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카멜레온 -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작 책고래마을 21
이은선 글.그림 / 책고래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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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꼬맹이를 데리고 갔던 작은 미니동물원에서 난생 처음으로 카멜레온을 봤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보호색으로 위장 중이어서 그런지 한참을 본 다음에야 비로소 카멜레온을 찾을 수가 있었다. 물론 사육사 양반은 바로 어디에 있는지 알겠다고 하셨고. 책고래에서 나온 <까만 카멜레온>으로 오늘 재회할 수가 있었다.

 

카멜레온은 뱀목 카멜레온과 도마뱀류의 동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등지에 서식한다고 한다. 말로만 들었지 어디에 사는지 그리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네이버의 도움을 받아 검색해 봤다. 내친 김에 진짜 카멜레온의 습성을 알고 싶어서 유투브의 도움을 요청했다.

 


카멜레온의 색깔은 기본적으로 초록색이고, 빨강-오렌지-노랑 그리고 파란색으로 계속해서 색깔을 바꾸는데 색고의 축적이나 분산이 아니라, 피부 세포 밑에 있는 존재하는 크리스털의 구조 변화로 반사되는 빛의 파장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고 복잡해라.

 

암튼 다시 책고래 동화 <까만 카멜레온>으로 돌아가 난생(혹은 태생)으로 알려진 대로 알을 깨고 나온 6마리의 카멜레온들이 주인공이다. 나머지 까만 카멜레온의 다른 형제들은 모두 노랑, 빨강, 파랑, 그린 그리고 오렌지색인데 이 녀석만 별종인가 보다. 다른 녀석들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피부 세포 밑의 크리스털이 제대로 작동을 해서 주변 환경색에 맞춰 보호색깔을 맞추는데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까만 카멜레온”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크리스털리 작동을 하지 못해 까만색으로 남아 있다.

 


동영상으로 본 카멜레온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느렸다. 색깔 바꾸기는 그렇게 우연하게 잘하는데 움직임은 나무늘보 저리가라할 정도였다. 녀석들은 주로 낮에 활동한다고 하는데, 주인공 까만 카멜레온은 낮보다는 자신의 보호색이라고 할 수 있는 어둠이 내린 저녁 무렵에 더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관용의 자세로 바라보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나와 다른 것이 나쁜 것이 아닌데 외모나 사고가 나와는 다른 이유로 차별을 일삼는다. 최근 그런 차별을 딛고, 다름을 바탕으로 활발한 모델 활동을 하는 한현민의 경우가 떠올랐다.

 

아, 그리고 잊지 말고 꼭 5분 27초짜리 오디오 꿈북도 들어 보시라. 책을 동화구연으로 만든 오디오 파일 너무 좋더라. 작은 데도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책고래 출판사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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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과 문학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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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만에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책이 출간되기 전에 내가 모니터링을 한 책이기 때문이다. 보통 말미에 모니터링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는데, 지금 들춰보니 내 이름이 빠져 있더라. 이유는 너무 오래 돼서 잘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넣어 달라고 말해야 하나. 5년 전 일을 헤집어서 그러기엔 너무 귀찮네 그래.

 

나의 제발트 읽기 프로젝트 네 번째 책으로 <공중전과 문학>을 골랐다. 모니터링하고 받은 책이 분명 어디 있을텐데, 집안을 모두 뒤져도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왜 내가 읽고 싶은 책은 읽고 싶을 때 나타나지 않는 걸까. <토성의 고리>도 사서 다 읽고 나니 어디선가 불쑥 등장하더라만.

 

제발트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을 상대로 한 연합군, 특히 영국 공군의 지역폭격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된 대규모 공중 폭격전의 부당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영국이 실시한 대규모 폭격은 전쟁을 조속하게 끝내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다,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전쟁을 수행 중이던 독일 시민들의 사기를 꺾기 위한 선전전에 해당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게다가 실제적으로 그렇게 막대한 전쟁 비용과 인원(폭격수 60/100명 꼴로 사망)을 동원해서 실시한 공중전이 독일 시민들의 전쟁의지를 꺾지도, 산업 생산 피해도 미미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영국군이 정말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면, 나치의 유능한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가 지적한 대로 교통요충지나 정유시설, 연료설비, 볼베어링공장 같은 전쟁물자를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전략목표를 대상으로 정교하고 선별적인 폭격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 대륙에서 압도적인 독일군의 블리츠크리크(전격전)로 유례없는 패배를 기록한 영국군은 사실상 대항할 수단이 전무했다. 온갖 기괴한 작전 구상들이 나온 끝에 도출된 결론이 바로 공중전이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가용자원을 동원한 공중전이 사실상 적국에게 크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비싼 기회비용을 들여 생산한 엄청난 수량의 폭탄을 썩힐 수는 없었다. 그 결과 불행한 다수 독일 민간인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나치 독일의 프로파간다 전문가들이 선전한 대로 “가학적인 테러 공격”이나 “야만적인 깡패짓”이라는 문구들이 어쩌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1943년 7월 마지막 주에 수행된 고모라 작전에 목표였던 함부르크에서 벌어진 대규모 살상에 대한 기록들을 공개한다. 미국 제8공군의 지원을 받은 영국 공군은 연속적으로 1만 톤 달하는 화염폭탄과 파쇄폭탄의 비를 함부르크에 퍼부어댔고, 함부르크 시내를 강타한 화염 폭풍은 도시에 살던 인명과 유서 깊은 건축물들을 그야말로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서로 뒤엉켜 불타 버린 시신들에 대한 제발트의 서술은 너무 끔찍해서 차마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45쪽에 등장하는 사진이 고모라 작전이 만든 비극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발트는 비판의 화살을 다수의 독일 지식인들에게도 돌리고 있다. 전쟁 중에 저질러진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원죄 때문에 연합군이 실시한 부당한 폭격에 대해서도 전후 독일 지식인들을 비롯한 문학인들도 의도적으로 입을 다물고, 의식적 저지와 회피 혹은 외면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도 충분히 시대상황을 고려해서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침묵하는 다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폐허가 된 조국의 재건이었다. 승전국들의 점령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만한 발언들은 극도로 자제해야 한다는 자기검열이 작동한 것일까.

 

물론 우리에게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널리 알려진 하인리히 뵐(<천사는 침묵했다> 오래 전에 국내에 출간됐지만 절판된 상태다), 한스 에리히 노사크(<늦어도 11월에는> 문학동네), 헤르만 카자크, 아르노 슈미트, 페터 드 멘델스존(대부분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가들이다) 같은 소수의 양심적 작가들과 무명의 인사들이 남긴 기록이 있지만 너무나 빈약했고 산재되어 있었다고 저자는 저술한다. 한 마디로 말해 제 2의 과거 청산 작업 중에 모두에게 완전한 침묵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과 어쩌면 이렇게 딱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주류 수구언론들에서 연일 적폐청산에 대한 존재하지도 않는 피로감을 호소하며 지난 9년간의 악몽을 뒤로 하고, 미래로 달려 나가자는 주장과 꼭 맞아 떨어지는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침묵하는 다수는 미래에 벌어질 범죄의 공동정범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중전과 문학> 세 번째 장에서는 취리히 강연과 지면을 통해 제발트의 연합군 공중전에 관한 비판이 공개된 뒤 쏟아진 다양한 비난의 일부분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의 영국식 표현이 담긴 문장을 문제 삼은 어느 교장 선생님의 칭찬과 비난으로 범벅이 된 편지는 또 어떤가. 어디서나 지엽적인 문제들을 본래 어젠다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이탈해서 중점으로 삼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또 어떤 글들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서투르고 과민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도 했다. 저자는 문학가이면서 동시에 역사가를 능가하는 그런 철두철미한 역사가의 정신으로 자신이 접한 사료들을 대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다름슈타트에서 온 H박사의 글은 정말 구제불능의 황당무계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연합군의 지역폭격이 독일 민족을 말살시키려는 해외 유대인들의 음모론에서 비롯되었다는 해괴한 주장이다. 실제 나치 치하를 체험한 것도 아닌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한다는 점이 극히 우려스럽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수정주의적 역사관도 이런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은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정예 독일군들이 루프트바페의 공중폭격으로 4만 명이나 되는 무고한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을 살상됐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고모라 작전으로 폐허가 된 함부르크의 사진을 보고 환호작약하는 연합군 병사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 것처럼 내게는 들렸다.

 

책의 후반에 등장하는 문제적 인간, 알프레트 안더쉬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오로지 제발트의 비판에 의하면, 사상적으로는 극우파 선배 에른스트 윙거를 추종했고 문학적으로는 토마스 만을 뛰어 넘고 싶어했던 성공과 유명세를 쫓는 협잡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국내에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예전에 <잔지바르 또는 마지막 이유>라는 9개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 출간되었는데 구해 두기는 했으나 미처 읽어 보지는 못했다. 독일 '문학의 교황'이라고 불리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일찍이 그의 글에 대해 “거짓말과 키치의 밥맛 떨어지는 조합”이라는 혹평을 내렸다.

 

제발트의 분석에 따르면 원래 공산당 출신이었던 안더쉬는 몇 달 간의 강제수용소 생활을 거쳐 제국에 봉사하는 신실한 인간으로 개조되었다. 유대인 출신 부인과의 결혼도 제국문예부의 회원이 되기 위해 이혼으로 깔끔하게 마무리지었다. 베허마흐트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아르노 전선에서 1944년 6월 미군의 전쟁포로가 되어 미국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제발트는 안더쉬의 초기작부터 말년에 발표한 그의 주목할 만한 모든 작품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좌파에서 우파로, 다시 좌파로 재전향하며 오락가락하는 안더쉬의 삶을 관통하는 성공과 유명세를 향한 출세욕을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내가 읽어야 하는 제발트의 책들은 두 권이 남았다. 그 중의 하나인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된 <현기증. 감정들>은 이미 읽었지만 다음달에 다시 읽을 계획이다. 그나저나 문학동네에서 5년 전부터 제발트 선집으로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는 <캄포 산토>는 과연 언제나 출간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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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2-02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 소설 하면 대체로 톨스토이나 헤밍웨이 생각들 하지만 제발트를 안다면 순위 다툼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전쟁에 대한 고찰이 대단했던 작가 같아요. 최근 톨스토이 읽다가 제발트 생각했는데 반가운 글^-^

레삭매냐 2018-02-02 13:06   좋아요 1 | URL
그 유명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아직
읽어 보지 못해서 제발트의 책과 비교를 못하겠네요 :>

전쟁 자체 뿐만 아니라 전후 비겁했던 독일 지식인들을
꾸짖는 그런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덟 개의 산
파올로 코녜티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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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탈리아 출신 산사람 파올로 코녜티의 책 <여덟 개의 산>을 읽으면서 나는 작년에 읽었던 에리 데 루카의 <나비의 무게>와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이 연상됐다. 비록 도시 소년이었지만 산에서 자란 피에트로(베리오) 과스티가 어떻게 산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산에서 만난 평생 지기 브루노와의 우정을 쌓아 가게 되었는지 자신도 산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 파올로 코녜티는 자전적 소설 <여덟 개의 산>을 통해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산에는 국경이 없던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몬테로사 산이 어디 있나 싶어 찾아보았더니 스위스에 있더라.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그라나를 찾은 과스티 가족은 그야말로 그림 같은 이탈리아 알프스의 풍경에 대만족한다. 토리노를 거점으로 해서 사는 도시 사람들이지만, 돌로미티에서 만나 결혼에 골인한 피에트로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고작 일 년에 한 번 뒷동산에 올라갈까 말까하는 우리네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까. 화학자 출신 아버지는 사물에 원체부터 관심이 많았고, 꼬마 아들을 데리고 아들이 고산병에 시달리는지도 모른 채 자부심만으로 눈덮인 산에 오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런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런 아버지와 달리 사람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는 피에트로가 산에서 새로 사귄 친구 브루노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는다. 산에서 나고 자라 산 밖에 모르는 철부지 소년에게 글을 알려 주고, 더 나은 학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브루노의 부모를 설득한다. 심지어 브루노를 도시로 데려가 상위 학교 진학을 책임지겠다고 한다. 이런 부모를 보면서 소년 피에트로는 브루노를 임시 산에서 지낼 때만 만나는 친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신의 이기심을 깨닫기도 한다.

 

호시절은 금세 지나가고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된 피에트로와 브루노. 계속해서 산에서 지내며 벽돌공이 된 브루노는 산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반면, 도시에 나간 피에트로는 이런저런 일들을 하며 지내는 떠돌이 생활에 투신한다. 그러다 아버지가 조반니가 심장병으로 돌아가시고 자신에게 남겨둔 조그마한 자투리 폐허에 브루노와 합심해서 작은 집을 짓기 시작한다. 산과 브루노와의 우정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두 지기는 산위에 집짓기라는 고된 노동을 통해 지나간 시간들을 극복하고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

 

역마살이 낀 피에트로는 브루노처럼 한 곳에 지긋하게 정착하지 못하고 세계를 주유한다. 멀리 히말라야가 있는 네팔까지 가서 서구 등산객들을 위해 산 닭을 지고 산을 오르는 현지인에게 “여덟 개의 산”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산에서 젖소를 길러 순수한 토마 치즈를 만들겠다는 꿈에 젖은 친구 브루노에게 들려준다. 하지만 브루노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은행 대출을 하는 순간, 어쩌면 그의 꿈은 사악한 금융권에 저당잡힌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를 엄습한 경제 위기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한때 피에트로의 여자친구였던 라라 사이에서 사랑스러운 딸 아니타를 낳기도 하지만, 산사람 브루노에는 몰라도 잠시 산에 살고 싶다는 낭만적 생각을 가지고 입산한 라라에게는 아무래도 무리였으리라.

 

사실 파올로 코녜티의 산사람 이야기에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그런 극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만 그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 일상의 공간이 아닌 산이라는 점, 사람마다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요소가 담긴 꿈을 문학적 형상화하고 나름의 이해와 상호 간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초반에 무척이나 재밌게 읽기 시작했는데, 중반에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난데없이 등장한 히말라야 이야기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슬로 리딩으로 전환되는 느낌이 들었다.

 

#파올로코녜티#여덟개의산#몬테로사#토마치즈#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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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을유세계문학전집 1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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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아우스터리츠. 빈프리트 게오르크 제발트의 마지막 소설 <아우스터리츠>에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책도 두 번이나 샀다. 재작년 2월 첫 번째날에 중고서점에서 두 번째로 이 책을 사면서 직원 분에게 산 책인데 괜찮으시겠어요란 말도 들었다. 사서 바로 읽기 시작했지만 또 실패했다. 올해 제발트 전작 읽기를 도전하면서 세 번째로 도전했고 불과 하루만에 다 읽어 버렸다. 그 때와 도대체 뭐가 달랐던 거지? 그 땐 왜 완독하지 못했고 이번엔 이렇게 빨리 읽을 수가 있었을까. 아마 제발트를 읽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독서 근력이 필요한 모양이다. <이민자들>을 처음으로 그리고 <토성의 고리>를 다시 읽으면서 비로소 작가의 스타일을 꿰뚫을 수가 있었다. 그런 다음에 만난 <아우스터리츠>는 나에게 넘사벽이 아니었다.

 

1인칭 내레이터가 보고 들은 방식을 토대로 진행되는 <아우스터리츠>의 진짜 주인공은 바로 자크 아우스터리츠다. 어떻게 이름부터 동부 유럽 냄새가 나지 않는가. 혹자는 나폴레옹의 그랑 아미의 빛나는 격전장이었던 아우스테를리츠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아우스터리츠>는 여행과 과거의 기억을 헤집는 전형적인 제발트 스타일의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벨기에 답사여행에서 영국 출신의 건축사가 자크 아우스터리츠를 만나 그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우연이 거듭되면 필연이라고 했던가. 유럽을 주유하던 가운데 아우스터리츠와 다시 만나게 되고,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던 주인공은 화자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동시에 소설에서는 시간을 초월하는 건축물들을 연구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사람은 떠나가도 그들이 만들어낸 건축물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기 마련이다. 또 한편으로는 만남과 이별의 교차로라고 할 수 있는 기차역도 자주 등장한다. 화자인 나와 아우스터리츠가 처음으로 만난 곳이 아마 안트베르펜 기차역이었지 싶다. 새로운 세기 유럽(EU)의 중심이 된 벨기에 영토이자,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의 대륙군에 대항하는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 세력이 격돌했던 전장도 벨기에가 아니었던가. 저자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안트베르펜 대화가 화자와 주인공 사이에 소통의 물꼬를 튼 장소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빼어난 설정이었다.

 

영국 웨일스 지방 시골 발라라는 곳에서 선교사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아우스터리츠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여느 소년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병약했던 양어머니를 잃고, 양아버지마저 부인을 잃은 충격으로 잃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이 1938~1939년 사이에 나치 독일 히틀러 총통의 핍박을 피해 어린이 수송으로 영국으로 보내진 만여명에 달하는 유대인 아이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데이비드 일라이어스에서 자크 아우스터리츠라는 본명을 되찾게 된 소년은 격리라는 자신만의 면역 체계를 갖추고, 사고의 엄격한 자기검열 그리고 내적 갈등으로 심화된 지속적 거부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전개는 자못 진부해 보인다. 그렇다면 나의 진짜 부모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사나이가 밝혀야 하는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실낱같은 단서들을 실마리로 삼아 아우스터리츠라는 흔치 않은 이름의 유래가 체코 모라비아 지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크 아우스터리츠는 마치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떠나는 연어처럼 외로운 여행길에 나서게 된다. 나그네는 과연 길 위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인가. 명철한 독자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아우스터리츠의 오디세이는 특정한 합목적성을 지닌 것이 아니다. 히틀러가 지배하고 있던 당시 유럽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베르겐벨젠, 테레지엔슈타트, 다카우 그리고 아우슈비츠 같은 다양한 이름의 절멸수용소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문헌 보관소에서 오랜 서류를 뒤져 마침내 자신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아가타 아우스터리초바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추적한 끝에, 정말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 아가타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베라 아주머니와 만나게 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파리 국립도서관/비블리오테크처럼 기록의 보관장소로서의 도서관 역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불과 며칠 전에 나눈 대화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인류에게 기록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는 특별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어떤 방식으로 기록이 되는가에 대한 논의는 또다른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나치의 최종해결책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된 홀로코스트나 일본군에 자행된 난징대학살 혹은 일제시대 친일 부역자들의 기억을 부정하는 수정주의 역사전쟁의 현장을 우리는 직접 체험하지 않았던가. 역설적으로 저자는 정식 기록을 통한 교훈보다 발자크가 남긴 55편에 달하는 <인간희극>에 등장하는 위대한 황제를 위해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용맹하게 전사한 사자(死者) 샤베르 대령을 등장시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유동적이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죽음을 맞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때 배우이자 오페라 가수였던 어머니 아가타의 희미한 흔적을 찾아 헤매는 아들의 모습은 정말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독일 제3제국이 프로파간다를 위해 제작한 다큐멘터리 필름에 어머니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저배속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를 스캔하는 지난한 작업을 수행하는 아우스터리츠의 모습에서,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자그마치 93조나 되는 비용을 집행하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반성을 통한 역사 바로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어느 국가의 현실이 중첩됐다.

 

제발트의 소설 삼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민자들>, <토성의 고리> 그리고 <아우스터리츠>를 통해 현실과 허구를 오가는 작가의 독특한 소설 스타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통적 소설의 내러티브 구성과 너무 상이해서, 내부적으로 그의 소설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다. 한 고비를 넘겼으니 남은 그의 다른 책들은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아우스터리츠>를 다 읽고 나서, 바로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공중전과 문학>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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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8-01-30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간 (아니 초반인가요?;;;) 역 사진 근처까지 읽고 포기했어요;;;;

레삭매냐 2018-01-31 09:16   좋아요 1 | URL
저도 번번히 실패하다가 이번에야 간신히
성공한 걸요...

이번엔 정말 재밌게 읽었었는데 그전에는
왜 그랬을까 모르겠습니다.

AgalmA 2018-02-02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발트 전작 읽기 저도 넘 하고 싶었는데 먼저 시작을^0^! 드라마도 끝까지 보는 게 잘 없어서 시리즈나 전작읽기는 참 제게 어려운 산입니다ㅎ; 레삭매냐님 전작읽기 행보는 존경스러움요~

레삭매냐 2018-02-02 13:08   좋아요 1 | URL
저도 끈기 있게 드라마를 다 못 보겠더라구요.
작년 <시녀 이야기>는 좀 달랐지만 말이죠.
<얼라이어스 그레이스>는 자막을 못 구해서
못 봤네요.

일단 쉽지 않은 소설들을 다 읽어서 이제
남은 책들은 시집-에세이류라 부담이 없어
좋네요.

은하수 2023-02-26 1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토성의 고리 읽다 포기했는데
이 책을 또 들여놨네요
감히 손이 안가네요ㅠㅠ
얼마나 뿌듯하실지 ...
자신감 넘치는 모습 멋집니다^^

레삭매냐 2023-02-27 09:49   좋아요 0 | URL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제발트 작가의 진입 장벽이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한 번 빠지게 되
면 제발티언으로 거듭나게
되는 그런 작가라고 생각합
니다.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신년 목표 중의 하나로 삼은 제발트 전작읽기 그 두 번째 기록이다. 정말 오래 전에 만났던 <토성의 고리>를 다시 읽었다. 처음은 언제나 그렇듯 어려운 법이다. <토성의 고리>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제발트의 책이었는데, 다시 읽어도 이렇게 생소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독일 출신으로 영국에서 생을 마친 이방인의 기묘한 스타일에 대한 적응을 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그의 책을 읽었어도 평소와 달리 리뷰로 남기지 못한 것이 상당수다. 그래서 무술년에는 그의 책들을 다시 읽어 가면서 쓰지 못한 리뷰도 쓰고, 나에게는 마의 산과도 같은 <아우스터리츠>도 반드시 읽겠노라고 다짐하는 바이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모호한 제발트 스타일이 여전히 쉽지 않았다고 고백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 그 중에서도 서퍽 지방을 도보여행한 저자가 온 몸이 마비되는 증상으로 병원에 누워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소설 <토성의 고리>의 핵심이다. 서퍽 카운티를 여행하면서 저자는 정말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의사 토머스 브라운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해서, 계몽시대 인체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 시체해부에 나선 네덜란드 의사들에 대한 관찰은 기본이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들려주는 제발트의 박학다식한 내러티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문득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여행한 것으로 보이는 서퍽 지방의 단조로운 경관에 대한 관찰 보고에서는 조금씩 지루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법, 저자는 아무런 주제 의식이나 이유 없이 독자들을 인도하지 않는다. 그의 다른 작품인 <공중전과 문학>에도 등장하는 영국에서 발진한 폭격기 편대의 독일 대도시 폭격에 대한 공중전(dog fight) 에피소드 그리고 한때 대단한 산업이었지만 이제는 사양산업이 된 청어잡이에 얽힌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절정기였던 시절에 해마다 무려 육백억 마리나 되는 청어들이 대서양 바다에서 잡혔다고 하니 그저 놀랄 따름이다. 그래서 지금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비린 청어를 국민음식처럼 잘 먹어대는 걸까.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미국에서 주문하는 피자의 앤초비 토핑처럼 나한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지만 말이다.

 

한때 대선후보로 각광을 받았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선배였던 오스트리아 대통령 출신 쿠르트 발트하임의 행적에 대해서도 꼼꼼한 저술가는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빈 출신의 유능한 행정장교였던 발트하임은 티토의 게릴라 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코차라 전선에서 민간인들을 강제이주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로 크로아티아 괴뢰정부의 수반 안테 파벨리치에게 훈장도 받았다고 하지 않던가. 후배는 비록 대선 도전에 실패했지만, 선배 사무총장은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각국으로부터 자신의 화려한 과거 경력을 이유로 푸대접받는 수모를 견뎌야 했다.

 

노벨상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선생의 소설에도 등장하는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로저 케이스먼트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에 앞서 폴란드 출신으로 <암흑의 핵심>을 발표한 조셉 콘래드는 꿈에 그리던 선장이 되어 콩고 여행에 나서게 된다. 당시 레오폴드 국왕의 사유지이자 식민지였던 벨기에령 콩고에서 진보의 세기를 완수하겠다는 미명 아래, ‘십자군의 기획이라며 자행되는 갖가지 악행을 직접 목격한 지식인 콘래드는 몸과 마음이 병들게 되었다고 제발트는 썼다. 케이스먼트는 좀 더 신랄하게 흑인을 상대로 한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악랄한 착취를 서구 사회에 폭로했다. 훗날 로저 케이스먼트는 영국의 적국이었던 독일과 협력해 가면서까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결국 영국정부에 의해 국가반역죄로 사형당하고, 그가 남긴 동성애 연대기가 폭로되기에 이르렀다. 각 시대를 뛰어 넘는 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리포트 덕분에 그들의 삶을 인터넷을 통해 더 살펴보는 기회도 가졌다. 아무래도 제발트가 한정된 지면에서 다루기에는 방대한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을 달리던 이야기는 다시 동양으로 넘어간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중국 침탈로 시작된 이야기는 청나라 내부에서 벌어진 태평천국의 난 시절에 개입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청나라 황제의 이궁이었던 원명원을 방화하고 약탈한 사건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는다. 이것을 단순하게 동양과 서양 문명의 충돌로 봐야 할까. 산업혁명으로 축적된 무한대의 이윤 추구를 위한 자본의 전세계화는 선교사(종교)와 군대(무력)를 앞세운 제국주의의 형태로 진행됐다. 신자유주의의 비극은 어쩌면 이 시절에 이미 잉태된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인류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었던 아편전쟁 이래, 고대 페르시아 제국 이래 서양세계를 압도했던 동양 문화권 몰락의 단초가 되었던 시절을 유려하게 저술해낸 저자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경탄을 마지않게 된다.

 

그 외에도 동부해안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가장 위태로웠던 19405월 독일 베어마흐트의 상륙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한 <싱글 스트리트> 프로젝트가 가동되었다는 음모론도 흥미롭다. 위대한 덩케르크 철수작전(사실 볼썽 사납게 유럽대륙에서 패퇴한 것이 사실이다)으로 훗날 전세 역전을 위한 반격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자그마치 30만 명 이상의 정예병이 덩케르크에서 막강한 나치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현실 앞에서 영국은 독일군의 상륙을 막아낼 능력이 전무했다. 저자가 직접 찾은 영국 동부 오포드니스에는 신경가스 혹은 대량살상무기들이 배치되었으며, 영국공병대원들이 모종의 작전을 수행하다가 전몰했다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이 난무했다고 한다. 윈스턴 처칠의 외로운 투쟁을 그린 <다키스트 아워>에서 위 내용을 잘 다루고 있다니 하니, 기회가 되면 한 번 봐야지 싶다.

 

프리드리히 횔덜린과 파울 첼란 같이 저명한 독일 작가들의 글을 영어로 번역한 선배 이민자 마이클 햄버거의 경우도 주목할 만하다. 제발트의 글들을 영어로 소개하기도 한 마이클 햄버거는 베를린 유대 가정 출신으로 제발트보다 한 세대 전에 이미 영국에 자리를 잡았다. 도버 세관에서 햄버거 집안 사람들이 잉꼬 두 마리를 압수당했다는 에피소드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국에서라도 별 문제가 되지도 않을 일들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가능하지 않더라는 그런 절망적 상황에 대한 단적인 예라고 해야 할까. 제발트가 구성한 사진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집안에 가득 쌓인 원고뭉치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프랑스혁명 이후 대륙을 제패한 나폴레옹에 맞섰던 지식인 샤또브리앙 자작이 경험한 로맨스의 재구성을 자신의 도보여행 도중에 뽑아내는 신공을 펼치기도 한다. 도대체 어디까지나 진짜 자신의 체험이고, 가공한 소설인지 궁금했지만 이제 그의 스타일을 알게 되니 그게 무슨 대수냐하게 되었다. 어쩌면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내가 두 번이나 <아우스터리츠> 읽기에 나섰다가 실패한 이유가 아닐까. 제발트에게는 무엇이 픽션이고 아닌지 그리고 내러티브도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자신이 접한 모든 것들이 분석의 대상이었고 텍스트의 소재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런 그의 스타일과 서사를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리뷰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작품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게 나로서는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니 그가 남긴 책들을 되새김질하듯이 읽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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