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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아니 왜 내가 이제야 토니 모리슨을 읽게 되었는가. 지난주에 만난 <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에 등장한 토니 모리슨의 <술라>를 보고 바로 온라인 서점에 주문장을 날렸고 지난 수요일 책이 도착했다. 그리고 한창 읽고 있던 존 쿳시의 <마이클 K>를 다 마치고, 바로 <술라>를 읽기 시작했다. 197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에 발표된 대가의 두 번째 소설이라고 하는데, 대가의 작품은 시절이 흘러도 여전히 고고한 묵향을 풍기고 있었다.
미국 오하이오 주 메달리언의 보텀(Bottom)이라고 불리는 계곡에 흑인들이 모여 살았다는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전선에 파견된 섀드랙이 바로 곁에서 전우가 산산조각이 나 죽는 모습을 보고 고향에 돌아와서 내면이 파괴된 채로 살아가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같은 흑인들은 물론이고 백인에게 그야말로 깽판을 쳐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고 했던가.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절 이야기다. 그런 그가 전국자살일(National Suicide Day)를 정한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소설 <술라>의 진짜 주인공들은 술라 매 피스와 넬 라이트다. 서로 상반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그녀들의 이야기 속으로 토니 모리슨은 독자를 안내한다. 넬의 엄마 헐린 라이트는 보수적 성향을 가진 여성이다. 헐린은 어린 딸 넬을 데리고 할머니가 병에 걸리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남부여행길에 나서게 된다. 두 모녀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심한 남부여행 도중에 치욕적인 경험을 한다.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에서 흑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들의 태생적 권리를 얻게 되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넬의 집안환경이 그렇다면, 술라의 케이스는 좀 더 복잡하다. 피스 집안의 여걸 에바 할머니는 자신과 아이들을 내버리고 도망친 남편 보이보이가 부재한 가운데,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는 사투를 벌인다. 자신의 그 아름다운 다리 한 짝과 맞바꿈으로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피스 집안이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술라의 외삼촌 플럼은 섀드랙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상흔으로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에바가 제대로 먹지 못해 변비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던 아이의 항문을 손으로 파내던 그 젊은 엄마였단 말인가. 보텀 공동체의 여성들을 온통 적으로 만들었던 술라의 엄마 해나 역시 불이 붙어 죽고 만다. 그렇다면 그 장면을 본 술라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
넬은 모든 여성들이 선망하는 주드 그린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절친한 친구 술라와의 관계에서 빠져 나간다. 그렇게 십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넬이 전업주부로 변신했자면, 술라는 대처로 나가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의 온갖 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고향으로 귀향한다. 고향에 돌아와서 그녀가 처음 한 일은, 할머니 에바를 요양원에 보낸 일이다. 그리고 그녀의 엄마 해나보다 한술 더 떠 마을의 모든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 사랑하는 감정도 없이 말이다. 문제는 넬의 남편 주드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두 친구 간의 우정에 금이 쩍쩍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우정이라는 도덕적 기준에서 본다면 술라는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훗날 그녀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마을 공동체 사람들은 하나 같이 기뻐해 마지않았다. 마을의 소문난 창녀가 죽었어도, 그녀들은 맨발로 달려 나가다시피 해서 도움을 주었는데 왜 술라에게는 그렇게 매몰찬 대접을 했던 것일까. 성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자유로웠던 영혼이었던 이단아 술라 피스를 그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암묵적인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힌 일원에 대한 징벌이 얼마나 가혹한지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술라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공동체의 공공의 적이 사라짐으로써, 공허한 감정들을 양산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에바 피스의 예를 들어 자신의 나이든 부모들을 양심의 가책에 못이겨 부양하지 않았던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자유연애를 즐기던 술라에게 자신들의 연인 혹은 남편을 빼앗길까봐 노심초사하던 여자들은 또 어떤가. 넬과 술라, 해나 그리고 에바 피스에 이르는 등장인물에 대한 선 굵은 심리묘사는 정말 탁월했다.
그렇게 소설의 2/3 지점까지는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술라가 갑작스럽게 죽은 뒤부터는 이야기의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초보작가(1973년 당시) 내러티브 구성에 있어 뒷심이 빠진 게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처음 만난 토니 모리슨의 작품은 일단 분량에서 읽기에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간결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전개와 구성 그리고 술라와 에바 피스 같이 강단 있는 성격의 캐릭터의 창조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제 오늘 산 신간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부터 토니 모리슨을 역순으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