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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 종교개혁 - 루터의 고요한 개혁은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가 ㅣ 지성인의 거울 슈피겔 시리즈
디트마르 피이퍼 외 지음, 박지희 옮김, 박흥식 감수 / 21세기북스 / 2017년 10월
평점 :

올해는 루터가 독일 변방의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시작된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그리고 레닌의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기도 하다. 전자가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의 전이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회적 변혁을 이루는데 중점적인 역할을 했다면, 후자는 인간해방의 관점에서 또다른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후자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몰락 이후, 종주국 러시아에서조차 예전 같은 대우를 못받고 있는 것 같다.
교회는 한국에 와서 대기업이 되었다
우스꽝스럽게도 한국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과는 정확하게 정 반대로 가고 있다. 전세계에서 최고 신도수를 자랑하는 어느 교회의 목사는 130억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배임죄로 유죄확정이 되었고, 성범죄 전력의 목사가 어떠한 치리도 받지 않고 버젓이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타락한 중세교회의 전범을 그대로 따라가는 모습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이라도 하듯이 부자세습을 완료한 대형교회의 양태에서 완료되었다. 루터가 한국에 와서 대기업이 되어 버린 21세기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본다면, 분연히 두 번째 종교개혁을 외치지 않겠는가.
장 칼뱅의 장로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큰 의미로 다가 오지 않는 모양이다. 동아시아 최고의 개신교 국가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종교개혁 500주년이 조용한 기세다. 독일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10년 전부터 종교개혁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종교인 과세 같은 맘모니즘 이슈에 대해서는 벌떼 같이 일어서는 종교인들이 중세교회보다 더 중세교회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는 한국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적인 이야기에서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된 15세기 르네상스는 한 세기 뒤에 영방국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으로 개화되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 시작된 면죄부 발행은 중세 기독교 타락을 상징하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독일 민중들은 교회가 자기들에게 수탈한 돈을 로마로 보내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르네상스 시절에 발흥한 인문주의가 민중들에게 영향을 미친 탓이었을까. 신본주의 계급사회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무르익을 무렵, 독일의 변방 작센 주에 자리잡은 비텐베르크의 젊은 수도사가 개혁의 불씨를 당겼다. 로마에 저항하는 수도사라는 더없이 좋을 구호로 무장한 마르틴 루터의 등장이었다. 당시 지배계급이 사용하던 라틴어가 아닌 민중의 언어인 독일어로 때마침 발전하기 시작한 인쇄술의 도움으로 루터의 주장은 독일 전역에서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오역을 지적하고, 가톨릭의 보속을 부정하고, 가톨릭 사제를 부인하는 만인사제설 그리고 믿음과 은총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겠다는 루터의 주장이야말로 시대정신에 부합했던 것이다.
이런 이단적 주장에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젊은 수도사를 파문하기에 이르렀고, 가톨릭을 신봉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는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의 주장을 들어 보기에 이른다. 이렇게 이어지는 급박한 사태의 전개에서, 개신교쪽으로 기운 제후들 가운데 특히 루터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작센 선제후 현명공 프리드리히와 헤센 백작 등의 제후들이 황제의 통치와 교황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루터가 주창한 종교개혁에 동참하기에 이른다.

주간지 슈피겔에서 엄선한 저널리스트들과 다수의 신학자들은 이런 일련의 사태에 다양한 목소리를 낸 인물들에 대한 목소리도 세세하게 담아냈다. 현명공 프리드리히의 지원으로 독일에서 내로라하는 대학도시가 된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를 지원한 신학자 필립 멜란히톤을 비롯해서, 채색삽화로 루터의 독일어 9월성경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루카스 크라나흐는 발군의 실력으로 홍보를 담당했다. 교황을 당나귀에 비유하는 풍자물에서 보듯이 크라나흐는 선전선동의 대가였던 모양이다. 기사가 몰락하기 시작한 시대, 본질은 날강도에 가까웠던 폰 지킹엔은 루터의 호위무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그가 과연 루터의 종교개혁이라는 대의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도 종교개혁에 한몫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로마에 저항하는 수도사 루터가 무지막지하게 속도로 써내려간 일단의 팜플렛들은 인쇄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상품이었다. 종교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을 담아낸 루터의 글에 대중과 지식인 계급이었던 귀족들은 열광했다. 루터가 글을 발표하는 대로, 대기하고 있던 인쇄업자들이 달려들어 인쇄물을 찍어내기에 바빴을 정도였다고 한다. 16세기 초반, 독일 내에서 유통하던 인쇄물의 1/3에 해당하는 분량이 루터가 쓴 저작물이었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면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하지 않았을까.
1부와 2부에서 종교개혁의 전개, 시대상 그리고 당시 활약하던 인물들을 다뤘다면 3부에서는 반종교개혁 진영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당시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나 황제였던 칼 5세 모두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이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미처 몰랐다. 그 후과를 알았다면,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루터는 1세기 전 보헤미아의 개혁가 얀 후스와 똑같은 운명에 처해졌으리라. 루터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중세를 끝장내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 종교개혁 역시 후퇴했을 것이다. 가톨릭 진영에서도 이그나시오 로욜라 같은 인물이 등장해서 반동적 예수회를 조직해서 내부 개혁에 매진하기도 했다. 특히 루터의 맞수로 나선 선수로 슈피겔 저자들은 베드로 가니시오를 꼽았다. 루터를 추종하는 개신교의 등장으로 거의 무너지겐 된 독일 가톨릭의 보루로 등판해서, 가니시오는 보수적 가톨릭 신앙을 부흥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지난 세기에 가톨릭의 성인으로 시성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의 뛰어난 활약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슈피겔이 선정한 저널리스트들과 학자들은 1520년대 독일을 휩쓸었던 농민전쟁에서 루터가 보여준 보수적 입장과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도 냉철한 분석을 선보인다. 루터로부터 영향을 받은 독일 농민들은 각지에서 폭동과 반란을 일으켰고, 독일 제후들은 잘 훈련된 용병들을 동원해서 농민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와중에 루터는 제후들의 편에 서면서, 신의 은총을 갈구하면서 평등을 주장한 농민들을 저버렸다. 물론 토마스 뮌처 같이 극단적인 주장을 펴면서 농민반란에 적극 가담한 신학자도 있었다. 또한 독일 거주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개신교로 개종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고 지속적으로 모욕적인 태도로 자신들을 대하는 유대인에게 적대감을 느낀 나머지 마지막 저작에서까지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훗날 나치들은 루터에게서 반유대주의의 단초를 찾아냈더고 하는데, 모사드에게 비밀리에 납치되어 예루살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이 루터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전율할 정도였다. 루터의 반유대주의는 현대의 반유대주의와는 그 결을 달리 한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저작들의 출간이 봇물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다시 한 번 루터가 주창했던 종교개혁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려놓음과 나눔 그리고 십자가 정신이라는 초대 교회 정신에서 벗어나, 루터가 주장했던 평등주의에 입각한 만인사제설에 어긋난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고, 성장지상주의를 목청껏 외치면서 오늘도 맘몬의 곳간을 채우는 데만 여념이 없는, 점점 사회에서 격리되어 게토화 되어 가는 한국 대형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물적 인적 자원을 빨아들이는 소수의 대형교회보다 우리는 작고 건강한 다수의 작은교회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긴 글을 마무리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