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페이션트 에디션 D(desire) 14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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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이십 년만에 마이클 온다치 작가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읽었다. 사실 너무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주인공 알마시 백작 역의 랄프 피니스가 화상을 입고 붕대 감은 모습만이 기억났다. 좀 더 기억을 되살려 보니 북 아프리카 사막에서 죽어가는 연인 캐서린을 안고 동굴로 가던 장면도 떠올랐다. 물론 원작 소설을 읽어 보니, 영화하고는 많이 달랐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친 김에 영화도 다시 보고 있는 중이다. 워낙 긴 영화라 3일에 걸쳐 보고 있다. 그전에 먼저 소설을 다 읽었다.

 

스리랑카 출신 캐나다 시인 마이클 온다치가 1992년에 발표한 세 번째 소설로 맨부커상에 빛나는 작품이다. 영화는 4년 뒤에 고 앤소니 밍겔라 감독의 연출로 영화화되었고, 아카데미상을 무려 9개나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소설은 사막에서 비행기 사고로 지독한 화상을 입고 거의 빈사의 상태에서 베두인 족에게 발견된 ‘영국인 환자’의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한다. 마이클 온다치는 실제했던 헝가리 탐험가 알마시라는 인물에게서 주인공 캐릭터의 모티프를 따왔다고 한다.

 

확실히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면서 보니 영화보다 소설이 담아낸 이야기들이 더 풍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영화는 소설에서 다룰 수 없는 비주얼적인 측면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헝가리 출신이지만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삶의 나침반으로 삼아 사막을 누비는 자유인 라디슬라우 드 알마시, 사랑하는 이들을 전쟁에서 잃은 트라우마를 가진 간호병 해나, 도둑이자 스파이로 엄지손가락을 잃고 모르핀 중독에 빠진 도둑 데이비드 카라바지오 그리고 킵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공병 출신 폭탄 처리전문가 시크 교도 키르팔 싱이 북쪽으로 퇴각하는 독일군과의 전투가 한창인 이탈리아의 파괴된 빌라 산 지롤라모 수도원에 모이면서 시공을 오가는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에서는 보다 극적으로 해나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전장의 동료 잔 그리고 연인을 전쟁에서 잃은 것으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상실한 스무살 내기 해나는 역시 과거의 기억과 이름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영국인 환자의 치료에 모든 것을 건다. 어쩌면 빌라 산 지롤라모 수도원은 상실의 시대를 직면한 이들을 위한 치유의 공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국인 환자 알마시의 지혜의 숲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거의 모든 문학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 영화에서는 음악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가 있다는 것을 카라바지오와의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베니 굿맨이 연주한 <왱 왱 블루스>를 맞추는 것을 보고 카라바지오는 감탄한다.

 

두 손가락을 잃은 카라바지오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보다 영화에서 더 극적으로 등장한다. “무스”라는 암호명으로 암약하던 영국 스파이였던 카라바지오는 치열한 격전 끝에 영국군의 북 아프리카 중요기지였던 토브룩을 함락한 롬멜 아프리카 군단의 포로가 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두 엄지 손가락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 카라바지오 역할의 윌렘 데포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소설과 달리 알마시가 연인 캐서린을 살리기 위해 독일군에게 넘긴 지도에 대한 정보 때문에 자신이 엄지를 잃게 되었다는 설정이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서 책의 독자와는 다른 타겟 오디언스를 상대로 한 각색에 공감할 수가 있었다.

 

다른 주인공들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킵에 대해서 영화에서는 아쉽게도 잘 다루어주지 않은 느낌이다. 소설에서 터번을 두른 시크 교도 출신 싱은 펀잡 출신으로 독일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전쟁에 왜 그는 목숨을 걸게 된 걸까. 게다가 그에게 아버지 같았던 스승 서퍽 경도 폭발물 처리 과정에서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일손이 부족한 전쟁 와중에 식민 모국 영국인들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만, 그들과의 동화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킵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들은 영국과의 공중전 당시와는 다르게 안좋은 방향으로 너무 잘 진화해서 퇴각하는 가운데 창의력 넘치는 부비트랩과 각종 지뢰로 북진하는 연합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늦추는데 성공했다. 사실 처칠이 구상한 유럽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공략해서 서진하는 스탈린의 공산주의 위성국가 건설을 최대한 막아 보겠다는 전략은 독일의 이탈리아 전선 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이 삼중 방어선으로 막아낸, 특히 고딕라인 앞의 지연전술로 무산되어 버렸다.

 

자, 이제 알마시와 캐서린의 본격적인 로맨스에 대해 이야기해 볼 차례인가. 영화에서는 둘 사이의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 보이지 않는데 자그마치 15살 차이나 되는 남녀가 그야말로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런 장면 역시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영화에 높은 평가점을 주고 싶다. 소설에서는 보다 플라토닉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앤소니 밍겔라 감독은 처음의 냉랭한 사이에서 열정으로 옮아가는 알마시의 캐서린에 대한 관계를 훌륭하게 연출해냈다.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였던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사막의 캐러밴에서 탐험가들이 시구 대결을 하고,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유명한 연애 이야기를 낭송하면서 불쑥불쑥 등장하는 연애의 감정 표현은 정말 대단했다. 소설과 영화의 장면들을 대조해 보는 재미는 정말 대단했다. 캐서린의 남편 제프리 클리버튼 역을 30대의 콜린 퍼스가 맡았었다는 점도 미처 몰랐었다. 중년 넘어서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배우의 청년 시절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알마시, 해나, 카라바지오와 킵이 휘말린 전쟁 역시 그들의 삶을 앗아가 버렸다. 폐허가 되어 버린 성과 속의 교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원에서 그들은 치유의 시간을 맞는다. 킵이 해나의 스무 번째 생일을 맞아 준비한 45개의 달팽이 집에서 타오르는 불빛에 대한 묘사는 정말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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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06 1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붉은색 표지의 구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땐 책이 절판된 상태였어요. 구판과 개정판이 같은 역자인데 번역이 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귀찮은 일이지만, 개정판을 읽게 되면 구판과 비교해봐야겠어요. ^^

레삭매냐 2018-03-06 13:58   좋아요 1 | URL
저도 신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구간이
있었네요. 역자도 같은 것으로 볼 적에 아마
구간과 신간이 거의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새로 나온 <싱글맨>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번역하신 분이 군에 관한 지식이 없으
신지 영국 제8군을 제8군대로 번역을 하셨더라구요.

[그장소] 2018-03-06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말고 책이 있다는 걸 저도 안지 얼마 안됐어요 . 한번 봐야지하고 장바구니에 담아놨는데 레삭매냐 님은 읽으셨군요 ? 이 영화 제 인생영화인데.. 넘 좋아하고요 . 랄프 파인즈도 , 줄리엣트 비노쉬도 넘 넘 좋아하고요 . 글로 만나니 더 반갑네요!^^

레삭매냐 2018-03-06 13:59   좋아요 1 | URL
아마 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책은 책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좋았습니다.

영화는 정말 오랜 만에 다시 보았는데,
새롭고 멋졌습니다 -

달팽이 집 촛불과 이탈리아 성당에서 해나
와 킵이 조명탄을 켜고 벽화를 보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그장소] 2018-03-06 14:58   좋아요 1 | URL
빈병을 굴려가며 진실게임을 하던 장면, 동굴에서 혼자 그림과 일기를 쓰던 그녀도 멋지고 애잔했죠.
전쟁이 그 모든 것들의 배경이란게 슬프지만 그마저도 좋았어요 . 아름다운 것들이 파괴되는 동안 남는게 뭔지 사라지는게 뭔지 넘 잘 보여주고요 .
 
잊혀진 소년
오타 아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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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어느 재벌 회장의 항소심 판결로 나라가 다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주심을 맡은 판사는 어느 보수지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백성’이 자신의 원대한 뜻을 모른다며 아마 핀잔을 주었지.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판결 때문에 한동안 정신줄을 제대로 잡고 있기가 쉽지 않았다. 23년 전, 실종된 13세 소년을 찾아 나서면서 벌어지는 일본 사법계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짚어낸 정통 사회파 스릴러 <잊혀진 아이>의 작가 오타 아이가 이 뇌물사건을 소설로 다룬다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미즈사와 가나에가 삼류흥신소 직원에게 23년 전에 잃어버린 아들 나오를 찾아 달라는 사건 의뢰로 소설은 시작된다. 아니 도대체 왜 23년이나 지난 지금에 왜? 물론 흥신소장 야리미즈 나나오는 가나에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다. 자그마치 삼백만엔이나 되는 거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결국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돈이었다.

 

나나오는 대학시절 동창이자 진다이 서의 강직한 경찰 소마 료스케(그는 23년 전 사라진 나오의 여름친구였다) 그리고 자신의 수하 시게토 슈지와 함께 과거로의 여행에 나선다. 그리고 그들은 나오와 다쿠의 아버지 시바타니 데쓰오가 억울한 살인죄 누명을 쓰고 9년형을 받고 8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게다가 데쓰오는 자신이 진범이 아니고 억울하게 원조(冤罪)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날, 사랑하는 아내 가나에와 아들들을 찾아 나섰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2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흘러 눈이 아름다운 초등학교 소녀 도키와 리사가 납치된다. 나나오들은 유괴 사건 현장에 남겨진 / / = I 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슬래시 슬래시 이퀄 버티컬 바라... 물론 오타 아이 저자는 소설의 후반에 파자로 구성된 비밀 암호는 진실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이 비밀 암호는 주인공 이름의 파자였다는 것이다.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한 어린 독자는 그저 작가가 진실을 알려줄 때까지 그저 묵묵하게 따라가는 수밖에.

 

다양한 장치들과 숨겨진 이야기들로 구성된 <잊혀진 소년>의 뒷배경에는 데쓰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된 핵심 사실이 자리잡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누들은 강을 건너기 전에, 누를 노리고 있는 악어에게 희생양으로 바칠 누를 제공했다고 했던가. 1과 10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강박적 메시지에는 데쓰오 사건 당시, 순전히 일본 사법제도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기소편의주의에 입각해서 사건의 수사를 맡은 형사, 기소와 구형을 맡은 검찰 그리고 최종 판결을 맡은 판사들이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형사사건의 대원칙을 무시하고 단기간에 사건을 종결짓기 위해 데쓰오에게 유리한 증인들의 진술 일체를 무시하고 강압적 수사로 일관해서 결국 데쓰오의 자백을 바탕으로 그를 범인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어디 기소편의주의와 수사관들의 강압적 수사가 일본에만 있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삼례 나라슈퍼 사건이 있었다. 박준영 변호사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재심과정을 통해 피해자들을 구제하는데 성공할 수가 있었다. 오타 아이 작가는 텔레비전 각본가 출신답게,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파고드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500여 쪽에 달하는 책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고나 할까.

 

정말 소설을 읽다가 분통이 터지는 건, 그렇게 한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은 형사, 검사 그리고 판사 중에서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삼례 나라슈퍼 사건의 배심판사였던 박범계 의원은 자신이 내린 오심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지 않았던가.

 

물론 오타 아이 작가는 나오의 가족이 겪은 억울한 사건을 단순하게 그리고 있지만은 않다. 스릴러 소설에 안성맞춤인 복수라는 코드로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소수의 누를 희생해서라도 범법자들로부터 사회를 수호해야 한다는 최고검찰청 차장검사 출신 인사의 손녀 리사를 인질로 설정한다. 그리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피해자는 당시 배석판사의 아들로 그리고 은퇴를 앞둔 오카무라 다케히코를 수사책임자로 등장시키면서 갈등을 최고조로 달하게 만든다. 도대체 어떤 결론을 내려고 이렇게 내달리는 거지?

 

이 모든 복잡다단한 설정 밑에 철없던 시절, 모든 게 한 없이 즐겁기만 했던 소년 소마 료스케와 미즈사와 나오, 다쿠의 우정으로 이야기를 매듭짓는다. 어떻게 봐도 해피엔딩일 수 없을 이야기의 결말로 이 정도면 최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우리가 가진 사회의 부조리를 저격할 수 있는 능력의 오타 아이 같은 작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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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
마이클 부스 지음, 김경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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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소득세율이 얼마인지 아시는지? 자그마치 55.8%라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번 돈의 절반 이상을 세금으로 낸다는 것이다. 놀랍군. 그래도 최고치였던 65.9%보다는 낮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영국 출신 저널리스트 마이클 부스는 세계 최고의 행복지수와 복지천국으로 알려진 노르딕 5개국(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아이슬란드)에 대한 자전적 탐방기인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에서 바로 이 세금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아는 핀란드 사람이 있냐고 묻는다? 나는 한 사람 알고 있다고 대답하리라. 홍대 막거리 주모인 따루 살미넨. 미안하다, 웃기지 않았다면 나의 농담은 실패다.

 

 

시작은 저자의 부인의 모국인 덴마크에서 출발한다. 내가 덴마크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더라. 여왕이 다스리는 입헌군주국, 레고의 나라 뭐 그 정도. 아, 독일과의 전쟁에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빼앗겨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라는 개척정신으로 당시만 하더라도 황무지였던 유틀란트 반도를 비옥한 토지로 개간했다는 점도 있구나. 그리고 돈육 생산에 있어 세계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라는 사실도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그런데 실제 돼지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 덴마크의 돼지들은 모두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길러지는 모양이다.

 

덴마크 국가는 과거에 얻은 상실이라는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 받아 와서 그런지 국민들은 ‘휘게’정신에 입각한 ‘휘겔리’한 스타일로 사는데 익숙한 모양이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이 정도. 이웃 노르딕 큰형에 해당하는 스웨덴의 갈등 회피주의와는 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나 할까. 저자 마이클 부스는 책의 1/3 가량을 덴마크 편에 할애하면서 북유럽 5인방의 특징을 이루는 동일민족, 세계의 부러움을 사는 복지국가 시스템 그리고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이민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덴마크 모델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나머지 4인방의 분석에 나선다고나 할까. 덴마크가 한 때 북유럽 최강의 국가였다는 점을 잊지 말자.

 

다음 주자는 핀란드다. 확실히 핀란드는 노르딕 국가들 중에서 민족적으로도 다르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방문한 파리로 가는 야간열차에서 아주 건장한 체구의 수오미 친구 한 명을 만나 핀란드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수오미들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저 알고 있는 정보를 총동원해서 신나게 떠든 기억이다. 지금도 수오미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만네르하임에 대해 물어 보았는데, 예의 수오미 친구는 만네르하임이 그야말로 그들에겐 애증과도 같은 캐릭터라고 하지 않았던가.

 

핀란드는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지난 세기 초, 러시아 혁명의 기운을 받아 독립에 성공했다. 그리고 서방세계와 동방의 강국 러시아 사이에서 줄다리기 외교를 하면서 가까스로 국가의 독립을 지키는데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웃의 빅 브라더 러시아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을 될수록 하지 말아야 했고, 우리의 과묵 진지 모드의 수오미 친구들은 그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냈다. 하긴 그 유명한 겨울전쟁에서 독재자 스탈린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 수오미들이 아니었던가. 물론 그 후에 카렐리야 지협을 비롯한 전 국토의 1/10에 해당하는 영토를 빅 브라더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겪긴 했지만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가가 되는 수모는 면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핀란드가 독립의 와중에 치열한 내전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18년에 발발한 핀란드 내전에서 귀족과 농민들이 주축을 이룬 백위대와 도시노동자 중심의 적위대가 맞부딪혀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고,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러시아 근위대 장교 출신의 만네르하임은 독일 제국군의 지원을 받아 남부 도시를 장악하고 있던 적위대를 격파하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훗날 중도당 출신으로 자그마치 26년 동안이나 핀란드 대통령으로 활약했던 우르호 칼레바 케코넨도 이때 소년병으로 백위대 소속으로 내전에 참가했다. 이런 정치적 면에 대해 좀 더 궁금했지만 마이클 부스는 그런 부분 대신 자신의 사우나 탐방기에 좀 더 많은 지면을 투자했다. 뭐 확실히 재밌긴 했지만, 아쉬웠다고나 할까.

 

다음 타자는 노르딕 5인방을 특징짓는 근면 성실 그리고 바이킹 특유의 평등 정신에서 많이 일탈한 소국 아이슬란드다. 개인적으로 아이슬란드하면 하루키의 여행에세이집에도 등장한 그 유명한 온천 “블루 라군”(공장 폐수로 운영하는 저명한 온천이라고 했던가), 화산폭발 그리고 흥청망청 투기로 국가부도를 맞은 나라라는 이미지 정도. 최근에는 34만 명 정도가 사용하는 소수민족 언어로 그나마 고대 스칸디나비아 언어의 유향을 유지하고 있는 아이슬란드 어가 디지털 시대에 멸종될 지도 모른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저자는 1980년대 초반 실시된 어획량 쿼터제 실시가 아이슬란드 경제붕괴의 시작이었다고 진단하면서, 실제 자산가치는 얼마 안되지만 국제 투기꾼들이 아이슬란드의 금융질서를 뻥튀기하면서 신나는 돈잔치가 시작되었다고 증언한다. 일본 엔화와 프랑스의 투자은행들이 아이슬란드 주택담보대출을 주무르면서 미군 기지에서 흘러나오는 달러화 맛을 들인 바이킹의 후예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남의 돈으로 신자유주의 시장에 도전했다가 낭패를 보게 됐다. 그 후과는 참혹했고, 아이슬란드 시민들은 냄비를 두드리며 집권자들과 금융가들을 혼내주기 시작했다. 엄청난 국가 채무를 안고 있는 아이슬란드는 여전히 요정의 힘을 빌어 바이킹의 배째라 정신으로 돈 갚으라는 채무국들의 성화를 가볍게 무시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네덜란드 투자자들의 상당 금액을 먹튀하기도 했다지. 그네들의 배짱 하나는 알아주어야할 것 같다.

 

북해유전의 개발로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변방 국가에서 일약 세계 최대의 산유국으로 뛰어오른 노르웨이의 경우는 또 어떤가. 1969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지사업이나 어업으로 근근히 먹고 살던 변방국가 노르웨이는 그야말로 국가 로또를 맞으면서 엄청난 국부펀드를 조성하고, 미래에 자원이 고갈될 경우를 대비해서 중동 산유국들처럼 흥청망청 국부를 소진하는 게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현재의 부를 물려주기 착착 준비 중이라고 한다.

 

마이클 부스의 책을 읽다 보면 전 세계에 복지천국으로 알려진 노르딕 5인방에게도 가난에 허덕이는 세계가 모르는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료와 교육이 무료라고 하지만, 지나친 평등주의와 관료 시스템의 폐해로 응급 상황 시에 충분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실례를 마이클 부스는 책에서 자신의 아들의 경우로 설명한다. 이런 부분들이 복지망국론을 신봉하는 보수언론에 좋은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유연한 고용정책이 국가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실업이 곧 사회적 사망을 의미하는 한국의 경우와 달리 소득의 절반이나 가져가는 노르딕 5인방의 경우에는 실업이 곧 사회적 사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오랜 기간 사회민주주의 시스템 아래서 구축한 복지라는 이름의 사회적 인프라는 재기의 기반을 제공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기후 탓일지는 몰라도 음주율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국영 주류상점에서만 술을 살 수 있는 시절도 있었고, 자국민들을 알코올 중독자로 모는 어처구니 없는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벌이기도 했다고 하지 않은가. 하지만 너무 재미없고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알코올 소비량이 적지만 문제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폭음이 자주 발생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견 이해가 되기도 했다. 뭐 나도 가끔은 그러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세상 재미없고 괴롭게 술이나 퍼 마시자 뭐 이런 주의?

 

세계에서 손꼽히는 교육 정책에 대해서도 교육자들에 대한 수준 높은 양성과정(석사 학위 제공)은 물론이고 누구나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무료 교육 시스템은 확실히 부러웠다. 공교육과 사교육의 차이가 없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에서 소수의 엘리트들이 국가정책을 좌지우지하고, 미래의 먹거리르 선도한다는 생각 대신 낙오하는 사람 없이 모두가 행복하고 즐겁게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런 바이킹식 평등주의 때문에 학생들의 수준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게다가 세계 어디서나 십대들은 불평 불만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말이다. 덴마크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상대적 평가에 대해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실제로 누가 그렇게 행복하대라고 물을 수 있는 자유까지 모든 것이 보장된 노르딕 5인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마이클 부스의 실력에 감탄했다.

 

아니 노르웨이 유전개발 이야기를 하다가 어디로 이야기가 또 샜나 그래. 암튼 북유럽의 새로운 갑부로 등장한 노르웨이를 주변 국가들이 시샘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시간당 47달러나 되는 임금에 혹해 이웃 스웨덴 청년들이 게으른 노르웨이 사람들이 즐겨 먹는 바나나 스프레드를 만들기 위해 바나나 까는 일에 투입되고, 이제는 더 이상 노르웨이 사람들이 하지 않는 물고기 내장 제거에 동원되는 에피소드도 상당히 흥미롭다. 수도 오슬로의 식당에서 더 이상 노르웨이 사람들이 서빙하지 않는다는 말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스웨덴도 마이클 부스는 처음에 나온 덴마크 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일단 스웨덴은 덴마크로부터 독립한 이래, 나름 중립국으로 국가적 위상을 닦아나갔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지금은 세계인들에게 인정받고 있지만 30년 전쟁 당시 유럽에서 악명을 떨친 일이나,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처절하게 저항한 이웃 노르웨이와 달리 중립국이라는 이름으로 나치에 협력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수의 스웨덴 청년들이 의용군으로 나치를 따라 전역을 전전한 것도 사실이고.

 

스웨덴 역시 저자가 책의 후반에서 전체주의 국가라고 할 정도로 사회민주주의가 국가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복지시스템으로 국가의 방향을 틀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다른 노르딕 4인방에 비해 스웨덴만 그렇게 유난히 국가주의에 순응했던 걸까. 마이클 부스는 의도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회피하는 스웨덴 사람들의 국민성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던 게 아닐까 하는 추론을 제시한다.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사회적 비용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그런 문제들, 특히 최근의 이민문제에 대해 타국에 비해 가장 많이 비서방 무슬림들의 이민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스웨덴 주류사회에 안착하지 못하고 다시 스웨덴을 떠나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저자는 냉정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나는 스웨덴의 좌파나 우파 모두 복지 축소에 격렬하게 반대한다는 점이다. 보통 우파들은 복지여왕의 케이스를 들어 인간을 타락시킨다며 복지확대에 반대하지 않나.

 

한편, 스웨덴 국가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발렌베리 가문의 영향력은 우리네 삼성의 그것과 매우 유사해 보였다. 후자의 경우와 달리 발렌베리 가문의 후계자들은 병역 의무를 지는데 있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경영과 소유의 분리, 후계자에 대한 엄격한 검증과정, 노동자들을 경영파트너로 인정하는 모습 등은 정말 시민들의 존경을 받을 만하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쨌든 수십년 간 이행되어온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 실패를 인정하고 1990년대 경제위기로 대두된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소득세율을 낮추고, 복지사업의 민영화 같은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낼 문제들을 속속 도입하면서 북유럽의 큰형은 제조강국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조립식 가구로 세계를 제패한 이케아를 필두로 해서 노르딕 4개국에 비해 세계화에 적극적이었던 큰형 스웨덴은 노조, 기업 그리고 정부가 삼위일체가 되어 신자유주의식 세계화가 만들어낸 거친 파고를 극복해낼 수 있었다. 제조강국 스웨덴의 비결에 대해 궁금했지만 마이클 부스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아 아쉬웠다.

 

제법 분량이 되지만 유머 넘치는 노르딕 5인방에 대한 신나는 탐방기를 읽으면서 그동안 복지천국으로만 생각했던 북유럽 국가들이 오늘날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보면서 과연 지상에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 어떻게 완전무결한 행복을 우리에게 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과 동시에 궤도가 틀어졌을 때 과감하게 수정하고 새로운 길에 나설 수 있는 그네들의 바이킹 정신 특히나 그 평등주의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특권 계급을 위한 부에 근거한 계급주의로 발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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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02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웨덴에 페미니즘 정당이 있다고 해요. 스웨덴이 우리나라보다 페미니즘 수준이 앞서고, 그곳에서도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어요. 그러나 스웨덴도 여전히 반 페미니즘 분위기가 남아있고, 페미니즘 정당이 있어도 사람들의 지지를 많이 받지 못해요. 왜냐하면, 스웨덴 사람들은 극우정당이 당선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무조건 좌파 정당을 찍기 때문입니다. 스웨덴 같은 북유럽의 페미니즘 운동과 현황을 알고 싶은데 이를 알려주는 문헌이 부족해요. 학술논문을 읽어야 해요. ^^;;

레삭매냐 2018-03-02 15:08   좋아요 0 | URL
우리와 달리 결선투표가 있는 프랑스에서도
극우 정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이번에도 역시나
에마뉘엘 마크롱을 찍었죠...

집권 뒤에 하는 짓을 보면 과연 사회주의 진영
을 대변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스웨덴의 정당에 대한 투표도 비슷한 케이스가
아닐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책만으로는 현지
분위기를 파악할 수가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마이클 부스는 실제로 덴마크에서 10년 이상
거주했죠. 학술 논문에 드러나는 것과 현지
인들과 부딪히면서 체득하는 것의 괴리라고나
할까요. 상당한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부만두 2018-03-31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읽기 시작했어요. 초반은 빌 브라이슨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꽤 진지하게 노르딕 국가들을 살피는군요.

레삭매냐 2018-04-01 10:32   좋아요 0 | URL
전 아직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어 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나름 진중하면서도
유머를 추구하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노르딕 칸츄리의 허와 실을 제대로 짚어내
지 않았나 싶습니다.
 
별의 계승자 별의 계승자 1
제임스 P. 호건 지음, 이동진 옮김 / 아작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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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오멜라스에서 발간되었다가 절판된 그리고 이번에 아작 출판사에서 새롭게 다시 출간된 제임스 P. 호건의 <별의 계승자>를 읽었다. 어쩌면 SF팬들에게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아작 출판사는 구세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건 작가의 자이언츠 시리즈 5권을 모두 낼 예정이라고 하니 적잖이 기대가 된다. 그리고 그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자 제임스 P. 호건의 데뷔작이기도 한 <별의 계승자>를 읽었다.

 

 

인류에게 전쟁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고 더 이상 무기개발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게 되자 인류는 모든 자원과 열정을 온전하게 우주로 돌리게 된다. 소설의 개론에 해당하는 이 부분이야말로 개인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전쟁무기 혹은 핵개발 경쟁 같은 비효율적인 것에 자원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일까. 그런 최첨단 무기경쟁이 인류에게 티끌이나마 무슨 도움이 되었단 말인가.

 

어쨌든 영국 출신의 이론연구가이자 핵물리학자인 빅터 헌트 박사와 그의 동료인 엔지니어 롭 그레이는 메타다인 핵공학장비사 소속으로 물체를 절단하지 않고 내면을 투사할 수 있는 트라이매그니스코프(이하 스코프)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바로 이걸 계기로 헌트와 그레이는 달탐사에서 발견된 자그마치 5만년 전에 죽은 찰리와 운명적 조우를 하게 된다. 아, 프롤로그에서 코리엘과 고르다로 향하는 찰리에 대한 소개가 잠시 등장했던가. UN 우주군으로 대변되는 인류의 위대한 태양계 탐사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우주탐험 과정에서 발견된 인류와 거의 유사한 찰리의 존재는 지구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조금은 황당한 상상력으로 출발한 과학소설 <별의 계승자>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저자가 준비한 떡밥을 물고 충실하게 수행해낸다. 이른바 인류의 기원을 두고 열렬한 토론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막 우주탐험에 나선 현대 인류보다 5만년이나 앞선 기술력을 가진 인류와 평행진화를 한 유사인류가 있었단 말인가? 지구의 가장 유능한 전문가들이 모여 지식의 자웅을 겨루는 한판 대결이 벌어진다. 책임자 콜드웰은 우리의 빅터 헌트 박사야말로 선험이나 편견에 사로 잡히지 않고, 과학적 가설과 증명된 사실에만 의거한 연역적 방법으로 인류의 기원과 찰리 프로젝트로 알려지게 될 가니메데인에 대한 비밀을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로 생각하고 그를 적극 지원한다.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진 뒤, 인류의 공동개발이 지향해야 할 점에 대한 아이디어처럼 서로 각기 다른 분야에서 협업을 이루어 찰리 프로젝트를 풀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별의 계승자>에서 정말 저자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투보병 출신 월인(月人) 찰리가 적대적 람비아인들과의 치열한 교전을 거치면서 남긴 일지를 해독하게 된 헌트 그룹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도대체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인류의 기원이 어디에서 출발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우주를 가로 질러 월인의 고향으로 알려진 목성 부근의 미네르바에까지 진출하는 가운데 펼쳐지는 한편의 스페이스 오페라의 향연은 과연 황홀했다.

 

다만 소설의 후반에서 마련한 미네르바의 달이 행성 폭발로 이동해서 지구의 별이 되었다는 너무 멀리 나간 가설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점에서는 좀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말이다. 물론 에필로그 부분에서 모두가 원하는 월인이 지구에 존재했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저자가 친절하게 준비한 증거물은 이어지는 자이언트 시리즈를 위한 멋진 소품이었다고나 할까.

 

후기에 실린 역자의 저자 소개에서 보게 된 내용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말년의 제임스 P. 호건이 홀로코스트 부정주의에 동의하고 유사과학의 영역에 심취했다고 했던가. 어쩔 수 없이 미국 하위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타인에 대한 정복과 지배 그리고 폭력의 미화라는 이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싶다. 이렇게 멋진 스페이스 오페라를 만들어냈으면서도 우주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인류는 평화로운 공존 대신 식민화를 원하고 있다는 설정에는 동의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소설에서 부족한 자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월인 세리오스와 람비아 세력이 벌이는 대결구도는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유한한 자원이 고갈되는 순간, 지구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공존을 위한 대화와 타협 대신, 상대방은 물론이고 자신의 생존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핵무기를 동원한 극한대결에 나선 월인들의 최후를 통해 배우는 게 하나도 없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별의 계승자> 역시 인류의 기원을 찾는 내적 탐구와 더불어 반전이라는 확실한 메시지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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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십 트루퍼스 환상문학전집 27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김상훈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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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SF"라는 별명을 가진 업계의 대부 로버트 A. 하인라인의 SF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다. 제목은 <스타십 트루퍼스>. 이미 폴 버호벤 감독 연출의 작품으로 만나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리지널 소설의 열혈팬들에게는 그렇게 욕을 먹었다지. 책을 읽어 보니 왜 그런 줄 알겠더라. 소설에서 전체적인 줄거리를 채용하긴 했지만, 소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화라고나 할까. 정말 오래된 영화를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밀리터리 SF의 걸작으로 칭송받는 <스타십 트루퍼스>가 출간된 해는 자그마치 1959년이다. 59년 전에 이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정말 놀라웠다. 소설은 잘 나가는 부잣집 아들인 후안 자니 리코가 기동보병(Mobile Infantry)의 일원으로 전투강하를 시작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첫 장면에서 등장한 전투씬이 연달아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판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사실 <스타십 트루퍼스>에는 거미들과 싸우는 격렬한 묘사보다는 오히려 전쟁터에 투입된 병사의 윤리 철학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듯 싶다.

 

미래사회는 2년간의 병력을 마친 이들에게만 완전한 시민권(투표권)을 부여한다. 어째 시작부터 좀 이상하지? 바로 전에 읽은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처럼 <스타십 트루퍼스>에서도 전쟁이 일상화된 상황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자니 리코는 친구 칼을 따라 그야말로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식으로 지구 연방군에 자원입대한다. 물론 부자 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말렸지만, 이제 막 성인이 된 18세 아들에게 그런 호소가 들릴 리가 없지. 입대 동기 칼이나 미녀 친구 카르멘시타 이바네즈와는 달리 반응 속도와 시력이 양호하다는 장점 밖에는 없는 리코는 우리말로 하자면 땅개, 기동보병으로 배속되어 신병훈련을 치르게 된다.

 

하인라인 작가는 소설의 절반 가량을 신병훈련소 과정에 할애한다. 혹독한 신병훈련이라는 통과의례를 통해 철부지 소년에서 유능한 전쟁터의 살인병기로 변신해 가는 과정에 저자는 방점을 찍는다. 당시로도 거금인 50만 달러 짜리 병사라니, 게다가 강화복으로 무장한 기동보병이 되는 과정은 전혀 순탄지 않다. 전원 자원입대한 이들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그만 둘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 어떤 이유도 받아들여진다. 다만 그들에게는 완전한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만 빼놓는다면 말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권리일지 모르겠지만, 또 누군가에는 정말 소중한 권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작가는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하인라인은 고대 로마에서 병역을 무사히 마친 퇴역병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사 이래, 정말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어디 있었던가. 그렇게 가는 거지.

 

한편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의 노골적인 군국주의 혹은 파시즘에 대한 찬양은 비판의 대상이다.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민주적 시민권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시대적인 국가주의 그리고 군대식 규율을 강조하는 점들을 볼 때 충분히 그럴만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 전투에 투입되는 보병들보다 왜 그렇게 많은 지원 병과와 장교들이 필요하냐는 주장에는 일면 동의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수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 전쟁이 단순한 전술(tactics)과 병참(logistics)으로만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직접적인 전쟁을 하지 않고도 전쟁이 이길 수 있다면 그만큼 수지맞는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되어 가고 있는 현대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설정이 아닌가 싶다.

 

사회에서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는 “비행 청소년(juvenile delinquents)”에 대해서도 엄격한 규율로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도식적 사고도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슨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군대에서 하는 것처럼 태형(笞刑)이라도 실시하란 말인가. 이런 물리적 방식의 훈육으로 교정이 가능하다는 발상이 정말 놀랍다. 문득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총기사건에 대항해서 교사에게 총기를 지급해서 무장시키자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떠올랐다.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는 전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펼치는 아무말잔치인가. 다시 한 번 전미총기협회의 로비와 정치후원금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확인할 수가 있었다.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금권정치의 폐해는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어쨌든 하인라인이 구축한 밀리터리 스페이스 오페라 <스타십 트루퍼스>는 대단히 흥미진진한 요소들을 다수 탑재하고 있다. 어쩌면 이제 구시대의 유산이 되어 버린 명예심, 희생과 헌신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가치들로 무장한 소년 자니 리코가 신병훈련과정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무자비한 거미 전쟁을 거치면서 성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정말 흥미진진했다. 아무리 많은 훈련을 했지만 여전히 캡슐 전투강하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 묘사, 수많은 포기의 순간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동료들 간의 끈끈한 전우애, 거미 종족의 습격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몰락으로 잃게 된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아들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들을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내러티브는 정말 대단했다. 사관학교에 지원해서 삼등소위로 지휘관으로 실전에 참가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막중한 책임감에 불타는 사관후보생의 모습은 신병 시절의 리코의 그것과는 천양지차가 아닌가. 그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동안 SF소설은 찾아서 읽지 않았는데, 한 번 재미를 들리니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다. <스타십 트루퍼스>의 경우에는 전반부에는 군인이 되어 시민권이나 따자는 식으로 기동보병이 된 소년의 고군분투기와 윤리 철학에 기반한 내적 갈등 구조가 마음에 들었는데, 상대적으로 후반부에서 이야기가 안정궤도로 접어들면서 호감이 반감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로버트 A. 하인라인과의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작가의 다른 걸작이라는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읽을 차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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