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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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은 내가 읽은 첫 번째 베트남 작가의 책이다(남 레의 <보트>도 있지만 논외로 하자).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이 통일된 지 43년이 지났다. 일본의 2차세계대전 패망으로 생겨난 아시아 분단국가 중에 하나가 베트남이었다. 1946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와의 8년 전쟁 끝에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민족해방과 통일이 이루어지는가 싶었지만 프랑스에 이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새로운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을 10,000일의 전쟁이라고 했던가. 미국의 우방국으로 참전한 우리나라 병사들도 15,000명에 달하는 전상자를 기록했다. 소설을 쓴 바오닌은 베트남 정규군 소속으로 프랑스와의 해방전쟁 와중에 태어나 무신년 구정공세 다음해인 1969년 미국과의 전쟁에 참전해서 6년 동안에 걸친 격전을 치렀다. 전쟁의 마지막 날 탄손누트 공항을 사수하던 베트남 공수부대와의 사투에서 그의 소대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고 했던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항미 전쟁을 치른 바오닌 작가의 소설 <전쟁의 슬픔>에는 내가 예상했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선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1968년 미국의 지도자들은 베트남 인민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전비와 병력을 동원해서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아 보려는 서방 지도자들의 노력은 민족해방과 자주통일을 원하던 베트남 인민들의 열망을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형적인 이데올로기 선전보다 꽃다운 청춘들이 무수히 스러져간 전장의 비애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소설에서 저자는 다루고 있었다.

 

명백히 저자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주인공 끼엔은 전쟁이 끝난 뒤, 수개월 동안 통일열차를 타고 전사자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베트남을 누빈다. 끼엔은 자신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통일 조국의 기쁨을 누려야할 전우들이 기꺼이 자신을 대신해서 죽어간 순간들을 무심하게 진혼한다. 살아남은 자의 비애라고 해야 할까. 죽은 이들처럼 영면을 누리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적어낸다. 전후 작가로 변신해서 수많은 글들을 쓴 끼엔의 이야기는 라틴아메리카의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끼엔의 추체험들은 시간을 엇갈리며 중첩되면서 17세 소년병이 직접 경험한 전쟁에 대한 비극을 그대로 재현해낸다.

 

지금, 그 모든 것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야만적인 바람이 이 세상에 불어 닥쳤나? 끼엔은 책상에 앉았다. 아침이 오래전에 지나갔다. 점심. 오후. 날이 저물었다. 지난날의 어두운 혼돈 시대에 죽어간 영웅들, 친한 동료들에 대해 써 놓은 원고 더미 앞에서 우리 동네의 작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괴로움. 무거운 마음. 그럼에도 언제나 눈물과 슬픔은 말 없는 위로의 원천이 되었다. 항상 그랬다. 언제나 그랬다. (280쪽)

 

저자 바오닌은 단선적인 민족해방 이데올로기만으로 베트남전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오닌은 끼엔에게 연인 프엉이라는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목적을 부여한다. 문제는 끼엔과 프엉이 전쟁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막연한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랑을 향한 열정과 반복되는 행운의 여신이 부여한 애절한 시그널로 살아남을 수는 있었어도, 전쟁이라는 무지막지한 폭력을 체험한 끼엔과 프엉의 삶은 전쟁 이전의 순수했던 시절로 절대 돌아갈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야말로 바오닌이 그려낸 자전적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끼엔의 동료들이 왜 그를 슬픔의 신이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됐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고 방심할 수 없는 무자비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오닌의 존재는 기념할 만한 일일 것이다. 작가 바오닌은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건들을 갈고 닦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바오닌이 구사하는 한 문장이 한 문장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한반도 종전 선언을 앞둔 시기에 의미 있는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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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앞의 한 사람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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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열심히 활동하던 온라인 카페 정모에 오소희 작가가 참석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냥 작가라는 정보 정도. 나중에 아이를 데리고 여행길에 나선 대단한 작가라는 설명을 들었고, 책도 몇 권 수중에 넣었던 것 같은데 정작 책을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십년 정도가 흘러 작가의 에세이집을 읽게 됐다. 마침 독서 슬럼프에 빠져 헤매던 차에 이틀만에 가뿐하게 읽고 슬럼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아, 이 책의 원제는 <사랑바보>였다고 하는데 그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7년 전에 나온 책의 재개정판이다.

 

여행은 우리가 사는 곳과는 다른 곳을 여행하는 게 기본이다. 어쩌면 남들이 가보지 않은 비경을 찾는 것도, 파리의 에펠탑처럼 모든 이가 가보고 싶어하는 곳을 찾는 일종의 순례라고 해야 할까. 하긴 나도 처음에 에펠탑을 보러 갔을 때 심장이 다 쿵쾅거리더라. 그보다 더 흥미로운 건 여행길에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이다. 사실 시간부족으로 수박겉핡기식 여행을 하는 나같은 배낭여행족에게 지긋하게 한 곳에 머물면서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삶의 이모저모를 살펴 보는 건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간적 여유를 차치하고라도 언어의 장벽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작가가 페루 여행길에 만난 목수와 석공 아저씨와 더불어 스페인어 사전을 더듬으며 나눈 대화는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다. 물론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감정이 전달될 수는 있겠지만 미묘한 소통은 어쩔 것인가.

 

작가의 라이프 스타일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왠지 작가가 여행길에서 수집한 타인과의 대화들이,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작가의 글쓰기를 위한 질료가 되는 게 아닐까하는 그런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출판하겠노라는 허락을 구했을까하고 말이다. 에세이집의 곳곳에서 보이는 감정과잉도 좀 그랬다.

 

베테랑 여행가답게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냥 넘어갈 법한 이야기도 멋지게 뽑아내는 실력은 역시나 탁월했다. 에티오피아와 발리에서 만난 제3세계 소녀들에 대한 단상도 주목할 만하다. 작가가 세계의 곳곳에서 만난 그리고 체험한 뒤에 들려주는 사랑타령은 부러웠다. 짧은 만남 긴 여운, 뭐 삶이라는 게 그런게 아니겠는가. 이제는 사랑을 주고 싶어도 거부하는 틴에이저가 되어 버린 제이비에 대한 이야기도 울림 있게 다가 오더라. 수년을 연애하고 20년에 가까운 결혼생활에서 얻은 삶의 지혜 나눔도 멋졌다. 그렇지 나 자신도 변하기 어려운 데, 타인을 내 방식대로 변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려면 우선 계획이 필요한데, 아무리 최소한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며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을 것인지... 한 때는 그런 계획들을 세우는 게 즐거움이었지만 이젠 다 귀찮아져 버렸다. 삶에 지치다 보니 그런 힘들었지만 새로운 것을 만남에 대한 흥분이 주는 즐거움보다, 진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런 무위의 즐거움이 절실해졌다. 나의 마지막 장거리여행이었던 십년 전의 유럽여행 같은 기회는 이제 당분간 주어지지 않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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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08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외여행을 안 가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가든 말든 지들이 뭔 상관인지.. 저는 혼자서 가는 여행이 편해요.

레삭매냐 2018-05-08 13:43   좋아요 0 | URL
저도 어려서부터 혼자 여행하다 보니 습관
이 되서 그런지 나홀로 여행이 편하더군요.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무계획의 즐거움이라고나 할까요 ㅋㅋ

2018-05-08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8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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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2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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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을 읽는데 3일이 걸렸는데, 2권은 보름이 걸렸다. 물리적으로 다섯 배가 시간이 걸린 셈이다. 사실 두 번째 권도 금세 읽었다. 다만 그 사이에 다른 책들을 기웃거리느라 더 시간이 필요했을 뿐.

 

전쟁이 끝났어도 재일 자이니치들의 삶은 나아진 게 없었다. 노아는 생부 고한수의 금전적 지원으로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해서 원 없이 공부를 하게 되었고, 모자수는 고로 사장 밑에서 성실한 파친코 매니저가 되었다. 두 형제는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성장했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가난과 비극은 피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양진과 순자, 노아와 모자수 그리고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자이니치 4대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차별이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었건만 일본인들은 그들을 같은 일본 사람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다. 자이니치들에게 가난과 범죄 그리고 냄새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우고 차별했다. 이민진 작가는 일본 사람들을 비난하는 캐릭터로 역시 같은 조선인으로 미국에서 진짜배기 미국 사람으로 자란 솔로몬의 여자친구 피비를 통해 자신이 가진 생각들을 조용하게 전파한다. 일본은 여전히 전쟁 중에 벌어진 범죄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고 있다고. 어쩌면 그 점이야말로 일본이 아시아 국가이면서도 여전히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남아 있는 이유가 아닐까.

 

또 한편으로 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수년 마다 지문날인을 하고 외국인 거주자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 원칙적으로 외부세계와 차단되어 살아야 하는 수많은 자이니치들에 대한 고찰이 그대로 소설에 묻어 있다. 모자수로 대변되는 아버지 세대들은 돈을 벌어 그런 차별의 벽을 뛰어 넘고자 하지만, 민족이라는 이름의 낙인은 쉽사리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난과 범죄는 많은 자이니치들을 파친코(나는 왜 ‘빠찡꼬’라는 표현과 어감이 더 마음에 드는 걸까) 사업에 뛰어들게 했고, 차별의 순환 그리고 대물림은 계속됐다.

 

아무리 신분을 세탁해서 세계 유수의 대학인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인 회사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자이니치들은 일본인 지배계급에게 철저하게 이용되는 소모품일 따름이다. 솔로몬과 그의 특별한 상사 가즈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라. 그러니까 이 세상에 단순하게 진행되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솔로몬이 어쩌면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꿈꾸던 자신의 어머니 유미의 소망대로 일본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사느니, 차라리 그럴 바에야 미국에 건너가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택지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 대한 이해 불가는 어쩌면 원수의 나라에서 극심한 차별을 견디고 사는 자이니치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의 그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지도 모르겠다. 결국 같은 조선인의 후예였던 피비도 솔로몬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솔로몬의 삶에 느닷없이 개입했던 진짜배기 일본인 하나의 몰락이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저주 받은 운명을 한탄하던 노아의 죽음은 예상했던 바여서 그런지 충격이 덜했던 것 같다. 다만, 노아가 죽은 다음에 그가 남긴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비치지 않아 좀 아쉬웠다. 그것도 작가가 의도한 것일 지도 모르겠지만.

 

일본에 사는 자이니치들에 대해 아는 바가 일천해서인지 1권에서부터 이어지는 이물감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어판에 등장하는 순자의 부산 사투리가 과연 영어판에서는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도 자못 궁금하다. 한국을 출발해서 일본으로 배경으로 한 미국소설 <파친코>는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정의할 수 없는 불편함이라는 양가적 감정이 피어오르게 만드는 그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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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평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4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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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를 읽고 나서 독서모임을 가졌다. 수많은 이야기들을 하며 내가 내린 결론은 결국 독자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읽고 보게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뻬드로 빠라모> 같이 타임라인이 얽히고설킨 경우에는 더더욱이나. 나도 그렇게 책을 읽고 내 맘대로 리뷰를 썼다.

 

단 한 개의 장편소설과 또 하나의 소설집만을 세상에 내놓은 메히코 작가 후안 룰포는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문학계의 별이 되었다. 독서모임에서 어떤 동지가 말했듯이, 조국의 산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문장들에서 더더욱 그랬다고 했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불타는 평원>은 <뻬드로 빠라모>에 비해 진입장벽이 수월하다. 장편소설 <뻬드로 빠마로>가 사람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는 주술적 리얼리즘으로 무장하고 있다면, <불타는 평원>은 쉬르리얼리스틱하다고나 할까? 슈퍼현실적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 같다.

 

딸 셋 가지 아버지가 막내딸은 창녀가 된 두 언니들과 다른 길을 걷게 하기 위해 막내딸에게 암송아지를 선물한다. 하지만 천재지변 중의 하나인 홍수가 나서 암송아지가 떠내려 가버린다.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메히코 민중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순간이 아니던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며느리와 결혼한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 매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또 어떤가. 아이들의 할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의 손자들을 굶기지 말라는 부탁을 외면하는 냉정한 노인의 모습 그리고 미국으로 일자리를 구해 월경을 시도해 보지만, 웻백(wetback) 신세로 총을 맞고 돌아온 남자를 기다리는 소식은 아내가 자신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엄혹한 사실이다.

 

복수에 대한 이야기도 의미심장하다. 우연하게 살인을 저지르고, 수십 년간 자신을 잡으러 올 지도 모르는 외지인을 피해 다녔지만 결국 피해자의 아들에게 처형당하는 장면은 또 어떤가. 메히코의 역사를 관통하는 혁명의 부산물인 토지개혁에 있어서도, 불모의 야노그란데를 불하받은 농민들의 항의는 관료들에 의해 가볍게 제지되어 버린다. 아니 땅을 달라 해서 주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냐? 아니 땅을 주더라도 농작물을 심을 수 있는 땅이 필요한 거지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불모지를 주다니. 메히코식 탁상행정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혁명에 배신당한 이들이 다시금 불의에 대항하는 혁명의 대의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문학을 통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의식세계, 사회문화를 엿보는 것은 황홀경과도 같은 체험이었다. 물론 반세기도 전에 나온 책의 전부를 내가 소화해낼 수는 없었으리라. 그래서 나는 내가 보고 느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변명 같지만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더라도 현실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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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24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난해해도 독자가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문학작품이라면 저는 기꺼이 그책을 읽을 것입니다. 쉬르리얼리즘 풍의 작품 좋아합니다. ^^

레삭매냐 2018-04-26 10:10   좋아요 0 | URL
단 두 권의 소설로 라틴 아메리카의 별이
작가라는 명성이 괜스레 온 게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대단한 작가였습니다.

실비 제르맹의 <마그누스>에도 언급이 되었던
것 같은데, 예전에 달궁에서 <마그누스> 읽고
나서 한 번 읽어 봐야지 싶었는데 결국 만나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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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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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을 보고 남자로 생각했다. 나의 첫 번째 착각이었다. 킬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라는 말에 혹해 책을 펼쳐 들었는데 65세 할머니가 주인공 킬러란다. 놀라운 솜씨로 표적을 거침없이 제거하는 킬러 주인공은 남자일 거라고 추측했는데, 두 번째 착각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소설 <파과>의 이런 파격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한국소설에서 킬러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장르 문학이 아주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반증일까? 그래서인지 ‘설거지’하고 ‘방역’하는 킬러가 등장하는 소설을 좋아한다. 그런데 왜 하나 같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킬러들은 완벽할 수밖에 없는 걸까. 어리석은 질문일까? 표적을 제거하는 임무를 띤 킬러가 자꾸만 실패한다면 누가 다른 일을 그에게 맡기겠는가. 업무의 영속을 위해 킬러는 절대 임무에 실패하면 안 된다는 구조적 필연성을 가진다. 다음 질문은 그렇게 방역업자들에게 일거리가 많단 말인가? 조각 할머니 일인 에이전시로 시작한 방역사업은 고객을 위한 옵션 사업까지 전개할 정도로 규모의 경제를 지향한다. 온 세상을 들썩이는 창조경제가 방역사업에도 적용된 모양이다.

 

우리의 조각 할머니는 굳이 일거리가 되지 않더라도 전철에서 임부에게 막말을 내지르는 노인 같이 않은 노인을 응징한다. 그렇게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내는 치들에게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소시민의 울분을 대신해 주다니 통쾌할 따름이다. 요즘에는 노인축에도 끼지 못하는 나이지만, 역시 현직 방역업을 하기에 기력이 부족함을 느끼는 조각 씨는 자기관리에도 철저하다. 에이전시에서 마주친 자기 나이 반 토막밖에 안되는 투우라는 젊은 방역업자의 대거리가 목엣 가시 같지만 45년을 현역에 종사한 베테랑답게 가볍게 무시하는 센스도 빠뜨리지 않는다.

 

유기견 무용과 단란한 시절을 보내던 조각 씨의 삶에 균열이 발생한 건 한 달 전의 방역작업의 소산이다. 누가 들으면 웃을 지도 모르겠지만, 나름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조각 씨의 약점은 자신의 상처를 타인에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랴 그 약점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노화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이 시점에서 구병모 작가가 기술하는 주인공 조각 씨의 다채로운 감정선은 혁신과 통섭 그리고 생산성의 극대화라는 전투용어가 빗발치는 우리네 밥벌이의 현장과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독자는 킬러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삶의 진실 앞에 그저 놀랄 뿐이다.

 

냉장고 속 시취를 풍기며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잃어버린 으깨진 과일[破果]처럼 주인공 조각 역시 세월을 빗겨 나갈 수 없다. 구병모 작가는 씨줄과 날줄처럼 어떻게 조각이 뛰어난 방역업자가 되었는지 그녀의 과거와 현실을 오롯하게 엮어낸다. 프로페셔널한 해충 혹은 쥐를 깔끔하게 박멸하는 방역업자지만 풍진세상을 살다 보면 별일을 다 겪기 마련이 아닌가. 하물며 우리네 같은 보통 사람도 그럴진대, 45년을 전문 방역업자로 살아온 조각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모든 사건 사고의 균열은 예상하지 못한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최근 구제작업 도중 방심 때문에 큰 부상을 입은 조각은 에이전시와 줄을 닿은 병원에서 아내를 잃고 홀로 딸을 키우는 페이닥터 강 박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구원(舊怨) 때문에 복수의 전의를 불태우는 신예 킬러까지 등장하니 독자로서는 드디어 고대해 마지 않던 액션 활극이 펼쳐진다는 흥분감에 아드레날린 증폭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나는 소설 <파과>의 전개를 읽으면서 어떻게 해서 냉혈한 킬러 조각이 파지를 줍는 노인을 돕다가 자신의 표적 제거에 실패하고, 점점 더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가 하는 점에 독서의 방점을 두었다. 45년이라는 시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러저러한 사연을 가진 이들을 제거하던 킬러마저도 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까? 이 세상 모든 것은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게 된 킬러의 진혼곡처럼 <파과>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자신이 어느 날 죽게 된다면, 그동안 함께 해온 무용에게 위해가 닥칠 것을 염려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 대결을 앞두고 주변 정리를 하고 집을 나서는 조각의 모습에서 비장미의 절정을 읽는다.

 

남자 작가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묘사할 수 없을 자신의 이름이 유래된 손톱 소제를 위해 네일샵을 찾는 것으로 작품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지상의 찬란한 어둠 속에서 이런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점도 놀랍지만, 이 모든 것의 시발이 냉장고 청소를 하다 만난 으깨진 과일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기상천외하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결말은 창대하였다는 말만큼 이 소설을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표현도 없지 않을까 싶다. 어둠 속에서 일하는 방역업자 역시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의뢰인의 갖가지 사연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는 설정 역시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결국은 그렇게 우리 삶의 총합은 인간의 정(情)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인가.

 

진중하면서도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캐릭터 묘사가 일품이라고 생각한다. 긴장감을 포착하는 감정선의 신속한 전개도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마지막 대결에서 조각의 실력이 너무 돋보이는 설정이다.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5+1의 업자들을 권총과 벅나이프로 제압하는 장면은 판타지 영화에서나 가능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미래의 관객에서 보너스를 미리 지급한 게 아닐까. 수많은 짐작과 예측을 뒤로 하고 그저 죽음을 불사하고 마지막 결투를 앞둔 대모가 부른 백조의 노래라면 생각하면 모두가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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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9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9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8-04-21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들어보는 작가와 책인데 심지어 개정판이네요. 궁금해서 보관함에 담습니다.

레삭매냐 2018-04-23 11:50   좋아요 0 | URL
소설은 일단 재밌습니다 !
영화로도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겨울호랑이 2018-04-23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과」라는 작품은 여러 면에서 우리의 편견, 선입관을 깨는 군요... 선입관은 어떨 때는 사사로운 것에 신경을 덜 쓰게 하지만, 때로는 사실을 왜곡해서 전달해 주는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18-04-23 18:38   좋아요 1 | URL
그렇죠 일단 킬러라는 게 보통 남성들의 전유물로 인식
되어 왔는데 여성 그것도 연세가 드신 할머니 킬러의 등장
에서부터 편견을 박살내 버립니다.

참신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프레임에 갇히게 되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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