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책읽는 계절, 여름이 지나고 독서 페이스가 떨어져 버렸다.

 

언제나 그렇지만 나의 중구난방 책읽기는 계속된다. 일단 수년 전에 사두었지만 읽지 않고 끝까지 버티었던,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 두 권을 읽었다. 그런데 왜 그 시절에 그 책을 샀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니 이유를 모르겠더라. 그래도 꾸역꾸역 읽었다.

 

간만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아주 재밌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더 바랄 게 없었더라는.

 

KSA의 가상현실도시 같은 진짜 도시에서의 삶을 그린 데이브 에거스의 소설도 인상적이었다.

 

빔 벤더스의 사진집 <한번은>을 읽고 나서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기 시작했는데 딱 절반 가량 보고 나서 아직 마저 보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과연 언제나 다 보게 될런지.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마오쩌둥 평전은 너무 평이해서 기대만 못했다. 절판된 책이라 오래 찾아 헤맸건만 기대만 못하더라.

 

어쩌구 저쩌구 해도 역시 9월에 내가 만난 최고의 작가는 바로 아리엘 도르프만이었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45주기를 맞이하야, 지근거리에서 대통령과 칠레혁명을 직접 체험한 도르프만의 육성 증언은 정말 값진 발견이었다.

 

희극 <죽음과 소녀>도 인상적이었지만, 자신의 회고록 <남을 향하고 북을 바라보다>는 정말 최고였다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동을 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지경이다.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도 거의 다 읽었는데 아직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다. 아, 줄리언 반스의 신간도 빨랑 읽어야 하는데...

 

이달에는 레이철 카슨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으려고 지난주에 무려 3권이나 사들였다. 대표작 <침묵의 봄>은 이미 읽기 시작했다.

 

이달의 독서모임책 아민 말루프의 <동방의 항구들>(예전에 사서 65쪽까지 읽다 말았다)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단박에 100쪽 그러니까 1/3을 돌파했다. 역시 책은 완독하게 되는 시기가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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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0-01 17: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저는 독서의 계절이 되면... 책 읽는 시간이 적어지고 자꾸 밖으로 나가게 되더라구요.ㅋㅋㅋㅋ

레삭매냐 2018-10-01 17:58   좋아요 0 | URL
네 정답입니다 !~

그동안의 패턴을 보면 전 여름에 가장
책을 많이 읽더라구요. 날 좋으면 밖
으로 고고씽 !

cyrus 2018-10-01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소설을 읽어야겠어요. 딱딱한 내용의 책만 계속 읽으니까 리딩 페이스가 점점 떨어지고 있어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8-10-01 20:07   좋아요 0 | URL
싸이러스 브로의 인문지식의 편람은 대단
합니다 ~ 그야말로 사통팔달이라고나 할
까요.

저같은 편식쟁이로스는 부러울 따름입니다.

이달에는 그래서 레이철 카슨을 좀 읽어
볼까 합니다.

2018-10-01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10-02 08:12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을요... 그저 읽는 대로 읽고
있는 걸요 :>
 
신의 대리인, 메슈바
권무언 지음 / 나무옆의자 / 2018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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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명성교회 세습 건으로 사회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예장합동 교단측 장자라고 할 수 있는 메가처치에서 세습불가 교단 헌법을 만든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행히 총회에서 재심을 진행하기로 했다고 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웠다. 500년 전 루터가 타락한 중세교회에 대한 작심하고 비판을 시작한 이래, 작금의 한국 교회처럼 영적으로 타락한 교계가 존재했을까 싶을 정도다. 권무언 작가는 소설 <신의 대리인 메슈바>로 이건 자신들만 모르는 인지부조화의 단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대신 성장일변도와 물신주의로 무장한 한국 교계에 대한 ‘비판 종합선물세트’를 제시한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 주목할 만하다.

 

여느 목회자처럼 메가처치 대성교회의 명수창 목사 역시 개척교회 당시에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보듬은 그런 선한 목자였다. 미국인 목사 스미스의 설교에서 어느날 영감을 얻은 명수창은 기괴한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의 확산에 나선다. 메가처치의 첫 단계인 대성전 건축이 그 시발이었다. 그의 옆에서 수석 재무장로 김일국이 충실하게 조력을 다했다. 문제는 SO(Special Offering)라는 방식의 어림짐작으로 천억대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말씀의 전파 대신 재물에 눈이 먼 목사와 일단의 장로들은 교인들로부터 갖은 항목의 헌금으로 은퇴 후를 위한 막대한 비자금 조성에 나선 것이다. 문제는 김일국 장로가 섣부른 투자에 나섰다가 원금까지 까먹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교회의 최고권력자 명수창이 이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결국 김일국 장로를 ‘횡령’이라는 죄목으로 옭아매고 압박한 결과, 그는 “새벽의 아들 메슈바”라는 알쏭달쏭한 메모를 남기고 투신하기에 이른다.

 

사건을 파헤치는 민완기자 역에 우종건을 배치한 작가는 미래의 목사 양성을 담당하는 신학대 교수이자 루터신학의 권위자 이건호를 배치한다. 사회부 기자 우종건이 제보를 바탕으로 김일국 장로사건을 파고 들어오자, 대성교회는 정말 세속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우선 사실을 부인하고, 세속법에 따라 우 기자를 고소 고발한다. 이 때만 해도 늦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투명한 재정시스템 대신 담임목사의 명예실추만은 막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교회 재판계 불패를 기록 중인 전담 법무법인 로직스를 동원해서 어처구니없는 ‘영적 전쟁’에 나선다.

 

숨 가쁘게 진행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회장에서 집중되는 교회 내의 권력의 비정상적인 행사와 감시의 부재가 결국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파국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건호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건강한 교회로 거듭나는 대신, 성장 지상주의에 매몰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검약 대신 물신 맘몬을 추구하는 영악하고 교묘하게 설계된 설교를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후과가 작금의 사태의 단초가 되었던 게 아닐까. 물론 자신의 열정과 노고를 바친 교회가 성장한 뒤에 미련 없이 새로운 사역을 위해 떠나는 정직한 목사들도 있지만, 극히 일부일 따름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몸피를 키워 건강한 영혼의 추수보다 재물의 추수에만 급급한 다수 목사와 그들의 공동 정범들이 한국 기독계를 대표하는 선수들이라는 사실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새벽의 아들이자 메슈바로 등장하는 명수창이 처음부터 그런 악당이었던 것은 아니다. 시골마을 출신의 변변치 않은 학력과 배경을 가진 그에게도 한 때는 모세와 요셉의 시간이 있지 않았던가. 개척교회를 하던 초기 시절만 해도, 그야말로 영성 넘치던 훌륭한 사역자로 칭송받던 그는 교회가 성장해 가면서 점점 더 루시퍼의 유혹에 빠져 들었고, 어느 순간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게 되자 폭주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바로 그 지점을 한국 기독교의 원죄에 대입한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라는 씻을 수 없는 원죄를 청산하지 못한 후과가 지금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주장이다. 당시 교계 지도자였던 김현호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공허한 주장을 거듭한다. 물론, 신사참배는 기독교의 제1계명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절대 굴하지 않고 옥살이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이건호 교수의 부친 이원준 목사 같은 이도 있었다. 물론 소수였기 때문에, 다수의 목소리에 묻혀 버렸지만 말이다.

 

교인들이 갹출한 헌금에서 명분 없는 비자금을 조성하고,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부자세습을 시도하는 메가처치 지도자들에게서 기독교 정신이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대성전 건축을 통한 몸피 불리기가 신의 축복이라는 주장 앞에서는 정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나마 명수창의 세습에 끝까지 반대하는 박세운 목사와 파면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이건호 교수 같은 이들의 모습에서 중세 엄혹한 시절에 교황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비텐베르크의 수도사 루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룡이 왜 멸종되었느냐고 묻는 손자 득세의 질문에 대답하는 새벽의 아들 메슈바의 대답에 어쩌면 역설의 진리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잘 알고 있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려 돌아갈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라 무조건 직진만 할 수밖에 없게 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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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10-02 08:13   좋아요 0 | URL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모습
으로 사람들에게 따르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교인감소에 대한 원인을 모르니 앞으
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될 거라고 생
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1년 전에 앨런 홀링허스트의 책을 읽어 보고 싶다는 그런 글을 포스팅한 적이 있었다. 다시 찾아보니 작년 11월이었군.

 

http://blog.aladin.co.kr/723405103/9688993

 

그리고 오늘 문득 램프의 요정을 슬슬 문지르다 보니, 홀링허스트 작가의 책이 출간 예정으로 뜬 것이 아니던가. 오!!!

 

창비에서 다음달 말 정도에 나올 모양이다. 물론 신간은 아니고, 작가의 부커상 수상작으로 일단 독자들의 관심을 끌겠다는 전략이겠지. 그런 다음 반응을 보아 가면서 신작을 출간하려나. 근데 입에 담기도 싫은 모 신문의 연초 출간 계획 기사를 보니, 6월에 나올 예정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암튼 출간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지긴 했지만 지금에라도 나오니 대환영이다.

 

물론 나는 번역판의 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오래 전에 원서를 사서 쓰담쓰담만 하고 있었다. 오늘 출간된다는 소식에 사무실 책상 머리에서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던 너란 녀석을 살짝 펴 보았다.

 

3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고, 각 챕터는 6개씩 들어있다. 대처 정권이 재집권에 성공한 1983년부터 시작해서 1986년과 1987년 이렇게 세 시기를 아우른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소설은 닉 게스트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게이 소설이다. 원서 뒤에 실린 후기를 보니 2006년에 BBC에서 솔 딥이라는 감독 연출로 3부작 텔레비전 시리즈로도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빡빡한 원서로 분량은 501쪽이나 된다. 아니 그럼 도대체 한글로는 몇 페이지나 된다는 거지? 보통 영어 원서가 1.5배로 뻥튀기가 되니 최소한 600쪽 이상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지난 번에 아주 재밌게 읽었던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 원서가 480쪽이었는데, 번역서는 700쪽이 넘었다. 대충 감이 오는구만 그래. 그런데 또 단가는 얼마나 하려나. 피카도르 버전은 8파운드 정도였었는데. 설마 번역서가 원서보다 더 비싼 시츄?

 

나오면 바로 사서 읽어 보려고, 예약알림도 걸어 두었다. 이번 가을에 제격인 소설이라고나 할까. 원서랑 대조해 보면서 읽는 재미도 있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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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28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서 대조! 역쉬 메냐님~^____^

레삭매냐 2018-09-28 19:25   좋아요 0 | URL
제 주제에 원서 완독은 사실상 불가능
하고 나중에 번역서가 나오면, 그 때
마다 디비 볼려구요.

추석 끝나고 책이 읽은 책이 넘쳐나서
즐거운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중입니다.

비로그인 2018-09-28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앨런 홀링허스트 책 출간을 기다리는 독자 중 한 명인데 반가운 소식이네요! 예약알림 걸어두어야겠어요~! :)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18-09-28 19:25   좋아요 1 | URL
저도 오늘 우연히 알게 되었답니다 :>

평소에는 무슨 책이 나오나 딱히 궁금
해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이 참에 앨런 홀링허스트의 전작이 주
욱 출간되었으면 바램입니다.

비로그인 2018-09-28 21:28   좋아요 1 | URL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는 <수영장 도서관>의 원서를 가지고 있는데 이 책도 꼭 번역서로 보고 싶어요. 앨런 홀링허스트의 글이 나오는 <끌리는 박물관>을 보며 정말 번역서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는데... 출간 소식이 기쁘고 반갑습니다. 다른 책들도 더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목나무 2018-09-28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레삭매냐님이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라 하셔서 일단 출간알림신청부터 해놨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8-09-28 21:36   좋아요 1 | URL
월척이닷 !

이 책을 필두로 해서 앨런 홀링허스트의
다른 책들도 우수수 쏟아져 나오길 기대
해 봅니다.

그나저나 필립 로스의 <미국을 노린 음
모>는 또 언제 나오는 겐지...

syo 2018-09-28 21: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런 게 알라딘의 위대함이네요. 금시초문의 작가에 대해서 강력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고수들의 존재.....

레삭매냐 2018-09-28 21:45   좋아요 0 | URL
강호 독자 제현의 강력한 호기심을 유발시
키는 데는 일단 성공했네요 :>

다만 고수가 아니라 허조비라는 ㅋㅋㅋ

coolcat329 2018-09-30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몰랐던 작가인데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게 있나봅니다~ 호기심이 마구 일어나네요^^

레삭매냐 2018-10-01 09:4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 더 기대가 큰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쎄인트saint 2018-10-01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2권으로 나올 가능성이 많군요...

레삭매냐 2018-10-01 16:25   좋아요 0 | URL
아 그 생각을 못했네요.

두터워도 그냥 한 권이 훨씬 나은데
말이죠. 두 권이면 가격도 가격이고 -
 
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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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드디어 앨런 홀링허스트의 <라인 오브 뷰티>
가 나오는 건가! 원서로 쓰담하고 있던 책의 출간 대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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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 - 아리엘 도르프만 회고록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한기욱.강미숙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어떤 작가의 책을 읽는 데는 순서가 필요한 법이다. 내 마음대로 정한 9월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읽으면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급한 마음에 도르프만 문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순서가 틀렸다. 그의 대표작인 <죽음과 소녀>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칠레혁명을 다룬 에세이집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부터 읽어야했다. 이런 순서였다면 나의 도르프만 읽기는 좀 더 수월했으리라. 작가의 자전적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는 지난여름 귄터 발라프 르포르타쥬의 발견만큼이나 독서의 성취감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유대인으로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하고 칠레를 사랑하게 된 혁명전사 블라디미로 도르프만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그의 복잡다단한 정체성처럼 회고록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아옌데 정권으로 상징되는 칠레혁명을 붕괴시킨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테타 이후 망명길에 오르게 되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이야기와 조국에서 추방되다시피 쫓겨난 아돌포 도르프만의 아들이자 영어를 사용하는 양키 소년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에드워드 도르프만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등장한다.

 

도르프만 가계의 뿌리는 저 멀리 러시아의 오데사에서부터 출발한다. 반유대주의의 광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르프만의 조상들은 아르헨티나에 뿌리를 내린다. 아리엘의 어머니는 능수능란한 언어로 한 때 트로츠키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 아돌포는 아르헨티나에서 쫓겨나듯 벗어나 그링고들의 천국 뉴욕으로 향한다. 나어린 나, 아리엘은 에드워드란 이름의 양키 소년이 되기로 결심하고 스페인어를 버린다. 이런 정체성의 극심한 혼란은 어쩌면 3개국을 오가는 망명자로서의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미국의 CIA가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시킨 1954년, 매카시 광풍이 불던 미국에서 더 이상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도르프만 가족은 칠레로 향한다. 십 수 년 동안, 영어 노래를 듣고 제국주의 미국문화의 세례를 받은 소년 블라디미로는 거절했던 모국어를 되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미래의 진짜 조국 칠레 인민들의 참혹한 현실을 깨닫고, 미국을 찬양하던 양키 소년에서 철저한 반미주의 전사이자 혁명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가 칠레에 안착했던 1950년대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있끄는 쿠바혁명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억압받던 제3세계 인민들의 연대가 구체적 형태를 갖춰 가던 시기였다. 미국의 안마당으로 인식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이 식민화되고, 제국주의 악당 그링고들에게 착취당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풍족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현실을 젊은이 특유의 신랄한 비판의식을 담아 짚어낸다.

 

한편, 아리엘-블라디미로-에드워드라는 각각의 이름이 상징하는 작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도 자못 심각하게 다가온다.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면서도 미국식 교육의 세례를 받아 준양키에 가까운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훗날 살바도르 아옌데 선거운동에 나선 저자의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탁월한 미국식 마케팅 방식을 선거전에 도입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빈민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그들을 꾀기 위해 디즈니에서 제조하고 수출한 악질 자본가 스크루지 맥덕이 등장하는 단편만화들을 상영하기도 한다. 그가 이 에세이집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듯이, 라틴아메리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모순들은 그야말로 무 자르듯 그렇게 단순화할 수만은 없는 그런 사회경제적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내내 잡종(hybrid)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그런 개념이라고 해야 할까.

 

피노체트 쿠데타 당시 그의 수많은 친구들과 동지들이 군부가 조직한 총살조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에 대해 도르프만은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쿠데타 당일, 친구 클라우디오 히메노와 근무를 바꾸지 않았다면 그리고 자신의 상관이었던 장관이 대통령과 함께 최후를 같이할 인사 리스트에서 그를 삭제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아리엘 도르프만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쓰고 있다. 쿠데타가 일어난 뒤에도 그는 자신이 그날 ‘우리의’ 대통령 아옌데와 죽었어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욕스러운 독재 치하를 견뎌내고, 대재앙의 목격자로서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 더 큰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 안헬리카와 아들 로드리고를 지켜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임무도 엄연하게 존재했다. 선택의 순간에 그는 주저하지 않았고, 목숨을 보전하는데 성공했다.

 

삼십대 혁명전사로서 아리엘 도르프만의 악명은 주로 그가 저술한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비롯되었다. 노골적인 정치적 서사 대신 부지불식간에 아이들 사이에 전파되는 미국 문화 제국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칠레에서 수많은 분서 사태를 불러왔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이제 <도널드 덕>을 읽을 준비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더 공감이 가는 부분은 칠레혁명이 쿠데타로 실패하고 나서, 자신들의 편이 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돈 파트리시오 같은 인사들을 포용력을 가지고 품지 못했다는 점이다. 혁명세력이 흔히 범하는 오류를 도르프만들은 범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돈 파트리시오들이 극우 세력에게 달려가게 만들었다는 뼈저린 고백은 곱씹어 봐야할 문제다.

 

영어 상용자로서의 정체성은 두고두고 저자를 괴롭히는 이슈였다.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의탁해서 조국을 등지고 망명길에 오르는 과정에서 그의 고뇌는 그가 비판했던 <도널드 덕>의 나라를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상황이 수도 없이 펼쳐지리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묵시록적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짧은 리뷰로 아리엘 도르프만의 사변적 고민들을 다 담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비겁하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실수를 전가하지 않고 칠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1973년 9월 11일, 그가 자살했는지 아니면 군부의 총에 맞아 장렬하게 산화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중요하지 않다. 저자가 쓴 대로 극한 상황에 내몰린 아옌데가 자살보다 민주주의의 적들과 싸우다 죽었다고 믿고 싶었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지 모르겠다. 모든 순간의 선택이 생과 사를 결정하는 고뇌였던 시간을 다루면서, 동시에 이방인이었지만 진실로 칠레를 사랑했던 목격자의 시선이 이룬 문학적 성취는 기대 그 이상이었다. 올해의 발견으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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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9-27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유대주의로 인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된 유대인이 이로 인해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됩니다...

레삭매냐 2018-09-27 21:46   좋아요 1 | URL
바빌론 유수 이래 디아스포라는 유대인들의
숙명이 아닐까 싶네요.

고향을 떠난 방랑객이 되어 고유의 정체성
을 지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현지적응이라
는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보니 반대급부로
다양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지 않았나 생
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