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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박사의 오류
김연경 지음 / 강 / 2016년 10월
평점 :

작고한 김소진 작가 덕분에 강 출판사를 알게 됐다. 그리고 한국 소설이 읽고 싶어지면 강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뒤적여 보게 된다. 그렇게 탁명주 작가의 <도마뱀이 숨 쉬는 방>과 정광모 작가의 <존슨 기억 판매 회사>(아직까지도 리뷰를 못 쓰고 있다)를 만났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보석 같은 글들이 담긴 책들이라 애정할 수밖에 없더라. 지난 4월에 사서 나의 서가에 고이 모셔 두었던 김연경 작가의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재밌었다.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한국 소설은 지난 8월의 배명훈 작가의 신작 소설이었다. 그 뒤로는 한국 소설을 읽지 못했다. 아니 않았던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외국 작가들의 새로운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고, 게다가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덕분에 한참을 외유하며 보낸 그런 느낌이다. 독자들의 소구력을 끄는 작가들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독자들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에 등장하는 일상의 평범한 이들의 범속한 일상을 원한다. 하긴 현실세계에서 워낙 드라마틱한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니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계에서 문학으로 점프할 시간이 있나 그래.
사실 김연경 작가는 소설가로 보다 번역가로 더 친숙한 그런 느낌이다. 표제작에서 교수 임용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 결국 자기 소멸을 선택한 독일 고전철학 연구교수 최승휴 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소위 자본주의 3.0 시대, 사회 전반에 걸친 각자도생의 시절이다. 학문 분야에서도 경쟁은 필요불가결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평생 공부만 해서 먹고 살아온 최승휴 씨는 시간강사가 아닌 정규직 교수의 꿈을 키워 보지만, 희망고문일 따름이다. 알코올, 카페인 그리고 니코틴만으로 넘치는 지식인의 자아의식을 달랠 수 없었던 그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철학이 더 이상 밥먹여 주지 않는 세상, 그것이 바로 21세기 우리가 직면한 살풍경한 모습이다.
시작이 좀 어두웠다. 다음 이야기 <섬>에서는 나의 짧았던 연구소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부산처녀 서울 상경기가 이어진다. 한 때 죽고 못살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던 부모 대부터 시작된 한많은 가족사에서는 왜 이렇게 웃음이 나던지. 무능력한 아버지의 모습과 고된 시집살이에 술에 손대기 시작한 어머니의 알코올 연대기, 사해동포주의자 동생의 화려한 방랑기. 어느 소설에서도 빠지지 않을 법한 불행의 삼종세트가 그대로 시전되는 장면 앞에서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차며 낄낄댔다. 아무리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하지만 타인의 불행에 웃는 내가 과연 비정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범속한 이야기들에 몰입되어 가기 시작했다. 한 때, 요만한 고추를 가진 전혀 로맨틱해 보이지 않는 노총각 상사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들이 점점히 이어진다.
고달픈 육아러의 모습에, 처자식 벌어 먹이겠노라고 천지사방으로 뛰면서 파이프 영업을 하며 시설도 후진 여관방에 피곤한 몸을 누이는 우리네 가장의 고달픈 일상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휙휙 지나쳐 가기 시작한다. 뭐 다 그렇게 사는 게 아니겠어, 그렇게 가는 거지. 별 것도 아닌 문장들인 “여기가 묵시록이다”, “Welcome to the real world"에서는 왜 이렇게 절절하게 다가오던지. 무엇이 우연이고, 필연인지 그리고 또 인과는 따져서 무엇하리.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타령이 절로 나온다.
삼십대 후반의 썸타던 동기에게 주워들은 그야말로 바람의 파이터 찜쪄 먹을 만한 스토리를 지닌 강태공이자 심마니를 취재해서 소설 소재로 써먹기 위해 무작정 일본까지 날아가는 소설가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자신의 원룸에 당당하게 들어와 아이스크림을 쟁여 놓은 도둑님과의 대화 장면에서도 빵빵 터졌다. 아마 문제의 아이스크림이 호두마루였지. 그거 맛있는데. 별 소득 없이 돌아와 결국 듣게 된 이야기는 너무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이혼 후 다시 만난 운명의 여인과 나이 오십에 아이 낳고, 아이 교육을 위해 다시 서울로 가야 한다는. 사교육, 부동산공화국의 민낯을 교묘하게 저격하기도 한다. 구토에 따른 허기 그리고 폭식으로 이어지는 청춘들의 초상이 등장하는 장면도 쓸쓸하기만 하다. 그놈의 인공지능 알파고 타령 때문에 더 이상 개인의 노동이 예전 같이 중요하지 않은 시절에, 실연 때문에 수면제를 삼키는 장면을 과연 감정의 과잉으로 치부하는 게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모두 8편이 실린 소설집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에서 부산 달동네에 훈이복덕방을 운영하시던 부부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맞벌이 부모 슬하에서 자란 때문인지, 그런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에 염통이 노곤노곤해지는 느낌이랄까. 돌봐 주는 이 없이 성장하는 가운데 주변에 훈이복덕방 아주머니처럼 통 크게 내가 아닌 타인에게 베풀 줄 아는 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상념에 젖어 보기도 했다. 옆집 아이들에게 통째로 수박을 갈라 친구들까지 대접하기도 하고, 끼니를 거른 아이에게 계란 후라이를 부쳐 주며 먹성과 인사성 좋다는 말로 퉁치는 장면에서는 살짝 눈가에 염분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려웠지만 서로 ‘노나’ 먹는 재미로 살던 시절은 저 뒷켠으로 썩 물러나 버리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각자도생의 시기에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
어린 시절 들었던 전설 같은 고소득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의 추억 혹은 저주로 고생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아지랑이> 그리고 마지막의 <깍두기>로 김연경 작가가 구사하는 대망의 범속한 이야기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마지막 단편의 주인공 이정애 씨의 깍두기 인생이 어찌나 슬프게 다가 오던지.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소설집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에 담긴 우리네 일상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있는 범속한 이야기들이야말로 작가가 구사하는 최고의 문학적 무기가 아니었을까. 결혼과 출산, 육아 같은 일상의 주제들로부터 이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다니 놀랍다. 우리가 늘상 접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황당무계한 막장극이 아니라, 우리네 현실과 아주 가까운 그런 범속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더 설득력과 소구력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닐까. 내가 다음에 읽고 싶은 강 출판사의 책은 김가경 작가의 <몰리모를 부는 화요일>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사는 인근 세 개 도시 도서관에서 강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은 아예 소장을 하지 않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사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