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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원.명 - 곤경에 빠진 제국 ㅣ 하버드 중국사
티모시 브룩 지음, 조영헌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10월
평점 :
작년말에 산 하버드 중국사 원나라 명나라 편을 이제서야 읽었다. 부제는 <곤경에 빠진 제국> 그리고 저자는 캐나다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티모시 브룩 교수다. 문득 왜 서구인들이 왜 그렇게 자기네 나라 역사도 아닌 중국 역사에 그렇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언어도 낯선 한자문화권의 중국어가 아닌가. 그들은 어떻게 1차 사료들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거지? 교수 정도 되는 식자층은 우리만큼 한자에 익숙한 걸까? 그런 질문들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접한 대부분의 중국사는 거시사가 주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권력을 담당하는 제왕들 중심의 역사 서술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그런 거시사에서 벗어나 미시사를 다루는 흐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라고 생각한다. 한편, 티모시 브룩 교수는 특이하게도 중국 역사를 6등분한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원명편에서 특이하게도 기후결정론을 전면에 내세운다. 물론 거시사와 미시사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백년 남짓 중원을 제패한 원나라보다는 중국의 마지막 한족 정권이었던 명나라에 대한 비중이 많은 점도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는 늪(slough)이라는 표현으로 원명시기에 중국 전역을 강타한 기후에 의한 재난을 구분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당대 기록에 남은 용의 출현이 홍수, 가뭄, 기근 그리고 역병 같은 재난이었을 거라는 추정에 도달한다. 세계제국이었던 원 시절에는 모두 3번의 그리고 쇄국정책으로 농업제국의 길을 걸었던 명나라 시절에는 모두 6번이 있었다고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원나라의 실질적인 설계자였던 세조 쿠빌라이칸이 세계제국을 꿈꾸며 민족차별정책을 도입했다면, 명나라의 시조 홍무제 주원장은 일통 중화민족의 제국의 부흥을 도모했다. 다행히 명나라 건국 후, 100여년 동안 특이할 만한 재난이 발생하지 않은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양 제국의 주류를 이루는 민족은 달랐지만, 그들의 이상은 거의 동일했다. 황제 전제정치의 구축은 제국 건설자들의 공통적 관심사였다. 제국 통치의 기반은 무력이었다. 몽골족의 원은 말할 것도 없고, 원말기 전국에서 할거하는 군벌 중의 하나였던 주원장 역시 무력으로 한족의 명나라를 건설했다. 물론 제국의 영속성을 위해서는 유가적 질서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태조가 모를 리가 없었다. 유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 질서의 확대야말로 홍무제가 꿈꾸었던 이상향이었다.
정치 질서의 안정은 경제성장을 불러왔다. 경작할 수 없는 토지들은 모두 경작의 대상이었고, 그렇게 생산된 잉여물자를 바탕으로 상업화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물론 지나친 경작의 영향과 산림벌목으로 홍수는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었다. 당대에도 이미 과도한 벌목에 대한 경각심을 가진 관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환경문제는 이미 500년 전에도 심각한 문제였나 보다. 사농공상으로 분류된 명대의 신분제에서 상인들은 가장 계급제도의 가장 밑바닥이었지만, 실제 그들의 소비력은 과거제를 통해 국가를 지배하는 관료가 된 이들의 경제력을 훨씬 능가했다. 며칠 전, 이마트에 들렀다가 그전부터 탐내던 코드제로라는 무선 청소기를 하나 사왔는데, 명나라 시절 죽어라고 노동한 댓가로 세간살이을 바꾸었던 농민들과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상인들의 주거래품목이었던 곡물은 마침 개통된 운하 뱃길을 따라 중원을 남북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가 있었다. 명조정에서는 기존의 현물징세보다 은(銀)을 이용한 재정시스템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농민들이 담당하던 요역 역시 은으로 대납하는 게 정부 차원에서도 그리고 민간에서도 효율적이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한편, 과거시험을 통해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수년간 과거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가문의 유력한 자제들을 지원하기 위한 시스템이 필요했다. 원천적으로 과거는 비용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던 모양이다. 과거를 통해 일단 입신양명하게 되면 중앙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되지만, 전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비슷한 꿈을 가지고 관료로 선발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는 없어졌지만 한 때 고시폐인이라는 말처럼 현대판 과거에 응시해서 입신을 꿈꾸던 후예들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민간 상업의 발달은 당연히 대다수 인구의 소비를 촉진시켰다. 여유가 있는 부유한 상인들은 물론이고, 농민들도 얼마 전에 코드제도 무선청소기를 무이자 6개월 할부로 산 나처럼 이런저런 세간들을 사들였다. 경덕진에서 대량생산되는 도자기는 물론이고, 의자로 대표되는 목젝가구들 그리고 서적들이 대표적인 민간 상품들이었다. 그 중에서 역시나 책쟁이의 관심을 자극하는 물품은 바로 서적이었다. <수호전>, <서유기> 그리고 <금병매> 같은 대중소설들이 대중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서적유통을 촉진시켰다. 과거에 필요한 서적들은 식자층에게나 필요한 것이었고, 문자를 깨우친 이들에게 삽화가 포함된 <금병매> 같이 흥미진진한 대중소설이 인기를 끌었던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통속소설이라며 비판을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티모시 브룩이 점지한 감식안을 갖춘 신사계급의 대표선수는 바로 이일화였다. 빼어난 감식안을 가진 이일화는 자신이 찾는 원명기를 대표하는 문인과 화가들의 가품과 진품을 대량으로 공급하면서 판정을 의뢰하기도 했다. 저자는 그런 점을 흥미롭게 여기면서 상대적으로 진품이 비해 가품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은 그런 싸구려 작품을 위한 시장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동시에 명 말기에 저명한 화가가 그린 <나한>에서는 서양 르네상스 화가들이 발명해낸 명암법의 흔적이 보인다는 점을 들어, 일정한 교류가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티모시 브룩의 저서 <베르메르의 모자>를 한 번 구해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라틴아메리카에 진출한 스페인이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에서 대량으로 채굴한 은과 일본에서 명나라와 무역을 위해 개발한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면서 상업화의 가속도를 붙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조카 건문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영락제는 남경성이 불타면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건문제를 추적하기 위해 정화 원정대를 남양으로 파견했다는 일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명대 초기 활발했던 해양활동은 본토개발에 치중하면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정화의 원정대가 기존의 알려진 인도양과 아프리카까지 중국의 전통적 조공무역을 확대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불필요한 쇄국정책으로 훗날 해양세력에게 침탈당하게 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책에서 저자가 다루고 있는 부분 중에 흥미로운 점은 원나라는 물론이고 명나라 역시 부지불식 간에 페르낭 브로델이 발명한 세계경제(global economy)에 명백하게 편입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캘리포니아의 네이벌 오렌지가 한국 이마트에서 팔리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지만, 볼리비아에서 생산된 은광이 태평양을 가로 질러 마닐라를 거쳐 중국에서 화폐로 유통되었다는 점은 정말 놀랍지 않은가.
레이 황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명나라 황제 가장 오랫동안 제위를 지킨 만력제야말로 망국의 원인을 제공한 원흉이었다고 지목하고 있는데, 사실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만주족의 청나라가 아니라 이자성과 장헌충의 반란군이 아니었던가. 만력 연간 초기에 뛰어난 정치지도자였던 내각대학사 수보 장거정의 재정정책으로 첫 번째 만력 연간의 늪은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황위 계승 문제로 정치를 외면한 만력제의 무능함에서 비롯된 위기는 임진왜란 조선파병으로 막대한 전비 지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이끄는 만주족과의 끝없는 전쟁, 각종 재난으로 국가운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입이 줄어들면서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니까 명제국의 멸망이 어떤 한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무능한 위정자가 이미 정상궤도에서 탈선한 국가의 방향성을 바로 잡지 못했다는 점이 치명적으로 작동하긴 했지만 말이다.
<곤경에 빠진 제국>은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중에 두 번째로 내가 읽은 책이다. 앞으로 4권이 더 남아 있고, 그 중에 두 권은 소장하고 있다. 중국의 마지막 제국이었던 청나라에 대한 책도 그전에 읽기 시작했는데 미처 완독하지 못했지 아마. 나의 세 번째 하버드 중국사 도전은 그 책으로부터 시작해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