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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기자 귄터 발라프의 언더커버 리포트 - 세계화가 만들어낸 멋진 신세계 탐험
귄터 발라프 지음, 황현숙 옮김 / 프로네시스(웅진)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독일의 유명한 저가형 할인매장 리들이 어떻게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지 귄터 발라프의 언더커버 리포트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리들이라는 회사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봤다. 최근 유통업계의 화두가 된 PB브랜드로 무장하고, 동종 업계에서 최저가격으로 승부를 거는 그런 업체였다. 그런데 정작 궁금한 리들이 어떻게 그런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은 부재했다. 얼마나 깊이가 없는 기사인지 바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한국의 기자들은 하나의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 참으로 노력을 하지 않는구나 싶기도 했다.
전통적 그리고 기본적 우리의 삶을 모조리 파괴하는 세계화의 덫으로부터 한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의 힘은 상상도 국경도 초월한다. 1960년대부터 그런 부조리한 사회의 단면들에 대한 진실을 캐기 위해,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암행취재라는 방식을 선보인 귄터 발라프가 이번에는 모두 7개의 종목에 도전한다. 처음에는 문명과 민주주의라는 꽃장식을 단 선진국 중의 선진국 독일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을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이 직접 흑인으로 분장하고 차별의 최전선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피부를 검게 만드는 약을 복용하고 취재를 하다가 죽기까지 했다고 하던가. 발라프 아저씨, 제발 건강까지 해쳐 가면서 취재는 하지 말아 주세요, 걱정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점잖은 독일 신사들이 발라프가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유람선에서 당연히 맥주 서비스를 하는 웨이터로 판단하는 장면은 정말 불편했다. 어디 그 뿐이던가? 사회 곳곳에서 아예 대놓고 인종차별이 이루어지는 것을 독자는 생생하게 목격한다. 애견동호회에서도 그저 등산을 즐기기 위해 참여한 모임에서도, 바비큐를 즐기기 위해 참여한 캠핑장에서도 ‘흑인’ 발라프는 환영받지 못한다. 소위 문명세계에 산다는 1세계 사람들의 위선을 그대로 까발리는 대머리 아저씨의 한 방에 속이 다 시원했다.
그의 두 번째 미션은 노숙자 체험이었다. 답답하고 꽉 막힌 독일식 관료주의는 엄동설한에 일단 사람부터 살리자는 발라프의 충언에 귀를 막고 눈감아 버린다. 어쩌면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심지어 멀쩡한 사람이 마약중독자 행세를 해서, 마약중독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수용시설에 입장해야 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역시나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한 사람들이 갱생할 수 없는 시스템은 독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자유주의 정글자본주의 시대에 그 누구도 바로 일자리를 잃고 노숙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예 무시하려는 태도가 사실은 개인적으로 더 무서웠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그렇게 칭송해 마지 않는 하르츠4 개혁에 대해서도 독일 사람들마저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귄터 발라프의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됐다.
다음 타겟은 신자유주의 시대 그야말로 노다지 같은 자본의 광산인 텔레마케팅 시장 잠입이었다. 콜드 콜(cold call)이라고 해서, 소비자가 원하지 않는 무차별 전화 테러에 가까운 방식으로 콜센터에 채용된 직원들은 자신의 양심까지 팔아 가면서 상품 판매에 열을 올린다. 문제는 그게 전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긴 우리도 당장에 가입하지 않으면 손해 본다는 보험판매 전화를 안 받아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 그전에 기기묘묘한 방식으로 자신의 개인정보 판매를 허용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주지의 사실이다. 마트 할인카드, 카드포인트 그리고 이벤트 응모 등등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누출된 나의 개인정보를 바탕으로 콜센서 전사들은 영업에 나선다.
귄터 발라프는 이번에도 멋지게 변장을 하고서, 콜센터 사기 판매의 세계에 뛰어든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취재 당시에는 합법적이었던 복권 판매였는데 저자는 무엇보다도 콜온 같은 전화판매 회사도 문제지만, 정부도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우선 콜온 같은 대기업의 구조를 갖춘 회사들은 쾰른투름(한국으로 치자면 코엑스 정도 비즈니스 센터) 같이 휘황찬란한 장소를 많은 비용을 들여 임대해서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심는 작전을 구사한다. 그리고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연방 및 지방정부에서는 그런 전화 판매회사들의 구직을 장려한다. 사실 복권 판매로 단위 정부에 재정이 증대되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고 대머리 아저씨는 기술한다. 바로 앞에서 실적을 강조하는 상사의 감시 아래, 정확한 정보 제공도 없이 거의 위협적이거나 혹은 유혹적인 온갖 방식을 동원해서 소비자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다. 콜센터 직원들 역시 양심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감정의 소비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계약에 따른 실적 보너스를 받기 위해 내 양심을 지키는 대신 사기를 치는 것이란다. 그놈의 돈이 항상 말썽이지. 그런 독일의 모습과 우리네 그것이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서두에서 언급한 리들에 독일 사람들에게 프랑스의 바게뜨 같은 브뢰첸 빵을 만들어서 공급하는 라인란트 팔츠 지역 훈스브뤼크에 소재한 바인츠하이머 형제 제빵 주식 회사의 추악한 현실을 다시 한 번 언급할 차례다. 일단 유통 공룡인 리들은 최저가 경쟁이라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빵 하청업체인 바인츠하이머를 악랄하게 쥐어짠다. 그러니까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라인에서 뜨거운 철판에 노동자들이 다치거나 말거나 리들의 관심을 오로지 저가로 제조한 브뢰첸 뿐이다. 자본의 세례를 듬뿍 받은 금수저 사장 바인츠하이머의 베스터호르스트만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자사의 노동자들을 엄중하게 감시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다.
바인츠하이머 같은 회사들은 독일 헌법이 규정하는 노동자 보호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무자비한 생산속도와 부상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리들과의 계약 위반으로 물게 될 위약금이 그리고 노후화된 시설을 교체할 비용이 아까워서 일자리가 궁한 노동자들을 사납게 몰아붙인다. 아니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브뢰첸이 목으로 넘어갈까 싶다. 이런 악질 기업은 망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현장에서의 상황이 이럴진대, 누가 도대체 반기업정서를 부추기고 있는지 그 잘난 입으로 떠들어 대는 국회의원에게 묻고 싶다. 리들에 대한 다른 기사에서는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해서 최저가 경쟁신화를 이루어냈다고 기자가 쓰고 있는데, 리들 같은 유통공룡 기업들이 불필요한 비용이 아니라 생산과 유통에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비용마저도 절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대머리 아저씨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일까? 바로 스타벅스다. 그런데 이번부터 나머지 세 꼭지는 자신이 직접 암행취재를 한 것이 아니라 기업의 ‘내부 식민지인들’의 내부고발, 제보와 인터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고객친화적인 업체라는 모토를 가지고 고객을 응대하는 스타벅스는 커피/에스프레소를 파는 곳이 아니다. 스타벅스는 고급화된 커피전문점이라는 이미지를 파는 곳으로 변신했다. 시애틀에서 출발해서 세계 커피 제국으로 성장한 스타벅스는 공정무역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제국의 수장 슐츠 회장과 주주들의 수익을 위해 일하는 일개미들을 원할 분이다. 하워드 슐츠 제국은 세분화된 다양한 직군으로, 부유한 도심 주변에 잇달아 같은 스타벅스 매장을 내면서 무시무시한 카니벌리제이션(자기시장잠식)도 마다하지 않는다. 직원들의 교육시간에는 당연히 임금이나 수당이 지급되지 않고,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직원들의 노동착취를 극대화시키는 전략은 이제 기본이 되었다. 에티오피아 커피재배 농민들과 브랜드 전쟁을 한 것은 철저하게 숨기고, 달랑 5% 가량 공정무역 거래를 하면서 양심적인 기업이라는 선전에 나서는 게 바로 스타벅스의 오늘이다. 이래도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겠는가.
독일철도주식회사(DB)의 민영화 과정에서 드러는 천태만상에서는 지난 MB정부 시절 보고 들은 한국의 철도민영화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정부의 핵심기간 산업이기도 한 철도사업을 오로지 민영화했다가 낭패를 본 나라들이 어디 한 둘인가. 특히나 수익이 나는 구간에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수지가 맞지 않는 곳에 지원해야 하는 게 철도사업의 기본이 아니었던가. KTX 사업을 민영화하는데 그토록 공을 들인 지난 정권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 보였다. 일시적으로 가격이 내려갈 수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철도운영에 있어 중요한 안정을 위한 기본 정비도 무시하면서까지 비용절감에 의한 수익추구가 어떤 결과를 불러 올지 진정 몰랐단 말인가. 대형사고가 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열악한 상황으로 치달은 독일철도에 대한 기사들이 등장한다.

6번째 이야기까지 독일 국내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편견 그리고 노동착취에 대한 리포트라고 한다면 마지막 장은 탐욕스러운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연대를 구축한 노조 혹은 경영협의회를 파괴하는데 고용주의 입장에서 부역한 유능한 변호사들에 대한 고발이 이어진다. 대표적인 선수로는 헬무트 나우요크스라는 변호사가 등장한다. 기업의 노조파괴 전문가라는 말이 정확하게 어울리는 인사로, 자신은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기업경영에 눈엣가시 같은 인사들을(그들을 기생충이나 쥐로 부른다) 모빙(직장 내 따돌림)으로 솎아내는 최신 기술을 천유로씩이나 받는 유료 세미나(부가세는 별도다)를 통해 고객들에게 전파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인사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양심도 없으며, 오로지 6자리 숫자의 성공보수만이 필요할 따름이다. 절대 해고할 수 없는 이들을 해고하는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어때 듣기만 해도 솔깃하지 않은가.
일단의 변호사들은 경영협의회의 리더들을 타겟으로 해서 갖자기 공작과 음해를 마다하지 않는다. 감시의 상시화는 물론이고, 해당 직원 동물 포르노그래피를 업무 시간에 중에 보았는 소문을 퍼뜨려 평판을 떨어뜨리는 작업시작해서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사찰까지도 감행한다. 그들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과 손해배상도 나우요크스 같은 변호사 무리를 고용해서 진행하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한다. 사실 이런 송사들의 목적은 금전이 아니라 그들에게 정신적 쇼크와 육체적 타격을 가하기 위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전사들의 공격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귄터 발라프는 이 책에서 정말 가감 없이 그대로 고발한다.
귄터 발라프의 <언더커버 리포트>를 읽다가 자주 만나게 되는 하르츠4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한국 정치권에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롤모델로 항상 입버릇처럼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독일의 위대한 노사정 대타협이라며 선전하던 하르츠4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정부와 자본(기업)은 항상 노동자들의 희생만을 요구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독일식 하르츠4 개혁에도 문제가 많기 때문에 폐기하고, 해당 개혁을 주도했던 사민당(SPD) 내부에서도 50만원 남짓한 실업급여가 아닌 150만원 정도의 기본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고 하지 않은가. 지난 번 독서모임에서 우리의 헤르메스님이 주창한 기본소득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었을까? 선구자는 역시 다르구만 그래.
하르츠4를 그야말로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정작 하르츠개혁의 본질을 모른 채, 규제완화와 저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양산해내고 실질적 복지축소를 가져온 피상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독일에서도 하르츠개혁으로 만성적 실업율을 획기적으로 축소시킨 건 사실이지만, 반대급부로 고용안정과 복지확대가 역진하고 있는 부정적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생산된 다수의 미니잡이 안정적 일자리가 아니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 아닌가. 기업가와 정치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게 아닌가 말이다. 독일 경제회생의 비밀은 유로통합으로 유럽경제를 사실 좌지우지하게 된 독일의 통화 가치 절하였다. 경쟁국들에 비해 고품질의 기술과 뛰어난 가격 경쟁력을 갖추게 된 독일의 강소기업들이 유럽경제를 제패하게 되었다는 것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국내 보수언론들에게는 하르츠개혁의 실체보다 노사정 대타협으로 발생한 노동 유연성이 쓸모없는 일자리를 늘렸다는 가시적인 수치와 구호만이 중요하니 말이다.
책의 뒷꼭지에 실린 강수돌 교수의 글은 이미 책을 읽다가 독일 내 이주노동자 문제와 하르츠개혁에 대해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에 만났던 글들인지라 반가웠다. 인권선진국이라는 독일에서도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가 이럴진대 한국의 경우는 어떤지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그의 주장대로 한국에서도 노동전문법원이 생겨서, 항상 강자가 이기는 진부한 장면 대신 연대한 다수의 약자들이 부당한 대우과 편견을 깨고 이기는 장면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법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다. 아울러 발라프 같은 책임감 있고 용감한 저널리스트의 등장도 기대해 본다. 그가 지난 40년 동안 신념을 가지고 보여준 그동안의 노고에 마음에서 우러난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