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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 -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 지음, 정탄 옮김, 권성욱 감수 / 교유서가 / 2017년 8월
평점 :
역시 읽고 싶은 책은 바로 옆에 두어야 읽게 되는 법인가 보다. 작년부터 한 번 읽어야지 싶었던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의 <덩케르크>를 연초에 샀는데 이제야 읽게 됐다. 왜 난 이상하게도 소설보다도 역사를 다룬 책을 더 빨리 읽게 되는 걸까. 아무래도 문학적 감상의 소설과 역사서는 결이 달라서겠지. 암튼 후자가 진도 빼기에는 그리고 독서슬럼프에는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상 <다이나모 작전>으로 알려진 덩케르크 철수작전의 얼개는 다음과 같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전격전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은 동부전선에서는 치열한 격전이 이루어졌지만, 이와는 반대로 서부전선은 조용했다. 1940년 5월 10일, 동부전선을 평정한 독일군이 예봉을 서부전선으로 돌리기 전까지 자그마치 7개월이나 되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대체 무얼 한 것일까? 동맹국 폴란드가 나치 독일의 기갑부대에게 유린되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던가. 독일 군부는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대로, 동부와 서부 양쪽 전선에서의 전쟁을 회피하는데 성공했다.
지난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겪은 프랑스군은 마지노선을 구축하고, 방어선 뒤에서 독일군을 기다렸다. 독일군 역시 지리한 참호전의 폐해를 몸소 겪었기 때문에 무리한 종심돌파 전략대신 기갑부대를 선봉으로 삼아 아르덴 숲을 돌파하는 연합군을 예상을 뛰어넘는 전략으로 5월 10일 서방공략에 나선다. 맹장 만슈타인과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구데리안 그리고 훗날 아프리카 전선에서 사막의 여우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날린 롬멜이 지휘하단 제7기갑사단이 단 5일만에 연합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주력부대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연합군은 그나마 믿었던 저지대 국가 중의 하나인 벨기에마저 독일군에게 맥없이 항복해 버리면서(저자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3세를 배신자라고 맹렬하게 공격한다) 자그마치 33만 명에 달하는 영불 연합군 병사들은 영불해협의 면한 덩케르크에 내몰리게 된다. 저자가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그들은 전선에서 이탈한 패잔병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히틀러의 치명적 오판으로 인한 진격 중지명령 그리고 한 때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던 대영제국의 해군과 그야말로 항해할 수 있는 모든 배들이 동원되어 덩케르크에 고립된 패잔병들을 구하러 나서는 과정을 저자는 세심하면서도 예리하게 그려냈다.
이 역사서가 덩케르크 철수작전이 벌어진 1940년에 쓰인 책이라는 점도 놀랍다. 모름지기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었다고 했던가. 영국 해군은 1차세계대전 당시 갈리폴리 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치르면서 촌각을 다투는 신속한 철수야말로 핵심이라는 사실을 배웠던 것일까. 사실 <덩케르크>의 1/3 정도만 읽어도 다이나모 작전의 대략적인 사실은 파악할 수 있다. 나머지 2/3 가량은 철수작전에 동원된 유람선, 연락선, 우편선, 예인선, 바지선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요트와 보트에 이르기까지 절망에 빠진 병사들을 구하는데 동원된 열흘 간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다룬다.
작년에 보다 만 영화 <덩케르크>의 나머지 절반도 보았는데, 정부에서 강제 징발하기도 했지만 자원해서 고립된 자국 병사들을 구하러 나서는 민간의 용사들에 대한 면면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해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사실 채터턴 작가는 당시 위기에 처한 대영제국을 위기에서 구해 내기 위해 선전에 가까운 찬사를 풀어낸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채터턴의 시선보다 객관적이 입장에서 사실에 접근을 시도한다. 전쟁 초기에 전투기 조종사 맏아들을 잃은 요트 주인 아저씨가 아들 같은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덩케르크로 요트를 몰고 십대 둘째 아들과 그의 친구 조지와 함께 독일 포대의 포격과 루프트바페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영불해협을 건넌다. 그들이 구한 패잔병(킬리언 머피 분)은 절대 덩케르크 해변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애꿎은 소년 조지를 죽게 만든다. 프랑스 병사를 “개구리”라고 부르면서 조롱하며 자신들만 살겠다고 소년병 토미와 깁슨을 매몰차게 내쫓는 영국 패잔병들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넌픽션보다 픽션 영화가 더 현실적이라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저자가 강조하는 애국주의 때문에 좀 마음에 불편하긴 했지만,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이 단순하게 병사들의 수나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 같은 가시적인 요소들 뿐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준비된 해안 항해에서 습득한 경험과 민간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체임벌린의 뒤를 이어 전시내각의 수반이 된 처칠이 1/10만 구해도 성공이라던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영국의 저력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19만 명에 달하는 영국 원정군을 무사히 영국 본토로 데려오지 못했다면 나치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치가 자랑하는 팔쉬름예거 사단을 투입해서 해안교두보를 장악하고, 영불해협을 통해 기갑부대를 투입해서 무주공산에 가까운 본토에서 공방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총통의 미스터리한 진격 중지 명령 덕분에 본토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수많은 토미들은 4년 뒤 제2전선을 열고, 마침내 나치 독일군이 장악한 유럽 대륙을 해방시키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참담하고 수치스러운 패배를 승리의 기초라고 선전하는 장면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연합군이 거두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던가.
전반적 판세를 파악하고 난 뒤에 따라 붙는 2/3나 되는 디테일들은 사족 같아 읽는데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