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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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드디어 앨런 홀링허스트의 <라인 오브 뷰티>
가 나오는 건가! 원서로 쓰담하고 있던 책의 출간 대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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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 - 아리엘 도르프만 회고록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한기욱.강미숙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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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작가의 책을 읽는 데는 순서가 필요한 법이다. 내 마음대로 정한 9월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읽으면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급한 마음에 도르프만 문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순서가 틀렸다. 그의 대표작인 <죽음과 소녀>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칠레혁명을 다룬 에세이집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부터 읽어야했다. 이런 순서였다면 나의 도르프만 읽기는 좀 더 수월했으리라. 작가의 자전적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는 지난여름 귄터 발라프 르포르타쥬의 발견만큼이나 독서의 성취감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유대인으로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하고 칠레를 사랑하게 된 혁명전사 블라디미로 도르프만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그의 복잡다단한 정체성처럼 회고록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아옌데 정권으로 상징되는 칠레혁명을 붕괴시킨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테타 이후 망명길에 오르게 되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이야기와 조국에서 추방되다시피 쫓겨난 아돌포 도르프만의 아들이자 영어를 사용하는 양키 소년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에드워드 도르프만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등장한다.

 

도르프만 가계의 뿌리는 저 멀리 러시아의 오데사에서부터 출발한다. 반유대주의의 광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르프만의 조상들은 아르헨티나에 뿌리를 내린다. 아리엘의 어머니는 능수능란한 언어로 한 때 트로츠키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 아돌포는 아르헨티나에서 쫓겨나듯 벗어나 그링고들의 천국 뉴욕으로 향한다. 나어린 나, 아리엘은 에드워드란 이름의 양키 소년이 되기로 결심하고 스페인어를 버린다. 이런 정체성의 극심한 혼란은 어쩌면 3개국을 오가는 망명자로서의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미국의 CIA가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시킨 1954년, 매카시 광풍이 불던 미국에서 더 이상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도르프만 가족은 칠레로 향한다. 십 수 년 동안, 영어 노래를 듣고 제국주의 미국문화의 세례를 받은 소년 블라디미로는 거절했던 모국어를 되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미래의 진짜 조국 칠레 인민들의 참혹한 현실을 깨닫고, 미국을 찬양하던 양키 소년에서 철저한 반미주의 전사이자 혁명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가 칠레에 안착했던 1950년대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있끄는 쿠바혁명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억압받던 제3세계 인민들의 연대가 구체적 형태를 갖춰 가던 시기였다. 미국의 안마당으로 인식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이 식민화되고, 제국주의 악당 그링고들에게 착취당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풍족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현실을 젊은이 특유의 신랄한 비판의식을 담아 짚어낸다.

 

한편, 아리엘-블라디미로-에드워드라는 각각의 이름이 상징하는 작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도 자못 심각하게 다가온다.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면서도 미국식 교육의 세례를 받아 준양키에 가까운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훗날 살바도르 아옌데 선거운동에 나선 저자의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탁월한 미국식 마케팅 방식을 선거전에 도입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빈민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그들을 꾀기 위해 디즈니에서 제조하고 수출한 악질 자본가 스크루지 맥덕이 등장하는 단편만화들을 상영하기도 한다. 그가 이 에세이집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듯이, 라틴아메리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모순들은 그야말로 무 자르듯 그렇게 단순화할 수만은 없는 그런 사회경제적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내내 잡종(hybrid)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그런 개념이라고 해야 할까.

 

피노체트 쿠데타 당시 그의 수많은 친구들과 동지들이 군부가 조직한 총살조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에 대해 도르프만은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쿠데타 당일, 친구 클라우디오 히메노와 근무를 바꾸지 않았다면 그리고 자신의 상관이었던 장관이 대통령과 함께 최후를 같이할 인사 리스트에서 그를 삭제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아리엘 도르프만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쓰고 있다. 쿠데타가 일어난 뒤에도 그는 자신이 그날 ‘우리의’ 대통령 아옌데와 죽었어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욕스러운 독재 치하를 견뎌내고, 대재앙의 목격자로서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 더 큰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 안헬리카와 아들 로드리고를 지켜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임무도 엄연하게 존재했다. 선택의 순간에 그는 주저하지 않았고, 목숨을 보전하는데 성공했다.

 

삼십대 혁명전사로서 아리엘 도르프만의 악명은 주로 그가 저술한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비롯되었다. 노골적인 정치적 서사 대신 부지불식간에 아이들 사이에 전파되는 미국 문화 제국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칠레에서 수많은 분서 사태를 불러왔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이제 <도널드 덕>을 읽을 준비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더 공감이 가는 부분은 칠레혁명이 쿠데타로 실패하고 나서, 자신들의 편이 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돈 파트리시오 같은 인사들을 포용력을 가지고 품지 못했다는 점이다. 혁명세력이 흔히 범하는 오류를 도르프만들은 범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돈 파트리시오들이 극우 세력에게 달려가게 만들었다는 뼈저린 고백은 곱씹어 봐야할 문제다.

 

영어 상용자로서의 정체성은 두고두고 저자를 괴롭히는 이슈였다.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의탁해서 조국을 등지고 망명길에 오르는 과정에서 그의 고뇌는 그가 비판했던 <도널드 덕>의 나라를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상황이 수도 없이 펼쳐지리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묵시록적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짧은 리뷰로 아리엘 도르프만의 사변적 고민들을 다 담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비겁하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실수를 전가하지 않고 칠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1973년 9월 11일, 그가 자살했는지 아니면 군부의 총에 맞아 장렬하게 산화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중요하지 않다. 저자가 쓴 대로 극한 상황에 내몰린 아옌데가 자살보다 민주주의의 적들과 싸우다 죽었다고 믿고 싶었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지 모르겠다. 모든 순간의 선택이 생과 사를 결정하는 고뇌였던 시간을 다루면서, 동시에 이방인이었지만 진실로 칠레를 사랑했던 목격자의 시선이 이룬 문학적 성취는 기대 그 이상이었다. 올해의 발견으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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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9-27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유대주의로 인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된 유대인이 이로 인해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됩니다...

레삭매냐 2018-09-27 21:46   좋아요 1 | URL
바빌론 유수 이래 디아스포라는 유대인들의
숙명이 아닐까 싶네요.

고향을 떠난 방랑객이 되어 고유의 정체성
을 지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현지적응이라
는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보니 반대급부로
다양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지 않았나 생
각해 봅니다.
 

[독서일기] 2018926일 수요일

 

기나긴 명절의 끝을 달려가고 있다.

 

명절 때 이런저런 책을 읽어야지 싶었지만, 삶이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목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되는 대로 읽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좀 읽고 싶었으나, 껌딱지가 달라 붙어서 자신의 재량껏 나의 독서질을 방해했다. 영화도 <베를린 천사의 시>를 절반 정도(다 못봤다, 역시 흥미로웠다) 그리고 <공작>도 절반 정도 보고 말았다. 영화 보기는 마치 나의 책읽기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가 싶구나. 보다 말다 보다 말다하기 거듭하기.

 

그나마 도르프만의 <죽음과 소녀> 한 권을 읽어 다행이다. 이달에는 가능한한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많이 읽고 싶었지만 그 사이 사이에 이런저런 책들을 읽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아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였던가. 대신 사방을 다니면서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컬렉션했다. 책쟁이들에게 무한한 즐거움인 책사냥 말이다. 지난 금요일날 신촌에 가서 <체 게바라의 빙산>을 사들였고, 일요일에는 구월동에 가서 <죽음과 소녀> 그리고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도르프만의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을 샀다. 전자는 이미 읽어서 리뷰까지 작성했고, 후자는 오늘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재밌어서 진도가 쑥쑥 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작가의 아버지 아돌포는 러시아 오데사 출신 레닌주의자/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뮬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이었고, 그의 어머니의 탁월한 언어능력 덕분에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조국인 칠레, 아르헨티나 그리고 미국을 점프하며 사는 바람에 정체성에 문제는 없었을까.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사는 바람에 10년 동안 모국어인 스페인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깡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 못해서 안한 게 아니라 의도적이었던 게 아닌가.

 

1973911,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바로 그 때 죽었어야 했다는 작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계속해서 곱씹어 보게 된다. 사실 내가 이 작가를 읽게 된 것이 신문에서 접한 이 한 문장 덕분이 아니었던가. 작가가 칠레혁명 당시 아옌데 대통령 휘하에서 문화전사로 활약하던 당시 준비했다는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도 한 백쪽 가량 남겨 두었는데 이달의 작가로 선언한 만큼 부지런하게 읽어서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다.

 

, 그런데 이번 주말에 달궁 독서모임이 있었지. 대비해서 구해서 읽기 시작한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워터멜론 슈가에서>도 마저 읽어야 하는데. 이 책은 남미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케 하는 그런 요소들을 잔뜩 품고 있어서 그런지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물론 토요일 전에 다 읽긴 하겠지만... 분량이 적지 않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느닷없이 등장한 호랑이에게 부모님을 다 잃은 저자의 이야기, 아이디아뜨(I-DEATH)라는 요상한 이름의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데 쉽지 않다 쉽지 않아. 원래 생각 같아서는 브라우티건의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도 읽을까 했지만 다 글렀다. 뭐 책읽기가 원래 그렇지 않은가.

 

오늘 저녁에는 보다만 영화 <공작>을 마저 볼까 아니면 도르프만의 회고록을 더 읽을까 고민 중이다.


[뱀다리] 어제 저녁 나의 선택은 아리엘 도르프만의 회고록이었다. 지난여름 귄터 발라프의 발견에 이은 두 번째 쾌거라고 과언이 아닐 듯 싶다. 하마터면 밤을 셀 뻔 했다. 긴 연휴 끝의 출근인데 그러면 안 되지 싶어. 애써 잠을 청했다. 대단한 작품이다. 파괴된 칠레혁명에 대한 육성 증언이자, 스페인어와 영어 사이에서 오가는 분열적 이중생활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분석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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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소녀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명환.김엘리사 옮김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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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는 아리엘 도르프만을 읽겠다고 선언했지만 지지부진하다. 지난여름 로맹 가리 읽을 당시 좋은 기억만 가지고 덤벼들었다가 낭패를 봤다. 사실 도르프만 교수의 다른 책인 <체 게바라의 빙산>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1/3 가량 읽었나.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민주주의로의 이행 과정이었던 1992년 세비야 엑스포 빙산 출품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확 와 닿지가 않았다. 대신 <죽음과 소녀>는 역시 작가의 대표 희곡 작품답게 대단했다.

 

사실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 <죽음과 소녀>가 네 편으로 구성된 희곡집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서가에서도 소설이 아니라 희곡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다. 도르프만이 쓴 네 편의 희곡들을 보면서 정말 희곡으로 만들기에 최적화된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과부들> 외에는 정말 소수의 배우들과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연극으로 무대에 올리기에 적합하지 않은가. 사실 도르프만은 우리나라에서 소설가라기 보다 희곡가로 더 유명하지 않나 싶다. 요즘 맛을 들인 인스타에서 검색을 해보니, 연극 <죽음과 소녀>가 압도적으로 많은 검색물을 토해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연출로 이미 1994년 시거니 위버 주연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는 <죽음과 소녀>부터 읽었다. 라틴아메리카 모처라고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공간적 배경이 칠레라는 사실을.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모든 반대 세력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제압했던 군부는 의대생 파울리나 살라스를 납치해서 고문하고 강간했다. 십수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파울리나는 여전히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을 고문했던 그 의사는 고문 희생자들의 고통을 덜어 준다는 이유로 슈베르트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를 틀어 주었다고 했던가. 그 아름다운 선율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으로 각인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민주화 투사였던 파울리나의 남편 헤라르도는 변호사로 대통령의 위촉을 받아 과거 군부독재 정권 저질러진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조사 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내의 승인을 받을 거라고 말하지만, 예리한 파울리나는 그가 이미 대통령에게 위원장직을 승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세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짜 파열음을 외부에서 왔다. 헤라르도의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비치하우스에 사는 닥터 미란다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 준 것이다. 닥터 미란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파울리는 즉시 그가 그 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닥터 미란다를 포로로 잡고 권총으로 무장한 파울리나는 진실에 대한 그의 고백과 사과를 들어야겠다고 선언한다. 영화 트레일러를 보니 좀 더 격렬한 액션이 추가된 것 같은데, 원작은 지극히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게 침착하게 전개된다. 그만큼 파울리나의 과거의 사건에 대한 고통이 깊다는 반증이 아닐까. 당연히 포로로 잡힌 닥터 미란다는 자신이 무고하다고 주장하고, 변호사 남편 헤라르도 역시 이런 방식으로는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복수를 위해 군부정권이 저지른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긴 해도, 비록 선거로 권좌에서 물러나긴 했어도 여전히 칠레 민주주의 정권 하에서도 기소 면책권과 일정 지분의 정치적 권력을 가진 피노체트가 지휘하는 군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가 있었다. 파울리나의 주장 대로 왜 항상 약자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는가에 대해 작가는 처절한 질문을 던진다.

 

한편, 닥터 미란다의 주장 대로 전형적인 정신 분열증 증상을 보이는 파울리나가 과연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일까? 우리의 영리한 주인공을 그것을 대비해서 닥터 미란다가 빠져 나갈 수 없는 몇 가지 장치들을 준비해 두었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남편에게 들려주면서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을 던져 주었더니 닥터 미란다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러니까 그가 진범이었던 것이다. 작가가 구상에서부터 수년간 들인 공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멋진 장치가 아니었던가. 걸작이 걸작으로 칭송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과부들>도 남자들이 모두 잡혀가 버린 어느 마을의 과부들에 대한 이야기다. 군부를 상징하는 대위와 중위 그리고 군인들은 강가에서 수년 전에 잡혀간 남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소피아를 위시한 과부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과부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잡혀간 남자들이 살아 있다면 바로 석방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죽었다면 시체를 내주어 장례라도 치르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건 모두 군인들은 들어줄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이고, 아들이고 손자 그리고 연인이 아니었던가. 그나마 민주주의 시스템 아래서 정상적인 이성을 발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대위마저 과부들의 막무가내 주장에 진저리를 내면서 기존의 폭력적인 방식으로 항의하는 과부들을 해산시키려는 장면에서는 여전히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현대 칠레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다. 군부정권 아래 호의호식하며 권력을 농단했던 이들이 사회 기득권으로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칠레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네들의 상황은 해방 이후 일제 부역자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를 겪어야 했던 우리의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되었다.

 

한국을 상정하고 발표했던 <경계선 너머> 역시 비극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다른 작품과 궤도를 같이 한다. 공간적 배경은 수십 년 째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국경 도시다. 5천 명에 달하는 전쟁 희생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매장하는 일을 하고 있는 아톰 로마와 러바나 줄렉 그리고 국경 수비대원이 차례로 등장한다. 마침내 전쟁은 끝났지만, 냉정한 군인은 부부의 집을 경계선으로 갈라 버린다. 전쟁 중에도 피아 구분 없이 지내던 부부가 졸지에 이산가족이 될 판이다.

 

모든 것을 소멸시켜 버리는 전쟁의 참혹함 그리고 인도주의적 사고 대신 그저 관료적 방식으로 국경선을 긋고 분단시켜 버리겠다는 군인의 등장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군인의 존재가 원래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던가. 현대 사회의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원래 존재의 목적 대신 자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존재로 탈바꿈한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고 나면 새로운 사실들이 쏟아지는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사법농단이 가져올 사법시스템 전체에 대한 불신을 앞으로 어떻게 해소하겠다는 건지 해당 책임자들은 전혀 관심도 없었겠지. 내가 낸 세금으로 그런 이들에게 월급과 연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도르프만은 <죽음과 소녀>와 마찬가지로 <경계선 너머>에서도 일종의 미스터리로 내러티브에 감칠맛을 첨가한다. 예의 군인이 오래 전에 부부의 곁을 떠난 아들 요셉이라는 설정이다. 부부는 그와 이야기를 할수록 그가 그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만, 다시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인이 또다른 전쟁의 희생자가 되면서 그 사실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역시 작가는 열린 결말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마지막의 <연옥>은 읽기는 했는데 너무 모호한 이야기여서 좀 헷갈렸다. 아마도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 만난 두 남녀가 나누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후기에 실린 <이아손과 메데이야> 전설이 연상되었다. 아무래도 앞에서 읽은 세 이야기와는 결을 달리 하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보니 나는 칠레 출신 작가들을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모양이다. 루이스 세풀베다를 필두로 해서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들을 제법 많이 읽었다. 이번에는 생소한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도 읽게 되었다. 그전에 읽은 다른 칠레 작가들 덕분인지 조국 칠레와 제2의 조국 미국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는 작가의 저술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게 다가왔다. 중고서점에서 <죽음과 소녀>를 사면서 같이 산 그의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도 읽어봐야겠다. 아 그전에 먼저 영화 <진실>부터 봐야 하나. 다시 생각해 봐도,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도 진실과 화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하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모든 문제에 책임 있는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피해자들에게 사죄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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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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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신간 <비바, 제인>에 앞서 개브리얼 제인 작가의 <섬에 있는 서점>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수년째 지속되고 달궁 독서모임을 뜨겁게 달군 <섬에 있는 서점>은 재밌으면서도 또 핍진성에서 부족하다는 지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도출한 그런 책이 아니었던가.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탐 드루리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미국의 대도시가 아니라 어쩌면 미국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가장 미국적인 이야기들을 직조해내는 소설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의 출발점은 올해 64세의 레이철 셔피로의 온라인 데이트다. 제빈 작가의 소설적 장치 배치 실력은 확실히 뛰어나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 같은 구성의 전개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한 자락 하는 스토리의 주인공이 주목 하시라. 심장전문의 닥터 마이크 그로스먼과 이혼한 전직 유대인 학교 교장 선생님은 노년의 싱글 라이프를 아주 여유롭게 즐기고 계신 중이다. 절친 로즈 호로위츠의 유리남 남편이 껄떡일 때도 있지만, 지혜롭게 넘기는 능력도 발휘해 주신다. 그녀의 어머니와 미미 이모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어머니는 평생 독일에서 만든 제품은 사지 않는다는 방식으로 홀로코스트의 기억에 저항한다.

 

여기서 문제 돌발, 그녀의 딸 아비바 그로스먼이 출현할 차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마이애리 출신 멋쟁이 하원의원 에런 레빈과 바람이 난 것이다. 미래의 정치인 지망생인 아비바는 예전 이웃인 레빈 의원실의 무보수 인턴으로 지원했다가 그만 그런 사단이 나고 말았다. 그냥 조용하게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 불행은 항상 홀로 오는 법이 없다는 식으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전도유망하고 미남 하원의원의 섹스 스캔들은 전국적 이슈가 되었고, 아비바가 재미로 쓰던 블로그는 성지가 되고 그야말로 스티그마타가 되어 버린다.

 

소설 <비바, 제인>에는 모두 5개의 시선이 등장하는데 눈치 빠른 독자라면 원제 <Young Jane Young>에서 언급하는 제인 영이 과연 누구일지 벌써 알아챘을 지도 모르겠다. 싱글맘으로 플로리다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멀어 보이는 메인 주의 앨리슨 스프링스에서 랍스터 롤을 즐기는 제인 영과 그의 딸 루비가 등판할 순서다. 행사 기획자이자 웨딩 플래너로 활동 중인 제인 영이 바로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세탁하고 새롭게 거듭난 아비바 그로스먼이었다. 어쩌면 개브리얼 제빈 작가는 가장 페미니스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페미니즘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아비바의 할머니, 커리어 우먼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엄마 레이철 셔피로와 아비바/제인 영 그리고 루비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세상을 향한 투쟁은 그야말로 부단하기 그지없다. 제인 영이 한 때 자신의 손님이었던 전형적 꼰대 웨스 웨스트의 시장 선출을 저지하고자 지역 유지 모건 부인의 지원 아래 어쩌면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날 지도 모를 그런 위험한 시장 선거에 뛰어드는 결정은 참으로 담대했다.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어서, 십대 소녀 루비가 구글링을 통해 자기 엄마의 정체를 알고 자신의 생부라고 믿는 레빈 의원을 찾아가는 장면은 일종의 클리셰라고 해야 할까.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철부지 인턴의 불장난 혹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잘 나가는 하원의원을 파멸시키려는 꽃뱀으로 모는 시선도 엄연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소위 말하는 슬럿 셰이밍이라는 비겁한 방식으로 가족을 제외한 그 어느 누구도 아비바 편에 서지 않았다.

 

그 결과 대학에서 스페인어와 정치학을 전공한 여성의 커리어는 산산조각이 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멀리 메인에서 할머니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야 했다. 그것도 싱글맘이라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말이다. 제인 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 만든 아비바는 세상의 모든 편견과 맞서 싸워야했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진행형이다.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시선과 캐릭터는 바로 에런 레빈의 아내이자 여걸 변호사 엠베스였다. 그녀는 여느 정치인의 아내처럼, 남편의 바람에도 그를 지지한다는 마음에도 없는 연기를 펼쳐야만 했다. 그 결과 정치인 레빈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20년 동안 10선 의원이라는 정치적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남편 에런 레빈은 인간적으로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대학생 인턴과 바람난 그로스먼같은 인간이지만, 정치적으로 탁월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그만큼 사랑받았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노라고 엠베스는 고백한다. 문제는 그런 어마무시한 스트레스를 안고 살다 보니, 세상에 존재하는 않는 앵무새 엘 메테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것이다. 엠베스 여사가 갑자기 나타나서 레빈 의원의 선거를 한 방에 날려버릴 지도 모를 루비의 출현에 대처하는 장면은 확실히 지난 미국 대선에 나섰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연상시켰다. 아니 어쩌면 엠베스 여사의 모델이 바로 그 이가 아니었던가 싶을 정도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현실이 어쩌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게 아닐까.

 

원래 <비바, 제인>은 추석 때 읽을 계획이었는데 읽다 보니 추석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뭐 프리-추석용 독서로도 제격이었지 싶다. 그렇게 시간을 번 나는 추석 때는 다른 책을 읽게 됐다. 우리가 언제 읽을 책이 없어서 고민한 적이 있었던가. 읽은 시간이 없어서 문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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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22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샥매냐님 어디십니까? ㅋ 명절 잘 쇠시고 책 보신다고 밤 새지 마시공 ^________^*

레삭매냐 2018-09-23 10:51   좋아요 0 | URL
집에서 얌전히 쉬고 있습니다...

책도 안 땡기고, 그냥 저냥이네요.

이번 추석에는 줄리언 반스의 신작
정도 읽고, 9월의 작가라고 공언하고
한 권도 읽지 못한 아리엘 도르프만
의 책 정도 있으면 만족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