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바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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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리어 왕>이다. 지난 주말에 요 네스뵈가 쓴 <맥베스>로 호가스 셰익스피어 다시 쓰기 시리즈를 접하고 삘이 온 모양이다.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이번에는 <던바>를 빌려서 읽었다. 얼마나 재밌는지,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아무래도 이 시리즈의 팬이 될 모양이다.

 

요즘 패트릭 멜로즈 시리즈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이라는 우리에게는 낯선 작가지만, 영국에서는 한 자락하는 작가라고 한다. 구구절절하게 던바 트러스트라는 미디어 제국을 세운 헨리 던바가 어떻게 해서 자신의 딸인 애비게일과 메건에게 밀려났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바로 정신 병원에서 출발한다. 올해 여든 살의 노익장을 자랑하는 캐나라 출신 헨리 던바는 야심찬 딸들에게 강제로 제국의 수장 자리에서 퇴위되어 유폐된 운명이다. 유산상속에서 내쳐진 막내딸 플로렌스만이 자신을 찾아 나선다.

 

맨체스터의 고립된 요양원에서 희극 배우 피터 워커의 도움으로 탈출해서 자신의 제국을 회복하려고 하지만, 딸들의 추적은 집요하다. 특수부대 출신 경호원들로 구성된 추적대가 폭풍우와 폭설이 몰아치는 영국의 황무지를 누빈다. 형편 없이 추락한 처지에서 보니, 돈의 노예가 되어 성공만을 추종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만, 절망에 빠지고 요양원에서 피해망상 때문에 주입된 다량의 약물 탓인지 가끔씩 착란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에 헨리 던바는 좌절을 겪는다. 오로지 자신의 딸들이 수십 년 동안 자신이 공들인 던바 트러스트를 인수하지 못하는 게 막는데 전력을 다한다. 플로렌스는 사랑으로 아버지를 쫓지만, 애비게일과 메건은 아버지를 다시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기 위해 추적한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진실이란 말인가.

 

양쪽 모두 충실한 조력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전자는 오랫동안 측근 변호사로 제국 건설에 일조한 윌슨과 그의 아들 크리스가 버티고 있다. 후자는 던바의 주치의이자, 두 딸의 노예 같은 존재 닥터 밥이다. 전자가 세상의 미덕을 대표하는 선수들이라면, 후자는 악덕의 화신이다. 닥터 밥은 두 딸이 요구하는 기괴한 성적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헨리 던바를 정신 이상으로 요양원에 가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막대한 보너스와 상당한 양의 스톡옵션도 덤으로 얻었다. 문제는 던바 트러스트를 합병하려는 라이벌 유니컴에게도 정보를 흘려 양쪽을 배신했다는 점이다. 이런 악당에겐 신의나 양심 따위는 전혀 필요없다, 오로지 자신의 계좌에 찍히는 숫자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헨리 던바는 정신을 되찾은 뒤 플로렌스를 유산 상속에서 제외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점에 대해 사과하고, 자신에게 충실하게 봉사해온 윌슨을 해고한 사실에 대해 잘못을 인정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왕좌를 찾기 위해 도전에 나선다. 정신 병원을 탈출했을 때, 그를 유지해준 것이 분노와 복수심이었던 것처럼 애비게일과 메건을 응징할 차례다. 문제는 이제 간신히 화해한 플로렌스를 기다리고 있는 비극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많이 접해 보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이 대가는 희극보다 비극에서 더 진가를 발휘한다는 느낌이다. 왜 우리 인간들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걸까? 나이가 여든이 되어서도 손에 든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속세에 미련을 둔 헨리 던바의 모습이 어찌나 그렇게 쓸쓸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수십억 달라의 재산 그리고 40만 명이나 되는 직원을 거느렸던 권력자의 말년이 얼마나 초라하게 무너졌던가. 그들이 그렇게 원하지 않았던 추악한 권력 투쟁은 던바 가문을 그야말로 초토화시켜 버렸다. 그런데 그 원인제공자 역시 헨리 던바였다.

 

애비게일과 메건을 혹독하게 교육한다며, 계승 과정에서 제외시켰던 사건은 그대로 자신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전 세계에 화려한 미디어 제국을 건설하면서 자신의 불륜을 합리화시켰고, 자녀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애비게일과 메건이 패륜적 악녀들로 거듭나게 된 것에 대해 그의 책임은 없었던가? 플로렌스의 진심을 몰라주고 자신이 건설한 제국에서 쫓아난 것도 결국 자신의 오판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가 던바에게 돈을 요구했던가?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천박한 자본가의 모습이 얼마나 처연하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셰익스피어가 500년 전에 구성한 영국식 막장드라마의 주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다가온다.

 

<던바>의 말미에서 역자가 요약한 원작은 훨씬 더 큰 스케일의 비극으로 끝나지만, 천신만고 끝에 제국을 되찾는데 성공한 던바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개인적 비극과 직면하면서 끝을 맺는다.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은 어쩌면 그렇게 현대극에 걸맞는 상황에 <리어 왕>을 집어넣었는지 경탄할 지경이다. 정신 병원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한겨울의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추격전으로 독자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기도 하고, 주인공 던바의 치명적 실수와 판단착오에 대한 회한으로 감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요 네스뵈의 <맥베스>에서도 그랬지만, 이 시리즈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2편을 읽었지만, 셰익스피어 시리즈를 위해 호가스 관계자들이 선택한 작가들의 역량은 기대이상이었다. 다음 주자는 어떤 책으로 정할지 벌써부터 기대감에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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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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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년 만에 다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을 읽었다. 내가 처음으로 읽은 요사 샘의 책이다. 그리고 그 후에 바로 그의 팬이 되었다. 그게 벌써 9년 전의 일이로구나. 원래 가지고 있던 책은 어느 행사에서 다른 이에게 주었고, 어제 중고로 다시 샀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요즘 계속해서 무언가 재밌는 책이 읽고 싶었는데, 요사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는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그런 책이었다.

 

1950년대 중반, 페루 아마존 지역의 이키토스란 곳에서 사단이 벌어진다. 국경 수비를 위해 젊은이들을 변경에 배치하다 보니, 섹스에 굶주린 청년들이 인근 마을의 아낙네들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페루의 수도 리마에 있는 고명한 전략가들은 부대원들을 위해 비밀리에 특별봉사대를 만들 것을 결의한다. 그리고 그 책임자에 최근 중위에서 대위로 진급한 전도유망한 병참부대 소속 행정장교 판탈레온 판토하(판티, 판타, 판티타 등으로 불린다)를 임명한다. 이런 황당한 특별임무를 스카비노 장군과 군종 벨트란 신부/중령은 결사반대하지만 군대가 어떤 곳인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곳이 아닌가. 그렇다면 좀 덜 유능한 인사를 했어야 했는데, 삼 대째 군문에 종사하는 판탈레온은 지나치에 유능했다.

 

그 결과, 판타 대위는 자신의 특기를 발휘해서 엄청난 과업을 수행하는데 성공한다. 우선 8,700명에 달하는 사병들의 한 달 욕구를 10만 번으로 추정하고, 특별봉사대원을 수급하는데 나선다. 이키토스 사창가의 짱꼴라 포르피리오를 비롯한 추추페 하우스의 마담과 젖빨개들을 동원해서 우선 4명의 인원을 선발하고, 점차 증원에 나선다. 특별봉사대원들은 봉사대원들대로, 그리고 마침내 욕구를 발산할 수 있게 된 사병들의 환호는 대단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얼핏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블랙유머를 적절하게 배합하고, 탄탄한 스토리라인으로 힘차게 이끌어 나간다. 때로는 대화체로, 때로는 판타의 아내 포치타의 구구절한 편지사연으로 또 냉정하면서도 웃음이 넘치는 판타 대위의 군내부 보고서를 이용한 이야기는 정말 포복절도할 만하다.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굴러 간다면, 다른 한 쪽에서는 아마존 민중의 마음 속 깊숙하게 침투한 이단 프란시스코 형제에 대한 흑마술이 대기하고 있다. 십자가 고난을 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겠다는 프란시스코 형제의 추종자들은 개구리와 도마뱀, 원숭이 같은 동물을 십자가에 못을 박다가 드디어는 멀쩡한 사람들을 못 박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면, 특별봉사대와 프란시스코 형제를 추종하는 방주 형제단의 실체는 비슷하지 않은가. 인간의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뇌를 덜어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심지어 평소에 종교와 거리를 두던 판타의 어머니 레오노르 여사까지도 아이 순교자의 기도문을 외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철저하게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특별봉사대 사업에 나선 판타는 너무나 효율적이고 유능했다. 특별봉사대원 역시 예전의 포주들에 비해, 일이 고되긴 했지만 자신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판타의 모습에 감동받기도 했다. 특별봉사대원들의 서비스에 대한 소식이 아마존 정글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일반 사병들뿐만 아니라 하사관과 장교들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를 성적 타락과 방종의 증거라고 본 벨트란 신부 아니 중령은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결국 군복을 벗기도 했다. 아마존 라디오를 진행하는 신치라는 DJ는 여론을 부정적으로 조성하겠다며 판타를 협박해서 뇌물을 뜯기도 한다. 한편, 이키토스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술과 여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판타는 추추페 하우스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아내 포차의 말대로 그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말해, 너무 군이 자신에게 부여한 임무에 충실하다 보니 진짜 본업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 것이다. 사실 그가 하는 일이 매춘알선과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아마존 정글을 배경으로 해서 인간의 들끓는 욕망을 그대로 독자들의 마음에 각인하는 작업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판타가 최고의 특별봉사대원 미스 브라질올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제 아무리 규율과 명령, 명예와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군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역시 욕망 덩어리인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키토스에 부임한 초반까지만 해도 그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아내 포차를 탐하면서 후끈한 열기와 습한 기후 탓을 해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격적인 무대를 위한 사전작업일 따름이었다.

 

비행기와 선박 그리고 최신 통신시설까지 갖춘 판티랜드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진정한 군인인지 아니면 실력 좋은 포주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정체성 위기를 겪는 장면이야말로 이 소설에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병사들의 생리 욕구를 해소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개발해 놓고서, 비밀리에 추진하면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던 이율배반적인 페루 군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일 지도 모르겠다. 이단 방주 형제단을 따르는 민중 심리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덧붙여지지 않으면서 균형을 잃은 점이 좀 아쉬웠다. 결국 올가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특별봉사대가 공중분해되고, 판타의 실력을 인정한 추추페 사람들이 판타에게 군을 떠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자는 제안은 정말 최고였다. 그야말로 토박이 업자들도 인정한 실력이 아닌가!

 

오랜만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책을 읽으니, 그동안 사두고 미처 읽지 못했던 그의 다른 책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후 작품들은 국내 출간이 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모두 절판된 초기 작품들에도 관심이 많은데, 아무래도 국내출간은 어렵겠지 싶다. 너무 오래 전에 나온 책들이라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도 도통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1993년에 발표된 <안데스의 리투마>란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영문판이라도 구해서 읽어야 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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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0-11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거의 9년동안 눈독만 들이고 있었던 것 같은데... 특별봉사대가... 이런 특별봉사대였군요.ㅋㅋ

레삭매냐 2018-10-11 10:50   좋아요 1 | URL
어디선가 읽어 보니 좌파인사였던 요사 샘이
이 책을 기점으로 해서 우파로 변신하기 시작
했다고 하는군요...

그전에는(1960년대) 상당히 좌파 스타일의 글
들을 발표했었다고 하는군요. 그 시절 책들은
도대체 구할 수가 없네요. 그리하여 책바다 서
비스를 이용해 보기로 했답니다 :> 자그마치
청주도서관에서 !!!

다시 읽어도 너무 재밌었습니다.
 
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 마젤란펭귄과 철부지 교사의 우연한 동거
톰 미첼 지음, 박여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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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의 존재를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책 소개 글을 통해 알게 됐다. 네 컷의 동영상을 통해 펼쳐지는 개략적인 소개에 그만 빠져 버렸다. 당장 사거나 빌려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은 예약판매 중이고 도서관에는 모두 빌려가서 없더라. 그런데 왜 하필 펭귄이었을까? 우리집 테라스에 멍멍이나 야옹이가 사는 이야기를 썼다면 아마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펭귄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보기 쉬운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이 간 거다. 그런 점에서 톰 미첼 작가의 홍보 전략과 타이틀은 정말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잘 모르는 작가라면 독자를 낚을 수 있는 타이틀이 중요한 법이니까.

 

영국 출신 나는 뼛속까지 제국주의자였던 러디어드 키플링의 모험담을 듣고 자라났다. 나의 어머니는 한 때 악어를 키우기도 하셨다고 한다. 젊은 날, 저 멀리 아르헨티나에서 기숙학교 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말할 필요 없이 모험을 향해 떠날 수가 있었다. 군 출신 페론 대통령이 통치하던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정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거리에서는 폭력 시위가 넘쳐났고, 납치와 유괴가 횡행하던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저자는 친구의 호의로 이웃나라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아파트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그 때 바닷가에서 청어 떼를 쫓는 펭귄들을 목격한다. 얼마 뒤, 충격적이고 비통한 장면을 목격한다. 기름 때에 절어 죽은 수천 마리의 펭귄 사체더미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 북새통에 살아남은 마젤란 펭귄 후안 살바도르를 만나게 된다.

 

타르로 그냥 놔두면 죽을 펭귄을 숙소로 데려와 잘 씻긴 다음, 다시 바닷가로 돌려보내려 하는 작가의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결국 녀석을 데리고 아르헨티나로 돌아와야 했다. 저자는 버스에서 만난 가브리엘라에게 오해를 받아 가며(녀석의 실례 때문에), 군사쿠데타로 가뜩이나 예민한 아르헨티나 세관원의 뇌물 공여 요청을 거부해 가면서 후안 살바도르를 무사히 자신이 근무하는 세인트 조지 학교로 데려 오는데 성공한다. 녀석은 청어를 좋아하는 타고난 사냥꾼이자, 사람들의 애정을 한 눈에 앗아가는 너그러운 성직자 같은 모습과 매력으로 만인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저자 톰 미첼은 이야기의 다른 한 축에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의 실정을 배치한다. 영국인들은 포클랜드로 그리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말비나스라고 부르며 전쟁까지도 불사한 바 있는 예민한 정치적 주제를 거론했다가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싸우게 된 일화는 물론이고, 가히 살인적인 당시 인플레이션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진술한다. 군부는 정치권력을 장악했을지는 몰라도 역시나 민간 부분인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누군가 손해를 보면, 누군가에는 득을 보지 않았던가. 세인트 조지에서 산타 마리아라 불리는 친절한 세탁 담당 아주머니 같은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으로 고통 받고, 대신 대지주와 자본가들만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번영을 구가했다고 저자는 조용하게 알려준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후안 살바도르를 자연에 풀어 주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황무지를 선배 체 게바라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누비다 맞닥뜨리게 되는 장면을 이 소설 최고의 한 컷으로 꼽고 싶다. 초반에 마젤란 펭귄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이유가 환경오염과 무분별한 남획이라고 했던가. 저자는 아르헨티나 동물원에 후안을 데려다 주려던 계획은 인간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동물들의 실태를 보고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세인트 조지에서 후안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낫다는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여행 중에 볼리비아 포토시를 찾은 경험담도 인상적이다. 소매치기를 당해 하는 수 없이 지역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했다지 아마. 돈 몇 푼에 기꺼이 잠자지를 내주는 호의에는 감사했지만, 자신과 그들 그리고 여기저기서 나는 냄새 때문에 도저히 같이 잠을 자지 못하고 한데서 잠을 자려다가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는, 언젠가 들은 미국 출신 아프리카 선교사들이 다른 건 몰라도 물 부족으로 마음대로 샤워를 하지 못해 결국 선교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모든 게 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았겠지만, 우리의 핑귀노 후안은 저자가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그만 죽었다고 한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 무언가 끝내주는 특별한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그런 건 사실 없었다. 23살의 젊은이 눈에 비친 테러와 폭력이 백주대낮에 횡행하는 불안한 아르헨티나 정정에 대한 기술도 깊이는 없었고, 피상적인 관찰이 주를 이룬다. 혹독한 군부독재에 대한 상세한 리포트를 기대했는데 좀 아쉬웠다. 예상한 대로 마젤란 핑귀노 후안 살바도르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더라는 이야기 블라 블라. 이십대 영국 출신 젊은이가 무언가 새롭고 특별한 경험을 찾아 제3세계를 찾았다가 만난 마젤란 펭귄과의 스토리는 과연 책으로 엮어낼 만한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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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맥주 여행 - 맥주에 취한 세계사
백경학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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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맥주를 마셔 왔다. 옥토버훼스트(Oktoberfest)를 운영하는 업자인 저자처럼만큼은 아니겠지만 맥주에 대한 사랑도 대단하다. 역시 최고의 추억은 뮌헨에 가서 호프브로이하우스와 뢰벤브로이에서 실컷 술을 마신 기억이지 싶다. 사실 에일 맥주와 라거 맥주의 차이도 잘 모르고 그냥 마셔댄다. 이유는? 그냥 좋으니까. 집에도 그롤쉬(저자는 ‘흐롤스’라고 부르더라) 500ml 한 캔이 있는데 어제 마시려다가 참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셔야지 싶었는데, 그전에 사둔 오다리랑 함께, 그만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오늘 집에 가서 마셔야지.

 

고대 이집트까지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맥주는 정말 서구 문명에서 빠질 수 없는 그런 재화였다. 병사들의 급여로도 지급이 되었고, 고된 노동을 한 노동자들에게는 영원같은 안식을 주기도 했다니 말이다. 지금도 불토면 가끔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을 고대 이집트의 센스 있는 작가들은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단다. 물론 당시의 맥주는 지금의 그것과 같이 깔끔한 것이 아니라 거의 죽 같은 수준이었다나. 중세에는 수도원에서 거의 맥주 생산을 독점하다시피 했다고 하는데, 지금 같은 대량생산이 가능하지 않아 수도원마다 맛이 다 틀렸다고 한다. 지금도 벨기에에서 생상되는 트라피스트 맥주인가는 정말 대단한 맛이라고 하는데, 맥주 애호가로서 한 번 맛을 보고 싶기는 하다.

 

맥주의 초창기에는 보리와 효모 그리고 물로만 빚었다고 한다. 맥주의 쌉쌀한 맛을 내는 홉을 첨가하기 전까지 그루트라는 갖가지 향신료를 맥주에 넣어 빚는 시도를 했다고 한다. 현대 맥주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는 일찍이 맥주 순수령을 포고하여, 보리와 효모, 홉 그리고 물로만 맥주를 만들라고 했다던가. 그리하여 지금도 독일에서는 위의 네 가지만으로 만든 맥주만을 최고로 친다고 한다. 상면 혹은 하면 제조법도 있다고 하는데, 맥주 애호가라고 하긴 하지만 그런 차이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자.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천편일률적인 오비나 카스 맥주 외에도 소규모 브루어리에서 만드는 수제 맥주가 인기라고 한다. 다만 가격이 일반 대중 맥주와는 좀 차이가 있어서 마음껏 마시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오래전에는 돈이 없어서 맥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버드와이저랑 밀러 라이트가 들어와서 겉멋으로 마셔 보았는데 영 그렇더라. 나의 진짜 맥주 시음기는 IPA(India Pale Ale)의 시발점이 아니었을까. 난 좀 더 쌉쌀한 맛이 좋다. 그러니까 독일에서 출발한 라거보다는 영국식 에일 맥주가 더 마음에 든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맥주는 샘 애덤스 IPA다. 인도를 식민지배한 영국 사람들이 고향에서 맛보던 맥주맛이 그리워 아열대지방에서 맥주를 제조하기 위해 홉을 더 첨가해서 쌉싸름한 맛의 맥주를 만든 게 시초였다고 하던가. 아니면 본국에서 만든 맥주통을 배에 싣고 적도를 두어번 오가면서 오크통에서 오묘한 맛이 생겼다는 썰도 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독일 뮌헨에 가서는 히틀러가 폭동을 선동하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는 호프브로이하우스에도 가서 맥주를 마셨다. 거기서는 기본이 1,000cc였다. 아침에 뮌헨 시장에 가서 보니 아침부터 어떤 아저씨가 맥주통 위에 당당하게 1,000cc 한 조끼를 걸치는 장면에 감탄하기도 했다. 아, 이 동네에서는 이렇게 마시는구나 싶었다. 뮌헨중앙역 부근의 뢰벤브로이에서는 디즈니 캐슬 투어를 함께 한 여행 동료와 거나하게 취하기도 했었지.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는 홍대 부근에서 다시 만나 필즈너 맥주를 신나게 주고받고 그랬더랬지. 그게 벌써 십년 전 이야기로구나.

 

영국의 펍(pub)과 독일의 켈러(keller)라는 공간이 단순하게 술을 마시는 장소가 아닌 동네 사교의 장이라는 점에 대한 저자의 저술도 마음에 들었다. 도시화는 다수의 익명성을 보장하기도 하지만, 개인주의적 공동화를 부추기는 점도 있지 않은가. 서구 유럽사회의 유구한 지방자치제 역사는 어쩌면 이런 펍과 켈러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의 현안과 갈등해소를 바탕으로 했던 게 아닐까. 상처 받은 영혼들이 힐링을 쫓아 공허한 디지털 공간을 누비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요즘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맥주들이 마트에 차고 넘친다. 예전에 저장시설이 일천하던 시절에는 오크통으로만 운반이 가능했었다고 하는데, 병맥주와 캔맥주가 차례 대로 개발되면서 전 세계로 맥주의 유통이 가능해지는 신세계가 펼쳐졌다. 이 책을 통해 몰랐던 사실 하나는 편의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체코 맥주 필즈너 우르켈(오리지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이 일본 아사히 맥주에게 팔렸다는 점이다. 아사히 맥주는 전범기업에서 만든 술이라고 그동안 나의 맥주 구매목록에서 제외했었는데, 그럼 이제 필즈너 우르켈도 역시 같은 이유로 배제해야 하나 싶다. 그럼 이제 안녕 필즈너!

 

이번 달이 10월인데, 맥주의 본고장 독일 그중에서도 뮌헨의 옥토버훼스트에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 기네스의 고향 아일랜드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저자가 받은 현지 사람들의 환대도 너무 부러웠다. 종교개혁의 기수 마르틴 루터도 ‘마시는 빵’ 맥주를 사랑했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술 마시는 건 좋지만, 자제의 미덕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종교개혁가는 강조한다. 양조전문가(brew master) 부인이 빚은 맥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던 종교인이 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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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0-05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아침부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레삭매냐님...ㅋㅋㅋ
저 얼마전에 읽은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 읽으면서 맥주 공부좀 했더랬죠.
그냥 일상의 음료로 마시던 맥주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더라구요. ㅎㅎ
더 추워지기전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하게 맥주 한잔 하고 싶네요! ^^

레삭매냐 2018-10-05 13:19   좋아요 1 | URL
근데 지금 설해목님은 금주 내기 중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ㅋㅋㅋ

일상의 음료에서 그만 빵~ 터져 버렸습니다.

맥쥬가 일상의 음료였군요 !!! 아 당장 마시고잡다.

2018-10-05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10-05 10:26   좋아요 1 | URL
말씀해 주시니,,,

역시 술의 최고봉은 낮술이 아니겠습니까.

오래전 선배들의 귀여움을 받고자 까만봉지
에 맥쥬병들을 잔뜩 싣고 짤랑 짤랑 소리를
내며 교정을 누비던 생각이 나네요.

그땐 그랬지하고 말이죠.

syo 2018-10-05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뭐랄까,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만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는 문장에서 어쩐지 오래 멈추게 되었습니다. 뭔가 숭고한 순간이다....

레삭매냐 2018-10-05 10:27   좋아요 0 | URL
마저 다 읽고 싶었으나,
의지가 바디의 욕망을 누르지 못했습니다.

뭐 그랬습니다.

moonnight 2018-10-05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앜 필스너 우르켈이 아사히에 팔렸나요? 몰랐네요. 제일 좋아하는 맥주인데ㅠㅠ; 글을 읽으니 또 맥주 생각이 나네요. 아침의 맥주를 좋아하는데 슬프게도 근무 중 ㅠㅠ

레삭매냐 2018-10-05 13:19   좋아요 0 | URL
어스름한 모닝 맥쥬의 추억 캬하 ~

비내리는 데 술 생각이 절로 나네요.

psyche 2018-10-05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은 지금 아침이지만 여기는 저녁이라... 저녁 먹으면서 맥주 한잔 하던길에 한 잔 더 하면서 북플을 열었다가 맥주에 대한 글을 보니 반갑네요 ㅎㅎ 아주 오랫동안 라거만 좋아했는데 한번 에일에 맛들이니 에일만 마시게 되네요. 저도 언젠가 유럽에 가서 맥주 투어를 하고 싶어요.

레삭매냐 2018-10-05 13:2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나중에 유럽에 다시 가게 되면
비어 투어에 나서야할까 봅니다 :>

저도 라거만 마시다가 에일 맛을 들으니
라거 맛이 싱겁게 느껴지더라구요.

cyrus 2018-10-05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독서모임에 활동하셨던 분이 일본 라멘 겸 맥주 파는 가게를 차렸어요. 이름이 ‘투찬스’에요. 대구에 오신다면 여기에 꼭 가보셔요. 이 곳 사장님이 전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맥주를 마셔 봤을 정도로 맥주 덕후에요. 좋은 맥주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한 분이에요. ^^

레삭매냐 2018-10-05 13:23   좋아요 0 | URL
싸이러스 브로의 소개를 듣고 대구 투찬스
검색해 보았습니다. 멋지네요. 언젠가 대구
에 가게 되면 방문해 보는 것으로...

일본에 갔을 적에 점심 때 사람들이 거의
무조건 식사 주문하고 큰 맥주병 하나씩
비우는 거 보고는 깜딱 놀랐습니다. 일본
은 이렇구나 하고 말이죠.

라멘에 코히비루라, 묘한 조합일 것 같습니다.
 
참 잘했어요 - 거짓일지라도 나에게는 꼭 필요했던 말
박광수 지음 / 메이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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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궁금했다. 이십여 년 전, C일보엔가 연재하던 <광수생각>을 즐겨 봐서 그랬던가. 당시 광고업계에서 일하던 친구가 <광수생각>의 광수와 실제 광수와 차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연재읽기를 접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사랑타령은 이혼으로 빛이 바랬고, 불우이웃 돕기 역시나 자기만족적이라는 비판 때문이었을까. 환호가 냉담으로 바뀌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났다. <광수생각>의 광수는 바뀌었을까라는 생각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는 힐링과 위로하며 살아야 한다는 문구가, 특히나 인스타그램에는 넘쳐흐르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에 상처를 그렇게 입고 살아가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생살이가 녹록하지 않다는 건,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란다. 그것도 사회생활 초년기에나 가능한 일이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부양할 가족이 생기면 전혀 가능하지 않은 선택지가 된다. 어제 읽은 줄리언 반스의 책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바로 돈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몰라도 대개의 사람들은 그놈의 돈 벌다 세월이 갈 판이다.

 

반세기를 살아오며 이런 저런 세상풍파를 체험한 광수 씨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세상살이가 팍팍해졌을 때, 그에게 야구가 탈출구였던 것처럼 마음껏 자신을 소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을까? 그런데 야구가 스포츠 중에서 제법 비용이 많이 드는 스포츠라는 건 알고 있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려고 해도 돈이 필요한 법이라는 것이다. 아이 또 돈 타령이네...

 

야구하면 나도 한 타령할 수 있는데. 예전에 엠엘비의 보스톤 레드삭스를 열렬하게 응원했었다. 물론 지금도 팬이다. 2004년 우승의 저주를 풀기 전까지 얼마나 혹독한 시련들이 있었던가. 바로 전해인 2003 ALCS 7차전에서 영원한 숙적 양키즈의 애런 분에게 통한의 끝내기 홈런을 맞고 역전패당하던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오늘 2018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오클랜드를 꺾은 양키즈와 다시 ALDS에서 숙명의 라이벌전을 치르게 된다고 한다. 부디 초전에 박살내 주길! 웃기는 건, 예전에 돈키스라며 돈으로 우승을 산다던 보스톤이 엠엘비에서 가장 돈을 많이 쓰는 팀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블 엠파이어(evile empire)란 별명은 이제 양키스보다 레드삭스에게 더 어울리는 별명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가다 보면, 상황이 역전되는 법이긴 하지.

 

자존감을 상실해 가는 현대인들을 위한 에세이집에서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에피소드는 바로 파타야 코끼리 투어가 아니었을까. 까만 마음으로 푸켓 대신, 여성들이 득시글거릴 것으로 추정되는 파타야로 갔다가 졸지에 아이들 보모 신세로 전락하고 코끼리 트래킹에서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친구와 함께 코끼리들을 힘들게 했던 전과자들의 이야기에서 정말 빵빵 터져 버렸다. 그들을 태우기 위해 맘모스급 코끼리들이 등장하고, 가뿐하게 일어나는 동시에 엉덩이에서 볼링공만한 끙아들이 나왔다는 이야기, 흥겨운 스토리가 아닐 수 없었다.

 

미슐랭 가이드에 나오는 별점 이야기도 흥미롭다. 요즘 어디서고, 가성비가 최고라는 맛집투어를 하고 올라오는 사진들이 인기다. 왠지 그런 곳의 사진을 보거나, 텔레비전 방송 혹은 입소문을 들으면 가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곳들을 찾아가 보면 대부분 실망하기 마련이다. 한 마디로 말해 초심을 잃게 된 곳이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다 보니 아무래도 줄서기와 불친절한 서비스는 기본이다. 내 돈 주고 가서 그런 곳에 가서 대접을 받는다니, 믿을 수가 없더라. 그래서 나는 그런 곳은 가지 않으련다. 예전에 추운 가을바람을 맞아 가며 군산 짬뽕맛을 보겠다며 기다린 나의 어리석음을 통탄할 따름이다.

 

광수 씨와 더불어 세월을 헤쳐 오다 보니, 그 옛날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그런 기분은 들지 않더라. 한 컷의 만화로도 오랜 여운이 가는 그런 느낌이 들곤 했었는데, 이젠 세월과 함께 다 휘발되어 버린 그런 느낌이다. 그동안 어디에서 무얼 하면서 사는지 몰랐었는데 여전히 그림 그리고 책내고 그리고 강연회도 다니는가 보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아,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제발 250만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느니 하는 광고는 자제해 주시길. 사골도 고만 우려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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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4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10-05 09:19   좋아요 0 | URL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입니다.

특히나 일관성은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대장물방울 2018-10-05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의외다 했더니 역시나로.

레삭매냐 2018-10-05 09:20   좋아요 0 | URL
the class does not change, thoug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