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신년 목표 중의 하나로 삼은 제발트 전작읽기 그 두 번째 기록이다. 정말 오래 전에 만났던 <토성의 고리>를 다시 읽었다. 처음은 언제나 그렇듯 어려운 법이다. <토성의 고리>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제발트의 책이었는데, 다시 읽어도 이렇게 생소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독일 출신으로 영국에서 생을 마친 이방인의 기묘한 스타일에 대한 적응을 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그의 책을 읽었어도 평소와 달리 리뷰로 남기지 못한 것이 상당수다. 그래서 무술년에는 그의 책들을 다시 읽어 가면서 쓰지 못한 리뷰도 쓰고, 나에게는 마의 산과도 같은 <아우스터리츠>도 반드시 읽겠노라고 다짐하는 바이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모호한 제발트 스타일이 여전히 쉽지 않았다고 고백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 그 중에서도 서퍽 지방을 도보여행한 저자가 온 몸이 마비되는 증상으로 병원에 누워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소설 <토성의 고리>의 핵심이다. 서퍽 카운티를 여행하면서 저자는 정말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의사 토머스 브라운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해서, 계몽시대 인체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 시체해부에 나선 네덜란드 의사들에 대한 관찰은 기본이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들려주는 제발트의 박학다식한 내러티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문득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여행한 것으로 보이는 서퍽 지방의 단조로운 경관에 대한 관찰 보고에서는 조금씩 지루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법, 저자는 아무런 주제 의식이나 이유 없이 독자들을 인도하지 않는다. 그의 다른 작품인 <공중전과 문학>에도 등장하는 영국에서 발진한 폭격기 편대의 독일 대도시 폭격에 대한 공중전(dog fight) 에피소드 그리고 한때 대단한 산업이었지만 이제는 사양산업이 된 청어잡이에 얽힌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절정기였던 시절에 해마다 무려 육백억 마리나 되는 청어들이 대서양 바다에서 잡혔다고 하니 그저 놀랄 따름이다. 그래서 지금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비린 청어를 국민음식처럼 잘 먹어대는 걸까.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미국에서 주문하는 피자의 앤초비 토핑처럼 나한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지만 말이다.

 

한때 대선후보로 각광을 받았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선배였던 오스트리아 대통령 출신 쿠르트 발트하임의 행적에 대해서도 꼼꼼한 저술가는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빈 출신의 유능한 행정장교였던 발트하임은 티토의 게릴라 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코차라 전선에서 민간인들을 강제이주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로 크로아티아 괴뢰정부의 수반 안테 파벨리치에게 훈장도 받았다고 하지 않던가. 후배는 비록 대선 도전에 실패했지만, 선배 사무총장은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각국으로부터 자신의 화려한 과거 경력을 이유로 푸대접받는 수모를 견뎌야 했다.

 

노벨상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선생의 소설에도 등장하는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로저 케이스먼트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에 앞서 폴란드 출신으로 <암흑의 핵심>을 발표한 조셉 콘래드는 꿈에 그리던 선장이 되어 콩고 여행에 나서게 된다. 당시 레오폴드 국왕의 사유지이자 식민지였던 벨기에령 콩고에서 진보의 세기를 완수하겠다는 미명 아래, ‘십자군의 기획이라며 자행되는 갖가지 악행을 직접 목격한 지식인 콘래드는 몸과 마음이 병들게 되었다고 제발트는 썼다. 케이스먼트는 좀 더 신랄하게 흑인을 상대로 한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악랄한 착취를 서구 사회에 폭로했다. 훗날 로저 케이스먼트는 영국의 적국이었던 독일과 협력해 가면서까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결국 영국정부에 의해 국가반역죄로 사형당하고, 그가 남긴 동성애 연대기가 폭로되기에 이르렀다. 각 시대를 뛰어 넘는 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리포트 덕분에 그들의 삶을 인터넷을 통해 더 살펴보는 기회도 가졌다. 아무래도 제발트가 한정된 지면에서 다루기에는 방대한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을 달리던 이야기는 다시 동양으로 넘어간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중국 침탈로 시작된 이야기는 청나라 내부에서 벌어진 태평천국의 난 시절에 개입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청나라 황제의 이궁이었던 원명원을 방화하고 약탈한 사건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는다. 이것을 단순하게 동양과 서양 문명의 충돌로 봐야 할까. 산업혁명으로 축적된 무한대의 이윤 추구를 위한 자본의 전세계화는 선교사(종교)와 군대(무력)를 앞세운 제국주의의 형태로 진행됐다. 신자유주의의 비극은 어쩌면 이 시절에 이미 잉태된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인류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었던 아편전쟁 이래, 고대 페르시아 제국 이래 서양세계를 압도했던 동양 문화권 몰락의 단초가 되었던 시절을 유려하게 저술해낸 저자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경탄을 마지않게 된다.

 

그 외에도 동부해안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가장 위태로웠던 19405월 독일 베어마흐트의 상륙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한 <싱글 스트리트> 프로젝트가 가동되었다는 음모론도 흥미롭다. 위대한 덩케르크 철수작전(사실 볼썽 사납게 유럽대륙에서 패퇴한 것이 사실이다)으로 훗날 전세 역전을 위한 반격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자그마치 30만 명 이상의 정예병이 덩케르크에서 막강한 나치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현실 앞에서 영국은 독일군의 상륙을 막아낼 능력이 전무했다. 저자가 직접 찾은 영국 동부 오포드니스에는 신경가스 혹은 대량살상무기들이 배치되었으며, 영국공병대원들이 모종의 작전을 수행하다가 전몰했다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이 난무했다고 한다. 윈스턴 처칠의 외로운 투쟁을 그린 <다키스트 아워>에서 위 내용을 잘 다루고 있다니 하니, 기회가 되면 한 번 봐야지 싶다.

 

프리드리히 횔덜린과 파울 첼란 같이 저명한 독일 작가들의 글을 영어로 번역한 선배 이민자 마이클 햄버거의 경우도 주목할 만하다. 제발트의 글들을 영어로 소개하기도 한 마이클 햄버거는 베를린 유대 가정 출신으로 제발트보다 한 세대 전에 이미 영국에 자리를 잡았다. 도버 세관에서 햄버거 집안 사람들이 잉꼬 두 마리를 압수당했다는 에피소드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국에서라도 별 문제가 되지도 않을 일들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가능하지 않더라는 그런 절망적 상황에 대한 단적인 예라고 해야 할까. 제발트가 구성한 사진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집안에 가득 쌓인 원고뭉치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프랑스혁명 이후 대륙을 제패한 나폴레옹에 맞섰던 지식인 샤또브리앙 자작이 경험한 로맨스의 재구성을 자신의 도보여행 도중에 뽑아내는 신공을 펼치기도 한다. 도대체 어디까지나 진짜 자신의 체험이고, 가공한 소설인지 궁금했지만 이제 그의 스타일을 알게 되니 그게 무슨 대수냐하게 되었다. 어쩌면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내가 두 번이나 <아우스터리츠> 읽기에 나섰다가 실패한 이유가 아닐까. 제발트에게는 무엇이 픽션이고 아닌지 그리고 내러티브도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자신이 접한 모든 것들이 분석의 대상이었고 텍스트의 소재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런 그의 스타일과 서사를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리뷰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작품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게 나로서는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니 그가 남긴 책들을 되새김질하듯이 읽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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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나소스 이동서점
크리스토퍼 몰리 지음, 김인수 옮김 / 마인드큐브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에 발표된 크리스토퍼 몰리 씨의 <파르나소소 이동서점>을 읽었다. 분량이 생각보다 적고 내용도 무척 재밌어서 주말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내친 김에 후속작인 <유령서점>도 읽기 시작했다. 좋은 책과의 만남, 언제나 대환영이다.

 

배경은 20세기 초반, 크리스토퍼 몰리의 첫 번째 소설 <파르나소스 이동서점>은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에 살던 헬렌 맥길 양(무려 39살!)의 모험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녀의 열 살 많은 오빠 앤드루 맥길은 귀향해서 농사를 짓다가 발표한 소설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오빠를 따라 귀향해서 지난 15년 동안 자그마치 육천 덩이의 빵을 구으며 오빠를 보필한 헬렌 양에게 일생일대의 모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페가소스가 끄는 “파르나소소 이동서점”을 단돈 400달러(!!!)에 인수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포드 자동차를 사겠노라고 고이 모아온 돈을 오빠에게 더 이상 헛된 망상을 안겨 주지 않겠다는 일념 하에 구입하기에 이른다.

 

붉은 수염의 대머리 로저 미플린 교수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오락거리라고 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담긴 책들을 도심에 사는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책을 접할 수 없는 벽촌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책을 컨설팅해주는 독서 치료사 같은 역할을 하며 살고 있다. 오랜 방랑 생활에 지친 그는 책 좋아하기로 소문난 앤드루 맥길에게 이동서점을 통째로 맡기고 석양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는 브루클린으로 돌아가서 책을 집필할 계획이다.

 

가정교사로 일하며 한때 꿈꾸는 덩치 큰 처녀였던 헬렌 양과 대머리 신사 미플린 씨의 기묘한 조합은 의외로 신선한 재미를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물론 그 둘 사이에 며칠 사이에 싹트는 로맨스도 한 몫 단단히 한다. 수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자기 것으로 체화시킨 미플린 씨는 어떤 상황, 그 누구에게라도 책을 소개하고 팔 수 있는 뛰어난 독서 행상인으로서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정말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의 하나는 셰익스피어를 읽고 싶어하는 독자에게 아직 그 수준이 되지 않았다며 뜯어 말리는 시퀀스였다.

 

자신의 부엌데기 헬렌의 도주 사실을 알게 된 오빠 앤드루는 그들을 찾아 나서고, 자기 여동생을 꼬드겨 사기쳤다고 생각한 나머지 미플린 씨와 주먹다짐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다. 한편, 홀로 이동서점을 이끌고 15년 만에 책판매 여행에 나선 헬렌 양도 부랑자들에게 마차를 탈취당할 뻔 하지만 시기적절하게 등장한 미플린 씨의 도움으로 책마차도 되찾고, 서로에 대한 사랑도 확인하게 되더라는 뭐 그런 식의 전개가 이어진다.

 

아마 <파르나소소 이동서점>이 줄창 책 이야기만 늘어놓았다면,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리라.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크리스토퍼 몰리는 우리네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책과 이동서점이라는 우리에게는 정말 생소한 소재를 가지고 흥미롭고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문득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21세기에도 책마차라는 컨셉트가 먹힐까라고. 볼티모어 같은 도시에서는 지금도 마차에 과일을 싣고 다니면서 파는 행상이 있다고 하는데 책이라고 안될까.

 

얼마 전, 도서정가제에 대한 온라인 토론을 기사로 접한 적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책의 가격이 저렴하며, 최소한 50%는 올려야 한다는 주장에 기겁했다. 토론을 주도하는 이들이 어디까지나 출판업자들이다 보니 너무나 그들 입장만 외치는 게 아닐까. 왜 우리 저렴한 책과 계속해서 만나고 싶은 독자들의 의견은 아예 무시되는 걸까? 책의 가격 산정에는 마케팅 비용이 상당 부분 차지한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로저 미플린 씨처럼 책마차를 끌고 다니면서 서적 소비자와 만나는 대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마케팅 방식이 소품종소량생산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걸까. 물론 로저 미플린 교수 시절의 책보다 더 재미있는 아이템들이 많다는 점도 무시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을 책 읽게 만들 순 없으니, 책사는 이들에게 더 뜯어내자는 식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시대를 뛰어 넘는 책의 가치에 대한 크리스토퍼 몰리 씨의 생각이 담긴 소설 <파르나소스 이동서점>은 훌륭했다. 책들이 꼴랑 몇 장의 종이와 몇 그램의 잉크로만 구성된 건 아니니까 말이다. 다만 그 가치를 어떻게 매기느냐는 여전히 논쟁 중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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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01-29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멋. 저도 어제 이 책 읽었는데! (방가방가)

레삭매냐 2018-01-29 10:15   좋아요 0 | URL
사서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도서관에 가서 빌려다 읽었는데 너무 금세
읽었어요.

내친 김에 <유령서점>도 달리고 있습니다.
 
기호의 제국 산책자 에쎄 시리즈 1
롤랑 바르트 지음, 김주환.한은경 옮김, 정화열 해설 / 산책자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정말 아주 오래 전에 롤랑 바르트의 <이미지-뮤직-텍스트> 교재를 영어로 만난 적이 있었다. 지금 한글로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기호학의 대가가 쓴 글을 영어로 읽겠다니. 무모한 도전이었다. 단순히 읽었다는 것이지, 이해와는 거리가 먼 무식자의 독서였다. 그리고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 일본 문화를 기호로 분석한 <기호의 제국>을 만났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이번에도 그 때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이제 절판돼서 구할 수도 없는 책을(그나마 분량이 적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읽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싶다.

 

동양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서구인이 언어도 모른 채, 중국 일본 혹은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세계 공통적인 감각이라고 할 수 있는 순전한 기호로만 여행을 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과잉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과잉생산은 기본이고, 의미와 언어도 차고 넘칠 지경이다. 기호를 구축하는 기표와 기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박학다식한 서구인 롤랑 바르트는 일본을 기호라는 틀을 통해 분석을 시도한다. 같은 동양권 문화에 속한 나조차도 관심이 없는 하이쿠와 분라쿠 같은 장르에 이렇게 많은 의이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만으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니, 바르트는 기호학자가 아니라 선을 깨달은 서구의 고승 같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그에게는 교토 니조조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긴 하지만 시시해 보이는 창틀조차도 몇 시간은 떠들어 댈 수 있는 기표로 겹겹이 둘러쌓인 기의들의 집합일지도 모르겠다. 색즉시공을 분석해내는 시도를 보라. 알듯 모를 듯한 선문답으로 무장한 선사들의 그것을 뛰어넘는 명쾌해 보이는 서구 지식인의 설명에 왠지 모르게 불신이 솟아나면서도 동시에 어쩌면 그게 진리일지도 모르겠더라는 회의가 들지 않는가.

 

우리에겐 대수롭지 않은 덴푸라마저도 바르트에게는 오묘한 기의로 포장된 무언가가 아닐까 싶다. 이 대가에게 생선회인 사시미를 분석해 보라고 하면 어떤 해석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생물에서 무생물로 전이한 사물인 사시미의 안과 밖이 모두 담겨 있다고 할까? 산 채로 물속에서 떠내져서 서늘한 회칼이 자신의 몸에서 살과 뼈를 발라내는 그야말로 유체이탈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자신의 살을 노리는 미식가들의 입 안에서 녹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정말 흥미진진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바르트 정도 되는 기호학자라면 한 점의 사시미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요즘 한창 즐겨하는 인스타그램에서 놀라운 실력으로 백화점 코너에서 선물을 포장하는 점원의 기술을 본 적이 있다. 혼네와 다테마에의 개념이 그대로 들어있는 포장 선물이야말로 어쩌면 일본 사람들의 본질을 보여주는 그런 게 아닐까. 알맹이만 마음에 든다면 포장이 뭐 대수인가 싶지만, 또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포장이 화려할수록 반대급부로 실속은 없다는 리얼리티의 클리셰이가 개입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또 역으로 실제가 대단한 물건이기 때문에 그만큼 포장에 정성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공식도 성립하지 않을까. 서구인들에게 낯선 “절하는 풍습”도 사진으로 담아 분석을 시도할 정도로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상호간에 지키는 예를 넘어설 정도로 비굴해 보일 정도로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과정에서 그런 예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양화가 악화를 구축한다의 예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면제된 죽음의 예로 바르트가 든 러일전쟁 당시 뤼순 전투를 맡았던 노기 장군의 사진도 흥미롭다. 무언가 더 쓰고 싶지만, 할 말이 없다.

 

야호, 어쨌거나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책을 만나 사서 읽었다. 그것만으로도 난 대만족이다. 나중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재독에 들어갈 것이다. 지금처럼 급하게 씹어 먹듯이 읽지 않고 대신 아주 느린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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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구신문에 출판전문기자라는 이가 쓴 칼럼을 보고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은 한 마디로 다음과 같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지난 9년간 보수정권에서 벌어진 각종 해괴한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는 적폐 청산 작업이 피로하니 “이 모든 것을 끝내자”는 것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자신의 블로그 혹은 일기장에나 쓸 법한 이야기를 돈을 받고 칼럼으로까지 발표하는 놀라운 패기를 보여주었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다른 경우도 아닌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을 예로 들었다는 점이다. 분명 배운 분이실 텐데, 누가 그런 주장을 하는지 그런 엉터리 논거와 주장을 펴는 주체에 대해서는 쏙 빼놓고 말씀해 주시는 신공을 보여 주셨다. 아무래도 나는 일제와 독재권력을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찬양했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자사의 주장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당시 프랑스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과 그 독일에 부역했던 비시 괴뢰정부에 협력했던 꼴라보들의 만행에 대해서는 달랑 한 문단으로 압축해 버리고, 상대적으로 나치 독일의 패퇴 이후 당연한 수순으로 권력을 쟁취한 레지스탕스들이 재판도 없이(이게 핵심이다!) 다수의 꼴라보들을 약식 처형했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단 5년 동안의 꼴라보들의 부역 행위에 대해서도 프랑스는 9년 동안의 단죄를 단행했다. 나치 독일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1944년 여름, 권력의 진공상태에서 벌어진 민중의 복수를 저지할 공권력이 프랑스에 존재했던가.

글쓴이는 영악하게도 오로지 적폐 청산이 피로하니 이제 그만하자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자신의 전문 영역인 출판의 도움을 빌기에 이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질서로 이루어진 현대를 그린 이안 부루마의 저서 <0년>의 내용을 ‘부역 처벌이 상징적일 뿐 공정하지 않았다’로 퉁치는 패기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이 책에는 정말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는데, 자신의 논조를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취사선택해서 쓴 것이다. 왜 난민들의 비참한 실상에 분노한 미군 중위가 기관총을 동원해서 300명의 독일경비병들을 총살했다는 살벌한 이야기는 안했을까. 이안 부루마 교수의 책에는 당시 독일을 점령한 미군 중에는 나치친위대의 만행에 분노해서 난민들의 복수를 눈감아 주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나치 부역 청산에 대해서도 오로지 한쪽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부각시키는 신공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치 부역 청산에 적극 찬성한 레지스탕스 출신 작가 알베르 카뮈의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같은 명문은 애써 외면한 걸까. 바로 그 지점에 글쓴이의 저의가 숨어 있는 것이다. 우선 보수정권 9년 동안 일어난 국기문란 행위를 철저하게 파헤치고 엄하게 처벌해서 다시는 그런 국정농단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게 국가권력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닌가. 파면 팔수록 기가 막힌 블랙리스트, 특활비 수수정황, 국가권력의 사유화, 사법부에 맞춤 재판 주문을 한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도 망각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지면을 장식하는 마당에 적폐 청산을 이제 그만 하자는 저의가 궁금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에서 1953년 두 번째 사면법으로 과거사 청산 작업을 사실상 끝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해방 40년이 지난 뒤 레지스탕스 후예들이 대독항전 당시 자유프랑스군을 상징하는 장 물랭을 고문 살해한 ‘리옹의 도살자’ 게슈타포 클라우스 바르비를 남미에서 송환해서 4년간에 걸친 재판 준비 끝에 반인류죄로 종신형에 처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한 것인가. 이게 바로 프랑스식 적폐 청산의 모델이다. 혹시라도 그런 프랑스의 예를 따라 앞으로 40년 동안 적폐 청산에 나설 것을 주문하는 것이라면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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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5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5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현남 오빠에게 (어나더커버 특별판)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2주 전에 도서관에 다른 책을 빌리러 들렀다가 신간 코너에서 이 책을 보고 바로 빌렸다. 그 때 앤디 위어의 <아르테미스>도 빌렸는데 두 책 모두 재밌어서 만족했다. 흠, 잘 선택했군. 아 그리고 <현남 오빠에게>의 마지막 주자의 글도 화성 이주를 주제로 다룬 게 아니었던가. 어떤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군.

 

페미니즘 소설을 표방하는 7인의 작가들이 쓴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는 처음 세 편의 소설은 흥미로웠지만, 나머지 작가들의 소설들은 그닥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소설과 관계가 있나 싶었다. 손보미 작가의 <이방인>은 작가 특유의 스타일과 개성을 갖추긴 했지만, 전통적 서사에서는 좀 멀리 나가지 않았나 싶다. 솔직히 그냥 그랬다. 무언가 아싸라한 그런 결말을 기대했지만, 파트너의 희생으로 다시 경위로 복귀한다는 내용 정도 밖에는 잡아내지 못한 나의 무력함을 탓해야겠지.

 

구병모 작가의 히파티아의 끔찍한 최후를 결말에 도치한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에서는 작가의 전작 <빨간구두당>의 반복 변주가 아닌가 싶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일년에 하루 공식적인 폭력행사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의 영화 <퍼지>가 연상되기도 했다. 원래 서양에서 유래한 카니발의 사회적 기능이 그런 게 아니었던가. 인간의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긍정적 방향으로 유도하겠다는. 우리 사회에서도 할로윈 같이 상업적으로 순화된 이벤트를 따라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일부에 국한된 일이라 나의 관심 밖이다. 고립된 섬에 오천만원이라는 상금을 받기 위해 여장 남자 코스프레를 하고 참가했다가 인간사냥을 당한다는 끔찍한 악몽으로 끝나는 이야기에서는 딱 꼬집어서 뭐라할 수 없는 그런 기시감이 들었다.

 

막판에 ‘너랑 결혼하기 싫다고 이 강현남 이 개자식아’라는 선언으로 끝나는 표제작에 대해서는 읽는 동안 대충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나게 될지 빤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나는 텔레비전에서 이미 충분히 막장드마라의 얼개와 전개양식을 충분히 습득했고,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사건사고가 연달아 벌어지는 드마라공화국에서 다년 동안 산 경험의 산물인 모양이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는 왜 십년 동안 그 지긋지긋한 현남오빠에게 매달려 살았을까. 자신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청춘을 그지 같은 개자식에게 투자했는지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 그것에 사랑이라는 레테르를 붙여야 하나 싶다. 그랬다면 그 개자식은 너무 뻔뻔하고 양심도 없는 놈이라고 매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세상에 어째 그런 일이! 이야기에서 가장 놀란 지점은 바로 화자가 개자식의 감시에서 탈출해서 감행한 일탈이 고작 영화관 침투였는데, 얼마 뒤 그 개자식이 바로 자기 옆에 가만 앉더라는 진술이었다. 나라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런 개자식과 결별했을 텐데. 도대체 그 누가 타인의 삶을 구속하고 결정할 권리가 그 개자식에게 주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열불이 나네 이거. 늦게라도 개자식으로부터 탈출해서 자신의 살게 된 이에게 박수를. 그나저나 제목을 왜 <노모어 굿바이 개자식아>라고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표제작의 제목으로는 너무 쎄서 그랬을까.

 

<쇼코의 미소>라는 단편집으로 기대를 모은 최은영 작가의 <당신의 평화>도 재밌게 읽었다. 남편과 결혼한 게 아니라 남편과 부부생활을 하는 시어머니의 몸종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화자 유진의 어머니 정순. 이제 아들 준호의 며느리를 보게 된 정순은 고깝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해마다 외식하던 남편 생일날 굳이 자신이 직접 상을 차리겠다고 하면서 사단이 벌어진다. 아 왜 난 이렇게 갈등이 폭발하는 순간들이 그렇게 반가운지 모르겠다. 하긴 모든 것이 준비된 마당에 아무 일도 없이 그냥 넘어가면 섭섭하겠지 안그래? 이렇게 겉으로는 보기 좋은 날, 누군가 나서서 밥상 정도는 가볍게 뒤집어엎어 주어야 썰이 풀릴 테니까. 우리 선수끼리 왜 그래.

 

시대가 바뀌면 사람도 바뀌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사람의 전형을 유진의 엄마 정순은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니 절로 한숨이 날 수밖에. 세태에 빠른 준호는 이미 미래의 잘난 와이프 유학생 출신 박사님 선영에게 투항했고, 대세는 이미 끝났는데 홀로 격투장에서 부엌칼과 도마로 무장한 정순만이 외롭게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그런 형세였으니, 그런 엄마의 곁을 떠나 행복한 미래를 꾸릴 유진에게 다시 한 번 박수를.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고 충격적으로 만난 작품은 바로 김이설 작가의 <경년>이었다. 모범생 아들 세훈과 아이돌에 빠진 딸 세은을 둔 중년 부인이 주인공이다. 문제는 모범생 세훈이 사랑도 없이 또래 아이들과 섹스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사실이다. 아니 겨우 중학교 2학년 짜리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학업이 주는 스트레스 해소로 섹스를 한다니! 그야말로 놀랄 노자가 아닐 수 없었다. 요즘 세태가 그런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더욱 놀라운 건 그나마 양심이 남아 있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두둔하면서 상대 여자들을 비난하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딸에게 적용시켜 보라는 말에는 끔찍하다며 일갈하는 모습은 이중성 그 자체였다. 아들은 괜찮고, 자신의 귀한 딸은 안된다라는 그야말로 희극을 보는 듯한 가부장제에 몰입된 그의 모습이 성공신화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전사 부모들의 모습에 연상됐다. 세훈 엄마는 그나마 자신의 아들이 미래에 내달릴 성공가도에서 이런 스캔들이 빚어낼 비극의 전주곡을 예감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페미니즘 소설집을 표방하는 <현남 오빠에게>를 읽으면서 왜 이렇게 자꾸만 다른 영화들이 무시로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어떤 장면에서는 <블레이드 러너>의 고독한 레플리컨트 사냥꾼 데커드가 떠오르기도 했고, 화성에 가서 삼시세끼를 마련하는 맷 데이먼이 연상되기도 했다. 첫 세 작품에서는 늘상 우리 소위 막장드라마 혹은 예능을 가장한 리얼리티 쑈가 떠올랐다. 결론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고나 할까. 서사보다 스타일에 집착하는 모호한 소설에서는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앞세운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하니 무언가 공통적인 게 있지 않을까 하고 억지로 이음새를 맞춰 보려고 해도 별무소용이더라. 그냥 각각의 이야기들을 즐기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그래서 더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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