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레인 - 상 - 영화 강철비 원작만화
양우석 지음, 김태건 그림 / 네오카툰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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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정말 오래 간만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한 편 봤다. 예전에 영화 보기가 취미였던 시절도 있었으나 다 오래된 시절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JSA 이래, 분단을 다룬 최고의 영화였다는 평을 마음에 품고 영화를 보러 갔다. 그리고 기대이상이었다. 최근 사이다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정우성이 맡은 북한 최고의 공작원 엄철우의 열연이 특히 돋보이는 그런 작품이었다.

 

최근 미국의 이상한 대통령과 북한 1호의 연이은 핵실험으로 한반도에 그 어느 때보다 전쟁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웹툰원작을 영화화했다는 영화 <강철비>가 던지는 메시지는 비교적 간단한다. 한민족에게 재앙이 되는 제 2의 한국전쟁은 어떻게든 막아라. 정찰총국장 리태한(김갑수 분)은 북한 군부 쿠데타를 기획 중이라는 호위총국장 박광동(이재용 분)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한때 최고의 정예 엘리트 요원이었던 엄철우(정우성 분)에게 내린다. 마치 마피아들이 그렇듯이 가족들의 안위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엄철우는 개성공단 시찰에 나설 북한 1호를 동반할 예정인 박광동 저격에 나선다.

 

문제는 저격 현장에 박광동은 보이지 않았고, 북한 특수부대원에게 탈취당한 미군 MLRS(Multiple Launch Rocket System)의 폭격으로 시찰에 나선 북한 1호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엄철우는 공화국 수령을 지키겠다는 일념에 나선 북한 처자 두 명과 함께 남쪽으로 향하는 중국 차량 속에 섞여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북한 특수부대 에코팀 소속 최명록(조우진 분)이 이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총격전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1호의 뒤를 쫓는다.

 

한편 한국에서는 막 대선을 치른 상황으로 현직 대통령 이의성(김의성 분)에서 차기 대통령 김경영(이경영 분)으로의 권력 이양이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서 벌어진 쿠데타에 당연히 국가안보팀은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곽철우(곽도원 분)는 긴박하게 전개되는 상황 분석 중에 북한 1호를 호위 중인 엄철우가 자신의 부인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갔을 것이라는 추리에 도달한다. 아, 그 전에 리태한에게 현장 보고를 하고 일산에 머물던 엄철우 일행을 다시 에코팀이 엄습하면서 한바탕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MLRS의 공격으로 두개골에 피탄된 북한 1호의 생사가 불투명한 위기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통령 전쟁불사를 외치는 보수파 이의성은 전국적인 계엄령을 발표하고 우방 미국에 북한 핵폭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 보겠다는 차기 대통령 김경영의 의사는 무시한 채 말이다. 미국이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는 핵폭 작전과 파멸적 전쟁을 막기에 주어진 시간은 36시간, 남북한의 철우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민족의 공멸을 부를 수도 있는 전쟁 방지에 나선다.

 

- 이하 영화에 대한 중요한 스포일러들이 다수 포진해 있으니 감안해서 봐 주시길 -

 

참여정부 이래 자주국방과 작전권 회수라는 명제를 가지고 싸워 왔지만, 역시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운명을 타의에 맡겨야 하는 처량한 신세다. 미국의 첫 번째 핵폭 공격이 북한의 요격 미사일(?)에 의해 무력화되고(북학의 미사일 능력이 그 정도나 되었단 말인가) 두 번째 공격을 요청하는 한국 대통령의 나름 절박한 요청에 미국 담당자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사실상 북한 1호를 제거하고 군부 쿠데타를 기도한 정찰총국장 리태한의 음모를 그 유능한 엄철우가 계속해서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아무리 감청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엄철우가 은신해 있는 곳을 에코팀이 기가 막히게 찾아낸단 말인가. 그 정도라면 상대방을 한 번쯤은 의심해 봤어야 했는데, 자기 가족의 생사와 안위를 맡긴 탓인지 엄철우의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이다.

 

선제공격을 받은 북한 당국은 당연히 선전포고를 했고, 우리에겐 잊혀진 존재였던 수많은 땅굴을 통해 15만 특수부대를 남침시켜 미군과 10만명에 달하는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고 미국과 협상에 나서겠다는 리태한의 큰소리가 마냥 우스개 소리만으로 들리진 않는다. 어쩌면 선군정치라는 미명 아래 군부를 우대하고 있지만, 핵개발 과정에서 틀어져 나온 불평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일정 정도의 군사적 도발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 9년 동안의 보수정권 아래서, 강대강 압박작전으로만 일관해서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북한이 핵개발 능력을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개발시키는데 성공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한 번 DJ의 햇볕정책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위기가 발생한 곳이 개성공단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점도 크다. 남북관계 협력의 시발점이었던 개성공단 협력과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마당에, 우리가 북한을 상대로 제재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실질적으로 북한 노동자들의 저렴한 임금으로 이익을 본 것은 북한보다도 우리 기업들이 아니었던가. 어느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북한 1호가 남한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좀 비현실적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사태가 모두 진정된 뒤 북한 1호를 북한으로 귀환시키는 과정에서 북한이 가진 핵무기 절반을 인수 받는다는 것이 황당했다. 아무리 최고존엄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수십년 동안 고난의 행군 끝에 개발한 핵무기의 절반을 우리에게 넘긴다?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신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시한부 삶을 살고 있던 엄철우 동무가 자신을 희생해서 전쟁에 미친 리태한 일당과 동귀어진한 것이 아닐까.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살면서, 한국 주재 외국인들이 북한의 핵실험 뉴스를 듣고 경악했을 때 한국 동료들은 그런 뉴스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올봄에는 어떤 스카프 색깔이 유행일까 고민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계엄령이 선포된 마당에도 한국 시민들은 불야성 같은 서울에서 연말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지 않았던가.

 

다시 한 번 전쟁이 일어나서는 절대 안된다는 명제를 떠올리게 해주는 영화 <강철비>였다. 아, 그리고 지디(GD)동무는 영화에서도 그렇듯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세계적인 스타이긴 한 모양이다. 케이팝의 위력이 북한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 양념이 인상적이었다. 영화에서 김경영 당선자가 보고 있던 빌리 브란트의 책이 국내에 출간되었나 싶어 검색해 보았는데 그런 책은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걸까. 다음 웹툰 원작을 잠시 살펴보니, 원작과 영화는 상당 부분 다른 점이 있구나. 무료는 두 편 뿐이라 나머지는 못봤지만, 주인공 청와대 행정관인 박재익이 곽철우로 바뀌었고 대통령의 조카였다. 그리고 웹툰의 스토리라인을 양우석이 맡았는데 영화감독 그 양우석인지 궁금하다. 나무위키 자료를 보니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영화 판권이 넷플릭스에 팔렸다고 한다. 넷플릭스가 대세이긴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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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부터 혁명을 읽고 있다. 아주 오래 전, 정말 오래 전에 읽다가 아마 완독하지 못했던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을 지난 일요일 헌책방에 달려가서 사왔다. 제법 분량이 있는 책이었는데(정말 두툼했다) 아무래도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지 술술 잘 읽혔다. 다만, 다른 책들이 속속 등장해서 일단 잠시 읽기를 멈추고 있는 상황이다.

 

1936년 장제스의 백군, 다시 말해 국민당군의 추적을 피해 대장정 끝에 산시성의 바오안에 자리잡은 홍군 사령부를 미국 캔자스 출신의 젊은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는 쑨원의 부인 쑹칭링의 소개장 하나만 달랑 들고 찾아 들었다. 당시 서북 지역의 중화 소비에트 담당은 만주 군벌 출신의 청년 원수 장쉐량이었는데 이미 중국을 침략 중이던 외세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두 번째 국공합작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몇 달 뒤 시안사건으로 구체화 되기에 이른다.

 

첫 번째 국공합작은 장제시의 친위쿠데타로 비극으로 끝났고, 장제스가 통치하는 중국에서 공산당은 외세에 앞서 박멸해야 하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층 엘리트 계급의 견해였고, 인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계급에서는 마오 쩌둥이 이끄는 홍군이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훗날 그 사람들은 자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거라고 생각했던 독재자가 자신들을 절대적 빈곤과 기근의 수렁에 빠트릴 줄 예상이나 했을까.

 

어쨌든 외국인 저널리스트로서는 백군의 봉쇄선을 뚫고 적도 바오안에 도착해서 저우언라이와 마오 쩌둥 등 장제스 군대가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건 이른바 공산 비적 수괴들과 다수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꿈꾸는 공화세계, 민족해방 그리고 동아시아 질서의 개편 등 같은 당시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꿈만 같았던 이야기들을 글로 옮겼다. 이 정도까지가 다시 읽기 시작한 <중국의 붉은 별>에 대한 맛보기다.



 






 

 

 

 

 

 

다음 차례는 조선공산당에 대한 이야기다. 어제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우연히 훑어본 신간 코너에서 최백순 씨가 지은 <조선공산당 평전>을 냉큼 빌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차에 이게 왠 떡이란 말인가. 아니 그런데 보통 평전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전기물이 아니었던가. 공산당집단에 대한 평전이라니. 해방된 남한과 북한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일제시절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담당했던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평전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아직 처음에 등장하는 관련단체와 인물들 편만 읽어 봐서 사실 그다지 할 말이 많은 건 아니다. 한 때, 역사를 전공했던 일개 독자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최근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 약산 김원봉 선생, 심산 김창숙 선생 정도. 그리고 나중에 남부군으로 알려진 경성콤 그룹의 이현상을 비롯한 이관술, 김삼룡이 있다.

 

어제인가 어느 신문에서 브루스 커밍스가 저술한 <한국 전쟁의 기원>에 대한 글을 보면서 일제가 1931년 만주를 침략하면서 세운 만주국이야말로 한국 전쟁의 시발점이었는 평가를 읽었다. 일제 하에서 최고 엘리트였던 군인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던 친일부역자들과 그들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자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그야말로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천하의 원수들이었다는 것이다. 해방 공간 남한에서 주도권을 잡은 그런 친일파들을 독립운동가들은 어떤 시선을 보았을까.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한 어느 독재자에 대해 공은 공대로, 그리고 과는 과대로 평가하자고 하는데, 그들의 주장대로 하자면 일제시대 무장독립투쟁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같은 잣대를 견주어야 하지 않을까.

 


 






 

 

 

 

 


자, 혁명을 읽는 시간의 마지막은 최근 방중 중에 충칭 임시정부 청사를 최초로 방문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기록된 문재인 대통령이 베이징대 강연에서 언급한 김산의 일대기를 다룬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다. 사실 이 책도 예전에 대학 시절 선배에게 선물을 받았나 어쩌나 하는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마 인천집 옥상 어딘가에 이 책을 읽을 것이다. 나의 <녹슬은 해방구>와 함께.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던 차에 어제 들른 헌책방에 오늘 들어온 책 카트에 이 책이 실려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작년에 나온 책이라 컨디션도 아주 좋았다. 원래 사려고 마음먹었던 책을 살포시 내려놓고 대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에드가 스노의 전처로 알려진 님 웨일즈가 1937년 옌안에서 만난 조선대표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으로, 평북 용천 출신으로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을 살 간 혁명가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500쪽 남짓한 책인데, 단박에 100쪽을 읽어 버렸다. 구한말 태어나 서러운 식민지 백성으로 자라난 혁명가 장지락은 그 시절 대부분의 혁명가들처럼 3∙1운동을 계기로 제국주의 지배에 시달리는 조국의 현실을 깨닫고 혁명의 길에 나서게 된다. 원래 크리스천이었던 장지락은 평화적 운동으로는 일제의 무자비한 통치를 끝낼 수 없다는 각성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계열강 그 중에서도 미국의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호혜적 선의를 기대했지만, 다 부질 없는 짓이었다는 것이 곧 밝혀지지 않았던가.

 

나머지 부분은 아직 못 했지만, 일본 유학을 거쳐 중국에 귀화해서 중국공산당원 자격으로 광둥코뮌과 중국 최초의 소비에트였던 하이루펑 소비에트에서 살아남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서론 부분에서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인민들이 대오각성하게 될 날을 기대한다고 구술하였는데, 전형적인 코민테른에 입각한 이상주의적 발언이 아니었나 싶다. 이미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이 보여준 대로, 계급의 이익보다 우선 민족주의 전쟁의 실체를 보지 않았던가. 물론 당대의 한계일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풍운아 장지락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님 웨일즈과 인터뷰한 다음 해인 1938년 공산당 보안책임자였던 캉성에 의해 트로츠키파 스파이로 몰려 억울하게 처형을 당했다. 중국공산당에서 훗날 복권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이제 대한민국 건국 100년이 480일 남았다. 부족한 글로나마 자랑스러운 조국의 별이 된 이들을 추모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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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20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혁명을 꿈꾸며 치열하게 살았던 그분들에게 욕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젊은날의 각오가 무색해지는 현재의 삶..부끄럽네요!

레삭매냐 2017-12-20 11:48   좋아요 0 | URL
저도 마찬가지라 창피합니다 ㅜㅜ

cyrus 2017-12-20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리랑>.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펼쳐보지 않은 책입니다. 님 웨일스의 자서전도 나왔다고 하던데, 상당히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구하기 힘듭니다.

레삭매냐 2017-12-20 13:25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다 만 책이어서 그런지 어쩐지
진도가 쑥쑥 나가고 있습니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도 비슷한 시기
를 다룬 책이라 해서 한 번 구해서 읽어볼까
싶었는데, 마땅하게 땡기는 판본이 없네요.

sprenown 2017-12-20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찾아보니 저에게도 <인간의 조건> 지식공작소,김붕구 옮김 이 있네요.. 읽지는 못하고,앞뒤로 뒤적여 보기만 했네요.ㅎㅎ

레삭매냐 2017-12-21 14:28   좋아요 1 | URL
<인간의 조건> 새로운 번역으로 만나봤으면
하는 그런 바람입니다.

지식공작소 버전은 레어 아이템이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부럽네요 :>

서니데이 2017-12-22 2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2017년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2017-12-23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랑 로망 컬렉션 Roman Collection 11
윤이형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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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쩔 수 없는 꼰대인가 보다. 윤이형 작가의 <설랑>을 읽으면서 주인공 한서영과 최소운의 사랑 타령을 보면서 계속해서 헤테로섹슈얼리티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화급하게 체할 것처럼 빠진 줄거리에 몰입하다 보니 누가 여자고, 누가 남자지? 뭐 이런 생각에만 집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둘 다 여자다. 한 명은 레즈비언이고, 다른 한 명은 바이섹슈얼이란다. 허허, 스토리가 어디로 가는건가 그래. 설상가상으로 <언더월드>에나 나올 법한 라이칸(늑대인간)까지 등장한단다. 그렇다면 장르물인가?

 



로베르토 볼라뇨를 좋아하시나요?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과감하게 예설!이라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쌍방 간에 작가와 팬으로 기묘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여인이 술잔을 나누며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야말로 소설 <설랑>에서 내가 단연 최고라고 생각하는 장면이다. 이제 막 독서클럽에 입문한 소녀감성 같은 설정이긴 하지만 우리 같은 책덕후들에게는 그야말로 절정의 로맨틱한 장면이 아니던가. 선수들은 선수들을 알아 본다고 상대방이 쓴 글로 상대방이 좋아하는 작가군을 추정해 가는 장면, 아 정말 압권이었다. 그렇다, 나는 줄리언 반스는 좋아하지 않지만 로베르토 볼라뇨는 정말 좋아한다. 다만 어느 책을 골라 시작하느냐에 따라 진입장벽이 문제가 될 거라고 경고장을 발부하고 싶다. 난 운이 좋은 편이었다.

 

참참, 자꾸만 이야기가 곁다리로 새는 구나. <설랑>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말이다. 한서영은 보름달이 뜨면 라이칸, 그러니까 늑대인간으로 변한다. 다만, 꿈속에서만. 그리고 사랑에 빠진 상대방을 난폭하게 잡아먹고 글을 쓴다. 그러지 않고서는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는 저주에 빠졌다. 그만큼 글쓰기가 어렵다는 은유일까. 어쨌든 당연히 자신보다 세 살 적은 최소운와 사랑에 빠진 뒤로는 글을 한 줄도 못쓰고 있다. 반면 연인 최소운은 사랑의 힘으로 엄청난 글을 생산해낸다. 수일만에 천 페이지씩, 관계는 가감하는 보합이라는 설정이려나.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좋은 세상이다. 책에 나온 노르웨이 혼성 3인조 디사운드(d'Sound)의 <If You Get Scared>도 유튜브로 해서 들어 보았는데 아무래도 상쾌발랄하긴 하지만 잘 모르는 곡이라 그런지 감흥은 그닥. 그럼 이제 서영의 라이칸 증세를 억제하기 위해 소운이 심은 투구꽃에 대한 나무위키 정보를 검색해 봐야 하나. 왜 이렇게 곁다리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지 모르겠다. 아, 검색해서 찾아보니 바로 시간차공격으로 보름달을 피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구만 그래. 그러니까 늑대인간에게 보름달만 보여주지 않으면 된다는 거구만 그래. 난 그것보다도 예전에 텔레비전 시리즈로 방영된 <늑대미녀>(She-Wolf of London 혹은 Love and Curses) 떠올라서 내친 김에 그것도 찾아봤다. 분장이 왜 이리도 유치해 보이는지.

 

그 다음 서사는 좀 진부하다. 작가 부모에게 버림 받은 아이 서영은 글쓰기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저주에 걸렸다. 그리고 어려서 방문했던 자연사박물관에서 만난 얼치기 박제사가 만든 늑대박제 때문인지 어쩐지 예의 라이칸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 내용이 나를 설득시킬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닌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저런 일들을 극복하고 두 사람은 사랑을 이어간다는 내용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메인 서사보다 자꾸만 소설을 완성해 가는 와중에 만난 주변부에 눈길이 간다. 서영과 소운의 좋아하는 소설가 이야기가 그랬고, 디사운드의 노래가 그랬으며 나무위키에서 찾은 라이칸의 흉폭해지는 것을 막는다는 투구꽃 등등... 진지한 소설이라기 보다 <스틸 라이프>라는 장르물에 집중하던 서영이 로맨스를 쓴 것처럼 그렇게 가볍게 읽으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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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12-19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윤이형 작가 <큰 늑대 파랑> 단편도 있잖아요. 늑대인간, 좀비, 사이보그 이런 소재를 촌스럽지 않게 다뤄서 좋더라고요^^

레삭매냐 2017-12-20 10:34   좋아요 0 | URL
오호 세련된 작가시로군요 :>

제가 항상 구태의연한 사고로 책을 접하다
보니 사유도 그렇게 흘러 가는 것 같습니다 헷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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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제목부터 좀 태클을 걸고 들어가 볼까. 제이디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 원제는 <Hillbilly Elegy>다. 엘러지는 단순하게 노래라기 보다, 애가나 비가라는 뜻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긴 <힐빌리의 애가>라고 했다면 좀 더 슬픈 이미지가 들었겠지만. 사실 제이디 밴스의 넌픽션은 슬픈 이야기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초반 1/3 가량을 무서운 속도로 주파했다. 쇠락해 가는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인근 힐빌리들, 초반에 보면 레드넥 혹은 백인 쓰레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에 대한 육성 증언이다. 해병대 출신으로 오하이로 주립대를 1년 11개월만에 졸업하고 내친 김에 미국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신시내티에서 변호사로 잘먹고 잘살고 있는 저자의 불우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구술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스스로 골창이라고 부르는 켄터키 잭슨과 오하이오 미들타운에서 삶은 다사다산 그 자체였다.

 

대물림되는 가난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기회를 오직 고등교육 뿐이었는데 역설적으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더 저렴한 비용으로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약중독자 엄마와 수시로 바뀌는 아버지, 가정폭력이 일상화된 집구석에서는 도저히 신분상승을 위한 사다리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 중에서 저자의 상황은 더 특별했다.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간호사 엄마의 너무 자주 바뀌는 새아빠 후보와의 사랑과 전쟁 때문에 꼬마 제이디와 이부남매 린지 누나는 고통 속에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다. 웰빙 도락의 원조 미국에서 고칼로리의 몸에 해로운 음식만 섭취하고 푸드스탬프에 의존해 사는 이웃들, 그 중에서도 손가락 까딱 하지 않고 정부보조금에 기대어 사는 복지 여왕 같은 비노동자들의 흥청망청한 소비지상주의에 저자는 진저리를 친다.

 

물론 저자도 힐빌리들이 처해 있는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노오력으로 성공한 사람 특유의 오만함이 곳곳에서 보이는 점이 독자의 반감을 자극한다. 물론 사소한 자존심에 목숨 걸고 뭐든 주먹이나 총기로 해결하려는 힐빌리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의 육성증언이라 망정이지 외부인의 시각이었다면 그보다 큰 반발감이 들지 않았을까. 어려서 엄마와 함께 죽을 뻔한 경험을 한 제이디 밴스는 엄마가 아동학대죄로 감옥에 자신과 누나가 위탁가정에 맡겨져야 하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법정에서 거짓 증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긴 간호사들의 불시 약물검사를 위해 자신의 소변을 받아 달라고 부탁하는 엄마에게 증오심을 느끼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나마 저자에게는 켄터키 잭슨 출신의 할보와 할모가 든든한 뒷심이 되어 주었던 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에 지원해서 4년간 자립심을 기르고, 대학에 진학해서 자신도 다른 이들처럼 자존감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 성공의 결정적 비결이었다. 아마 저자는 자신의 성공 스토리가 모든 힐빌리들에게 적용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리라.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자신의 진짜 문제는 유년시절 경험한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ACEs:Adverse Childhood Experiences)’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수시로 본색을 드러내는 법보다 주먹이 우선이라는 할모의 가르침대로 불끈하는 성정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힐빌리 출신 아이비리그 변호사라는 꿈도 꾸지 못할 신분 상승이라는 이룬 저자에게도 쉽지 않은 인생의 과제였다.

 

넌픽션 <힐빌리의 노래>를 읽으면서 주목했던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저자가 예일대 로스쿨에서 배우게 되는 사회적 자본 다시 말해 인맥의 중요성이었다.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은 노오력에 근거한 성공지상주의를 강조하지만, 그 뒷면에는 바로 이미 기득권을 형성한 엘리트 계급 사이에서의 인맥관리가 실력보다 더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긴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했을 정도라면 이미 개개인의 실력과 성공을 향한 욕망은 입증된거나 마찬가지겠지만. 어제 읽은 어느 기사에서 그런 성공신화에 매달린 능력주의로 포장된 이데올로기야말로 21세기 공화정에서 타파해야 한 적폐 중의 적폐라는 주장에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정치적인 면에서 흥미롭게 읽는 또다른 내용은 원래 1970년때까지만 해도 열렬하게 민주당을 지지하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의 쇠락해 가는 러스트벨트 지역이 할보에 따르면 민주당 출신 ‘개자식’ 월터 먼데일 때문에 몽땅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미국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계급투표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도 동부 출신 주류 엘리트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반감 때문에 수많은 힐빌리들이 트럼프에게 투표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해서 과연 자신들에게 이익을 되었는지 나는 이 자리를 빌어 힐빌리들에게 묻고 싶다. 빈곤하지만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 살려는 힐빌리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정부보조금 같은 지원이 아니라 쓸만한 일자리인데, 과연 트럼프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하긴 애초부터 힐빌리와 트럼프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던가.

 

제이디 밴스가 십대 시절에 경험한 기독교 근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자신들과 다른 주장과 해석을 하는 이들을 사탄으로 만들어서 싸우자는 십자군 정신을 저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제이디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레드 제플린을 비롯한 록음악을 사탄의 음악으로 규정하고 못듣게 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빵 터져 버렸다. 또 한편으로는 종교를 가진 이들이 그래도 마구잡이로 삶을 사는 힐빌리들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분석에 수긍하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의 기술을 통해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지역의 주류인 힐빌리들의 삶을 규정하는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종교를 엿볼 수가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1부까지는 그런 대로 흥미를 가지고 읽었는데 성공신화로 치달아 가는 2부에서는 후반으로 갈수록 흥미가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제이디 밴스처럼 힐빌리 출신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면 누가 이 책에 관심이나 가졌을까. 그런 점에서 지금도 진짜 힐빌리의 삶을 사는 누군가의 글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전에 저넷 월스가 쓴 <더 글라스 캐슬>을 읽어서 힐빌리들에 대한 내성이 생긴 탓일까. 저넷 월스의 글에서는 그래도 유머라도 있었지, 제이디 밴스의 글은 정말 비가 혹은 애가에 가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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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19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혈연,지연,학연은 극복해야할 적폐인데 특히 우리사회에선 어려운거 같아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조직과 사회에서 왕따당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화죠.^^.

레삭매냐 2017-12-19 11:11   좋아요 1 | URL
돌아서면 우리가 진짜 남인데,
이익을 공유할 때만 ˝우리˝라는 설정입니다.

나의 이익을 넘본다면 정말 남보다도 못한
관계로 떨어지게 되는.
 
바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인정하자. 그때나 지금이나 존 밴빌의 <바다>는 나에게 읽기 만만한 작품이 아니었다. 수년을 질질 끌던 책을 아마 작년에 다 읽었었지. 그러다가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던가. 다른 번역자였다면 또 모르겠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번역자였다. 그전 책과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 결정적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독서 모임 책으로 선정돼서 읽게 되었는데, 책은 읽었는데 독서모임에는 미처 나가지 못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2013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영화도 보고 싶었지만, 아마존 말고는 방법이 없어서 패스했다.

 

소설 <바다>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아내 애나를 잃은 홀아비 미술 역사학자 맥스 모든이 50년 전 추억을 되새기며 다시 찾은 시더스에서의 며칠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모두 세 가지 시점이 교차되며 등장한다. 반세기만에 다시 찾은 시더스의 현재,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내 애나의 다가오는 죽음을 알게 된 1년 전 그리고 꼬마 맥스에게 신들 같았던 그레이스 가족과 함께 했던 50년 전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소설의 출발점은 지금이 아닌 50년 전의 시더스다.

 

지난 1년 동안, 병마와 싸우던 아내를 잃은 홀아비 맥스는 늙은 사냥개 같은 모양새로 시더스를 다시 찾는다. 외동딸 클레어에 따르면 맥스는 과거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은 자가 겪어야 하는 미묘한 게임을 해야 한다. 홀로 남은 자의 공허와 메아리로부터 그는 도망치고 싶었던 걸까. 어쨌건 간에 밸리레스에서 상처한 남자 맥스 모든은 모두에게 동정을 받았다. 맥스 모든은 “세상을 조금씩 재서 섭취”(180쪽)하는 방식으로 살아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한편 아버지 짐이 떠난 뒤, 모든(Morden) 가족은 어쩔 수 없이 궁핍에 시달렸다.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을까 맥스는 부유한 집안의 애나 와이스와 만나 결혼하고 마침내 유년시절 이래 꿈꾸어 왔던 계급적 상승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딸 클레어 역시 딜레당트(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이 아닌 취미 삼아 하는 사람, 164쪽)였다. 태어날 때부터 신들에게 매료된 소년 맥스에게 부족한 건 자산 뿐이었다는 저자의 지적이 날카롭게 들린다. 빈곤 가운데 돌아가신 맥스의 어머니가 과연 자신의 아들이 벨 에포크 시절의 피에르 보나르에 대한 논문을 쓰는 지식인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부잣집 며느리가 탐탁지 않았던 맥스의 어머니는 자식의 아들 이름이 심지어 맥스가 아니었냐며 따진다. 그렇다면 그의 원래 이름은 뭐였을까? 맥스 모든 박사는 결혼이라는 전통적 방법을 통한 계급적 상승을 이루면서 아예 자신의 정체성마저 바꾸어 버렸단 말인가.

 

이상이 현재라면, 과거의 회상은 좀 더 감정적으로 미묘하면서 복잡하다. 시더스에서 소년 맥스는 자신에게는 신과 같았던 부유한 그레이스 가족과 만나게 된다. 아버지 칼로, 어머니 코니 그리고 쌍둥이 남매 클로이와 벙어리 마일스. 그리고 가사도우미 로즈로 구성된 그레이스 가족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현현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만신전이 떠올랐다. 맥스의 신에 대한 비유 그리고 집착 때문이라고 해두자. 소년에게 코니 그레이스 아줌마는 그야말로 아프로디테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성숙한 여인 코니 그레이스에게서 소년의 감정은 코니의 딸 클로이에게로 점점 이동한다. 그 과정을 “심미적인 결정화”라는 표현으로 인식과 인정의 장엄한 순간이었노라고 설명했던가. 스타일리스트로서 작가의 실력이 극대화된 장면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밝혀지듯이 어떤 계기로 신들 같았던 그레이스 가족에게 비극이 발생하고, 신들은 바닷가를 그렇게 떠난다.

 

존 밴빌은 어려서부터 그의 우상이었던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서사의 전개보다는 주인공의 감정선의 변화에 따른 의식의 흐름을 좇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소설 <바다>에서 독자는 주인공 맥스 모든 박사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솔직히 역자 후기에서 역자가 존 밴빌을 뛰어난 스타일리스트라고 표현한 것처럼, 스타일에서는 뛰어날지 몰라도 서사는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독자는 과연 <바다>에서 어떤 줄거리를 뽑아낼 수 있을까. 결말 부분에 가서 맥스 모든 박사가 술에 취해 익사할 뻔한 장면은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에서 조지의 모습이 기묘하게도 겹쳐졌다. 일종의 자기애,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물들이라고나 할까.

 

기억 속에 사는 남자 맥스 모든은 “자기의식의 진정한 기원”(158쪽)을 십대 시절에 사랑한다고 믿었던 클로이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내 애나와의 불화는 필연적인 게 아니었을까.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상대와의 대결이라니. 남편을 미워했다고 고백하는 애나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병상에서 죽어가는 애나는 남편이 아닌 딸 클레어에게 카메라를 배달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병원에서 타인의 고통을 그 카메라(컬러 사진)로 기록했다. 그녀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녀의 모습에서 죽음을 대하는 하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애나와 달리 클레어의 아버지 맥스는 황금알을 낳지 못하는 통통한 거위였기 때문에 모녀 관계에서 배제된 걸까. 애나가 입원한 병실에 대한 묘사에서는 얼마 전에 읽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환자에 대한 서술 부분이 연상되기도 했다.

 

겸업작가 존 밴빌의 열네번째 장편 <바다>는 두 번 읽어도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다>가 맨부커상을 수상한 2005년 경쟁작으로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를 비롯해서 제이디 스미스의 <온 뷰티>, 알리 스미스의 <우연한 여행자>, 시배스천 배리와 줄리언 반스의 작품들이었다. 특히 <나를 보내지 마>와 마지막 순간까지 경쟁을 벌였다고 하는데, 그만큼 부커상 심사위원들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서사보다 존 밴빌의 스타일을 높게 평가했던 게 아닐까. 그나저나 그 수많은 존 밴빌의 작품들이 국내에 출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속히 신간 <오스몬드 부인>을 비롯한 작품들이 출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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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7-12-18 1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이 책 읽다 덮어서 곱게 모셔뒀어요....
내년에 아마 만날지도 몰라요...

레삭매냐 2017-12-18 13:18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서 서사가 재밌거나 그런 책은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부커상의 광휘와 대가의 작품을
읽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