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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로버트 J. 소여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월의 독서는 아마도 SF소설과 함께 하게 될 것 같다. <노변의 피크닉>으로 시작된 나의 싸이파이 소설 독서여정은 스타니스와프 렘의 <사이버리아드>를 거쳐 시간 여행을 떠나 중생대 공룡들과 만나게 된다는 허무맹랑한 하지만 재밌는 이야기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야심차게 출발한 오멜라스 시리즈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지난 주말부터 오멜라스 시리즈 수집에 나서게 됐다. 스타니스와프 렘에 이어 두 번째 나의 오멜라스 도전작이 바로 캐나다 출신 로버트 제임스 소여의 <멸종>이다. 그런데 읽기는 <멸종>을 먼저 읽었네.
싸이파이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바로 시간 여행일진대, 거기에 6,500만년 전 과거로 돌아가 공룡과 조우하게 된다는 설정 또한 기발하지 않은가. 보통 우리는 운석충돌로 인해 지구상에 번창하던 공룡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가설을 신봉하고 있는데, 저자는 그런 이론에 반기를 든다. 소설의 주인공 고생물학자이자 공룡 매니아이자 전문가인 브랜든 새커리 박사(41세, 터론토 교외 미시사가 거주)와 마일즈 조던(클릭스) 교수가 과거로 돌아가 보니 달도 두 개나 떠 있고, 무엇보다 중력이 지금보다 절반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브랜디는 현재의 중력 G1보다 상대적으로 중력이 반절 밖에 나가지 않았고, 그래서 공룡들이 그렇게 커다란 덩치를 유지할 수 있었노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대단한 가설이다.
작가들이 글을 쓰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 <멸종>에서 적어도 로버트 제임스 소여는 자신이 신봉하는 중력 때문에 공룡에 몰살했다는 가설을 주장하기 위해 소설을 쓴게 아닐까 싶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운석대충돌설로 한때 지구상에 번성했던 공룡들이 떼죽음당했다는 가설을 믿고 있는 마당에, 소여 작가의 가설은 흥미로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소설에서처럼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해서 직접 목격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것들은 모두 가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싸이파이 소설들이 그렇듯, 소여도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시간 여행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그리고 과거로 돌아갔을 때 벌어질 수 있는 갖가지 위험요소들에 대한 자세한 방법론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다. 사실 아무리 싸이파이 매니아라고 하더라도 그런 부분에까지 신경쓰진 않겠지만. 그래도 왜 더 가까운 과거가 아닌 그렇게 오래된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가까운 과거일수록 상대적으로 에너지가 더 많이 소모된다는 가설로 적당히 퉁친다. 사실 우리는 6,500만년 전 같은 먼 과거보다는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이 숨쉬는 십년 전 같은 가까운 과거를 탐내지 않는가 말이다. 이런 부분들은 충분히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어쨌든 뭐 그 정도면 약과다. 소여 작가는 과거 시간 여행 탐험에 또 한 가지 요소를 첨부한다. 그러니까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간 자신이 꼬박꼬박 쓰는 일기를 현재의 브랜던이 읽게 된다는 설정이다.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현재의 자신이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을 알게 된다면 말이다. 그중에서 그가 가장 돌리고 싶어하는 일은 바로 사랑하는 아내 테스를 절친한 동료이자 친구인 클릭스에게 빼앗기는 걸 막는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허점 중의 하나는 아무리 예산부족으로 햄버거 모양의 스턴버거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갔지만, 최소한의 호신을 위한 무기들은 충분히 갖췄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결국 브랜디와 클릭스는 과거로 가자마자 흉폭한 티렉스와 기타 공룡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과거 시간 여행에서 그들을 위협하는 건 공룡 군단이 아니다. 더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적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젤리 모양으로 조종이 가능한, 다시 말해 노예로 사용할 수 있는 숙주를 찾아다니는 화성인 헤트들이었다. 이 녀석들은 공룡 속으로 침투해서 성대로 지구인들과 대화에 나서기도 한다. 게다가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있어 지구별의 중력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중력 억제 위성’으로 조종하기까지 한다. 그들이 살던 화성과 비슷한 중력을 만들기 위해 설치한 장비들이 결국 그들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는 점도 역시나 아이러니하다. 아, 이런 기술적 디테일이라니!!!
이미 여기까지 쓰면서 다수의 스포일러를 제공했지만,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하나 제시하겠다. 화성인들의 정체는 바로 바이러스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지구 대표들인 브랜디와 마일즈의 고군분투로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향하려는 그들의 계획을 분쇄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RNA에 화학적으로 각인된 대로 숙주를 지배하려는 헤트들은 인플루엔자나 소아마비, 감기 그리고 브랜디의 아버지를 죽이고 있는 암으로 살아남아 끊임없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로버트 제임스 소여의 <멸종>에는 싸이파이 소설 팬들이 좋아할 만한 거의 모든 요소들을 균형있게 잘 장착하고 있다. 시간 여행(타임머신), 공룡 그리고 외계인과의 조우. 그리고 당연히 지구정복을 꿈꾸는 외계인들을 저지해야 한다는 대전제와 더불어 브랜디의 개인적 고민인 어떻게 해서든 사랑하는 테스를 친구 클릭스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그런 설정까지 다양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공룡멸종에 대한 중력 가설에 대한 주장을 놓치지 않는다. 브랜디는 친구 마일즈의 패기 있는 성격을 칭찬했는데 어쩌면 나는 로버트 제임스 소여의 그런 뚝심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거기에 무신론자로 보이는 브랜디가 신에게 호소하는 장면도 백미였다.
아무래도 24년 전에 나온 소설이라 현재의 첨단기술이 주는 그런 디테일은 부족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 시절의 싸이파이 소설이 지향하는 지점을 볼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독서의 가치가 느껴졌다. 게다가 재미까지 있었으니 금상첨화.
아, 나의 이제는 모두 절판되어 구할 수 없게 된 오멜라스 북들에 대한 사냥은 계속된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부터 읽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