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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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로맹 가리를 읽으려고 시작하는 독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로맹 가리가 죽기 전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된 <내 삶의 의미>는 작가이자 레지스탕스 전쟁영웅, 외교관,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를 아우르는 로맹 가리 인생 전부를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깔끔한 모둠회 같은 책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로맹 가리는 할례 받은 유대인 출신으로, 러시아-폴란드-프랑스 그리고 미국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주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최근에 귀화한 프랑스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보르 항공학교에서 장교 임관을 받지 못하고 하사관이 되어 어머니 니나가 기다리는 니스로 돌아올 때의 열패감은 진짜 대단했다. 최근 월드컵에서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가 우승을 차지했다는 점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이웃 독일은 외국인 혐오주의, 특히 무슬림 터키 출신 외질의 국가대표직 반납을 두고 소음이 일지 않았던가. 반세기도 더 지난 후에도 여전히 통합의 문제가 이슈가 되는 유럽의 오늘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짧은 인터뷰 집을 통해 로맹 가리는 자신의 신화를 때로는 인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정하기도 한다. 우선 전자의 경우에는 <하늘의 뿌리>에서 프랑스 최초의 생태주의 작가로 보여준 코끼리 보호 선봉에 섰던 경력을 자랑한다. 로맹 가리 인생의 초반부에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 주었던 어머니 니나의 영향력 자장 아래, 절대 여자의 돈을 받지 말라던 정언명령대로 파리 유학 시절 한 때 타락의 길로 들어설 뻔 했던 경험도 숨기지 않는다. 와인의 나라 후예답게 술고래라는 별명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평소부터 알코올을 멀리했다고 하는데, 왜 나같은 얼치기 독자는 술고래 작가라는 이미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로맹 가리에게 자유프랑스군의 지도자 드골 장군은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주입한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 프랑스를 대표하는 이미지였다. 앙드레 말로를 따라 스페인 내전에도 참전했었고 아비시니아 전쟁에도 참전했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아쉽게도 이번 인터뷰집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도미니크 보나가 썼다는 로맹 전기를 한 번 읽어야 하나 싶다. 어쩌면 로맹 가리 읽기의 완성은 그의 평전으로 끝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악전고투 끝에 다 읽은 <새벽의 약속> 덕분에 인터뷰 대담집 읽기는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그렇지, 로맹 가리는 이때 이런 고민들을 했었지.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저자의 일생을 돌아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또 어떤 미진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는 새롭게 알게 된 정보들도 많았다. 특히 어머니의 소망 대로 프랑스 대사 혹은 국가를 대표하는 외무장관이 되지는 못했지만(후보에까지 거론되었다고 한다) 불가리아 대사관 서기관, 유엔 대표부 대변인, 볼리비아 대리공사 그리고 훗날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이루게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로스앤젤레스 총영사에 이르는 다양한 경력의 나열이 경이롭게 펼쳐진다.

 

연상의 아내 진 세버그와의 만남, 그리고 할리우드 판에 뛰어 들어 작가답게 시나리오는 물론이고 아내를 주인공 삼아 만든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도 있다고 했던가. 연출자로서는 혹평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해당 영화를 찾아 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프랑스 내의 혹평대로 영화 초반부부터 너무 과다한 노출과 폭행 장면이 부담스럽더라. 그런데 왜 나중에 진 세버그는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자와 바닷가를 거닐며 바닷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 걸까. 대충 봐서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영화적 재미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지상 최대의 작전>의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가하고, 요즘으로 치면 블록버스터 영화에 해당하는 <클레오파트라>의 주인공 카이사르 역으로 캐스팅 될 뻔 하기도 한 할리우드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히 흥미롭다. 실버스크린의 매력으로 할리우드의 부유한 제작자들은 그야말로 로맹 가리를 똥개 부리듯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들의 철저한 오판이었다. 죽는 날까지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바람둥이 작가는 길들여지지 않는 “흰 개”였을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로맹 가리는 자기가 사는 동안 유일한 관심사는 바로 여성, 여성성이었다고 고백한다. 어쩌면 그건 자신의 성공을 유일한 인생의 목표로 삼은 어머니 니나 카체프의 바람에서 기원한 게 아니었을까. 자신의 아들이 모든 여성의 영원한 연인이 되길 원했던 어머니의 소원대로 레지스탕스, 작가, 외교관, 전쟁영웅, 영화제작자 그야말로 남자라면 원하는 모든 걸 이룬 사람이 된 아들은 여성성에 대한 사랑을 모토로 해서 작가 생활에 뛰어들었다. 로맹 가리의 그런 경향은 나이가 들고 작가로서 원숙해질수록 동경을 넘어 집착에까지 이르렀던 게 아닐까 싶다.

 

모든 시대에 기존의 작가들은 다시 읽히기 마련이다. 나에게는 처음이지만, 그의 작품들을 섭렵하면서 로맹 가리를 재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모든 작가들이 그렇듯 범작도 있고, 또 예상을 뛰어 넘는 수작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네 삶의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그래서 로맹 가리의 작품들이 더 매력적이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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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7-24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

레삭매냐 2018-07-24 14:25   좋아요 1 | URL
열심으로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9권 남았네요.

카알벨루치 2018-07-24 14:35   좋아요 0 | URL
화이팅 레삭매냐님~

목나무 2018-07-24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로맹 가리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읽어보면 좋겠다는 정보 잘 챙겼습니다. ^^

레삭매냐 2018-07-24 17:39   좋아요 0 | URL
에밀 아자르 말고도 외교관 시절에 가명으로 낸
책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마음산책에서 다 펴낼 진 모르겠지만 말이죠.

로맹 가리 책들의 판권이 마음산책-문학동네-
문학과 지성사에 퍼져 있는 것도 신기하네요.
 
흰 개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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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로맹 가리의 책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건 아니어서 어떤 책들은 또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고 있다. 오늘도 세 권의 책을 빌려 왔다. <흰 개>는 지난 주말에 빌려온 책인데, 어제(7월 19일)부터 읽기 시작했다. 1968년 1월 30일 베트남에서는 테트 공세로 주월 미군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전투에는 승리했지만 결국 전쟁에 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4월 4일에는 미국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했다. 당연히 극한의 폭력이 분출했고, 문명사회는 들썩였다. 바로 이 시점에 로맹 가리는 아마 미국에 아내 진 세버그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에게 다른 사회적 이슈들보다도 심각한 당면 과제는 흑인만 보면 잔혹한 공격성을 내보이는 “흰 개”였다.

 

그가 바트카(러시아 어로 ‘키 작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라는 뜻이라고 한다)라고 이름 회색 셰퍼드는 백인들이 주는 밥만 먹었다. 나중에 그 개에 대한 이력이 드러나는데, 남부에서 키워지면서 흑인만 공격하게 체포하게 훈련받은 경찰견이었다. 개 사육장에서 로맹 가리는 그런 개들을 ‘흰 개’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된다. 세상에 이런 극심한 인종주의의 부산물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바트카의 원래 주인이 등장해서 그들이 인종주의 온상 앨라배마 출신이며, 수대째 보안관과 경찰관직을 역임해 왔다는 말에 로맹 가리는 대놓고 면박을 준다.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들이기에 이런 악랄한 방식으로 ‘흰 개’를 길렀단 말인가. 개 사육장에 있는 로맹 가리의 지인들이 바트카가 재교육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앨라배마 출신 노인 역시 리셋이 불가능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아무래도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으니 말이다.

 

68세대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극심한 정치적 대립이 계속되고 있던 1968년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라는 점을 꼭 명심해야 할 것 같다. 미국 배우 출신으로 타국 프랑스의 연인이 되고, 블랙 팬서단의 온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휴머니스트 진 세버그를 FBI국장 에드가 후버는 블랙리스트에 올리고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모략질을 일삼았다. 일국의 정보국장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어린 처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 세버그의 고향 아이오와 주의 마셜타운으로 향한다. 장례식에서 역시나 미국내 뿌리 깊은 인종주의의 진실과 대면하게 된다. 과연 분리차별정책(segregation) 밖에는 답이 없다는 걸까. 그리고 마틴 루터 킹 암살로 온 미국이 들끓는 가운데 흑인 친구 아니 ‘소울 브라더’ 레드를 찾아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흑인 인권운동의 방식을 전해 듣게 된다.

 

베트남 전쟁에 소총수나 탄약수 등으로 동원된 흑인 전사들이 훗날 미국내 무장투쟁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거란 레드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로맹 가리는 그들보다 다섯 배나 많은 수의 백인 전사들이 있노라고 대꾸한다. 정말 드골 주의자다운 대꾸가 아닐 수 없다. 레드의 아들 필립은 베트남 전에 장교로 참전해서 또 하나의 영웅이 되고자 하고, 다른 아들 발라드는 프랑스 여자와 사랑에 빠져 탈영을 감행한다. 그리고 대선 레이스 중인 밥 케네디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나는 어디선가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내가 책을 제대로 읽기는 하고 있는 건가? 단순하게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작가의 시선을 추적하는 것 같았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프랑스는 미국 이전에 안남(베트남) 혹은 코친차이나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이 아니었던가. 그 다음에는 알제리에서 빨치산들의 독립투쟁에 맞서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른 나라가 아니었던가.

 

페미니즘과 동물보호를 옹호하면서도 우파 보수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포기하지 않는 이방인 로맹 가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내 진 세버그는 열렬하게 흑인 민권운동가들을 후원하지만, 정작 그들에겐 흰둥이 개○일 따름이었다. 말론 브란도를 위시한 일단의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좌지우지하는 인사들이 모여서 후원 모금하는 장면도 역시 레지스탕스 영웅에겐 하나의 개짓거리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자유프랑스군의 일원으로 로렌 십자가를 앞세우고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겠다는 모습도 68혁명의 대의와는 정말 거리가 있는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보니 흰 개 바트카는 백인을 공격하는 검은개가 되어 있더라는 결말에서는 정말, 이 작가가 <흰 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뭐였나 하는 혼란에 빠져 버렸다. 굳이 역자 후기는 읽고 싶지가 않았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미완성으로 나의 독서를 남겨 두어야 하나 싶다.

 

이제 로맹 가리 읽기가 중반을 넘어섰다. 앞으로 남은 책은 모두 열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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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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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에 <새페죽>을 다 읽고 나서 리뷰를 쓰려고 내가 이 책을 언제 샀나 싶어서 기록을 검색해 보다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을 두 번 산 것이었다. 아니 이미 알고 샀었나. 그전에 개정판으로 한 번, 이번 양장 특별판으로 한 번 구매했던 것이었다. 같은 책을 두 번이나 사다니. 어쨌든 만날 표제작만 읽다가 이번에는 드디어 다 읽는데 성공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지난 주에 도서관에 빌린 로맹 가리의 인터뷰집 <내 삶의 의미>를 읽기 시작했는데, 천상 드골 주의자였던 레지스탕스 출신 전쟁영웅이자 (프랑스) 영토 해방 전사였던 영원한 이방인 로맹 가리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러시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폴란드로 이주했다가 결국 꿈에 그리던 프랑스 니스에 안착해서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살 수 있었던 남자. 나중에는 외교관으로 미국 LA 총영사로 한 10여년을 미국에서 살았다고 했던가. 지금 같이 읽고 있는 중인 <흰 개>에서는 뜨거웠던 1968년 혁명시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접할 수 있었다.

 

자긍심 강한 이 레지스탕스 영웅의 페르소나는 소설 곳곳에 무시로 등장한다. 표제작 <새페죽>에서는 속세를 떠나 페루의 어느 바닷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화자로 등장하기도 하고, 작가로 분신한 페르소나는 아이티 바닷가에서 서구 영웅 신화를 재현하기 위해 상어가 득실거리는 작살총 하나만 달랑 들고 뛰어 들기도 한다. 고향을 떠나 이발사로 죽은 탐험가는 고향의 옛사랑에게 줄기차게 세계 곳곳의 진귀한 우표가 붙은 엽서들을 발송하는데, 알고 보니 그가 보낸 엽서의 우표들은 고스란히 옛 사랑의 현재 남편의 우표 컬렉션이 되었더라는 웃기 못한 현실과 마주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 인간들이란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현실만 보면서 살게 되더라는 그런 말인가.

 

자신의 외교관 경험을 녹여낸 <류트>에서는 이스탄불 바자의 매력적인 골동품 시장을 누비는 멋쟁이 현직 외교관의 풍류를 읽을 수가 있었다. 절대 돈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가치 혹은 아우라를 지닌 진품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앞서는 주인공은 외교관 나리의 품위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던 모양이다. 물건은 사지도 않으면서, 내내 그렇게 아이쇼핑만 해댔으니 말이다. 어쩌면 자신의 딸이 지적한 대로 만들어진 예술품에 대한 감상이 주는 만족보다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그런 캐릭터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는 잘 아는 상인에게 선물로 받은 ‘류트’를 연주하게 되었더라는 그런 설정. 왠지 트란 안 훙 감독의 <그린 파파야>에 나오는 그런 끈쩍끈쩍하면서도 관음적인 느낌이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트란 안 훙이 연출해 낸다면 어떤 식의 영화가 될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다.

 

<몰락>에서는 미국의 전설적인 노조지도자의 복귀를 앞두고 그의 옛 동지들은 시멘트에 공구리쳐서 바다에 수장시킨 이들이 몇 톤이나 되고, 산 사람을 진짜 “그리스” 조각으로 만들 정도로 깡다구로 무장한 호보켄의 거인 마이크 사파티에 대해 로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동료들이 다시 만난 사파티는 진짜 행위예술가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사파티를 소재로 해서 또다른 작품을 창조해 내기에 이른다. 진짜 무시무시하면서도 가치 전복적인 구성이 아닌가. 소설집 <새페죽>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였다.

 

진짜와 가짜 예술품을 판별해 내는 주인공에게 놀라울 정도로 센 어퍼컷을 먹이는 <가짜>는 또 어떠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품은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예술품으로서의 고유한 가치보다 금전적으로 매겨지는 자산이 되어 버렸다. 그런 산업에 중심에는 범람하는 위작을 진품으로부터 구별해내는 감별사(왜 난 여기서 갑자기 병아리 감별사가 떠오른 거지?)가 반드시 필요해졌다. 주인공은 절대 가품을 진품으로 판별해 달라는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 예술산업 종사자로서의 품위를 지킨다. 그러자 그에게 앙심을 품은 의뢰자는 그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 ‘가짜’임을 증명하는 사진을 그에게 배달한다. 그가 사랑하는 아름다움이 사실은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그에게 폭로해 버린 것이다. 복수라는 치졸함 뒤에 숨은 행위와 우리 눈에 보이는 미추의 구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유하게 만들어주는 수작이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어온 가치가 전복되는 기가 막힌 순간에 대한 또다른 포착은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에 등장한다. 자본주의 광풍에 휘말려 원시적 순수함을 모두 상실해 버린 타히티 파페에테에서 주인공을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좀 더 순수함이 고갈되지 않은 마르키즈 제도의 타라토라에 정착했다고 했던가. 문제는 한 때 마르키즈 제도의 여러 섬을 지배했다는 추장의 딸 타라통가가 선의로 호두과자를 싼 천을 보내오면서 시작된다. 바로 그 천이 폴 고갱의 그림이라는 걸 확신한 내레이터는 자신만이 그 가치를 알아본다고 생각하고, 추장의 딸에게서 거금 70만 프랑을 들여 1억 프랑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천들을 사들였다. 막판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타라통가가 탁월한 모작 화가라는 사실이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사기극이었지만, 추장의 딸이 그에게 천조각들을 사달라고 했던가? 화자 혼자 판단해서 그런 투자를 한 게 아니었던가. 이 단편에서는 지난주에 한국을 강타했던 러시아 보물선 돈스코이 호 인양에 뛰어든 수많은 개인 투자자들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그렇지, 어디에 순수가 존재한다고. 순수를 원하는 이들은 그저 타라통가 같은 선수들의 좋은 사냥감일 뿐.

 

<새페죽>에서 내가 주목한 주제는 바로 “전복의 미학”이었다. 일상대로 흐르는 이야기 속에서 묵직한 한 방을 준비한 로맹 가리의 기술에 감탄했다. 작가는 이미 자신의 삶을 통해 로맹 가리 그리고 에밀 아자르라는 구도로 당대 비평가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다채로우면서도 전복적인 이야기들을 구술하려면 도대체 얼마만큼의 개인적 체험과 독서편력이 필요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로맹 가리 읽기는 순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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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7-23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님께선 진정한 책 마니아시군요.
책 마니아중 하나가 샀던 책은 또 산 거라잖습니까?
그래도 용서하세요. 로맹 아저씨잖아요.ㅋㅋ
혹시 한 권은 필요 없으시다면 저 같은 마음에는 있으나
사지도 읽지도 못하는 길손에게 넘겨 주시면 복 받으실 텐데요...ㅋㅋ

레삭매냐 2018-07-23 13:24   좋아요 1 | URL
하하하 이미 <별을 먹는 사람들> 같은 경우엔
지난 주에 생일선물로 보내 드렸네요.

<새페죽>도 그러고 싶으나 당최 어디에 가 있
는지 찾을 수가 없네요. 나중에라도 그전에
산 책을 찾으면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로 2018-07-23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드디어 리뷰가 올라왓군요!! 기다렸어요~~~.^^;;;
저도 자칭 로맹가리 팬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모르던 이야기도 있네요.
앞으로도 님의 로맹가리 읽기 순항을 응원합니다!^^

레삭매냐 2018-07-23 14:24   좋아요 1 | URL
네네 응원 감사합니다 -

방금 전에 올린 <흰 개>까지 해서 모두
열 권의 로맹 가리 책들을 읽었네요.

이제 남은 책들의 수도 열 권이네요.

로맹 가리의 대표작 <하늘의 뿌리>가
어쩌면 가장 험난한 고지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로맹 가리 지음, 이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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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전작읽기를 선언한 이래, 집에 있는 로맹 가리의 책들을 모두 찾아서 읽지도 않을 거면서(아직 차례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버릇이 생겼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도 사실 <새페죽>을 다 읽고 나서 보려고 했다. 그냥 몇 쪽만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재밌더라. 그래서 <새페죽>도 다음으로 미루고 계속 읽었다. 이번 7월은 가히 로맹 가리의 달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다.

 

소설의 화자는 저자 로맹 가리처럼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초로의 나이(59세)가 된 자크 레니에다.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회사는 사업이 지지부진해서 좋은 가격에 회사 매각을 고민 중이다. 자크는 미국인 갑부이자 호색한 짐 둘리 소유의 은행에 호의를 기대해야 하는 불쌍한 처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둘리보다 애인 로라 수자(22세)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 있다는 점 정도. 그것도 최근 발생한 전립선의 위기로 자존심이 상해 있다. 브라질 출신 젊은 애인을 성적으로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크는 ‘전립선 변호사’의 권고도 무시한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지켜 보다 보니 문득 영화 <광란의 사랑>이 연상된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영화의 제목이 떠올랐다.

 

이 책이 나온 해는 1975년, 그러니까 로맹 가리 61세가 되던 해였다. 프랑스 문단에서는 한 때 프랑스 문학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었던 대가의 몰락이라고 신랄한 비평을 날렸다. 그가 <자기 앞의 생>으로 두 번째 공쿠르상을 수상한 에밀 아자르라는 걸 모른 채 말이다. 소설 속의 페르소나 자크 레니에처럼 확실히 노년의 로맹 가리는 오십대의 자신과 견주어도 노쇠했다는 느낌이 든다. 전에 읽은 <레이디 L>과 지금 읽고 있는 <흰 개>와 비교해 봐도 그렇다.

 

주인공 자크는 오일쇼크의 여파 탓인지 계속해서 서구 사회에 없는 에너지 자원에 대한 갈구를 서구의 몰락으로 연결시키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자신의 성적 무능함과 다국적 기업에서 자신의 출판사를 넘길 수밖에 없는 경제적 위기를 동일선상에 올려 놓고 냉정한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라는 주문한다. 생로병사라는 자연의 흐름을 외면하고 싶은 무신론자의 발악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책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의 적나라한 전개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아마 프랑스 문단에서 그를 불편하게 생각했는 지도 모르겠다.

 

젊은 애인 로라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노년의 자크가 가진 강박은 어느 날 둘이 거주하는 호텔에 침입한 강도이자 ‘안달루시아 야수’ 몬토야(자크는 그를 루이스라고 명명한다)를 고용해서 자신의 성적 대리인으로 삼겠다는 판타지에 젖는다. 자신은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라틴 사람들이나 흑인 혹은 아랍인에 대한 성적 콤플렉스 때문에 그들을 이용하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한 인종주의의 흔적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 와중에 자크는 오랜 레지스탕스 동지이자 지금은 포주로 활약하고 있는 릴리 마를렌을 찾는다. 자신의 생명보험금 4억 프랑을 아들 장피에르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모종의 계획을 세우지만 현명한 여인 릴리의 조언으로 계획은 무산된다. 그리고 성적으로 노쇠했건 그렇지 않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하는 애인 로라와 터키건 이란이건 어디론가 먼 곳으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확실히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는 기존의 로맹 가리가 구사한 희망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숭배라는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제는 더 이상 남성으로 누구에게도 매력적이지 않은, 오래된 레지스탕스 전사의 광휘와 문학가에 대한 일정한 존경심 정도 밖에는 남지 않는 한물간 작가라는 혹평에도 불구하고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프랑스 문단에 묵직한 어퍼컷을 날리지 않았던가.

 

전성기가 지난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쇠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주변의 관심은 관계의 소멸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특히 잘 나가던 시절을 경험한 로맹 가리 같은 작가라면 더더욱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 같다. 지방 밤무대 혹은 미사리 라이브카페에 등장하는 예전 스타 연예인들의 심정이 그랬을까. 난 아직 죽지 않았는데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당신의 승차권>이 <자기 앞의 생>보다 리얼한 로맹 가리의 본모습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긴 했지만, 노작가의 넋두리 같다고나 할까. 동정은 하지만 공감까지는 아직 부족한 것 같다. 무려 4년 전에 사서 아직 읽지 않은 책이라니 놀랍다. 읽지도 않았지만 작가의 책을 컬렉션한 것으로도 로맹 가리의 팬이라고 불릴 만하지 않은가. 좀 억지스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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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급자족한다
오한기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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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코드명은 프란츠 카프카. 프리랜서 작가로 스토리텔링으로 돈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한다. 유명인이나 재벌들의 자서전 대필은 물론이고, 영화비평 광고문구 제작, 사보만들기 그리고 정치성향은 진보지만 우파 댓글알바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일을 하다가 결국 CIA요원으로까지 발탁이 되었다. 이제부터 나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 쫌 황당하다. 최소한 CIA 요원으로 활동하려면 원어민 수준의 유창한 영어와 비범한 재능은 기본이 아닐까 싶지만, 오한기 작가는 그런 것 따위쯤은 카프카 아저씨의 스토리텔링 능력으로 가볍게 제압해 버리신다. 게다가 CIA가 적으로 규정하고 때려잡고 소탕하기 위해 자금과 요원 그리고 시간까지 소모해 가며 타겟으로 삼은 집단은 바로 자급자족단(SSM:Self Sufficiency Members)이라고 한다. 대량생산에 끊임없이 소비하는 존재(아마도 노동자들)가 있어야 굴러갈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 3.0 시대에 자급자족단이야말로 자본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최고의 사악한 무리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소설이 구사하는 핍진성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면 나처럼 소설 <나는 자급자족한다>를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카프카는 확실히 위기의 남자다. 그놈의 텃밭 소송으로 가산을 탕진하게 생긴 남자는 글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조차 시원치 않다. 대기업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는 아내 해인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자 구원일진대 그녀마저 회사를 그만 두고 지독한 미니멀리즘에 빠져 점점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미래로 훨훨 날아가 버리려는 아내를 지키기 위한 보통남자의 고군분투기 정도로 생각하면 아주 마음이 편하고 재밌을 것이다. 자꾸 따지기 시작하면 어쩌면 속이 부대끼실 지도 모른다.

 

카프카를 스카웃하고 훈련시킨 사람은 한국계 미국인 미아 모닝스타라는 전설적 요원이다. 보다 체계적인 훈련 과정이 아닌 미아가 발표한 저서를 통해 스파이가 되어 가는 과정을 착착 카프카 요원, 흥미롭다. 그 와중에 천재해커 비비양도 등장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볼셰비키(볼키) 그리고 카프카의 전임자이자 알고 보니 베스트셀러 작가기도 한 헤밍웨이 요원이 등장하기도 한다. 고철에서 만든 수제권총 막스 브로트의 총구에서 불이 뿜고, 롯데월드타워에서 재벌 총수 인질극이 벌어지는 등 다양한 사건 사고가 무시로 발생한다. 이거 뭐 스케일에서는 탐 크루즈 형님이 등장하시는 <미션 임파서블> 뺨치는데. 헛된 공상이겠지만 <나는 자급자족한다>를 영화화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티베트의 어느 오아시스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자급자족단의 일상과 인도양 섬에서 한 마리에 1달러 하는 랍스터를 배터지게 먹는 장면은 제발 꼭 넣어 주시길.

 

아쉽게도 재밌게 잘 나가던 내러티브는 종언을 100쪽 정도 남겨 두고 주인공 카프카의 지독한 해인에 대한 사랑 신파 덕분인지 어쩐지 바람 빠진 타이어마냥 피시시 주저앉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좀 더 강력한 한 방이 아쉬웠다. 차라리 모두가 비극으로 치닫는 엔딩은 어땠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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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7-19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만 보면 외국작가의 작품같은데 국내 작가가 지으셨네요.그나저나 랍스터가 1달러라면 저역시 배터지게 먹고 싶습니당^^

레삭매냐 2018-07-19 11:26   좋아요 0 | URL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부담 없이 읽으신다면 재밌습니다.

랍스터 한 마리에 1달러, 당장 달려 가고
싶습니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잔향이 다만...

2018-07-19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07-19 16:11   좋아요 1 | URL
작가 분의 내러티브 설정이 아주 참신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7-19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드명이 프란츠 카프카라면 멋지네요^^:) 지나가는 말입니다만, 누구의 코드명 ‘길라임‘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이제는 큰 의미없지만 생각나 적어봅니다^^:)

레삭매냐 2018-07-19 17:11   좋아요 1 | URL
으응 코드명 길라임?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빵 터져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