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
폴 비티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지난 달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소장하고 있는 그의 책들을 모두 읽었다. 없는 책들은 도서관에 가서 빌려다 읽었다. 이시구로 선생의 모든 책들이 기존에 국내에 출간되어 있는 덕분에 놀라울 정도의 매출신장에 출판사는 기쁨에 찬 비명을 질렀을리라. 그리고 얼마 뒤, 맨부커상이 발표되었는데 우리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그리고 많은 책들이 발표되지 않은 작가들의 작가 조지 손더스가 수상했다. 게다가 그 수상작은 아직 번역 중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반응이 시큰둥할 수밖에. 아마 그리고 <바르도의 링컨>은 진입장벽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작년 맨부커 수상작인 폴 비티의 <배반> 역시 마찬가지다. 다 읽는데 한 보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물론 그 동안 다른 책들에 외도를 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남부 캘리포니아의 정서를 한가득 담은 니거 위스퍼러(흑인을 잘 다루는 조련사) 미(Mee)의 인종차별에 대한 역발상으로 범죄의 온상인 자신의 고향 디킨스 시를 구하겠다는 신념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 읽고 나니 성취감 하나는 끝내준다. 아, 나도 드디어 맨부커상 수상작을 읽었어라는. 그동안 수많은 맨부커 수상작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다음으로 이언 매큐언의 <속죄>을 마저 읽으려고 가방에 넣어 두었다.

 

소설 <배반>은 주인공 미가 도널드 트럼프의 위대한 나라 미국 대법원에서 철폐된 노예 소유와 연방범죄에 해당하는 인종차별로 수정헌법 몇 개 조항(아무래도 우리나라도 아닌 미국법이다 보니 못 외우겠다)을 위반한 혐의로 항소심에 처해졌다. 형사범죄에 있어 능수능란한 변호사 햄프턴 피스크를 기용해서 자신의 변호에 나섰지만 미의 운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candle in the wind by Elton John) 같은 신세다. 그런데 디킨스 출신 농부 니거라고 자처하는 미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추상 같은 대법원 판사들 앞에 서게 된 것일까.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폴 비티는 어떤 방식으로도 해결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종차별과 흑백통합이라는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해묵은 주제에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역발상으로 도전장을 날린다. 아무리 흑인 대통령이 출현했지만, 그것은 그 때 뿐이라는 것이다. 다음 주자가 반동적 트럼프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익히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럴 바에야 차라리 적극적인 인종분리가 답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니거 위스퍼러 미는 인근 학교에서 실시한 진로의 날 행사를 통해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거의 인구의 전부를 차지하는 지금은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린 디킨스 시에서 백인들과의 일상을 배제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버스에서도, 그리고 학교에서도. 인종문제가 그 어느 문제보다 민감한 현안이 된 미국 사회에서 과연 이런 시도가 가능할까. 그래서일진 모르겠지만, 대머리 니거 위스퍼러 부근에 있는 이들은 그를 가차없이 셀아웃(sellout, 배신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발칙한 니거 미의 존재만으로도 소설은 버거워 해야 마땅할 텐데, 특이한 캐릭터 두 명을 더 추가한다. 예전에 한자락하던 <꼬마 악당들>에 출연하던 호미니 젠킨스라는 늙은 흑인이 자살하려던 장면을 목격한 미는 그를 죽음에서 구해낸다. 그랬더니만 이 노인네 흑인이 대뜸 미의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하지 않는가. 그가 기소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수박과 닭튀김을 즐기는 흑인들에게 홈스쿨링 출신의 미는 또 하나의 쾌락을 선사하는데 그것은 바로 마리화나다. 직접 수경재배한 마리화나를 거룩한 대법원 법정에서 마구 피워대는 장면에서는 정말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잠시 이야기가 세어 버렸는데, 다음 주자는 포이 체셔다. 이 파렴치한 남자는 미의 아버지 F.K. 미의 아이디어를 도용하고, 기존 명작들을 자신만의 패러디 기법으로 창작해서 거액을 벌어들이는 부자가 되었다. 그것도 잠시 뿐이었지만, 그는 주인공 미에게 총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설 <배반>은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은 탄력을 자랑한다. 아무래도 미국 흑인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소설의 컨텐츠는 무지한 독자에게 부유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십대 릭 루빈이 런디엠씨와 비스티 보이즈로 대표되는 랩 장르를 메이저 씬에 등극시켰다는 유용한 정보는 반가웠다. 폴 비티는 그리고 교육이야말로 인종 간의 장벽을 허물고, 계급 이슈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응, 누가 그걸 모르냐고?)이라고 주구장창 썰을 풀어대고 있다. 어쨌든 내가 소설 <배반>을 읽으면서 결정적으로 느낀 핵심 주제는 미국 사회에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인종통합은 흑인들의 잿빛 피부를 탈색시켜서 흰색으로 만들지 않는 이제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안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인종 어젠더를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지금 그 시대가 트럼프가 통치하는 시대라는 점이겠지만.

 

폴 비티가 구사하는 언어 유희와 현실과 가상의 교차된 직조 방식이 개인적으로 좀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말 그대로 작가는 ‘블랙 유머’의 원조처럼 보인다. 어찌나 그렇게 냉소적이던지. 곳곳에서 빵빵 터지는 빛나는 유머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작년에 사둔 원서를 대조해 보고 싶은 유혹을 강렬하게 느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책들 때문에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소설에서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인근 채프 중학교에서 치른 진로의 날 행사에서 실라 클라크와 더불어 치른 송아지 거세 장면이었다.

 

지난 1996년부터 소설을 발표해온 폴 비티는 20년 동안 네 편의 장편소설을 썼다. 그 중에 맨 끝에 있는 <배반>이 맨부커상의 위업을 바탕으로 이번에 출간된 것이다. 그런데 진입장벽이 생각보다 높았다. 미국 사회에 노골적이고 만연한 인종차별을 직접 체험하지 못해본 독자의 피상적 인식, 남부 캘리포니아 흑인 서브컬처에 대한 낯설음(수많은 지명이 주는 내면의 디테일을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미국 사법제도에 대한 이해부족을 그 이유로 꼽고 싶다. 다른 책들은 또 어떨까? 개인적으로 데뷔작인 <화이트 보이 셔플>에 관심이 간다. 악전고투 끝에 다 읽고 나니, 성취감에 그저 황홀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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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 2017-11-02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지 않은 책이지만 일고 싶은 충동을 자극한다

레삭매냐 2017-11-02 13:43   좋아요 0 | URL
극단적 냉소주의라는 양념이 아주 일품이랍니다.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sprenown 2017-11-02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언제 악전고투 끝에 다 읽고, 성취감에 황홀할 지경에 이를수 있을려나?^^

레삭매냐 2017-11-02 13:44   좋아요 0 | URL
한동안 맨부커상 수상작에 도전해 보겠다고
컬렉션과 독서를 병행했었는데 저랑 잘 맞지
않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이번 책은 나름 재밌게 읽어서 다시
한 번 도전의지를 불태워 보려구요 :>

얄라알라 2017-12-18 2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이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레삭매냐 2017-12-19 09:0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인데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오후 네 시 블루 컬렉션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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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왠지 아멜리 노통브의 글을 보면, 문득 아니 에르노가 떠오른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노통브의 <오후 네 시>를 읽고 나서는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읽었는데, 쉽고 간결하다는 점에서 이 세 명의 작가에게 비슷한 레테르를 붙여 주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노통브의 책 중에서 세 번째로 판매성적이 좋다는 <오후 네 시>를 읽었다. 물론 객관적인 정보는 아니니 대충 알아서 들어주시길. 토마 귄지그의 책을 읽은 덕분에, 여파로 인해 부랴부랴 벨기에 출신 작가 아멜리 노통브의 책도 읽게 됐다. 그녀의 책 중에서 가장 인기라는 <적의 화장법>이 다음 타자로 대기 중에 있다.

 

<오후 네 시>? 도대체 무슨 뜻일까? 책을 읽기 전부터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교사 생활을 하다가 정년으로 은퇴한 에밀 아젤. 그는 자신의 60년 사랑 아내와 낙향해서 전원생활을 꿈꾼다. 그의 사랑스러운 동갑내기 아내 쥘리에트와 번잡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소박하고 아늑한 시골 생활에 대한 기대로 넘실거린다.

 

하지만, 이런 에밀의 기대는 어느 날 오후 네 시, 한 불청객의 방문으로 산산조각이 난다. 그의 이름은 베르나르댕, 이웃에 사는 무뚝뚝한 심장전문의란다. 그렇게 에밀과 쥘리에트의 안온한 나날이 조금씩 악몽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활발한 토크로 에밀들을 편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간결한 대답만을 일삼는 베르나르댕의 방문에 에밀은 갖가지 방법을 다 사용해 보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에밀의 의식에 한 곳에서는 자신을 찾아온 이를 잘 대접하라는 사회적 예의가 이 끈질긴 불청객을 내치라는 자아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매일 같이 두 시간씩 말 수 없는 심문자에게 고통당하는 65세 노인의 심리를 노통브는 그야말로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눈에 보이는 공포보다도,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찾아드는 심리적 불안을 조성하는 일상의 공포는 그야말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과연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집에 없는 척하고 문을 열어 주지 않는 방법이 가장 좋겠지만, 이 불청객에게는 그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후 네 시가 되면 집에 찾아와서 차 한 잔 마시고 정확히 6시가 되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에밀은 그래서 그를 모욕하는 방법도 고안해 보지만, 별 소용이 없다.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이 그럴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데, 베르나르댕에게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밀과 쥘리에트는 베르나르댕의 아내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는데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다. 소설의 초반, 할 일 없는 노인네들의 전원일기는 조금씩 궤도를 이탈해서 베르나르댕의 자살소동 그리고 뒤를 이은 비극적 결말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개인적으로 별 이야깃거리가 될 것 같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 이런 멋진 이야기를 빚어낸 아멜리 노통브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오후 네 시라는 특정한 시간은 에밀과 쥘리에트의 사적인 공간을 담보로 한다. 외부인 베르나르댕은 그렇게 타인의 시간과 공간을 허락도 없이 침입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교양과 예절로 무장된 에밀, 특히 쥘리에트는 외부의 침입자를 격퇴할 방법이 없다.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점잖게 타일러서 되돌려 보내겠지만 베르나르댕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다. 참 아이러니한 것이, 소통을 위해 이웃을 찾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타인과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베르나르댕의 모습은 난감하기만 하다.

 

단조로운 일상을 지루하게 생각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삶의 일부분이 된 일상의 반복을 그리워하게 되는 건 아닌지 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 시>를 통해 되돌아보게 됐다. 읽기 쉬우면서도 간결한 그녀의 작법 스타일에 그만 매료되어 버렸다. 다음에는 그녀의 최고 걸작이라는 <적의 화장법>에 도전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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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11-01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멜리 노통브는 처음 듣는 작가예요.
올려주신 리뷰 읽어보니까 너무 궁금하구요.
오후 네시마다 찾아오는 손님, 게다가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니....^^

레삭매냐 2017-11-01 15:51   좋아요 0 | URL
예전에 처음 울나라에 소개될 적에는
아멜리에 노통이라고 소개되었다가 노통브
라고 정정되었다고 하지요.

다작을 하는 작가라 이런 저런 책들이 많
습니다.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블루 컬렉션이라고
하는 시리즈로 우선 8권 출간했다고 하네요.
대부분이 프랑스 작가들의 책이네요.

두 권 빼고는 절판되었던 책들이라 한 번
보고 구입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요건 예전에 쓴 리뷰의 업데이트였습니다.

얄라알라 2017-11-02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에밀리 노통브가 한국에서 막 핫하게 오를 때 열심히 읽다가 최근은 책도 안 나오는 것 같고....아니 에르노.라는 작가는 처음 들어보는데, ^^ 어떤 점에서 연상되셨을까?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레삭매냐 2017-11-02 11:26   좋아요 0 | URL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주력인 프랑스 문학
을 표지갈이해서 내놓았다고 하는군요 :>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건 아예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아멜리에 노통브도 비슷하다는 그런 느낌
이랄까요 ㅋ 아주 재밌습니다.

2017-11-02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02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녀들, 자살하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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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선뜻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지난 24년 동안 단 3편의 소설만 발표하면서 두 번째 작품으로는 퓰리처상까지 받아낸 미국 출신 그리스계 제프리 유제디나스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다. 다만, 그의 데뷔작 <처녀들 자살하다>의 주제가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즈번 가의 다섯 자매들의 죽음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니. 하지만 서가 정리를 하다가 문득 그 책이 눈에 들어왔고, 마침 가지고 있던 영화도 잠시 돌려 보니(공교롭게도 트립 폰테인이 럭스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었다) 원작 소설에 대한 호기심이 불처럼 일었다. 그래서 바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과 만나게 되는 이유도 참으로 가지가지다.

 

소설 <처녀들, 자살하다>는 리즈번 가의 마지막 딸 메리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사실 소설은 죽음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인근 웨인이라는 가상의 도시에 리즈번 가의 다섯 자매가 살고 있었다. 프람 댄스 파티도 끝난 6월의 어느 날, 리스번 가의 막내딸 서실리아가 고대 로마인들의 자살 방법을 골라 자살을 시도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죽음이란 18세기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사안인 줄 알았던 웨인 사람들에게 서설리아의 자살 시도는 그야말로 충격 자체였다. 1970년대 경찰국가 미국의 슈퍼파워가 전 세계를 압도하던 시절, 소녀의 자살 시도는 어쩌면 겉으로 보기에 순수하고 무한한 번영을 구가할 줄 알았던 미국 사회가 앞으로 몰락할 것이라는 하나의 징후가 아니었을까.

 

리즈번 부부는 부랴부랴 이제 곧 사교계에 데뷔할 딸들을 위해 파티를 준비한다. 어렵사리 준비한 파티가 결국 불상사로 끝났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유제니다스 소설의 특이한 점 중의 하나는 소설의 내레이터가 리즈번 가의 주변을 맴돌던 우리들(꼬마 소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십대 소년들의 감수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로, ‘우리들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진술한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가다 보면, 왜 리스번 가의 소녀들은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가라는 궁극적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서 소년에서 청년 그러니까 성인이 되어가는 과도기 과정에 대한 상세한 르포르타쥬에 도달한다.

 

그들의 눈에 리스번 가의 다섯 소녀들은 그야말로 판타지 그 자체였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소년들의 시선은 집중된다. 막내 서실리아를 잃고 난 뒤, 비극으로 치닫는 13개월 간의 리포트는 그야말로 생생하다. 그 와중에 럭스 리즈번은 웨인 최고의 미남자 트립 폰테인과 사랑에 빠진다. 당연한 수순이었을까. 어느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선남선녀의 만남, 영화에서 아버지 리즈번 씨를 제외하고는 금남의 집이었던 리즈번 가에 도착해서 어리둥절해 하던 트립 폰테인 역을 맡은 자쉬 하트넷의 어린 시절이 풋풋하게 다가왔다. 집에 그만 가라는 리즈번 씨의 말에 고분고분하게 밖으로 나온 트립의 차에 뛰어 들어 느닷없이 키스를 퍼붓는 럭스 리즈번(커스틴 던스트 분)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댄스파티에서 위조한 신분증으로 산 복숭아 슈냅스를 나눠 마시는 장면은 또 어떤가. 그렇게 딱 세 장면을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영화의 분위기를 잡아낼 수가 있었다.

 

아직 오일쇼크, 대량해고와 지역 경제의 몰락이 시작되지 않았던 미국 중서부를 배경으로 한 <처녀들, 자살하다>는 미국의 호시절을 그리고 있다. 동네에 별다른 이슈가 없기에, 13세 소녀 서실리아의 자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지역 주민들은 리즈번 가에 온갖 종류의 꽃들을 보내고, 직접 방문해서 가족을 위로하려고 시도해 보지만 별무소용이다. 우리 소년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의할 수 없는 그런 아름다움을 지닌 리즈번 소녀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해 보지만, 그녀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다. 그리고 서실리아 죽음의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는 미제 사건으로 남고 만다.

 

유제니다스는 충격적인 서두로 소설을 시작하지만, 두 번째 충격에 도달하기까지 비교적 순탄한 서사 구조를 유지한다. 그가 그리는 소년 소녀들은 운전면허를 따고, 몰래 손에 넣은 그들에게는 금단의 열매나 다름없는 복숭아 슈냅스를 마시고, 담배를 피며 록음악을 듣는다. 아, 그리고 보니 리즈번 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었던가. 교회 매장을 위해 서실리아의 죽음도 ‘사고사’로 뒤바뀌었다. 실제를 위해 진실이 바뀌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다섯 소년들이 넘실대는 리즈번 가는 소년들에게 어쩌면 환상의 할렘처럼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실은 아버지 리즈번 씨가 딸들이 사용하는 생리대를 사기 위해 가게를 들락거려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실리아의 죽음과 댄스 파티에 갔던 럭스의 일탈 때문에 그들에게 외출금지령이 내리면서 리즈번 가는 그야말로 쇠락하기 시작한다. 마치 잘 나가던 세계 최강국 미국 사회와 경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왜 그렇게 억압적인 환경에서 리즈번 가의 딸들은 내가 최근에 읽은 <더 글라스 캐슬>의 저넷 월스처럼 탈출을 감행하지 못했던 걸까? 그들의 마지막 선택은 죽음으로의 탈출이었다. 우리 소년들은 그녀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서 갖은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차량까지 준비해서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까지 가주겠다는 각오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런 과정 속에서 그들 스스로 소년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소설의 어디선가 읽었던 “사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라니. 아, 너무 염세주의였던가.

 

이제 원작소설을 다 읽었으니, 영화를 볼 차례다. 지난 밀레니엄의 끝무렵인 1999년에 발표된 영화는 우리나라에 <처녀 자살 소동>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영화를 본격적으로 보기 전에 너무 궁금해서 유튜브 클립을 찾아보니, 우리 소년들과 리즈번 가의 남은 네 소녀들이 서로 전화선으로 바이널 레코드 음악을 들려주는 장면이 나왔다. 아, 70년대의 낭만이구나. 모바일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클래식컬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캐롤 킹이 부르는 “So Far Away", 구닥다리 노래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럽고 아름답구나.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구나. 원작소설과 영화의 만남,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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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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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부터 김을 빼서 미안하지만, <섬에 있는 서점>은 누가 봐도 책 좀 읽는다는 책덕후들을 위한 책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우리나라하고 크기가 비슷하다는 매사추세츠 동남쪽 하이애니스에서 페리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앨리스 섬(가공의 섬이라고 생각하고 구글맵 돌리기를 포기했다)에서 ‘아일랜드 서점’을 인도계 괴짜 주인 에이제이 피크리 씨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출판업계는 어렵고, 사람들은 모바일폰에 영혼을 빼앗겨 점점 책을 읽지 않는다. 아니 그런 판에 서점 운영이라니. 소설이 진행될수록 개브리얼 제빈 작가는 앨리스 섬에 연고도 없는 피크리 씨가 왜 서점을 열게 되었는지, 그의 삶을 그리고 피크리 씨와 관련된 인연들을 하나하나 보듬어 가면서 멋진 서사를 완성시킨다.

 

피크리 씨는 현재 21개월 째 홀아비 신세다. 사랑하는 아내 니콜 때문에 명문대 박사 과정마저 때려 치우고, 앨리스 섬에 책방을 냈는데 말이다. 니콜은 교통 사고로 죽었다. 그나마 피크리 씨의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사람이었는데, 그러니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 젖어 알콜 중독으로 피크리 씨의 삶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아, 소설은 아일랜드 서점에 책을 공급하기 위해 나이틀리 출판사에서 파견된 어밀리아 로먼의 등장으로 시작하지. 연간 35만 달러 매출의 대부분은 앨리스 섬을 여름에 찾는 뜨내기 손님들로부터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어쨌든, 피크리 씨는 고집스럽게 순문학만을 고집한다. 자기계발서는 물론 사양이고, 번역본이나 칙릿 소설 그리고 한창 유행인 좀비물과 뱀파이어물에도 질색을 한다. 한 마디로 말해 주관이 뚜렷한 서점 주인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에이제이 피크리 씨의 삶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되는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어느 겨울날, 마야라는 선물이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마야의 엄마가 남긴 쪽지 하나, 마야의 엄마는 시신으로 발견된다. 부인도 없고, 별 볼 일 없는 섬의 서점을 운영하는 에이제이는 처음부터 자신은 마야를 맡을 수 없다고 선언하지만, 어디 사람의 일이 그렇게 자신의 뜻대로 진행되던가. 결국 죽은 마야 엄마의 부탁대로, 책으로 둘러쌓인 서점에서 마야는 성장하게 된다.

 

나는 <섬에 있는 서점>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고집스럽게 전통적인 책, 그 중에서도 순문학을 대표하는 선수로 등판한 에이제이 피크리에 공감이 갔다. 나도 역시 이북 단말기를 샀지만, 전혀 그 이상한 기계로 책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 어쩌면 ‘올드 스쿨’ 스타일의 독자라 그런 지도 모르겠다. 사실 책값과 편리성이라는 이유를 들어 대부분의 책을 온라인과 대형서점에서 사들이고 있지만 에이제이가 운영하는 아일랜드 서점 같이 지역공동체에서 독서 모임도 할 수 있고, 책에 대해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서점이라는 공간이 있다면 대환영이다. 자본주의 3.0 시대에 항상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다 보니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협력과 공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족이라는 생각을 잊을 때가 많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개브리얼 제빈 작가는 대단히 촘촘한 구성과 캐릭터 배치로 독자의 관심을 사로 잡는다. 언제 우리나라에 출간될 지 모르는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의 <한없는 웃음거리>(우리 친구 브랜던에게 물어 보니 미국 사람들 중에서도 읽은 사람이 거의 없는 모양이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적에는 정말 반가웠다. 얼마 전, 그의 전기영화의 존재를 확인하고 독서모임 뒤 대화에 등장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토바이어스 울프 역시 마찬가지다. 역시 브랜던 친구에게 정말 멋진 단편이라는 추천을 받고 <머릿속에 밝힌 총알>을 원어로 구해서 읽지 않았던가. <올드 스쿨>은 구했지만 아직 읽지 못했다. 이참에 탐 드루어리의 그로톤우드 삼부작도 싸잡아서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소설 <섬에 있는 서점>은 에드카 앨런 포의 <태멀레인>부터 시작해서 컨템퍼러리 미국 문학을 압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호기심의 연쇄반응 같은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저작이야말로 미국 문학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미처 몰랐던 이들에게는 나도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그리고 나처럼 어느 정도 입문한 선수들에게는 또 하나의 도전정신을 불어 넣는.

 

에이제비 피크리 주변 인물들이 빚어내는 앨리스 섬 스토리는 정말 흥미진진하다. 평생 책읽기를 주저했던 파출소 소장 램비에이스가 대장의 북클럽이라는 독서모임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가는 과정을 보라. 멋진 데뷔작을 발표했지만, 멋진 외모와 작가라는 무기를 이용해서 바람을 피워대는 대니얼은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남편 대니얼이 바람기에 질려 유산을 거듭하던 처형 이즈메이는 램비에이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 에이제이가 우연한 기회에 손에 넣게 된 에드가 앨런 포의 희귀 시집 <태멀레인>(자그마치 40만 달러)을 도둑맞은 이야기를 했던가? 이 남자 역시 자신과의 첫 만남을 고약하게 기억하고 있는 시애틀 히피를 연상시키는 어밀리아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한다. 모든 일이 그렇게 좋게 돌아가면 좋으련만, 에이제이는 희귀암에 걸리고, 사랑하는 아내 어밀리아와 딸 마야에게 빚을 남겨 줄 수 없다며 치료를 거부한다. 그 즈음에 잃어버린 시집 <태멀레인>에 얽힌 비화도 말끔하게 정리된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개브리엘 제빈은 이 소설에서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뉴잉글랜드 지방의 정서를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 하이애니스, 메드퍼드 같은 지명부터 시작해서 매스 제너럴 하스피탈에서 에이제이는 암진단을 받지 않았던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지만,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지역색을 가진 동네답게 에이제이의 “깜장”과 마야의 “깜장”이 다르다는 민감한 인종차별 이슈까지도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에서 건드리고 있다. 또 한편으로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지역 공동체에서 갖게 되는 유대감도 보여준다. 어쩌면 섬이라는 특수한 장소가 주는 배제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외부에서 마야라는 충격이 도착했을 때, 마을 주민들이 보여준 그런 따뜻한 온정을 2017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기대할 수 있을까 과연.

 

소설 <섬에 있는 서점>은 책을 매개로 사람들과의 인연과 관계를 저격한 아름다운 소설이다. 아일랜드 서점의 주인장 에이제이 피크리가 소설의 중심에 떡 버티고 서서, 기존의 가치관을 떨치고 변화해 가면서 지역 공동체에 스며든다는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의 클리셰이가 엿보이긴 하지만, 뛰어난 작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깊어가는 가을, 사유하기 좋은 계절에 우리 인간은 외부와 단절된 인간이 아니며 책이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뱀다리] 출판사 루페는 문학동네의 임프린트 출판사라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왠지 문동의 향기가 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였다. 혹시 판권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한 번 데이벗 포스터 월리스의 <한없는 웃음거리>와 타블로 씨의 스승이라는 토바이어스 울프의 <올드 스쿨>, <한 소년의 삶> 그리고 단편소설집 등을 내주었으면 한다. 탐 드루어리의 삼부작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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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10-30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친구 브랜던?^^ 칙릿 소설? 문동의 향기..?

리뷰를 읽으며 몇번씩 멈추는 걸 보면 전 책 덕후 되려면 멀어나봅니다. 이책은 일단 리딩 리스트에 올려두겠습니다^^

레삭매냐 2017-10-30 11:55   좋아요 0 | URL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희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미국 친구인데
소설 쓰시는 분이라,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고 있답니다. 브랜던 친구 ㅋㅋ

책덕후의 필독서라고나 할까요? 재미집니다
참말로.

stella.K 2017-10-30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정말 예리하십니다.
얼마나 책을 읽으면 그런 후각이 발달되는 것입니까?
번역 희망본도 올리시고.
혹시 하시는 일이...?ㅋ

좋은 책 같지만 가까운 시일내에 읽을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님의 리뷰로 만족하겠습니다.^^

레삭매냐 2017-10-30 15:00   좋아요 1 | URL
그냥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독서와 책수집은 취미일 뿐이죠 :>

아마 읽게 되시면 반하셔서 다른 책
잡으실 생각이 달아나 버리실 겁니다 넵.

AgalmA 2017-10-31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 국내에 출판되길 학수고대하는 1인 중 하나요/
《모든 것은 빛난다》,《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등 여러 책에 무수하게 소개되는 작가인데 국내에 읽어볼 작품이 없다니ㅜㅜ
요절에 자살에 이런 카테고리 작가면 국내에서 관심가지지 안남요? 아무래도 작품의 난해성 때문에 안 팔릴 거라고 생각하나 봄))

레삭매냐 2017-10-31 14:07   좋아요 1 | URL
제 생각에는... 일단 분량도 어마어마하구요.
자살한 작가여서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책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
이고... 난해하기도 해서 엄청난 양을 자랑
하는 주석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팔릴 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싸장님이 어떤 책은 2,000부만
도서관 비치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다고
말하시던 기억이 나네요.
 
나이트 스쿨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잭 리처가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탐 크루즈가 주연을 맡은 영화 버전의 주인공이 잭 리처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 것 같다. 뭐 캐스팅이야 일개 독자가 정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개인적으로 영화 버전의 잭 리처는 <원 샷> 이후로 포기해 버렸다. 대신 책을 선택했다 나는.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기 전인 1996년으로 리 차일드 선생은 독자를 인도한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헌병대 소령 잭 리처는 발칸 반도에서 벌인 성공적인 작전 덕분에 수훈장까지 받았다. 그들은 마치 임무에 굶주린 늑대들처럼, 옛 임무가 끝나자 마자 보상으로 새로운, 그리고 도전할 만한 프로젝트가 주어지길 기대한다. 금속 쪼가리로 만든 훈장 따위랑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 그가 보내진 곳이 바로 사단법인 교육해법 연구소란다.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보안을 위한 위장 일 뿐, 그곳에서 잭 리처가 만난 다른 교육생들 역시 비슷한 임무를 마치고 다시 새로운 임무에 투입된 FBI 요원 케이시 워터맨 그리고 중동문제 전문가라는 CIA 요원 존 화이트다.

 

대통령 직속 국가안보좌관 알프레드 래트클리프와 중년의 실질적인 프로젝트 책임자 마리안 싱클레어가 등장해서 조국이 지금 심각한 위협에 처해 있다고 선언한다. 독일 함부르크의 모처에 있는 사우디 인과 이란 인으로 구성된 테러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 아, 깜빡한 게 있었지. 이십년 전부터 테러의 위협에 우리는 시달리고 있었구나. 이란 인의 밀고로 싱클레어들은 미국 안보의 심각한 위협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느 미국인이 끼어들어서 테러리스트들에게 자그마치 1억 달러를 주면 자신이 가진 것을 제공하겠다는 사실은 덤이다. 자, 이제 아리송하긴 하지만 문제가 제기되고, 그 문제는 미래래의 점증하는 위협으로 바뀔 것이니 유능한 FIB, CIA 그리고 헌병대 삼총사가 투입될 시점이지 않은가. 엄청난 오퍼를 한 미국인의 정체를 밝히되, 우리 편인 테러 조직에 침투한 이란 청년의 안전을 보장하라. 어때 서로 모순된 임무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 그리고 아무도 믿지 말라. 어쩌면 이미 적은 그들 사이에 침투해 있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삼총사의 사령부가 차려진 미국 버지니아 맥린, 모종의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현장 독일의 함부르크 그리고 테러가 계획되고 있는 아프간의 잘랄라바드를 연결하며 전개되는 속도가 마음에 든다. ‘협동심 배양 학교’ 출신들의 실력은 출중했다. 그것이 정보가 됐든, 무기가 됐든 간에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테러 조직에게 그것을 팔려는 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국인의 신분을 20만에서 획기적인 숫자로 줄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놀랍군,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가 유통되는 시대의 개가라고 해야 할까.

 

지구상에서 20초마다 한 권 씩 팔린다는 리 차일드 소설의 흡입력은 역시나 대단했다. 이번 소설의 무대는 독일의 함부르크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도시라고 했던가. 어마어마한 물동량이 넘나드는 도시에서, 누군가 아프간 테러조직에게 무엇을 팔려고 한다는 정보를 미국 국가안보위원회가 포착했다. 볼 것도 없이 경찰국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려는 것이겠지. 항상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처리한다는 규칙에 따라, 군과 FBI 그리고 CIA까지 동원된 ‘나이트 스쿨’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론 철저하게 존재는 감춘 채로. 다양한 채널의 네트워크를 동원해서 잭 리처와 그의 부관 프랜시스 니글리 상사는 독일 미군기지에서 4개월 전에 탈영한 병사가 테러조직에게 자그마치 1억 달러를 받고 장물을 넘기려고 한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도대체 그 물건은 무엇일까? 소설에서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중요한 단서 중의 하나인 “데비 크로켓”이라 불리는 H-912가 바로 잭 리처 그룹이 애타게 찾는 물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더 이상 밝히면 스포일러가 되니 나머지는 알아서 찾아 보시면 될 것 같다. 참고로 H-912는 실제로 존재했다.

 

전 세계에 미군을 파견해서 운영하고 있는 기지국가 미국은 냉전 시절 나치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연합군이었던 붉은 군대가 언제라도 서방으로 진격해 올 것을 두려워 했단다. 그 시절에 있었음직한 가설을 바탕으로 해서 리 차일드는 정교하게 짤 자인 플롯을 구사한다. 위조문서가 난무하던 통일 독일 시대에 극우 비밀 조직의 등장도 낯설지 않다. 이웃 아베 정권이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전쟁국가로 발돋움하려는 것처럼, 독일에서도 패전의 상처를 딛고 독일 민족만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망상에 젖은 무리들이 있다는 것이 이번 독일 총선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던가.

 

탈영병의 정체와 그가 훔친 무시무시한 무기로 돌변할 수 있는 장물에 대한 미스터리를 리 차일드는 메트로폴리스 함부르크를 배경으로 해서, 캐릭터들이 근접조우하는 방식으로 아슬아슬하게 교차시키는 방법으로 독자의 염통을 쫄게 만든다. 냉전 시대 비밀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아르헨티나에 슈거 랜드 목장을 건설하겠다는 망상에 젖어 위험천만한 장물을 다루는 삼십대 탈영병 그리고 그들을 저지하려는 35세 12년차 잭 리처 소령의 활약상은 정말 최고였다. 잭 리처를 어쩔 수 없기 돕게 되는 함부르크 경찰서의 형사과장 그리즈만의 비중도 적지 않았다. 뛰어난 독일 경찰의 검시와 요즘으로 치면 디지털 포렌식에 해당하는 수사기법 등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1996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21년 전이라는 점도 감안해 주시길. 너무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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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27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 재밌는 소설이긴 하는 모양이네요..20초당 1권씩 팔리다니..작가 리 차일드는 떼돈을 벌었겠는데요? 20달이나 20년만에 1권씩 팔리는 작가들은 엄청 부럽겠습니다.ㅋㅋ

레삭매냐 2017-10-27 14:07   좋아요 1 | URL
네 500쪽이 넘어서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었
는데 3일 만에 다 읽었네요.

잭 리처 역은 아무래도 탐 크루즈에 어울리
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소설에서 35세로 나오
는데 탐 크루즈 이제 50줄 아닌가요 ㅋ

하긴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들도 이번에 노벨
문학상 수상 전까지만 해도 서너권 정도 팔
리다가 단박에 베.셀.이 되었으니 말이죠.

stella.K 2017-10-27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책을 정말 열심히 읽으세요.
그러신 줄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시리즈 재밌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그 운명이 저에게까지 올지 모르겠어요.

탐 크루즈 이젠 할아버지 테가 슬슬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옛날에 정말 잘 생겼었는데...
니콜 키드먼도 세월을 비껴가지 않더만요.
이제부턴 곱게 멋있게 나이들어가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해요.
그러므로 전 이들의 나이들어 가는 걸 응원합니다.ㅎ

레삭매냐 2017-10-27 14:43   좋아요 1 | URL
최근 오픈하우스에서 나오는 책들을
자주 만나게 되네요 :>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이언 랜킨 그리고 리 차일드까지!

니콜 키드먼, 정말 나이가 들었더라구요 :>

많은 분들이 좋다고 극찬한 개브리엘 제빈
의 <섬에 있는 서점> 읽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