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코다 이발소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로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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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오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오락이 필요했던 거겠지. 신년 들어 산 첫 번째 책(어제 샀다)을 바로 다 읽어 버렸다. 요즘 머리 아픈 책들을 만나서 신년에는 왠지 산뜻하고 재밌고 뭐 그런 책이 읽고 싶었다. 그럴 만한 책으로 오쿠다 히데오 작가의 책만한 게 있을까 싶었고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한동안 오쿠다 히데오의 책들을 찾아 읽곤 했었는데 그것도 정말 한참 전의 이야기가 되었구나. 그런데 생각해 보니 부러 신간들을 찾아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냥 아무 때고 읽고 싶어졌을 때 읽으면 되는 게 아닐까. 신간이랍시고 사들였는데, 읽지 않아서 구간이 된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중고서점에서 읽지 않은 책을 만나게 되면 속이 다 쓰리다.

 

새해부터 샛길로 샜다. 책 이야기에 집중해 보자. <무코다 이발소>의 주인공은 바로 한국전쟁이 나던 해에 만들어진 무코다 이발소의 두 번째 주인장 무코다 야스히코 아저씨다. 대처에 나가 살던 아저씨는 이발소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디스크로 더 이상을 일을 못하시게 되자, 가업을 잇고자 귀향했다고 한다. 무코다 이발소가 위치한 도마자와 면은 홋카이도에 있는데, 한 때 탄광 산업을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탄광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그저 그런 시골의 과소지 마을이 되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은 인근 삿포로나 대도시 도쿄로 나가 자신의 꿈을 좇게 되었던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 젊은이들이 대도시로 진출하면서 공동화된 시골 풍경은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런데 야스히코 씨는 삿포로에서 학교를 나오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사실은 실패해서 낙향한 것이다. 다행히 대학시절부터 자신과 연애해오던 교코 씨와 같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점이 하나의 수확이라고나 할까.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처럼 시골에서만 살다 보면 혼기를 놓쳐 중국에까지 가서 신부를 맞이해야 할 지도 모르니 말이다. 오쿧 히데오 작가는 시골 마을에 대한 편견을 갖지 말라고 내내 당부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당장 야스히코 씨부터 도시에서 지내다가 가업을 잇겠다고 돌아온 아들 가즈마사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 않은가 말이다. 부모라면 자신의 자식들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그나마 도마자와가 흥하는 고장이라면 모르겠지만, 손님도 거의 들지 않는 조합 소속의 이발소라 가격마저도 일률적이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그런데 말입니다, 야스히코 씨의 이야기 속을 거닐다 보면 뭐 그래도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 몰라라할 수밖에 없는 삭막한 도회의 삶보다는 프라이버시가 좀 없긴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진심으로 동정하는 이들이 사는 그런 곳이 사람 냄새가 나고 뭐 그래서 더 좋은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책을 읽으면서 프라이버시를 유지하고 싶은 심정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의 관심은 좀 꺼주세요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충돌하고 있더라 뭐 그런 거다.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려서 다 큰 어른들이 사나에 씨네 조그만 술집에 모여 묘한 긴장감을 즐기는 장면도 그렇지만, 이웃 어르신이 뇌졸중 증세로 병원에 실려가게 되자 그야말로 모든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돕겠다는 장면도 정말 인상적이었다. 진부하긴 하지만, 왜 슬픔이나 괴로움을 나눌수록 줄어든다는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웃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을에 사는 것도 하나의 행복이 아닐까. 물론 우리의 주인공 야스히코 씨는 그런 단면만 보고서 시골 마을에서 사는 불편함을 아는 척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호통을 칠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큰 일이 없는 마을이다 보니 저예산 영화이긴 하지만 마을을 무대로 해서 영화 촬영이 시작되자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는 장면도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에겐 같이 공유할 만한 그런 오락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책읽기 같은 건전한 프로그램은 안되는 걸까. 마을에 있던 도서관도 이용자가 없어서 폐관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같은 책쟁이들이라면 도서관에 읽을 만한 책만 많이 비치되어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영화 촬영과 관계해서 자신들의 잇속을 차리려는 사람들에 대해 야스히코 씨는 냉정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서로 양보하고 지내면 좋으련만, 하나라도 더 챙기려다 보니 그런 소소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닌가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합십해서 찍은 영화의 내용이 연쇄살인을 다룬 예술영화였다는 사실에 마을 주민들은 분노하지 않았던가. 더 재밌는 건, 나중에 그 영화가 세계적인 영화상을 받으면서 재평가를 받게 되자 영화의 진가를 몰라 봤던 자신들을 자책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죽음이라던가 재정이 파탄에 달한 마을 부흥이라는 쉽지 않아 보이는 주제들을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특유의 유머를 섞어 가며 즐거운 이야기들로 만들어낸다. 내가 이래서 이 작가를 좋아하지 않는가 말이다. 새해를 시작하기에 이렇게 읽기에 부담 없으면서도 재밌는 <무코다 이발소>만한 작품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달랑 6개의 에피소드 밖에 없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도마자와라는 멋진 공간과 흥미로운 캐릭터가 이렇게 잡혔는데, 한 편으로 끝내는 게 아쉽지 않나. 후속편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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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3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5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8-01-04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드매냐님 2017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며 무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레삭매냐 2018-01-05 16: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목화밭 엽기전
백민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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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필선언을 했던 작가가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왜 절필을 했었더라? 그리고 복귀의 변은 또 뭐였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떠도는 풍문에 의해 어렴풋이 짐작할 뿐. 어쨌든 글밥으로 먹고 사는 글쟁이는 어쩔 수 없이 글을 써야 하는구나 싶었다.

 

<목화밭 엽기전>의 시공간적 배경은 무척이나 구체적이어서 반가웠다.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막 출발하기 직전의 11월이었던가. 하루에 103원이 올랐다는 IMF 시절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공간적 배경은 서울랜드와 동물원이 맞닿아 있는 과천. 주인공인 한창림과 박태자는 교육 서비스업계에 종사하는 평범한 사람들로 보인다.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특히 한창림은 ‘슈퍼 수컷’의 냄새를 풍기는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벌이는 부부들이다. 그들은 인간 사회에서 금하는 거의 모든 강력 범죄들에 연루되어 있다. 유괴, 납치, 감금, 약취, 폭행 그리고 살인에 이르기까지 악의 전 부분을 고루 망라한다. <목화밭 엽기전>을 읽으면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마치 납덩이를 매단 종잇장을 넘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박태자가 한 때 수학 과외를 맡았던 청담동에 살고, 참치 회를 즐겨 먹는 사내애를 잡아 가두면서 서사의 수레바퀴는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얼결에 양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대치동 사는 어느 회계사를 두들겨 패고, 이 일로 인해 과천서의 오장근이라는 형사가 개입된다. 판돈이 점점 커지는 이야기 패가 돌려진다.

 

게다가 펫숍이라는 해괴한 곳을 운영하는 삼촌과 ‘뷰티풀 피플’의 (박태자의 약을 공급하는) 언니가 등장하면서, 텔레비전의 삼류 드라마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복잡한 이야기 구성도 빠지지 않는다. 이들의 기묘한 관계를 통해, 백민석 작가가 그리려고 했던 권력에 대한 복종과 추구에 대한 희열들이 나열된다.

 

특히 작가가 공을 들여 리서치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 동물원 묘사 부분은 마치 현장을 둘러보는 것과 같은 정도의 리얼리티를 재현해냈다. 동물원에 사는 여러 동물 중에서 특히나 수컷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만드릴 육식 원숭이’의 에피소드는 <목화밭 엽기전>의 남자 주인공 한창림의 이미지와 중첩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엇비슷하거나 열등한 수컷들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성향을 들어내지만, 펫숍의 삼촌과 같이 도저히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을 것 같은 캐릭터에 대해서는 꼬리를 말아 버린다. “치사하다”라는 말로 자신의 부족한 권력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한창림 부부가 벌이는 일상의 패악들은 펫숍의 프로들이 진행하는 방식에 비하면 아마추어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 역시 삼촌이 부리는 장기판의 말들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만,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패악일 뿐이다. 아니 그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았을까.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서울랜드와 동물원은 주인공 한창림의 본질에 대한 상징처럼 다가온다. 여러 개의 테마로 나누어진 서울랜드 테마공원 중에서 “모험의 세계”는 사회의 테두리 밖에서 태연하게 금지된 범죄를 저지르는 한창림의 욕망이 놀이기구에 올라탄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기묘한 동조를 이룬다. 각양각색의 동물이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원은 말할 것도 없이, 아이들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길들이려는 그의 어두운 욕망으로 대치된다.

 

백민석 작가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긴장감 같은 분노의 감정들을 후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그리고 보니 비슷한 시기에 읽은 편혜영 작가의 <아오이 가든>에서도 느꼈었는데, 공포는 이제 시각과 청각뿐만 후각의 영역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이 점이 참 특이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아주 재밌게 봤던 미국 폭스 텔레비전의 <덱스터> 시리즈가 생각났다. 연쇄살인법인 주인공 덱스터는 법의 테두리 밖에서 교묘하게 악을 저지르는 악당들을 수술(!!!)해 버린다. 하지만 <목화밭 엽기전>의 주인공들인 한창림과 박태자의 목적과 동기는 모호하다. 단지 상상 속의 목화밭에 거름을 주기 위해? 그것도 아니라면 펫숍 삼촌의 도착적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였을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정리되지 않은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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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12-30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도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한 해 다양한 책 많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도 부탁드려용^^
 
카탈루냐 찬가 비꽃 세계 고전문학 10
조지 오웰 지음, 김옥수 옮김 / 비꽃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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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을 실명 칼럼으로 비판한 삼성출신 언론장학생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긴 했어도 경향신문을 펼치니, 글쓰기에 대한 어느 칼럼니스트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글쓰기로 타인의 생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매력적 유혹, 그리고 보니 어쩌면 글쓰기 자체가 혁명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나도 이렇게 책 읽고 열심히 리뷰를 쓰는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꽤 오래 전에 혁명가로 직접 전쟁터에 나서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 대선배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조지 오웰. 세계 3대 르포문학으로 꼽히는 <카탈루냐 찬가>를 드디어 읽게 됐다.

 

대공황 이래 전 세계적 현상이었던 파시즘의 확산을 막고, 한 명의 파시스트라고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은 스페인 내전에 민병대원으로 참전했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세력의 최전선이었다.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봐오던 스페인 내전에 대해 현장에서 직접 기술한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선에 투입된 무정부주의 성향의 통일노동자당(P.O.U.M.;Partido Obrero de Unificación Marxista, Workers' Party of Marxist Unification 번역하면서 막시스트라는 표현을 빼서 그렇지 실제적으로 공산당 분파가 아닐까 추정된다) 소속 조지 오웰이 포함된 부대의 무서운 적은 전선에서 대치한 프랑코 파시스트 부대가 아니었다. 보다 무시무시한 적은 추위와 굶주림이었다.

 

저자가 들려주는 우에스카를 중심으로 한 아라곤 전선의 현황은 참담했다. 파시스트 우방 독일과 이탈리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프랑코 군대에 비해 스페인 인민전선을 지탱하는 민병대원들의 무장은 형편없었다. 소총은 물론이고 기관총이나 야포 같은 중화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장비는 물론이고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민병대원들이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스페인 공화국을 파시스트로부터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비록 오합지졸 부대였지만 전선에 투입된 것이다.

 

한편, 발렌시아 정부를 사실상 장악한 공산당은 내전 초기의 혁명적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조지 오웰은 쓰고 있다. 가장 혁명적이어야 할 공산당이 특히 가장 혁명적이고 내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무정부주의자들을 트로츠키주의자로 파시스트라는 억울한 누명을 씌워 탄압하지 않았던가. 그 바탕에는 러시아 스탈린의 군사원조가 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역시 스페인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일어선 무정부주의자들의 움직임에 동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발렌시아 정부가 내전에서 이기기 위한 정부차원의 군사원조를 할 리가 없었다. 오로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만이 스페인을 원조했고, 그 원조의 후광을 업은 공산당이 실제적인 스페인 공화국의 지배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역설적이게도 공화파는 점점 더 혁명적 성격을 상실하고, 그저그전 부르주아지 국가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민군이 되어 버렸노라고 증언한다.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는 크게 세 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조지 오웰이 직접 115일 동안 아라곤 전선에서 싸운 이야기, 두 번째는 바르셀로나 시가전에 대한 육성증언 그리고 마지막은 다시 투입된 전선에서 목에 관통상을 입고 후송되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과정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자고로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스페인 내전 당시에도 같은 좌익이지만 무정부주의자 그룹과 사회주의자 계열의 공산당은 적군보다 서로에게 총질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에 앞서, 조지 오웰은 스페인의 특성상 프랑코 군대와의 내전에서 승리하더라도 필연적으로 파시즘 성격을 지닌 독재 정치가 만연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지 않았던가. 결과는 프랑코 군대의 승리로 역사를 수십 년 뒤로 퇴행시키는 결과를 가져 오긴 했지만 말이다. 한 때 전세계를 호령하던 스페인 제국이 지금도 유럽의 주변부 신세로 전락한 건 어쩌면 스페인 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게 아닐까 싶다.

 

다시 1937년 5월의 바르셀로나 시가전 당시로 돌아가 보자. 애초부터 무정부주의자 그룹과 공산당의 극한 대립으로 머지않아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모두가 예측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발렌시아 정부의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진 않았지만, 무장 치안대가 무정부주의자들의 관할권 아래 있던 전화 교환국 건물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시가전은 결국 대규모 유혈사태를 불러왔다. 전선에서 멀어질수록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그룹 간의 갈등은 커졌다고 조지 오웰은 증언한다. 아니 공동의 적인 프랑코 군대를 앞두고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이유로 단합해서 투쟁에 나서도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마냥 후방에서 서로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을 읽다 보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한 때 혁명그룹이 우세를 보이지만, 모든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공산당이 반격에 나서면서 혁명세력은 처절한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짧은 휴가를 마치고 전선으로 복귀한 조지 오웰은 또 한 번 달라진 부대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빈민과 노동자를 위한 부대였던 민병대에 29사단이라는 인민군 편제가 따라붙고, 일반병사와 장교들 사이에도 계급의식이 도입되는 등 일반 부르주아지 군대와 다를 게 없더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혁명기 스페인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결국 목에 관통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어 제대하기에 이른다. 우여곡절 끝에 제대증을 받고 돌아온 바르셀로나에서는 정부에 의해 불법집단으로 규정된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체포, 약식처형이 자행되고 있다는 비극적 현실을 접하게 된다. 아마 당시 이런 현실을 바탕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된 조지 오웰이 훗날 <동물 농장>을 쓰게 된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조지 오웰과 아내 아일린은 극적으로 공산당이 대대적인 혁명세력 검거에 나서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바르셀로나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벨기에 출신 군 지휘관이었던 게오르게스 콥의 구명활동에 나서지만, 감옥에서 비밀리에 처형된 다수의 인사들처럼 그에 대한 소식 역시 역사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통일노동자당의 당수인 안드레스 닌도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당하는 판에 일개 지휘관의 안위를 걱정할 겨를이 있었을까. 그 와중에서도 자신에게 따뜻한 온정을 보여 주었던 인민군 장교에 대한 스케치도 있는다.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이 내내 경계하듯이, 자신이 속해 있는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당파성 때문에 자신의 기록이 완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수천 킬로 미터 떨어진 안전한 후방에서 전선에 대한 글을 다룬 다수의 저널리스트들과 달리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굴의 정신으로 아라곤 전선에서 강력한 파시스트와 대결했던 지식인의 모습에 이 자리를 빌어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선에서 전투도 마다하지 않은 용감한 지식인이 모습에서 편안한 데스크에 앉아 팩트 체크조차 하지 않고 너무 쉽게 기사를 쓰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언론인들의 그것과 대조적으로 다가왔다.

 

Viva la Revoluc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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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배드 폭스
벵자맹 레네 글.그림, 강희진 옮김 / 북레시피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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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유쾌한 동화 만화 한 편을 봤다. 프랑스 출신 작가 벵자맹(벤저민의 프랑스식 발음이다) 레네의 <빅 배드 폭스>다. 한가로운 농장의 암탉을 노리는 못난이 여우의 독박 병아리 육아기라고 해야 할까.

 

전통적으로 교활한 여우 이미지 대신 선량한 여우의 이미지를 쓰고 등장한 여우는 배가 고파 암탉의 엉덩이를 물어 뜯었다가 된통 혼이 난다. 농장의 경비견과 토끼 돼지가 아무리 정교하게 울타리를 세워도 얼뜨기 여우는 침투에 성공한다. 열 도둑을 못 막는다는 옛 속담이 생각났다. 신세한탄하던 여우는 숲의 진짜 강자 늑대를 만나 컨설팅을 받기에 이른다. 좀 더 협박에 능해야 하고, 으르렁거려 상대방을 위협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런데 어찌 보면 다 허세다. 그리고 진짜 무력한 상대를 골라 공격하라는 조언까지 해준다. 농장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는 무엇일까? 바로 암탉이 낳은 알들이었다.

 

못난이 여우는 늑대의 조언대로 농장에 침투해서 암탉이 품고 있던 세 개의 알을 탈취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자력으로 성공하지는 못하고 그것도 늑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성공한다. 문제는 요놈의 알들이 부화해서 병아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갓 태어난 녀석들은 여우를 자신의 엄마라고 생각하고 뒤따른다. 그 다음 이야기는 안 봐도 빤하겠지? 그 녀석들과 지내면서 정이 들대로 든 여우는 얼른 키워서 잡아먹자는 늑대의 제안에 실존적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까 아무리 미물들이라고 하더라도,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야말로 이 만화 같은 동화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한편, 자신의 알을 탈취당한 암탉도 가만 있지는 않는다. 이른바 연대의 힘을 보여 주기에 이른다. 무능하고 무사태평한 경비견을 닦달질해서 자신들의 안녕을 위협하는 여우 더 나아가서는 훗날 무시무시한 늑대마저도 쫓아낼 수 있는 자력갱생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드만 스튜디오의 <치킨 런>이 연상되기도 했다.

 

귀엽고 발랄한 세 마리 병아리를 꿀꺽 하려는 늑대로부터 도망치는데 성공한 여우는 자신들이 여우라고 굳게 믿는 세 병아리들과 다시 농장에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안되기에 농장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닭으로 위장해서. 병아리 삼총사들은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학부모 회의에 참석한 여우는 결국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이 와중에 철도 없이 늑대 아저씨를 찾아나선 병아리 일병들 구하기에 성공한 여우와 농장의 암탉들은 못난이 여우를 농장의 일원으로 받아준다.

 

병아리 삼남매를 귀찮아 하면서도 고 녀석들이 커가는 동안 정이 흠뻑 든 여우의 모습에서는 오늘도 독박육아에 지친 부모들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필요하다고 했던가. 사촌 형제들이 수두룩하던 시절에는 아무도 놀거리 걱정을 하지 않았었는데, 요즘엔 외동 투성이라 아이들이 홀로 커가는 걸 보노라면 마음이 쨍하다. 그리고 개별적 존재로 보면 암탉들도 병아리들처럼 무력하기만 하지 않은가. 하지만 암탉들이 연대의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생존과 안녕을 위협하는 늑대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는 장면은 정말 통쾌했다. 고거 정말 상쾌한 걸. 벵자맹 레네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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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레인 - 상 - 영화 강철비 원작만화
양우석 지음, 김태건 그림 / 네오카툰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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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정말 오래 간만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한 편 봤다. 예전에 영화 보기가 취미였던 시절도 있었으나 다 오래된 시절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JSA 이래, 분단을 다룬 최고의 영화였다는 평을 마음에 품고 영화를 보러 갔다. 그리고 기대이상이었다. 최근 사이다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정우성이 맡은 북한 최고의 공작원 엄철우의 열연이 특히 돋보이는 그런 작품이었다.

 

최근 미국의 이상한 대통령과 북한 1호의 연이은 핵실험으로 한반도에 그 어느 때보다 전쟁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웹툰원작을 영화화했다는 영화 <강철비>가 던지는 메시지는 비교적 간단한다. 한민족에게 재앙이 되는 제 2의 한국전쟁은 어떻게든 막아라. 정찰총국장 리태한(김갑수 분)은 북한 군부 쿠데타를 기획 중이라는 호위총국장 박광동(이재용 분)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한때 최고의 정예 엘리트 요원이었던 엄철우(정우성 분)에게 내린다. 마치 마피아들이 그렇듯이 가족들의 안위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엄철우는 개성공단 시찰에 나설 북한 1호를 동반할 예정인 박광동 저격에 나선다.

 

문제는 저격 현장에 박광동은 보이지 않았고, 북한 특수부대원에게 탈취당한 미군 MLRS(Multiple Launch Rocket System)의 폭격으로 시찰에 나선 북한 1호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엄철우는 공화국 수령을 지키겠다는 일념에 나선 북한 처자 두 명과 함께 남쪽으로 향하는 중국 차량 속에 섞여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북한 특수부대 에코팀 소속 최명록(조우진 분)이 이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총격전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1호의 뒤를 쫓는다.

 

한편 한국에서는 막 대선을 치른 상황으로 현직 대통령 이의성(김의성 분)에서 차기 대통령 김경영(이경영 분)으로의 권력 이양이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서 벌어진 쿠데타에 당연히 국가안보팀은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곽철우(곽도원 분)는 긴박하게 전개되는 상황 분석 중에 북한 1호를 호위 중인 엄철우가 자신의 부인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갔을 것이라는 추리에 도달한다. 아, 그 전에 리태한에게 현장 보고를 하고 일산에 머물던 엄철우 일행을 다시 에코팀이 엄습하면서 한바탕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MLRS의 공격으로 두개골에 피탄된 북한 1호의 생사가 불투명한 위기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통령 전쟁불사를 외치는 보수파 이의성은 전국적인 계엄령을 발표하고 우방 미국에 북한 핵폭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 보겠다는 차기 대통령 김경영의 의사는 무시한 채 말이다. 미국이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는 핵폭 작전과 파멸적 전쟁을 막기에 주어진 시간은 36시간, 남북한의 철우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민족의 공멸을 부를 수도 있는 전쟁 방지에 나선다.

 

- 이하 영화에 대한 중요한 스포일러들이 다수 포진해 있으니 감안해서 봐 주시길 -

 

참여정부 이래 자주국방과 작전권 회수라는 명제를 가지고 싸워 왔지만, 역시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운명을 타의에 맡겨야 하는 처량한 신세다. 미국의 첫 번째 핵폭 공격이 북한의 요격 미사일(?)에 의해 무력화되고(북학의 미사일 능력이 그 정도나 되었단 말인가) 두 번째 공격을 요청하는 한국 대통령의 나름 절박한 요청에 미국 담당자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사실상 북한 1호를 제거하고 군부 쿠데타를 기도한 정찰총국장 리태한의 음모를 그 유능한 엄철우가 계속해서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아무리 감청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엄철우가 은신해 있는 곳을 에코팀이 기가 막히게 찾아낸단 말인가. 그 정도라면 상대방을 한 번쯤은 의심해 봤어야 했는데, 자기 가족의 생사와 안위를 맡긴 탓인지 엄철우의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이다.

 

선제공격을 받은 북한 당국은 당연히 선전포고를 했고, 우리에겐 잊혀진 존재였던 수많은 땅굴을 통해 15만 특수부대를 남침시켜 미군과 10만명에 달하는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고 미국과 협상에 나서겠다는 리태한의 큰소리가 마냥 우스개 소리만으로 들리진 않는다. 어쩌면 선군정치라는 미명 아래 군부를 우대하고 있지만, 핵개발 과정에서 틀어져 나온 불평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일정 정도의 군사적 도발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 9년 동안의 보수정권 아래서, 강대강 압박작전으로만 일관해서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북한이 핵개발 능력을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개발시키는데 성공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한 번 DJ의 햇볕정책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위기가 발생한 곳이 개성공단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점도 크다. 남북관계 협력의 시발점이었던 개성공단 협력과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마당에, 우리가 북한을 상대로 제재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실질적으로 북한 노동자들의 저렴한 임금으로 이익을 본 것은 북한보다도 우리 기업들이 아니었던가. 어느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북한 1호가 남한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좀 비현실적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사태가 모두 진정된 뒤 북한 1호를 북한으로 귀환시키는 과정에서 북한이 가진 핵무기 절반을 인수 받는다는 것이 황당했다. 아무리 최고존엄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수십년 동안 고난의 행군 끝에 개발한 핵무기의 절반을 우리에게 넘긴다?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신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시한부 삶을 살고 있던 엄철우 동무가 자신을 희생해서 전쟁에 미친 리태한 일당과 동귀어진한 것이 아닐까.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살면서, 한국 주재 외국인들이 북한의 핵실험 뉴스를 듣고 경악했을 때 한국 동료들은 그런 뉴스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올봄에는 어떤 스카프 색깔이 유행일까 고민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계엄령이 선포된 마당에도 한국 시민들은 불야성 같은 서울에서 연말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지 않았던가.

 

다시 한 번 전쟁이 일어나서는 절대 안된다는 명제를 떠올리게 해주는 영화 <강철비>였다. 아, 그리고 지디(GD)동무는 영화에서도 그렇듯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세계적인 스타이긴 한 모양이다. 케이팝의 위력이 북한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 양념이 인상적이었다. 영화에서 김경영 당선자가 보고 있던 빌리 브란트의 책이 국내에 출간되었나 싶어 검색해 보았는데 그런 책은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걸까. 다음 웹툰 원작을 잠시 살펴보니, 원작과 영화는 상당 부분 다른 점이 있구나. 무료는 두 편 뿐이라 나머지는 못봤지만, 주인공 청와대 행정관인 박재익이 곽철우로 바뀌었고 대통령의 조카였다. 그리고 웹툰의 스토리라인을 양우석이 맡았는데 영화감독 그 양우석인지 궁금하다. 나무위키 자료를 보니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영화 판권이 넷플릭스에 팔렸다고 한다. 넷플릭스가 대세이긴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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