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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위한 홀로그램
데이브 에거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KSA(한국 학생회가 아니라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의미한다, Kingdom of Saudi Arabia)에 사업을 위해 들른 미국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앨런 클레이, 나이는 54세. 한 때는 자전거 제조업체 슈윈의 유능한 영업사원이었다. 미국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절, 그의 성공과 영화는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던 때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영원한 게 있었던가. 미국 제조업의 몰락과 더불어 슈윈의 자전거 사업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앨런은 유연한 노동시장을 찾아 회사의 본거지 시카고에서 미시시피로 그리고 다시 헝가리와 중국/대만으로 값싼 노동력을 찾아 떠났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노조파괴자였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회사에서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 역시 해고대상이었다.
아내 루비와 이혼하고 만성 채무에 시달리며, 딸 키트의 학자금 확보가 발등에 떨어진 앨런 클레이가 왜 이 시점에서 사우디 아라비다의 제다에서도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KAEC(킹 압둘라 경제도시)의 PT 텐트에 와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천국보다 낯선 곳에서 매사추세츠 보스턴 출신 데이브 에거스의 소설 <왕을 위한 홀로그램>이 시작된다.
소설에 보스턴 출신 앨런 클레이의 회상 부분에 액턴, 데댐이니 자메이카 플레인 같이 익숙한 지명들이 등장해서 더 반가웠다. 문득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 위키피디아를 뒤져 보니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보스턴에서 1970년에 태어난 데이브 에거스의 부모님은 변호사와 학교 선생님이셨다. 아마 유복한 가정환경을 지녔겠지.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1991년과 1992년에 각각 뇌암, 폐암 그리고 위암으로 돌아가시게 되면서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이런 과정은 자신의 데뷔 소설에 담은 모양이다. 그 책도 읽고 싶어졌다. 이런 작가의 내력을 읽어 보니 <왕을 위한 홀로그램>에 등장하는 딸 키트에게 수시로 보내는 편지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가 있었다. 관계의 회복이라고나 할까.
다시 KSA로 돌아가 보자. 실제로 킹 압둘라의 희망사항대로 사막에 석유를 의존하지 않는 자립자족적인 경제혁신도시를 짓자는 구상은 7개 중에 유일하게 KAEC만 현실화되었다. 소설에 유머처럼 등장하는 현대판 파라오, 킹 압둘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에 최첨단 기술을 도입하고 싶어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미국의 최신 기술을 가진 릴라이언트 사의 홀로그램 기술이 요청되었고, 1인 컨설팅회사를 근근히 꾸려 나가는 앨런 클레이가 와의 조카와의 실낱같은 인맥을 동원해서 프리젠테이션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됐다.
문제의 사우디의 관습이 미국의 사업체 간에 이루어지는 그것과 상이하다는 것이다. 사막의 텐트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왕을 기다리는 시간들이 이어진다. 이미 첫날부터 사막행 셔틀을 타지 못해, 미국 유학경험이 있는 청년 유세프(요셉, 성서에 등장하는 바로 그 구원자로다)가 운전하는 다 낡아빠진 차를 타고 KAEC로 향한다. 중간중간에 자신의 고된 삶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회사를 위해 노조파괴에 나섰다가 자신마저 해고당한 아들을 경멸하는 아버지 론의 이야기, 음주운전으로 딸에게 창피를 산 패기 넘치는 와이프 루비에 대한 에피소드 등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아, 이웃의 초절주의자 찰리 팰런이 긴급출동한 구조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천히 호수에서 익사한 이야기도 나왔던가. 집도 팔려고 내놨는데 집을 보러 온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지 아마. 정말 웃겼다.
25P 집 안의 유령 같은 존재가 있어요, (데이스 에거스 식 유머의 폭발)
<왕을 위한 홀로그램>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주인공 앨런 클레이 역은 탐 행크스가 맡았다. <다빈치 코드>에서는 미스캐스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제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소설도 다 읽었으니 영화를 볼 차롄가. 소설을 읽는 동안 왜 자꾸만 정말 오래 전에 본 영화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이 떠오르지 모르겠다. 느낌이 비슷하달까. 덴마크 출신 매력적인 여성 하네 그리고 자가수술한 지방종/종양을 집도한 닥터 자라 하켐과 아슬아슬한 관계에까지 가지만 중년남자의 욕망을 쉽사리 불이 붙지 않는 모양이다. 너무 많은 걱정거리를 껴안고 있어서였을까. 홍해 바다에서 하켐 박사와 스노클링하는 장면은 정말 멋진 설정이었다.
엄격하게 알코올이 금지된 KSA에서 문샤인이라 불리는 밀주를 마시고, 스테이크 써는 칼로 종양을 스스로 파내는 일을 하지 않나, 샌달을 팔아 번 돈으로 사막에 산을 깎아 세운 성 같은 유세프 아버지의 집에 가서 이리 사냥에 나서는 장면들은 정말 미국식 오리엔탈리즘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또 KAEC 같은 기획도시의 건축물들이 미국 플로리다나 애리조나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어도비 벽돌로 만들어진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결국 킹 압둘라가 도착해서 릴라이언트 직원들의 멋진 시연에도 불구하고, 계약은 중국 업체가 따갔다는 역설은 이미 미국에 있는 친구의 일화에서도 듣지 않았던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왕서방이 입찰에 참가한 기업의 유리 제조 특허권으로 알맹이만 쏙 빼먹었다는.
소설 <왕을 위한 홀로그램>에서 저자 데이브 에거스는 몰락해 버린 미국 제조업에 대한 향수를 팍스 아메리카나 시절 전 세계에 개입하던 아버지 같았던 부성에 대치한다. 경제력을 잃은 아버지 앨런 클레이는 8년 만에 자신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두 번의 유혹에도 별 감흥이 없는 모양이다. 현재에 집중하기엔 그러니까 걱정거리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일자리, 건강, 거주, 자녀교육 등 무엇 하나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없다. 그 이미지는 세계시장에서 점점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오만한 엉클 샘에 대한 상징이려나. 현재 모든 면에서 좌충우돌하며 종잡을 수 없는 이웃나라 대통령이 연상되기도 했다.
KSA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도 데이브 에거스는 짧은 단상을 전한다. 이제는 여성의 자동차 운전이 허용되었지만, 책이 발표되던 당시까지만 해도 KSA에서 여성의 운전은 허용되지 않았다. 최근에도 여성운동가가 참수형을 선고받지 않았던가. 나라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유능한 젊은 인재들이 무언가 창의적인 일과 사고를 할 수 없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국왕에게 지배되는 KSA의 현실이 서구에서 교육받은 유수프와 닥터 자라 하켐의 삶을 통해 여실히 드러내지 않았던가. 재스민 혁명이 엉클 샘의 강력한 동맹국 KSA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모양이다. 유수프가 앨런을 자신의 차에 태울 때마다, 전처 자밀라의 질투심 많은 남편이 사제폭발물(IED)를 설치하지 않았나 싶어 전선을 점검하는 장면도 폭소를 자아냈다.
미국 제조업의 몰락, 사막에 신기루 같은 KAEC 스토리, KSA의 페미니즘 이슈, 노동조합 파괴자의 최후, 다 큰 자녀와의 갈등을 비롯한 다양한 주제들을 적당한 수위에서 다룬 <왕을 위한 홀로그램>을 재밌게 읽었다. 제목에 등장하는 ‘홀로그램’은 킹 압둘라를 홀리기 위한 그야말로 신기루 같은 아라비안 나이트의 상징 같은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봤다. 데이브 에거스의 데뷔작을 한 번 읽어 보고 싶은데 분량 때문에 선뜻 도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영화를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