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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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에 산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었다. 나의 오래된 책장에서 찾아낸 하지만 그동안 읽지 않았던 책이다. 작년에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으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이자 시대의 양심이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 조지 오웰의 전작읽기에 도전하는 첫 번째 과제였다고나 할까.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영국 북부 랭커셔와 요크셔 지방을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당대의 에너지원이었던 탄광에서 일하는 탄광 광부들에게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1부와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 비해 2부에 솔직하게 읽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5일 동안 집중적으로 읽었고 오늘 오후에 다 읽는데 성공했다. 뿌듯하다.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82년 전 기록임에도 어떻게 해서 육체노동자들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당시 산업 역군이었던 광부들 - 소설에서는 필러(filler, 우리말로는 막장꾼)들로 표현된다 - 수시간에 걸쳐 탄광에 가서 7시간 동안 쉴 시간도 없이 숨가쁘게 석탄을 캐냈다. 조지 오웰은 먼저 그들이 거주하는 열악한 하숙집에 대한 스케치부터 시작하는데, 거의 벌이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을 갈취하면서도 끔찍할 정도의 악취와 비좁은 공간 그리고 형편없는 식사를 제공하는 하숙집이 대다수였다고 한다. 광부들은 갱도에 가득한 탄진 때문에 진폐증과 안진증이라는 직업병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그런 끔찍한 병들도 막장에서 벌어지는 사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절단과 발파 그리고 채탄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석탄을 캐내는 과정에서 가스 폭발 사고는 상수였고, 그보다 무서운건 갱도 붕괴사고였다. 그나마 예전에는 나무 기둥이 버팀목이 되어졌는데, 갱도가 더 길어지고 철제 기둥으로 바뀌면서 삐거덕 거리는 경고음 대신 순식간에 갱도가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주기적으로 발생했다고 한다. 그런데 탄광의 육체노동자들에게 그런 사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실업이었다. 생존을 위해선 탄광에서의 육체노동과 그 대가로 주어지는 임금이 필수적이었는데, 일자리가 날아가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곧 사회적 사망진단을 의미하는게 아니었을까. 그래도 영국에서는 얼마 안되는 돈이나마 실업수당이 주어졌다고 한다. 그게 1936년 당시의 일이었다. 중산층 계급에게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겠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실업수당을 받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가면서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중산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동자 계층의 생존력이 더 강했다고나 할까.

 

저널리스트의 입장에서 조지 오웰은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어울릴 수는 있어도 그들이 삶에서 감당하는 육체노동은 할 수 없었노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교육 받은 계급의식은 노동자 계층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식의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하급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 계층 위에 군림하면서 자본가 계급의 완충작용을 했다는 예리한 지적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상이 1부에서 다루어진 내용이라면 2부에서는 쁘띠 부르주아 계급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한 “타락한 근대의 반쪽 지식인(283쪽)”의 고백이다. 식민지 인도에서 태어난 조지 오웰은 원래 자신의 신분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한 명문 이튼 스쿨을 장학금을 받아 졸업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던 그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버마에서 하급관리 생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버마에서 피부 색깔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그리고 피압제와 압제자라는 구도로 형성된 제국주의의 본질을 파악한 오웰은 5년간의 식민지 관리 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본국인 영국에서도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형성된 계급문제는 식민지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게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이에 조지 오웰은 런던과 파리에서 수년간 부랑자 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문학가 그리고 민주적 사회주의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압제자는 언제나 틀렸고, 피압제자는 항상 옳다는 자신만의 명제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한편, 산업혁명 이래 영국 사회를 휩쓴 기계화의 과정을 유심히 관찰한 조지 오웰은 산업혁명 당시 과학과 기계에 대한 적대감이 존재했다고 기록한다. 지난달부터 읽기 시작한 리처드 플래니건의 신간 소설 <굴드의 물고기 책>에도 등장하는 기계파괴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연상됐다. 조지 오웰은 궁극적으로 기계화의 승리가 이루어졌고,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기계화의 진행에 따라 발전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관철시킨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미래에는 기계가 인간이 해야할 육체노동을 대신하게 될 것이고 인간은 그렇게 해서 얻어진 여가 시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창조적 활동(유희)을 하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지금 보면 기계화가 인간의 노동해방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본가 계급의 이윤확대만을 위해 진행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리고 실업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노동자들의 삶을 덮쳐 버렸고.

 

물론 노동과 그런 여가 시간에 이루어지는 노동이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런 일조차도 기계가 대신할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기계화의 부작용으로 발생된 이슈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연달아 발생한 대형 크레인 사고를 비롯해서, 위험의 외주화로 불린 대형 화학공장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들을 보면 82년 전에 이미 이 민주적 사회주의자가 자본주의에 대한 병폐를 미리 알고 있던 예언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기계화 시대에 시도 때도 없이 발명과 개량을 추구하는 것이 어느새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작가의 지적도 주목할 만하다.

 

노동자들에게서 유리된 인간미 없는 사회주의 운동이 스스로 괴리시키고, 기질적으로 우파일 수 밖에 없는 인텔리 주류들을 미래의 파시스트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조지 오웰의 경고는 정확하게 시대의 흐름을 파악한 것이었다. 그가 주창하는 사회주의란 어떤 형식의 압제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82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것이 변했지만 미래의 예언자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자본의 노예가 되어 상대적 빈곤과 압제에 시달리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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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2-08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부분 사회주의자는 과학이 발달한 낙관적인 미래 사회를 지나치게 믿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트 베벨, 마르크시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결합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각각 ‘기계화‘, ‘사이버네틱스‘가 발달한 사회상을 제시했습니다. 기계가 돌아가면서 노동력이 더 많이 늘어난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적했던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해요. 노동자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기계가 나와도 역설적으로 노동력은 줄어들지 않을 겁니다.

레삭매냐 2018-02-08 17:26   좋아요 1 | URL
그건 아마 조지 오웰 시대나 지금이나 지대와 생산 수단
을 독점한 자본가 계급이 수익/이윤을 독점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희 독서모임에서 헤르메스님이 줄기차게 주장한 기본
수당을 모두에게 지급하고 기계가 생산을 맡고 인간은
오로지 창조적 활동과 여가 시간 향유에 전념해야 한다
는 의견이 떠올랐습니다. 그땐 황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미 조지 오웰이 82년 전에 했던 주장이어서 더 놀랐
습니다.
 
마지막 탐정 버티고 시리즈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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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에 다시 로버트 크레이스와 만나게 되었다. 그 때 읽었던 책이 <투 미닛 룰>이었는데 솔직히 너무 오래 전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1953년 미국 루이지애나 인디펜던스 출신 로버트 크레이스는 입양되어 자랐고,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아하 그러니까 공돌이 출신 작가란 말이지. 1976년 할리우드로 근거지를 옮겨 <마이애미 바이스> 등의 방송작가로 활동하면서 에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85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몽키스 레인코트>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번에 출간된 <마지막 탐정>은 세계 최고의 사설탐정이라는 미국 레인저부대 출신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가 등장하는 9번째 소설로 지난 2003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전작 <LA 레퀴엠>과 데뷔작인 <몽키스 레인코트>(절판)도 읽어 보고 싶어졌다.

 

사실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 시리즈는 처음인지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새로웠다소설 초반알래스카 불곰과 격돌하는 조 파이크는 부상이 채 낫기도 전에 야생 생태학자들을 습격해서 살해한 미친 불곰과 대결하는 장면에서는 소설이 어떻게 전개될까 궁금했지만 소설은 바로 알래스카에서 캘리포니아 그러니까 엘비스 콜의 근거지로 이동한다그리고 애인 루시 셰니에가 출장간 사이 며칠 동안 그녀의 아들 벤 셰니에를 데리고 있는 동안 유괴사건이 발생한다.

 

세계 최고의 탐정도 전혀 추격의 실마리를 잡지 못할 정도로 벤을 유괴한 놈들의 실력은 대단했다. 18세의 나이에 베트남전에 레인저 부대원으로 참전할 정도로 유능한 실력의 소유자였던 엘비스는 이번 대결에 나서는 적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악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동료 조 파이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한편벤을 납치한 범인들은 베트남전 당시 엘비스가 동료들은 무참하게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라면서 아무도 모르는 특수한 사실들을 공개한다아들의 납치 소식을 들은 루시의 전남편 리처드가 루이지애나에서 자신의 경호원들을 데리고 출동하고정말 밥맛 떨어지는 캐릭터인 리처드는 <데몰리션 엔젤>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던 캐럴 스타키 형사와 협력해서 실낱같은 단서를 찾던 엘비스를 사건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유괴사건을 맡은 지타몬 경사에게 강력하게 요구한다.

 

자신이 아이를 맡고 있는 동안 벤을 잃어버린 사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요목조목 자세하게 아는 유괴범들이 자신에 대한 복수를 공공연하게 떠들어대자 엘비스는 잠도 한숨 못자고 사건 해결에 나선다엘비스는 결국 자신의 집을 멀리서 관찰하던 실력 좋는 유괴범의 족적과 지문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그리고 그들의 리더가 디보이(델타 포스출신 마이클 팰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현재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유괴사건과 더불어 과연 베트남에서 엘비스와 그의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용병으로 참전했던 시에라리온에서 마이클 팰런과 에릭이보가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세 개 축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이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면서 베트남전 당시 상황에 대한 묘사가 하도 뛰어나서 나는 로버트 크레이스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줄 알았다하지만 크레이스의 바이오그래피를 살펴보니 딱히 그런 내용은 들어있지 않았다아마 실제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이들의 조언을 받아 생생한 리포트식의 글을 써낸 것 같다시에라리온에서도 마찬가지고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전적으로 미국이 부도덕한 전쟁을 치른 것이 명백한데도군경력-베트남전이라는 모종의 카르텔로 구성된 사나이들의 세계라는 허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물론 멋진 일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아무런 명분도 없이사실을 조작해서 시작한 전쟁에 대한 후유증이 문학에도 영향을 미리고 있다는 점이 놀랄 따름이었다.

 

물론 로버트 크레이스가 설계한 반전은 따로 준비되어 있다그것을 까는 건 바로 스포일러이기에 그 부분은 패스하자첨단 수사기법을 동원해서범인으로 추정되는 신원불상자들의 족적을 채취하고 육군 인사기록부에 등재된 자신의 기록을 조회한 사람이 누구인지 사건을 맡은 형사들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는 엘비스 콜의 실력에 경의를 표한다아무리 그래도 LAPD들을 무능한 멍청이들로 만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좌충우돌하며 오로지 벤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뛰는 엘비스의 모습에서 수십년 전 베트남전에서 끝내 구하지 못한 신병 로이 애보트의 처절한 죽음이 바로 연상됐다그러니까 엘비스에게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미션이 결국에는 하나로 귀결된 것이었다. <마지막 탐정>은 정말 영화화 되기에 최적의 요건들을 지니고 있었다베트남과 시에라리온에서의 사건들, LA 도심에서 벌어지는 자동차 추격전 그리고 마이클 팰런 일당들과의 최후의 대결.

 

중후반으로 넘어갈수록 호기심이 증폭되서 도저히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일단 그 정도로 재미는 보장한다참고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바로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가 등장하는 첫 번째 소설 <몽키스 레인코트>를 중고서점에서 데려왔다아쉽게도 절판이 돼서 아마 대부분의 온라인서점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모양이었다그 책도 다 읽고 나면 <L.A. 레퀴엠>과 캐럴 스타키 형사가 등장하는 <데몰리션 엔젤>도 구해서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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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카멜레온 -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작 책고래마을 21
이은선 글.그림 / 책고래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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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꼬맹이를 데리고 갔던 작은 미니동물원에서 난생 처음으로 카멜레온을 봤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보호색으로 위장 중이어서 그런지 한참을 본 다음에야 비로소 카멜레온을 찾을 수가 있었다. 물론 사육사 양반은 바로 어디에 있는지 알겠다고 하셨고. 책고래에서 나온 <까만 카멜레온>으로 오늘 재회할 수가 있었다.

 

카멜레온은 뱀목 카멜레온과 도마뱀류의 동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등지에 서식한다고 한다. 말로만 들었지 어디에 사는지 그리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네이버의 도움을 받아 검색해 봤다. 내친 김에 진짜 카멜레온의 습성을 알고 싶어서 유투브의 도움을 요청했다.

 


카멜레온의 색깔은 기본적으로 초록색이고, 빨강-오렌지-노랑 그리고 파란색으로 계속해서 색깔을 바꾸는데 색고의 축적이나 분산이 아니라, 피부 세포 밑에 있는 존재하는 크리스털의 구조 변화로 반사되는 빛의 파장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고 복잡해라.

 

암튼 다시 책고래 동화 <까만 카멜레온>으로 돌아가 난생(혹은 태생)으로 알려진 대로 알을 깨고 나온 6마리의 카멜레온들이 주인공이다. 나머지 까만 카멜레온의 다른 형제들은 모두 노랑, 빨강, 파랑, 그린 그리고 오렌지색인데 이 녀석만 별종인가 보다. 다른 녀석들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피부 세포 밑의 크리스털이 제대로 작동을 해서 주변 환경색에 맞춰 보호색깔을 맞추는데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까만 카멜레온”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크리스털리 작동을 하지 못해 까만색으로 남아 있다.

 


동영상으로 본 카멜레온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느렸다. 색깔 바꾸기는 그렇게 우연하게 잘하는데 움직임은 나무늘보 저리가라할 정도였다. 녀석들은 주로 낮에 활동한다고 하는데, 주인공 까만 카멜레온은 낮보다는 자신의 보호색이라고 할 수 있는 어둠이 내린 저녁 무렵에 더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관용의 자세로 바라보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나와 다른 것이 나쁜 것이 아닌데 외모나 사고가 나와는 다른 이유로 차별을 일삼는다. 최근 그런 차별을 딛고, 다름을 바탕으로 활발한 모델 활동을 하는 한현민의 경우가 떠올랐다.

 

아, 그리고 잊지 말고 꼭 5분 27초짜리 오디오 꿈북도 들어 보시라. 책을 동화구연으로 만든 오디오 파일 너무 좋더라. 작은 데도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책고래 출판사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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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과 문학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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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만에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책이 출간되기 전에 내가 모니터링을 한 책이기 때문이다. 보통 말미에 모니터링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는데, 지금 들춰보니 내 이름이 빠져 있더라. 이유는 너무 오래 돼서 잘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넣어 달라고 말해야 하나. 5년 전 일을 헤집어서 그러기엔 너무 귀찮네 그래.

 

나의 제발트 읽기 프로젝트 네 번째 책으로 <공중전과 문학>을 골랐다. 모니터링하고 받은 책이 분명 어디 있을텐데, 집안을 모두 뒤져도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왜 내가 읽고 싶은 책은 읽고 싶을 때 나타나지 않는 걸까. <토성의 고리>도 사서 다 읽고 나니 어디선가 불쑥 등장하더라만.

 

제발트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을 상대로 한 연합군, 특히 영국 공군의 지역폭격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된 대규모 공중 폭격전의 부당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영국이 실시한 대규모 폭격은 전쟁을 조속하게 끝내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다,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전쟁을 수행 중이던 독일 시민들의 사기를 꺾기 위한 선전전에 해당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게다가 실제적으로 그렇게 막대한 전쟁 비용과 인원(폭격수 60/100명 꼴로 사망)을 동원해서 실시한 공중전이 독일 시민들의 전쟁의지를 꺾지도, 산업 생산 피해도 미미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영국군이 정말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면, 나치의 유능한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가 지적한 대로 교통요충지나 정유시설, 연료설비, 볼베어링공장 같은 전쟁물자를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전략목표를 대상으로 정교하고 선별적인 폭격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 대륙에서 압도적인 독일군의 블리츠크리크(전격전)로 유례없는 패배를 기록한 영국군은 사실상 대항할 수단이 전무했다. 온갖 기괴한 작전 구상들이 나온 끝에 도출된 결론이 바로 공중전이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가용자원을 동원한 공중전이 사실상 적국에게 크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비싼 기회비용을 들여 생산한 엄청난 수량의 폭탄을 썩힐 수는 없었다. 그 결과 불행한 다수 독일 민간인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나치 독일의 프로파간다 전문가들이 선전한 대로 “가학적인 테러 공격”이나 “야만적인 깡패짓”이라는 문구들이 어쩌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1943년 7월 마지막 주에 수행된 고모라 작전에 목표였던 함부르크에서 벌어진 대규모 살상에 대한 기록들을 공개한다. 미국 제8공군의 지원을 받은 영국 공군은 연속적으로 1만 톤 달하는 화염폭탄과 파쇄폭탄의 비를 함부르크에 퍼부어댔고, 함부르크 시내를 강타한 화염 폭풍은 도시에 살던 인명과 유서 깊은 건축물들을 그야말로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서로 뒤엉켜 불타 버린 시신들에 대한 제발트의 서술은 너무 끔찍해서 차마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45쪽에 등장하는 사진이 고모라 작전이 만든 비극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발트는 비판의 화살을 다수의 독일 지식인들에게도 돌리고 있다. 전쟁 중에 저질러진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원죄 때문에 연합군이 실시한 부당한 폭격에 대해서도 전후 독일 지식인들을 비롯한 문학인들도 의도적으로 입을 다물고, 의식적 저지와 회피 혹은 외면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도 충분히 시대상황을 고려해서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침묵하는 다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폐허가 된 조국의 재건이었다. 승전국들의 점령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만한 발언들은 극도로 자제해야 한다는 자기검열이 작동한 것일까.

 

물론 우리에게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널리 알려진 하인리히 뵐(<천사는 침묵했다> 오래 전에 국내에 출간됐지만 절판된 상태다), 한스 에리히 노사크(<늦어도 11월에는> 문학동네), 헤르만 카자크, 아르노 슈미트, 페터 드 멘델스존(대부분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가들이다) 같은 소수의 양심적 작가들과 무명의 인사들이 남긴 기록이 있지만 너무나 빈약했고 산재되어 있었다고 저자는 저술한다. 한 마디로 말해 제 2의 과거 청산 작업 중에 모두에게 완전한 침묵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과 어쩌면 이렇게 딱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주류 수구언론들에서 연일 적폐청산에 대한 존재하지도 않는 피로감을 호소하며 지난 9년간의 악몽을 뒤로 하고, 미래로 달려 나가자는 주장과 꼭 맞아 떨어지는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침묵하는 다수는 미래에 벌어질 범죄의 공동정범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중전과 문학> 세 번째 장에서는 취리히 강연과 지면을 통해 제발트의 연합군 공중전에 관한 비판이 공개된 뒤 쏟아진 다양한 비난의 일부분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의 영국식 표현이 담긴 문장을 문제 삼은 어느 교장 선생님의 칭찬과 비난으로 범벅이 된 편지는 또 어떤가. 어디서나 지엽적인 문제들을 본래 어젠다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이탈해서 중점으로 삼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또 어떤 글들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서투르고 과민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도 했다. 저자는 문학가이면서 동시에 역사가를 능가하는 그런 철두철미한 역사가의 정신으로 자신이 접한 사료들을 대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다름슈타트에서 온 H박사의 글은 정말 구제불능의 황당무계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연합군의 지역폭격이 독일 민족을 말살시키려는 해외 유대인들의 음모론에서 비롯되었다는 해괴한 주장이다. 실제 나치 치하를 체험한 것도 아닌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한다는 점이 극히 우려스럽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수정주의적 역사관도 이런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은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정예 독일군들이 루프트바페의 공중폭격으로 4만 명이나 되는 무고한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을 살상됐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고모라 작전으로 폐허가 된 함부르크의 사진을 보고 환호작약하는 연합군 병사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 것처럼 내게는 들렸다.

 

책의 후반에 등장하는 문제적 인간, 알프레트 안더쉬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오로지 제발트의 비판에 의하면, 사상적으로는 극우파 선배 에른스트 윙거를 추종했고 문학적으로는 토마스 만을 뛰어 넘고 싶어했던 성공과 유명세를 쫓는 협잡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국내에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예전에 <잔지바르 또는 마지막 이유>라는 9개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 출간되었는데 구해 두기는 했으나 미처 읽어 보지는 못했다. 독일 '문학의 교황'이라고 불리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일찍이 그의 글에 대해 “거짓말과 키치의 밥맛 떨어지는 조합”이라는 혹평을 내렸다.

 

제발트의 분석에 따르면 원래 공산당 출신이었던 안더쉬는 몇 달 간의 강제수용소 생활을 거쳐 제국에 봉사하는 신실한 인간으로 개조되었다. 유대인 출신 부인과의 결혼도 제국문예부의 회원이 되기 위해 이혼으로 깔끔하게 마무리지었다. 베허마흐트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아르노 전선에서 1944년 6월 미군의 전쟁포로가 되어 미국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제발트는 안더쉬의 초기작부터 말년에 발표한 그의 주목할 만한 모든 작품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좌파에서 우파로, 다시 좌파로 재전향하며 오락가락하는 안더쉬의 삶을 관통하는 성공과 유명세를 향한 출세욕을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내가 읽어야 하는 제발트의 책들은 두 권이 남았다. 그 중의 하나인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된 <현기증. 감정들>은 이미 읽었지만 다음달에 다시 읽을 계획이다. 그나저나 문학동네에서 5년 전부터 제발트 선집으로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는 <캄포 산토>는 과연 언제나 출간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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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2-02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 소설 하면 대체로 톨스토이나 헤밍웨이 생각들 하지만 제발트를 안다면 순위 다툼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전쟁에 대한 고찰이 대단했던 작가 같아요. 최근 톨스토이 읽다가 제발트 생각했는데 반가운 글^-^

레삭매냐 2018-02-02 13:06   좋아요 1 | URL
그 유명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아직
읽어 보지 못해서 제발트의 책과 비교를 못하겠네요 :>

전쟁 자체 뿐만 아니라 전후 비겁했던 독일 지식인들을
꾸짖는 그런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덟 개의 산
파올로 코녜티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이탈리아 출신 산사람 파올로 코녜티의 책 <여덟 개의 산>을 읽으면서 나는 작년에 읽었던 에리 데 루카의 <나비의 무게>와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이 연상됐다. 비록 도시 소년이었지만 산에서 자란 피에트로(베리오) 과스티가 어떻게 산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산에서 만난 평생 지기 브루노와의 우정을 쌓아 가게 되었는지 자신도 산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 파올로 코녜티는 자전적 소설 <여덟 개의 산>을 통해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산에는 국경이 없던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몬테로사 산이 어디 있나 싶어 찾아보았더니 스위스에 있더라.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그라나를 찾은 과스티 가족은 그야말로 그림 같은 이탈리아 알프스의 풍경에 대만족한다. 토리노를 거점으로 해서 사는 도시 사람들이지만, 돌로미티에서 만나 결혼에 골인한 피에트로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고작 일 년에 한 번 뒷동산에 올라갈까 말까하는 우리네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까. 화학자 출신 아버지는 사물에 원체부터 관심이 많았고, 꼬마 아들을 데리고 아들이 고산병에 시달리는지도 모른 채 자부심만으로 눈덮인 산에 오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런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런 아버지와 달리 사람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는 피에트로가 산에서 새로 사귄 친구 브루노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는다. 산에서 나고 자라 산 밖에 모르는 철부지 소년에게 글을 알려 주고, 더 나은 학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브루노의 부모를 설득한다. 심지어 브루노를 도시로 데려가 상위 학교 진학을 책임지겠다고 한다. 이런 부모를 보면서 소년 피에트로는 브루노를 임시 산에서 지낼 때만 만나는 친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신의 이기심을 깨닫기도 한다.

 

호시절은 금세 지나가고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된 피에트로와 브루노. 계속해서 산에서 지내며 벽돌공이 된 브루노는 산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반면, 도시에 나간 피에트로는 이런저런 일들을 하며 지내는 떠돌이 생활에 투신한다. 그러다 아버지가 조반니가 심장병으로 돌아가시고 자신에게 남겨둔 조그마한 자투리 폐허에 브루노와 합심해서 작은 집을 짓기 시작한다. 산과 브루노와의 우정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두 지기는 산위에 집짓기라는 고된 노동을 통해 지나간 시간들을 극복하고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

 

역마살이 낀 피에트로는 브루노처럼 한 곳에 지긋하게 정착하지 못하고 세계를 주유한다. 멀리 히말라야가 있는 네팔까지 가서 서구 등산객들을 위해 산 닭을 지고 산을 오르는 현지인에게 “여덟 개의 산”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산에서 젖소를 길러 순수한 토마 치즈를 만들겠다는 꿈에 젖은 친구 브루노에게 들려준다. 하지만 브루노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은행 대출을 하는 순간, 어쩌면 그의 꿈은 사악한 금융권에 저당잡힌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를 엄습한 경제 위기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한때 피에트로의 여자친구였던 라라 사이에서 사랑스러운 딸 아니타를 낳기도 하지만, 산사람 브루노에는 몰라도 잠시 산에 살고 싶다는 낭만적 생각을 가지고 입산한 라라에게는 아무래도 무리였으리라.

 

사실 파올로 코녜티의 산사람 이야기에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그런 극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만 그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 일상의 공간이 아닌 산이라는 점, 사람마다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요소가 담긴 꿈을 문학적 형상화하고 나름의 이해와 상호 간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초반에 무척이나 재밌게 읽기 시작했는데, 중반에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난데없이 등장한 히말라야 이야기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슬로 리딩으로 전환되는 느낌이 들었다.

 

#파올로코녜티#여덟개의산#몬테로사#토마치즈#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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