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전히 맨부커상 수상에 빛나는 폴 비티의 작품 <The Sellout>이 국내에서 <배반>으로 번역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마도 무지한 독자의 짧은 영어 탓을 해야겠지.

 

오늘 이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질러 버렸다. 그렇다, 폴 비티의 신간은 알라딘 배송트럭을 타고 열심히 내게로 달려오고 있는 중이다.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 혹시 이웃 반디서점에 깔렸나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지만 천만에. 10월 26일에나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소한 알라딘이 신간 서적의 수급에 있어 다른 서점을 압도한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방심하지 마시라. 여기에 또 맹점이 있나니. 그렇지만 MD의 게으름 탓인지 미리보기 싸비스는 제공되지 않는다. 그러니 독자 제현들은 책을 기다리라는 말인가. 난 그럴 수 없다고 선언하고 분연하게 키보드 자판을 박차고 미리보기를 제공하는 다른 온라인 서점 사이트를 찾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자백하자면 난 지난 3월에 전세계 무료 배송을 한다는 북디파지토리를 통해 폴 비티의 <셀아웃> 원서를 수중에 넣었다. 묵직한 하드커버로. 다만 288쪽에 달하는 그의 책을 원서로 읽을 능력이 되지 않아 첫 페이지들을 읽다가 묵혀 두었다. 우리말도 아닌 영어로 읽느라 용을 쓸 필요가 없었다고 했던가. 그리고 번역이 되어 나오길 기다렸다. 뭐 맨부커상도 받은 작가라고 하니 언젠가 번역이 되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그리고 이제야 내 바람이 완성되었다.

 

주인공 Me가 미국 대법원 상고심에 소환되었다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소설 <배반>은 출판사 책소개에 등장하듯이 한때 인종의 도가니라 불렸던 미국에서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인종차별을 역설적으로 패러디한 그런 작품이다. 궁금한 것이 과연 백인 작가들이 이렇게 신랄한 소설을 써낼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지난 번 독서모임에서 마침 막 읽었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읽고 있다는 미국 친구에게 물었듯이, 어떤 내용을 써도 모두에게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다고 했던가. 인종차별을 반대해도, 그리고 찬성해도 어차피 욕 먹긴 마찬가지라는 게 아닌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런 걸 각오해서인지 폴 비티는 욕받이 무녀가 될 각오를 단디 하고 <배반>에 도전한 게 아닐까. 첫 18페이지를 읽으면서 이거 물건이구나 싶었다. 비슷한 인종차별이라는 소재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발표한 콜슨 화이트헤드가 전통에 입각한 내러티브 전개를 구사한다면, 폴 비티는 그 대척점에 서서 인종차별 문제를 저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악명 높은 투 라이브 크루가 등장하는 장면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주석에 충실하게 그들이 불러서 법정 소송까지 갔다는 <프리티 우먼>을 유투브를 통해 듣기도 했다. 아, 이런 노래도 있었구나.

 


어쨌든 어젯밤에 존 맥그리거의 책을 다 읽고 나서 허탈해 하던 차에, 이렇게 따끈따끈한 책을 바로 만나게 되다니 역시 책과 만나게 되는 운명은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진격의 독서에 오늘밤부터 돌입할 예정이다. 기다리시게나 폴 비티 양반!

 

[뱀다리] 그의 첫 번째 작품 <화이트 보이 셔플>도 대단히 궁금하다. 아마 역시나 특유의 패러디 조롱조의 구조 때문에 점잖은 독자들이 다수 포진한 국내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배반>이 맨부커상의 위상을 뒤엎고 부디 선전해서 폴 비티 씨의 다른 책들도 번역으로 만나보게 될 수 있으면 참 좋겠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10-18 18: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 좋아하는 사람들 빼고는 올해 맨부커상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줄어든 것 같아요. 작년에 한강 효과가 컸습니다. ^^;;

레삭매냐 2017-10-18 18:13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그리고 사실 한강 씨가 받은 상은
맨부커 본상이 아니라 인터내셔널이라 상대
적으로 위상이 좀 약한 것도 사실이죠.

결정적으로 제가 지금까지 봐온 맨부커상 수
상작들은 대개 재미가 없었습니다 !!!

게다가 작가들도 생소하니 더더욱 그랬었죠.

그래서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올해는 또 어떤 작가가 수상을 하게
될지 자못 궁금하네요.

앗, 지금 확인해 보니 바로 발표가 났네요.
바로 작가들의 작가라는 조지 손더스 ~

장편소설 단 한 편으로 맨부커상을 먹었네요.
대단합니다.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자, 이제 드디어 연휴 때 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마지막 책에 대한 리뷰를 쓰게 됐다. 리뷰를 쓰기에 앞서 경건한 마음으로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에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 연출의 <남아 있는 나날>을 감상했다. 젊은 날의 휴 그랜트와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의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가 등장해서 잠시 충격을 먹기도 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영화는 소설만큼이나 그렇게 훌륭했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수십 년간, 옥스퍼드셔 달링턴 홀에서 수석집사로 작고한 달링턴 경을 모셔온 스티븐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능한 집사(butler)다. 그의 유일한 관심을 주인님인 달링턴 경을 어떻게 모시고, 그가 초대하는 수많은 저명인사들을 대접하고, 잦은 행사를 무사히 치르는가이다. 그러기 위해서 스티븐스는 마치 제각각 개성이 다른 하인과 하녀들 그리고 조리사들로 구성된 집단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영화에서는 달링턴 하우스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여우사냥에 나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특이하게도 여성들은 한쪽으로 다리를 모으고 말을 타는 장면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아마 고증을 거친 뒤에 촬영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시절에는 여성들이 말을 그렇게 탔었구나.

 

물론 수석집사 홀로 그 수많은 직원들을 부릴 순 없다. 그래서 그는 최근이 눈이 맞아 달아난 보조집사와 하녀장의 자리에 자신의 아버지 스티븐스 시니어와 켄턴 양을 배치한다. 스티븐스 삶에서 가장 우선은 주인님의 심기경호다. 그리고 보니 모처의 감옥에 있는 인사 생각이 떠오른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오로지 그의 심기경호에만 전념하다가 결국 주군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인사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시구로 선생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된다.

계급이나 재산 같은 유형의 자산보다 주인을 모시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도덕적 가치(moral statue)라고 스티븐스는 자신 있게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달링턴 경이 사망하고 미국인 갑부 패러데이는 스티븐스의 고용을 승계했지만, 달링턴 하우스에 예전과 같은 흥청거림 혹은 영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대전으로 구질서 자체가 붕괴되어 버린 탓이다. 어쨌든 만성적인 인력부족에 시달리던 스티븐스는 유능했던 옛 하녀장 켄턴 양의 편지를 받고 들뜬 마음에 재고용 위해 패러데이 주인님의 허락을 얻어 정말 오랜 만에 여행에 나선다. 주인님의 포드차까지 빌려 타고 가다 보니, 들리는 곳곳마다 진짜 신사 취급을 받는다. 문제는 저간에서 느끼는 고 달링턴 경에 대한 야박한 평가다. 영화에서는 심지어 매국노라고까지 하는데, 전쟁 중에 히틀러에 협력한 나치 동조자라는 평가에 스티븐스는 마치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자신은 달링턴 경 밑에서 일하지 않았노라고 선언한다.

 

그러니까 스티븐스 자신도 달링턴 경 삶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일까? 자기 삶에 최우선하는 가치로, 주인님을 충실하게 모셔야 한다는 대의는 자신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도덕적 가치 덕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임종도 돌보지 않고, 자신에게 호감이 가지고 대했던 켄턴 양의 애정마저도 무시했던 스티븐스가 말년에 알게 된 달링턴 경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의 생각과 너무나 달랐다. 호전적 제국주의자 처칠과는 달리 달링턴 경은 인류애적인 관심에서 독일의 재건과 재무장을 허용해야 한다는 독일외상 폰 리벤트로프의 사탕발림에 그만 넘어가 버렸다. 히틀러가 평화를 원했다고?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당시 영국 귀족들 사이에서는 상당 부분 호응을 얻었던 모양이다. 전간기의 중요한 모임에서 미국 출신 하원의원 루이스는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리브가 연회장에서 연설하는 장면은 최고였다. 독일의 재무장에 부정적이던 프랑스 대표마저 넘어가 버린 마당에, 루이스는 정치와 외교는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고한 신분제에 의거한 아마추어 외교관들이 정세판단을 잘못해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린 뮌헨 협정 같이 중대한 외교가 달링턴 하우스의 서가 같은 밀실에서 소수에 의해 결정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이시구로 선생은 지적한다. 소설에서 달링턴 경들의 외교관 동료들은 마치 수백만의 무지한 영국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스티븐스를 지목해서, 그가 대답할 수 없는 전문적인 내용에 대한 의견을 묻고 스티븐스의 잘 모르겠다는 대답에 그것 보란 듯이 무시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민주주의와 공론의 장에서 그런 국가적 대사를 논의해야 하는 이유를 망각한 이들의 정치놀음을 보는 것 같았다. 하긴 우리나라에도 여전히 그런 인사들이 한 때 정권을 잡고 있으면서 국정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게 지금에서야 속속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1930년대 독일 이외에 유럽에서 가장 반유대주의가 극성을 부린 나라가 영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이미 오래 전에 조지 오웰이 지적한 대로, 유서 깊은 반유대주의가 영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블랙셔츠 단으로 대표되는 반유대주의에 경도된 달링턴 경 역시 집안 하인들 중에 유대인을 색출해서 쫓아내라는 결정을 스티븐스에게 전달한다. 켄턴 양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지만, 그녀 역시 스스로를 비겁자라고 부르면서 달링턴 하우스에 잔류를 선택한다. 달링턴 경은 곧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오하게 되지만, 이미 열차는 떠난 다음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주인님의 잘못된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텐데, 스티븐스의 달링턴 경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 결국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아무런 의견 없이 주인님의 결정에 대한 스티븐스의 맹신이 아니었을까. 엄정한 역사는 사소한 역할을 맡은 이에게도 이렇게 책임을 묻는 모양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과거에 벌어졌던 일들을 플래시백으로 처리하면서, 동시에 일종의 로드무비 스타일을 취하고 있다. 달링턴 하우스라는 공간이 전부였던 스티븐스는 켄턴 양을 서쪽으로 여행을 하면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스티븐스에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동력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아버지 스티븐스 시니어처럼 평생 죽어라고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다가 그렇게 죽는 것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인 것이다.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게 따르면서, 좀 더 극적인 장치들을 차용했다. 가령 예를 들면, 미국 하원의원인 잭 루이스가 소설과는 달리 달링턴 하우스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다. 켄턴 양 역할을 맡은 삼십대 초반의 엠마 톰슨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다. 스티븐스와 묘한 감정의 썸을 타면서도, 자기가 말해야 할 때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장면에서는 감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옹고집쟁이 버틀러 역할의 앤소니 홉킨스의 열연 또한 일품이었다. 달링턴 경의 대자 역으로 등장한 기자 역할의 휴 그랜트 역시 감초 같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음악도 긴장을 고조시키거나, 스토리를 전개하는데 있어 한 부분을 담당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모쪼록 영화를 보게 된다면 부디 원작 소설을 보시고 영화를 보시길. 영화를 먼저 보게 되면 원작에 대한 감상이 훼손될 수 있으니.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래히 2017-10-14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책이 먼저 이군요^^

레삭매냐 2017-10-14 23:48   좋아요 0 | URL
아무리 영화가 잘 만들어져도 원작의
아우라를 넘어서기란 버거운 것 같습니다.

<네버 렛 미 고>도 마찬가지구요.

shuai 2017-11-05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라는 표현을 저도 사용했는데 제가 나중에 썼으니 표절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독후에 이런 꼼꼼한 리뷰를 보니 소설을 제대로 복기하는 기분이 듭니다. 영화도 보고싶어지는군요.

레삭매냐 2017-11-05 10:44   좋아요 0 | URL
표절이라뇨 무신 그런 말쌈을 -
공감대의 확장이라고 생각합니다 :>

영화도 정말 흥미진진했습니다. 원작소설과
다른 점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영화도 한 번 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리커버 특별판, 양장)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컬렉션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책을 통해 책을 읽게 된다. 유시민 선생의 <청춘의 독서>에서 독일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알게 됐고, 연쇄사슬처럼 또 그렇게 책을 사들였다. 아, 책을 보기 전에 1975년에 역시 독일 출신의 영화감독 폴커 슐렌도르프가 원작을 각색해서 만든 동명의 영화를 먼저 봤다. 그래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원작 읽기는 마치 바둑의 복기를 연상시킨다.

 

하인리히 뵐은 전후 독일 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실제 지식인의 삶이 어떡해야 된다는 전범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1917년생으로, 2차 세계대전을 병사의 신분에서 몸소 체험한 뵐은,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전후 독일의 모습과 세계를 놀라게 한 경제성장에 따른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자신의 펜 끝에 담아냈다. 특히 1974년에 출간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1968년을 기점으로써 서구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학생운동과 1970년대 독일의 고도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계급적 갈등이 첨예하게 충돌하면서 파생된 바더마인호프 그룹(RAF 일명 적군파)의 활동을 그 사실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도 보여 주다시피, 주인공은 27살 난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미모의 가정관리사다. 일단의 사건을 통해 그녀가 검찰과 경찰로 대표되는 권력과 황색 언론의 선정주의적 보도 행태로 말미암아 개인의 사적 생활이 침해되고, 개인의 명예가 훼손되는 비극적 사건을 보고서라는 형식으로 철저하게 객관적 견지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요소로 부제로 따라붙은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간과할 수가 있는데, 이 부제 역시 제목만큼이나 중요하게 작동을 하니 책을 읽으면서 꼭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라인 지방의 여성 카니발이 벌어지던 2월의 어느 날,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은 자신의 대모 볼터스하임 여사 집에서 벌어진 댄스파티에서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남성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서로 운명적인 이끌림을 느끼고, 카타리나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무장경찰들이 카타리나의 안온한 일상 속으로 뛰어든다. 괴텐은 은행강도로 아주 흉악한 현상수배범이며, 그를 숨겨준 혐의로 카타리나를 경찰서로 연행한다.

 

사건 발생에서부터 경찰은 그녀가 무슨 혐의로 체포되었는지 그 이유도 알려 주지 않으면서 최초의 인권 유린을 시작한다. 경찰은 그녀에게 수색영장 같은 공식문서도 제시하지 않은 채, 수배 중인 범인의 도주를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피의 사실이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조자로 몰고 간다. 게다가 그 시점에서 선정적 보도 형태로 유명한 <차이퉁>지에서는 은행강도의 정부(情婦)가 체포됐다는 기사에 카타리아를 실명으로 보도하면서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한 채, 비윤리적인 황색 보도의 열풍을 당긴다.

 

이미 카타리나의 체포 과정에서 그녀의 인격과 사생활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던 사건 담당 바이츠메네 수사과장은 물론이고, 사건을 맡은 하흐 검사 역시 그녀에게 적대적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진술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들은 어김없이, <차이퉁>지의 퇴트게스 기자에 의해 윤색과 재가공의 과정을 거쳐 자극적으로 공개된다. 이 과정에서, 과연 어느 특정 계급과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이 다루는 사실이 과연 진실일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차이퉁>과 퇴트게스는 카타리나와 관련된 이들이라면 전 남편은 물론이고, 암 수술을 받고 회복하고 있는 중인 카타리나의 어머니 마리아에까지 찾아가 자신들이 필요한 정보를 캐낸다. 절대 면회가 금지되어 있는 환자의 병세 따위는 퇴트게스에게 중요하지 않다. 국민의 알 권리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초법적 언론의 비윤리적 행태는 그 위악을 발휘한다. 개인의 사적 범위에 들어가는 이성관계는 물론이고, 도로주행 거리와 재정 상태는 물론이고, 그녀를 가정관리사로 채용한 현 고용주 블로르나 변호사와 그 가족은 물론이고 전 고용주들까지 모두 경찰의 수사 선상에 오르게 된다.

 

검경과 언론의 이런 마녀사냥은 오래전 우리가 목격했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이들의 공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국민이 정작 알고 싶어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눈을 감던 이들이, 마치 하이에나처럼 은퇴한 전직 대통령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생채기를 내는 모습에서 사회적 공기(公器)로서의 제 본분을 망각한 족벌언론의 모습은 영화와 책을 통해 만난 <차이퉁>의 재현에 다름이 아니었다.

 

사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바더 마인호프 그룹의 테러 용의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자신의 사회적 명예의 추락을 경험했던 페터 브뤼크너 교수의 실화를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언론재벌 악셀 슈프링거 그룹의 일간지 <빌트>가 바로 <차이퉁>의 롤 모델이라고 한다. 책의 서두에서 뵐이 밝히듯이, 실제의 <빌트>와 유사성은 ‘불가피’하다는 선언을 한다. 올해 개봉된 울리 에델 감독의 영화 <바더 마인호프>에서 청년들이 습격해서 불태우는 언론사가 바로 예의 <빌트>지였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뵐이 왜 카타리나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았는지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됐다. 여성에 대한 일반적 동정심과 사회적 약자를 소설의 전면에 내세운 작가의 결정에 저절로 수긍이 갔다. 가정관리인으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던 이혼여성이 어느 날 자신에게 닥친 이 불행한 사태 가운데서, 검경으로 대변되는 권력의 무자비한 사생활 침해와 보이지 않는 언론의 폭력에 사실 효과적으로 대항할 방법은 전혀 없다. 더 무서운 것은 그녀가 살던 아파트 주민들과 익명의 전화 편지 등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폭력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조용한 성격의 카타리나는 이 시련을 통해, 국가가 자신을 전혀 보호해줄 의지도 그리고 그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게 된다. 이야기는 다시 처음에 잠깐 언급했던 폭력의 발생과 결과로 돌아간다.

 

사실 다른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의 글을 읽어 보았는데, 너무나 자의적인 그들만의 문학세계가 선뜻 마음속으로 파고들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다분히 현실참여적인 문제작들을 펴낸 것으로 유명한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새로운 천 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개인의 자유와 명예에 대한 이야기와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저널리즘의 윤리와 방향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하여준 수작이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prenown 2017-10-11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앞으로 노벨상 수상작품 위주로 리뷰를 하실 예정인가요? 과도한 부탁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레삭매냐 2017-10-11 14:41   좋아요 1 | URL
아니 그런 건 아니구요 :>

이번에 하인리히 뵐의 소설이 리커버링
돼서 나왔다고 해서, 예전 리뷰를 개작
해 봤습니다.

후반기에는 볼라뇨와 로힌턴 미스트리를
중심으로 한 인도문학에 집중해 볼까
합니다.

sprenown 2017-10-11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인도문학까지? 기대됩니다

레삭매냐 2017-10-11 16:02   좋아요 0 | URL
요즘 세계 문학의 끝장은 인도문학
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시류에 편승해서 인도문학
을 좀 파볼까 합니다.

sprenown 2017-10-11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대단합니다. 저는 워낙 문외한이라서 인도하면 철학과 발리우드 영화밖에 생각나는게 없는데, 덕분에 인도문학에 대해서도 알수 있게 되었네요.. 얼핏, 신화와 엮이면서 복잡한 인간과 세계에 심오한 탐구? 어렵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좋은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레삭매냐 2017-10-12 09:37   좋아요 1 | URL
최근 인도 문학을 보면 다이아스포라와
극도로 절제된 현실주의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카스트 제도와 종교갈등에 대한 부분도
빼놓을 수 없구요.
신화적인 요소들은 다소 배제된 느낌이
라고나 할까요.

cyrus 2017-10-11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이 눈길을 줬거나 주고 있는 외국 작가들 중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올 것입니다. 유력 후보는 줄리언 반스. ^^

레삭매냐 2017-10-12 09:38   좋아요 0 | URL
ㅋㅋ 오해십니다 -

전 줄리언 반스 책은 제대로 읽은 게
없는 것 같아요.

<시대의 소음>도 지금 못 다 읽고 있
습니다. 아무래도 저하고는 맞지 않는
다고나 할까요.

문득 예전에 밀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
사 생각이 나는군요. 노벨문학상 특수
반짝하고는 신작은 아예 출간도 되지
않고 있네요. 냄비근성입니다...

sprenown 2017-10-11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cyrus님. 정말 다들 대단하세요, 이 무식에서 벗어나는 길은 열심히 읽는길 밖에 없네요

cyrus 2017-10-12 12:46   좋아요 1 | URL
책 많이 읽는 사람들과 어울리면 주워 들은 정보도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책을 안 읽어도 아는 척할 수 있습니다. ^^;;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민음사 모던 클래식 75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주에 노벨문학상 발표를 듣고 나서 집 안에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려 가면서. 분명 몇 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모두 해서 어섯 권의 책을 찾아냈다. 그 중에 네 권을 읽지 않았더라. 좋아해야 하나. 그중에서 모던클래식 중에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인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골랐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약 다른 책으로 읽기 시작했다면, 그렇게 열심히 장기간에 걸친 연휴 기간 동안에 이시구로 선생의 책에 몰입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리고 모던클래식은 왜 지난 2년 동안 멈춰 있는 거지. 민음사는 자신들이 이시구로 선생을 발굴해서 번역해 냈다고 자랑하면서 노벨문학상 특수를 맞아 증쇄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반성 좀 하시지. 자본이 모든 것에 우위를 차지하는 도금주의 시대에 출판사 탓만 할 건 아니겠지만.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이번에 새로 읽어낸 다섯 권의 책 중에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맨부커상에 빛나는 <남아 있는 나날>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이 좋다. 남태평양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패전한 지 어언 3년이 흐른 1948년 10월, 소설은 시작된다. 화단에서 은퇴한 오노 마스지 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스기무라 아키라의 대저택을 인수해서 조용하게 은퇴해서 살던 오노 씨의 숨겨진 비화들을 하나둘씩 밝히는 방향으로 소설은 흘러가기 시작한다. 결혼으로 출가한 세쓰코가 아들 이치로를 데리고 친정을 방문한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혼기에 다다른 둘째딸 노리코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상인 집안 출신의 오노 씨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주판알 튕기는 일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그림 그리기가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그 분야에 투신하기에 이르렀다. 다케다 장인 밑에서 거의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 그림 찍어내는 속도로 작업을 하며 도제 생활을 하던 오노 씨는 서양화를 일본화에 도입하려는 노력에 맹진하던 스승 세이지 모리야마의 휘하에서 새로운 출발을 도모한다. 술과 여흥 그리고 쾌락으로 점철된 ‘부유하는 세상’을 그리던 시절도 있었다.

 

이시구로 선생이 즐겨 사용하는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 기법이 소설의 전반을 아우른다. 자신이 이룬 성취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며 지내오던 오노 씨는 어느 순간, 그런 삶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계기는 혼기에 다다른 둘째딸 노리코의 혼담이 깨지면서였을까. 인근 가와카미 여사의 주점에서 쟁쟁한 후학들을 거느리고 잦은 술자리를 가지던 오노 씨의 주변인사들도 하나둘씩 존재를 감추기 시작했다는 것도 잊지 말자. 전후 구질서의 해체를 목도하게 된 은퇴한 거장은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면서 기묘하게 생각했던 점 하나는 고풍스러운 스기무라 저택에 왜 대단한 성취를 이룬 오노 씨의 그림이 하나도 없을까하는 점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그런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솟기 시작한다. 혼담을 진행하는 가운데, 탐정을 고용해서 상대방 집안에 대한 조사를 하는 장면도 좀 우스웠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는 맏딸 세쓰코가 상대방 쪽에서도 탐정을 고용해서 자기 집안 내력을 조사해 볼 것을 고려해서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이시구로 선생은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오노 씨의 미심쩍어 보이는 과거행적에 대한 이런 갖가지 복선 같은 장치들을 배치하는 섬세함을 구사한다.

 

잠복해 있던 갈등은 전쟁 중에 만주에서 전사한 맏아들 겐지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면서 구체화되기에 이른다. 전전세대를 대표하는 오노 씨와 전후세대의 상징으로 직접 불의한 전쟁에 참여했던 사위 슈이치가 정면충돌하는 장면은 그래서 흥미롭다. 노리코와의 혼담이 깨진 미야게 청년과의 대화도 같은 연장선상에 서 있다. 여전히 다수의 일본인들은 태평양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오노 씨의 주장은 조국이 벌이는 전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자기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 절반이 전사했다고 말하는 슈이치는 어리석은 대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정작 죄인들은 무사태평하게 새로운 시절을 맞아 호의호식하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세대들이 목청껏 외쳤던 대의에 의거한 정의란 말인가. 일본계 이시구로 선생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많은 나가사키 시민들에게 과연 이시구로 선생의 책은 읽어 보았는지 묻고 싶어졌다. 슈퍼마리오 코스프레 아베는 물론이고.

 

소설은 중반을 넘어가면서 오노 씨가 전쟁 중에 어떤 일을 하면서 성취를 이루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은 인사가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독자에게 알려주기 시작한다. 마쓰다 치슈에서 포섭되어 국무성의 예술 위원회 일원으로 만주 위기에 즈음해서 퇴폐적인 성향의 그림을 그리던 모리 스승의 곁을 떠나 본격적으로 부역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일왕에게 충성하고,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활약을 고무하는 예술이라기보다 추악한 정치적 선전선동에 가까운 그림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모든 이들의 칭송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부역 예술가는 전쟁이 끝나면서 반강제로 은퇴를 하게 된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위대한 조국의 예술혼으로 떠받들어지던 화가가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물론 <창백한 언덕 풍경>에서도 비슷한 정황이 등장한다. 전작에서 오가타 상이 반성하지 않는 일본 구세대의 대변인으로 등장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좀 더 나아가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오노 씨는 어떻게 해서든 자기 딸 노리코의 혼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상견례장에서 억지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이 소설의 핵심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같은 패전국이지만 독일과 상반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본의 오늘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 강요에 의한 억지 사과, 이런 자세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아베 정권의 일본이 경제적 풍요 덕분에 부러움을 살지 몰라도, 존경받는 나라는 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 과거는 잊고 미래로 나가자고 외치고 있지만, 그 미래는 과거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제대로 된 과거청산 없이 미래만 외쳐대는 게 얼마나 허망한지 우리는 누구보다 역사를 통해 혹독하게 배우지 않았던가.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읽다 보니 문득 이모 작가의 <고시조>가 연상됐다. 예전에 참 그 소설을 좋아했었지. 순수한 예술에 목말라 하던 예술가가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그렇게 애타게 찾던 가릉빈가를 만나게 되었던가. 지금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그런 작가가 되어 버렸지만. 그의 영락한 모습에서도 보듯이 모름지기 예술가로서 진정한 용기란, 과거의 시대착오적인 행적과 잘못된 판단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마천 2017-10-11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기사단장도 화가가 나오는데 전쟁 끝난뒤부터 본격 활동해서 대가가 되더군요. 이어지는 듯한 일본역사네요 ^^

레삭매냐 2017-10-11 14:37   좋아요 0 | URL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하루키 신작 소설에서도 오스트리아 유학
길에 나섰던 화가가 등장하죠!

결은 좀 다르지만, 이시구로 선생이 그전
에 이미 다뤘었네요.

sprenown 2017-10-11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에 대한 성실하고, 알찬 리뷰 잘 읽었습니다.님의 리뷰를 참고해서 좋은 독서 해 보렵니다.

레삭매냐 2017-10-11 14:37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이시구로 선생 최고작은
<네버 렛 미 고>라고 생각합니다.

작품마다 다른 스타일을 시전하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akardo 2017-10-11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인공 직업도 그렇고 전개도 그렇고 흥미롭네요. 읽어보고 싶습니다.

레삭매냐 2017-10-11 14:40   좋아요 0 | URL
이번 연휴 때 읽은 이시구로 선생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입니다.

AgalmA 2017-10-14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오르한 파묵도 그렇고 노벨문학상 받을라믄 조국의 예술과 전통적 생활상을 심도깊게 소설로 써 내라우~ 일까요ㅎ 고은 선생은 받기 어려운 거 같아 기대도 안 하는데...이번엔 이시구로가 일본인이기도 해서 하루키는 의문의 2패;

레삭매냐 2017-10-14 23:54   좋아요 1 | URL
지적하신 대로 세계문학의 정수는 가장 자기
조국의 전통적인 모습에 충실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춘수 씨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가망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봅니다.
해외문학에 경도된 작가를 선정할 리가
없겠죠.

춘수 씨가 정치적 이슈들을 교묘하게 피해
간다면, 이시구로 선생은 상대적으로 민감
한 주제들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1승.
 
녹턴 -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36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산 지가 벌써 만 3년이 되었구나. 도서정가제 시행 전 막바지 광풍이 불던 시절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유일한 소설집 <녹턴>을 샀다. 그리고 읽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묵혀 두었다가, 이시구로 선생의 노벨문학상 발표가 난 뒤에 열심히 찾아 얍삽하게 읽어내렸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참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아는 ‘녹턴’이라고는 쇼팽의 야상곡으로 대니얼 바렌보임이 연주한 op.9-2가 유일했다. 이제 나의 녹턴 리스트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모두 5개의 음악과 해질녘에 관한 단편소설들이 <녹턴>을 장식한다. 개인적으로 누군가 이 소설집의 특징을 잡아내는 키워드를 말해 보라고 한다면, 유머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동안 내가 읽은 이시구로 선생의 책들에는 유머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십년에 한 편 꼴로 소설을 발표하는 진지모드의 과작(寡作) 작가에게 유머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을까. 아무래도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에 이런 색다른 시도가 용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시작은 베네치아다. 동구권 폴란드 출신의 기타리스트 야네크는 어릴 적 자신의 우상 토니 가드너와 아주 우연히(소설에서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 어렵고 암울하던 시절을 야네크의 어머니는 토니 가드너가 불러제끼는 아름다운 노래들을 들으면서 버틸 수 있었다고 했던가. 공산주의 동구권과 자본주의 서방을 이어주는 가교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는 점에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그것으로 끝일까? 아니다. 토니 가드너는 모종의 계획을 위해 자신의 아내 린디에게 세레나데를 들려 주기 위해 야네크를 초빙해서 곤돌라 위에서 크루너(crooner)로서 공연을 계획한다. 다들 ‘한물간 딴따라’라고 치부하는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아내 린디와의 27년 간의 결혼생활을 접고 새로운 출발, 컴백을 위해 이혼 이벤트를 거행하려고 한단다. 인간사 모든 것이 금전으로 계량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대한 문학가의 저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가는 거지.

 

슬슬 발동을 건 이시구로 선생의 유머는 두 번째 에피소드인 <비가 오나 해가 뜨나>에서 폭발한다. 사반세기 전 대학동창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세 명의 대학동창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어떤 점에서는 슬랩스틱 스타일의 미국식 코미디가 연상되기도 했다. 스페인과 이태리에서 영어교사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던 레이(먼드)는 여느 때처럼 런던의 찰리와 에밀리를 방문하지만 예전과 같지 않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눅이 든다. 레이의 예상대로 찰리는 바람이 났고, 자신이 프랑크푸르트에 가 있는 동안 아내 에밀리의 화를 삭여 달라는 분부대로 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이 꼬여만 간다. 어쩌면 런던 금융계에서 성공한 이들 부부는 레이에게서 자신들과는 다른 패배자의 모습을 원했던 게 아닐까. 우리 출발은 같았지만, 2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다음 우리는 이렇게 달라졌다라고. 레이가 찰리의 지시대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인공적으로 개냄새를 만들기 위해 찰리의 낡은 신발을 삶는 동안 나타난 에밀리에게 무슨 말을 해도 과연 먹혔을까. 소설집 <녹턴>에서 가장 재밌는 이야기였다. 한편으로는 친구들에게 이용당하는 레이의 모습이 슬프기도 했던. 여기서 얻은 교훈 하나, 타인의 삶에 개입하려고 하지 말 것이니.

 

<말번 힐즈>는 다섯 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내레이터는 기타리스트로 런던에서 음악가로서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 중이다. 성공이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었다.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 주겠다는 매기 누나의 제안에 그녀와 매형이 말번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빌붙는다. 그는 철저하게 이상주의자다. 매기 누나가 그를 그냥 먹여 주고 재우고 싶어서 불렀을까? 아니다. 여름철 손님들이 늘어나니 일손이 부족해서 그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가하게 음악이나 만들면서 보내고 싶은 주인공의 심리와 매기 누나의 현실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누나가 빚어내고 자신이 ‘새로운 분노’라고 명명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분노는 시간이 지나도 다시 그렇게 샘솟는 법이지. 예전 자신의 학창시절을 악몽으로 만들었던 프레이저 선생님에 대한 증오감과 매기 누나네 카페에서 서비스에 대해 혹평을 하던 스위스인 부부를 골탕 먹이려던 시도는 그들을 알게 되면서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한다. 연주 혹은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청자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는,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청중이 주는 긴장감에 대한 묘사 등은 정말 탁월했다. 한 때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기도 했다는 이시구로 선생의 음악에 대한 사랑이 담뿍 담긴 그런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다.

 

표제작 <녹턴>에서는 <스쿠너>에서 등장했던 토니 가드너의 전처 린디 가드너가 주인공 스티브처럼 얼굴이 붕대를 친친 감고 등장해서 멋진 호흡을 맞춰준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누구인가? 붕대감은 세션 연주자로 뛰어난 테너 색소폰 주자이지만, 실패자형 추남(원서에는 어떻게 표현이 되어 있는지 너무 궁금하다)이라 성공 가도를 달리지 못하는 남자 스티브다. 이 남자는 아내 헬렌을 뺏아간 샛서방의 제안으로 그리고 매니저의 강권에 못이겨 할리우드에서 성형수술이라면 둘째라면 서러워할 전문의 닥터 보리스에게 자신의 미래를 내맡긴다. 그것 참,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일이 아닌가. 닥터 보리스의 걸작품으로 재탄생하길 원하는 스티브의 바람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연상되기도 했다. 재능을 가지고 정상을 향해 달리길 원하다면, 마케팅 전략(성형수술)이 있어야 한다는 주변의 설득에 줏대 없는 실패자형 추남은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과 동병상련에 있는, 천박함의 대명사지만 할리우드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린디 가드너와 의기투합해서 한바탕 헛소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부와 명예를 위해 내달리는 스티브와 린디의 조합이야말로 한밤의 ‘야상곡’ 같다는 의미에서 이시구로 선생은 과감하게 <녹턴>이라는 제목을 붙인 게 아닐까. 그 또한 작가가 던진 유머로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대미를 장식하는 <첼리스트>에서 저자는 다시 독자들을 최초로 소설이 시작된 베네치아로 다시 인도한다. 시작한 곳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번에는 집시처럼 베네치아에서 음악으로 밥벌어 먹고 사는 연주자들의 눈에 들어온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티보르에 대한 이야기다. 저명한 스승에게 사사 받은 것을 자랑으로 삼는 티보르지만, 정작 밥벌이의 지겨움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광장의 카페에서 값비싼 커피를 마시는 그를 보고 다른 연주자들은 ‘낭만적 바보’라고 폄하한다. 그런 그가 미국 오레곤 출신으로 스스로 저명한 첼로 주자라고 주장하는 중년의 엘로이즈 매코믹 양을 만난 것은 불운이었을까? 아니면 앞으로 스승의 대를 이어 저명한 첼리스트가 될 티보르의 행운이었을까? 그들은 아마 전자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해 본다. 엘로이즈 양의 티보르에 대한 개인교습이 진행되는 가운데, 과연 그녀가 진짜 첼로를 켤 줄 아는 사람이었나하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동시에 사기꾼 명연주자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시구로 선생의 소설집 <녹턴>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어떤 이들에게는 밥벌이의 수단이 될 것이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고된 삶을 이겨내는 힘을 주는 원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이별의 노래로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된다. 변형(성형수술)을 통한 성공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치유제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바로 그런 음악의 효용성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인연의 매개체로 음악을 그리고 해질녘의 순간들을 절묘하게 포착해내고, 휘발시켜 버린다.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리는 음악처럼 그렇게 소설 <녹턴>도 독자의 가슴 속에 잔영을 남긴 채 사그러지는 것이다. 뭐 음악이 원래 그런 게 아니었던가. 남은 것은 그런 음악에 대한 자신만의 기억 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10-10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숨어서 지냈던(?) 이시구로 덕후들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되는군요. ^^

레삭매냐 2017-10-11 09:02   좋아요 0 | URL
노벨상 받기 전까지 꼴랑 이시구로 선생
의 책 두 권만 읽어서 덕후 인증이 쉽지
않을 듯 합니다 :>

이젠 덕후라도 해도 괘않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