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한 1년 전에 앨런 홀링허스트의 책을 읽어 보고 싶다는 그런 글을 포스팅한 적이 있었다. 다시 찾아보니 작년 11월이었군.

 

http://blog.aladin.co.kr/723405103/9688993

 

그리고 오늘 문득 램프의 요정을 슬슬 문지르다 보니, 홀링허스트 작가의 책이 출간 예정으로 뜬 것이 아니던가. 오!!!

 

창비에서 다음달 말 정도에 나올 모양이다. 물론 신간은 아니고, 작가의 부커상 수상작으로 일단 독자들의 관심을 끌겠다는 전략이겠지. 그런 다음 반응을 보아 가면서 신작을 출간하려나. 근데 입에 담기도 싫은 모 신문의 연초 출간 계획 기사를 보니, 6월에 나올 예정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암튼 출간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지긴 했지만 지금에라도 나오니 대환영이다.

 

물론 나는 번역판의 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오래 전에 원서를 사서 쓰담쓰담만 하고 있었다. 오늘 출간된다는 소식에 사무실 책상 머리에서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던 너란 녀석을 살짝 펴 보았다.

 

3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고, 각 챕터는 6개씩 들어있다. 대처 정권이 재집권에 성공한 1983년부터 시작해서 1986년과 1987년 이렇게 세 시기를 아우른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소설은 닉 게스트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게이 소설이다. 원서 뒤에 실린 후기를 보니 2006년에 BBC에서 솔 딥이라는 감독 연출로 3부작 텔레비전 시리즈로도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빡빡한 원서로 분량은 501쪽이나 된다. 아니 그럼 도대체 한글로는 몇 페이지나 된다는 거지? 보통 영어 원서가 1.5배로 뻥튀기가 되니 최소한 600쪽 이상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지난 번에 아주 재밌게 읽었던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 원서가 480쪽이었는데, 번역서는 700쪽이 넘었다. 대충 감이 오는구만 그래. 그런데 또 단가는 얼마나 하려나. 피카도르 버전은 8파운드 정도였었는데. 설마 번역서가 원서보다 더 비싼 시츄?

 

나오면 바로 사서 읽어 보려고, 예약알림도 걸어 두었다. 이번 가을에 제격인 소설이라고나 할까. 원서랑 대조해 보면서 읽는 재미도 있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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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28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서 대조! 역쉬 메냐님~^____^

레삭매냐 2018-09-28 19:25   좋아요 0 | URL
제 주제에 원서 완독은 사실상 불가능
하고 나중에 번역서가 나오면, 그 때
마다 디비 볼려구요.

추석 끝나고 책이 읽은 책이 넘쳐나서
즐거운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중입니다.

비로그인 2018-09-28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앨런 홀링허스트 책 출간을 기다리는 독자 중 한 명인데 반가운 소식이네요! 예약알림 걸어두어야겠어요~! :)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18-09-28 19:25   좋아요 1 | URL
저도 오늘 우연히 알게 되었답니다 :>

평소에는 무슨 책이 나오나 딱히 궁금
해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이 참에 앨런 홀링허스트의 전작이 주
욱 출간되었으면 바램입니다.

비로그인 2018-09-28 21:28   좋아요 1 | URL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는 <수영장 도서관>의 원서를 가지고 있는데 이 책도 꼭 번역서로 보고 싶어요. 앨런 홀링허스트의 글이 나오는 <끌리는 박물관>을 보며 정말 번역서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는데... 출간 소식이 기쁘고 반갑습니다. 다른 책들도 더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목나무 2018-09-28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레삭매냐님이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라 하셔서 일단 출간알림신청부터 해놨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8-09-28 21:36   좋아요 1 | URL
월척이닷 !

이 책을 필두로 해서 앨런 홀링허스트의
다른 책들도 우수수 쏟아져 나오길 기대
해 봅니다.

그나저나 필립 로스의 <미국을 노린 음
모>는 또 언제 나오는 겐지...

syo 2018-09-28 21: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런 게 알라딘의 위대함이네요. 금시초문의 작가에 대해서 강력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고수들의 존재.....

레삭매냐 2018-09-28 21:45   좋아요 0 | URL
강호 독자 제현의 강력한 호기심을 유발시
키는 데는 일단 성공했네요 :>

다만 고수가 아니라 허조비라는 ㅋㅋㅋ

coolcat329 2018-09-30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몰랐던 작가인데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게 있나봅니다~ 호기심이 마구 일어나네요^^

레삭매냐 2018-10-01 09:4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 더 기대가 큰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쎄인트saint 2018-10-01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2권으로 나올 가능성이 많군요...

레삭매냐 2018-10-01 16:25   좋아요 0 | URL
아 그 생각을 못했네요.

두터워도 그냥 한 권이 훨씬 나은데
말이죠. 두 권이면 가격도 가격이고 -
 
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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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드디어 앨런 홀링허스트의 <라인 오브 뷰티>
가 나오는 건가! 원서로 쓰담하고 있던 책의 출간 대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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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 - 아리엘 도르프만 회고록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한기욱.강미숙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어떤 작가의 책을 읽는 데는 순서가 필요한 법이다. 내 마음대로 정한 9월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읽으면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급한 마음에 도르프만 문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순서가 틀렸다. 그의 대표작인 <죽음과 소녀>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칠레혁명을 다룬 에세이집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부터 읽어야했다. 이런 순서였다면 나의 도르프만 읽기는 좀 더 수월했으리라. 작가의 자전적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는 지난여름 귄터 발라프 르포르타쥬의 발견만큼이나 독서의 성취감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유대인으로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하고 칠레를 사랑하게 된 혁명전사 블라디미로 도르프만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그의 복잡다단한 정체성처럼 회고록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아옌데 정권으로 상징되는 칠레혁명을 붕괴시킨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테타 이후 망명길에 오르게 되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이야기와 조국에서 추방되다시피 쫓겨난 아돌포 도르프만의 아들이자 영어를 사용하는 양키 소년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에드워드 도르프만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등장한다.

 

도르프만 가계의 뿌리는 저 멀리 러시아의 오데사에서부터 출발한다. 반유대주의의 광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르프만의 조상들은 아르헨티나에 뿌리를 내린다. 아리엘의 어머니는 능수능란한 언어로 한 때 트로츠키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 아돌포는 아르헨티나에서 쫓겨나듯 벗어나 그링고들의 천국 뉴욕으로 향한다. 나어린 나, 아리엘은 에드워드란 이름의 양키 소년이 되기로 결심하고 스페인어를 버린다. 이런 정체성의 극심한 혼란은 어쩌면 3개국을 오가는 망명자로서의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미국의 CIA가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시킨 1954년, 매카시 광풍이 불던 미국에서 더 이상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도르프만 가족은 칠레로 향한다. 십 수 년 동안, 영어 노래를 듣고 제국주의 미국문화의 세례를 받은 소년 블라디미로는 거절했던 모국어를 되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미래의 진짜 조국 칠레 인민들의 참혹한 현실을 깨닫고, 미국을 찬양하던 양키 소년에서 철저한 반미주의 전사이자 혁명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가 칠레에 안착했던 1950년대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있끄는 쿠바혁명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억압받던 제3세계 인민들의 연대가 구체적 형태를 갖춰 가던 시기였다. 미국의 안마당으로 인식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이 식민화되고, 제국주의 악당 그링고들에게 착취당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풍족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현실을 젊은이 특유의 신랄한 비판의식을 담아 짚어낸다.

 

한편, 아리엘-블라디미로-에드워드라는 각각의 이름이 상징하는 작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도 자못 심각하게 다가온다.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면서도 미국식 교육의 세례를 받아 준양키에 가까운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훗날 살바도르 아옌데 선거운동에 나선 저자의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탁월한 미국식 마케팅 방식을 선거전에 도입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빈민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그들을 꾀기 위해 디즈니에서 제조하고 수출한 악질 자본가 스크루지 맥덕이 등장하는 단편만화들을 상영하기도 한다. 그가 이 에세이집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듯이, 라틴아메리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모순들은 그야말로 무 자르듯 그렇게 단순화할 수만은 없는 그런 사회경제적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내내 잡종(hybrid)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그런 개념이라고 해야 할까.

 

피노체트 쿠데타 당시 그의 수많은 친구들과 동지들이 군부가 조직한 총살조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에 대해 도르프만은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쿠데타 당일, 친구 클라우디오 히메노와 근무를 바꾸지 않았다면 그리고 자신의 상관이었던 장관이 대통령과 함께 최후를 같이할 인사 리스트에서 그를 삭제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아리엘 도르프만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쓰고 있다. 쿠데타가 일어난 뒤에도 그는 자신이 그날 ‘우리의’ 대통령 아옌데와 죽었어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욕스러운 독재 치하를 견뎌내고, 대재앙의 목격자로서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 더 큰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 안헬리카와 아들 로드리고를 지켜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임무도 엄연하게 존재했다. 선택의 순간에 그는 주저하지 않았고, 목숨을 보전하는데 성공했다.

 

삼십대 혁명전사로서 아리엘 도르프만의 악명은 주로 그가 저술한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비롯되었다. 노골적인 정치적 서사 대신 부지불식간에 아이들 사이에 전파되는 미국 문화 제국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칠레에서 수많은 분서 사태를 불러왔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이제 <도널드 덕>을 읽을 준비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더 공감이 가는 부분은 칠레혁명이 쿠데타로 실패하고 나서, 자신들의 편이 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돈 파트리시오 같은 인사들을 포용력을 가지고 품지 못했다는 점이다. 혁명세력이 흔히 범하는 오류를 도르프만들은 범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돈 파트리시오들이 극우 세력에게 달려가게 만들었다는 뼈저린 고백은 곱씹어 봐야할 문제다.

 

영어 상용자로서의 정체성은 두고두고 저자를 괴롭히는 이슈였다.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의탁해서 조국을 등지고 망명길에 오르는 과정에서 그의 고뇌는 그가 비판했던 <도널드 덕>의 나라를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상황이 수도 없이 펼쳐지리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묵시록적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짧은 리뷰로 아리엘 도르프만의 사변적 고민들을 다 담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비겁하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실수를 전가하지 않고 칠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1973년 9월 11일, 그가 자살했는지 아니면 군부의 총에 맞아 장렬하게 산화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중요하지 않다. 저자가 쓴 대로 극한 상황에 내몰린 아옌데가 자살보다 민주주의의 적들과 싸우다 죽었다고 믿고 싶었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지 모르겠다. 모든 순간의 선택이 생과 사를 결정하는 고뇌였던 시간을 다루면서, 동시에 이방인이었지만 진실로 칠레를 사랑했던 목격자의 시선이 이룬 문학적 성취는 기대 그 이상이었다. 올해의 발견으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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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9-27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유대주의로 인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된 유대인이 이로 인해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됩니다...

레삭매냐 2018-09-27 21:46   좋아요 1 | URL
바빌론 유수 이래 디아스포라는 유대인들의
숙명이 아닐까 싶네요.

고향을 떠난 방랑객이 되어 고유의 정체성
을 지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현지적응이라
는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보니 반대급부로
다양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지 않았나 생
각해 봅니다.
 

[독서일기] 2018926일 수요일

 

기나긴 명절의 끝을 달려가고 있다.

 

명절 때 이런저런 책을 읽어야지 싶었지만, 삶이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목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되는 대로 읽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좀 읽고 싶었으나, 껌딱지가 달라 붙어서 자신의 재량껏 나의 독서질을 방해했다. 영화도 <베를린 천사의 시>를 절반 정도(다 못봤다, 역시 흥미로웠다) 그리고 <공작>도 절반 정도 보고 말았다. 영화 보기는 마치 나의 책읽기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가 싶구나. 보다 말다 보다 말다하기 거듭하기.

 

그나마 도르프만의 <죽음과 소녀> 한 권을 읽어 다행이다. 이달에는 가능한한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많이 읽고 싶었지만 그 사이 사이에 이런저런 책들을 읽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아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였던가. 대신 사방을 다니면서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컬렉션했다. 책쟁이들에게 무한한 즐거움인 책사냥 말이다. 지난 금요일날 신촌에 가서 <체 게바라의 빙산>을 사들였고, 일요일에는 구월동에 가서 <죽음과 소녀> 그리고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도르프만의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을 샀다. 전자는 이미 읽어서 리뷰까지 작성했고, 후자는 오늘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재밌어서 진도가 쑥쑥 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작가의 아버지 아돌포는 러시아 오데사 출신 레닌주의자/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뮬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이었고, 그의 어머니의 탁월한 언어능력 덕분에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조국인 칠레, 아르헨티나 그리고 미국을 점프하며 사는 바람에 정체성에 문제는 없었을까.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사는 바람에 10년 동안 모국어인 스페인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깡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 못해서 안한 게 아니라 의도적이었던 게 아닌가.

 

1973911,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바로 그 때 죽었어야 했다는 작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계속해서 곱씹어 보게 된다. 사실 내가 이 작가를 읽게 된 것이 신문에서 접한 이 한 문장 덕분이 아니었던가. 작가가 칠레혁명 당시 아옌데 대통령 휘하에서 문화전사로 활약하던 당시 준비했다는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도 한 백쪽 가량 남겨 두었는데 이달의 작가로 선언한 만큼 부지런하게 읽어서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다.

 

, 그런데 이번 주말에 달궁 독서모임이 있었지. 대비해서 구해서 읽기 시작한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워터멜론 슈가에서>도 마저 읽어야 하는데. 이 책은 남미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케 하는 그런 요소들을 잔뜩 품고 있어서 그런지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물론 토요일 전에 다 읽긴 하겠지만... 분량이 적지 않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느닷없이 등장한 호랑이에게 부모님을 다 잃은 저자의 이야기, 아이디아뜨(I-DEATH)라는 요상한 이름의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데 쉽지 않다 쉽지 않아. 원래 생각 같아서는 브라우티건의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도 읽을까 했지만 다 글렀다. 뭐 책읽기가 원래 그렇지 않은가.

 

오늘 저녁에는 보다만 영화 <공작>을 마저 볼까 아니면 도르프만의 회고록을 더 읽을까 고민 중이다.


[뱀다리] 어제 저녁 나의 선택은 아리엘 도르프만의 회고록이었다. 지난여름 귄터 발라프의 발견에 이은 두 번째 쾌거라고 과언이 아닐 듯 싶다. 하마터면 밤을 셀 뻔 했다. 긴 연휴 끝의 출근인데 그러면 안 되지 싶어. 애써 잠을 청했다. 대단한 작품이다. 파괴된 칠레혁명에 대한 육성 증언이자, 스페인어와 영어 사이에서 오가는 분열적 이중생활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분석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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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소녀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명환.김엘리사 옮김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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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는 아리엘 도르프만을 읽겠다고 선언했지만 지지부진하다. 지난여름 로맹 가리 읽을 당시 좋은 기억만 가지고 덤벼들었다가 낭패를 봤다. 사실 도르프만 교수의 다른 책인 <체 게바라의 빙산>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1/3 가량 읽었나.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민주주의로의 이행 과정이었던 1992년 세비야 엑스포 빙산 출품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확 와 닿지가 않았다. 대신 <죽음과 소녀>는 역시 작가의 대표 희곡 작품답게 대단했다.

 

사실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 <죽음과 소녀>가 네 편으로 구성된 희곡집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서가에서도 소설이 아니라 희곡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다. 도르프만이 쓴 네 편의 희곡들을 보면서 정말 희곡으로 만들기에 최적화된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과부들> 외에는 정말 소수의 배우들과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연극으로 무대에 올리기에 적합하지 않은가. 사실 도르프만은 우리나라에서 소설가라기 보다 희곡가로 더 유명하지 않나 싶다. 요즘 맛을 들인 인스타에서 검색을 해보니, 연극 <죽음과 소녀>가 압도적으로 많은 검색물을 토해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연출로 이미 1994년 시거니 위버 주연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는 <죽음과 소녀>부터 읽었다. 라틴아메리카 모처라고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공간적 배경이 칠레라는 사실을.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모든 반대 세력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제압했던 군부는 의대생 파울리나 살라스를 납치해서 고문하고 강간했다. 십수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파울리나는 여전히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을 고문했던 그 의사는 고문 희생자들의 고통을 덜어 준다는 이유로 슈베르트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를 틀어 주었다고 했던가. 그 아름다운 선율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으로 각인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민주화 투사였던 파울리나의 남편 헤라르도는 변호사로 대통령의 위촉을 받아 과거 군부독재 정권 저질러진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조사 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내의 승인을 받을 거라고 말하지만, 예리한 파울리나는 그가 이미 대통령에게 위원장직을 승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세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짜 파열음을 외부에서 왔다. 헤라르도의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비치하우스에 사는 닥터 미란다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 준 것이다. 닥터 미란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파울리는 즉시 그가 그 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닥터 미란다를 포로로 잡고 권총으로 무장한 파울리나는 진실에 대한 그의 고백과 사과를 들어야겠다고 선언한다. 영화 트레일러를 보니 좀 더 격렬한 액션이 추가된 것 같은데, 원작은 지극히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게 침착하게 전개된다. 그만큼 파울리나의 과거의 사건에 대한 고통이 깊다는 반증이 아닐까. 당연히 포로로 잡힌 닥터 미란다는 자신이 무고하다고 주장하고, 변호사 남편 헤라르도 역시 이런 방식으로는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복수를 위해 군부정권이 저지른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긴 해도, 비록 선거로 권좌에서 물러나긴 했어도 여전히 칠레 민주주의 정권 하에서도 기소 면책권과 일정 지분의 정치적 권력을 가진 피노체트가 지휘하는 군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가 있었다. 파울리나의 주장 대로 왜 항상 약자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는가에 대해 작가는 처절한 질문을 던진다.

 

한편, 닥터 미란다의 주장 대로 전형적인 정신 분열증 증상을 보이는 파울리나가 과연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일까? 우리의 영리한 주인공을 그것을 대비해서 닥터 미란다가 빠져 나갈 수 없는 몇 가지 장치들을 준비해 두었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남편에게 들려주면서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을 던져 주었더니 닥터 미란다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러니까 그가 진범이었던 것이다. 작가가 구상에서부터 수년간 들인 공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멋진 장치가 아니었던가. 걸작이 걸작으로 칭송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과부들>도 남자들이 모두 잡혀가 버린 어느 마을의 과부들에 대한 이야기다. 군부를 상징하는 대위와 중위 그리고 군인들은 강가에서 수년 전에 잡혀간 남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소피아를 위시한 과부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과부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잡혀간 남자들이 살아 있다면 바로 석방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죽었다면 시체를 내주어 장례라도 치르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건 모두 군인들은 들어줄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이고, 아들이고 손자 그리고 연인이 아니었던가. 그나마 민주주의 시스템 아래서 정상적인 이성을 발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대위마저 과부들의 막무가내 주장에 진저리를 내면서 기존의 폭력적인 방식으로 항의하는 과부들을 해산시키려는 장면에서는 여전히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현대 칠레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다. 군부정권 아래 호의호식하며 권력을 농단했던 이들이 사회 기득권으로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칠레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네들의 상황은 해방 이후 일제 부역자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를 겪어야 했던 우리의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되었다.

 

한국을 상정하고 발표했던 <경계선 너머> 역시 비극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다른 작품과 궤도를 같이 한다. 공간적 배경은 수십 년 째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국경 도시다. 5천 명에 달하는 전쟁 희생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매장하는 일을 하고 있는 아톰 로마와 러바나 줄렉 그리고 국경 수비대원이 차례로 등장한다. 마침내 전쟁은 끝났지만, 냉정한 군인은 부부의 집을 경계선으로 갈라 버린다. 전쟁 중에도 피아 구분 없이 지내던 부부가 졸지에 이산가족이 될 판이다.

 

모든 것을 소멸시켜 버리는 전쟁의 참혹함 그리고 인도주의적 사고 대신 그저 관료적 방식으로 국경선을 긋고 분단시켜 버리겠다는 군인의 등장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군인의 존재가 원래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던가. 현대 사회의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원래 존재의 목적 대신 자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존재로 탈바꿈한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고 나면 새로운 사실들이 쏟아지는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사법농단이 가져올 사법시스템 전체에 대한 불신을 앞으로 어떻게 해소하겠다는 건지 해당 책임자들은 전혀 관심도 없었겠지. 내가 낸 세금으로 그런 이들에게 월급과 연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도르프만은 <죽음과 소녀>와 마찬가지로 <경계선 너머>에서도 일종의 미스터리로 내러티브에 감칠맛을 첨가한다. 예의 군인이 오래 전에 부부의 곁을 떠난 아들 요셉이라는 설정이다. 부부는 그와 이야기를 할수록 그가 그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만, 다시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인이 또다른 전쟁의 희생자가 되면서 그 사실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역시 작가는 열린 결말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마지막의 <연옥>은 읽기는 했는데 너무 모호한 이야기여서 좀 헷갈렸다. 아마도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 만난 두 남녀가 나누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후기에 실린 <이아손과 메데이야> 전설이 연상되었다. 아무래도 앞에서 읽은 세 이야기와는 결을 달리 하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보니 나는 칠레 출신 작가들을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모양이다. 루이스 세풀베다를 필두로 해서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들을 제법 많이 읽었다. 이번에는 생소한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도 읽게 되었다. 그전에 읽은 다른 칠레 작가들 덕분인지 조국 칠레와 제2의 조국 미국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는 작가의 저술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게 다가왔다. 중고서점에서 <죽음과 소녀>를 사면서 같이 산 그의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도 읽어봐야겠다. 아 그전에 먼저 영화 <진실>부터 봐야 하나. 다시 생각해 봐도,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도 진실과 화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하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모든 문제에 책임 있는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피해자들에게 사죄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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