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로버트 J. 소여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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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월의 독서는 아마도 SF소설과 함께 하게 될 것 같다. <노변의 피크닉>으로 시작된 나의 싸이파이 소설 독서여정은 스타니스와프 렘의 <사이버리아드>를 거쳐 시간 여행을 떠나 중생대 공룡들과 만나게 된다는 허무맹랑한 하지만 재밌는 이야기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야심차게 출발한 오멜라스 시리즈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지난 주말부터 오멜라스 시리즈 수집에 나서게 됐다. 스타니스와프 렘에 이어 두 번째 나의 오멜라스 도전작이 바로 캐나다 출신 로버트 제임스 소여의 <멸종>이다. 그런데 읽기는 <멸종>을 먼저 읽었네.

 

싸이파이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바로 시간 여행일진대, 거기에 6,500만년 전 과거로 돌아가 공룡과 조우하게 된다는 설정 또한 기발하지 않은가. 보통 우리는 운석충돌로 인해 지구상에 번창하던 공룡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가설을 신봉하고 있는데, 저자는 그런 이론에 반기를 든다. 소설의 주인공 고생물학자이자 공룡 매니아이자 전문가인 브랜든 새커리 박사(41세, 터론토 교외 미시사가 거주)와 마일즈 조던(클릭스) 교수가 과거로 돌아가 보니 달도 두 개나 떠 있고, 무엇보다 중력이 지금보다 절반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브랜디는 현재의 중력 G1보다 상대적으로 중력이 반절 밖에 나가지 않았고, 그래서 공룡들이 그렇게 커다란 덩치를 유지할 수 있었노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대단한 가설이다.

 

작가들이 글을 쓰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 <멸종>에서 적어도 로버트 제임스 소여는 자신이 신봉하는 중력 때문에 공룡에 몰살했다는 가설을 주장하기 위해 소설을 쓴게 아닐까 싶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운석대충돌설로 한때 지구상에 번성했던 공룡들이 떼죽음당했다는 가설을 믿고 있는 마당에, 소여 작가의 가설은 흥미로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소설에서처럼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해서 직접 목격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것들은 모두 가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싸이파이 소설들이 그렇듯, 소여도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시간 여행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그리고 과거로 돌아갔을 때 벌어질 수 있는 갖가지 위험요소들에 대한 자세한 방법론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다. 사실 아무리 싸이파이 매니아라고 하더라도 그런 부분에까지 신경쓰진 않겠지만. 그래도 왜 더 가까운 과거가 아닌 그렇게 오래된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가까운 과거일수록 상대적으로 에너지가 더 많이 소모된다는 가설로 적당히 퉁친다. 사실 우리는 6,500만년 전 같은 먼 과거보다는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이 숨쉬는 십년 전 같은 가까운 과거를 탐내지 않는가 말이다. 이런 부분들은 충분히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어쨌든 뭐 그 정도면 약과다. 소여 작가는 과거 시간 여행 탐험에 또 한 가지 요소를 첨부한다. 그러니까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간 자신이 꼬박꼬박 쓰는 일기를 현재의 브랜던이 읽게 된다는 설정이다.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현재의 자신이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을 알게 된다면 말이다. 그중에서 그가 가장 돌리고 싶어하는 일은 바로 사랑하는 아내 테스를 절친한 동료이자 친구인 클릭스에게 빼앗기는 걸 막는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허점 중의 하나는 아무리 예산부족으로 햄버거 모양의 스턴버거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갔지만, 최소한의 호신을 위한 무기들은 충분히 갖췄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결국 브랜디와 클릭스는 과거로 가자마자 흉폭한 티렉스와 기타 공룡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과거 시간 여행에서 그들을 위협하는 건 공룡 군단이 아니다. 더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적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젤리 모양으로 조종이 가능한, 다시 말해 노예로 사용할 수 있는 숙주를 찾아다니는 화성인 헤트들이었다. 이 녀석들은 공룡 속으로 침투해서 성대로 지구인들과 대화에 나서기도 한다. 게다가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있어 지구별의 중력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중력 억제 위성’으로 조종하기까지 한다. 그들이 살던 화성과 비슷한 중력을 만들기 위해 설치한 장비들이 결국 그들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는 점도 역시나 아이러니하다. 아, 이런 기술적 디테일이라니!!!

 

이미 여기까지 쓰면서 다수의 스포일러를 제공했지만,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하나 제시하겠다. 화성인들의 정체는 바로 바이러스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지구 대표들인 브랜디와 마일즈의 고군분투로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향하려는 그들의 계획을 분쇄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RNA에 화학적으로 각인된 대로 숙주를 지배하려는 헤트들은 인플루엔자나 소아마비, 감기 그리고 브랜디의 아버지를 죽이고 있는 암으로 살아남아 끊임없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로버트 제임스 소여의 <멸종>에는 싸이파이 소설 팬들이 좋아할 만한 거의 모든 요소들을 균형있게 잘 장착하고 있다. 시간 여행(타임머신), 공룡 그리고 외계인과의 조우. 그리고 당연히 지구정복을 꿈꾸는 외계인들을 저지해야 한다는 대전제와 더불어 브랜디의 개인적 고민인 어떻게 해서든 사랑하는 테스를 친구 클릭스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그런 설정까지 다양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공룡멸종에 대한 중력 가설에 대한 주장을 놓치지 않는다. 브랜디는 친구 마일즈의 패기 있는 성격을 칭찬했는데 어쩌면 나는 로버트 제임스 소여의 그런 뚝심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거기에 무신론자로 보이는 브랜디가 신에게 호소하는 장면도 백미였다.

 

아무래도 24년 전에 나온 소설이라 현재의 첨단기술이 주는 그런 디테일은 부족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 시절의 싸이파이 소설이 지향하는 지점을 볼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독서의 가치가 느껴졌다. 게다가 재미까지 있었으니 금상첨화.

 

아, 나의 이제는 모두 절판되어 구할 수 없게 된 오멜라스 북들에 대한 사냥은 계속된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부터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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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2-14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점에서 오멜라스 출판사의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최근에 정말 운 좋게 <아시모프의 과학소설 창작백과>를 득템했어요. <솔라리스>도 소장하고 싶은 오멜라스 출판사의 책 중 한 권입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구판의 중고가가 어마어마하더군요. ^^;;

레삭매냐 2018-02-14 22:1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전국 램프의 요정 중고서점에서
오멜라스 책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더라구요.
다행히 저희 동네 서점에 두 권이 입고돼
있어서 바로 데려왔습니다.

<솔라리스>는 일단 오늘 도서관에 가서
빌려 왔습니다. 일단 읽고 나서 천천히
사냥에 나서려구요.

기다리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더라구요.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도 결국 샀습니다.
 
얼어붙은 바다
이언 맥과이어 지음, 정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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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바다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떤 생물들이 살고 있을까? 이언 머과이어의 소설 <얼어붙은 바다>에서 포경선 볼런티어호에 탑승한 선원들은 고래잡이에 나선다. 최소한 얼어붙은 북빙양에는 고래가 살고 있다는 것이리라. 책을 읽어 보면, 고래와 바다표범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욕망, 분노 그리고 채울 수 없는 갈급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책이 나오기 전부터 기존의 여러 채널을 통해 소설이 어떤 내용인지 다 알고 있던 터라, 독서는 확인사살에 가까웠다. 지금 읽기 시작한 책들이 하도 여러 권이라 좀 헷갈리지만 그래도 가장 읽고 싶었던 책부터 먼저 읽기로 했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항구도시 헐을 출발해서 그린란드로 가는 포경선 볼런티어 호에 탑승한 인간 군상들에 대한 스케치로 이언 머과이어 작가는 소설을 시작한다.

 

문제적 인간 하나, 그의 이름은 헨리 드랙스. 볼런티어 호의 작살수로 냉혈한 캐릭터의 주인공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 주로 폭력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인간형이다. 문제적 인간 둘, 아일랜드 캐슬바 출신으로 열대의 나라 인도에서 세포이 전쟁을 겪고 본국으로 돌아온 퇴역 군의관 패트릭 섬너다. 보통 돈이 필요한 의대생들이나 탑승하는 선박의로 지원한 저의에 대해 모두가 궁금해 한다. 머지않아 들어나게 되지만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연금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난 신세다. 게다가 아편중독이라는 치명적인 약점까지 지니고 있다. 볼런티어호를 침몰시켜 보험금을 타내겠다는 음흉한 계획을 가진 선주 제이컵 백스터에게 고용된 섬너는 앞으로 그의 앞에 펼쳐질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지나친 낙관만 가진 채 볼런티어 호에 탑승을 결정한다. 책이나 읽고 글이나 좀 쓰면서 그 좋아하는 아편을 실컷 즐길 수 있는 유급휴가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해빙이 넘실거리는 북해 바다에서 볼런티어 호의 선원들은 잔혹한 바다표범 사냥에 나선다. 오로지 돈으로 환산되는 바다표범 가죽을 얻기 위해 성체와 새끼할 것 없이 뱃사람들은 잔혹하게 라이플과 곤봉을 휘둘렀다. 섬너는 동료들과 함께 바다표범 사냥 중에 사고로 해빙에 빠져 익사할 뻔한 위기도 겪지만 이등 항해사 미스터 블랙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자그마치 세 시간 동안이나 부빙에 갇혀 있다가 살아나다니, 정말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다. 물론 나중에 그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워밍업이라고나 할까.

 

바다표범 사냥에서 보여주는 선원들의 야만적 행위는 앞으로 벌어질 비극의 전조처럼 다가온다. 13세 소년 조지프 해너가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된 것이다. 북빙양에 외로이 떠있는 포경선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38명의 선원 중에 범인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마치 한 편의 스릴러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기 시작한다. 능수능란한 작가 이언 머과이어는 이런 이야기 속에 주인공 패트릭 섬너에게 델리에서 있었던 과거도 슬쩍 끼어 넣는다. 인도 델리에서 벌어진 세포이 전쟁 와중에, 보물 약탈에 눈이 멀어 수석군의관 코빈과 작당해서 보물찾기에 나섰다가 동료들은 모두 적군의 매복에 걸려 죽고 자신도 부상당해 구사일생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한다. 문제는 자신의 상관 코빈이 의료현장에서 이탈한 섬너의 구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불명예제대하게 된 섬너의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그게 섬너가 볼런티어호에 승선하게 된 진짜 이유였다.

 

배신과 음모가 휘몰아치는 세상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전직 군의관 섬너에게 포경선에서 이루어지는 순수한 노동이야말로 적격이었다. 섬너는 여가 시간에는 <일리아드>를 읽었다. 이언 머과이어 작가는 철저한 고증으로 마치 눈 앞에서 거친 고래잡이를 보는 듯한 리포트와 세포이 전쟁 당시의 처절한 현장을 시각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작가가 준비한 이야기들은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술술 돌아간다. 결국 진짜 살인범이자 남색자로 밝혀진 헨리 드랙스의 난동으로 선장 브라운리가 사망하고, 일등 항해사 마이클 캐번디시가 볼런티어호의 지휘를 맡게 된다. 이어지는 난파와 조난의 과정이 무서운 속도로 전개된다. 자신의 생명줄 같았던 아편이 든 짐 상자를 잃어버린 섬너는 금단증상에 시달리며 눈보라가 치는 혹한에서 결국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독자는 어쩌면 양심적 의사 섬너의 생환을 적극적으로 응원할 지도 모르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 역시 타인의 삶에 관심이 없는 무심한 사나이다. 그와 대척점에 놓여 있는 헨리 드랙스와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확실히 이언 머과이어의 소설 <얼어붙은 바다>는 충분히 흥미롭고 읽어볼 만한 책이다. 특히 바다표범과 고래사냥에 나선 포경업자들에 대한 뛰어난 묘사와 세포이 전쟁에서 보물약탈에 나섰다가 부상을 입고 가까스로 살아남는데 성공한 섬너의 이야기는 독보적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래잡이 부분에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아우라를 자랑하는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선과 악의 구분에 대한 독일 출신 작살수 오토와의 대화도 멋졌다. 선은 악의 부재한 결과라는 패러프레이즈는 또 어떤가. 과연 패트릭 섬너에게 선(virtue)을 적용시킬 수 있을까? 그냥 전형적인 제국주의 시절 지식인의 양심적 모습이 아닐까.

 

제국주의 자본가들에게 고래/바다표험 혹은 인도의 민중들은 오로지 착취의 대상으로만 비칠 따름이다. 내가 아닌 피아를 모두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그런 시선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분명 살인적 바다를 상대하는 선원들의 입이 상대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필요이상으로 거친 언어들(아마 번역 와중에 순화되지 않았을까 싶다)이 쓰인 점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아마 어쩌면 그런 점들도 현대 독자들을 고려해서 이언 머과이어가 기술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 <얼어붙은 바다>는 맨부커상 최종심에 오르고 뉴욕타임즈에서 그해의 베스트 10에 올릴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재밌기도 하다. 만사를 제쳐 두고 책읽기를 마치지 않으면 다른 걸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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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변의 피크닉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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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개인적으로 SF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다음주 독서모임 도서로 선정이 돼서 읽게 됐다. 왠지 사고 싶지는 않고 해서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다. 난생 처음으로 하는 희망도서였다. 이언 머과이어의 <얼어붙은 바다>도 신청하려고 했으나 누가 먼저 신청해서 두 번째로 빌려다 읽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더 재밌지 않나 싶다.

 

<노변의 피크닉>은 구 소비에트 SF 소설로 하몬트라는 지역에 외계인의 “방문”이 이루어진 뒤, 벌어지는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소설이 특이한 점은 SF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 중의 하나인 그 흔한 외계인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푸른 철모”의 군인들이 통제하는 것으로 봐서 전 세계적인 이슈가 분명한데, 외계인들이 방문한 “구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작가인 스트루가츠키 브라더스 역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방문과 구역을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은 인간 군상들에 이야기에 방점을 찍는다.

 

소설은 물리학자 밸런타인 필먼(필먼 방사점의 창시자?)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는 뉴스로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은 방문구역으로, 아마도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한 거점들로 보인다. 그리고 그 방문구역에 외계인들이 남겨둔 물체들을 노리는 스토커(사냥꾼)들이 노획물들을 사냥 중이다. 요즘 우리가 일상에서 목격하고 있는 위험의 외주화라고나 할까.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획물들을 원하지만 마녀의 젤리, 불타는 솜털, 악마의 배추, 모기지옥 같은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은 부유한 이들은 사냥꾼을 고용해서 구역의 충만한 “깡통”을 돈을 주고 사들이는 시스템이다.

 

당연히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스토커가 등장할 순서고, 23세의 3년차 연구원 “빨강머리” 레드릭 슈하트가 나선다. 보통 3인조로 구성된 스토커들이 노획물 사냥에 나서는데 레드릭은 이번에 키릴 파노프 박사 그리고 텐더와 함께 구역에 침투한다. 독자는 무언가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능가하는 그런 스펙터클한 대우주 서사시적 시퀀스를 기대해 보지만 아쉽게도 <노변의 피크닉>에는 그런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굳이 예를 들어 보자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레드릭과 아서 버브리지가 인간의 소망, 아니 욕망을 들어준다는 전설의 금빛 구체를 찾아 나서는 장면로 만족해야지 싶다.

 

대신 아르카디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은 구역에 등장하는 치명적인 마녀의 젤리처럼 부글부글 끓는 인간의 욕망을 저격한다. “돈은 돈 생각을 하지 않는 위해 필요한(279쪽)” 거라는 문장처럼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있는 자본주의 3.0 시대의 부조리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표현이 또 존재할 수 있을까. 욕망을 발현시킬 수단인 돈을 얻기 위해 스토커들은 명백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구역에 침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구역에 침투하면서 생기는 부작용(키릴 파노프는 구역에 침투한 후 심장파열로 사망했다, 레드릭의 몽키를 보라) 혹은 침투 중에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따위는 욕망의 실현에 우선하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장면은 전자 장비 공급처 대리인 리처드 허버트 누넌과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빛나는 밸런타인 필먼 박사의 대화였다. 우리 지구인들은 꾸준하게 외계와의 대화를 시도해 오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와 다른 이성을 가진 객체에 대한 호기심과 미지와의 조우가 우리에게 긍정적일 거라는 가정 아래 추진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무언가 지구별에 외계인들이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 수많은 비용과 시간을 소모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런 것들이 소설의 제목처럼 “우주의 노변에서 열린 피크닉”에서 외계인들이 흘린 샌드위치 조각이나 병뚜껑 같이 하찮은 부산물들을 찾는 행위는 아닐까라는 식견에 감복했다. 그리고 미지와의 조우가 궁극적으로 소설에 나오는 구역처럼 스토커들을 집어 삼키는 블랙홀처럼 작동할 수도 있는게 아닌가 말이다.

 

여전히 SF장르물은 나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무언가 흥미로운 지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에 발표된 <노변의 피크닉>은 요즘 나오는 세련된 SF소설에 비하면 좀 싱거운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미지와의 조우라는 우리 인류가 추구하는 지향점에서 비롯된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대로 만족할 만하지 않은가 싶다. 이 책 이전에 열린책들에서 소개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이라는 제목의 소설도 있다고 하는데 다음주까지 이 책도 읽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제는 오멜라스 시리즈로 소개된 스타니스와프 렘의 <사이버리아드>와 로버트 J. 소여의 <멸종>도 중고서점에서 사왔다. 품절/절판된 책이라고 해서 더 호기심이 간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2월에는 SF소설을 주로 읽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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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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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해서 내 주변의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정리하며 내려 놓기 시작하다가 결국 번듯해 보이는 아사히신문사라는 회사까지 내려놓은 아프로 헤어의 중년 이나가키 에미코 씨의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를 읽었다.

 

사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이웃 우리에게도 대단한 충격이었다. 싸고 안전한 에너지원으로 각광 받던 원자력발전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일대 사건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원전마피아들로 똘똘 뭉친 카르텔들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우리 동남해안에 밀집되어 있는 노후화된 원전 중의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원전마피아들이 선전을 해도, 유시민 작가가 지적한 대로 영원히 불타는 불덩어리 원전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사건이 터진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저자 이나가키 씨는 원전사고를 계기로 해서 전기 절약에 나선다. 한달 평균 2,000엔 정도 나오는 전기료를 줄이기 위해 갖은 애를 써보았지만 오히려 미세하게 전기료가 더 많이 나왔다는 사실에 저자는 충격을 받고, 획기적인 방법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예 전기를 잡아먹는 원천을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명의 편리한 이기를 이용한다면 우리 주변에 너무 불필요한 것들이 배치해 둔 게 아닐까. 저자의 첫 번째 타겟은 바로 청소기였다. 나도 호시탐탐 요즘 최신유행이라는 다이슨 무선청소기를 남자의 로망이라며 노리고 있지만, 어려서부터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청소를 해온 몸이라 그런지 지금도 전깃줄이 지나치게 늘어지는 진공청소기보다 가끔은 원시적 방법을 선호하는 편이다. 가루같은 것들이 날릴 적에는 물론 대번에 진공청소기를 동원하지만 말이다.

 

다음 목표는 전자레인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어렸을 적에는 전자레인지가 없었다. 없다가 생긴 것들에 대해서는 사라진다고 해서 아예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니 아쉬울 게 없을 듯 싶다. 그런데 이나가키 씨는 그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냉낭반까지 하지 않는 선까지 도달한다. 뭐랄까 지금은 작고하신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러면서 동시에 자연에 순응해 가는 자신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저자는 자신의 주변에서 전기를 소모하는 물건들을 하나둘씩 제거하는 방식으로 절전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도전은 무모하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건 바로 냉장고다. 냉장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거실 혹은 부엌의 한 편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플라스틱 상자였다. 그나마 저자에게 다행인 것은 딸린 식구가 없고, 냉장고 사용을 중지하던 계절이 겨울이었다는 점이다. 누가 나에게 과연 냉장고 없이 살아 보라고 한다면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저자는 냉장고 다이어트를 하면서 냉장고는 시간을 정리하는 장치였다고 적었. 그리고 꼭 필요한 먹거리들만 구매하고, 주변을 정리하며 자신의 가치와 본질에 대해 깨달음까지 부수적으로 얻었노라고 고백한다. 이거 너무 거창한 거 아냐? 하지만 되돌아 보면, 그동안 냉장고에 양껏 쟁여 두었다가 미처 먹지 못하고 버린 먹거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마 지금 당장 집에 있는 냉장고에 든 먹거리들을 꺼내 정리해보면 상당수가 바로 음식물 쓰레기로 분류가 되지 않을까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드는 게 사실이다. 저자는 연간 버려지는 632만 톤에 해당하는 음식물 쓰레기 중 절반이 가정, 아마 그중에서도 냉장고에서 화석의 모습으로 최후를 맞는다고 쓰고 있는데, 우리 회사 동료는 ‘미라’라는 재미난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나가키 씨는 욕망과 불안 그리고 스트레스로 점철된 우리네 삶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대에 대량폐기를 하게 되었다는 예리한 분석을 내놓는다. 저자의 아버지는 일본이 고도의 경제성장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가전제품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복무했었는데, 상여금의 일부로 자사에서 만든 제품들을 사들였다고 한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최신 첨단기기에 둘러싸여 성장했다고 한다. 특히 컬러 텔레비전이 나왔을 적에는 동네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뭐 그 땐 그랬지. 그리고 그런 가전제품들이 과연 가사노동으로부터 여성들을 해방시켜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든다고 적고 있다. 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 가전 제품 신기3총사 중의 하나인 세탁기는 세탁이라는 중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어쨌든 최첨단 인터넷 시대에 사물인터넷(IoT)이 눈앞에까지 도달했지만, 마냥 좋아만 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텔레비전 리모콘만 하더라도 어찌나 복잡한 기능들이 많은지 헷갈릴 판인데 나이드신 어르신들은 오죽하겠냐 싶다.

 

이나가키 에미코 씨의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도 나에게 과연 꼭 필요한 게 무얼까하고 주변에 불필요한 것들을 다이어트하겠다고 결심했었지만 며칠 가지 못하고 끝나지 않았던가. 저자처럼 거창하게 전기세 반값 그런 지키지 못할 공약보다는 집안의 불필요한 전선 코드부터 뽑는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는 게 내 자신을 비우고, 그 안을 깨달음으로 채우는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 책은 유쾌하고 재밌었고, 아쉽게도 너무 금방 읽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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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2-08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저자도 가전제품의 등장이 여성해방을 실현시켜준다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군요. 집안일, 특히 부엌에 있는 가전제품을 어머니들만 쓰고 있다는 게 문제죠. 요리를 직접 하는 남성들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가사일에 관심 없는 남성들은 요리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요. 여성한테 잘 보이려고 가사일을 흉내내는 남성들도 있어요.

레삭매냐 2018-02-08 22:45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남성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이 18분이라고 하더군요.

가사분담부터 실천에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세탁 청소 설거지 기타
등등 분담해야 할 게 너무 많아요...

2018-02-08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8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7년 전에 산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었다. 나의 오래된 책장에서 찾아낸 하지만 그동안 읽지 않았던 책이다. 작년에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으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이자 시대의 양심이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 조지 오웰의 전작읽기에 도전하는 첫 번째 과제였다고나 할까.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영국 북부 랭커셔와 요크셔 지방을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당대의 에너지원이었던 탄광에서 일하는 탄광 광부들에게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1부와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 비해 2부에 솔직하게 읽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5일 동안 집중적으로 읽었고 오늘 오후에 다 읽는데 성공했다. 뿌듯하다.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82년 전 기록임에도 어떻게 해서 육체노동자들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당시 산업 역군이었던 광부들 - 소설에서는 필러(filler, 우리말로는 막장꾼)들로 표현된다 - 수시간에 걸쳐 탄광에 가서 7시간 동안 쉴 시간도 없이 숨가쁘게 석탄을 캐냈다. 조지 오웰은 먼저 그들이 거주하는 열악한 하숙집에 대한 스케치부터 시작하는데, 거의 벌이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을 갈취하면서도 끔찍할 정도의 악취와 비좁은 공간 그리고 형편없는 식사를 제공하는 하숙집이 대다수였다고 한다. 광부들은 갱도에 가득한 탄진 때문에 진폐증과 안진증이라는 직업병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그런 끔찍한 병들도 막장에서 벌어지는 사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절단과 발파 그리고 채탄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석탄을 캐내는 과정에서 가스 폭발 사고는 상수였고, 그보다 무서운건 갱도 붕괴사고였다. 그나마 예전에는 나무 기둥이 버팀목이 되어졌는데, 갱도가 더 길어지고 철제 기둥으로 바뀌면서 삐거덕 거리는 경고음 대신 순식간에 갱도가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주기적으로 발생했다고 한다. 그런데 탄광의 육체노동자들에게 그런 사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실업이었다. 생존을 위해선 탄광에서의 육체노동과 그 대가로 주어지는 임금이 필수적이었는데, 일자리가 날아가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곧 사회적 사망진단을 의미하는게 아니었을까. 그래도 영국에서는 얼마 안되는 돈이나마 실업수당이 주어졌다고 한다. 그게 1936년 당시의 일이었다. 중산층 계급에게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겠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실업수당을 받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가면서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중산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동자 계층의 생존력이 더 강했다고나 할까.

 

저널리스트의 입장에서 조지 오웰은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어울릴 수는 있어도 그들이 삶에서 감당하는 육체노동은 할 수 없었노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교육 받은 계급의식은 노동자 계층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식의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하급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 계층 위에 군림하면서 자본가 계급의 완충작용을 했다는 예리한 지적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상이 1부에서 다루어진 내용이라면 2부에서는 쁘띠 부르주아 계급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한 “타락한 근대의 반쪽 지식인(283쪽)”의 고백이다. 식민지 인도에서 태어난 조지 오웰은 원래 자신의 신분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한 명문 이튼 스쿨을 장학금을 받아 졸업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던 그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버마에서 하급관리 생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버마에서 피부 색깔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그리고 피압제와 압제자라는 구도로 형성된 제국주의의 본질을 파악한 오웰은 5년간의 식민지 관리 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본국인 영국에서도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형성된 계급문제는 식민지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게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이에 조지 오웰은 런던과 파리에서 수년간 부랑자 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문학가 그리고 민주적 사회주의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압제자는 언제나 틀렸고, 피압제자는 항상 옳다는 자신만의 명제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한편, 산업혁명 이래 영국 사회를 휩쓴 기계화의 과정을 유심히 관찰한 조지 오웰은 산업혁명 당시 과학과 기계에 대한 적대감이 존재했다고 기록한다. 지난달부터 읽기 시작한 리처드 플래니건의 신간 소설 <굴드의 물고기 책>에도 등장하는 기계파괴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연상됐다. 조지 오웰은 궁극적으로 기계화의 승리가 이루어졌고,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기계화의 진행에 따라 발전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관철시킨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미래에는 기계가 인간이 해야할 육체노동을 대신하게 될 것이고 인간은 그렇게 해서 얻어진 여가 시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창조적 활동(유희)을 하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지금 보면 기계화가 인간의 노동해방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본가 계급의 이윤확대만을 위해 진행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리고 실업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노동자들의 삶을 덮쳐 버렸고.

 

물론 노동과 그런 여가 시간에 이루어지는 노동이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런 일조차도 기계가 대신할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기계화의 부작용으로 발생된 이슈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연달아 발생한 대형 크레인 사고를 비롯해서, 위험의 외주화로 불린 대형 화학공장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들을 보면 82년 전에 이미 이 민주적 사회주의자가 자본주의에 대한 병폐를 미리 알고 있던 예언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기계화 시대에 시도 때도 없이 발명과 개량을 추구하는 것이 어느새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작가의 지적도 주목할 만하다.

 

노동자들에게서 유리된 인간미 없는 사회주의 운동이 스스로 괴리시키고, 기질적으로 우파일 수 밖에 없는 인텔리 주류들을 미래의 파시스트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조지 오웰의 경고는 정확하게 시대의 흐름을 파악한 것이었다. 그가 주창하는 사회주의란 어떤 형식의 압제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82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것이 변했지만 미래의 예언자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자본의 노예가 되어 상대적 빈곤과 압제에 시달리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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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2-08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부분 사회주의자는 과학이 발달한 낙관적인 미래 사회를 지나치게 믿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트 베벨, 마르크시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결합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각각 ‘기계화‘, ‘사이버네틱스‘가 발달한 사회상을 제시했습니다. 기계가 돌아가면서 노동력이 더 많이 늘어난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적했던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해요. 노동자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기계가 나와도 역설적으로 노동력은 줄어들지 않을 겁니다.

레삭매냐 2018-02-08 17:26   좋아요 1 | URL
그건 아마 조지 오웰 시대나 지금이나 지대와 생산 수단
을 독점한 자본가 계급이 수익/이윤을 독점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희 독서모임에서 헤르메스님이 줄기차게 주장한 기본
수당을 모두에게 지급하고 기계가 생산을 맡고 인간은
오로지 창조적 활동과 여가 시간 향유에 전념해야 한다
는 의견이 떠올랐습니다. 그땐 황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미 조지 오웰이 82년 전에 했던 주장이어서 더 놀랐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