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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항구들 ㅣ 동방문학총서 1
아민 말루프 지음, 박선주 옮김 / 훗 / 2016년 12월
평점 :

이달의 달궁 모임 책으로 선정되고 나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작년에 사둔 책이었는데 읽다가 방치해 둔 기억이 났다. 서가의 보기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오래 전에 저자 아민 말루프가 쓴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읽었던 것 같다. 너무 오래 전에 읽었고, 리뷰도 남기지 않아 감상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레바논 출신으로 1976년부터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아민 말루프는 레비-스트라우스에 이어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모국어는 아랍어인데 작품 활동은 프랑스어로 하는 아민 말루프는 터키의 마지막 술탄의 자손을 주인공으로 삼아 현대 중동사를 관통하는 대하드라마를 창조해냈다.
소설 <동방의 항구들>은 1976년 6월 16일 수요일, 프랑스 파리의 모처에서 화자가 과거 레지스탕스 영웅으로 교과서에도 실렸던 오시안 케탑다르를 만나 파란만장한 그의 일대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설이 생기기 위해서는 항상 청자가 필요한 법이지.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터키인, 그리스인, 유대인, 아랍인 그리고 아르메니아인은 다섯 개의 손가락이라고 했던가. 그것은 술탄이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던 술래이만 대제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중동의 빈사에 빠진 환자 오스만 터키는 동유럽에서 시작된 피지배 민족들의 국토회복운동으로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몰락하는 중이었다. 이스탄불의 군주(술탄)는 폐위된 뒤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군주의 딸이었던 이페트는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돕겠다고 나선 노박사 케탑다르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이페트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오시안 케탑다르의 할머니였다. 귀족의 후예답게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오시안의 할아버지는 아르메니아인 친구 누바르의 딸 세실(15세)과 결혼해서 둘째 오시안(1919년생)을 낳게 된다. 1909년 4월 6일, 케탑다르 가족이 살던 터키 남부의 아다나 지방을 휩쓴 오스만 무슬림과 아르메니아 기독교계의 충돌로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누바르의 가족들은 신대륙 아메리카로 떠나게 된다. 아다나 학살사건은 6년 뒤에 전 세계에 근대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알려지게 될 조직적 아르메니아 대학살(1915년)에 앞선 불길한 전조였다. 케탑다르 가족도 같은 레반트 지역의 베이루트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한 때 중근동에서 패자였던 오스만 터키가 몰락해 가는 과정에서 그동안 피지배민족으로 설움을 겪던 수많은 민족이 민족자결을 주장했다. 특히 터키와 종교가 다른 민족인 아르메니아인들의 독립 요구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사태가 폭력적으로 치닫게 되었을 때, 터키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아민 말루프는 이민족간의 평화로운 공존과 동화를 꿈꾸었던 것일까? 물론 기독교 아르메니아인들을 도운 터키 무슬림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극소수였고, 대다수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위해서라도 아르메니아인들을 혹독하게 다뤘다.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인데, 40년 뒤 이스라엘 독립 과정에서 벌어진 나크바(Nakba:대재앙)가 그랬다.
어엿한 청년으로 자란 오시안은 프랑스 몽펠리에로 떠나 의학공부를 하게 된다. 1930년대 전간기의 유럽대륙은 불안 그 자체였다. 곧 이어 터진 2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가 독일군의 전차부대 앞에 속수무책으로 항복하고, 이에 굴하지 않는 프랑스 국민들은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독일 점령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외부인 오시안 케탑다르는 정의의 편에 서서, 바쿠 혹은 아바카(미래를 의미한다)라는 가명으로 레지스탕스 전사 베르트랑과 함께 활발한 저항활동을 개시한다. 프랑스 사람도 아닌 터키인 오시안이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엄혹한 시절에 오시안은 오스트리아 그라츠 출신 유대인 처녀 클라라 엠덴을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유대인 절멸계획으로 모든 가족을 잃은 클라라 역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요원이었고, 오시안의 평생의 사랑이 될 전망이다. 오시안을 레지스탕스 활동 중에 친독 의용대에게 체포되는 결정적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다른 무장 레지스탕스 요원들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탈주에 성공해서 “레지스탕스 잡역부”의 영광스러운 활동을 이어갔다. 모두가 오시안을 칭송했지만, 영웅의 최고의 덕목이라는 겸손을 그는 직접 실천했다. 그런데 나는 왜 오시안의 이미지에서 자꾸만 ‘포레스트 검프’의 그것이 연상되는 걸까.
밀수업자 막내아들 살렘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오욕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오시안의 아버지와 왕녀 출신 할머니 이페트는 영웅의 귀환으로 비로소 명예를 되찾을 수가 있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실성한 군주의 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기적적으로 미래의 이스라엘이 되는 팔레스타인으로 귀국 중이던 클라라가 오시안을 찾아오고, 둘은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문제는 한 명은 아랍인(터키인)이고 다른 한 명은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벌써부터 비극이 잉태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이스라엘 독립으로 아랍인과 유대인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기 전까지만 해도 베이루트와 하이파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독립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케탑다르 부부가 꿈꾸던 미래의 행복은 단박에 무산되어 버렸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만삭의 아내 클라라를 하이파에 두고 베이루트를 찾은 오시안은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다. 전쟁으로 국경이 봉쇄되고, 자신의 자리를 노린 동생 살렘의 음모로 수십 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강제로 갇힌 정신병원에서 오시안을 버티게 해준 힘의 근원은 돌잡이 딸 나디아와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의 존재였다.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는 변질되기 쉬운 음식 같은 희망이야말로 1976년 6월 20일 재회의 기쁨을 위한 연단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아민 말루프는 중근동 현대사에 등장하는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에 올라탔던 어느 남자의 거창한 일대기로 시대의 비극을 그려냈다. 아무래도 터키 출신 오시안 케탑다르가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하게 되는 과정은 소설적 핍진성과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프랑스 지식계를 대표하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아예 이해 못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오스만 터키의 몰락, 아르메니아 대학살, 나크바, 이스라엘 독립전쟁 그리고 전화가 미친 레바논 내전에 이르는 시대의 흔적에 정면도전한 남자의 연대기는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소설의 후반에 등장하는 정신병원 시퀀스는 어쩌면 온전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시대의 비극에 대한 작가의 소설적 장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한 세대 전에 그의 할머니 이페트가 폐위된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을 목도하고는 정신을 놓지 않았던가. 성인이 되어 프랑스를 거쳐 자신을 찾아온 딸을 보고 삶의 존재 이유를 찾은 오시안이 바깥세상을 보기 위해, 무엇보다 강제로 떨어져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와 만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장면은 감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레지스탕스 경력과 만능키 같이 작동하는 베르트랑과의 관계를 통해 마침내 제 2의 조국 프랑스를 찾아온 영웅의 귀환은 오디세우스의 신산하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연상시킨다.
오시안 케탑다르에게 레반트라는 지역이 갖는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삶의 근원이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그런 장소가 아니었을까. 아민 말루프가 자유 프랑스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았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고전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레지스탕스 신화의 완성을 위해 익명의 나레이터를 등장시키는 방법도 나름 괜찮았던 것 같다. 이제는 절판되어 구할 수도 없게 된 저자의 다른 책들이 문득 궁금해졌다. 레반트 출신 저자의 다른 목소리도 한 번 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