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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린의 전쟁 같은 휴가
벤 파운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풋볼을 관심을 갖고 본 것이 2002년 한겨울이었다. 당시 풋볼 규칙도 하나 모르면서 내가 응원하던 팀은 뉴잉글랜드 페이트리어츠였다. 주전 쿼터백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고, 백업 쿼터백이었던 탐 브래디의 맹활약에 힘입어 디비전 시리즈에서 만난 오클랜드 레이더스에게 경기 종료 30초인가를 남겨 두고 마지막 킥이 성공하면서 챔피언십을 거쳐 결승전에 진출했다. 비록 언더독이긴 했지만 당시 최강이었던 세인트루이스 램스를 꺾고 첫 번째 슈퍼볼 우승컵을 들어 올릴 수가 있었다. 특히 오클랜드와의 경기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전형적인 뉴잉글랜드 겨울 날씨 가운데 진행이 되었는데, 그 엄동설한에도 흥분해서 웃통을 벗고 경기 내내 괴성을 지르며 펄펄 날뛰던 팬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 정도로 풋볼, 미식축구는 미국 문화를 대변한다는 방증이 아닐까. 장강 이남의 귤이 회하를 건너 탱자가 되듯이, 영국에서 시발된 축구가 대서양을 건너가 아메리카에서는 색다른 방식의 진화를 거쳐 풋볼이 되었다. 그렇게 복잡한 규칙으로 ‘조직화’된 구기 풋볼은 미국 남자 청소년들에게 길들여진 폭력성과 오락거리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풋볼이 주는 환상에서 깨어난 빌리 린 같은 친구도 있지만, 엄청난 수의 성인들이 오늘도 오락으로 혹은 도박으로 풋볼을 즐기고 있다. 벤 파운틴은 자신의 첫 장편소설 <빌리 린의 전쟁 같은 휴가>로 그런 풋볼과 아이래크(이라크) 전쟁, 엔터테인먼트 산업 그리고 치어리더들과의 드라이섹스로 점철된 미국 문화를 정조준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2004년 추수감사절 즈음이다. 이라크에 파병된 브라보 분대의 19세 소년병 빌리 빈은 격전지 알안사카르 운하 전투에서 동료 브림 하사를 구하는 장면이 방송 취재기자의 카메라에 잡히면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어 버렸다. 비록 빌 리가 목숨을 던져 가며 구하려 했던 슈룸은 전사했지만, 브라보 대원들은 부시행정부가 기획한 승전여행(Victory Tour)을 하기 위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문제는 이 기획 자체가 전형적인 정치적 선전, 한마디로 말해 프로파간다였다는 점이다. 조지 부지 2세, 딕 체니 그리고 칼 로브 등 아이래크 전쟁기획자들은 하나 같이 40년 전 베트남 전쟁 기피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기획한 아무런 명분도 없는 테러와의 전쟁에 내몰린 미국의 청년들이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는 조국을 구한다는 타이틀을 가지고 생과 사가 냉혹하게 갈리는 전쟁터에 투입되었다.
열사의 땅 아이래크와 모든 것이 풍족해 보이는 미국은 너무 달랐다. 젊은 미군 병사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부유한 미국의 부자들은 댈러스 스타디움에 마련된 초호화 컨트리클럽에서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뷔페 음식을 즐기고 잭콕을 신나게 마시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당대 최고의 인기그룹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슈퍼스타 비욘세와도 만날 수 있다고 하지 않은가. 할리우드 최고의 영화제작자 앨버트는 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전쟁영화를 만들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해온다. 아미 소말리아에서의 처절한 패배로 <블랙 호크 다운>으로 만들어지는 판에 아이래크가 안될 이유가 없지. 브라보 대원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 같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빌리의 감정은 복잡하기만 하다. 자신이 입대하게 된 경위부터 그렇지 않은가. 사랑하는 둘째 누나 캐스린이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면서, 약혼자로부터 파혼을 당하자 전형적인 힐빌리 답게 복수전에 나섰다가 중범죄 혐의로 기소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군입대를 조건으로 감형 받고 전장으로 떠나게 된다. 전쟁영웅으로 금의환향한 집에서 가족들을 빌리를 열렬하게 환영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2박 3일 뿐이다. 게다가 엄청난 의료비 때문에(아마도 아버지의 뇌졸중과 누나 캐스린의 치료비) 40만 달러나 되는 빚을 졌다는 말에 빌리는 숨이 턱턱 막힌다. 무사히 아이래크에서 돌아와도 전망이 없어 보이는 텍사스의 고향 스토벌에서 그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전쟁영웅이 되어 전국 투어를 하면서 알게 된 상상을 초월하는 부의 세계의 단맛을 보게 된 빌리에게 지역 유지의 일자리 제의 따위는 가당치도 않다. 물론 빌리가 원하는 신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전쟁영웅이라는 타이틀 말고도 대학 교육이 필수라는 걸 잘 알지만, 십대 소년병으로서는 당장 무작위성이 난무하는 적대적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임무다. 한밤 중에 소변을 보러 나갔다가 음속을 돌파해서 날아오는 반군의 총탄에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조국을 위한 전쟁이라는 선전은 하나같이 개소리일 따름이다.
한때는 석유산업으로 번영하는 도시였던 촌마을 출신 청년을 주눅 들게 하는 스포츠 산업계의 발할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어쩌면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전쟁을 중계해 주는 CNN에 등장하는 전쟁이나 ESPN 채널로 전국에 중계되는 풋볼이나 매한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위험과는 전혀 상관없는 오락거리에 열광하는 대중들, 빌리 같은 미군 전쟁기계들이 무엇 때문에 아이래크에 가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결정적으로 브라보 대원들은 전역한 것이 아니다. 모두를 열광시키는 풋볼 게임이 끝나면 오늘 22시 소집되어 다시 전장으로 향해야 한다. 그래서 누나 캐스린은 빌리에게 복귀하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 보자고 제안하지 않았던가.
특이하게도 나는 이번에 영화와 소설을 같이 보고 읽고 있는데, 소설의 상당한 부분이 영화에서는 꼴랑 30분 만에 다루어질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락커룸에서 풋볼선수들과 진짜 전쟁에서 사용하는 무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진짜 텍사스 스타일이로군. 그리고 소설에서는 잘 몰랐던 진수성찬이 차려진 컨트리클럽의 추수감사절 뷔페의 호화찬란함은 영화가 훨씬 더 잡아냈다는 느낌이다. 아이래크에서 브림 하사와 빌리가 나누는 대화는 인도의 전사 그리고 비슈누 신에 대한 동양적인 신비로움이랄까 그런 점들이 그리고 윤회에 대한 생각들이 얼핏 지나쳐 갔다. 바로 이런 게 영화의 힘이로군.
벤 파운틴은 현재 텍사스 댈러스 카우보이스 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현재를 배경으로, 험비를 타고 기지를 나설 때마다 공격을 받던 아이래크 시절과 좀 더 가까운 과거인 승전여행으로 귀향해서 고향 스토벌에서 가족들과 보내던 시간들을 정밀하게 교차하면서 어떻게 보아도 정의가 없었던 아이래크 전쟁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이어간다. 부시 정부가 어떤 식으로 선전을 하더라도 9-11 테러의 배후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지목하고 시작한 아이래크 전쟁은 명분이 없었다. 시들어 가는 미국의 힘을 세계에 과시하겠다고 시작한 명분 없는 전쟁은 미국을 정치 경제적 수렁에 빠트려 버렸다. 정치적 선전물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부시 행정부에게 브라보 분대야말로 아메리카의 위대한 신이 내려준 선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풋볼 스타디움에서 선량한 미국 시민들이 브라보 대원들을 격려하는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져 왔다. 그들은 과연 전쟁의 실상을 알고 있을 걸까? 소가 끄는 달구지가 시가를 어슬렁거리는 시가에서 적대적인 아이래크 사람들에게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무작위성이 판치는 곳에 떨어진 해병 대원들의 불안과 긴장을. 부시 행정부가 전쟁을 시작한 핵심 이유 중의 하나였던 WMD(대량 살상 무기)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노먼 오글스비는 그들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면서도 그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기는 거부한다. 영화제작자 앨버트가 브라보 대원들이 아이래크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영화 계약을 하고 싶어한다는 약점을 알아낸 ‘놈’은 제작비를 줄이겠다는 욕심에 입으로는 그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치하하면서 한편으로는 계약 단가를 후려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닌가? 미국식 자본주의의 추악한 단면을 저자는 냉정하게 저격한다.
소설은 후반으로 갈수록 뒷심이 떨어진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빌리에게 게임을 역전시킬 만한 패가 주어지지 않아서였을까. 사실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몸뚱이 하나 밖에 없는 브라보 대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아이래크행 하나 뿐이지 않은가. 빌리의 누나 캐스린은 반복해서 다른 선택을 하라고 문자를 날리지만, 해병 대원 빌 리가 전우들을 배신하고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아니 이미 사회구조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잃을 게 많아서 그만큼 걱정거리가 많다는 부자들의 고민을 최소한 빌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자 이제 소설을 다 읽었으니 절반 정도 남은 영화를 마저 봐야겠다. 이안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화도 나쁘지 않은 편인데 흥행에는 참패를 한 모양이다. 사실 이 소설도 영화 덕분에 알게 돼서 읽게 됐다. 저자의 전작 소설집 <체 게바라와의 짧은 조우>도 출간됐으면 좋겠다. 10년 만에 소설을 발표하다니, 과작하는 작가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