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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서두부터 김을 빼서 미안하지만, <섬에 있는 서점>은 누가 봐도 책 좀 읽는다는 책덕후들을 위한 책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우리나라하고 크기가 비슷하다는 매사추세츠 동남쪽 하이애니스에서 페리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앨리스 섬(가공의 섬이라고 생각하고 구글맵 돌리기를 포기했다)에서 ‘아일랜드 서점’을 인도계 괴짜 주인 에이제이 피크리 씨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출판업계는 어렵고, 사람들은 모바일폰에 영혼을 빼앗겨 점점 책을 읽지 않는다. 아니 그런 판에 서점 운영이라니. 소설이 진행될수록 개브리얼 제빈 작가는 앨리스 섬에 연고도 없는 피크리 씨가 왜 서점을 열게 되었는지, 그의 삶을 그리고 피크리 씨와 관련된 인연들을 하나하나 보듬어 가면서 멋진 서사를 완성시킨다.
피크리 씨는 현재 21개월 째 홀아비 신세다. 사랑하는 아내 니콜 때문에 명문대 박사 과정마저 때려 치우고, 앨리스 섬에 책방을 냈는데 말이다. 니콜은 교통 사고로 죽었다. 그나마 피크리 씨의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사람이었는데, 그러니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 젖어 알콜 중독으로 피크리 씨의 삶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아, 소설은 아일랜드 서점에 책을 공급하기 위해 나이틀리 출판사에서 파견된 어밀리아 로먼의 등장으로 시작하지. 연간 35만 달러 매출의 대부분은 앨리스 섬을 여름에 찾는 뜨내기 손님들로부터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어쨌든, 피크리 씨는 고집스럽게 순문학만을 고집한다. 자기계발서는 물론 사양이고, 번역본이나 칙릿 소설 그리고 한창 유행인 좀비물과 뱀파이어물에도 질색을 한다. 한 마디로 말해 주관이 뚜렷한 서점 주인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에이제이 피크리 씨의 삶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되는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어느 겨울날, 마야라는 선물이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마야의 엄마가 남긴 쪽지 하나, 마야의 엄마는 시신으로 발견된다. 부인도 없고, 별 볼 일 없는 섬의 서점을 운영하는 에이제이는 처음부터 자신은 마야를 맡을 수 없다고 선언하지만, 어디 사람의 일이 그렇게 자신의 뜻대로 진행되던가. 결국 죽은 마야 엄마의 부탁대로, 책으로 둘러쌓인 서점에서 마야는 성장하게 된다.
나는 <섬에 있는 서점>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고집스럽게 전통적인 책, 그 중에서도 순문학을 대표하는 선수로 등판한 에이제이 피크리에 공감이 갔다. 나도 역시 이북 단말기를 샀지만, 전혀 그 이상한 기계로 책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 어쩌면 ‘올드 스쿨’ 스타일의 독자라 그런 지도 모르겠다. 사실 책값과 편리성이라는 이유를 들어 대부분의 책을 온라인과 대형서점에서 사들이고 있지만 에이제이가 운영하는 아일랜드 서점 같이 지역공동체에서 독서 모임도 할 수 있고, 책에 대해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서점이라는 공간이 있다면 대환영이다. 자본주의 3.0 시대에 항상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다 보니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협력과 공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족이라는 생각을 잊을 때가 많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개브리얼 제빈 작가는 대단히 촘촘한 구성과 캐릭터 배치로 독자의 관심을 사로 잡는다. 언제 우리나라에 출간될 지 모르는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의 <한없는 웃음거리>(우리 친구 브랜던에게 물어 보니 미국 사람들 중에서도 읽은 사람이 거의 없는 모양이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적에는 정말 반가웠다. 얼마 전, 그의 전기영화의 존재를 확인하고 독서모임 뒤 대화에 등장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토바이어스 울프 역시 마찬가지다. 역시 브랜던 친구에게 정말 멋진 단편이라는 추천을 받고 <머릿속에 밝힌 총알>을 원어로 구해서 읽지 않았던가. <올드 스쿨>은 구했지만 아직 읽지 못했다. 이참에 탐 드루어리의 그로톤우드 삼부작도 싸잡아서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소설 <섬에 있는 서점>은 에드카 앨런 포의 <태멀레인>부터 시작해서 컨템퍼러리 미국 문학을 압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호기심의 연쇄반응 같은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저작이야말로 미국 문학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미처 몰랐던 이들에게는 나도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그리고 나처럼 어느 정도 입문한 선수들에게는 또 하나의 도전정신을 불어 넣는.
에이제비 피크리 주변 인물들이 빚어내는 앨리스 섬 스토리는 정말 흥미진진하다. 평생 책읽기를 주저했던 파출소 소장 램비에이스가 대장의 북클럽이라는 독서모임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가는 과정을 보라. 멋진 데뷔작을 발표했지만, 멋진 외모와 작가라는 무기를 이용해서 바람을 피워대는 대니얼은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남편 대니얼이 바람기에 질려 유산을 거듭하던 처형 이즈메이는 램비에이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 에이제이가 우연한 기회에 손에 넣게 된 에드가 앨런 포의 희귀 시집 <태멀레인>(자그마치 40만 달러)을 도둑맞은 이야기를 했던가? 이 남자 역시 자신과의 첫 만남을 고약하게 기억하고 있는 시애틀 히피를 연상시키는 어밀리아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한다. 모든 일이 그렇게 좋게 돌아가면 좋으련만, 에이제이는 희귀암에 걸리고, 사랑하는 아내 어밀리아와 딸 마야에게 빚을 남겨 줄 수 없다며 치료를 거부한다. 그 즈음에 잃어버린 시집 <태멀레인>에 얽힌 비화도 말끔하게 정리된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개브리엘 제빈은 이 소설에서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뉴잉글랜드 지방의 정서를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 하이애니스, 메드퍼드 같은 지명부터 시작해서 매스 제너럴 하스피탈에서 에이제이는 암진단을 받지 않았던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지만,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지역색을 가진 동네답게 에이제이의 “깜장”과 마야의 “깜장”이 다르다는 민감한 인종차별 이슈까지도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에서 건드리고 있다. 또 한편으로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지역 공동체에서 갖게 되는 유대감도 보여준다. 어쩌면 섬이라는 특수한 장소가 주는 배제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외부에서 마야라는 충격이 도착했을 때, 마을 주민들이 보여준 그런 따뜻한 온정을 2017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기대할 수 있을까 과연.
소설 <섬에 있는 서점>은 책을 매개로 사람들과의 인연과 관계를 저격한 아름다운 소설이다. 아일랜드 서점의 주인장 에이제이 피크리가 소설의 중심에 떡 버티고 서서, 기존의 가치관을 떨치고 변화해 가면서 지역 공동체에 스며든다는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의 클리셰이가 엿보이긴 하지만, 뛰어난 작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깊어가는 가을, 사유하기 좋은 계절에 우리 인간은 외부와 단절된 인간이 아니며 책이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뱀다리] 출판사 루페는 문학동네의 임프린트 출판사라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왠지 문동의 향기가 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였다. 혹시 판권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한 번 데이벗 포스터 월리스의 <한없는 웃음거리>와 타블로 씨의 스승이라는 토바이어스 울프의 <올드 스쿨>, <한 소년의 삶> 그리고 단편소설집 등을 내주었으면 한다. 탐 드루어리의 삼부작은 말할 것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