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 대신 권총을 든 노인
대니얼 프리드먼 지음, 박산호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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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멤피스가 미국 어느 주에 있는 도시더라. 엘비스는 펠비스라 불리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이 멤피스 아니었나. NYU 출신 변호사는 예전부터 작가의 꿈을 꾼 모양이다. 이름과 작품에 등장한 유대인 주인공의 버크 샤츠라는 이름으로 보아 아마 유대계 출신이 아닐까 추정된다.

 

특이하게 출판사가 아닌 교보문고에서 출간된 대니얼 프리드먼의 <지팡이 대신 권총을 드 노인>은 숨겨진 나치의 황금을 찾게 된다는, 조금은 황당한 설정으로 출발한다. 멤피스에서 뛰어난 민완형사로 활동하다가 오래전에 은퇴해서 노년을 즐기던 버크 샤츠는 오래전 전우 짐 월리스에게 죽음의 시간이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를 찾아간다. 죽기 전, 자신이 그동안 친구에게 숨겨온 비밀 그러니까 전쟁포로 시절 버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엄청나게 학대했던 나치 전범 하인이히 지글러가 엄청난 금액의 황금덩어리를 가지고 도주하는 것을 뇌물(황금 한 덩어리)을 받고 묵인해 주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히고 죽는다.

 

이제는 더 이상 예전 같이 완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87세의 버크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면 당연시 되는 기억력 감퇴와 조금만 액션을 사용해도 온 몸에 멍이 드는 유리같은 체력의 소유자다. 물론 기질 만큼은 한창 시절의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그러지 못한 일을 냉철하게 분석해 내는 그런 능력이 아닐까. 뉴욕에서 날아온 손자 빌리/테킬라의 도움으로 자신을 핍박했던 개자식 지글러는 찾아 나선다.

 

그렇게 나치 전범을 찾는 것만으로는 아마 이야기가 되지 않겠다고 프리드먼 작가는 판단했는지 염통이 다 쫄깃해지는 다양한 긴장 요소들을 수차례 삽입한다. 나치 황금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도박중독으로 타락한 목사님 카인드 박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탐욕스러운 월리스의 사위 노리스 필리, 구 소련 출신 유대인 요원 이츠하크 스타인블라트 그리고 이웃 세인트루이스 출신 채무업자 프랫에 이르기까지 왜 그들이 지글러의 황금이 자기 것이라는 합리적인 설명 없이 그저 주인 없는 돈은 내거다라며 들이대는 한바탕 소동 속으로 저자는 독자를 인도한다.

 

저자 대니얼 프리드먼은 변호사 출신답게, 버크와 테킬라가 나치의 황금을 수중에 넣기 위해 추적해 가는 과정에 마주하는 소소한 법률적인 정보들을 아주 자세하게 제공한다. 한 마디로 말해 자신의 전공을 발휘한다고나 할까. 가령 예를 들어 버크 2인조가 찾아낸 나치의 황금을 집안에 두는 게 차에 보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는 사실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프라이버시 이슈 때문에 가택수색은 개인의 사적 공간으로 간주되어 엄격하게 보장하지만 자동차는 공적 공간으로 분류된다고 했던가. 버크가 지글러 행세를 해서 안전보관 금고로 황금을 찾으러 갔을 적에도, 서명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은행 대리인을 윽박질러 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한편 저자는 스릴러의 창조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유대인 행세를 하며 일련의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킬러가 소설에 등장하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프리드먼은 극대화한다. 그러니까 그런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을 흥행시키는 주요한 요소라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해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점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그가 범인으로 지목한 선수에 대해, 혹시 범인이 아닐까 하는 내 예감이 적중해서 더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저자가 이 흥미진진한 소설의 곳곳에 포진시킨 범행의 동기와 기회야말로 독자의 예단을 흐리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였을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악당에게도 그리고 조용하게 은퇴를 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주인공 버크 샤츠에게도 죽음은 공평하다는 조용한 저자의 의견도 멋지다.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87세의 노인장이 매그넘을 쏘아 대고, 결국엔 온통 금연천지가 된 세상에서 발할라 에스테이트 요양원 행을 받아들이는 장면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게 다가왔다. 뭐 인생이 그렇게 가는 거겠지. 멋진 소설이었고, 예상 외로 단박에 읽었다. 사실 이 책을 다 읽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었다고 고백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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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5-15 0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멤피스는 테네시주에 있는데요. 사실 엘비스가 태어난 곳은 아니고 거기서 자라고 활동을 했죠. 멤피스는 록큰롤의 고향이라고 불리는데 미국에서 위험한 도시 5위안에 항상 드는 그런 곳이기도 해요.
그건 그렇고 책이 무척 재미있어 보이네요 ^^

레삭매냐 2018-05-15 09:40   좋아요 1 | URL
말씀 듣고 위키피디아 검색해 보니 출신은
미시시피 터펄로라는 곳이라고 하는군요.

전 지금까지 엘비스가 멤피스 출신으로
알고 있었네요 :>

그나저나 멤피스가 정말 위험한 도시로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책 아주 재밌습니다!

psyche 2018-05-15 12:14   좋아요 1 | URL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자라고 활동하고 죽은 곳이 멤피스니까요. 엘비스 하면 멤피스가 떠오르고 멤피스를 대표하는 사람중 하나가 엘비스인게 맞죠. ㅎㅎ
 
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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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판단이 틀렸다. <베어타운>의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전작 <오베라는 남자><할미전>이 퀼트 이불조각꿰기 같은 시트콤 스타일의 소설들이었다면 신작 <베어타운>은 새롭게 단장한 정극 드라마 같은 스타일이었는데, 소설의 1/3 지점 그러니까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느슨하면서도 장황한 소개 때문에 판단착오를 일으킨 모양이다. 경제가 쇠락해 가는, 하키를 거의 종교의 수준으로까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곰들이 사는 베어타운의 추악한 실체가 드러나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하긴 그전에 영화로 만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도 아마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물질과 승리만을 추구하는 매모니즘에 몰입된 인간들의 욕망을 프레드릭 배크만은 정확하게 저격한다.

 

헤드 같은 도시 사람들이 거지타운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베어타운의 경제는 날이 갈수록 몰락해 가는 와중이다. 어려서부터 스케이트로 얼음을 지치켜 하키 전사로 성장한 청소년들의 탈출구는 베어타운 하키팀의 단장 페테르 안데르손처럼 큰 무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NHL이나 A팀 선수가 되는 것 뿐이다. 도태된 이들은 아무런 기술도 없이 침울한 표정으로 공장에서 일하는 것 밖에는 선택지가 없다.

 

시대는 영웅의 탄생을 기다린 모양이다. 17세 소년 케빈 에르달의 천재적 능력과 눈부신 활약으로 베어타운 청소년팀은 4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베어타운의 사람곰들은 제각기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팀을 이끌어온 나이든 코치 수네의 자리를, 오직 승리만 추구하는 젊은 코치 다비드로 바꾸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승리가 가져다줄 달콤한 약속에 젖어 들기 시작한다. <베어타운>이 미국 아마존에서 상당히 많은 판매고를 기록했다는 광고를 본 것 같은데,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4대 스포츠 중의 하나인 아이스하키를 소재로 다루면서 동시에 그네들이 좋아라하는 디테일에 집중한 점을 들어 나는 프레드릭 배크만이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짚어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베어타운은 겉보기에 평화로운 시골 마을처럼 보이지만 거주지부터 철저하게 자본의 유무에 따라 나뉜 계급사회다. 하이츠와 할로 사이의 거리는 지구별과 달에 견줄만하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넘실대기는 지구별의 그 어느 장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배크만 작가는 우리에게는 사회복지 천국이자 지상낙원으로 알려진 스웨덴도 인간의 욕망이라는 도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베어타운의 청소년들에게 욕망의 탈출구가 아이스하키라는 스포츠 종목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태생적으로 성공의 출발선이 다른 이들에게 그나마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스포츠야말로 유일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반증이려나. 물론 그들이 신 이상으로 숭배하는 아이스하키 역시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본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 치명적 약점이긴 하지만. 하긴 우리 사회에서도 제일가는 재벌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언론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언론사 간부들을(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돈으로, 선물로 그리고 공연티켓으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케빈 에르달의 성폭행 사건이 뉴스가 되었을 때, 기자들의 자유로운 취재를 방해하려는 베어타운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라. 그들의 모습과 2018년 어느 민주공화국의 모습이 한치의 오차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베어타운에는 곰들이 산다 아주 비겁한

 

소설 <베어타운>은 케빈의 성폭행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시작한다. 단지 거지타운의 승리를 다룰 거라는 나의 예상은 이미 보기 좋게 벗어나 버렸다. 이제는 모두의 묵인 아래 야수가 되어 버린 케빈 일당에 맞서는 마야 안데르손 가족과 일말의 이성과 양심을 이들의 대결구도가 형성된다. 배크만 작가에게 크게 한 방 먹은 느낌이다. 이런 기가 막힌 에피소드가 뒤에 대기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15세 소녀 마야는 비극을 딛고, 더 이상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베어타운 전체를 상대로 힘든 싸움을 시작한다. 문제는 소녀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상상을 초월하는 무지막지한 따돌림과 마타도어가 벌어진다는 점이다. 당장 하키팀의 단장인 아버지 페테르는 자신의 일자리부터 걱정해야 할 처지다. 자신들의 우상이 된 아이스하키팀을 지키기 위해,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베어타운의 비겁한 곰들의 모습에서 4년 전 참담한 사건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 전력투구했던 우리네 언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울러 현재진행형인 미투운동에 대한 단상도 떠올랐다. 왜 모두가 그 순간만 넘기면 될 거라는 단순한 발상에서 거짓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걸까? 거짓으로 가리기 위해선 또다른 거짓말을 동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가해자들은 모르는 것일까? 난 그들의 치졸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피해자들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것이 문제해결이 시발점이라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케빈이 자신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미련한 곰돌이 타운의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당당하게 마을을 활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비극의 시작인 것을 절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케빈과 더불어 베어타운 하키팀을 특별하게 만든 벤이(벤야민)의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그 누구보다 남성성이 강조되는 하키 선수가 게이라니! 그래서 소설 막판에 벤이를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던 다비드가 그 사실을 알고는 수치와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되었던 걸까? 이해와 용서 대신 어려서부터 주입된 성적 정체성에 대한 편견이 드러나는 장면도 소설 <베어타운>에서 빼놓으면 안될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케빈의 성폭행 사건 이후 자각해서 성공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몰락할 지도 모를 베어타운 하키팀을 후원하겠다고 나선 프락의 경우는 또 어떤가. 잘못된 것을 자각하고,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 만큼 부끄러운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자신의 자식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오늘날의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사족 같지만 베어타운 사람들에게 선지자처럼 행동하는 펠센의 주인장 라모나에게서는 오베의 향기가 났다.

 

배크만 작가는 <베어타운>에 나온 캐릭터들의 후속담을 그린 시퀄을 이미 완성했다고 한다. 역시 영화화 되기에 적절한 요소를 갖춘 <베어타운> 역시 영화화가 결정되었다는 뉴스로 따라 붙는다. 이렇게 멋진 캐릭터들을 일회용으로 쓰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베어타운 삼부작 정도는 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그리고 영화는 제발 너무 할리우드 스타일로 만들지 말고, 북구 스타일로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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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라이터
사미르 판디야 지음, 임재희 옮김 / 나무옆의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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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블라인드 라이터(Blind Writer)>를 읽으면서 두 가지 궁금증에 사로 잡혔다. 하나는 왜 제목을 맹인작가라고 하지 않고 원제 그대로 블라인드 라이터라고 했을까. 다른 하나는 왜 인도 작가들이 쓰는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페르소나는 하나 같이 일류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어야만 하는 걸까 하는 사실 말이다. 두 가지 모두에서 왠지 모를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잔재를 느꼈다고 한다면 오버일까?

 

three to tango

 

처음 만나는 작가 사미르 판디야는 인도 출신으로 8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가서 데이비스에 소재한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라케시 메타처럼 스탠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문학과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가히 엘리트 코스를 밟은 작가라는 느낌이다.

 

맹인작가로 15권이나 되는 책을 쓴 아닐 트리베디와 힌두 여신을 닮은 그의 아내 미라 그리고 스탠퍼드에서 역사를 전공 중인 대학원생 라케시가 <블라인드 라이터>의 주인공이다. 아닐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 중으로, 인도 취향을 가진 예술애호가의 집 별채에 머물고 있는 중이다. 아닐은 자신을 위해 다양한 종류의 신문/책을 읽어줄 조수를 찾았고,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세 시간에 15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라케시와의 인연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연스런 수순대로 라케시는 아닐에게서 부상(father figure)의 이미지를 조각해 나간다. 하긴 어떤 부모 자식이 아닐과 라케시 같은 관계를 가지게 될까 싶다.

 

독자는 처음부터 맹인작가 아닐, 그의 26살이나 어리고 매력적인 아내 미라 그리고 24난 청년 라케시의 조합이 결국 문제가 될 거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이제는 예전 같은 필력을 자랑하지 못하지만, 장애를 가졌지만 뛰어난 유머감각을 지닌 아닐은 평생의 인연 미라를 찾았지만, 대가로 글쓰기를 잃어 버린 것일까. 마치 문하생처럼 아닐을 수행하며 작가의 꿈을 키우는 청년 라케시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문청의 그것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스토리는 구루 슬립 바바를 떠나 자신의 아버지를 떠난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원망 그리고 첫 키스의 아련한 추억을 남긴 채 크리스마스 명절을 보내기 위해 자신들의 거처로 떠나 버린 미라를 찾아 아버지와 만난다는 변명으로 뉴욕을 찾은 라케시의 행적을 소설은 차분하게 묘사해낸다. 문창과 교수답게 사미르 판디야의 소설 구성과 작법은 무리가 없다. 다만 초반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비록 카스트 제도에 대한 언급은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이민자 특유의 성공에 대한 강박, 세계의 돈을 모두 긁어모을 것 같았던 월스트리트 생활을 떠나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서부로 떠난 라케시에 대한 응원 같은 감정들이 소설의 곳곳에서 넘쳐 나는 걸 독자는 목격한다. , 그리고 약쟁이 배리 본즈가 한창 활약을 벌이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경기를 보러 아닐과 라케시가 야구장을 찾았었지. 어쩌면 청년 라케시는 평생 아버지에게 원하던 바를 자신이 사부라고 생각하던 아닐에게서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치명적 파국 끝에 오락가락하던 데이트 상대 헬렌과 결국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라케시는 아닐이 자동차 사고로 죽은 뒤, 책을 펴낸 미라의 독서낭독회에서 근 이십년만의 재회를 경험한다. 오래 전 행복했던 시절만은 간직한 채, 다시 자신의 돌아가야 하는 남녀의 모습이 왜 그리도 애잔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어제부터 시작한 나의 사미르 판디야와의 만남은 퇴근 길 독서로 마무리되었다. 항상 궁금해 하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와 무엇보다 좋아하는 야구에 대한 묘사가 담겨 있어서 기대 이상으로 만족했었다. 물론 디아스포라라는 소재를 체험한 이방인의 이야기라 더더욱 좋았던 게 아닐까. 판디야 교수님의 또다른 작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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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 -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 지음, 정탄 옮김, 권성욱 감수 / 교유서가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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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읽고 싶은 책은 바로 옆에 두어야 읽게 되는 법인가 보다. 작년부터 한 번 읽어야지 싶었던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의 <덩케르크>를 연초에 샀는데 이제야 읽게 됐다. 왜 난 이상하게도 소설보다도 역사를 다룬 책을 더 빨리 읽게 되는 걸까. 아무래도 문학적 감상의 소설과 역사서는 결이 달라서겠지. 암튼 후자가 진도 빼기에는 그리고 독서슬럼프에는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상 <다이나모 작전>으로 알려진 덩케르크 철수작전의 얼개는 다음과 같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전격전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은 동부전선에서는 치열한 격전이 이루어졌지만, 이와는 반대로 서부전선은 조용했다. 1940년 5월 10일, 동부전선을 평정한 독일군이 예봉을 서부전선으로 돌리기 전까지 자그마치 7개월이나 되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대체 무얼 한 것일까? 동맹국 폴란드가 나치 독일의 기갑부대에게 유린되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던가. 독일 군부는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대로, 동부와 서부 양쪽 전선에서의 전쟁을 회피하는데 성공했다.

 

지난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겪은 프랑스군은 마지노선을 구축하고, 방어선 뒤에서 독일군을 기다렸다. 독일군 역시 지리한 참호전의 폐해를 몸소 겪었기 때문에 무리한 종심돌파 전략대신 기갑부대를 선봉으로 삼아 아르덴 숲을 돌파하는 연합군을 예상을 뛰어넘는 전략으로 5월 10일 서방공략에 나선다. 맹장 만슈타인과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구데리안 그리고 훗날 아프리카 전선에서 사막의 여우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날린 롬멜이 지휘하단 제7기갑사단이 단 5일만에 연합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주력부대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연합군은 그나마 믿었던 저지대 국가 중의 하나인 벨기에마저 독일군에게 맥없이 항복해 버리면서(저자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3세를 배신자라고 맹렬하게 공격한다) 자그마치 33만 명에 달하는 영불 연합군 병사들은 영불해협의 면한 덩케르크에 내몰리게 된다. 저자가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그들은 전선에서 이탈한 패잔병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히틀러의 치명적 오판으로 인한 진격 중지명령 그리고 한 때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던 대영제국의 해군과 그야말로 항해할 수 있는 모든 배들이 동원되어 덩케르크에 고립된 패잔병들을 구하러 나서는 과정을 저자는 세심하면서도 예리하게 그려냈다.

 

이 역사서가 덩케르크 철수작전이 벌어진 1940년에 쓰인 책이라는 점도 놀랍다. 모름지기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었다고 했던가. 영국 해군은 1차세계대전 당시 갈리폴리 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치르면서 촌각을 다투는 신속한 철수야말로 핵심이라는 사실을 배웠던 것일까. 사실 <덩케르크>의 1/3 정도만 읽어도 다이나모 작전의 대략적인 사실은 파악할 수 있다. 나머지 2/3 가량은 철수작전에 동원된 유람선, 연락선, 우편선, 예인선, 바지선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요트와 보트에 이르기까지 절망에 빠진 병사들을 구하는데 동원된 열흘 간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다룬다.

 

작년에 보다 만 영화 <덩케르크>의 나머지 절반도 보았는데, 정부에서 강제 징발하기도 했지만 자원해서 고립된 자국 병사들을 구하러 나서는 민간의 용사들에 대한 면면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해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사실 채터턴 작가는 당시 위기에 처한 대영제국을 위기에서 구해 내기 위해 선전에 가까운 찬사를 풀어낸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채터턴의 시선보다 객관적이 입장에서 사실에 접근을 시도한다. 전쟁 초기에 전투기 조종사 맏아들을 잃은 요트 주인 아저씨가 아들 같은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덩케르크로 요트를 몰고 십대 둘째 아들과 그의 친구 조지와 함께 독일 포대의 포격과 루프트바페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영불해협을 건넌다. 그들이 구한 패잔병(킬리언 머피 분)은 절대 덩케르크 해변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애꿎은 소년 조지를 죽게 만든다. 프랑스 병사를 “개구리”라고 부르면서 조롱하며 자신들만 살겠다고 소년병 토미와 깁슨을 매몰차게 내쫓는 영국 패잔병들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넌픽션보다 픽션 영화가 더 현실적이라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저자가 강조하는 애국주의 때문에 좀 마음에 불편하긴 했지만,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이 단순하게 병사들의 수나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 같은 가시적인 요소들 뿐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준비된 해안 항해에서 습득한 경험과 민간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체임벌린의 뒤를 이어 전시내각의 수반이 된 처칠이 1/10만 구해도 성공이라던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영국의 저력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19만 명에 달하는 영국 원정군을 무사히 영국 본토로 데려오지 못했다면 나치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치가 자랑하는 팔쉬름예거 사단을 투입해서 해안교두보를 장악하고, 영불해협을 통해 기갑부대를 투입해서 무주공산에 가까운 본토에서 공방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총통의 미스터리한 진격 중지 명령 덕분에 본토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수많은 토미들은 4년 뒤 제2전선을 열고, 마침내 나치 독일군이 장악한 유럽 대륙을 해방시키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참담하고 수치스러운 패배를 승리의 기초라고 선전하는 장면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연합군이 거두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던가.

 

전반적 판세를 파악하고 난 뒤에 따라 붙는 2/3나 되는 디테일들은 사족 같아 읽는데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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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0 1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0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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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은 내가 읽은 첫 번째 베트남 작가의 책이다(남 레의 <보트>도 있지만 논외로 하자).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이 통일된 지 43년이 지났다. 일본의 2차세계대전 패망으로 생겨난 아시아 분단국가 중에 하나가 베트남이었다. 1946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와의 8년 전쟁 끝에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민족해방과 통일이 이루어지는가 싶었지만 프랑스에 이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새로운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을 10,000일의 전쟁이라고 했던가. 미국의 우방국으로 참전한 우리나라 병사들도 15,000명에 달하는 전상자를 기록했다. 소설을 쓴 바오닌은 베트남 정규군 소속으로 프랑스와의 해방전쟁 와중에 태어나 무신년 구정공세 다음해인 1969년 미국과의 전쟁에 참전해서 6년 동안에 걸친 격전을 치렀다. 전쟁의 마지막 날 탄손누트 공항을 사수하던 베트남 공수부대와의 사투에서 그의 소대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고 했던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항미 전쟁을 치른 바오닌 작가의 소설 <전쟁의 슬픔>에는 내가 예상했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선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1968년 미국의 지도자들은 베트남 인민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전비와 병력을 동원해서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아 보려는 서방 지도자들의 노력은 민족해방과 자주통일을 원하던 베트남 인민들의 열망을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형적인 이데올로기 선전보다 꽃다운 청춘들이 무수히 스러져간 전장의 비애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소설에서 저자는 다루고 있었다.

 

명백히 저자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주인공 끼엔은 전쟁이 끝난 뒤, 수개월 동안 통일열차를 타고 전사자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베트남을 누빈다. 끼엔은 자신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통일 조국의 기쁨을 누려야할 전우들이 기꺼이 자신을 대신해서 죽어간 순간들을 무심하게 진혼한다. 살아남은 자의 비애라고 해야 할까. 죽은 이들처럼 영면을 누리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적어낸다. 전후 작가로 변신해서 수많은 글들을 쓴 끼엔의 이야기는 라틴아메리카의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끼엔의 추체험들은 시간을 엇갈리며 중첩되면서 17세 소년병이 직접 경험한 전쟁에 대한 비극을 그대로 재현해낸다.

 

지금, 그 모든 것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야만적인 바람이 이 세상에 불어 닥쳤나? 끼엔은 책상에 앉았다. 아침이 오래전에 지나갔다. 점심. 오후. 날이 저물었다. 지난날의 어두운 혼돈 시대에 죽어간 영웅들, 친한 동료들에 대해 써 놓은 원고 더미 앞에서 우리 동네의 작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괴로움. 무거운 마음. 그럼에도 언제나 눈물과 슬픔은 말 없는 위로의 원천이 되었다. 항상 그랬다. 언제나 그랬다. (280쪽)

 

저자 바오닌은 단선적인 민족해방 이데올로기만으로 베트남전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오닌은 끼엔에게 연인 프엉이라는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목적을 부여한다. 문제는 끼엔과 프엉이 전쟁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막연한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랑을 향한 열정과 반복되는 행운의 여신이 부여한 애절한 시그널로 살아남을 수는 있었어도, 전쟁이라는 무지막지한 폭력을 체험한 끼엔과 프엉의 삶은 전쟁 이전의 순수했던 시절로 절대 돌아갈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야말로 바오닌이 그려낸 자전적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끼엔의 동료들이 왜 그를 슬픔의 신이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됐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고 방심할 수 없는 무자비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오닌의 존재는 기념할 만한 일일 것이다. 작가 바오닌은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건들을 갈고 닦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바오닌이 구사하는 한 문장이 한 문장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한반도 종전 선언을 앞둔 시기에 의미 있는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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