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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라 - 돈 드릴로 장편소설
돈 드릴로 지음, 정회성 옮김 / 창비 / 2009년 7월
평점 :

그것 마치 거미줄을 치고 먹이가 잡히길 기다리는 마음이었을까. 돈 드릴로 작가의 포스트모던 소설 <리브라>에 대한 이야기다. 기다리던 중에 월요일날 중고서점을 통해 드디어 수중에 넣을 수가 있었다. 700쪽이 훨씬 넘는 육중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혹이 풀리지 않은 JFK 암살사건을 다룬 <리브라>는 오랜 기다림 만큼이나 매혹적인 소설이었다.
우선 돈 드릴로는 다양한 각도에서 JFK 암살사건에 접근한다. 희대의 미스터리인 만큼 엄청난 종류의 음모론이 도사리고 있다고 들었다.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54년 전인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오후 12시 30분, JFK를 저격한 당사자 리 하비 오즈월드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1939년 생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오즈월드의 유년 시절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출생지 뉴올리안즈로부터 시작해서 브롱스, 댈러스, 포트 워스, 일본의 아쯔기 기지와 민스크까지 총망라하는 인생유전을 보라. 고등학교를 중퇴해서 17세에 해병대원으로 입대한 오즈월드는 15세에 독학으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놀랍군! 자본주의 천국에서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소설가가 다루기에 이보다 더 극적인 인물은 아마 가상으로도 만들어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언제나 현실이 가상을 능가하지 않았던가.
1963년 4월 17일을 기점으로 3년 전, JFK 취임 채 100일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CIA 주도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겠다는 비밀공작으로 추진된 피그즈만 침공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과 이란의 모사데그 정권을 붕괴시키는 탁월한 전과를 올렸던 CIA의 오만이 빚은 참극이었다. 윈 에버렛, 래리 파멘터 그리고 가이 배니스터로 구성된 반카스트로 인사들은 JFK 행정부의 쿠바 유연책에 극도의 거부감을 가지면서 대통령에게 혹독한 교훈을 안겨 주겠다는 생각으로 대통령 암살을 모의하기 시작한다. 물론 정말 대통령을 저격하려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실패한 암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물론 실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돈 드릴로가 구사하는 포스트모던 소설 <리브라>의 디테일은 가공할 만하다. 오즈월드의 일본 아쯔기 기지 시절 레이더 요원으로서의 삶, 권총오발사건으로 전역 후 모스크바 망명기도, 소련 귀화가 좌절되자 자해기도에 이르기까지 오즈월드의 내적 심리묘사는 물론이고 정말 방대한 자료 조사가 없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탁월한 내러티브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대가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 느껴진다. 오즈월드를 모스크바에서 심문한 KGB요원 알렉 키릴렌코가 오즈월드의 진심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을 보라. 진짜 공산주의 천국 소련을 찾은 망명객인지 아니면 CIA의 스파이인지 진실과 거짓으로 중첩된 이미지를 선별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여담이지만, 오즈월드의 어머니 마거리트는 훗날 워런 청문회에서 아들 오즈월드가 CIA 요원이었다는 증언을 했다고 한다. 물론 워런 위원회는 그 증언을 가볍게 무시해 버렸지만 말이다.
아울러 실존 인물이었던 가이 배니스터 삼인방이 왜 그렇게 JFK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핍진성 있게 다가온다.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였던 쿠바가 카스트로의 혁명으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석유개발권과 사탕수수 농장, 아바나 시가제조 그리고 카지노 사업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이권을 가지고 있던 사업가(혹은 비밀공작원)들이 카스트로 정권을 증오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불문가지다. 그들에게 호시절의 쿠바 탈환이야말로 삶의 최고의 목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돈 드릴로가 구사하는 내러티브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다.
소설을 흥미롭게 만드는 점 중의 하나는 돈 드릴로 작가의 세계 정세분석이다. 한국전쟁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미국은 쿠바에서는 낭패를 보았다. 반공주의 신념으로 똘똘 뭉친 반카스트로 카르텔에게 아이젠하워의 흐루시초프에 대한 유화정책와 쿠바 미사일 위기 그리고 훗날 미국에게 재앙이 되는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지는 경찰국가 미국의 위상 제고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앤드루 바세비치가 “워싱턴 룰”이라고 규정한 말대로, 오직 미국만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워싱턴 신조”는 애당초 가능하지도 않은 믿음이었지만 미국의 역대 지도자들은 여전히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소설의 제목 ‘리브라’(천칭자리)는 어디에서 온 걸까? 소설을 읽다 보면 JFK 암살범 리 하비 오즈월드의 별자리가 리브라라는 사실을 만날 수 있다. 천칭의 추는 어느 쪽으로도 금세 옮길 수 있다. 단 7초 만에 미국의 세기를 박살내버린 오즈월드는 포스트모던 소설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으로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자칭 공산주의자, 전직 해병대원, 소련 망명자에서 돌아온 탕자, 러시아 출신 아내 마리나와의 결혼 그리고 친카스트로 이력을 무장하고 사회주의 천국 쿠바로 두 번째 망명을 꿈꾸던 몽상가라니.
소설 <리브라>가 중후반으로 진입하면서 초반의 긴장감이 사그러드는 느낌이 들었다. 난독증과 가난에 시달리던 전직 불명예제대한 해병 오즈월드가 애당초 삼엄한 경호를 받는 JFK의 암살범이라는 게 과연 사실이었을까. 차라리 윈 에버렛, 래리 파멘터와 가이 배니스터 트리오가 보다 유력한 진범이 아닐까 싶은 심증이 드는 건 나만의 오독의 결과였을까. 무려 3년 동안,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 작가가 구상한 나침반이 자꾸만 진짜 범인은 따로 있지 않을까가 지향하는 지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렇다면 암살의 진짜 배후는 누구란 말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1991년에 본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FK>가 생각났다. 당시 7초가 프레임 단위로 기록된 재프루더 필름을 기초로 한 3시간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영화였다는 점만 생각난다. 학교 후배랑 보러 갔었는데 1리터 짜리 음료수를 사들고 들어갔다가 아마 잠이 들어 버렸지. 다시 구해서 살펴 보니 소설과 상당히 비슷한 부분들이 보였다. 차를 사겠다고 나선 오즈월드, 쿠바로 망명하겠다며 멕시코 시티에 간 오스월드 그리고 사격장에서 라이플로 다른 사람의 표적을 쏘며 주위를 끈 이가 모두 다른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묘사한 장면들을 영화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
넌픽션과 픽션을 넘나들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시로 없애 버리는 작가의 능력은 정말 대단했다. 댈러스 역사상 치욕이 된 암살범 오즈월드를 운영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스트립 클럽 사장 잭 레온 루비(유대인)가 암살한 것도 연쇄 미스터리의 또다른 시작이다. JFK의 암살범이 유대인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냐는 자조섞인 한탄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집트 미라의 비극처럼, JFK 암살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된 이들이 하나같이 비극적으로 죽었다는 점도 이 희대의 사건을 영구미제 파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변주를 가하되 원전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대신 판단은 오롯하게 독자의 몫으로 돌리는 기술이야말로 소설 <리브라>를 읽는 재미가 아닐는지.
<마오 II>와 <화이트 노이즈> 읽기에 도전했다가 보기 좋게 실패하는 나는 마침내 <리브라>로 돈 드릴로 읽기에 성공했다. 나의 다음 도전은 <화이트 노이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