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혁명을 읽고 있다. 아주 오래 전, 정말 오래 전에 읽다가 아마 완독하지 못했던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을 지난 일요일 헌책방에 달려가서 사왔다. 제법 분량이 있는 책이었는데(정말 두툼했다) 아무래도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지 술술 잘 읽혔다. 다만, 다른 책들이 속속 등장해서 일단 잠시 읽기를 멈추고 있는 상황이다.

 

1936년 장제스의 백군, 다시 말해 국민당군의 추적을 피해 대장정 끝에 산시성의 바오안에 자리잡은 홍군 사령부를 미국 캔자스 출신의 젊은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는 쑨원의 부인 쑹칭링의 소개장 하나만 달랑 들고 찾아 들었다. 당시 서북 지역의 중화 소비에트 담당은 만주 군벌 출신의 청년 원수 장쉐량이었는데 이미 중국을 침략 중이던 외세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두 번째 국공합작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몇 달 뒤 시안사건으로 구체화 되기에 이른다.

 

첫 번째 국공합작은 장제시의 친위쿠데타로 비극으로 끝났고, 장제스가 통치하는 중국에서 공산당은 외세에 앞서 박멸해야 하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층 엘리트 계급의 견해였고, 인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계급에서는 마오 쩌둥이 이끄는 홍군이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훗날 그 사람들은 자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거라고 생각했던 독재자가 자신들을 절대적 빈곤과 기근의 수렁에 빠트릴 줄 예상이나 했을까.

 

어쨌든 외국인 저널리스트로서는 백군의 봉쇄선을 뚫고 적도 바오안에 도착해서 저우언라이와 마오 쩌둥 등 장제스 군대가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건 이른바 공산 비적 수괴들과 다수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꿈꾸는 공화세계, 민족해방 그리고 동아시아 질서의 개편 등 같은 당시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꿈만 같았던 이야기들을 글로 옮겼다. 이 정도까지가 다시 읽기 시작한 <중국의 붉은 별>에 대한 맛보기다.



 






 

 

 

 

 

 

다음 차례는 조선공산당에 대한 이야기다. 어제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우연히 훑어본 신간 코너에서 최백순 씨가 지은 <조선공산당 평전>을 냉큼 빌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차에 이게 왠 떡이란 말인가. 아니 그런데 보통 평전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전기물이 아니었던가. 공산당집단에 대한 평전이라니. 해방된 남한과 북한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일제시절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담당했던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평전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아직 처음에 등장하는 관련단체와 인물들 편만 읽어 봐서 사실 그다지 할 말이 많은 건 아니다. 한 때, 역사를 전공했던 일개 독자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최근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 약산 김원봉 선생, 심산 김창숙 선생 정도. 그리고 나중에 남부군으로 알려진 경성콤 그룹의 이현상을 비롯한 이관술, 김삼룡이 있다.

 

어제인가 어느 신문에서 브루스 커밍스가 저술한 <한국 전쟁의 기원>에 대한 글을 보면서 일제가 1931년 만주를 침략하면서 세운 만주국이야말로 한국 전쟁의 시발점이었는 평가를 읽었다. 일제 하에서 최고 엘리트였던 군인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던 친일부역자들과 그들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자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그야말로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천하의 원수들이었다는 것이다. 해방 공간 남한에서 주도권을 잡은 그런 친일파들을 독립운동가들은 어떤 시선을 보았을까.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한 어느 독재자에 대해 공은 공대로, 그리고 과는 과대로 평가하자고 하는데, 그들의 주장대로 하자면 일제시대 무장독립투쟁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같은 잣대를 견주어야 하지 않을까.

 


 






 

 

 

 

 


자, 혁명을 읽는 시간의 마지막은 최근 방중 중에 충칭 임시정부 청사를 최초로 방문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기록된 문재인 대통령이 베이징대 강연에서 언급한 김산의 일대기를 다룬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다. 사실 이 책도 예전에 대학 시절 선배에게 선물을 받았나 어쩌나 하는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마 인천집 옥상 어딘가에 이 책을 읽을 것이다. 나의 <녹슬은 해방구>와 함께.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던 차에 어제 들른 헌책방에 오늘 들어온 책 카트에 이 책이 실려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작년에 나온 책이라 컨디션도 아주 좋았다. 원래 사려고 마음먹었던 책을 살포시 내려놓고 대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에드가 스노의 전처로 알려진 님 웨일즈가 1937년 옌안에서 만난 조선대표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으로, 평북 용천 출신으로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을 살 간 혁명가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500쪽 남짓한 책인데, 단박에 100쪽을 읽어 버렸다. 구한말 태어나 서러운 식민지 백성으로 자라난 혁명가 장지락은 그 시절 대부분의 혁명가들처럼 3∙1운동을 계기로 제국주의 지배에 시달리는 조국의 현실을 깨닫고 혁명의 길에 나서게 된다. 원래 크리스천이었던 장지락은 평화적 운동으로는 일제의 무자비한 통치를 끝낼 수 없다는 각성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계열강 그 중에서도 미국의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호혜적 선의를 기대했지만, 다 부질 없는 짓이었다는 것이 곧 밝혀지지 않았던가.

 

나머지 부분은 아직 못 했지만, 일본 유학을 거쳐 중국에 귀화해서 중국공산당원 자격으로 광둥코뮌과 중국 최초의 소비에트였던 하이루펑 소비에트에서 살아남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서론 부분에서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인민들이 대오각성하게 될 날을 기대한다고 구술하였는데, 전형적인 코민테른에 입각한 이상주의적 발언이 아니었나 싶다. 이미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이 보여준 대로, 계급의 이익보다 우선 민족주의 전쟁의 실체를 보지 않았던가. 물론 당대의 한계일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풍운아 장지락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님 웨일즈과 인터뷰한 다음 해인 1938년 공산당 보안책임자였던 캉성에 의해 트로츠키파 스파이로 몰려 억울하게 처형을 당했다. 중국공산당에서 훗날 복권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이제 대한민국 건국 100년이 480일 남았다. 부족한 글로나마 자랑스러운 조국의 별이 된 이들을 추모해 보고자 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prenown 2017-12-20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혁명을 꿈꾸며 치열하게 살았던 그분들에게 욕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젊은날의 각오가 무색해지는 현재의 삶..부끄럽네요!

레삭매냐 2017-12-20 11:48   좋아요 0 | URL
저도 마찬가지라 창피합니다 ㅜㅜ

cyrus 2017-12-20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리랑>.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펼쳐보지 않은 책입니다. 님 웨일스의 자서전도 나왔다고 하던데, 상당히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구하기 힘듭니다.

레삭매냐 2017-12-20 13:25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다 만 책이어서 그런지 어쩐지
진도가 쑥쑥 나가고 있습니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도 비슷한 시기
를 다룬 책이라 해서 한 번 구해서 읽어볼까
싶었는데, 마땅하게 땡기는 판본이 없네요.

sprenown 2017-12-20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찾아보니 저에게도 <인간의 조건> 지식공작소,김붕구 옮김 이 있네요.. 읽지는 못하고,앞뒤로 뒤적여 보기만 했네요.ㅎㅎ

레삭매냐 2017-12-21 14:28   좋아요 1 | URL
<인간의 조건> 새로운 번역으로 만나봤으면
하는 그런 바람입니다.

지식공작소 버전은 레어 아이템이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부럽네요 :>

서니데이 2017-12-22 2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2017년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2017-12-23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랑 로망 컬렉션 Roman Collection 11
윤이형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어쩔 수 없는 꼰대인가 보다. 윤이형 작가의 <설랑>을 읽으면서 주인공 한서영과 최소운의 사랑 타령을 보면서 계속해서 헤테로섹슈얼리티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화급하게 체할 것처럼 빠진 줄거리에 몰입하다 보니 누가 여자고, 누가 남자지? 뭐 이런 생각에만 집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둘 다 여자다. 한 명은 레즈비언이고, 다른 한 명은 바이섹슈얼이란다. 허허, 스토리가 어디로 가는건가 그래. 설상가상으로 <언더월드>에나 나올 법한 라이칸(늑대인간)까지 등장한단다. 그렇다면 장르물인가?

 



로베르토 볼라뇨를 좋아하시나요?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과감하게 예설!이라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쌍방 간에 작가와 팬으로 기묘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여인이 술잔을 나누며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야말로 소설 <설랑>에서 내가 단연 최고라고 생각하는 장면이다. 이제 막 독서클럽에 입문한 소녀감성 같은 설정이긴 하지만 우리 같은 책덕후들에게는 그야말로 절정의 로맨틱한 장면이 아니던가. 선수들은 선수들을 알아 본다고 상대방이 쓴 글로 상대방이 좋아하는 작가군을 추정해 가는 장면, 아 정말 압권이었다. 그렇다, 나는 줄리언 반스는 좋아하지 않지만 로베르토 볼라뇨는 정말 좋아한다. 다만 어느 책을 골라 시작하느냐에 따라 진입장벽이 문제가 될 거라고 경고장을 발부하고 싶다. 난 운이 좋은 편이었다.

 

참참, 자꾸만 이야기가 곁다리로 새는 구나. <설랑>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말이다. 한서영은 보름달이 뜨면 라이칸, 그러니까 늑대인간으로 변한다. 다만, 꿈속에서만. 그리고 사랑에 빠진 상대방을 난폭하게 잡아먹고 글을 쓴다. 그러지 않고서는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는 저주에 빠졌다. 그만큼 글쓰기가 어렵다는 은유일까. 어쨌든 당연히 자신보다 세 살 적은 최소운와 사랑에 빠진 뒤로는 글을 한 줄도 못쓰고 있다. 반면 연인 최소운은 사랑의 힘으로 엄청난 글을 생산해낸다. 수일만에 천 페이지씩, 관계는 가감하는 보합이라는 설정이려나.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좋은 세상이다. 책에 나온 노르웨이 혼성 3인조 디사운드(d'Sound)의 <If You Get Scared>도 유튜브로 해서 들어 보았는데 아무래도 상쾌발랄하긴 하지만 잘 모르는 곡이라 그런지 감흥은 그닥. 그럼 이제 서영의 라이칸 증세를 억제하기 위해 소운이 심은 투구꽃에 대한 나무위키 정보를 검색해 봐야 하나. 왜 이렇게 곁다리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지 모르겠다. 아, 검색해서 찾아보니 바로 시간차공격으로 보름달을 피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구만 그래. 그러니까 늑대인간에게 보름달만 보여주지 않으면 된다는 거구만 그래. 난 그것보다도 예전에 텔레비전 시리즈로 방영된 <늑대미녀>(She-Wolf of London 혹은 Love and Curses) 떠올라서 내친 김에 그것도 찾아봤다. 분장이 왜 이리도 유치해 보이는지.

 

그 다음 서사는 좀 진부하다. 작가 부모에게 버림 받은 아이 서영은 글쓰기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저주에 걸렸다. 그리고 어려서 방문했던 자연사박물관에서 만난 얼치기 박제사가 만든 늑대박제 때문인지 어쩐지 예의 라이칸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 내용이 나를 설득시킬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닌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저런 일들을 극복하고 두 사람은 사랑을 이어간다는 내용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메인 서사보다 자꾸만 소설을 완성해 가는 와중에 만난 주변부에 눈길이 간다. 서영과 소운의 좋아하는 소설가 이야기가 그랬고, 디사운드의 노래가 그랬으며 나무위키에서 찾은 라이칸의 흉폭해지는 것을 막는다는 투구꽃 등등... 진지한 소설이라기 보다 <스틸 라이프>라는 장르물에 집중하던 서영이 로맨스를 쓴 것처럼 그렇게 가볍게 읽으면 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7-12-19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윤이형 작가 <큰 늑대 파랑> 단편도 있잖아요. 늑대인간, 좀비, 사이보그 이런 소재를 촌스럽지 않게 다뤄서 좋더라고요^^

레삭매냐 2017-12-20 10:34   좋아요 0 | URL
오호 세련된 작가시로군요 :>

제가 항상 구태의연한 사고로 책을 접하다
보니 사유도 그렇게 흘러 가는 것 같습니다 헷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떻게 제목부터 좀 태클을 걸고 들어가 볼까. 제이디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 원제는 <Hillbilly Elegy>다. 엘러지는 단순하게 노래라기 보다, 애가나 비가라는 뜻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긴 <힐빌리의 애가>라고 했다면 좀 더 슬픈 이미지가 들었겠지만. 사실 제이디 밴스의 넌픽션은 슬픈 이야기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초반 1/3 가량을 무서운 속도로 주파했다. 쇠락해 가는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인근 힐빌리들, 초반에 보면 레드넥 혹은 백인 쓰레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에 대한 육성 증언이다. 해병대 출신으로 오하이로 주립대를 1년 11개월만에 졸업하고 내친 김에 미국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신시내티에서 변호사로 잘먹고 잘살고 있는 저자의 불우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구술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스스로 골창이라고 부르는 켄터키 잭슨과 오하이오 미들타운에서 삶은 다사다산 그 자체였다.

 

대물림되는 가난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기회를 오직 고등교육 뿐이었는데 역설적으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더 저렴한 비용으로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약중독자 엄마와 수시로 바뀌는 아버지, 가정폭력이 일상화된 집구석에서는 도저히 신분상승을 위한 사다리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 중에서 저자의 상황은 더 특별했다.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간호사 엄마의 너무 자주 바뀌는 새아빠 후보와의 사랑과 전쟁 때문에 꼬마 제이디와 이부남매 린지 누나는 고통 속에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다. 웰빙 도락의 원조 미국에서 고칼로리의 몸에 해로운 음식만 섭취하고 푸드스탬프에 의존해 사는 이웃들, 그 중에서도 손가락 까딱 하지 않고 정부보조금에 기대어 사는 복지 여왕 같은 비노동자들의 흥청망청한 소비지상주의에 저자는 진저리를 친다.

 

물론 저자도 힐빌리들이 처해 있는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노오력으로 성공한 사람 특유의 오만함이 곳곳에서 보이는 점이 독자의 반감을 자극한다. 물론 사소한 자존심에 목숨 걸고 뭐든 주먹이나 총기로 해결하려는 힐빌리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의 육성증언이라 망정이지 외부인의 시각이었다면 그보다 큰 반발감이 들지 않았을까. 어려서 엄마와 함께 죽을 뻔한 경험을 한 제이디 밴스는 엄마가 아동학대죄로 감옥에 자신과 누나가 위탁가정에 맡겨져야 하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법정에서 거짓 증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긴 간호사들의 불시 약물검사를 위해 자신의 소변을 받아 달라고 부탁하는 엄마에게 증오심을 느끼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나마 저자에게는 켄터키 잭슨 출신의 할보와 할모가 든든한 뒷심이 되어 주었던 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에 지원해서 4년간 자립심을 기르고, 대학에 진학해서 자신도 다른 이들처럼 자존감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 성공의 결정적 비결이었다. 아마 저자는 자신의 성공 스토리가 모든 힐빌리들에게 적용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리라.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자신의 진짜 문제는 유년시절 경험한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ACEs:Adverse Childhood Experiences)’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수시로 본색을 드러내는 법보다 주먹이 우선이라는 할모의 가르침대로 불끈하는 성정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힐빌리 출신 아이비리그 변호사라는 꿈도 꾸지 못할 신분 상승이라는 이룬 저자에게도 쉽지 않은 인생의 과제였다.

 

넌픽션 <힐빌리의 노래>를 읽으면서 주목했던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저자가 예일대 로스쿨에서 배우게 되는 사회적 자본 다시 말해 인맥의 중요성이었다.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은 노오력에 근거한 성공지상주의를 강조하지만, 그 뒷면에는 바로 이미 기득권을 형성한 엘리트 계급 사이에서의 인맥관리가 실력보다 더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긴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했을 정도라면 이미 개개인의 실력과 성공을 향한 욕망은 입증된거나 마찬가지겠지만. 어제 읽은 어느 기사에서 그런 성공신화에 매달린 능력주의로 포장된 이데올로기야말로 21세기 공화정에서 타파해야 한 적폐 중의 적폐라는 주장에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정치적인 면에서 흥미롭게 읽는 또다른 내용은 원래 1970년때까지만 해도 열렬하게 민주당을 지지하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의 쇠락해 가는 러스트벨트 지역이 할보에 따르면 민주당 출신 ‘개자식’ 월터 먼데일 때문에 몽땅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미국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계급투표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도 동부 출신 주류 엘리트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반감 때문에 수많은 힐빌리들이 트럼프에게 투표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해서 과연 자신들에게 이익을 되었는지 나는 이 자리를 빌어 힐빌리들에게 묻고 싶다. 빈곤하지만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 살려는 힐빌리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정부보조금 같은 지원이 아니라 쓸만한 일자리인데, 과연 트럼프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하긴 애초부터 힐빌리와 트럼프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던가.

 

제이디 밴스가 십대 시절에 경험한 기독교 근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자신들과 다른 주장과 해석을 하는 이들을 사탄으로 만들어서 싸우자는 십자군 정신을 저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제이디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레드 제플린을 비롯한 록음악을 사탄의 음악으로 규정하고 못듣게 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빵 터져 버렸다. 또 한편으로는 종교를 가진 이들이 그래도 마구잡이로 삶을 사는 힐빌리들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분석에 수긍하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의 기술을 통해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지역의 주류인 힐빌리들의 삶을 규정하는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종교를 엿볼 수가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1부까지는 그런 대로 흥미를 가지고 읽었는데 성공신화로 치달아 가는 2부에서는 후반으로 갈수록 흥미가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제이디 밴스처럼 힐빌리 출신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면 누가 이 책에 관심이나 가졌을까. 그런 점에서 지금도 진짜 힐빌리의 삶을 사는 누군가의 글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전에 저넷 월스가 쓴 <더 글라스 캐슬>을 읽어서 힐빌리들에 대한 내성이 생긴 탓일까. 저넷 월스의 글에서는 그래도 유머라도 있었지, 제이디 밴스의 글은 정말 비가 혹은 애가에 가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prenown 2017-12-19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혈연,지연,학연은 극복해야할 적폐인데 특히 우리사회에선 어려운거 같아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조직과 사회에서 왕따당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화죠.^^.

레삭매냐 2017-12-19 11:11   좋아요 1 | URL
돌아서면 우리가 진짜 남인데,
이익을 공유할 때만 ˝우리˝라는 설정입니다.

나의 이익을 넘본다면 정말 남보다도 못한
관계로 떨어지게 되는.
 
바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인정하자. 그때나 지금이나 존 밴빌의 <바다>는 나에게 읽기 만만한 작품이 아니었다. 수년을 질질 끌던 책을 아마 작년에 다 읽었었지. 그러다가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던가. 다른 번역자였다면 또 모르겠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번역자였다. 그전 책과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 결정적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독서 모임 책으로 선정돼서 읽게 되었는데, 책은 읽었는데 독서모임에는 미처 나가지 못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2013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영화도 보고 싶었지만, 아마존 말고는 방법이 없어서 패스했다.

 

소설 <바다>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아내 애나를 잃은 홀아비 미술 역사학자 맥스 모든이 50년 전 추억을 되새기며 다시 찾은 시더스에서의 며칠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모두 세 가지 시점이 교차되며 등장한다. 반세기만에 다시 찾은 시더스의 현재,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내 애나의 다가오는 죽음을 알게 된 1년 전 그리고 꼬마 맥스에게 신들 같았던 그레이스 가족과 함께 했던 50년 전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소설의 출발점은 지금이 아닌 50년 전의 시더스다.

 

지난 1년 동안, 병마와 싸우던 아내를 잃은 홀아비 맥스는 늙은 사냥개 같은 모양새로 시더스를 다시 찾는다. 외동딸 클레어에 따르면 맥스는 과거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은 자가 겪어야 하는 미묘한 게임을 해야 한다. 홀로 남은 자의 공허와 메아리로부터 그는 도망치고 싶었던 걸까. 어쨌건 간에 밸리레스에서 상처한 남자 맥스 모든은 모두에게 동정을 받았다. 맥스 모든은 “세상을 조금씩 재서 섭취”(180쪽)하는 방식으로 살아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한편 아버지 짐이 떠난 뒤, 모든(Morden) 가족은 어쩔 수 없이 궁핍에 시달렸다.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을까 맥스는 부유한 집안의 애나 와이스와 만나 결혼하고 마침내 유년시절 이래 꿈꾸어 왔던 계급적 상승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딸 클레어 역시 딜레당트(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이 아닌 취미 삼아 하는 사람, 164쪽)였다. 태어날 때부터 신들에게 매료된 소년 맥스에게 부족한 건 자산 뿐이었다는 저자의 지적이 날카롭게 들린다. 빈곤 가운데 돌아가신 맥스의 어머니가 과연 자신의 아들이 벨 에포크 시절의 피에르 보나르에 대한 논문을 쓰는 지식인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부잣집 며느리가 탐탁지 않았던 맥스의 어머니는 자식의 아들 이름이 심지어 맥스가 아니었냐며 따진다. 그렇다면 그의 원래 이름은 뭐였을까? 맥스 모든 박사는 결혼이라는 전통적 방법을 통한 계급적 상승을 이루면서 아예 자신의 정체성마저 바꾸어 버렸단 말인가.

 

이상이 현재라면, 과거의 회상은 좀 더 감정적으로 미묘하면서 복잡하다. 시더스에서 소년 맥스는 자신에게는 신과 같았던 부유한 그레이스 가족과 만나게 된다. 아버지 칼로, 어머니 코니 그리고 쌍둥이 남매 클로이와 벙어리 마일스. 그리고 가사도우미 로즈로 구성된 그레이스 가족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현현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만신전이 떠올랐다. 맥스의 신에 대한 비유 그리고 집착 때문이라고 해두자. 소년에게 코니 그레이스 아줌마는 그야말로 아프로디테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성숙한 여인 코니 그레이스에게서 소년의 감정은 코니의 딸 클로이에게로 점점 이동한다. 그 과정을 “심미적인 결정화”라는 표현으로 인식과 인정의 장엄한 순간이었노라고 설명했던가. 스타일리스트로서 작가의 실력이 극대화된 장면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밝혀지듯이 어떤 계기로 신들 같았던 그레이스 가족에게 비극이 발생하고, 신들은 바닷가를 그렇게 떠난다.

 

존 밴빌은 어려서부터 그의 우상이었던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서사의 전개보다는 주인공의 감정선의 변화에 따른 의식의 흐름을 좇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소설 <바다>에서 독자는 주인공 맥스 모든 박사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솔직히 역자 후기에서 역자가 존 밴빌을 뛰어난 스타일리스트라고 표현한 것처럼, 스타일에서는 뛰어날지 몰라도 서사는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독자는 과연 <바다>에서 어떤 줄거리를 뽑아낼 수 있을까. 결말 부분에 가서 맥스 모든 박사가 술에 취해 익사할 뻔한 장면은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에서 조지의 모습이 기묘하게도 겹쳐졌다. 일종의 자기애,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물들이라고나 할까.

 

기억 속에 사는 남자 맥스 모든은 “자기의식의 진정한 기원”(158쪽)을 십대 시절에 사랑한다고 믿었던 클로이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내 애나와의 불화는 필연적인 게 아니었을까.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상대와의 대결이라니. 남편을 미워했다고 고백하는 애나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병상에서 죽어가는 애나는 남편이 아닌 딸 클레어에게 카메라를 배달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병원에서 타인의 고통을 그 카메라(컬러 사진)로 기록했다. 그녀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녀의 모습에서 죽음을 대하는 하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애나와 달리 클레어의 아버지 맥스는 황금알을 낳지 못하는 통통한 거위였기 때문에 모녀 관계에서 배제된 걸까. 애나가 입원한 병실에 대한 묘사에서는 얼마 전에 읽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환자에 대한 서술 부분이 연상되기도 했다.

 

겸업작가 존 밴빌의 열네번째 장편 <바다>는 두 번 읽어도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다>가 맨부커상을 수상한 2005년 경쟁작으로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를 비롯해서 제이디 스미스의 <온 뷰티>, 알리 스미스의 <우연한 여행자>, 시배스천 배리와 줄리언 반스의 작품들이었다. 특히 <나를 보내지 마>와 마지막 순간까지 경쟁을 벌였다고 하는데, 그만큼 부커상 심사위원들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서사보다 존 밴빌의 스타일을 높게 평가했던 게 아닐까. 그나저나 그 수많은 존 밴빌의 작품들이 국내에 출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속히 신간 <오스몬드 부인>을 비롯한 작품들이 출간되길 바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17-12-18 1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이 책 읽다 덮어서 곱게 모셔뒀어요....
내년에 아마 만날지도 몰라요...

레삭매냐 2017-12-18 13:18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서 서사가 재밌거나 그런 책은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부커상의 광휘와 대가의 작품을
읽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싶습니다.
 
빌리 린의 전쟁 같은 휴가
벤 파운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풋볼을 관심을 갖고 본 것이 2002년 한겨울이었다. 당시 풋볼 규칙도 하나 모르면서 내가 응원하던 팀은 뉴잉글랜드 페이트리어츠였다. 주전 쿼터백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고, 백업 쿼터백이었던 탐 브래디의 맹활약에 힘입어 디비전 시리즈에서 만난 오클랜드 레이더스에게 경기 종료 30초인가를 남겨 두고 마지막 킥이 성공하면서 챔피언십을 거쳐 결승전에 진출했다. 비록 언더독이긴 했지만 당시 최강이었던 세인트루이스 램스를 꺾고 첫 번째 슈퍼볼 우승컵을 들어 올릴 수가 있었다. 특히 오클랜드와의 경기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전형적인 뉴잉글랜드 겨울 날씨 가운데 진행이 되었는데, 그 엄동설한에도 흥분해서 웃통을 벗고 경기 내내 괴성을 지르며 펄펄 날뛰던 팬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 정도로 풋볼, 미식축구는 미국 문화를 대변한다는 방증이 아닐까. 장강 이남의 귤이 회하를 건너 탱자가 되듯이, 영국에서 시발된 축구가 대서양을 건너가 아메리카에서는 색다른 방식의 진화를 거쳐 풋볼이 되었다. 그렇게 복잡한 규칙으로 ‘조직화’된 구기 풋볼은 미국 남자 청소년들에게 길들여진 폭력성과 오락거리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풋볼이 주는 환상에서 깨어난 빌리 린 같은 친구도 있지만, 엄청난 수의 성인들이 오늘도 오락으로 혹은 도박으로 풋볼을 즐기고 있다. 벤 파운틴은 자신의 첫 장편소설 <빌리 린의 전쟁 같은 휴가>로 그런 풋볼과 아이래크(이라크) 전쟁, 엔터테인먼트 산업 그리고 치어리더들과의 드라이섹스로 점철된 미국 문화를 정조준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2004년 추수감사절 즈음이다. 이라크에 파병된 브라보 분대의 19세 소년병 빌리 빈은 격전지 알안사카르 운하 전투에서 동료 브림 하사를 구하는 장면이 방송 취재기자의 카메라에 잡히면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어 버렸다. 비록 빌 리가 목숨을 던져 가며 구하려 했던 슈룸은 전사했지만, 브라보 대원들은 부시행정부가 기획한 승전여행(Victory Tour)을 하기 위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문제는 이 기획 자체가 전형적인 정치적 선전, 한마디로 말해 프로파간다였다는 점이다. 조지 부지 2세, 딕 체니 그리고 칼 로브 등 아이래크 전쟁기획자들은 하나 같이 40년 전 베트남 전쟁 기피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기획한 아무런 명분도 없는 테러와의 전쟁에 내몰린 미국의 청년들이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는 조국을 구한다는 타이틀을 가지고 생과 사가 냉혹하게 갈리는 전쟁터에 투입되었다.

 

열사의 땅 아이래크와 모든 것이 풍족해 보이는 미국은 너무 달랐다. 젊은 미군 병사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부유한 미국의 부자들은 댈러스 스타디움에 마련된 초호화 컨트리클럽에서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뷔페 음식을 즐기고 잭콕을 신나게 마시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당대 최고의 인기그룹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슈퍼스타 비욘세와도 만날 수 있다고 하지 않은가. 할리우드 최고의 영화제작자 앨버트는 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전쟁영화를 만들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해온다. 아미 소말리아에서의 처절한 패배로 <블랙 호크 다운>으로 만들어지는 판에 아이래크가 안될 이유가 없지. 브라보 대원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 같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빌리의 감정은 복잡하기만 하다. 자신이 입대하게 된 경위부터 그렇지 않은가. 사랑하는 둘째 누나 캐스린이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면서, 약혼자로부터 파혼을 당하자 전형적인 힐빌리 답게 복수전에 나섰다가 중범죄 혐의로 기소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군입대를 조건으로 감형 받고 전장으로 떠나게 된다. 전쟁영웅으로 금의환향한 집에서 가족들을 빌리를 열렬하게 환영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2박 3일 뿐이다. 게다가 엄청난 의료비 때문에(아마도 아버지의 뇌졸중과 누나 캐스린의 치료비) 40만 달러나 되는 빚을 졌다는 말에 빌리는 숨이 턱턱 막힌다. 무사히 아이래크에서 돌아와도 전망이 없어 보이는 텍사스의 고향 스토벌에서 그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전쟁영웅이 되어 전국 투어를 하면서 알게 된 상상을 초월하는 부의 세계의 단맛을 보게 된 빌리에게 지역 유지의 일자리 제의 따위는 가당치도 않다. 물론 빌리가 원하는 신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전쟁영웅이라는 타이틀 말고도 대학 교육이 필수라는 걸 잘 알지만, 십대 소년병으로서는 당장 무작위성이 난무하는 적대적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임무다. 한밤 중에 소변을 보러 나갔다가 음속을 돌파해서 날아오는 반군의 총탄에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조국을 위한 전쟁이라는 선전은 하나같이 개소리일 따름이다.

 

한때는 석유산업으로 번영하는 도시였던 촌마을 출신 청년을 주눅 들게 하는 스포츠 산업계의 발할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어쩌면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전쟁을 중계해 주는 CNN에 등장하는 전쟁이나 ESPN 채널로 전국에 중계되는 풋볼이나 매한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위험과는 전혀 상관없는 오락거리에 열광하는 대중들, 빌리 같은 미군 전쟁기계들이 무엇 때문에 아이래크에 가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결정적으로 브라보 대원들은 전역한 것이 아니다. 모두를 열광시키는 풋볼 게임이 끝나면 오늘 22시 소집되어 다시 전장으로 향해야 한다. 그래서 누나 캐스린은 빌리에게 복귀하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 보자고 제안하지 않았던가.

 

특이하게도 나는 이번에 영화와 소설을 같이 보고 읽고 있는데, 소설의 상당한 부분이 영화에서는 꼴랑 30분 만에 다루어질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락커룸에서 풋볼선수들과 진짜 전쟁에서 사용하는 무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진짜 텍사스 스타일이로군. 그리고 소설에서는 잘 몰랐던 진수성찬이 차려진 컨트리클럽의 추수감사절 뷔페의 호화찬란함은 영화가 훨씬 더 잡아냈다는 느낌이다. 아이래크에서 브림 하사와 빌리가 나누는 대화는 인도의 전사 그리고 비슈누 신에 대한 동양적인 신비로움이랄까 그런 점들이 그리고 윤회에 대한 생각들이 얼핏 지나쳐 갔다. 바로 이런 게 영화의 힘이로군.

 

벤 파운틴은 현재 텍사스 댈러스 카우보이스 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현재를 배경으로, 험비를 타고 기지를 나설 때마다 공격을 받던 아이래크 시절과 좀 더 가까운 과거인 승전여행으로 귀향해서 고향 스토벌에서 가족들과 보내던 시간들을 정밀하게 교차하면서 어떻게 보아도 정의가 없었던 아이래크 전쟁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이어간다. 부시 정부가 어떤 식으로 선전을 하더라도 9-11 테러의 배후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지목하고 시작한 아이래크 전쟁은 명분이 없었다. 시들어 가는 미국의 힘을 세계에 과시하겠다고 시작한 명분 없는 전쟁은 미국을 정치 경제적 수렁에 빠트려 버렸다. 정치적 선전물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부시 행정부에게 브라보 분대야말로 아메리카의 위대한 신이 내려준 선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풋볼 스타디움에서 선량한 미국 시민들이 브라보 대원들을 격려하는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져 왔다. 그들은 과연 전쟁의 실상을 알고 있을 걸까? 소가 끄는 달구지가 시가를 어슬렁거리는 시가에서 적대적인 아이래크 사람들에게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무작위성이 판치는 곳에 떨어진 해병 대원들의 불안과 긴장을. 부시 행정부가 전쟁을 시작한 핵심 이유 중의 하나였던 WMD(대량 살상 무기)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노먼 오글스비는 그들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면서도 그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기는 거부한다. 영화제작자 앨버트가 브라보 대원들이 아이래크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영화 계약을 하고 싶어한다는 약점을 알아낸 ‘놈’은 제작비를 줄이겠다는 욕심에 입으로는 그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치하하면서 한편으로는 계약 단가를 후려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닌가? 미국식 자본주의의 추악한 단면을 저자는 냉정하게 저격한다.

 

소설은 후반으로 갈수록 뒷심이 떨어진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빌리에게 게임을 역전시킬 만한 패가 주어지지 않아서였을까. 사실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몸뚱이 하나 밖에 없는 브라보 대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아이래크행 하나 뿐이지 않은가. 빌리의 누나 캐스린은 반복해서 다른 선택을 하라고 문자를 날리지만, 해병 대원 빌 리가 전우들을 배신하고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아니 이미 사회구조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잃을 게 많아서 그만큼 걱정거리가 많다는 부자들의 고민을 최소한 빌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자 이제 소설을 다 읽었으니 절반 정도 남은 영화를 마저 봐야겠다. 이안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화도 나쁘지 않은 편인데 흥행에는 참패를 한 모양이다. 사실 이 소설도 영화 덕분에 알게 돼서 읽게 됐다. 저자의 전작 소설집 <체 게바라와의 짧은 조우>도 출간됐으면 좋겠다. 10년 만에 소설을 발표하다니, 과작하는 작가인가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