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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소녀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명환.김엘리사 옮김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9월에는 아리엘 도르프만을 읽겠다고 선언했지만 지지부진하다. 지난여름 로맹 가리 읽을 당시 좋은 기억만 가지고 덤벼들었다가 낭패를 봤다. 사실 도르프만 교수의 다른 책인 <체 게바라의 빙산>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1/3 가량 읽었나.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민주주의로의 이행 과정이었던 1992년 세비야 엑스포 빙산 출품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확 와 닿지가 않았다. 대신 <죽음과 소녀>는 역시 작가의 대표 희곡 작품답게 대단했다.
사실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 <죽음과 소녀>가 네 편으로 구성된 희곡집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서가에서도 소설이 아니라 희곡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다. 도르프만이 쓴 네 편의 희곡들을 보면서 정말 희곡으로 만들기에 최적화된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과부들> 외에는 정말 소수의 배우들과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연극으로 무대에 올리기에 적합하지 않은가. 사실 도르프만은 우리나라에서 소설가라기 보다 희곡가로 더 유명하지 않나 싶다. 요즘 맛을 들인 인스타에서 검색을 해보니, 연극 <죽음과 소녀>가 압도적으로 많은 검색물을 토해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연출로 이미 1994년 시거니 위버 주연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는 <죽음과 소녀>부터 읽었다. 라틴아메리카 모처라고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공간적 배경이 칠레라는 사실을.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모든 반대 세력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제압했던 군부는 의대생 파울리나 살라스를 납치해서 고문하고 강간했다. 십수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파울리나는 여전히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을 고문했던 그 의사는 고문 희생자들의 고통을 덜어 준다는 이유로 슈베르트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를 틀어 주었다고 했던가. 그 아름다운 선율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으로 각인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민주화 투사였던 파울리나의 남편 헤라르도는 변호사로 대통령의 위촉을 받아 과거 군부독재 정권 저질러진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조사 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내의 승인을 받을 거라고 말하지만, 예리한 파울리나는 그가 이미 대통령에게 위원장직을 승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세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짜 파열음을 외부에서 왔다. 헤라르도의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비치하우스에 사는 닥터 미란다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 준 것이다. 닥터 미란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파울리는 즉시 그가 “그 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닥터 미란다를 포로로 잡고 권총으로 무장한 파울리나는 진실에 대한 그의 고백과 사과를 들어야겠다고 선언한다. 영화 트레일러를 보니 좀 더 격렬한 액션이 추가된 것 같은데, 원작은 지극히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게 침착하게 전개된다. 그만큼 파울리나의 과거의 사건에 대한 고통이 깊다는 반증이 아닐까. 당연히 포로로 잡힌 닥터 미란다는 자신이 무고하다고 주장하고, 변호사 남편 헤라르도 역시 이런 방식으로는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복수를 위해 군부정권이 저지른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긴 해도, 비록 선거로 권좌에서 물러나긴 했어도 여전히 칠레 민주주의 정권 하에서도 기소 면책권과 일정 지분의 정치적 권력을 가진 피노체트가 지휘하는 군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가 있었다. 파울리나의 주장 대로 왜 항상 약자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는가에 대해 작가는 처절한 질문을 던진다.
한편, 닥터 미란다의 주장 대로 전형적인 정신 분열증 증상을 보이는 파울리나가 과연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일까? 우리의 영리한 주인공을 그것을 대비해서 닥터 미란다가 빠져 나갈 수 없는 몇 가지 장치들을 준비해 두었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남편에게 들려주면서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을 던져 주었더니 닥터 미란다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러니까 그가 진범이었던 것이다. 작가가 구상에서부터 수년간 들인 공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멋진 장치가 아니었던가. 걸작이 걸작으로 칭송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과부들>도 남자들이 모두 잡혀가 버린 어느 마을의 과부들에 대한 이야기다. 군부를 상징하는 대위와 중위 그리고 군인들은 강가에서 수년 전에 잡혀간 남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소피아를 위시한 과부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과부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잡혀간 남자들이 살아 있다면 바로 석방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죽었다면 시체를 내주어 장례라도 치르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건 모두 군인들은 들어줄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이고, 아들이고 손자 그리고 연인이 아니었던가. 그나마 민주주의 시스템 아래서 정상적인 이성을 발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대위마저 과부들의 막무가내 주장에 진저리를 내면서 기존의 폭력적인 방식으로 항의하는 과부들을 해산시키려는 장면에서는 여전히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현대 칠레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다. 군부정권 아래 호의호식하며 권력을 농단했던 이들이 사회 기득권으로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칠레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네들의 상황은 해방 이후 일제 부역자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를 겪어야 했던 우리의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되었다.
한국을 상정하고 발표했던 <경계선 너머> 역시 비극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다른 작품과 궤도를 같이 한다. 공간적 배경은 수십 년 째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국경 도시다. 5천 명에 달하는 전쟁 희생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매장하는 일을 하고 있는 아톰 로마와 러바나 줄렉 그리고 국경 수비대원이 차례로 등장한다. 마침내 전쟁은 끝났지만, 냉정한 군인은 부부의 집을 경계선으로 갈라 버린다. 전쟁 중에도 피아 구분 없이 지내던 부부가 졸지에 이산가족이 될 판이다.
모든 것을 소멸시켜 버리는 전쟁의 참혹함 그리고 인도주의적 사고 대신 그저 관료적 방식으로 국경선을 긋고 분단시켜 버리겠다는 군인의 등장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군인의 존재가 원래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던가. 현대 사회의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원래 존재의 목적 대신 자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존재로 탈바꿈한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고 나면 새로운 사실들이 쏟아지는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사법농단이 가져올 사법시스템 전체에 대한 불신을 앞으로 어떻게 해소하겠다는 건지 해당 책임자들은 전혀 관심도 없었겠지. 내가 낸 세금으로 그런 이들에게 월급과 연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도르프만은 <죽음과 소녀>와 마찬가지로 <경계선 너머>에서도 일종의 미스터리로 내러티브에 감칠맛을 첨가한다. 예의 군인이 오래 전에 부부의 곁을 떠난 아들 요셉이라는 설정이다. 부부는 그와 이야기를 할수록 그가 그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만, 다시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인이 또다른 전쟁의 희생자가 되면서 그 사실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역시 작가는 열린 결말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마지막의 <연옥>은 읽기는 했는데 너무 모호한 이야기여서 좀 헷갈렸다. 아마도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 만난 두 남녀가 나누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후기에 실린 <이아손과 메데이야> 전설이 연상되었다. 아무래도 앞에서 읽은 세 이야기와는 결을 달리 하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보니 나는 칠레 출신 작가들을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모양이다. 루이스 세풀베다를 필두로 해서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들을 제법 많이 읽었다. 이번에는 생소한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도 읽게 되었다. 그전에 읽은 다른 칠레 작가들 덕분인지 조국 칠레와 제2의 조국 미국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는 작가의 저술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게 다가왔다. 중고서점에서 <죽음과 소녀>를 사면서 같이 산 그의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도 읽어봐야겠다. 아 그전에 먼저 영화 <진실>부터 봐야 하나. 다시 생각해 봐도,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도 진실과 화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하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모든 문제에 책임 있는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피해자들에게 사죄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