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서 <내 이름은 루시 바턴>에 이은 신작이 나온다고 해서 올해 나온 전작의 스핀오프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는 <어떤 것도 가능해:Anything is Possible>(2017)일 거라는 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새로 나온 작품은 2013년에 발표된 스트라우트의 네 번째 작품 <버지스 형제>였다. 어찌어찌하여 그녀의 팬이 되어 버린 독자는 단돈 147원으로 신간을 주문하는 신공을 시전하였다. 지금 배송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버지스 형제>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우선 작가의 홈피에 들어가 원서로 소개된 첫 몇 페이지와 오디오 파일로 들어 봤다. 세 명의 버지스 집안 사람들 중에 밥 버지스와 그의 형수 헬렌이 통화하는 장면이 귓가를 간질인다.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 시리(NYC)에서 잘 나가는 로펌의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는 잘난 형 짐 버지스와 그에게 항상 괴롭힘을 당하는 역시 변호사 출신 동생 밥 그리고 쌍둥이 남매 수전. 30년도 전에 고향을 등진 짐과 밥은 어느 날, 소말리아 난민들이 신성하게 예배드리는 모스크에 얼린 돼지 머리를 건 19살 짜리 조카 재커리 올슨의 치기 어린 장난이 인종범죄로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 되면서 조카일병을 구하기 위해 거국적으로 단결해서 고향으로 향한다. 조카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는데, 삼촌들이 그 정도 쯤이야.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조카 구하기가 예상대로 쉽게 진행된다면 소설이 재밌을까? 없을까?

 

 

 

 

 

 

 

 

 

 

 

 

 

소설의 배경은 다시 1998년 작가의 데뷔작의 공간적 배경이 되었던 미국 동북부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메인 주의 셜리폴스다. 작년에 나온 <에이미와 이저벨>은 57쪽까지 읽다 말고 회사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가 셜리폴스를 찾아 보겠다는 아둔한 독자의 욕심에 다시 소환되었다. 아무래도 <버지스 형제>부터 읽고 나서 후순위로 읽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 그런데 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에이미와 이저벨>부터 집어 들었다.

 

해외 리뷰들을 참조해 보니 소설 <버지스 형제>는 두 가지 축으로 굴러 간다고 한다. 하나는 가족이면서 가족 같지 않은 느슨한 연대로 구성된 21세기 미국의 가족 시스템 내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가족 간의 갈등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향 소말리아의 모가디슈를 떠난 난민들의 현지 적응화, 특히 9-11 사태 이후 이방인들에게 적대적으로 변한 이민천국 미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저널리즘을 능가하는 작가의 문학적 탐구라고나 할까.

 

실제로 2006년 7월 3일, 미국 메인 주의 루이스턴에서 발생한 사건에서 작가는 영감을 얻은 모양이다. 작은 시골 마을의 9%에 해당하는 인구에까지 육박하는 소말리아 난민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원래 살던 이들의 반감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흑인인데다 무슬림이기까지 하니 더더욱 이방인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 브렌트 매튜스라는 청년은 사건 발생 전에 에릭 사이퍼스라는 경찰에 자신의 계획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물론 해당 경찰은 그 행동이 무단 투기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지만, 매튜스는 그저 장난(practical joke)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메인 주 검찰은 매튜스에게 경고명령장을 발부했고, 나중에 경범죄로 체포되었는데 그 사건이 매튜스에게는 첫 범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폭행, 음주운전 외에도 잡다한 전과가 있었다. 매튜스의 변호사는 연방 차원에서 중대하게 다뤄지는 증오범죄가 아니고, 종교시설인 모스크를 알리는 싸인이 없었노라고 변론했지만 자신의 의뢰인이 그 정도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나 보다.

 

인구 35,000명 정도의 루이스턴 마을에 대규모로 소말리아 난민들이 유입되어 오면서, 유색인종 유입에 반대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랠리도 기승을 부렸다. 알카에다 테러 이후, 피부색과 종교가 다른 이방인들에 대한 관용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미국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참고로, 브렌트 매튜스는 사건이 있은 뒤 몇 달 뒤인 2007년 4월 21일 토요일 오전 8시 30분경 루이스턴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주차장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죽음을 다룬 기사를 보니, 그를 농담꾼, 총기애호자(warm AK-47)라고 표현하며 최근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새로운 라벨이 붙었다고 한다. 기사를 읽다 보니 그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최근 미국에서 연달아 벌어지는 있는 무차별 총기사건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섬뜩한 생각이 엄습했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 유년 시절에 맞이한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조카 때문에 발생한 가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뭉친 짐과 밥 그리고 수전 버지스 가족에 초점을 맞추면서 또 한편으로 헬렌이 가족의 오점으로 생각하는 재커리 올슨의 인종범죄를 대하는 시선도 주목할 만하다. 과연 재커리가 한 행동이 무슬림 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마도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모스크에 걸어둔 것이 왜 하필이면 무슬림이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 머리였을까? 소나 양 혹은 염소 같은 다른 동물들도 있지 않은가. 무지의 소산이라고 하기엔 짙은 고의성이 느껴지지 않은가.

 

유투브에 나온 <버지스 형제> 저자와의 대담 동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hctgXjRzE2A) 도 저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찌해서 제목을 <버지스 남매>라고 하지 않고 ‘버지스 형제’로 지었는지에 대한 설명, 책을 쓰기 위해 메인 주에 거주하는 소말리아 난민들에 대해 방대한 리서치 작업을 했다는 설명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미국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소말리아라는 나라에 대해 그리고 내전 그리고 미국에 와서 살게 된 캠프 등에 저자는 관심을 갖고 리서치를 진행했다고 한다. 현실 세계에서 소말리아 난민들을 돕고 있다는 는 독자 중의 한 명이 미국에서 가장 백인주의적이고 오래된 메인에 그들이 정착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저자는 우선 미국이 몇몇 거점으로 삼은 곳이고 집세가 싸며, (조지아 주 같은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이들을 키우기에 안전하다는 이유로 명쾌한 설명을 해주었다.

 

 

 

 

 

 

 

 

 

 

 

 

 

퓰리처상 수상에 빛나는 작가답게 글쓰기에 대해서도 한 수 알려 주었다. 항상 자신의 본능에 반대해서 글을 쓰고 캐릭터를 만들어라. 특히 캐릭터를 만드는데 있어, 흥미진진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코치해 주었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주인공처럼 호감이 가지 않는 캐릭터를 소설이 진행될수록 호감을 느끼게 만드는 실력이야 말로 대가가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아니었을까. 대담을 들으면서 일가를 이룬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결연한 자세 같은 것도 눈에 띄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는 의례적인 질문에 앨리스 먼로와 윌리엄 트레버를 정말 정말로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작가로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들도 섭렵하고 있다고. 물론 러시아 작가들도 꾸준히 읽는다고 했다. 한 10분 정도 남겨 두고 고만 보았는데 시간이 나는 대로 마저 볼 생각이다.

 

어쨌든 이상이 나의 <버지스 형제>를 읽기 전에 취합한 정보들이었다. 빨리 내 수중에 들어와서 읽어 봤으면 좋겠다.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다 나는.



드디어 책 도착, 바로 읽기 시작했다.

유투브 동영상을 보고 나서 읽으니 더더욱 생생하게

와닿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에이미와 이저벨>도 읽어야 하는데 자꾸만 독서새

끼줄이 꼬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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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에프 모던 클래식
애니 프루 지음, 전하림 옮김 / F(에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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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이 자자한 애니 프루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드디어 읽었다. 모두 11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의 원제는 <클로즈 레인지: 와이오밍 이야기들>이다. 그리하여 구글맵으로 도대체 와이오밍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그리고 소설들에 나오는 샤이엔, 캐스퍼 그리고 래러미 같은 그나마 이름이 좀 알려진 도시들의 위치들을 찾아봤다. 미국에서 10번째로 큰 주지만 인구는 2016년 기준으로 58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인구 수에서는 DC를 제외한 50개 주 중에서 꼴찌를 차지하고 있다.

 

소설집 <브로크백 마운틴>에 등장하는 황량한 목장의 카우보이들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미국의 메트로폴리스들인 뉴욕이나 시카고 혹은 로스 앤젤레스에서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이다. 전자가 지구촌화 되어 가는 우리네 삶의 양상과 변별점을 가지지 않는다면, 후자는 정말 확연하게 다르다. 정치적으로 전통적으로 ‘레드’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보조금에 의존해서 지역 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삶의 양태도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국 미국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와이오밍에 사는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네 목장의 울타리 치기와 가뭄이나 우박 같은 재해로부터 안전하게 한 해를 보내는 일이다. 문득 예전에 오클라호마에서 온 친구가 평소에 하도 할 일이 없어서, 소들이 교미하는 것을 보고 놀았다는 말을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읽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졌다. 또 한 편으로 애니 프루 같이 능력 있는 작가가 와이오밍 같은 그야말로 촌구석에서 미국적 삶의 양태를 글로 쓰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미국 사회를 유지하는 힘을 느낄 수도 있었다. 이런 다양성이야말로 비록 예전 같진 않지만 팍스 아메리카나의 숨겨진 저력이 아닐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낯설음으로 가득하다. 아름다운 박차를 만들어서 자그마치 300달러나 주고 파는 박차 제조공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그 아름다운 박차를 타고 다니다가 암컷 늑대를 만나 낙마해서 땅에 쳐박혀 죽은 아내의 희비극적인 이야기. 어려서부터 말타고 다니는 일에 익숙하다 보니 거친 카우보이 사내들 사이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카우걸.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아내를 범하고 그 친구에게 술김에 총질을 당하면서도 맞총질하지 않는 대범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여자 거인에 가까운 모습이어서 결혼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처녀는 트랙터와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아버지 대신 소를 사러 온 소 상인과 눈이 맞아 결혼에 골인하기도 한다.

 

거칠기 짝이 없는 황소 잔등에서 8초 버티기라는 신기에 가까운 로데오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싸나이들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인대가 끊어지고, 팔뚝이나 다리뼈 혹은 갈비뼈가 부서지는 건 일도 아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에도 몸이 낫는 대로 다시 로데오에 나서는 무모함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널뛰기 하는 소값과 세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안 대대로 물려 받아온 목장을 외지인들에게 팔고 소치는 일 말고는 아는 게 하나도 없이 천둥벌거숭이 뜨내기처럼 막일에 나서는 가장들의 모습에서는 직장에서 나이 먹고 정리해고로 인력시장에 내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가장들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는 기묘한 동질감마저 느낄 수가 있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와이오밍에는 카우보이들이 산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지상낙원 와이오밍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역시 소설집의 백미는 맨 마지막에 실린 <브로크백 마운틴>이었다. 정작 영화나 원작소설은 못 보고 항상 SNL 같은 패러디만 봐서, 형편 없는 카우보이 게이영화라고 생각했었는데 원작 소설을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히스 레저가 맡은 에니스 델 마와 제이크 질렌할이 연기한 잭 트위스트의 20년간에 걸친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중심이다.

 

양떼를 치는 일에 동료로 투입되었다가 기묘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아무도 자신들의 행동을 못 보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고용주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누가 양떼를 지키는 대신 비역질하라고 돈을 주냐며 비난하는 고용주의 일갈이 생생하다. 그리고 다시 약혼자에게 돌아가 결혼하고 제각각 가정을 꾸린 에니스와 잭은 동성애자라기 보다 양성애자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 결국 잊을 수 없었던 브로크백 마운틴 시절을 그리며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지 않았을까. 어쨌든 삶의 한 시절을 그렇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원작소설이나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셔츠 속의 셔츠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급한 마음에 구한 영화를 차분하게 볼 생각에 앞서 소설에 등장한 예의 장면이 영화에서는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 찾아보았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된 거친 서부 사투리(솔직히 말해서 알아 먹기 힘든)를 구사하던 히스 레저의 명연기가 돋보였다. 앤 해서웨이가 잭 트위스트의 와이프로 등장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케이트 마라는 틴에이저 시절의 에니스의 딸 알마 주니어로 나왔다.

 

소설집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 애니 프루의 와이오밍 시리즈는 두 편(2004년, 2008년)이 더 나왔다. 애니 프루의 작품은 <시핑 뉴스> 이래 두 번째인데 전에 읽은 작품보다 훨씬 더 와이오밍 스토리가 마음에 든다. 애니 프루의 작가의 다른 신간들도 빨리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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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1-14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 그 원작소설인가 보네요.. 자연풍광과 카우보이의 동성애 연기가 기억에 남던데..원작과 영화를 비교해 보면서 감상하는 것도 참 좋은 것 같군요. 엄청 부지런 해야 겠지만.. 저 같은 게을뱅이는 소설 읽기에도 바쁘네요.^^

레삭매냐 2017-11-14 15:34   좋아요 1 | URL
전설 같은 책을 이제야 만나게 되었네요.
영화에 대해서도 정말 많이 들었었는데
마침 소장 중인지라 시간 내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외로 지금은 스타가 된 배우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cyrus 2017-11-14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개정판 표지가 신판보다 낫군요. ^^

레삭매냐 2017-11-14 15:45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영화의 후광 덕분이 아닐까요? ㅋㅋㅋ

단편을 영화로 만들어낸 역량이 더 대단한
것 같습니다.

밤에읽는책 2019-07-11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리뷰 진짜 잘 읽었습니다. 애니 프루 소설들 읽어보고싶어지네요!
 
꽃들에게 희망을 (양장) 생각하는 숲 6
트리나 폴러스 글 그림, 김석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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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다시 읽어도 기분 좋은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을 다시 읽었다. 내가 오늘 중고서점에서 만난 책에는 친구의 열두살 생일을 축하한다는 친구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난 선물 받은 책은 절대 팔거나 누구에게 주지 않는데라는 생각에 조금은 씁쓸해졌다. 선물 받은 친구는 이 책의 가치를 몰라서 처분한 게 아니었을까? 벼라별 생각이 다 드는 오후였다.

 

그런데 왜 책의 제목이 꽃들에게 희망일까? 주인공은 언젠가 나비가 되어 세상을 훨훨 날아 다닐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가 아니었던가. 태어나 먹이를 먹으면서 몸집을 키우는 것 밖에 별다른 할 일이 없던 호랑 애벌레는 벌레답지 않게, 그런 게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태어난 나무를 떠나 세상구경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벌레들이 기둥을 타고 오르는 장면을 보고는 자신도 기둥타기 대열에 참여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도 없이 경험하고 있는 치열한 경쟁에 대한 은유였다.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선 다른 벌레들을 짓밟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르는 기둥 위로 그저 올라가는 것만이 지상과제일 따름이다. 그들이 그렇게 애타게 원하는 기둥 위에는 과연 그동안의 고통과 노력을 보상해 줄만한 무엇이 과연 존재하는 걸까? 나중에 두 번째 도전에서 기둥 위의 비밀을 알게 될 호랑 애벌레와 동료 애벌레들에게 그것은 끝까지 지켜져야 할 비밀이었다.

 

기둥으로 올라가는 길에 노랑 애벌레는 만난 호랑 애벌레는 경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하산해서 노랑 애벌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문제는 과연 저 기둥 위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결국 만류하는 노랑 애벌레를 뒤로 하고 호랑 애벌레는 두 번째로 기둥오르기에 도전한다. 하산해서 충분한 휴식과 먹이로 보충한 호랑 애벌레는 초짜 시절과 달리 동료들을 제치고 마침내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정상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실은 아무 것도 없다였다. 그저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동료 애벌레들을 짓밟고 버티는 것만이 존재의 목적이었을 따름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치열한 현실이 주는 허무주의로 <꽃들에게 희망을>의 교훈을 잡을 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소비를 위한 물질적 성공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호랑 애벌레의 회의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한편, 지상에 남은 노랑 애벌레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고치에서 나비로 되어 가는 과정을 겪고 있는 늙은 애벌레를 만나 자신도 나비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새로운 죽음과 탄생에 도전한다. 트리나 폴러스 작가는 호랑 애벌레의 기둥 오르기 도전이나 노랑 애벌레의 나비가 되고자하는 도전을 같은 수준에서 평가한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는 평가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날게 된 노랑 애벌레를 알아본 호랑 애벌레 역시 고치가 되는 변태 과정을 거쳐 나비가 되는 숙명적 통과의례에 도전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영속해서 반복된다.

 


문득 <꽃들에게 희망을>에 등장하는 다음의 문구가 생각났다. 나비가 없다면 꽃들도 존재할 수 없지. 나비들과 벌들이 아름다운 꽃들이 필 수 있게 수정작업을 해주어서 만발하는 꽃들이 있을 수 있다고 했지. 지난달 찾은 당수동 시민농장에 만개한 코스모스와 해바라기들을 쉴 새 없이 오가는 나비들과 벌들이 생각났다. 아름다운 나비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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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1-13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이 들어봤고, 대충 내용도 안다고 생각해서 읽어 보진 않았는데...기회되면 읽어보겠습니다..경쟁이 아닌 상생의 길을 택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야지요..ㅎㅎ

레삭매냐 2017-11-13 16:54   좋아요 1 | URL
150쪽 남짓한 동화 스타일이라 보시기에
부담이 없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그런 책이랍니다.

sprenown 2017-11-13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꼭 읽어 볼게요..
 
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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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신 중국사의 대가라는 미야자키 이치사다 선생의 <옹정제>를 읽었다. <강희제>는 서구 학자인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책으로 만나 봤고, <건륭제> 역시 완독은 못했지만 역시 서구 학자의 시선으로 들여다 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모국 사람은 아니지만, 역시 나름대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아시아 대제국을 호령했던 군주를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분량이 짧아서 부담 없이 도전할 수가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강희 건륭연간 사이에 낀 청나라 5번째 황제로 긴 제위기간을 자랑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낀 비운의 인물이라고나 할까. 3대 순치제 시절에 대망의 중원 패권을 차지한 청조는 강희 연간의 대규모 반란과 원정을 통해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노년의 강희제는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후에 없을 황태자를 세워, 후계를 도모했지만 이미 조정의 큰 문제가 된 보스 정치의 폐해로 황태자가 낙마하고 결국 자그마치 35명이나 되는 황자들 가운데 사아거 인전이 대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45세의 나이에 천자의 자리에 오른 옹정제는 훌륭한 정치로 사해인민을 다스리겠다는 당찬 포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청년 천자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자세가 아니었을까. 일단 만승의 자리인 황제가 된 옹정제는 주변 정리부터 시작한다. 비록 형제이긴 했지만 자신과 황위 계승 경쟁자들이었던 형제들을 숙청하고, 태조 누르하치의 장자 추옝의 후손들인 수누 일족도 순차적으로 정리해 나간다. 물론, 십삽아거 이친왕처럼 자신에게 충성한 형제들에게는 그만큼 합당한 대우를 해주기도 했다. 역시 권력은 부모형제와도 나눌 수 없다는 오랜 격언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미야자키 교수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수누 일족에 대한 기사에서 충성심과 인내 그리고 성실함에서 한족을 압도했던 만주 귀족에 대한 후한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고작 인구 100만 정도의 만주족으로 백배나 되는 한족이 사는 중원 대륙을 점령한 성취에 대해 만주족 신인 아부카이 칸의 수호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는 인식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선 기존의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수누 일족은 소수의 신에서 보편적 신인 기독교로 귀의했던 게 아닐까. 자신의 일족을 핍박하는 천자의 부당한 처사에 수누 노인은 당당하게 맞서는 장면에서는 만주 꼴통의 기개를 엿볼 수도 있었다. 역시 보수라면 이 정도는 되야지 하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일본 작가의 옹정제 평전에서 흥미로웠던 점 중의 하나는 당대 여론을 주름 잡았던 독서인, 다시 말해 관료들에 대한 평가다. 현대 같은 미디어가 없던 시절 여론을 좌지우지했던 그룹은 역시 관료 지식인 계급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에 대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400개 주나 되는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 위해서 관료제에 대한 천자의 장악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옹정제가 만기친람 스타일의 독재군주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 챙길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황제는 주비유지라는 방식으로 순무나 총독 같은 주요 지방관들로부터 기밀 보고를 받았고, 사실여부를 가리기 위해 밀정 정치를 충실하게 활용했다. 천자의 지방관들이 모두 그가 총애한 총독 3인방 리웨이, 텐원징 그리고 오르타이 같은 유능한 행정관료들 같았다면 천명을 대신해서 천조를 다스리는 수월했겠지만, 자본과 결탁한 관료들을 다스리기란 난망한 주제였다.

 

지식인 계급에게 독점된 자본 집중 문제도 결국에 가서는 중국이 근대화로 이행하지 못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저자는 냉철하게 분석한다. 비슷한 시기의 유럽에 비해 청나라의 생산력을 월등했지만, 산업혁명을 거친 유럽에 비해 재생산에 투입되지 못하고 사장된 자본 때문에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지는 서구 열강의 침탈이라는 암흑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반역의 책>(사두기만 하고 아직 못 읽었다)에서 다룬 악비의 후손으로 알려진 웨중치에게 모반을 권고한 쩡징과 <대의각미록>에 대한 문자옥에 대해 미야자키 교수는 어떤 평가를 했을 지 궁금했는데,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 가서 좀 아쉬웠다. 대인배 모습을 보이고자 황제는 한낱 서생에 지나지 않는 쩡징과 무려 토론 배틀을 벌여 그를 마침내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삼족을 멸하는 처벌 대신 석방한다. 그렇게 끝나면 좋았으련만, 아들 건륭제가 즉위한 다음 쩡징은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된다. 각종 유언비어의 출처였던 <대의각미록>도 역시 시중에서 회수되었다.

 

중년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 옹정제는 선제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가 선택한 관용의 정치보다는 수성과 관리의 제왕으로 중국식 독재방식을 선호했다. 문제는 제국에 주어진 모든 문제를 황제가 관리할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어쩌면 황제의 지나친 자신감이 청나라 다른 황제에 비해 비교적 짧은 제위 기간으로 나타났던 게 아닐까. 아무리 체력이 강한 제왕이라고 하더라도 정신적 스트레스와 관료들을 제압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보면 결국 쓰러지기 마련이다. 어쨌든 낭비과 허례허식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주의자로 옹정제는 제국의 재정을 견실하게 다졌고, 다음 대의 건륭제 시절의 대원정을 위한 튼튼한 국가재정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만, 강희제나 건륭제처럼 전장에서 특별한 공적을 쌓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후대에 빈약한 평가를 받게 되어 아쉽다는 의견을 저자는 개진한다.

 

마크 C. 엘리엇의 <건륭제>를 읽다 말았는데, 옹정제 평전을 읽고 나니 그 책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중에서 윌리엄 T. 로가 쓴 <청 : 중국 최후의 제국>도 중간에 멈춰 서 있다. 앞으로 남은 두 달 동안은 새로운 책들을 읽을 게 아니라 읽다만 책들부터 하나씩 읽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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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박사의 오류
김연경 지음 / 강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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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한 김소진 작가 덕분에 강 출판사를 알게 됐다. 그리고 한국 소설이 읽고 싶어지면 강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뒤적여 보게 된다. 그렇게 탁명주 작가의 <도마뱀이 숨 쉬는 방>과 정광모 작가의 <존슨 기억 판매 회사>(아직까지도 리뷰를 못 쓰고 있다)를 만났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보석 같은 글들이 담긴 책들이라 애정할 수밖에 없더라. 지난 4월에 사서 나의 서가에 고이 모셔 두었던 김연경 작가의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재밌었다.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한국 소설은 지난 8월의 배명훈 작가의 신작 소설이었다. 그 뒤로는 한국 소설을 읽지 못했다. 아니 않았던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외국 작가들의 새로운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고, 게다가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덕분에 한참을 외유하며 보낸 그런 느낌이다. 독자들의 소구력을 끄는 작가들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독자들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에 등장하는 일상의 평범한 이들의 범속한 일상을 원한다. 하긴 현실세계에서 워낙 드라마틱한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니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계에서 문학으로 점프할 시간이 있나 그래.

 

사실 김연경 작가는 소설가로 보다 번역가로 더 친숙한 그런 느낌이다. 표제작에서 교수 임용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 결국 자기 소멸을 선택한 독일 고전철학 연구교수 최승휴 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소위 자본주의 3.0 시대, 사회 전반에 걸친 각자도생의 시절이다. 학문 분야에서도 경쟁은 필요불가결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평생 공부만 해서 먹고 살아온 최승휴 씨는 시간강사가 아닌 정규직 교수의 꿈을 키워 보지만, 희망고문일 따름이다. 알코올, 카페인 그리고 니코틴만으로 넘치는 지식인의 자아의식을 달랠 수 없었던 그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철학이 더 이상 밥먹여 주지 않는 세상, 그것이 바로 21세기 우리가 직면한 살풍경한 모습이다.

 

시작이 좀 어두웠다. 다음 이야기 <>에서는 나의 짧았던 연구소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부산처녀 서울 상경기가 이어진다. 한 때 죽고 못살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던 부모 대부터 시작된 한많은 가족사에서는 왜 이렇게 웃음이 나던지. 무능력한 아버지의 모습과 고된 시집살이에 술에 손대기 시작한 어머니의 알코올 연대기, 사해동포주의자 동생의 화려한 방랑기. 어느 소설에서도 빠지지 않을 법한 불행의 삼종세트가 그대로 시전되는 장면 앞에서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차며 낄낄댔다. 아무리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하지만 타인의 불행에 웃는 내가 과연 비정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범속한 이야기들에 몰입되어 가기 시작했다. 한 때, 요만한 고추를 가진 전혀 로맨틱해 보이지 않는 노총각 상사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들이 점점히 이어진다.

 

고달픈 육아러의 모습에, 처자식 벌어 먹이겠노라고 천지사방으로 뛰면서 파이프 영업을 하며 시설도 후진 여관방에 피곤한 몸을 누이는 우리네 가장의 고달픈 일상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휙휙 지나쳐 가기 시작한다. 뭐 다 그렇게 사는 게 아니겠어, 그렇게 가는 거지. 별 것도 아닌 문장들인 여기가 묵시록이다”, “Welcome to the real world"에서는 왜 이렇게 절절하게 다가오던지. 무엇이 우연이고, 필연인지 그리고 또 인과는 따져서 무엇하리.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타령이 절로 나온다.

 

삼십대 후반의 썸타던 동기에게 주워들은 그야말로 바람의 파이터 찜쪄 먹을 만한 스토리를 지닌 강태공이자 심마니를 취재해서 소설 소재로 써먹기 위해 무작정 일본까지 날아가는 소설가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자신의 원룸에 당당하게 들어와 아이스크림을 쟁여 놓은 도둑님과의 대화 장면에서도 빵빵 터졌다. 아마 문제의 아이스크림이 호두마루였지. 그거 맛있는데. 별 소득 없이 돌아와 결국 듣게 된 이야기는 너무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이혼 후 다시 만난 운명의 여인과 나이 오십에 아이 낳고, 아이 교육을 위해 다시 서울로 가야 한다는. 사교육, 부동산공화국의 민낯을 교묘하게 저격하기도 한다. 구토에 따른 허기 그리고 폭식으로 이어지는 청춘들의 초상이 등장하는 장면도 쓸쓸하기만 하다. 그놈의 인공지능 알파고 타령 때문에 더 이상 개인의 노동이 예전 같이 중요하지 않은 시절에, 실연 때문에 수면제를 삼키는 장면을 과연 감정의 과잉으로 치부하는 게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모두 8편이 실린 소설집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에서 부산 달동네에 훈이복덕방을 운영하시던 부부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맞벌이 부모 슬하에서 자란 때문인지, 그런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에 염통이 노곤노곤해지는 느낌이랄까. 돌봐 주는 이 없이 성장하는 가운데 주변에 훈이복덕방 아주머니처럼 통 크게 내가 아닌 타인에게 베풀 줄 아는 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상념에 젖어 보기도 했다. 옆집 아이들에게 통째로 수박을 갈라 친구들까지 대접하기도 하고, 끼니를 거른 아이에게 계란 후라이를 부쳐 주며 먹성과 인사성 좋다는 말로 퉁치는 장면에서는 살짝 눈가에 염분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려웠지만 서로 노나먹는 재미로 살던 시절은 저 뒷켠으로 썩 물러나 버리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각자도생의 시기에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

어린 시절 들었던 전설 같은 고소득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의 추억 혹은 저주로 고생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아지랑이> 그리고 마지막의 <깍두기>로 김연경 작가가 구사하는 대망의 범속한 이야기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마지막 단편의 주인공 이정애 씨의 깍두기 인생이 어찌나 슬프게 다가 오던지.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소설집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에 담긴 우리네 일상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있는 범속한 이야기들이야말로 작가가 구사하는 최고의 문학적 무기가 아니었을까. 결혼과 출산, 육아 같은 일상의 주제들로부터 이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다니 놀랍다. 우리가 늘상 접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황당무계한 막장극이 아니라, 우리네 현실과 아주 가까운 그런 범속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더 설득력과 소구력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닐까. 내가 다음에 읽고 싶은 강 출판사의 책은 김가경 작가의 <몰리모를 부는 화요일>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사는 인근 세 개 도시 도서관에서 강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은 아예 소장을 하지 않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사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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