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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과 함께 전선에서 - 한스 폰 루크 회고록
한스 폰 루크 지음, 진중근.김진완.최두영 옮김 / 길찾기 / 2018년 6월
평점 :

독일 국방군 출신 최연소 대령이자, 조상 대대로 육군으로 조국에 봉사해온 프로이센 귀족 가문 출신의 한스 폰 루크의 회고록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를 읽었다. 블리츠크리크로 유명한 폴란드 전역으로 시작해서, 대 프랑스 전에서는 롬멜 휘하의 유령 사단(제7기갑사단)의 일원으로, 대소전을 비롯해서 북아프리카에서는 사막의 여우 롬멜 휘하에서 아프리카 군단으로, 노르망디에서는 영국군을 상대로 싸웠으며 마지막 베를린 포위전에서는 소련군을 상대로 무용을 자랑한 그야말로 베테랑 중의 베테랑 전사의 기록은 상상을 초월했다. 전후에는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그루지야의 굴락에 버금갈 만한 포로수용소에서 5년간 잡혀 있다가 고향인 플렌스부르크로 귀환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생부를 잃은 루크는 목사 출신이었던 양아버지 슬하에서 엄격한 프로이센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원래 루크는 법과대학에 진학할 계획이었지만, 가문의 직업인 군인이 되라는 양부의 조언에 전후 전승국의 엄격한 감시를 받던 제국 육군의 일원으로 직업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훗날 무적의 독일 기갑부대의 모체가 되는 차량대대(그 유명한 판지로 만든 장갑차와 탱크 부대)의 사관후보생으로 프로이센식 엄격한 규율과 훈련을 받으면서 미래의 기갑부대장으로서의 꿈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드레스덴 보병학교 시절 만난 교관 에르빈 롬멜 대위와의 운명적 만남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루크가 소위로 임관할 무렵 등장한 히틀러의 등장은 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600만이나 되는 엄청난 실업률, 가혹한 전쟁배상금과 영토 할양 등으로 국민적 수모를 겪던 독일 국민들에게 새로운 일자리와 라인란트 진주 등으로 인기몰이를 시작한 국가사회주의 나치즘의 부상은 독이 든 성배였다. 변명 같이 들리지만,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요구하는 독일 군대의 특성은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지 못하고 국가수반의 자리에 오른 히틀러의 재무장과 이어지는 군부장악 와중에 대다수 제국군은 과거의 영광의 재현이라는 선전선동 아래 나치스의 도구가 되었다.
소위 임관 후, 한스 폰 루크는 유럽 각국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러시아 어를 배우는 기회도 갖게 되는데, 훗날 러시아에서 혹독한 포로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1930년대 중반에는 소련과 비밀리에 맺은 협정에 따라 기갑부대 훈련을 소련에서 받을 기회가 있었다는 에피소드(결국 무산되었다)도 흥미롭다. 아울러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도 출전할 뻔 했다는 화려한 전적이 차례로 등장한다. 저자의 저술을 읽다 보면, 한스 폰 루크야말로 독일이 자랑하는 군인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충성, 엄격한 신체조건, 교양과 학식까지 모든 요건을 갖춘 엘리트 장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전장에서는 적군이었던 폴란드군과 소련군 역시 조국을 위해 자신과 같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점을 인정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시발이 된 폴란드 침공전에서 기갑수색대대 중대장으로 실전에 참가한 루크는 준비된 전사로서 부족함이 없는 용맹을 보여준다. 야전에서 지휘관으로 병사들을 무작정 사지에 내모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희생으로 적진을 돌파하기 위해 궁리하고, 솔선수범해서 자신이 최전선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훈련과 신념으로 무장한 전사의 모습이 아니던가. 루크는 뛰어난 전략가답게 폴란드와 공수동맹을 맺은 영국과 프랑스가 서부전선을 무너뜨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히틀러의 예언대로 연합군들은 꼼짝하지 않았고 그야말로 앉은뱅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폴란드전에서의 승리로 사기가 충천한 독일군은 예봉을 서부전선으로 돌렸다. 총통의 경호대장에서 야전 기갑사단장으로 돌아온 산악보병 출신 베테랑 롬멜이 지휘하는 제7기갑사단의 일원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빛나는 독일군의 승리를 장식한 대 프랑스전에 루크는 투입된다.
루크는 롬멜 이상의 창의적 아이디어로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인츠 구데리안의 장갑부대 전술 운용의 시험장이 될 서부전선 무대가 마냥 반가웠다. 최신 무기와 효율적인 훈련, 개전에서의 혁혁한 승리로 고무된 독일 국방군은 5월 9일 개전과 동시에 프랑스 전역을 휩쓸기 시작했다. 루크는 전장에서 신사도에 입각한 페어플레이 정신을 마음껏 발휘한다. 전쟁에 미쳐 날뛰는 무장친위대와는 달리 상대방을 존중하는 진정한 군인정신의 발로라고 해야 할까. 만슈타인이 제안한 아르덴숲 돌파가 성공을 거두면서 롬멜이 지휘하는 제7기갑사단은 일명 유령사단으로 불리면서, 프랑스 전장을 신출귀몰하게 누빈다. 루크는 사단의 최전방에서 맹활약을 펼친 덕분에 독일군에게는 가장 명예로운 철십자 훈장을 수여 받기도 한다. 독일 본토에서 출발해서 보르도에 있던 프랑스 임시정부를 추격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 루크는 다음 번에 투입될 대소전에 앞서 휴식과 정비를 취한다. 격렬한 전투와 ㅍ평온한 휴식이 반복되는 가운데, 전쟁기계 독일 국방군이 처음으로 패배를 경험하게 될 모스크바 공방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도 모스크바를 함락시키는 것이 대소전의 1차적 목표였다면, 겨울이 오기 전에 신속하게 모스크바를 공격해야 했다. 하지만 최종 목적지인 우랄산맥까지는 자그마치 3,000KM 되는 거리였고,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코 앞에 두고 진격이 멈추어졌다. 계속되는 전투에서의 피로감과 전장에 계속해서 무한대로 투입되는 신예 부대와 전차의 행렬을 보면서 루크는 어쩌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백이십년 전 나폴레옹군의 퇴각 기록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다행히 아프리카 군단의 일원으로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던 옛 스승 롬멜이 루크에 대해 차출요청을 하면서 루크는 소령으로 승진해서 극한의 소련 전장에서 이번에는 열사의 아프리카로 무대를 옮긴다.
호기롭게 투입된 아프리카 전장에서 중상을 입은 루크는 본국으로 이송되어 수개월 동안 요양을 하게 된다. 부상이 회복된 뒤,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운 뒤였다. 북아프리카 전장에서 결정적이었던 엘알라메인 전투에서 보급물자와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은 상대적으로 보급에서 열세였던 독일군을 압도했다. 비행기와 대포, 전차, 탄약, 병사들의 식량 그리고 무엇보다 기갑부대를 운용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휘발유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독일군에게는 충분한 게 없었다. 롬멜은 너무 늦기 전에 후퇴해서 후방을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하려고 했지만 총통음 무조건 현지사수를 요구하고, 전략적 후퇴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궁지에 몰아 넣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충분한 물자를 제공한 것도 아니었다. 탄약과 휘발유가 없어서 싸울 수가 없다면 이미 말다한 게 아닌가. 사실 북아프리카 전장은 히틀러에게 가장 중요한 전장이 아니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궤멸적 패배로 승리의 여신은 그동안 독일군에게 보내던 미소를 연합군쪽으로 돌린 지 오래였다.
루크는 어쨌든 이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동쪽에서는 영국군으로부터 그리고 서쪽에서는 이제 막 전쟁에 뛰어든 미군을 상대로 후위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루크가 추구하는 페어플레이 정신은 사막에서도 어김없이 재현되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지도 모르는 전장에서 그런 에피소드들이 존재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멋진 이야기들이 현지에서 실전을 체험한 군인에게 전해 듣는 경험을 정말 짜릿했다. 전쟁 후에 루크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미 영국 첩보부대는 독일군의 모든 통신 암호를 선취해서 그들이 전장에서 어떤 전략과 계획으로 나올 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독일군들이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불굴의 의지로 전투에 나섰지만,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건강이 악화된 롬멜의 뒤를 이어 아르님 대장으로부터 ‘특별 임무’를 부여 받은 현지 대대장 루크는 독수리요새에서 은거 중인 히틀러로부터 너무 늦기 전에 최정예 아프리카 군단 병력을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 본토로 후퇴시켜 훗날을 도모하자는 계획을 승인받기 위해 본국으로 향한다. 그 순간에서도 수십만의 병사들이 아프리카 열사의 땅에서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데, 점심식사를 하는 총통을 알현할 수 없다는 참모의 말에 루크는 울분을 터뜨린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어느 시대고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롬멜의 충언을 따르지 않은 히틀러는 2주 뒤에 튀니지에 포위된 독일군의 유럽 본토 후퇴를 승인하게 되는데 이미 늦은 결정으로 자그마치 13만 명이나 되는 베테랑 아프리카 군단의 독일 장병들이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게 잡힌 독일 병사들은 미국 본토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는데, 독일군 포로병사가 등장하는 3년 전에 읽은 <독일병사와 함께한 여름>이란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났다. 롬멜은 동쪽의 영국군보다 신참내기 미군이 상대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카세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에게 그야말로 본때를 보여주었다. 루크는 이 때 경험을 바탕으로 비록 미군이 전투에서 패하긴 했지만,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역에서 전투가 거듭될수록 창의적인 방식으로 적응해 갔다는 냉철한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가는 길에 야지에 집적된 미군의 엄청난 물자를 목격한 독일군 포로들이 이런 물자가 그들에게 있었다면 승리는 그들의 것이었다는 외침이 그저 공허하게만 들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프리카 전역은 독일군의 패퇴로 끝이 났고, 다시 전간기의 휴식이 루크에게 주어졌다. 1943년 6월, 어느 파티에서 1/8 유대인 다그마와 만나 로맨스에 빠지기도 한다. 아마 다그마와의 연애가 이 청년 장교가 전장에서 그 숱한 위기를 뚫고 생존할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던 건 아닐까. 루크는 다시 롬멜 휘하에 배속되어 제2전선의 개막을 맞이하게 된다. 롬멜의 전략대로 연합군의 상륙을 해안에서 저지해야 했지만, 전역을 맡은 사령관 롬멜과 사단장 포이히팅어 모두 노르망디에 부재했다. 히틀러는 연합군의 주공이 파드칼레 지역일 거라는 자신의 예상을 고집하면서, 신속하게 기갑부대를 동원해서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을 요격할 절호의 기회를 상실해 버렸다. 이후 제공권을 장악한 영미 연합군은 압도적인 포병전력과 함포 사격의 후원 아래 독일군의 보급로를 강타하면서 동쪽으로 진군을 개시한다.

제21기갑사단의 예비대로 작전지역에 투입된 루크 연대 전투단은 탄약, 휘발유 그리고 식량 무엇 하나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캉 전투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효과적인 지연전술을 발휘했다. 루크 중령은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서 자신의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창의적인 전술을 동원해서 영국군의 진격을 막아내려고 고군분투했다. 후에도 등장하는 페가수스 다리 전투와 빌라 보카주 전투 같이 노르망디 전역에서 거의 신화에 가까운 전투를 치르면서 본토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지옥 같은 전장에서, 루크는 드디어 제3제국의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절감한다.
프랑스에 주둔 중인 독일군에게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팔레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데 성공한 루크는 연합군의 본토 진공을 앞두고 알자스의 리터스호펜과 아떵에서도 격전을 치른다. 잠시도 쉴 새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투이번에는 독일 내륙을 가로 질러, 제국의 심장부인 베를린으로 진격해 오던 소련군을 상대로 치른 할베 전투를 마지막으로 루크는 포로가 되어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전쟁을 끝마치게 된다. 한편 최후의 전투에 나선 루크와 그의 전우들이 독일 본토로 쳐들어오는 스탈린 적군이 사방에서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 분노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과연 그들은 자신들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자신들의 뒤를 이어 진주한 게슈타포와 특수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이 소련 전역에서 저지른 만행에 아무 것도 몰랐단 말인가.
그후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5년간의 혹독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무사히 고향으로 귀향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연인 다그마와는 너무 상이한 생활 조건 때문에 결국 이별하게 된다. 이후 루크는 호텔리어와 민간기업의 수출업자로 변신해서 생활을 영위해갔다. 그후에는 노르망디 전역에서 자신과 맞서 싸운 영국군 장교 존 하워드와 친분을 쌓고 영국 참모대학과 스웨덴 국방부의 초청으로 노르망디 행사에도 참가하고 당시 독일군의 방어전략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책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1991)는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스티븐 앰브로즈의 도움으로 펴내게 되었는데,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숱한 2차세계대전사에 대한 책과 회고록 중에서 가히 최고가 아닐까 싶다. 독일군 최연소 대령인 한스 폰 루크가 참가한 전역이 폴란드, 프랑스, 소련, 북아프리카, 노르망디와 독일 전역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2차세계대전의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장군이나 참모가 아닌 기동부대의 일원으로 최전선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바탕으로, 히틀러 체제에서 자신이 얼마나 제국의 레벤스라움 확보라는 가짜 대의에 속아 전쟁에 나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처절한 반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과 전장에서 맞닥뜨린 적군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 주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독일 국방군의 엘리트 전사답게 페어플레이 정신을 강조하는 몇몇 장면들도 압권이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히틀러의 수하로서 전쟁에 나섰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리라. 그의 러시아 포로생활이 없었다면 어쩌면 루크의 회고록은 그만큼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을까. 최근 출간된 나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의 비서였던 브룬힐데 폼젤의 일대기를 다룬 <어느 독일인의 삶>에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고 항변하는 누군가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 주목할 하다고 생각된다. 후자도 꼭 한 번 읽어 봐야겠다.
[뱀다리] 제목과 달리 1944년 7월 20일 히틀러에 대한 쿠데타 기도가 실패한 뒤, 주범으로 몰려 결국 자살한 롬멜에 대한 이야기가 이후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점도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한스 폰 루크는 자신의 정신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롬멜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던 걸까. 그것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