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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평점 :
가짜뉴스가 연일 판을 치고 있다. 드디어 총리가 나서서 가짜뉴스와의 전쟁을 선포할 지경이 되었다. 가짜뉴스의 해악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웃 천조국에서는 이런 가짜뉴스를 잘 활용해 대권을 거머쥔 사람도 있단다. 이름하여 도널드 트럼프. 미국 역사상 어떠한 공직도 경험하지 못한 민간인이 최고 권력자가 된 적이 있었던가? 더 심각한 문제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들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만든 독재자 리트머스 시험지 평가에서 트럼프는 4점 만점을 받았다는 점이다. 아니 그것만으로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진단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미국은 현재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들로 나뉘어져 있다. 전자는 주로 기독교 백인들이 그리고 후자는 유색인종과 이민자 그리고 진보 그룹이다. 사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 당파의 색깔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별 차이가 없다 보니 민주당과 공화당이 정권을 주고받는 게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혹독한 정치보복 수준의 막말이 오가지도 않았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나라를 세운이래, 보이지 않는 규범이 올바르게 작동해온 결과다. 문제는 공화당 티파티 인사들이 대거 하원에 진출하면서부터 암묵적으로 지켜져온 미국 정치 전통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사실 미국 대통령의 임기도 처음에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또한 대통령의 친인척들의 등용도 알아서 자제해온 전통을 자랑한다. 대통령 행정명령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미국의 45대 대통령은 그런 전통과 규범을 가볍게 무시했다. 워터게이트로 임기 도중에 사임한 닉슨 같은 대통령도 자신에게 적대적 언론을 상대하는데 있어 금도를 지켰다. 하지만, 트럼프는 전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에게 비판적인 CNN,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같은 신문들과 전쟁을 선포했다. 물론 그의 의중에는 어차피 자신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는 중도나 진보세력 대신 집토끼만을 상대하겠다는 전략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런 판국이니 미국이 분열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
남북전쟁을 치른 후, 남부의 민주당은 대거 선거권을 얻게 된 흑인들을 선거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1965년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으로 다시금은 온전한 투표권이 그들에게 부여된 뒤에는 공화당이 백 년 전 수법을 그대로 이식해서 따라하고 있는 중이다. 교묘한 선거구 조정으로 다수 흑인들을 밀집시키는 전형적인 게리맨더링 전술로 민주당 당선이 유력한 선거구를 빼앗는데 성공했다. 선거를 위한 신분확인을 강화하면서 상대적으로 백인들에 비해 운전면허증 같은 신분증이 없는 유색인종의 표를 잠식하고 있다. 트럼프의 가짜뉴스 전략을 본떠서 지난 대선 당시 대규모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다는 근거 없는 소식들을 유포시켜, 공화당 지지자들을 강력하게 응집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책은 분명히 병들어 가고 있는 세계 민주주의가 아니라 미국식 민주주의의 종언에 대한 분석이다. 세계 민주주의의 롤모델이라고 하는 미국의 민주주의에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 이 책을 읽으면서 알 수가 있었다. 한 가지 불만은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정부에 대해 미국 주류 지식인의 비판적 시각이다. 어느 정권도 모든 정책을 성공시킬 수는 없는 게 아닌가. 미국의 정책들이 모두 성공했던가? 지엽적인 이슈들로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를 포퓰리스트 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조지 W. 부시가 열정적인 민주주의자였다는 주장만큼이나 우습게 들렸다. 믿을 수가 없다, 부시가 열정적 민주주의자였다니.
건국의 아버지들이 고안한 대통령 간접선거 제도의 병폐가 부시와 앨 고어 그리고 지난 번 대선에서처럼 국민의 민의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개정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민의의 왜곡이 아니던가. 직접선거제였다면 당연히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었어야 할 텐데 지금 백악관의 주인은 누구인가 말이다. 독재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 엘리트 정당인들이 주축이 된 정당이 앞장 서야 한다고 하지만, 작금의 공화당 인사들이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그저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악마와도 손을 잡을 형국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문제점이 있는 인사가 집권자가 되었을 때, 견제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것도 아니다. 얼마 전 작고한 공화당의 존 매케인 의원이 암투병 중에도 먼 거리를 날아와 트럼프가 야심차게 추진한 오바마케어 무산을 위한 법안에 반대한 장면 하나가 기억났다. 여론에 떠밀려 대통령의 거수기가 된 공화당 의원들의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저자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게 강조하는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 같은 선의에 의한 규범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문제는 그런 제도들은 전혀 물리적 강제성을 지니고 않다는 점이다. 공화당이 게리맨더링 같이 악랄하고 비열한 전술로 민주당의 손발을 묶는데, 그들과 같은 전술로 되받아치면 안 된다는 주장은 공허하게만 들린다. 물론 강경투쟁으로 맞상대하라는 주문이 아니다. 아무리 자당에서 선출된 권력자라고 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판단이 든다면 1940년대 연방대법원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던 FDR에게 저항했던 민주당 의원들 같은 결기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한 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말이다.
미국 중간선거(11월 6일)가 다음 달로 다가왔다. 명백하게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을 지니는 이번 선거에서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지난 대선 당시 동시에 치러진 의원선거에서 상하원 다수당을 차지한 공화당은 상원은 유지하겠지만, 하원에서는 민주당에게 다수 의석을 빼앗길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다고 해서 민주당이 섣불리 러시아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를 탄핵하는 어리석은 수를 쓰지 말 것을 저자들은 주문한다. 상대 진영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경제호황 중에 역풍을 부를 수 있다는 진단이다. 대신 다민족 민주주의 역량 강화와 경제양극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개발의 위대한 전진이야말로 시대적 요청이라고 결말을 짓는다. 과연 미국 공화당이 티파티 극우세력과 결별하고 종래의 정치적 건강성을 회복해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보루로 거듭나게 될 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