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에게 무언가 줘서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항상 하시던 말씀이시다. 지난 주말에 정말 오랜만에 캠핑을 갔다. 안성에 있는 별밤 캠핑장. 아니 이런 곳에 캠핑장에 있단 말인가 싶은 곳에 고즈넉한 분위기의 캠핑장이 있었다. 집에서 출발해서 가는 데 자그마치 두시간 하고도 반이 걸렸다. 밤중에 올 땐 딱 한 시간이 걸렸다. 날이 좋아 모두들 집 밖으로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영동 고속도로에 정말 더럽게 차가 많았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데.

 

어려서는 캠핑 다니는 걸 참 좋아했었는데. 중학교 때, 갔던 캠핑에서는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바람에 다들 기겁해서 철수했던 기억이 난다. 진짜 엉망이었지. 대학교 때는 절친과 함께 둘이서 격에 맞지도 않는 6인용 텐트를 들고 정선 아우라지로 여행을 떠났었지. 그 때 아마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지. 다음날 식육점에 갔다가 뉴스를 보고 기겁한 기억이 난다. 준비한 쏘주가 다 떨어지는 바람에 이웃 텐트에 있는 모르는 분들에게 쏘주를 좀 파시면 안되냐고 했더니만 맘대로 갖다 마시라 해서 입이 쩍 벌어졌던 기억도. 만취한 친구가 안경을 그 넓다란 풀밭 어딘가에 잊어 버려서 한참을 걸려서 바윗돌에 잘 올려 안경을 찾은 기억도 난다.

 

 

캠핑장에서 서로 처음 만난 꼬맹이들이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 우리가 꼬챙이에 쏘시지를 구워 주니, 그 집에서 맛난 그리고 그 비싼 복숭아를 세 개나 들려 보내 주셨다. 아이 고마워라. 그렇지 이게 오가는 정이지. 같이 갔던 회사 동료네 딸내미가 삼촌 삼촌 메뚜기 잡아 주세요 그래서 아이들과 미친 듯이 뛰면서 전공을 발휘해서 지천에 널린 메뚜기와 잠자리를 잡았다. 아랫녘에 있는 캠핑장에는 누군가 지난 여름에 먹고 뱉은 수박씨가 자라서 자그마한 수박이 열리기도 했더라. 청개구리도 봤다. 밤에 캠프화이어를 하면서 ‘불멍’하던 순간의 추억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마 태고적 인간도 밤에 불을 피우고 이렇게 멍을 때렸겠지 싶더라.

 

사연이 길었다. 학교 후배 녀석에게 책 보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사를 앞두고 있어서 한참 책 정리를 하고 있다. 인스타에서 에세이를 부지런히 쓰고 있는 후배에게 책을 보내 준다고 했다. 녀석은 책을 다시 돌려 보낸다고 하고, 착불로 보내라고 한다. 됐다, 착불은 됐고 책도 다 너 가져라. 사무실에서 급하게 챙겨 보내느라 미처 보내지 못한 책들이 있는데 그것도 나중에 보내 준다고 했다.

 

인스타에서 끗발 날리는 녀석이 받은 책의 사진을 인스타에 올렸길래 훔쳐왔다. 난 알라딘에 포스팅을 하려고. 그렇게 세상은 돌고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지금 한창 아리엘 도르프만의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고 있는 중이다. 아니 이렇게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으로 대변되는 미국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있었던가. 알라딘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교보로 주문했더니 어디 지방에 있는 책을 수급해서 출고 준비 중이라고 한다. 어딘가에 내가 구하는 책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고 보니 지난달 독서 모임 때도 책을 몇 권 가져가서 동생들에게 나눠 주었지. 이달에도 갖다 주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추석 때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왕창 책 사러 가야 하는데, 언제 가나. 무려 7권이나 된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은 많이 없다. 있으면 쟁여 오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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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9-13 1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만큼 읽는 건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그래도 어쨌든 읽는 것은 누구나 할 수는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나누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경지에 오르셨어요 ㅎㅎㅎ 부럽습니다.

레삭매냐 2018-09-13 16:10   좋아요 1 | URL
저도 다른 좋은 분들에게 책을 받았으니
또 순환시킨다는 의미에서 다른 이들
에게 돌려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
습니다.

덜고 또 채워야죠 ㅋㅋㅋ

목나무 2018-09-13 1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뚜기와 잠자리를 잡는 전공이라.. 뭔지 왜이리 궁금할까요. ㅋㅋ
곧 이사하시는군요. 이럴 때 책정리 한번 거하게 해주면 새집에서 또 새책을 살 수 있어 기쁨이 두배인 것 같아요. ^^
책받은 후배님은 덕분에 좋은 에세이 쓰실 겁니다 분명!
캠핑은 아니지만 저도 이번 추석에 고향가서 자연과 벗하며 느긋하게 보내다 와야겠어요.:)

레삭매냐 2018-09-13 16:13   좋아요 1 | URL
아~ 여기서 전공이라 하믄 잘 잡는다는
뜻이었어요. 메뚜기랑 잠자리를 연구하지는
않았죠 ㅋㅋㅋ

책 다이어트를 진짜 빡시게 해야겠습니다.
안 읽은 책들이 문제죠... 누구에게 주기도
또 그냥 기부하기도 그렇고 죽갔습니다 -

명절 때 고향에 가셔서 또 긍정적인 에너지
듬뿍 리필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moonnight 2018-09-13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후배분 기쁘시겠어요@_@;; 저는 책을 팔긴 해도 아는 사람에게 주는 건 못하겠더라구요. 뭔가 내밀한 부분을 보여주는 느낌-_-;;;

레삭매냐 2018-09-13 16:32   좋아요 1 | URL
보내기 전에 포스트잇이랑 메모 다 지우느라
고생했습니다. 미처 못하고 보낸 책들도 있구요...
공감합니다.

택배 마감 치기 전에 급박하게 진행 바람에
말이죠 ㅋㅋ

세상틈에 2018-09-13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레삭님 경지에 오르셨군요.^^ 전 여전히 욕심만 가득한....ㅋ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이 무척 구미가 당깁니다.

레삭매냐 2018-09-13 16:33   좋아요 1 | URL
비우고 새로 채워 넣기를 시행해 보려고
마음~만 먹었습니다.

과연 가능할 진 모르겠습니다만.

아리엘 도르프만, 주문한 책들이 드디어
출발했다고 하네요 !!! 못 기다리고 결국
도서관에 가서 몇 권 빌려 왔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09-13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쉬 우리 레샥매냐님👍👍👍

레삭매냐 2018-09-14 08:13   좋아요 1 | URL
별 말씀을요... 제게 필요 없는 책들을
보낸 것인데요 ~

그 친구가 좋아해서 다행입니다.
 

 


부제 : 아옌데의 45주기를 기념하며

 

우연한 기회에 아리엘 도르프만이라는 작가에 대해 알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칠레의 사회민주주의는 종언을 고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조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카스트로가 선물로 칼라슈니코프를 들고 있었다지. 피델에게 체가 있었다면, 그에게는 문화 전사 아르헨티나 출신 아리엘 도르프만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혁명가들의 조국이 같구나. 31살의 도르프만은 그 때 아옌데와 함께 죽었어야 했다고 했던가. 지금은 도르프만이 자신의 두 번째 조국이었던 칠레를 그렇게 엉망으로 만든 미국 시민이 된 것도 역시나 아이러니라고나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 아옌데 사망 45주기를 기념해서 이달에는 아리엘 도르프만을 읽기로 했다. 책이 당장 수급이 되지 않는지 며칠 있다 배송이 된다 해서, 당장 도서관에 달려가 그의 책들을 빌려다 읽어야지 싶다.

 

이하 아리엘 도르프만의 바이오는 영문 위키를 내 마음대로 번역한 내용이다.

 

아리엘 도르프만은 1942년 5월 6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제국 시절 오데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아리엘의 아버지 아돌프는 아르헨티나 경제학 교수였다. 어머니는 베사라비아 키시네프 유대인 후손이었다. 아리엘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이사했고, 다시 1954년에는 칠레로 이주했다. 그는 칠레 대학에서 수학했고 그곳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1966년에는 앤젤리카 말리나리치와 결혼했고, 1967년에는 칠레 시민이 되었다. 1968년에서 1969년까지 미국 UC 버클리 대학원에서 수학하다가 칠레로 더돌아갔다.




1970년에서부터 1973년까지 도르프만은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의 문화 고문으로 일했다. 그동안 미국의 문화제국주의를 비판한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벨기에 출신 아르망 마테라르와 함께 발표하기도 했다(1971년). 도르프만은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발발하기 전날에 모네다 궁 야간근무를 하게 되어 있었으나 친구 클라우디오 히메뇨와 바꿨다.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도르프만은 칠레를 떠나도록 강요 받았고 망명해서 파리와 암스테르담 그리고 워싱턴DC에서 지냈다. 1985년부터는 미국 듀크대학에서 문학과 라틴 아메리카 연구를 가르치고 있다.


도르프만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피노체트 독재의 공포에 대해 자주 다룬다. 그는 인터뷰에서 세상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인들이 사라져 버리고 고문당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의 대표작 희곡인 <죽음과 소녀>에서는 오래 전 자신을 고문했던 의사라고 믿는 고문 희생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주인공 파울리나 살라스는 의사 미란다를 죽음의 벼랑 끝까지 밀어 붙이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복수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과다. 1994년에 시고니 위버와 벤 킹슬리를 캐스팅해서 로만 폴란스키가 연출을 맡아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도르프만은 ‘삭막하면서도 고통스러웠던 칠레식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자신의 대표적 희곡의 중심 주제였다고 밝혔다.


1990년 칠레에서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에 아리엘 도르프만과 그의 아내는 산티아고와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요즘 즐겨하는 인스타그램에서 아리엘 도르프만을 검색해 보니, 그의 저작에 대한 포스팅보다는 희극/연극에 대한 포스팅이 압도적이었다. 그가 쓴 저작보다 아마 국내에서는 연극으로 더 유명한 기분이다. 문득 그의 연극도 기회가 되면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대표작은 희곡 <죽음과 소녀>다. 1994년에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도르프만의 희곡을 바탕으로 시고니 위버를 주인공으로 한 <진실>이란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래 전에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느낌이다. 부랴부랴 네이버 검색으로 영화의 줄거리를 훑어 본다. 그리고 슈베르트가 작곡한 동명의 <죽음과 소녀>도 찾아서 들어 봐야지. 영문판에는 총은 든 여전사 시고니 위버가 자신을 고문한 의사 미란다의 턱을 움켜 쥐고 총을 든 모습이 그려져 있다. 멋진 포스터가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몇 권의 책들이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원제와는 사뭇 다른 <체 게바라의 빙산>, 원제는 <유모와 빙산> 정도. 그런데 구글링해 보니 원래 표지는 무척이나 야했다. 아니 작가의 홈피에서 본 것이었던가. 1992년 칠레가 피노체트의 야만적인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로 고통스러운 전진을 하던 시절, 세비야 엑스포에 실제로 출품한 빙산에 대한 이야기를 아리엘 도르프만이 소설화한 거라고 한다. 오늘 도서관에 가서 냉큼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24세 청년 가브리엘 매켄지의 이메일 유서로 아마 시작됐지.

 

다른 두 권도 빌려 왔는데 아르망 마텔라르와 공저한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이다. 전자의 부제는 무려 “디즈니 만화로 가장한 미 제국주의의 야만"이다. 놀랍군, 미국 듀크 대학에서 라틴 아메리카 문화강의를 하면서 이런 도발적인 제목을 발표하다니 말이다. 월트 디즈니가 개발한 착취 시스템은 유명하지. 국제법에 따라 지적재산권 시효가 끝난 미키마우스 캐릭터를 지들 맘대로 20년 더 늘려서 해먹질 않나, 그들에게 상호간의 규칙 따위는 지킬 필요가 없는 그런 것이다. <블레이크 테라피> 역시 매력적인 책으로 보인다. 지금으로서는 정보 부족으로 패스.

 

 

 

 

 

 

 

 

 

 

 

 

 

 

칠레 시민들에게 9월 11일이 잊을 수 없는 그런 날이 되었던 것처럼, 칠레 시민들이 합법적으로 세운 사회주의 정부를 구박하던 미국인들에게 9월 11일은 똑같은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압도적 군사력으로 모네다 궁을 압박해 오던 쿠데타군에게 항복하고 망명하라는 군인들의 협상조건을 거부하고, 별이 된 아옌데 대통령을 추모하며 부족한 글을 맺는다.

 


Rest in peace, Dr. Allende. #NeverForget as the other meaning in the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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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9-13 1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아리엘 도르프만, 이란 작가가 제 눈에 띄면 레삭매냐 님이 생각날 것 같군요.

이 글 읽으며 많이 배워 갑니다. 유익한 글로 추천합니다!!!!!

레삭매냐 2018-09-13 11:40   좋아요 2 | URL
저도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답니다 -

그리하야 <체 게바라의 빙산>과 <도널드 덕>을
동시다발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아마 후자부터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디 마이너스
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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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어느 수업 시간에 교수님에게 왜 그렇게 청년들이 혁명에 목숨을 거냐고 질문했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그 시절에는 혁명에,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나 보다. 군대라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사회 적응 시스템을 거치고서도 나는 여전히 그런 허튼 꿈을 꾸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득권의 철옹성은 강고하고 적폐와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내가 부재한 시절을 손아람 작가가 소설로 쓴 <디 마이너스>를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요즘 나름의 독서 슬럼프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말 재밌게 읽었다. 나에게는 귄터 발라프와 만남에 버금갈 만한 그런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손아람 작가의 짧은 칼럼들은 많이 읽었는데 소설로는 처음 만났다.

 


서울대 미학과 출신이라는 작가의 체험담 그리고 비둘기학번 혹은 00학번 불린 학생운동이 종언을 고하던 시절(모든 학생운동가들은 그들이 운동의 마지막 세대였다고 말했다지)의 전설들이 소설 <디 마이너스>에는 버무려져 있다. 1980년대에도 1990년대에도 마르크스는 청년들의 연구대상이었다. 그런데 무려 2000년도에도 여전히 독일 출신의 불세출의 사회과학자가 한국의 청년들에게 숭앙받고 있는지는 미처 몰랐다. 물론 이제 대안은 아니고,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보조재 정도의 역할이긴 하지만 말이다.

 

시작은 소설의 화자 서울대 미학과 출신으로 한때 그들이 그렇게 타도하고 싶었던 대한민국 자본의 맹주 삼성전자 홍보부에 다니는 박태의다. 그와 운동 동지였던 양진우의 청첩장이 잊힌 기억의 저편에서 가열찬 운동시절을 소환한다. 그래 그 땐 그랬지 아마. 작가는 스스로 모두가 가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는 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지 않는다. 아마 그동안의 삶을 통해 그 사실을 부인하면 할수록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걸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예 소설의 공간적 무대를 서울대로 잡았다.

 

예전에는 사회과학 써클이라는 이름으로 새내기들을 모집하곤 했었지. 그동안 고등학교에서 공부만 하느라 사회 경험만 일천한 스무살 청년들이 그 어려운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읽고 사회모순에 격분해서 운동에 투신(투쟁 정신)하는지 그 때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튀는 놈들을 선배들은 될 성 싶은 떡잎이자 미래의 재목으로 보고 점지해서 키웠다. 당시 서울대에만 NL, 연대회의, 전학협의 세 개의 정파가 있었다고 했던가. 그중에 주인공은 가운데 조직인 연대회의 소속이었고. 나의 학생운동에 대한 기억은 전대협 혹은 한총련에서 끝나는 지라 IMF 이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투쟁 같은 이야기들은 정말 생소했다. 사수이자 훗날 연인이 되는 강남좌파 미쥬의 손길에 이끌려 세미나(명백하게 의식화 교육의 다른 표현이었다)에 참가하고, 사시를 패스하고 검찰이 되는 운동권 선배에 손에 이끌려 사수대 소속으로 차출되어 가열찬 투쟁의 최전선에 나섰다.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법. 그런 이유로 해서 사진 채증이 되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공범으로 화염병 투척조였던 동료 진우를 불게 된다. 그전의 농활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다. 학문의 전당이라기 보다 이제는 보다 나은 직장과 미래의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한 직업훈련소로 전락해 버린 대학의 모습이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럴 바에야 대학을 만들 게 아니라, 유명직업훈련소로 개명하는 게 낫지 않을까. 프랑크푸르트 학파 출신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면서 음대 출신으로 아름다움에 대해 무언가 더 알아 보겠다는 조교에게 성적 수치심을 안긴 교수의 작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지금 같으면 미투운동으로 당장에 옷을 벗길 인간의 모습이 아니던가.

 

일찍이 미셸 투르니에가 <외면 일기>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소설 <디 마이너스>의 시간은 동지 간의 우정도, 사랑도, 정파간의 증오도, 심지어 그들이 그렇게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동력이 되었던 사회 모순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대의명분도 모두 파괴해 버렸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어떤 명분을 가지고 가열찬 투쟁의 전선에서 명예롭게 퇴진하는가의 문제가 달렸다. 순차적으로 영웅들이 무대에서 퇴장을 시작한다. 사수대의 무시무시한 전사 대석 형이, 뛰어난 조직가이자 자본의 굴레를 뚫고 약자의 편에 서려고 했던 미쥬가, 연대회의 정파의 불모지 공대에서 마침내 회장에 당선된 진우가 그리고 마지막 태의가 학생운동이라는 무대를 떠난다. 그야말로 사랑도 명예도 부질없어진 선수들이 떠난 무대를 또 누군가는 채우게 되겠지.

 


이러저러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154편의 짧은 이야기를 읽는 동안 행복했다. 결정적으로 부재한 시간들을 메꿀 수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젊은 시절 그렇게 사랑에, 운동에 매진했던 이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어떤 후일담이 등장할까. 손아람 작가가 들려주는 훗날의 에피소드들은 하나 같이 아쉬움 그 자체였다. 한 때 무엇보다 소중했던 자신의 신념을 지금 일상의 안위의 가치와 교환한 데서 오는 비루함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칙칙한 운동권 스토리만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미래의 좌파 이론가로 촉망받던 수리가 학교 축제에서 번쩍이는 횟칼을 들고 47마리의 광어를 해체하면서 일약 스타가 된 이야기, 선봉대장을 따라 학교를 휴학하고 투쟁선봉대원이 되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노동현장에서 가진 자각의 순간들, 평생 보수로 살아 왔지만 정작 자신의 일자리에서 내몰리게 되자 얼결에 닥터 이블 김정일에게 핵폭탄 한 방을 떨궈 달라는 요청을 한 경상도 아지매의 일화 등 손아람 작가의 번쩍이는 유머들이 돋보이는 순간들도 빼놓으면 안될 것 같다.

 

우리 때는 이런저런 사회적 모순을 견딜 수 없게 된 양심으로 나름대로 치열하게 산 것 같은데 요즘 젊은이들은 또 어떤 고민을 가지고 사는지 궁금해졌다. 그들의 고민의 실체를 모르면서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가 아닐까. 그 때의 동지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는지도 또 궁금하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잘 먹고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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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0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09-10 13:13   좋아요 1 | URL
오늘 어느 기사를 보니 국민연금 그리고 부동산
으로 촉발된 세대 간의 (계급)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하는군요.

성장의 과실을 독점해 버린 기성세대와 그렇지
못한 청년세대의 괴리...

길항하는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을 어떻게 다스
려야 할지 걱정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09-10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또 나에게 추천해주시네요 ㅎㅎ

레삭매냐 2018-09-10 20:01   좋아요 1 | URL
오래 전 사두고 읽지 못하던 책이었는데
어젯밤에 새벽까지 손에서 책을 뗄 수가
없더라구요 :> 재미 하난 기똥찹니다.
 
슈거 푸시 작가정신 소설향 20
이명랑 지음 / 작가정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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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 동안 나의 책장에 고이 모셔둔 책 두 권 중의 하나였다. 다른 한 권인 <사랑의 수사학>과 함께 작가정신 출판사의 소설향 시리즈로 나온 책이다. 난 그 때 왜 이 책을 샀고, 그리고 왜 읽지 않았을까. 5년이 지난 무더운 음력 8월에 나는 문득 재밌는 소설이 읽고 싶어졌고, <슈거 푸시>는 나의 그런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다.

 

군인의 아내로 21개월 아들 현을 둔 소설의 도발적 화자의 이름은 이소희.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녀의 나이는 27세다. 알다시피 군인 하사관의 월급이 빤한 건 당연지사. 그 중에 일부를 쪼개서 소희 씨는 라틴댄스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라틴댄스 학원의 당당하고 어여쁜 강사를 소희 씨는 나비라고 명명한다. 똥배는 집어 넣고, 아름답고 기왕이면 요염하게를 외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는 제비나비 같고 나머지 선수들은 배추흰나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이명랑 작가는 소희 씨의 남편을 너무 단순하게 다룬 게 아닐까. 군인이라는 직업부터 시작해서, 잠자리 서비스까지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없는 돈에 아내보고 어떻게 만들어내서 지인들의 경조사를 챙기라는 그런 이기적인 남자로 몰아간다. 이 책이 언제 나왔나 싶어 보니 자그마치 13년에 나온 책이다. 요즘 이랬다가는 바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내가 무슨 빵셔틀도 아니고, 없는 돈을 어떻게 만들어 내라는 거지.

 

그런데 소희 씨도 남편 김태후 씨도 후덜덜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으니 그건 바로 소희 씨에게는 엄마, 태후 씨에게는 장모님이다. 언제고 외동딸 소희 씨에게 물려 줄 거라는 그 집안의 금송아지 집 한 채가 그녀가 가진 강력한 무기다. 소갈머리 없는 사위는 장모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내 소희 씨를 닦달한다. 어쩌면 이렇게 성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무능한 놈팽이가 또 눈치는 이리도 빠른지. 어쩌면 군이라는 조직 내에서 배운 자신만의 생존 노하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명랑 작가는 군데군데 소희 씨의 과거를 삽입하면서 자신도 강사 나비 씨 같이 어여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해낸다. 그리고 물론 비밀도 있다. 어려서부터 도벽이 있던 소희 씨는 야한 망사팬티, 싸구려 귀걸이 한 짝, 파리 할머니가 건네준 소위 미친 년들이나 입을 법한 빌로드 치마 그리고 옛 애인 찬의 사진 등을 남모래 소중하게 보관한다. 그리고 가끔씩 속담배도 뻑뻑 피워댄다. 친구 혜선이 조장한 대로, 이혼하고 나서 거실에서 남편 눈치 보지 않고 보란 듯 피우는 담배가 그렇게 맛있었노라고 이야기했던가.

 

<슈퍼 푸시>는 라틴댄스에서 남녀가 서로의 손바닥을 맞대고 떠미는 그런 동작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마 그 동작이 아마 달달했던 모양이다. 이름조차 슈거 푸시일 정도니 말이다. 소희 씨가 일상에서 겪는 자잘한 고민과 채울 수 없는 욕망의 기원을 작가는 조근조근하게 들려준다. 어려서부터 소희 씨의 엄마는 그녀의 엉덩이를 보며 수차례 결혼과 아버지가 다른 아이들을 낳은 할머니에게 배운 거라며 부도덕하다며 비난했다지. 로열 젤리를 독식하는 여왕벌처럼 그 집안의 여왕벌은 자신 하나로 족하다는 듯 딸이 하고 싶은 일들, 다시 말해 소희 씨의 욕망을 거세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결과 소희 씨는 가출도 불사하고, 집에 돌아왔을 적에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산부인과를 들락거리는 그런 파렴치한 딸이 진짜 되어 버렸다. 엄마로써 딸의 실수나 잘못을 감싸 주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대놓고 망신을 주다니, 상식적이진 않지만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는 제격이지 않은가. 시시때때로 대가리에 똥만 가득 찼다고 비난투로 말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하긴 어려서 터무니 없는 짓을 저지르곤 했을 때, 그 시절 어른들은 그런 비난을 하곤 하셨더랬지. 아니 근데 대가리에 똥만 가득 찬 게 뭐가 어때서.

 

이런 비난이 공공연하게 담벼락을 넘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자신의 욕망을 마음대로 채워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경고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조용히 하라는 대로 공부나 하면서, 체제순응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라는 어른들 나름의 공모가 아니었을까 싶다. 무엇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요즘처럼 공개적으로 토의를 하고, 사유를 나누며 고민해결을 위한 방법을 생각해 보는 그런 시간이 있었다면 반대급부로 그렇게 엇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어느 날 소희 씨의 비밀 컬렉션이 들통이 나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면서 소희 씨의 비상은 탄력을 얻게 된다. 그렇지 아무리 이렇게 소소하게 진행되던 이야기라도 이런 한바탕 극적인 사건이 있기 마련이지. 거실에 퍼질러 앉아서 남은 세 개의 담배를 태우고, 엄마가 자신을 다양한 방법으로 갈구던 히든 카드에 대한 생각을 하던 우리의 소희 씨. 아마 13년 뒤에는 이런 거지같은 집구석 하고 바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상상을 해본다.

 

딸에게 가부장적 질서를 들이미는 대상이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라는 점이 특이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정이라는 파시즘 소굴을 통해 유전자에 각인된 기성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욕망을 가진 주체로 거듭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소희 씨의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다시 한 번 알게 됐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스템의 굴레가 얼마나 강고하고 상상이상이었는지 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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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위한 홀로그램
데이브 에거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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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한국 학생회가 아니라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의미한다, Kingdom of Saudi Arabia)에 사업을 위해 들른 미국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앨런 클레이, 나이는 54세. 한 때는 자전거 제조업체 슈윈의 유능한 영업사원이었다. 미국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절, 그의 성공과 영화는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던 때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영원한 게 있었던가. 미국 제조업의 몰락과 더불어 슈윈의 자전거 사업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앨런은 유연한 노동시장을 찾아 회사의 본거지 시카고에서 미시시피로 그리고 다시 헝가리와 중국/대만으로 값싼 노동력을 찾아 떠났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노조파괴자였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회사에서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 역시 해고대상이었다.

 

아내 루비와 이혼하고 만성 채무에 시달리며, 딸 키트의 학자금 확보가 발등에 떨어진 앨런 클레이가 왜 이 시점에서 사우디 아라비다의 제다에서도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KAEC(킹 압둘라 경제도시)의 PT 텐트에 와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천국보다 낯선 곳에서 매사추세츠 보스턴 출신 데이브 에거스의 소설 <왕을 위한 홀로그램>이 시작된다.

 

소설에 보스턴 출신 앨런 클레이의 회상 부분에 액턴, 데댐이니 자메이카 플레인 같이 익숙한 지명들이 등장해서 더 반가웠다. 문득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 위키피디아를 뒤져 보니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보스턴에서 1970년에 태어난 데이브 에거스의 부모님은 변호사와 학교 선생님이셨다. 아마 유복한 가정환경을 지녔겠지.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1991년과 1992년에 각각 뇌암, 폐암 그리고 위암으로 돌아가시게 되면서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이런 과정은 자신의 데뷔 소설에 담은 모양이다. 그 책도 읽고 싶어졌다. 이런 작가의 내력을 읽어 보니 <왕을 위한 홀로그램>에 등장하는 딸 키트에게 수시로 보내는 편지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가 있었다. 관계의 회복이라고나 할까.

 

다시 KSA로 돌아가 보자. 실제로 킹 압둘라의 희망사항대로 사막에 석유를 의존하지 않는 자립자족적인 경제혁신도시를 짓자는 구상은 7개 중에 유일하게 KAEC만 현실화되었다. 소설에 유머처럼 등장하는 현대판 파라오, 킹 압둘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에 최첨단 기술을 도입하고 싶어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미국의 최신 기술을 가진 릴라이언트 사의 홀로그램 기술이 요청되었고, 1인 컨설팅회사를 근근히 꾸려 나가는 앨런 클레이가 와의 조카와의 실낱같은 인맥을 동원해서 프리젠테이션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됐다.

 

문제의 사우디의 관습이 미국의 사업체 간에 이루어지는 그것과 상이하다는 것이다. 사막의 텐트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왕을 기다리는 시간들이 이어진다. 이미 첫날부터 사막행 셔틀을 타지 못해, 미국 유학경험이 있는 청년 유세프(요셉, 성서에 등장하는 바로 그 구원자로다)가 운전하는 다 낡아빠진 차를 타고 KAEC로 향한다. 중간중간에 자신의 고된 삶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회사를 위해 노조파괴에 나섰다가 자신마저 해고당한 아들을 경멸하는 아버지 론의 이야기, 음주운전으로 딸에게 창피를 산 패기 넘치는 와이프 루비에 대한 에피소드 등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아, 이웃의 초절주의자 찰리 팰런이 긴급출동한 구조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천히 호수에서 익사한 이야기도 나왔던가. 집도 팔려고 내놨는데 집을 보러 온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지 아마. 정말 웃겼다.

 

25P 집 안의 유령 같은 존재가 있어요, (데이스 에거스 식 유머의 폭발)

 

<왕을 위한 홀로그램>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주인공 앨런 클레이 역은 탐 행크스가 맡았다. <다빈치 코드>에서는 미스캐스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제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소설도 다 읽었으니 영화를 볼 차롄가. 소설을 읽는 동안 왜 자꾸만 정말 오래 전에 본 영화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이 떠오르지 모르겠다. 느낌이 비슷하달까. 덴마크 출신 매력적인 여성 하네 그리고 자가수술한 지방종/종양을 집도한 닥터 자라 하켐과 아슬아슬한 관계에까지 가지만 중년남자의 욕망을 쉽사리 불이 붙지 않는 모양이다. 너무 많은 걱정거리를 껴안고 있어서였을까. 홍해 바다에서 하켐 박사와 스노클링하는 장면은 정말 멋진 설정이었다.

 

엄격하게 알코올이 금지된 KSA에서 문샤인이라 불리는 밀주를 마시고, 스테이크 써는 칼로 종양을 스스로 파내는 일을 하지 않나, 샌달을 팔아 번 돈으로 사막에 산을 깎아 세운 성 같은 유세프 아버지의 집에 가서 이리 사냥에 나서는 장면들은 정말 미국식 오리엔탈리즘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또 KAEC 같은 기획도시의 건축물들이 미국 플로리다나 애리조나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어도비 벽돌로 만들어진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결국 킹 압둘라가 도착해서 릴라이언트 직원들의 멋진 시연에도 불구하고, 계약은 중국 업체가 따갔다는 역설은 이미 미국에 있는 친구의 일화에서도 듣지 않았던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왕서방이 입찰에 참가한 기업의 유리 제조 특허권으로 알맹이만 쏙 빼먹었다는.

 

소설 <왕을 위한 홀로그램>에서 저자 데이브 에거스는 몰락해 버린 미국 제조업에 대한 향수를 팍스 아메리카나 시절 전 세계에 개입하던 아버지 같았던 부성에 대치한다. 경제력을 잃은 아버지 앨런 클레이는 8년 만에 자신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두 번의 유혹에도 별 감흥이 없는 모양이다. 현재에 집중하기엔 그러니까 걱정거리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일자리, 건강, 거주, 자녀교육 등 무엇 하나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없다. 그 이미지는 세계시장에서 점점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오만한 엉클 샘에 대한 상징이려나. 현재 모든 면에서 좌충우돌하며 종잡을 수 없는 이웃나라 대통령이 연상되기도 했다.

 

KSA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도 데이브 에거스는 짧은 단상을 전한다. 이제는 여성의 자동차 운전이 허용되었지만, 책이 발표되던 당시까지만 해도 KSA에서 여성의 운전은 허용되지 않았다. 최근에도 여성운동가가 참수형을 선고받지 않았던가. 나라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유능한 젊은 인재들이 무언가 창의적인 일과 사고를 할 수 없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국왕에게 지배되는 KSA의 현실이 서구에서 교육받은 유수프와 닥터 자라 하켐의 삶을 통해 여실히 드러내지 않았던가. 재스민 혁명이 엉클 샘의 강력한 동맹국 KSA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모양이다. 유수프가 앨런을 자신의 차에 태울 때마다, 전처 자밀라의 질투심 많은 남편이 사제폭발물(IED)를 설치하지 않았나 싶어 전선을 점검하는 장면도 폭소를 자아냈다.

 

미국 제조업의 몰락, 사막에 신기루 같은 KAEC 스토리, KSA의 페미니즘 이슈, 노동조합 파괴자의 최후, 다 큰 자녀와의 갈등을 비롯한 다양한 주제들을 적당한 수위에서 다룬 <왕을 위한 홀로그램>을 재밌게 읽었다. 제목에 등장하는 ‘홀로그램’은 킹 압둘라를 홀리기 위한 그야말로 신기루 같은 아라비안 나이트의 상징 같은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봤다. 데이브 에거스의 데뷔작을 한 번 읽어 보고 싶은데 분량 때문에 선뜻 도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영화를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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