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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에 W.G. 제발트의 <이민자들>을 구입한 지 7년 만에 읽기 시작했다. 기록을 뒤져 보니 2011년 10월 8일날 두 번째 파주북소리 행사 때 창비사옥까지 산 책이었다. 그 때 매대에서 책을 파시는 창비 직원 분이 그즈음 출간된 <토성의 고리>를 추천해 주던 기억이 난다. 사실 <토성의 고리>를 읽고 나서 사게 된 책이었는데 말이다.
올해 나의 목표 중의 하나는 제발트 읽기다. 출발점으로 7년 전에 사두었지만 아직까지 읽지 못했던 <이민자들>부터 시작했다. 같은 날 중고서점에서 <토성의 고리>도 사서 읽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제발트가 바로 <토성의 고리>였는데 그 때는 정말 처음이라 책을 내가 제대로 읽었는 지조차 확신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동안 제발트의 이러저러한 책들을 만나게 되면서, 어렴풋이나마 그의 스타일을 알게 되었고 역시 처음보다 제발트 읽기가 편안해진 그런 느낌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 노리치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차리고 이방인[expatriate]으로 살다가 간 작가의 아우라를 여실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독서였다.
오래 전 미국의 메인 주를 여행한 적이 있다. US route 1을 타고 올라 가면서 집 앞에 온갖 잡동사니들을 쌓아 놓고 야드세일하는 곳도 많이 구경했고, 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쓰던 철모나 오래된 환타 병 같은 과연 누가 살갈까 싶은 물건들을 파는 골동품점을 들르기도 했었다. 어쩌면 제발트 작가는 그런 곳에서 수집한 사진들을 소재 삼아 자신의 소설을 쓴 게 아닐까 싶다. <이민자들>에는 모두 네 편의 이민생활에 대한 단편들이 들어 있다.
예전에 어렴풋이나마 이민자들의 신산한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들은 왜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땅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던 걸까. 시간과 여유 그리고 기회가 있었다면, 그들과 인터뷰를 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이민생활을 이들과 이야기하던 중에 자신의 동생이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그럼 혹시 니아메이에 계시냐고 했더니, 그 분이 정말 놀라워하며 그걸 어떻게 아냐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냥 오래 전, 나라와 그 나라 수도 외우기 놀이의 일부분이었는데 그게 조금은 껄끄러웠던 대화의 물고를 트는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정말 오래 전 이야기다.
제발트의 소설 읽기는 뭐랄까 그의 소설 대부분이 그렇지만,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가운데 숨은 원석을 찾는 그런 기분이다. 비록 믿는 신은 달랐지만, 독일 땅에서 수백년 동안 독일 사람으로 살아온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공동체에서 믿을 수 없는 국외자 취급을 당하게 되면서 참정권과 재산권 같은 기본권들을 박탈당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사실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생명까지 위협받게 되는 상황이라면, 자신의 조국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탈출해야 하는 게 아닐까.
히틀러가 통치하는 독일땅에서 유대인이 그런 이유로 엑소더스에 나섰다면, 너무 가난해서 먹고 살게 없었던 독일 사람들 역시 당시 신세계였던 미국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재밌는 것 중의 하나는 아메리쿰(미국)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고 나선 이민의 종착지가 영국이었다는 점. 그나마 신세계에서 먹고 살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 있는 이들이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아무런 기술도 없이 생계를 해결하려고 했던 이들도 다수였다는 점이다. 어떻게 봐도 제발트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화자는 다양한 입장에서 새로운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이민자들의 삶을 파헤쳐 나간다. 아니 어떤 특별한 목적이 없이 그렇게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그들의 삶을 추적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화자가 신빙할 수 없는 구전이나 빈약한 단서에 의지해서 이민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추적해 가는 과정은 신비롭다.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았지만 결국 엽총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의사 선생, 나치를 혐오하면서도 완전한 아리아인이 아니었지만 전쟁에 참가해서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한 베라이터 선생님. 소설에 유일한 독일인 주인공인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할아버지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생활전선에 나서 결국 바다 건너 이민자가 되었다. 뉴욕의 잘나가는 솔로몬 집안의 도련님 코즈모 씨를 모시고 유명한 휴양지 도빌의 카지노에서 끝없는 행운을 바탕으로 번 돈을 가지고 유럽을 주유하는 여정 끝에 도착한 성도 예루살렘에 대한 스케치 등이 이어진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리얼리티이고 허구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바로 눈앞의 보고 있는 것을 묘사하는 것 같은 사실주의가 모두 허구라고 한다면, 제발트의 능력은 정말 상상 그 이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게 된 아델바르트 씨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외국어를 쉽게 바꿀 수 있다고 했던가. 일본 교토에 있는 금각사 사진을 떡하니 제시하고는 지인과 함께 물 위에 있는 집에서 살기도 했더라는 배짱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런 것이 제발트가 구사하는 현실과 허구의 묘미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 점을 알게 되니, 아무런 주석도 달리지 않은 사진들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을 다시 보게 됐다. 아델바르트 씨에게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것은 고통이면서 동시에 해방이기도 했다고 화자는 진술한다. 그는 말년에 가서 상실된 기억을 자신이 지어낸 환상으로 보충하는 코르사코프 증후군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의 감독을 요청해서 충격요법을 순순히 받아 들였다는 점도 나에게는 기이하게 다가왔다. 화자는 그런 것들이 자신의 기억능력과 사고능력을 말살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는데,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의 공중폭격으로 자신들이 입은 피해까지 싸잡아 모두 망각의 늪으로 보내 버리고 싶었던 대다수 독일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비판으로 내게는 읽혔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발트의 또다른 걸작 <공중전과 문학>에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여전히 천국보다 낯선
자 이제 단편소설집의 마지막 주자 막스 페르버 씨를 만나볼 차례다. 소설의 화자는 제발트의 명백한 문학적 페르소나로 보인다. 1966년 고향 베르타흐를 떠나 영국으로 이민길에 오른 작가처럼 화자 역시 맨체스터에서 외국 학생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한 때 번영하는 대영제국의 최전선에 서 있던 물류기지에서 쇠락한 도시가 되어 버리는 천국보다 낯선 곳에서 우연히 화자는 1940년대말부터 하루에 열 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막스 페르버 씨를 만난다. 1939년 5월, 전쟁이 시작되기 전 독일에서 가까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막스 페르버 씨는 양친을 모두 홀로코스트로 잃었다. 페르버 씨는 일상에서 버드나무 목탄으로 그린 그림들을 그리고 지우기를 거듭한다. 그것은 마치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냉정한 시간과의 싸움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세계의 시시포스 같다고나 할까.
시시포스의 고역을 묵묵하게 수행하는 페르버 씨의 이미지는 그의 시간을 양분하는 마사이 족장이 무허가 영업 중인 ‘와디 할파’만큼이나 낯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처럼, 막스 페르버 씨의 이야기 그리고 책에 실린 조작된 분서 사진 그리고 페르버 씨의 어머니가 남긴 기록을 추적해 가는 과정들이 느릿하게 전개된다. 그 기록들은 너무나 정교해서 이것 역시 작가의 상상만으로 가능할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화자는 왜 그렇게 이런 이야기들에 집착해서 집필에 나서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마치 어떤 사명감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결국 기억과의 전쟁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제발트 작가가 전쟁 중에 독일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를 카이로스가 만든 망각의 덫 속으로 혹은 전쟁 막바지에 베를린의 총통 벙커에서 자살한 죽은 지도자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려는 조직적 은폐 행위에 문학적 저항을 시도한다. 우리도 지난 9년 동안의 적폐청산 작업 중에 있지 않은가.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만하면 됐으니, 과거는 덮고 미래로 가자고 주장하는 이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는 제발트의 편에서 손을 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