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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의 물고기 책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유나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맨부커상 수상에 빛나는 리처드 플래니건의 책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1월에 바로 두 권의 책을 샀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과 <굴드의 물고기 책>. 둘 다 각각 백 쪽 그리고 이백 쪽씩 읽었었는데 미처 다 읽지 못했다. 10월에 나의 서가에서 집어 올린 <굴드의 물고기 책>은 단 3일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그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상당히 재밌었다. 왜 그 때 미처 다 읽지 못했던 건지 궁금하다.
현재 시점에서 호주의 태즈메이니아를 찾는 부유한 관광객들을 상대로 골동품 사기를 치는 화자 시드 해밋은 어느 날, 윌리엄 뷜로 굴드라는 영국 출신 기결수가 쓴 <물고기 책>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책에 실린 다양하면서도 기교 넘치는 물고기 그림들과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아마 처음에 책을 읽을 적에 아무런 정보 없이 무턱대고 읽기 시작해서 그런지 9달 전의 기억들은 파편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새로 읽어야만 했다.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 이중혁명으로 인간이 지구를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19세기 밴디먼스랜드(오늘날의 태즈메이니아)가 공간적 배경이다. 영국 출신 윌리엄 뷜로 굴드(이하 빌리 굴드)는 지금 물고기 감방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는 간수 팝조이에게 그림을 그려 주고, 그의 묵인 아래 모종의 기록을 남긴다. 자신의 피로 때로는 갖가지 재료들을 이용해서. 우리도 현재 치열한 기억의 투쟁을 하고 있지만,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도전이었다. 심지어 그 기록자가 사형수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본토에서 위조죄로 잡혀 1825년 7년형을 받고 태즈메이니아 세라섬에서 형을 살게 된 빌리 굴드의 인생역정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한 때 신대륙 미국에 건너가 조류학의 대가 장바뵈프 오듀본 아래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지 않은가. 사실 유형지에서 그림 그리는 기술이 필요할까 싶지만,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고 기록을 위한 그림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미적 감상을 위해서도. 지금은 핸드폰에 달린 카메라로 누구나 쉽게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지만 수년 전만 하더라도 불가능한 상상이었다.
문명세계를 대표하는 제국 영국에서 건너온 이들이 문명인이었냐고 묻는다면,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단연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계몽주의 사조가 서구사회를 휩쓸고 있던 시기,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애버리진 원주민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하고 있었다. 순전히 과학에 근거한 인류학적 관점에서 그들의 신체를 훼손하고, 수집하는 야만에 가까운 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하긴 유형수들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마당에 원주민들에게 그런 대접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세라섬의 사령관 가짜 호러스 대위는 죄수들의 교화라는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지 않고, 노바 베네치아(Nova Benezia)를 꿈꾸면서 섬의 자원들을 팔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하다. 윗대가리가 이 모양이니 수하의 부하들은 어떨지 상상에 맡기겠다. 성병을 치료하겠다고 수은에 중독된 얼굴을 가리기 위해 황금가면을 쓰고, 갖은 기행을 저지르는 그의 모습에서 코폴라 감독의 걸작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커츠 대령이 연상되기도 했다.
어쨌든 빌리 굴드는 섬의 또 다른 권력자 토비어스 아킬레스 렘프리어 선생에게 픽업되어 그의 하인이자 전속화가가 되어, 영국 본토의 코즈모 휠러 박사에게 제공할 물고기 그림을 그리게 된다. 재밌는 건, 각장마다 등장하는 12마리의 물고기들이 제각각 등장인물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퉁퉁한 렘프리어 선생은 가시복에 비유하지 않던가. 그리고 불과 십 수 년 전에 있었던 나폴레옹 전쟁에 관련된 인물들이 무시로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하는데 일등공신 중의 하나였던 프로이센의 블뤼허 원수의 이름이 등장하고,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었던 아이티 반란의 주모자들도 차례로 등장한다.
다양한 차원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나는 여전히 소위 과학의 영구한 진보를 믿는다는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들이 밴디먼스랜드에서 벌이는 지옥의 카니발 같은 행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형수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고문과 처벌은 일상적이었다. 닥터 렘프리어가 죽은 뒤, 코즈모 휠러 경에게 보내진 그의 두개골이 애버리진 원주민의 퇴화를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로 채택되는 장면은 이 소설 최고의 블랙유머의 현현이었다.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자신과 물고기를 동일시하게 되는 빌리 굴드의 환각인지 망상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착란성 섬망에 다가갈수록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처럼 보기 좋게 물고기 감방에서 탈출해서 맷 브레이디와 호응해서 무언가 유의미한 반란의 시도를 기대해 보았지만, 소설은 나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빌리 굴드를 궁지에 몰아넣은 토비 렘프리어의 어이없는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카푸아 데스, 늙은 덴마크 서기이자 위조기록 전문가 요르겐 요르겐센과 사령관 호러스 대위까지 정말 기이한 죽음을 맞는다. 리처드 플래니건은 그들의 죽음을 통해 다시 한 번 독자들에게 ‘메멘토 모리’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기록에 집착하던 빌리 굴드가 시시포스처럼 요르겐센의 비밀서고에서 발견한 기록들을 썰매에 지고 가다가 결국 모두 다 태워 버리지 않았던가. 다시 한 번 느낀 점이지만, 언제나 기록은 승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아예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까.
<굴드의 물고기 책>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는 매혹적이었다. 반면 소설에서 리처드 플래니건 작가가 구사하는 면면과 전개를 온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지난 1월에 못 다한 숙제를 마친 것 같아, 기분은 후련하다. 바로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