 자기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 혈기 넘치는 이븐 파리드의 증손자이자 알후다일의 장남 주하이르 알팔(종마)은 23세의 젊은 청년답게 분기탱천해서 일곱 번째 천국으로 갈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젊은이들이 조직한 가르나타에서 봉기가 시스네로스가 무어인들을 탄압하기 위한 결정적 계기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가 과연 알고 있었을까?

 

언제라도 위기가 촉발될 지 모를 상황에서도 사랑의 꽃은 피어난다. 우마르와 주바이다의 자랑거리 딸 힌드는 아랍 여성의 그것과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교리 논쟁에서는 어쩌면 신성모독일 지도 모를 그런 주장을 펼치기도 하고, 사촌 미겔의 아들 후안과 결혼을 시켜 후일을 도모하자는 가족의 결정에도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결국 과거를 가지고 있는 알카히라(카이로) 출신 지식인 이븐 다우드와 결혼하게 된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결혼식을 치르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모로코의 페즈에 신접살림을 차리게 되는데, 우마르의 또다른 아들 야지드를 데리고 가지 않은 게 천추의 한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레콩키스타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저항할 수 없었던 알후다일로 대변되는 이베리아 반도의 아랍세력은 곧 안알달루스 이슬람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처지였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카스티야발 가톨릭 세력 앞에 무어인과 유대인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 이단 세력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신세였을 것이다. 그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기존의 질서와 관습 그리고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도 개종해서 투항하는 방법이 있었다. 훗날 역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가톨릭 사제들은 가짜로 개종한 무어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가혹한 종교재판으로 그들의 정신을 말살하는 게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나타에서 벌어진 불의 벽 사건이 주는 교훈은 명백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무어인들의 출발지였던 마그레브로 돌아가야 했다.

 

다른 선택은 수백 년간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운 조상들의 뒤를 이어 저항에 나서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럴 만한 동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가르나타의 술탄은 평화로운 공존을 약속한 이사벨에게 속아 아무런 저항 없이 가르나타를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았던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터키 술탄의 지원 아래, 지하드를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주하이르 알팔은 혈기 넘치는 친구들의 지원 아래 실제로 증조부의 칼을 들고 저항운동에 나섰다. 문제는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의 지원 받기에 알안달루스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술탄의 다음 목적지는 너무 먼 알안달루스가 아니라 비엔나였다.

 

가르나타에서 주하이르와 친구들이 벌인 봉기는 그들에게 일시적 민족적 자긍심의 부활을 가져다 주었을 지는 몰라도, 후과는 비극적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구체제의 기사도 정신을 놓지 못하고 카스티야 진압군을 대표하는 돈 알론소와 결투에서 승리한 주하이르 알팔에 대한 보복으로 소년장수 코르테스(저자 타리크 알리의 변용이라고 역자는 해석한다)는 알후다일을 습격해서 일족을 몰살시킨다. 평화로운 공존을 잠시나마 꿈꾼 무어인들에게 코르테스는 혹독한 교훈을 안겨 주었다. 가르나타 사령관 돈 이니고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시스네로스 주교에게 이교도들은 공존이 아닌 말살의 대상일 따름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기억의 완전한 추방은 현재진행형이다. 역사는 희비극으로 반복된다고 했던가. 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나크바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나와는 다른 생각과 종교를 가진 타인에 대한 적대적 종족절멸정책은 유서 깊은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우마르 시대에만 하더라도 알후다일의 번영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도시라는 형태의 정치권력이 부상하고, 카스티야 세력이 내분으로 분열된 알안달루스 무슬림 세력들을 각개격파하면서 시작된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난세에 주하이르, 쿨숨, 힌드 그리고 야지드로 대변되는 우마르와 주바이다 자식들의 운명이 각각 상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성에 앞선 감정적 선택은 일족에게 장례식 화환이었다. 어쩌면 주하이르가 도모한다는 미래도 바꿀 수 없는 과거의 반복일지도 모르겠다. 결말에 등장하는 코르테스가 지휘하는 카스티야 군대의 압도적 병력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우마르들의 모습은 정말 장렬하고 처연했다.

 

지난 이틀 동안 나를 16세기 초 미지의 세계 알안달루스로 인도했던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를 리뷰를 쓰면서 다시 생각해 본다. 제목에 등장하는 ‘석류나무 그늘’은 평화와 자유 그리고 풍족함이 넘치던 시절의 알후다일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다. 분열과 분노 그리고 증오의 정치가 조장되는 오늘날, 저자 타리크 알리가 구상한 우리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문학적 이상향에 대한 대서사시는 언어나 문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비극이었다. 올해 내가 만난 최고의 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다만 절판되어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게 흠일 따름이다.

 

[뱀다리] 오늘 아침부터 읽기 시작한 알제리 출신 작가 아시아 제바르의 <사랑, 판타지아>에서는 마그레브 지역에 살았던 무어인의 고난이 등장한다. 이베리아 반도 카스티야인의 역할을 이번에는 제국주의 프랑스 군대가 맡았다는 게 다를 뿐, 서구인들의 시선에서 본 ‘바르바리안’에 대한 핍박과 차별의 역사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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