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
크리스틴 페레플뢰리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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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독서가들은 모두 몽상가들이다.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그 무언가를 향해 달려 나가는 몽상가라는 생각이 크리스틴 페레플뢰리의 <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대해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분량도 적고, 무엇보다 책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지하철에서 책 읽던 여자가 무슨 재미난 이야기-아무래도 로맨스에 관한 것일 것이다-를 기대했건만 그런 건 없었다. 어쩌면 프랑스 소설 특유의 그런 맥락이 뚝뚝 끊어지는 스타일이 꾸준하게 책 읽기를 방해한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에 로버트 크레이스의 책들을 두 권이나 읽느라 상대적으로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로버트 크레이스의 신간이 재밌긴 했다.

 

부동산 사무소에서 그냥저냥 하루를 보내는 쥘리에트, 책 전달자 두목 급에 해당하는 솔리망, 그의 딸 자이드, 지하철에서 이탈리아 어로 된 요리책을 읽던 실비아 할머니 그리고 역시 지하철에서 곤충에 대한 책을 읽던 레오니다스가 엮어내는 책에 대한 이야기는 좀 심심했다. 무언가 좀 더 스펙터클한 스토리를 기대한 게 문제였을까. 평범한 소시민이 책의 세계에 돌입해 들어가는 과정이 낯설게 느껴졌다. 적어도 쥘리에트는 할머니가 물려 주신 유산으로 구입한 아파트 덕분에 주거에 대한 걱정은 없었으니까, 솔리망의 뒤를 이어 ‘무한 도서 협회’ 그리고 그의 딸 자이드까지 보살피게 되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었다. 아, 직장인의 로망이여.

 

저자 크리스틴 페레플뢰리는 정처 없이 부유하는 상념들로 고민하는 주인공 쥘리에트의 내적 갈등을 탁월하게 풀어낸다. 우리는 삶 가운데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면서 살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고 살지 않는가. 그냥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산다고 하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아마도 그럴 때, 책이야말로 최고의 위안이 될 거라는 상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쥘리에트는 솔리망이 심장 수술 중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좌절하지 않고 번듯하게 무한 도서 협회 두목으로 자신의 일을 꾸준하게 해나갈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솔리망의 딸 자이드를 이란의 시라즈에서 살던 난민이자 그녀의 어머니 피루제에게 데려다 준 후, 만나게 된 노란미니버스를 끌어다가 이동식 전달자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그렇지 삶의 순간들은 모두가 결정의 순간이다. 자신의 집을 세준 다음, 그 비용을 바탕으로 ‘옐로 서브마린(Y.S.)'의 연료를 채우고, 장거리 이동 중에 필요한 비상식량과 잡화들을 산 다음, 보무도 당당하게 잿빛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그녀가 길 위에서 책을 한 가득 실은 버스를 달리며 만나게 될 인연 아니 운명들의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졌다. 적어도 책을 사랑하는 이들과의 만남이라면 밤을 세워서라도 할 이야기들이 많을 테니까 말이다.

 

확실히 <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의 줄거리는 몽상적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우리네 현실에서도 만날 수 있는 오가와 이토의 <달팽이 식당> 그리고 토니 모리슨의 <술라>(이 책은 바로 어제 주문했다) 같은 책들이 주는 현실성에 퍼뜩 눈이 떠졌다. 아, 그렇지 나는 책 읽는 사람이었지. 곳곳에서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이지 못한 이물감에 다소 생소해지는 그런 느낌이 드는 독서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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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0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0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0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몽키스 레인코트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전행선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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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난 아무래도 로버트 크레이스 작가의 팬이 된 모양이다. 지금까지 아마 세 권의 그가 쓴 미스터리를 읽었는데 작가의 데뷔작인 <몽키스 레인코트>를 읽고 판가름이 나 버렸다. 지난 주에 신간 <서스펙트>를 읽고 나서, 2월달에 사두었던 <몽키스 레인코트>를 읽기 시작했다. 정말 의미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도 마다하고 이 책부터 다 읽게 됐다 어젯밤에. 새벽까지 책을 읽느라 몸은 피곤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더 재미에 가속도가 붙어서 도저히 고만 읽을 수가 없더라.

 

자칭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설 탐정이라고 자부하는 전직 육군 특수부대 출신 엘비스 콜과 전직 경찰이자 묵묵하기로 소문난 남자 조 파이크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평가하고 싶다. 아무래도 할리우드 바닥에서 극본가로 다년간 활동한 경험이 놀라운 데뷔작의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로버트 크레이스가 구사하는 문장은 간결하다. 그건 마치 한 편의 텔레비전 범죄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당연히 속도감도 탑재되어 있다. 다만 첫 소설이니 만큼 세련된 점이 아쉽긴 한데, 그런 점들은 후속작에서 개선되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자, 이제 본격적인 <몽키스 레인코트>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 올해 35세의 주인공 엘비스 콜은 39세 전업주부 엘렌 랭의 사건 의뢰를 받는다. 경찰이 개입되는 건 싫으니, 우리와는 달리 사설 탐정 서비스가 공인된 미국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비용이 든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사건 수수료는 별도의 청구를 빼고 2,000달러. 30년 전의 물가를 고려한다면 적은 돈은 아닌 것 같다. 엘렌 랭은 실종된 자신의 남편 모트와 9살난 아들 페리를 찾아 달라고 한다.

 

사건 초반에는 할리우드에서 제작자로 활동하던 바람난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잠적한 단순 사건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능한 탐정 엘비스 콜이 사건의 본질에 접근할수록 쉽지 않은 미션이라는 점이 속속 들어난다. 모트가 지역에서 투우사 출신의 이름난 범죄조직 두목인 돔(도밍고) 가르시아 두란이 아끼는 마약을 훔쳐 달아났다고 추정된다. 두란 패밀리는 잃어버린 마약을 찾기 위해 랭 씨네 집을 뒤집어엎고, 아이를 납치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놈들이다. 미스터 두란에게 끌려간 엘비스 콜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마약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당한다. 이거 점점 이야기가 꼬이기 시작하는걸. 천하의 엘비스도 거물 범죄조직을 상대하기가 버거워 보인다. 신뢰하는 동료 조 파이크도 등장하지만, 쉽지 않은 대결이 전개된다. 물론 그 와중에 두 건의 로맨스인 듯, 로맨스 같지 않은 메이크아웃(make out)도 거칠게 등장한다. 이런 부분이 약간 세련되지 않은 부분이라고 해야 할까.

 

경찰의 도움 따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두 마리의 외로운 늑대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는 나름의 무장을 갖추고, 할리우드 람보 스타일로 두란 패밀리와의 최후의 대결에 나선다.

 

무엇이 30년 전의 <몽키스 레인코트>가 지금도 여전히 흥미진진한 소설적 아우라를 풍기게 만들었을까. 우선 현재 진행형인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 듀오의 끈쩍한 브로맨스가 그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엘비스 콜이 시니컬한 유머를 담당하고 있다면, 그 반대에서 조 파이크는 침묵 가운데 동료와 그의 의뢰인을 호위하고 거친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둘은 불사신 같은 존재들이 아니다. 때로는 범죄조직원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하고, 부러지고 깨지고를 반복한다. 심지어 최후의 대결에서 조 파이크는 총에 맞기도 하지 않던가. 그들도 인간이기에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다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신념대로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엘비스 콜이 막무가내인 것만은 아니라고 로버트 크레이스 작가는 매력적인 엘렌의 친구 재닛 그리고 엘렌과 차례로 관계를 갖는 장면으로 이에 대해 항변한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들이 좀 소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뭐 30년 전에는 의뢰인과의 로맨스가 그런대로 받아 들여졌나 싶기도 하다. 지금은 아무도 모를 (존 쿠거) 멜런캠프의 이름이 소설에 등장하는 순간, 아 나도 옛날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멜런캠프와 브루스 스프링스틴 같이 한 시대를 상징하는 미국 문화 아이콘을 절묘하게 다루는 점에서 로버트 크레이스가 대중들의 코드를 잘 읽는 작가라는 점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내가 다음에 만나보고 싶은 엘비스 콜/조 파이크의 작품은 바로 <L.A. 레퀴엠>이다. 이 책은 아무래도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지 않을까 싶다. 아, 참고로 이 걸출한 소설의 제목 <몽키스 레인코트>는 바쇼의 하이쿠에 나오는 ‘원숭이도 도롱이가 필요하다’는 싯구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여전히 소설의 어떤 내용과 문맥이 맞아 떨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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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8-03-21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읽고 엘비스 콜 보다 조 파이크가 좋았어요.
뭐랄까, 인간적인 따스함~^^

레삭매냐 2018-03-21 20:11   좋아요 0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

어쩜 이렇게 멋들어진 콤비를 만들어내
울궈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조 파이크 단독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
도 있다고 하네요. 도서관에서 급하게
<라 레퀴엠> 빌려 왔는데 먼저 읽어야
하는 책 때문에 후순위로 밀려 버렸네요...
 
서스펙트 버티고 시리즈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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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다. 다른 말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지난 1월달에 <마지막 탐정>으로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과 두 번째로 만났는데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 듀엣과는 또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 <서스펙트>는 정말 대단했다. 아무래도 이 작가의 팬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이미 그의 데뷔작인 <몽키스 레인코트>도 수배해 두었는데 시간이 나는 대로 읽을 계획이다.

 

소설은 로버트 크레이스가 주로 활동하는 미국 LA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다. 소설 지분의 절반을 차지하는 저먼 셰퍼드 매기와 그의 무리이자 알파였던 피트가 급조 폭발물(IED)로 크게 다치고 죽는 장면으로 프롤로그의 시작을 알린다. 그 다음에는 LA의 모처에서 순찰 중이던 주인공 스콧 제임스 순경과 그의 파트너 스테파니 앤더스가 다섯 명의 괴한들의 총격을 받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총기의 천국 미국이 도대체 총기규제에 나서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늘도 학교에서 교사가 총기에 대한 안전교육을 하던 중에 오발 사고로 수업 참관 중이던 학생의 목에 총탄이 박히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하지 않은가. 이런 사고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바라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AK-47까지 동원한 무시무시한 총격으로 파트너를 잃은 스콧 제임스는 극복할 수 없는 상실감으로 지독한 PTSD에 시달린다. 밤마다 악몽을 꾸는 건 물론이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으로 죽어간 파트너 스테파니에 대한 생각 때문에 총격 때문에 입은 부상으로 후유증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LAPD 경찰직을 그만 두는 대신, 스콧은 LAPD 산하 K-9에 배속되어 도미닉 릴랜드 경사 휘하에서 경찰견을 다루는 핸들러 임무에 자원한다. 그렇게 스콧과 매기는 훈련장에서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믿음이 가지 않는 존재들(suspect)이 뭉친 것이다.

 

생전 개를 키워 보지 않은 스콧은 처음부터 릴랜드의 마음에 전혀 안드는 고집센 개자식(!!!)이었지만 매기와 함께 24시간을 보내면서 차츰 치유의 시간을 갖게 된다. 아마 그건 상대방인 매기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자신의 사건을 맡았던 멜론 형사와의 불화로 사건에서 배제된 스콧은 멜론 형사가 은퇴한 다음, 새로 사건을 맡은 버드 오르소 형사 그리고 조이스 카울리 형사와 팀을 이루면서 과거의 기억 속에 잠재된 희미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숨겨진 사건의 전모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사실 소설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어쩌면 밋밋해 보인다. 아무런 단서도, 목격자도 없는 사건을 매기의 후각만에 의지해서 실낱 같은 단서들을 기초로 해서 세운 희박한 재구성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경찰이었던 스콧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반드시 풀어야 하는 숙제가 있었다. 두 번 다시 파트너를 져버려서는 안된다는 자신과의 약속, 매기와의 짠한 관계 형성을 통해 그녀의 알파가 된 스콧에게 매기는 그야말로 충성을 다한다. 알파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안위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로버트 크레이스는 단순하게 복잡해 보이는 사건을 풀어 나가는 데만 신경을 쓴 게 아니라, 공통적으로 상실이라는 PTSD를 지닌 인간과 개의 상화작용을 내러티브에 녹여 내는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K-9에서 신출내기로 상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초짜 경관에서 스콧이 배짱 두둑한 개자식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일종의 통과의례라고나 할까. 내부 배신 때문에 누구를 믿어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도 하나의 클리셰이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상적이었다. 후반에 자신의 사건을 맡았던 멜론 형사를 찾아가 사과하는 장면도 사나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인정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의 모습이 아닐까.

 

스콧이 파고든 사건의 이면에는 국제적 다이아몬드 밀수의 실체가 숨어 있었고, 이제는 충격적일 것도 없는 내부자들의 고약한 모의의 존재였다. 내부의 악당들은 스콧이 꽂는 표적마다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과연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예상과 추측으로 흥분되기 시작한다. 이 양반, 확실하게 재밌는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결말 부분에 포진한 마지막 대결은 정말 최고였다. 독자를 점층적으로 클라이맥스로 모든 신경을 몰입하게 만든 다음, 한 방에 해결하는 수완은 정말 대단했다. 미스터리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게 아닌가.

 

사나이는 그의 파트너를 죽게 놔두지 않는 법이다 (417쪽)

 

넷플릭스나 훌루에서 로버트 크레이스의 이런 이야기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물론 영화로 만들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책의 뒷면에 나온 대로 로버트 크레이스가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라는 데이비드 발다치의 의견에 격하게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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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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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슬럼프에 빠졌다. 지난달에 숱한 SF소설들을 읽은 후유증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 저 책 읽기 시작했지만 미처 끝내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재밌고, 속도감나는 그런 책을 읽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 주에 주워온 책장에 스택한 책 중에 커트 보네거트의 <마더 나이트>가 눈에 띄었다. 그렇지 바로 이 책이야. 개인적으로 나는 커트 보네거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제5도살장>보다도 이 책을 더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오, 이럴 수가! 내가 커트 보네거트 작품 중에 단연 최고로 꼽는 <마더 나이트>가 이미 20년도 전(1996년 제작)에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바로 유투브로 트레일러를 검색해 보았다. 닉 놀티가 주인공 하워드 W. 캠벨 주니어 역할을 맡아 열연을 보여 주었다. 반드시 구해서 봐야겠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자. 미국 출신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의 라디오 선전원으로 직속상관인 선전상 파울 괴벨스 박사가 경탄할 정도로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다. 하지만 베를린 경찰총수의 딸 헬가 노트와 결혼해서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과 유태인 증오가(Jew Hater)로서 나치 프로파간다의 첨병이었던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놀라운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미국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이다. 이거 그야말로 놀랄 노자군! 문제는 프랭크 위르타넨과 로젠펠트 대통령 말고는 그가 미국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전쟁 중에 사랑하는 아내 헬가를 크림반도 전투에서 잃고, 가증스러운 전범 신세가 되어 쫓기던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는 푸른 요정 대모를 자처하는 자신의 상관 프랭크 위르타넨의 도움으로 뉴욕에 잠입해서 커다란 불편함 없이 살아왔다. 돌아가신 부모가 남겨 주신 유산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풍족하게 살면서. 한때 그의 동료들이었던 나치 전범들이 주로 남미 각국에서 신생국 이스라엘 모사드의 추적을 받으며 언제 납치되어 이스라엘로 송환될 걱정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커트 보네거트가 구사하는 블랙유머는 그렇게 단순하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아내 헬가가 십수년 전의 외모 그대로 나타나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를 놀라게 만든다. 자신이 나치 선전원 시절에 발표한 소중한 원고들이 가득들은 트렁크까지 선물로 가지고 말이다. 자신이 정말 진실한 친구라고 믿는 체스 파트너이자 화가 조지 크래프트의 정체는 소련 첩보원 이오나 포타포프 대령이란다.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의 주변에는 전쟁 중에 그가 한 행동이야말로 정말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부추기는 파시스트 전우들이 득시글거린다. 유색인종과 유태인이 득세해서 점점 아리안 민족의 도덕성이 타락한다며 걱정하는 파시스트 일당은 미국의 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철위대를 만들어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에게 연설까지 맡길 정도다. 블랙유머로 다루어지긴 했지만, 소설 <마더 나이트>가 발표된 1961년에도 대략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있었다는 작가의 이야기에 헛웃음이 펑펑 터져나왔다. 하긴 2018년에도 여전히 기승을 벌이고 있는 가짜뉴스 덕분에 오늘 하루도 쓴웃음이 가시지 않으니.

 

소설이 쓰인 시점에서 16년 밖에 지나지 않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생각에서도 작가는 양가적인 입장을 모두 보여준다. 하워드 W. 캠벨 주니어가 은둔한 나치 전범이라는 사실을 알려진 뒤, 그가 살던 아파트는 엉망진창이 된다. 물리적인 테러를 당한 그를 보살펴 주는 사람이 바로 어린 시절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닥터 엡스타인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인간이 처할 수밖에 없는 삶의 역설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닥터 엡스타인은 과거를 뒤로 하고 미래를 생각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우슈비츠에서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다. 자신을 죽음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은 나치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증오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그 점이야말로 정말 커트 보네거트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한편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는 자신이 전쟁 중에 한 행동 때문인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이들에게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거의 도인이 된 모양이다.

 

죽음에서 부활해서 당당하게 나타난 아내 헬가(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녀는 처제 레지 노트였다)가 죽고, 크래프트 역시 연방교도소로 가면서 그의 선택지는 선배 아돌프 아이히만이 잡혀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으로 좁혀진다. 물론 그 와중에 냉전의 와중에, 소련 첩보원의 공작으로 전쟁 중에 그렇게 파렴치한 행동을 한 나치 전범을 미국이 숨겨 두고 있다라는 프로파간다에 이용될 뻔한 위기도 맞게 된다. 물론 푸른 요정 대모의 신속한 개입으로 모스크바로 납치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어때 이 정도면 정말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겉으로 드러난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의 모습은 전형적인 신념에 찬 나치 전범의 그것과 다를 게 전혀 없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수많은 나치 전범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은 채로 사형당했다. 우스꽝스러운 설정이긴 하지만,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는 전쟁 기간 동안 베를린에서 나치 선전의 나팔수로 활약한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진짜 조국 미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에 지나지 않았노라고 강변하면서,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구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나치 친위대(SS:Schutzstaffel)에 복무한 수많은 독일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후자가 총칼로 나치가 점령한 지역에서 숱한 학살과 만행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수행했다면,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는 쌍번개(SS)를 가볍게 타이핑할 수 있게 고안된 타이프라이터로 어느 누구도 그가 나치 전범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 선전전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전쟁에 직접 참가해서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 폭격을 체험하면서, 선지자 커트 보네거트는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극단적 폭력의 와중에 악과 증오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명의 전쟁포로 출신 청년은 훗날 소설가로 변신해서, 블랙유머로 무장한 시니컬한 반전 메시지를 창조해냈다. <마더 나이트>는 정말 재밌으면서도, 유쾌하고 동시에 진지한 사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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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13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외출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어요. 읽어야 할 책들은 너무 많은데, 책이 눈에 안 들어오네요.. ^^

레삭매냐 2018-03-13 14:25   좋아요 0 | URL
날이 너무 좋더라구요 -
읽을 책들은 정말 많은데 생각처럼 진도가 쫙쫙
나가지 않아서 예전에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네요. 재밌습니다.
 
노인의 전쟁 샘터 외국소설선 1
존 스칼지 지음, 이수현 옮김 / 샘터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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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보면 지난 달에 정말 SF작품들을 많이 읽었다. 지난달에 사서 읽기 시작한 존 스칼지의 데뷔작 <노인의 전쟁>(2005년 출간)도 같은 연장선에 서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잠시 외도를 한 끝에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해서 오늘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 서문에서 만난 존 스칼지는 역시 지난 세기의 SF 미스터리의 대가 조 홀드먼과 로버트 A. 하인라인의 후계자로 부르기에 유감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75세의 나이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우주개척방위군(Colonial Defense Forces:CDF)에 자원입대해서, 지구인들이 외계에 개척한 식민지를 침공하는 외계인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을 그린 것이 <노인의 전쟁>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자 그런데, 이십대의 팔팔한 청춘도 아니고 75세의 노인들로 된 늙다리 군대가 우주 정복에 나선다?

 

핵심은 바로 유전자 첨단기술의 경이적인 발전에 힘입어, 자원입대한 노인들의 의식을 새로 구성된 DNA 복제된 육체에 이식해서 정예 CDF 병사들로 만든다는 것이다. 문제는 2년 복무기간이라고 하지만 10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의무복무를 해야 한다는 것과 그동안 죽는 비율이 자그마치 3/4에 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육신을 얻어 그동안 체험해 보지 못한 신세계로 인도한다는 CDF의 유혹에 많은 수의 노인들이 주저 없이 입대를 선택한다.

 

9년 전 사랑하는 아내 캐시와 사별한 전직 광고 카피라이터 조 페리 역시 우주개척방위군의 일원으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우주로 향한다. 늙은방귀쟁이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입대동기생 7인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난 육신을 가지고 고된 훈련을 이겨낸 우리의 정예 노인 병사들은 바로 전장에 투입된다. 뭐 여기까지가 소설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콘수, 르레이 같이 생소한 이름의 지구인과 엇비슷한 기술을 가진 외계 종족과의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숱한 전투를 통해 단련된 CDF 병사들은 전장의 소모품으로 수없이 쓰러지고, 지구에서 보급되어 전장터에 투입된다. 존 스칼지는 이병으로 투입된 전직 상원의원 벤더의 입을 빌려 왜 외교협상 대신 오로지 전쟁이라는 방식의 폭력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묻는다. 과연 그것이 상호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일 것이다.

 

살인기계로 거듭난 우주방위개척군 요원들은 개척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종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고작 3cm 사이즈의 코반두들을 거대괴수 고질라처럼 짓밟는 학살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주인공 존 페리는 문명인으로서 필연적으로 겪는 갈등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페리는 인간을 별미로 삼는 르레이족과의 치열한 코랄 행성 전투에 참가해서 9년 전에 죽은 아내 캐시의 도움으로 단신으로 살아남아 복귀한다. 존 스칼지 작가는 <노인의 전쟁>의 스핀오프에 해당하는 <유령 여단> 소속으로 페리의 아내 캐시/제인 세이건을 등장시키면서 시리즈의 출발에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포석도 빼놓지 않는다. 정말 영리한 작가로군.

 

르레이족이 콘수족으로부터 전수 받은 도약기술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콘수족 대 인간으로 구성된 5:5 맞짱 대결도 흥미로웠다. 이런 장면들을 영화화한다면 어떨지 문득 궁금해졌다. 50년 전의 모습보다 훨씬 더 업그레이드된 초록색의 노인 병사들이 전장을 누비면서 식인 외계인들과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이라, 상상만 해도 흥미롭지 않은가. 뇌도우미(BrainPal)의 도움으로 상호교신한다는 설정도 대단히 흥미롭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고함으로 의사전달한다는 게 우주전쟁에서 가능할까? 나노봇을 동원해서 전투 중에 부상당한 상처를 치유하고, 갖가지 방법으로 활용한다는 구상도 주목할 만하다. 한 마디로 말해 21세기 테크놀로지를 총동원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조 홀드먼 수준의 반전 메시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락적 요소와 도대체 왜 인간은 전쟁이라는 방식을 선호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의 조합이 인상적이었다.

 

2011년에 파라마운트에서 영화로 제작할 예정이라고 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 대신 인터넷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의 강자로 부상한 넷플릭스가 만들 예정이라고 하는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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