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모험이 있는 일러스트 세계 명작 동화 - 금발 머리와 곰 세 마리 외 7편 일러스트 세계 명작 동화
스콧 구스타프손 지음, 토마스 리 옮김 / 베이직북스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어제 책이 도착했다. 항상 다 알고 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세계명작 동화 8편이 정성스레 그려진 일러스트와 함께 담겨져 있었다. 옆에서 꼬맹이가 책을 읽어 달라는 성화에 주저 하지 않고 바로 책을 집어 들었다.

 

첫 번째 주자는 <금발 머리와 곰 세 마리>. 아빠곰, 엄마곰 그리고 아기곰 세 마리가 깊은 숲 속에 살고 있다. 맛있는 죽을 끓여 놓고, 식기를 기다리는 동안 곰 가족들은 산책을 나선다. 그 사이 우리의 주인공 금발머리 소녀가 등장한다. 이 녀석은 부모님이 하지 말라고 한 일들만 골라서 하기 시작한다. 우선 깊은 숲 속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건만 그렇게 했다. 남의 음식, 남의 집도 서슴지 않고 침입해서 아기곰의 죽을 다 먹어 버린다. 아기곰의 의자도 부숴 놓고, 피곤하다며 침실에까지 들어가 낮잠을 즐긴다. 아빠곰이 누군가 집에 침입한 흔적을 보고 분노하지만 금발머리 소녀는 곰돌이 가족에게 들키자 줄행랑을 놓는다. 거 참, 판단을 내리기에 아리송하다. 그나마 나쁘게 해결이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개구리 왕자>에서는 황금공(무려 고무공도 아니고 황금공이다!)을 가지고 놀던 공주가 황금공을 우물에 빠뜨려 위기에 처하자 못생긴 개구리가 짜잔하고 등장해 공주를 도와준다는 간단한 스토리다. 꼬마 공주는 앞뒤 잴 것 없이 황금공을 찾겠다는 생각에 개구리의 소원을 모두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덥썩 하고 만다. 이에 잽싸게 황금공을 찾아준 개구리는 공주에게 같이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그런 친구가 되어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늘어 놓는다. 못생긴 개구리에게 그런 약속을 지킬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공주는 냉큼 달아나 버린다.

 

못생긴 개구리가 그렇다고 포기할 리가 없지. 끝까지 공주를 따라가, 공주에게 계약을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공주의 아빠 왕은 아주 현명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간단하다, 약속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공주는 못생긴 개구리가 얄밉지만 자신이 내뱉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리 꼬맹이들에게 그래서 약속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못생긴 개구리를 혐오하던 공주가 개구리에게 대한 감정이 획기적으로 변하면서 짜잔하고 개구리는 멋진 소년 왕자로 변한다. 마녀의 저주를 받아 그동안 개구리로 살아야 했다나 뭐라나. 뭐 해피엔딩이 싫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시라.

 

‘재투성이 아가씨’란 의미의 신데렐라도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내용과 사뭇 달랐다. 병으로 자신의 부인을 잃은 소녀(훗날의 신데렐라)의 아빠는 소녀를 위해 새장가를 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외동딸을 위해 내린 결정은 소녀에게 가장 불행한 원인이 되는 단초를 제공한다. 세상의 모든 새엄마들은 다 그럴까? 신데렐라를 엄청 구박하기 시작한다. 마음씨 착한 우리 신데렐라는 새엄마와 새엄마가 새로 시집오면서 데려온 언니 둘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한다. 아니 이럴 수가! 신데렐라는 마음씨가 보살인 모양이다.

 

그 다음 레퍼터리는 모두가 아시는 바대로 진행된다. 왕국의 왕자가 결혼할 때가 되어 색시감을 구하기 위해 댄스파티를 주최하고, 왕국에 사는 모든 결혼적령기의 아가씨들이 초청을 받는다, 우리의 신데렐라만 빼고. 신데렐라는 댄스파티에 나갈 기대에 부풀어, 나아가 어쩌면 왕자님의 색시로 간택되는 영광에 눈이 먼 언니들을 위해 머리단장을 도와주고, 멋진 레이스까지 달아준다. 스드메의 완성인가? 신데렐라는 타고난 스타일리스트였나 보다. 암튼 신데렐라도 요정의 도움으로 댄스파티에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던 원작소설과의 결정적 차이는 왕자님이 주최한 댄스파티가 1회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있었다는 것이다. 요정은 언제나처럼 터부를 한 가지 제시한다. 자정에 끝나는 댄스파티 전에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법의 유효성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첫날은 경고를 마음에 새긴 신데렐라의 자각 때문에 문제 없이 넘어갔지만 두 번째 댄스파티에서는 모든 경고가 깨지기 마련이듯 신데렐라 역시 왕자님과의 댄스에 여념이 없다가 누더기 입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유명한 유리 구두 한 켤레만 남겨 두고 말이다.

 

왕자님의 시종은 유리 구두를 방석에 받든 채, 휘황찬란한 요정이 신데렐라에게 선물한 유니크한 유리 구두의 주인을 찾아 나선다. 왕자는 이미 조건의 달았다, 유리 구두의 주인이 미래의 자신의 배필감이라고 말이다. 하하하! 그러니까 조건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신데렐라 스토리 역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자신을 구박한 새언니들도 궁으로 불러 귀족들과 짝을 지어 주는 것으로 말이다. 신데렐라 역시 보살 뺨치는 선행를 베푸는 인물로 길이 기억되리라.

 

<아기 돼지 삼형제>도 흥미롭다. 아기 돼지 삼형제의 엄마가 이제 자식들이 독립할 때가 되었다며 나가서 독립하라는 그들에게 했던가. 짚단, 나무조각 그리고 벽돌을 모두 무상으로 얻어 자신의 독립거처를 짓지만 홀연히 등장한 방해꾼 늑대에게 내몰려 코너에 몰리지만 막내 돼지의 선견지명으로 마침내 늑대의 혼쭐을 내주는 게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던가. 늑대는 가택침입 뿐만 아니라 다양한 테러와 공격을 구사해 보지만 번번히 아기 돼지 삼총사에게 당한다. 늑대가 점점 불쌍해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굴뚝을 타고 내려온 늑대를 삶아 먹었다는 장면에서는 깜짝 놀랐다. 내가 본 다른 버전에서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고전처럼 동화도 어느 시절(era)에 읽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걸까? 아이들이 보는 시선과 성인의 그것은 정말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읽은 명작동화의 느낌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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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8-04-05 1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래동화(?) 들은 꽤 잔인한 내용도 많더라고요. 그래서 구전 동화를 글로 옮겨서 삽화까지 넣는 건 위험하다는 평도 있어요. 어른의 눈으로 봐서 그럴까요, 아이들은 늑대를 삶고 굽고 때려도 신나하더라구요;;;;;; (왜그런지 고길동 생각이 나네요)

레삭매냐 2018-04-05 17:0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정말 제대로 동화를 들려 주면
큰 일 날 듯 싶습니다. 빨간구두도 그런 것
같아요 ~

늑대고기를 아기 돼지 삼총사가 맛나게 먹
었다는 설정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

고길동, 쵝오입니다.

cyrus 2018-04-05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 세 마리 이야기’가 ‘골디락스’ 이야기 맞나요? 책방 독서모임에 참석하는 분들 대부분이 자녀를 키우는 부모입니다. 그분들을 자주 만나서 그런지 어린이 동화를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

레삭매냐 2018-04-05 19:57   좋아요 0 | URL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맞네요 골디락스~
골디락스가 금발머리 소녀를 뜻한다고
하네요.

무슨 경제용어와도 관계가 있구요.

1837년에 처음 쓰인 동화라고 합니다.

2018-04-05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5 1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읽어야 할 책들이 많은데 또 외도 중이다.

<호랑이 남자>를 읽고 나자, 그전에 사두었던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 생각이 났다. 어찌 하오리까, 일단 다른 책들은 접어 두고 이 책부터 읽게 됐다.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 - 에카 쿠르니아완

Beauty Is a Wound

 

이름도 사실 외우기 힘든 인도네시아 출신 작가의 글에 매료되어 버렸다. 매혹적이다 못해 고혹적이라고 해야 할까. 두 번째 소설 <호랑이 남자>를 먼저 읽고 나서 집의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장편 데뷔 소설을 찾아내 읽기 시작했다. 퇴근 길에 마침 들고 있던 <아킬레우스의 노래>도 읽기 시작했는데... 호메로스의 고전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글이 마음에 들었다. 고전은 이렇게 우려 먹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또 삼천포로 빠졌다.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는 <호랑이 남자>에 버금갈 정도의 위력을 가진 그런 소설이다. 출발부터 범상치 않다. 소설은 21년 전에 죽은 주인공 데위 아유가 되살아나 현실 세계로 들어오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때 죽이는 한 방 아닌가.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그녀가 결혼한 중늙은이 마 게딕이 사랑한 마 이양의 러브 스토리는 또 어떤가. 이번에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할리문다가 그 배경이다. 곧 싱가포르에 이어 바타비아까지 장악한 일본군이 등장할 차례다.

 

인도네시아 싸구려 (포르노) 소설과 서구의 근엄한 고전의 이종교배를 통해 나온 소설이라고 하는데 후자보다 개인적으로 전자에 더 호감이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이 재밌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 소설읽기에 전념하고 싶다. 유머는 어찌나 또 찰진지. 아직 채 100쪽도 읽지 못해 총평을 내리기엔 그렇지만, 올해를 장식하는 작품으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복수는 나의 것, 다른 사람들은 현금으로 내>도 연달아 번역되면 좋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 강추하는 바이다.

 

자, 다음 타자는 <아킬레우스의 노래>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 역시 한 번 불이 붙으면 당장에라도 읽어 버릴 것 같은 기세였는데 에카 쿠르니아완의 책 때문에 밀렸다.

 

아 그리고 보니 매들린 밀러의 소설도 데뷔작이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책이 비슷한 궤적에 놓여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내가 <호랑이 남자>를 먼저 읽고 쿠르니아완이 구사하는 인도네시아 스타일의 주술적 리얼리즘에 훈련이 되었다는 점 정도.

 

전자가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관통하는 내러티브를 자랑한다면, 후자는 역시 고전에 방점을 찍고 있다. 현대문학에서 나오는 셰익스피어 다시쓰기 시리즈가 현대의 작가에 의해 거듭해서 새로 쓰이는 것처럼 서양문화의 두 가지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신화와 기독교(엠마뉘엘 카레르의 르포 소설 <왕국>) 역시 끝없이 반복과 변주라는 과정을 통해 재해석되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그렇게 울궈 먹을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문학의 잠재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를 아무리 울궈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 누가 저작권 문제를 들먹이겠는가. 손쉬운 선택지이면서 동시에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욕을 얻어 먹을 수 있는 도전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일단 매들린 밀러의 소설은 커트라인은 통과한 셈이다.

 

소설의 시작은 아킬레우스의 전우이자 애인인 파트로클로스의 출생과 헬라스 세계의 최고 미녀 헬레네에 대한 구혼에 나선 영웅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꼬마 파트로클로스 역시 구혼자 대열에 끼어 보지만 사실 어림도 없는 도전이었다.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꾀쟁이 오디세우스가 모든 그리스 영웅들을 트로이 전쟁에 몰아 넣게 만드는 서약을 하는 장면도 흥미진진하다. 고래의 서사시/노래를 추구하는 필멸의 존재들인 인간/영웅들의 이야기, 성인이 되기 위해 소년은 거친 통과의례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가 어떻게 해서 아킬레우스와 다시 만나고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지 좀 더 읽어 봐야지 싶다.

 

오늘 논할 마지막 책은 그 이름도 높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에세이집이다. 아직 나오지도 않아서 어떤 책인지 가늠할 순 없지만 국내에서 과연 출간된지 요원해 보이는 <한없는 웃음>을 기다리며 몇 자 적어 본다.

 

우연히 이런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독서모임에서 우리의 친구 브랜던에게 물어 보았더랬지. 그랬더니만 책 좀 읽는다 하는 선수들은 다 알고 있지만, 그 악명 높은 책을 완독한 이가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호기심에 원서러도 입수해 놓았지만 두터운 싸이즈에 쫄아서 그저 쓰담쓰담만 할 뿐이다. 어서 빨리 번역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아, 그리고 제시 아이젠버그가 나오는 영화도 좀 찾아서 봤는데 작가와 비슷한 외모의 주인공이 등장해서 신기하기도 했다. 추운 겨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찾아간 또다른 작가의 이야기. 이름이 뭐였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둘이서 같이 눈길을 달리는 여행길은 아 전형적인 미국식 로드 무비의 재림이로구나 싶었다. 시간 내서 이 영화도 봐야지 싶다.

 

책은 주문해야겠다. 어서 빨리.

 

 

[뱀다리] 영화의 제목은 <the end of the tour>이었군요.

 

인터뷰어는 데비잇 립스키.

 

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반다나를 쓰고 있는지...

그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는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가 봅니다.

 

 

[뱀다리2] <한없는 웃음> 본문만 981쪽에 주석도 100쪽
이나 되네요... 출간하라 출간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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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4-03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레삭매냐님 페이퍼는 가급적 안 보는 게
좋은 것 같은데 오늘도 걸려서 봤습니다.
소설 책 좀 푹 빠져서 읽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습니다.ㅠㅠ

레삭매냐 2018-04-03 19:11   좋아요 1 | URL
요즘 괜찮은 책들이 연달아 나와서
도저히 안 사고 못배기게 만드네요.

로맹 가리의 책도 그렇고...
체사레 파베세의 책도 읽어 보고 -

그리하여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

AgalmA 2018-04-03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홓~~데이빗 포스터 월리스 이렇게 붐이 일어나나요! 아웅, 좋아!

레삭매냐 2018-04-03 22:17   좋아요 1 | URL
인피닛 제스트가 안된다면 다른 소설이라도
속히 번역이 돼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에세이집은 짜집기 스타일의 책으로
보이네요. 어쨌든 대환영입니다 !

목나무 2018-04-04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저 영화 보려구요. 우리나라 제목으로는 <여행의 끝>이더라구요.
이번 에세이집은 월러스의 세권의 에세이집 중에서 고른 것들을 묶은 거더라구요.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감사하며 읽으려구요!

레삭매냐 2018-04-04 10:21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서는 <여행의 끝>이라는 제목으로
소개가 되었군요. 저도 시간 내서 봐야겠어요...

월리스의 소설도 순차적으로 나왔으면 하네요.
도서관에 사달라는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요? ㅋㅋ

사서 읽어야 하는데 당장 읽어야 하는 책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한 박자 쉬고 들어가야겠습니다.
 
호랑이 남자
에카 쿠르니아완 지음, 박소현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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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출신 작가 에카 쿠르니아완의 <호랑이 남자>를 읽었다. 그는 작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한다. 작년말에 전작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가 나왔을 적에, 대단한 작품이라는 느낌에 일단 구매는 했지만 읽지는 못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흔한 책쟁이의 이야기려나. 이번에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와 더불어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우리가 보통 말하는 맨부커상하고 다르다는 점을 나는 강조한다)에서 경쟁한 쿠르니아완의 <호랑이 남자>(Man Tiger)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주말이 막 시작되기 전에 주문해서 만우절을 끼고 읽을 수가 있었다. 책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기대 이상이었다. 참고로 로베르트 제탈러의 책 <한평생>도 당시 맨부커 인터내셔널 롱리스트에 올랐었다.

 

아직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를 읽지 않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주술적 리얼리즘을 구사한다는 작가의 스타일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무슬림 문화와 이종교배된 인도네시아 전통문화에서 유래한 하얀 암호랑이가 주인공 청년 마르지오에 빙의되어 사랑하는 연인의 아버지를 살해한다는 충격적인 설정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아름다운 그것은 상처>가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생소한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관통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면, <호랑이 남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나치게 주관적인 해석일진 모르겠지만, 자신 안에 호랑이가 들끓는 기운을 느끼는 청년 마르지오는 수백 년간의 네덜란드의 지배에서 벗어난 인도네시아 민중을 상징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진 수십 년에 걸친 폭압적인 군부통치와 그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계열 게릴라들과의 내전을 겪은 포스트임페리얼리즘의 전형이 소설 속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마르지오는 자신의 이발사 아버지 코마르 빈 슈엡과 태생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다. 코마르는 자신의 아내 누라에니의 뿌루퉁한 태도에 질려 폭력과 패악질을 서슴지 않는다. 조상 대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전승되는 가운데, 주인공 마르지오 역시 그런 호랑이 한 마리를 가슴에 품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이빨로 이웃에 사는 예술가 안와르 사닷의 목을 물어뜯어 죽이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에카 쿠르니아완은 왜 마르지오가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을 시작한다.

 

쿠르니아완의 플래시백은 살인사건이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가까운 시점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이전의 과거로 목적지를 정한다. 코마르가 조숙아로 태어난 막내딸 마리안의 죽어가는 가운데 아버지로서의 역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뛰어난 돼지 사냥꾼 마르지오는 분노한다.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는 결심에 거리를 누빈다. 하지만 과연 <호랑이 남자>의 내러티브가 그렇게 단순하기만 할 걸까. 그렇지 않다. 마르지오 집안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예리하게 파고든다. 애정 없는 가난한 결혼생활을 해야 했던 누라에니의 과거 그리고 결정적 사건, 이어지는 마르지오와 안와르 사닷의 막내딸 마하라니와의 로맨스들이 복잡하게 겹치기 시작한다. 네덜란드의 폭력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인도네시아의 집권층은 식민지 모국으로부터 배운 통치기술을 그대로 민중에게 적용했다. 한 마디로 법치와 대화에 의한 해결보다는 주먹으로 대변되는 폭력적 방식이 훨씬 더 빠른 모양이다.

 

아버지 코마르의 폭력 때문에 아버지를 증오하게 된 마르지오는 어머니 누라에니 역시 원인제공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고뇌에 빠져든다. 다독가로 유명한 쿠르니아완은 어쩌면 선배 대가 셰익스피어에게서 배운 <로미오와 줄리엣>과 <햄릿>에서 유래한 중요한 모티브를 인도네시아 고유의 전승에 차용했다는 느낌도 들었다. 우리네 인간의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마르지오가 직면한 갈등을 전개하는 쿠르니아완의 저글링 기술은 인상적이다.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저격한 장면은 그야말로 천의무봉 같은 솜씨였다.

 

200쪽 남짓한 길지 않은 분량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녹여낼 수 있는 작가의 역량에 놀랐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호랑이 남자>에서 에카 쿠르니아완이 다루고 있는 인도네시아 전승에서 유래한 가장 유니크한 주제야말로 세계인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문학적 변별력이 아닐까 싶다. 결말 부분에 가서 다시 사건이 시작된 결정적 이유를 배치한 점도 훌륭하다. 이렇게 준비된 멋진 한 방이야말로 독자들에게 독서의 만족감을 제공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봄이 왔으니, 이제 예전에 사둔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를 찾아 읽을 시간이다. 기대한다.

 

[뱀다리] 당나귀점프가 맡은 표지 그림은 책의 주제를 제대로 짚어낸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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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
밴디 리 엮음, 정지인.이은진 옮김 / 심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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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반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의 분위기가 물씬 무르익고 있는 중이다. 정전협상을 평화협상으로 바꾸어 영구적인 평화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 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방국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반도의 영구 분단을 원하는 어느 이웃국가인 일본은 현재 패싱 위기에 직면해 있는 중이다.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덕담은커녕 내정간섭에 가까운 발언을 하는 지도자는 정말 밥맛이다. 또 강력한 우방국인 미국의 대통령에 대해서도 우려가 크다.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도널드 트럼프.

 

부동산 재벌 출신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 첨가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게 또 무슨 미국스러운 일인가 싶었는데 그가 쟁쟁한 공화당 후보들을 제치고 공화당 대선후보의 자리에 올라 힐러리 클린턴을 상대하게 되자 이러다 진짜 대통령이 되는 거 아냐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런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503호나 716호처럼 절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되는 이가 대통령이 될 건 아닌가 하는 우려는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의 지식인 계층에서도 널리 퍼졌던 모양이다. 우려가 현실이 되자 27명의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은 그들의 지도자에 대한 27편의 에세이를 펴내기에 이르렀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는 그런 결과의 집대성이다.

 

한국계 출신 밴디 리는 트럼프 당선 직후, 명백해 보이는 당선인의 정신적 불안정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권력자가 명백하게 정신적 장애징후를 보여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보인다고 할 때 과연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이른바 골드워터 규칙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는데, 연예인과 설전을 벌이는 가운데 경조증을 언급해서 의학회에서 제명되었다. 아마 책을 내면서 변호사들의 조언을 받았겠지만 결론은 도널드 트럼프처럼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이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 문제가 걸린 대통령직이라는 막대한 권력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아울러 공공의 정신 건강의 증진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미국 정가를 강타한 트럼프의 섹스 스캔들은 그가 가진 나르시스트로서의 자기성애적인 면모를 유감 없이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활발한 SNS 활동을 하면서도 왜 섹스 스캔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책에 의하면 그는 극단적 쾌락주의자로서 자신에게 유리한 가짜 뉴스들을 칭송하고, 불리한 진짜 뉴스에 대해서는 가짜 뉴스라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트럼프 시대에 우리는 과연 진실이 무엇인가라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예전에 빌 클린턴이 전 미국인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이 그의 섹스 스캔들이 아니라, 대통령이 미국 시민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입만 열면 거짓말을 늘어놓는 현대판 양치기 아저씨, 나르시스트의 경우에는 시민들이 그의 거짓말에 면역이 되어 버린 걸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강화되는 편집증, 판단력 저하 그리고 자신 말고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신뢰의 결여로 트럼프를 대통령을 만든 이들조차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에게 그의 변덕이 두려운 사실은 취임 4개월 동안 러시아 스캔들로 비화된 내부의 공격을 외부로 향하게 하기 위해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북한을 상대로 전쟁을 계획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여름, 한창 북한을 상대로 한 전쟁 위기설에 우리가 얼마나 시달렸는지 생각해 본다면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또다른 곳에서는 그의 소시오패시적인 성격에 대해 심층 있는 분석을 시도한다. 다시 한 번 골드워터 규칙을 적용해서, 저술에 참가한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이 그를 상대로 직접적인 진단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책에 소개된 진단들은 미디어를 통해 드러난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가정 혹은 가설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가 북한을 상대로 냉온탕을 오가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른바 미치광이 전략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십대 이래 계속된 반복된 거짓말, 자신이 한 말조차 지키지 않는 일관된 무책임성과 충동성 같은 케이스가 위에서 언급된 가설을 지지해 준다.

 

미국의 국내 문제를 돌아보면, 아메리카 퍼스트를 주창하며 세계를 상대로 한 무역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선포를 들으면서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왜 그동안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창조하면서 기존의 브레턴우즈 질서를 유지해 왔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절대적으로 미국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그래온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팍스 아메리카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지 않는 가운데 경찰국가로서의 위상 역시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고 있는 중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도널드 트럼프 자신이다. 주변의 경제 전문가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독불장군식의 정책이 유권자들의 불안 심리를 다시 한 번 자극해서, 올해 가을로 예정된 중간선거에서 자신과 공화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진 모르겠지만 추락한 미국의 정치 경제적 위신은 이제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자신에게 불리하게 조성된 국면을 탈출하기 위해 기존의 잘못된 정책과 거짓말들을 반복할 것이 눈에 뻔히 보이지 않는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예스맨으로 내각과 백악관을 채우고, 권력 남용 그리고 성공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장면은 어쩌면 그렇게 지금은 감옥에 가 계신 716호와 똑같은지 모르겠다. 어쩌면 물건너 이웃나라 대통령에 대한 글을 읽어볼 것이 아니라, 당장 우리의 케이스를 조명해 보는 게 훨씬 나은 게 아닐까. 그들이 천조국으로 떠받드는 명백한 사례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의 분발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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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1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1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8-04-02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뉴스공장에도 출연한 심리학자의 책인 것 같네요... 트럼프는 예능에서는 높은 인기를 끌었지만, 정치까지 나와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레삭매냐 2018-04-02 09:13   좋아요 1 | URL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예능에 출연하게 되면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결국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게 아닐까요.

물론 일반 대중의 슈퍼엘리트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반감도 한 몫 했겠지만 말입니다.
힐러리는 우리로 치면 716호처럼 시장에 가서
국밥이라도 먹는 쇼를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네요.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토니 모리슨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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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토니 모리슨과 존 쿳시의 책에 흠뻑 빠져 살고 있다. 이 달에만 이 두 작가의 책을 5권 읽었다. 한 권씩 번갈아 가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난주에 우연히 이 책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사다가 읽었다. 사실 그동안 토니 모리슨 작가의 책을 꾸준히 읽지 않아 그녀의 스타일이며, 주제 의식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틈이 없었다. 3월에 <술라>와 <하나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를 읽으면서 감을 잡았다.

 

소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의 시선에서 내러티브가 진행된다. 우선 브라이드(룰라 앤)에 대한 이야기부터. 예전에 검다는 것이 아주 나쁘다는 사회적 인식에 사로 잡혔던 시절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악랄했던 인신매매를 행했던 노예제를 거쳐, 1960-70년대 치열한 인권운동의 과정을 통해 마침내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선출되기도 했다. 브라이드의 엄마 스윗니스는 딸의 검은 피부색에 경악한다. 어미로서 제 할 일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은 듬뿍 나눠주지 못했다. 훗날 실비아 주식회사의 유능한 지역 매니저로 성공한 브라이드에게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못하고 스윗니스라고 부르는 그런 트라우마의 시작이었다. 엄마에게 천대받은 검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그녀 성공의 비결이 되었다.

 

그런 브라이드에게는 브루클린이라는 이름의 사이비 여자친구가 있다. 브라이드의 성공을 시샘하면서 그녀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이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긴 브라이드가 자신이 15년 전에 법정에서 한 거짓 증언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소피아 헉슬리가 출소하는 날, 그녀를 찾아가 그녀를 돕겠다고 했다가 늘씬하게 두들겨 맞았을 때 곁에서 자신을 도와준 이가 드레드 머리의 백인 친구 브루클린이었지. 한 사람에게서 선과 악 두 가지를 모두 보는 게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엄마에게 느끼지 못한 애정결핍을 브라이드는 성공과 숱하게 자신을 이용해 먹는 남자친구들에게서 찾았다. 모두가 오고 가는 가운데, 한 명만을 그녀는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의 이름은 부커 스타번. 소설에 후반에 가서 부커가 브라이드를 떠난 진짜 이유가 드러나게 되는데, 우리 모두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런 비밀들을 가지고 있고 그런 비밀들이 주는 내적 상처로부터 치유받아야 한다는 말을 토니 모리슨은 조용하게 들려 주기 시작한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소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에서 토니 모리슨은 브라이드/룰라 앤과 부커 스타번을 중심으로 한 주인공들이 가진 상처들을 치유해 가는 과정을 한 편의 로드무비를 보는 듯한 감성으로 그려낸다. 실제로 소설에서 브라이드는 멋진 재규어를 타고, 자신을 매몰차게 걷어차 버린 부커의 행적을 쫓아 나서지 않던가. 물론 그런 구도의 과정이 쉬울 리가 없다. 교통사고로 육체가 형편없이 부서진 브라이드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히피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부커는 또 어떤가. 어린 시절, 형인 애덤을 추악한 범죄자에게 희생당하고 평생 형의 죽음이 드리운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트럼펫에 전념하기도 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분석하기 위해 경제학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 결과 노예제도, 린치, 시민권, 인종주의 그리고 흑인혁명에 이르는 모든 문제의 핵심은 돈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무언가 기대해 보았지만, 매스 미디어에서는 온통 무의미해 보이는 오락만 제공할 뿐이었다. 부커가 원하는 유익한 통찰과 지식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두 개의 학위를 가진 거리의 음악가이자 철학자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고, 브라이드를 만나 운명적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불투명한 미래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결말 부근에 이르러 브라이드의 임신과 화상으로 죽은 올리베 고모를 정성으로 간호하는 동안 되살아난 연인관계의 회생은 솔직히 낯설게 다가왔다. 뭐랄까, 개인적으로 화끈한 한 방을 원했었나 보다. 토니 모리슨 작가의 스타일이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이다. 어쨌든 모든 관계에 있어, 회복의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진실이다. 장황하고 구구절절한 이유보다, 진심이 담긴 한 장의 편지가 더 위력적이지 않은가라고 토니 모리슨은 거장의 실력으로 증명해 보인다.

 

내가 다음에 읽을 토니 모리슨의 책은 <재즈>다. 예전에 들녘에서 나온 책도 있고, 새로 나온 책도 이미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만난 토니 모리슨의 책인 <자비>는 읽기만 하고 리뷰를 쓰지 않았네.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리뷰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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