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 종교개혁 - 루터의 고요한 개혁은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가 지성인의 거울 슈피겔 시리즈
디트마르 피이퍼 외 지음, 박지희 옮김, 박흥식 감수 / 21세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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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루터가 독일 변방의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시작된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그리고 레닌의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기도 하다. 전자가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의 전이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회적 변혁을 이루는데 중점적인 역할을 했다면, 후자는 인간해방의 관점에서 또다른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후자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몰락 이후, 종주국 러시아에서조차 예전 같은 대우를 못받고 있는 것 같다.

 

교회는 한국에 와서 대기업이 되었다

 

우스꽝스럽게도 한국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과는 정확하게 정 반대로 가고 있다. 전세계에서 최고 신도수를 자랑하는 어느 교회의 목사는 130억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배임죄로 유죄확정이 되었고, 성범죄 전력의 목사가 어떠한 치리도 받지 않고 버젓이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타락한 중세교회의 전범을 그대로 따라가는 모습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이라도 하듯이 부자세습을 완료한 대형교회의 양태에서 완료되었다. 루터가 한국에 와서 대기업이 되어 버린 21세기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본다면, 분연히 두 번째 종교개혁을 외치지 않겠는가.

 

장 칼뱅의 장로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큰 의미로 다가 오지 않는 모양이다. 동아시아 최고의 개신교 국가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종교개혁 500주년이 조용한 기세다. 독일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10년 전부터 종교개혁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종교인 과세 같은 맘모니즘 이슈에 대해서는 벌떼 같이 일어서는 종교인들이 중세교회보다 더 중세교회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는 한국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적인 이야기에서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된 15세기 르네상스는 한 세기 뒤에 영방국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으로 개화되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 시작된 면죄부 발행은 중세 기독교 타락을 상징하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독일 민중들은 교회가 자기들에게 수탈한 돈을 로마로 보내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르네상스 시절에 발흥한 인문주의가 민중들에게 영향을 미친 탓이었을까. 신본주의 계급사회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무르익을 무렵, 독일의 변방 작센 주에 자리잡은 비텐베르크의 젊은 수도사가 개혁의 불씨를 당겼다. 로마에 저항하는 수도사라는 더없이 좋을 구호로 무장한 마르틴 루터의 등장이었다. 당시 지배계급이 사용하던 라틴어가 아닌 민중의 언어인 독일어로 때마침 발전하기 시작한 인쇄술의 도움으로 루터의 주장은 독일 전역에서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오역을 지적하고, 가톨릭의 보속을 부정하고, 가톨릭 사제를 부인하는 만인사제설 그리고 믿음과 은총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겠다는 루터의 주장이야말로 시대정신에 부합했던 것이다.

 

이런 이단적 주장에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젊은 수도사를 파문하기에 이르렀고, 가톨릭을 신봉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는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의 주장을 들어 보기에 이른다. 이렇게 이어지는 급박한 사태의 전개에서, 개신교쪽으로 기운 제후들 가운데 특히 루터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작센 선제후 현명공 프리드리히와 헤센 백작 등의 제후들이 황제의 통치와 교황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루터가 주창한 종교개혁에 동참하기에 이른다.

 


주간지 슈피겔에서 엄선한 저널리스트들과 다수의 신학자들은 이런 일련의 사태에 다양한 목소리를 낸 인물들에 대한 목소리도 세세하게 담아냈다. 현명공 프리드리히의 지원으로 독일에서 내로라하는 대학도시가 된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를 지원한 신학자 필립 멜란히톤을 비롯해서, 채색삽화로 루터의 독일어 9월성경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루카스 크라나흐는 발군의 실력으로 홍보를 담당했다. 교황을 당나귀에 비유하는 풍자물에서 보듯이 크라나흐는 선전선동의 대가였던 모양이다. 기사가 몰락하기 시작한 시대, 본질은 날강도에 가까웠던 폰 지킹엔은 루터의 호위무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그가 과연 루터의 종교개혁이라는 대의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도 종교개혁에 한몫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로마에 저항하는 수도사 루터가 무지막지하게 속도로 써내려간 일단의 팜플렛들은 인쇄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상품이었다. 종교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을 담아낸 루터의 글에 대중과 지식인 계급이었던 귀족들은 열광했다. 루터가 글을 발표하는 대로, 대기하고 있던 인쇄업자들이 달려들어 인쇄물을 찍어내기에 바빴을 정도였다고 한다. 16세기 초반, 독일 내에서 유통하던 인쇄물의 1/3에 해당하는 분량이 루터가 쓴 저작물이었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면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하지 않았을까.

 

1부와 2부에서 종교개혁의 전개, 시대상 그리고 당시 활약하던 인물들을 다뤘다면 3부에서는 반종교개혁 진영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당시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나 황제였던 칼 5세 모두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이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미처 몰랐다. 그 후과를 알았다면,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루터는 1세기 전 보헤미아의 개혁가 얀 후스와 똑같은 운명에 처해졌으리라. 루터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중세를 끝장내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 종교개혁 역시 후퇴했을 것이다. 가톨릭 진영에서도 이그나시오 로욜라 같은 인물이 등장해서 반동적 예수회를 조직해서 내부 개혁에 매진하기도 했다. 특히 루터의 맞수로 나선 선수로 슈피겔 저자들은 베드로 가니시오를 꼽았다. 루터를 추종하는 개신교의 등장으로 거의 무너지겐 된 독일 가톨릭의 보루로 등판해서, 가니시오는 보수적 가톨릭 신앙을 부흥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지난 세기에 가톨릭의 성인으로 시성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의 뛰어난 활약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슈피겔이 선정한 저널리스트들과 학자들은 1520년대 독일을 휩쓸었던 농민전쟁에서 루터가 보여준 보수적 입장과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도 냉철한 분석을 선보인다. 루터로부터 영향을 받은 독일 농민들은 각지에서 폭동과 반란을 일으켰고, 독일 제후들은 잘 훈련된 용병들을 동원해서 농민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와중에 루터는 제후들의 편에 서면서, 신의 은총을 갈구하면서 평등을 주장한 농민들을 저버렸다. 물론 토마스 뮌처 같이 극단적인 주장을 펴면서 농민반란에 적극 가담한 신학자도 있었다. 또한 독일 거주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개신교로 개종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고 지속적으로 모욕적인 태도로 자신들을 대하는 유대인에게 적대감을 느낀 나머지 마지막 저작에서까지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훗날 나치들은 루터에게서 반유대주의의 단초를 찾아냈더고 하는데, 모사드에게 비밀리에 납치되어 예루살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이 루터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전율할 정도였다. 루터의 반유대주의는 현대의 반유대주의와는 그 결을 달리 한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저작들의 출간이 봇물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다시 한 번 루터가 주창했던 종교개혁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려놓음과 나눔 그리고 십자가 정신이라는 초대 교회 정신에서 벗어나, 루터가 주장했던 평등주의에 입각한 만인사제설에 어긋난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고, 성장지상주의를 목청껏 외치면서 오늘도 맘몬의 곳간을 채우는 데만 여념이 없는, 점점 사회에서 격리되어 게토화 되어 가는 한국 대형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물적 인적 자원을 빨아들이는 소수의 대형교회보다 우리는 작고 건강한 다수의 작은교회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긴 글을 마무리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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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24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독서 목표 중 두 개가 종교개혁과 러시아 혁명을 이해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책을 읽을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2017년을 떠나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

레삭매냐 2017-11-24 11:53   좋아요 0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의지 대로 되지가
않는군요 :>

그래도 종교개혁 책은 두어권 읽었으니 아쉬
운 대로... 작년에 읽었지만 리뷰로 담아내
지 못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장 칼뱅 비판 책
을 다시 읽어 볼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루터교보다 칼뱅을 모시는
장로교가 인기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이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고 있다는 루터교
목사님의 지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sprenown 2017-11-24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얼마전 직장 커뮤니티에서 종교인 과세문제로 시끌러웠던 적이 있었어요.. 댓글 수십개가 달리고, 난리법석.. 그 만큼 예민한 문제인가 봅니다. 세금낸 헌금에 대해 또 과세한다면 이중과세가 아니냐 등등... 얼마전 조계종 적폐청산 운동도 있었고...암튼, 종교개혁의 참 뜻과 취지를 되살려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17-11-24 13:49   좋아요 1 | URL
전혀 예민하지 않은 문제인데, 개신교계
에서 그렇게 문제를 몰고 가는 게 문제
입니다.

민주공화국에서 개세주의가 기본입니다.
대한민국을 신정국가로 착각하고 있는 일
부 몰지각한 성직자들이 문제입니다.

성직자가 세금을 내지 않거나 세무조사를
받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언급해 주신 이중과세 문제는 전혀 상식
에도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일 뿐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사업자가 각종 세금을 모
두 부담하고 이익을 낸 돈으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면 직원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나요? 이상한 논리를 적절하지 않은 상
황에 적용시키려는 작태에 기가 막힐 따름
입니다.

AgalmA 2017-12-01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나귀인데 뱀가죽에 여성 비하 정서까지...그림이 참 많은 걸 보여주네요^^;

레삭매냐 2017-12-01 09:12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중세가 걷히기 전이라
여전히 가부장제 시스템에서 벗어 나지
못한 예술가의 한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AgalmA 2017-12-01 09:18   좋아요 0 | URL
재밌어요. 인간이 아무리 명석하고 날고 뛰어나다 해도 시대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 드보르의 명언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 조상을 닮은 것보다 자신의 시대를 더욱 닮는다.˝

카알벨루치 2018-08-26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글 우아 좋아요! 기독교인인 저의 심금을 울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8-08-26 19:36   좋아요 1 | URL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작년에 나온
책을 읽고 쓴 리뷰였네요.

한국 기독교에서 벌어지는 작금의 상황
을 보면, 종교개혁 시대만큼이나 암울
해 보입니다.
 
노란 잠수함
이재량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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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내가 사는 동네 주변에 자리 잡은 안산이 나오고, 물왕저수지 그리고 시흥 목감 같은 정겨운 지명이 등장해서다. 맨하탄이나 라스베이거스 같은 낯선 지명보다 훨씬 귀에 착착 감기지 않는가 말이다. 그리고 무언가 비틀즈의 노래가 삽입된 반세기 정도된 애니메이션과의 연관성 정도라고 해두자. 솔직히 말해서 그냥 난 재밌는 소설이 읽고 싶었을 뿐.

 

소설 <노란 잠수함>은 내레이터이자 철학과를 졸업하고 육봉 1호를 몰고 시흥과 안산 일대에서 야릇한 동영상 유통과 판매업에(때로는 의약품도 취급한다) 종사하는 목포 출신 이현태(29세) 청년과 베트남 참전용사 출신 애국보수 김난조옹과 나해영옹 그리고 도발적인 십대소녀 모 모양이 안산을 떠나 부산으로 향하는 4인조의 로드무비 형식으로 출발한다. 이거 인적 구성부터 심상치 않으니 가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 정도로 성급하게, 화들짝 1부가 끝난다.

 

모든 욕망은 측은지심의 발현이다

 

아니 그런데 왜 그들은 부산으로 향하는가? 현태 청년은 안산 인근에서 벌어진 납치사건의 용의자이자 연쇄살인마로 지목되어 쫓기는 지명수배자 처지가 되었고, 치매와 장애 노인은 그런 그를 협박해서 육봉 1호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향한다. 역시 베트남 시절 동지 오만수 노인에게 배를 사서 노년을 보낼 거라나. 모모양은 철물점을 하는 멍키스패너 아버지로부터 도주 중이다. 노인들은 현태 청년에게 보수로 백만원 정도를 제시했지만, 그를 움직이는 동력은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 소설의 취약점이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왜 현태 청년은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예로 섭마린’에 등장하는 그들만의 페퍼랜드 찾기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이 지점에서 별 한 개를 아무래도 깎아야지 싶다.

 


육봉1호팀의 실질적 리더라고 할 수 있는 김난조 옹은 지병까지 안고 있다. 약장수 모모양이 긴급하게 콩알을 섞어 만든 정글주스로 기력을 차린 그들은 옥산휴게소와 김천을 거쳐 마침내 부산에 도착한다. 물론 문제가 쉽게 풀릴 리가 절대 없다! 도박에 빠진 오만수 노인은 동지들의 피같은 돈을 한방에 꿀꺽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시흥에서 자신의 영업을 협박해서 갈취하던 형사까지 등장해서 그들을 뒤쫓기 시작한다. 소설은 어느 잔잔한 로드무비에서 일대 액션이 난무하는 활극으로 변신을 감행한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는 감추고 싶은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이 터무니없는 로드무비를 찍게 된 김난조-나해영 용사들에겐 반세기 전 베트남에서 얻은 치명적인 사랑에 얽힌 사연이 숨어 있었다. 바로 그 점이 이번 활극을 유발시킨 동인이었다. 김난조옹은 나해영 일병을 대신해서 베트콩이 설치한 부비트랩에 걸려 허벅지를 날리고 반신불수가 되었다. 나해영 일병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결혼해서 낳는 아이마다 죽는 비극을 당했다. 자신의 몸이 망가진 건 문제도 아니었던가. 낯선 남국의 지옥에서 조국 건설을 위해 젊은 날의 자신들을 희생한 참전용사들은 그후로도 지긋지긋한 PTSD에 시달려야 했다. 오늘도 아스팔트를 누비는 애국보수 노인들이 측은해 지는 그런 순간이었다. 베트콩이 은신해 있다는 정보에 초토화가 된 지옥 가운데 낙원이라고 생각했던 수이진에서 만난 타잉과의 시간들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빛나는 순간이었고 오늘까지 그들을 버티게 해준 힘이었다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두 노인의 이야기들이 국가적인 차원의 서사라고 한다면,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현태 청년의 이야기는 개인의 서사다. 어머니가 죽고 세상에 의지할 데라곤 아버지 밖에 없지만, 아버지와 겪게 된 불화의 원인을 추적하다 보니 고향을 등진 현태 청년의 스토리도 눈물겹기만 하다. 독자의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눈물의 서사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유머가 부족하지도 않다. 초반의 영화 <부기 나이트>까지 등장해서 핑크빛 무드를 조성하더니, 후반에 가서 활극이 펼쳐질 무렵에는 정말 빵빵 터지고 미친 사람처럼 큭큭거릴 정도로 극한으로 밀어 붙이는 내러티브의 힘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종반에서는 마치 싸이키델릭한 애니메이션(예로 섭마린의 영향 탓일까)의 허무한 결말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렇게 되리란 것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찬란히 빛나는 순간을 가슴에 품고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하는 김난조옹과 나해영옹의 마지막 길은 판타지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정처없이 이상한 그룹에 미련 없이 투신한 모모양의 참여도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라면 이들과 함께 했을까? 아마도 아니겠지. 동영상업자와 두 노인네로 구성된 팀의 칙칙함을 털어주기 위한 배치였을 진 몰라도 2박 3일간의 짧은 여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엔 좀 그렇지 않은가.

 

어제 받아서 24시간이 채 되지 않을 상태로 읽을 정도로 소설의 뛰어난 가독성은 높이 평가해 주고 싶다. 어서 빨리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루터의 내러티브도 읽어야 하는데, 이렇게 재밌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마저 다 읽고 다시 루터로 돌아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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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2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
존 크라카우어 지음, 김훈 옮김 / 민음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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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들은 그렇게 무모한 행위에 돈과 열정 그리고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일까?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다. 매일매일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제 헌책방에서 사서 읽기 시작한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에는 에버레스트, 이하부터는 ‘하늘의 여신’이라는 뜻의 네팔 어인 사가르마타라고 부르겠다(티베트 어로는 초모룽마), 도전한 이들의 고난에 찬 역정을 그리고 있다. 사실 위대한 승리라고 부르기에는 정상정복에 나섰던 이들의 참혹한 죽음 때문에 비극 혹은 재난에 가까운 사건이었지만 말이다.

 

역설적으로 미국 출신으로 탐험 전문잡지인 <아웃사이드>의 의뢰를 받고 사가르마타 등반에 나선 상업적 등반대 취재를 해야 했던 작가 존 크라카우어는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젊은 시절 무모한 등반을 하던 열정이 되살아나 자신도 로브 홀이 이끄는 어드벤처 컨설턴츠 등반대(8명으로 '고객'으로 구성되었다)의 일원으로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가르마타(8,848m) 등반에 나서게 된다. 넌픽션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재난이 시작된 1996년 5월 10일 사가르마타 등반에 성공한 시점에서 시작된다. 가장 영광된 바로 그 순간에 참혹한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도대체 사가르마타에 도전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전에 앞서 작가는 사가르마타에 도전한 조리 리 맬로이나 힐러리 경 혹은 라인홀트 메스너 같이 이제는 신화가 된 영웅적인 인물들에 대한 역사에서부터 시작한다. 사가르마타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래로 거의 한 세기에 걸친 도전 끝에 사가르마타는 인간의 발자국을 정상에 허락했다. 소위 전문적으로 산악 등반에 숙련된 엘리트 산악인들만이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던 사가르마타 등반이 1985년 데이비드 브리셔즈라는 전문산악인의 도움으로 산악 경험이라고는 일천한 텍사스 출신 부자 딕 배스가 정상 정복에 성공하면서 상업화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돈으로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천박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그동안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라고 알려졌던 영국인들이 개발한 등반이라는 스포츠에까지 침투한 것이다. 배금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색다를 것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신성한 사가르마타가 그런 상업주의에 물드는 것에 저자는 상당히 비판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자 역시 1996년 당시 65,000달러라는 거금을 내고 로브 홀의 등반대의 일원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넌픽션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서 앞으로 벌어진 비극의 전주곡에 가담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캘리포니아 출신 거부인 샌디 힐 피트먼의 기행은 정말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그녀는 미국인 여성으로 7대륙에서 가장 높은 곳에 등반한 세븐 서미트 클럽에 가입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사가르마타 등반에 도전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산악인들과 달리 뉴욕 사교계의 여왕 피트먼은 그녀가 속한 마운틴 매드니스 등반대의 대장 스콧 피셔가 반드시 등반에 성공시켜야 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녀가 언제나 몰고 다니는 화제성과 홍보효과는 피셔의 사업에 꼭 필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피셔는 저자 존 크라카우어를 자신의 등반대에 참여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로브 홀이 제시했던 것 같은 유력한 조건은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이벌 팀에게 세기의 기록이 될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다시 한 번 극한에 도전하는 등반이 상업화되면서 발생한 부작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어드벤처 컨설턴츠의 대표 로브 홀의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사가르마타는 자신의 영지에 발을 들여 놓은 외지인들에게 정상을 쉽사리 내어 주지 않을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로브 홀이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발생한 치명적 병목현상 때문에 수시간이 지체되면서, 등반대원들은 불필요하게 추위와 강풍에 노출되고 말았다. 게다가 그 좋았던 날씨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강풍으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전에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하산한 이들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일분일초를 다투는 험난한 하산 과정에서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평소 같았다면, 냉철한 판단력으로 고객들의 안전을 생각했을 로브 홀이 어째서 무리하게 정상 등반을 강행했는지 의문이다. 마운틴 매드니스의 스콧 피셔와의 경쟁도 한몫하지 않았을까라고 저자는 추정한다.

 

정상정복이 반환점이었다면, 하산은 그보다 더 어려운 과정이었다. 갑자기 불어 닥친 강풍으로 정상적인 하산은 극도로 어려웠으며 시계마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엄청난 강추위 속에서 밤을 보낼 판이었다. 결국 크라카우어 팀은 등반대장인 로브 홀, 가이드 앤디 해리스, 일본 출신 남바 야스코를 잃었다. 그 시즌에만 모두 12명이 희생되었는데, 가히 재난이라고 할 만한 사태였다. 저자는 특히 앤디 해리스를 잃은 점에 대해 좌절했는데, 유능한 가이드라고 하더라도 이상 징후가 보였을 때 자신이 나서서 챙겼어야 했노라고 후언하고 있다. 그 외에도 고산등정에 반드시 필요한 산소통 확보 문제를 비롯해서, 정상정복을 위한 고정밧줄 설치를 위한 셰르파들의 협력문제, 통신장비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다수의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특히 남아프리카 원정대의 거의 사기꾼에 가까운 리더 이안 우달의 이기적인 모습은 최악이었다. 비극의 전조였던 타이완 원정대의 마칼루 고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고.

 

존 크라카우어가 남긴 기록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왜 그렇게 사람들이 다른 곳도 아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가르마타에 집착하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그들은 단순히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에 도전하고 싶은 수많은 월터 미티들의 분신이었을까? 정상에 오르는 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고 그 앞에서 회군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용기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순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욕망은 어쩌면 죽음에 상응하는 악마의 유혹이 아니었을까. 또 다른 문제는 상업팀들에 소속된 동료들은 말로만 동료였지,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안위가 가장 우선이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무조건 도와야 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등반을 자발적으로 포기할 수 있었으며 타인의 불행보다 나의 등반이, 정상공격이 우선이었다. 죽어가는 라다크 사람들을 보면서도 해발 8,000m에서는 해수면의 도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조난자들을 보고서 그대로 지나쳐간 일본 원정대의 경우가 그랬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땠을까? 그들을 비난할 수 있었을까 싶다.

 

어쨌든 그들은 사가르마타에서 죽었고, 존 크라카우어와 다른 이들은 살아남았다.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니 엉터리 등반가 마칼루 고는 치명적인 동상으로 폐인이 되었다. 어떤 산악인들은 기록을 남긴 크라카우어가 먼저 하산해서 다른 이들을 돕지 않고, 텐트에서 잠을 잤다고 비난했다. 유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들은 비극을 털어 일어섰지만, 저자는 미국으로 돌아 와서도 상당 기간 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다. 우리네 삶에 정답이 없듯이, 1996년의 사가르마타 재난에 대한 평가도 정답이 없는 것 같다. 크라카우어가 세심하게 공을 들여 작성한 재난 보고서는 한 편의 드라마다. 샌디 피트먼이나 이안 우달 같은 악당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자신의 안위 따위는 내팽긴 채 타인을 돕겠다고 나선 영웅들, 자기도 숨 쉬기가 어려운 마당에 자신의 소중한 산소통을 타인에게 양보하는 미담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 한 편으로는 스스로 그런 재난을 자처하지 않는 보통 사람의 안도감도 섞여 있다. 2년 전에 나온 <에버레스트>는 1996년 사가르마타의 비극을 영상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 시도를 한 제작자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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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1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1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버지스 형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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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만나면 만사 제쳐 두고 그 책부터 읽어야 하는 책들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지난 주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신간 <버지스 형제>가 나에겐 그런 책이었다. 책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영어로 된 리뷰들을 찾아 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투브로 저자의 대담이 담긴 동영상도 찾아봤는데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소설은 메인 주의 셜리폴스를 떠나 뉴욕에서 형사사건 변호사로 성공한 버지스 가의 두 형제가 등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특히, 짐 버지스는 부유한 유산을 물려받은 헬렌과 함께 세 명의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그야말로 모든 이가 선망하는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정된 직장과 월리 패커를 변호하면서 얻게 된 드높은 명성,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소득 그리고 아내 헬렌이 정성들여 꾸미는 브루클린에 자리잡은 정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다. 반면 같은 변호사이지만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법류보조원(legal aid)인 동생 밥은 아이도 없고 처량하게도 한때 사랑해 마지 않았던 아내 팸과 이혼한 상태다. 그럭저럭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가던 버지스 형제에게 큰 위기가 휘몰아 닥치는데 그것은 고향 셜리폴스에 남은 밥의 쌍둥이 동생 수전의 아들 재커리 올슨(19세)이 이슬람 모스크에 얼린 돼지머리를 던져 넣은 인종범죄 사건이 전국적인 매스컴을 타면서 시작된다.

 

코네티컷 출신 헬렌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시누이 수전의 일에 일절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런 모습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녀와 달리 ‘조카 일병’을 구해야 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버지스 형제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믿음직한 삼촌 짐은 자신이 직접 나서는 대신 유능한 지역 변호사를 고용해서 조카의 변론에 나서고, 만날 얼뜨기라고 부르는 동생 밥을 셜리폴스에 파견한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멍청이 행세로 대중의 동정을 받아야 하는 판에 자신을 구하기 위해 도착한 밥 삼촌에 의지해서 히죽거리는 사진이 대중에 노출되면서 사건을 악화시킨다.

 

작가는 버지스 집안의 내밀한 사건들에 접근하는 한편, 지독한 내전을 피해 셜리폴스에 살기 시작한 소말리족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같은 무게로 다루고 있다. 시리아 내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험난한 지중해 바다를 건너 오늘도 꿈과 희망의 땅이라고 생각하는 유럽으로 향하고 있지만, 이미 안전과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진 민족의 디아스포라는 오래 전에 시작됐다. 문제는 새로 이주해온 이방인들이 원래 살던 사람들과는 다른 피부색, 종교 그리고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9-11 테러 이래,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이방인들에게 물리적 그리고 심리적으로 빗장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셜리폴스에 터전을 잡은 소말리족들이 미국을 그들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시 고향인 모가디슈로 돌아갈 궁리만 한다는 일부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로 소말리족들의 전통인 여성 할례를 여성의 성적 결정권을 중시하는 미국 사회에서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난민들을 관용으로 대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들을 자신들의 사회에서 수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실을 작가는 정말 리얼하게 그려냈다.

 

다시 버지스 형제 이야기로 돌아가 삼남매는 모두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어이없는 죽음 때문에 발생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원인제공자였던 밥은 어려서부터 잘난 형의 온갖 구박을 들으며 살아야했다. 물론 이렇게 좋은 소설적 ‘장치’를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가는 소설의 후반에 회심의 일격으로 준비해 두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던 잭은 왜 그렇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증오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단 말인가? 수전과 이혼하고 스웨덴으로 떠나 새살림을 차린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살가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수전의 트라우마가 유전된 게 아닐까. 험난한 세상으로부터 자식을 지켜 주어야할 아버지라는 존재의 울타리는 처음부터 없었고, 삼촌들마저 멀리 뉴욕에서 자신들의 커리어를 쌓는데 정신이 팔려 고향땅을 등지지 않았던가.

 

모두가 대도시의 화려한 삶을 구가하며 고향을 떠나는 장면은 동서양이 따로 없는 모양이다. 변변한 일자리도 없고, 칙칙한 모습의 고향에 진저리를 치는 버지스 형제의 모습이 수도권 집중화라는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네 그것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해결사를 자처하며 고향에 돌아온 짐이 오히려 문제를 더 크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경범죄로 처리될 수도 있을 잭의 문제가 짐이 셜리폴스의 지역인사들(시장과 지방검사)을 자극하면서 기소처리되고, 연방검사가 개입할 정도로 사건이 확대된다. 동시에 완벽해 보이던 짐과 헬렌의 사이에도 균열이 가면서 파경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2006년 7월 3일, 미국 메인 주의 루이스턴에서 브렌트 매튜스라는 청년이 실제로 저지른 증오범죄에서 소설 <버지스 형제>의 주요한 모티브를 따왔다. 실제 사건은 매튜스의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소설에서는 완벽할 수 없는 가족의 봉합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의 행복은 스스로 찾는 것이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자수성가했지만, 어떤 방식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 본질적 행복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이야기를 작가는 훌륭하게 이끌어낸다. 새로운 밀레니엄에서 즈음해서도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말리족의 가족에 대한 관념과 느슨하기 짝이 없는 미국식 가족 제도를 비교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요즘 소송 같은 사법 제도가 등장하지 않는 미국 소설을 보기 힘들 정도인데, 작가로 데뷔하기 전 로스쿨에 다녔다가 중단하기를 반복했다는 작가의 경력도 이번 소설에서 빛을 발했다. 부유하고 부족할 것 없는 미국 사람들은 비관용적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탕아 잭을 용서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어리석은 증오범죄를 저지른 소말리족의 원로였다. 구체적으로 이게 옳다는 식의 제안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작가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용서와 화해 그리고 관용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미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답게 정교하면서도 촘촘하게 짜인 내러티브(작가는 스스로를 slow writer라고 표현했다)를 바탕으로 해서, 가족 간의 갈등 그리고 미국에 살게 된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점에서 <버지스 형제>를 수작으로 꼽고 싶다. 전작 <올리브 키터리지>에서도 그랬듯이 밉상으로 보이던 캐릭터(이번 작품에서는 명백하게 짐 버지스였다)에게 애정을 갖게 만드는 기법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본능에 반해서 글을 쓰라’는 작가의 조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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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20 1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증오문화의 발생 과정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습니다. ^^

레삭매냐 2017-11-21 09:24   좋아요 1 | URL
읽을 수록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담이나 인터뷰도 독서에 많은 도움이 됐습
니다.
 

 

 

 

 

 

 

 

 

 

 

 

 

 

 

문학동네에서 <내 이름은 루시 바턴>에 이은 신작이 나온다고 해서 올해 나온 전작의 스핀오프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는 <어떤 것도 가능해:Anything is Possible>(2017)일 거라는 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새로 나온 작품은 2013년에 발표된 스트라우트의 네 번째 작품 <버지스 형제>였다. 어찌어찌하여 그녀의 팬이 되어 버린 독자는 단돈 147원으로 신간을 주문하는 신공을 시전하였다. 지금 배송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버지스 형제>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우선 작가의 홈피에 들어가 원서로 소개된 첫 몇 페이지와 오디오 파일로 들어 봤다. 세 명의 버지스 집안 사람들 중에 밥 버지스와 그의 형수 헬렌이 통화하는 장면이 귓가를 간질인다.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 시리(NYC)에서 잘 나가는 로펌의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는 잘난 형 짐 버지스와 그에게 항상 괴롭힘을 당하는 역시 변호사 출신 동생 밥 그리고 쌍둥이 남매 수전. 30년도 전에 고향을 등진 짐과 밥은 어느 날, 소말리아 난민들이 신성하게 예배드리는 모스크에 얼린 돼지 머리를 건 19살 짜리 조카 재커리 올슨의 치기 어린 장난이 인종범죄로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 되면서 조카일병을 구하기 위해 거국적으로 단결해서 고향으로 향한다. 조카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는데, 삼촌들이 그 정도 쯤이야.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조카 구하기가 예상대로 쉽게 진행된다면 소설이 재밌을까? 없을까?

 

 

 

 

 

 

 

 

 

 

 

 

 

소설의 배경은 다시 1998년 작가의 데뷔작의 공간적 배경이 되었던 미국 동북부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메인 주의 셜리폴스다. 작년에 나온 <에이미와 이저벨>은 57쪽까지 읽다 말고 회사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가 셜리폴스를 찾아 보겠다는 아둔한 독자의 욕심에 다시 소환되었다. 아무래도 <버지스 형제>부터 읽고 나서 후순위로 읽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 그런데 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에이미와 이저벨>부터 집어 들었다.

 

해외 리뷰들을 참조해 보니 소설 <버지스 형제>는 두 가지 축으로 굴러 간다고 한다. 하나는 가족이면서 가족 같지 않은 느슨한 연대로 구성된 21세기 미국의 가족 시스템 내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가족 간의 갈등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향 소말리아의 모가디슈를 떠난 난민들의 현지 적응화, 특히 9-11 사태 이후 이방인들에게 적대적으로 변한 이민천국 미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저널리즘을 능가하는 작가의 문학적 탐구라고나 할까.

 

실제로 2006년 7월 3일, 미국 메인 주의 루이스턴에서 발생한 사건에서 작가는 영감을 얻은 모양이다. 작은 시골 마을의 9%에 해당하는 인구에까지 육박하는 소말리아 난민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원래 살던 이들의 반감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흑인인데다 무슬림이기까지 하니 더더욱 이방인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 브렌트 매튜스라는 청년은 사건 발생 전에 에릭 사이퍼스라는 경찰에 자신의 계획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물론 해당 경찰은 그 행동이 무단 투기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지만, 매튜스는 그저 장난(practical joke)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메인 주 검찰은 매튜스에게 경고명령장을 발부했고, 나중에 경범죄로 체포되었는데 그 사건이 매튜스에게는 첫 범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폭행, 음주운전 외에도 잡다한 전과가 있었다. 매튜스의 변호사는 연방 차원에서 중대하게 다뤄지는 증오범죄가 아니고, 종교시설인 모스크를 알리는 싸인이 없었노라고 변론했지만 자신의 의뢰인이 그 정도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나 보다.

 

인구 35,000명 정도의 루이스턴 마을에 대규모로 소말리아 난민들이 유입되어 오면서, 유색인종 유입에 반대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랠리도 기승을 부렸다. 알카에다 테러 이후, 피부색과 종교가 다른 이방인들에 대한 관용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미국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참고로, 브렌트 매튜스는 사건이 있은 뒤 몇 달 뒤인 2007년 4월 21일 토요일 오전 8시 30분경 루이스턴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주차장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죽음을 다룬 기사를 보니, 그를 농담꾼, 총기애호자(warm AK-47)라고 표현하며 최근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새로운 라벨이 붙었다고 한다. 기사를 읽다 보니 그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최근 미국에서 연달아 벌어지는 있는 무차별 총기사건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섬뜩한 생각이 엄습했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 유년 시절에 맞이한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조카 때문에 발생한 가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뭉친 짐과 밥 그리고 수전 버지스 가족에 초점을 맞추면서 또 한편으로 헬렌이 가족의 오점으로 생각하는 재커리 올슨의 인종범죄를 대하는 시선도 주목할 만하다. 과연 재커리가 한 행동이 무슬림 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마도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모스크에 걸어둔 것이 왜 하필이면 무슬림이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 머리였을까? 소나 양 혹은 염소 같은 다른 동물들도 있지 않은가. 무지의 소산이라고 하기엔 짙은 고의성이 느껴지지 않은가.

 

유투브에 나온 <버지스 형제> 저자와의 대담 동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hctgXjRzE2A) 도 저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찌해서 제목을 <버지스 남매>라고 하지 않고 ‘버지스 형제’로 지었는지에 대한 설명, 책을 쓰기 위해 메인 주에 거주하는 소말리아 난민들에 대해 방대한 리서치 작업을 했다는 설명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미국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소말리아라는 나라에 대해 그리고 내전 그리고 미국에 와서 살게 된 캠프 등에 저자는 관심을 갖고 리서치를 진행했다고 한다. 현실 세계에서 소말리아 난민들을 돕고 있다는 는 독자 중의 한 명이 미국에서 가장 백인주의적이고 오래된 메인에 그들이 정착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저자는 우선 미국이 몇몇 거점으로 삼은 곳이고 집세가 싸며, (조지아 주 같은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이들을 키우기에 안전하다는 이유로 명쾌한 설명을 해주었다.

 

 

 

 

 

 

 

 

 

 

 

 

 

퓰리처상 수상에 빛나는 작가답게 글쓰기에 대해서도 한 수 알려 주었다. 항상 자신의 본능에 반대해서 글을 쓰고 캐릭터를 만들어라. 특히 캐릭터를 만드는데 있어, 흥미진진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코치해 주었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주인공처럼 호감이 가지 않는 캐릭터를 소설이 진행될수록 호감을 느끼게 만드는 실력이야 말로 대가가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아니었을까. 대담을 들으면서 일가를 이룬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결연한 자세 같은 것도 눈에 띄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는 의례적인 질문에 앨리스 먼로와 윌리엄 트레버를 정말 정말로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작가로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들도 섭렵하고 있다고. 물론 러시아 작가들도 꾸준히 읽는다고 했다. 한 10분 정도 남겨 두고 고만 보았는데 시간이 나는 대로 마저 볼 생각이다.

 

어쨌든 이상이 나의 <버지스 형제>를 읽기 전에 취합한 정보들이었다. 빨리 내 수중에 들어와서 읽어 봤으면 좋겠다.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다 나는.



드디어 책 도착, 바로 읽기 시작했다.

유투브 동영상을 보고 나서 읽으니 더더욱 생생하게

와닿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에이미와 이저벨>도 읽어야 하는데 자꾸만 독서새

끼줄이 꼬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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