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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신년 목표 중의 하나로 삼은 제발트 전작읽기 그 두 번째 기록이다. 정말 오래 전에 만났던 <토성의 고리>를 다시 읽었다. 처음은 언제나 그렇듯 어려운 법이다. <토성의 고리>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제발트의 책이었는데, 다시 읽어도 이렇게 생소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독일 출신으로 영국에서 생을 마친 이방인의 기묘한 스타일에 대한 적응을 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그의 책을 읽었어도 평소와 달리 리뷰로 남기지 못한 것이 상당수다. 그래서 무술년에는 그의 책들을 다시 읽어 가면서 쓰지 못한 리뷰도 쓰고, 나에게는 마의 산과도 같은 <아우스터리츠>도 반드시 읽겠노라고 다짐하는 바이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모호한 제발트 스타일이 여전히 쉽지 않았다고 고백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 그 중에서도 서퍽 지방을 도보여행한 저자가 온 몸이 마비되는 증상으로 병원에 누워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소설 <토성의 고리>의 핵심이다. 서퍽 카운티를 여행하면서 저자는 정말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의사 토머스 브라운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해서, 계몽시대 인체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 시체해부에 나선 네덜란드 의사들에 대한 관찰은 기본이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들려주는 제발트의 박학다식한 내러티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문득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여행한 것으로 보이는 서퍽 지방의 단조로운 경관에 대한 관찰 보고에서는 조금씩 지루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법, 저자는 아무런 주제 의식이나 이유 없이 독자들을 인도하지 않는다. 그의 다른 작품인 <공중전과 문학>에도 등장하는 영국에서 발진한 폭격기 편대의 독일 대도시 폭격에 대한 공중전(dog fight) 에피소드 그리고 한때 대단한 산업이었지만 이제는 사양산업이 된 청어잡이에 얽힌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절정기였던 시절에 해마다 무려 육백억 마리나 되는 청어들이 대서양 바다에서 잡혔다고 하니 그저 놀랄 따름이다. 그래서 지금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비린 청어를 국민음식처럼 잘 먹어대는 걸까.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미국에서 주문하는 피자의 앤초비 토핑처럼 나한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지만 말이다.
한때 대선후보로 각광을 받았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선배였던 오스트리아 대통령 출신 쿠르트 발트하임의 행적에 대해서도 꼼꼼한 저술가는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빈 출신의 유능한 행정장교였던 발트하임은 티토의 게릴라 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코차라 전선에서 민간인들을 강제이주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로 크로아티아 괴뢰정부의 수반 안테 파벨리치에게 훈장도 받았다고 하지 않던가. 후배는 비록 대선 도전에 실패했지만, 선배 사무총장은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각국으로부터 자신의 화려한 과거 경력을 이유로 푸대접받는 수모를 견뎌야 했다.
노벨상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선생의 소설에도 등장하는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로저 케이스먼트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에 앞서 폴란드 출신으로 <암흑의 핵심>을 발표한 조셉 콘래드는 꿈에 그리던 선장이 되어 콩고 여행에 나서게 된다. 당시 레오폴드 국왕의 사유지이자 식민지였던 벨기에령 콩고에서 진보의 세기를 완수하겠다는 미명 아래, ‘십자군의 기획’이라며 자행되는 갖가지 악행을 직접 목격한 지식인 콘래드는 몸과 마음이 병들게 되었다고 제발트는 썼다. 케이스먼트는 좀 더 신랄하게 흑인을 상대로 한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악랄한 착취를 서구 사회에 폭로했다. 훗날 로저 케이스먼트는 영국의 적국이었던 독일과 협력해 가면서까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결국 영국정부에 의해 국가반역죄로 사형당하고, 그가 남긴 동성애 연대기가 폭로되기에 이르렀다. 각 시대를 뛰어 넘는 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리포트 덕분에 그들의 삶을 인터넷을 통해 더 살펴보는 기회도 가졌다. 아무래도 제발트가 한정된 지면에서 다루기에는 방대한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을 달리던 이야기는 다시 동양으로 넘어간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중국 침탈로 시작된 이야기는 청나라 내부에서 벌어진 태평천국의 난 시절에 개입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청나라 황제의 이궁이었던 원명원을 방화하고 약탈한 사건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는다. 이것을 단순하게 동양과 서양 문명의 충돌로 봐야 할까. 산업혁명으로 축적된 무한대의 이윤 추구를 위한 자본의 전세계화는 선교사(종교)와 군대(무력)를 앞세운 제국주의의 형태로 진행됐다. 신자유주의의 비극은 어쩌면 이 시절에 이미 잉태된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인류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었던 아편전쟁 이래, 고대 페르시아 제국 이래 서양세계를 압도했던 동양 문화권 몰락의 단초가 되었던 시절을 유려하게 저술해낸 저자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경탄을 마지않게 된다.
그 외에도 동부해안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가장 위태로웠던 1940년 5월 독일 베어마흐트의 상륙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한 <싱글 스트리트> 프로젝트가 가동되었다는 음모론도 흥미롭다. 위대한 덩케르크 철수작전(사실 볼썽 사납게 유럽대륙에서 패퇴한 것이 사실이다)으로 훗날 전세 역전을 위한 반격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자그마치 30만 명 이상의 정예병이 덩케르크에서 막강한 나치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현실 앞에서 영국은 독일군의 상륙을 막아낼 능력이 전무했다. 저자가 직접 찾은 영국 동부 오포드니스에는 신경가스 혹은 대량살상무기들이 배치되었으며, 영국공병대원들이 모종의 작전을 수행하다가 전몰했다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이 난무했다고 한다. 윈스턴 처칠의 외로운 투쟁을 그린 <다키스트 아워>에서 위 내용을 잘 다루고 있다니 하니, 기회가 되면 한 번 봐야지 싶다.
프리드리히 횔덜린과 파울 첼란 같이 저명한 독일 작가들의 글을 영어로 번역한 선배 이민자 마이클 햄버거의 경우도 주목할 만하다. 제발트의 글들을 영어로 소개하기도 한 마이클 햄버거는 베를린 유대 가정 출신으로 제발트보다 한 세대 전에 이미 영국에 자리를 잡았다. 도버 세관에서 햄버거 집안 사람들이 잉꼬 두 마리를 압수당했다는 에피소드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국에서라도 별 문제가 되지도 않을 일들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가능하지 않더라는 그런 절망적 상황에 대한 단적인 예라고 해야 할까. 제발트가 구성한 사진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집안에 가득 쌓인 원고뭉치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프랑스혁명 이후 대륙을 제패한 나폴레옹에 맞섰던 지식인 샤또브리앙 자작이 경험한 로맨스의 재구성을 자신의 도보여행 도중에 뽑아내는 신공을 펼치기도 한다. 도대체 어디까지나 진짜 자신의 체험이고, 가공한 소설인지 궁금했지만 이제 그의 스타일을 알게 되니 그게 무슨 대수냐하게 되었다. 어쩌면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내가 두 번이나 <아우스터리츠> 읽기에 나섰다가 실패한 이유가 아닐까. 제발트에게는 무엇이 픽션이고 아닌지 그리고 내러티브도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자신이 접한 모든 것들이 분석의 대상이었고 텍스트의 소재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런 그의 스타일과 서사를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리뷰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작품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게 나로서는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니 그가 남긴 책들을 되새김질하듯이 읽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