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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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 마침내 도착했고, 기갈한 것 같은 느낌으로 그렇게 읽어 내려갔다. 오늘 받았는데 벌써 다 읽어 버렸다. 그것은 마치 이 책을 다 읽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2016년 맨부커상 롱리스트 후보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보고나서부터, 원서라도 주문해서 읽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 정도 실력이 되지 않으니 그저 번역이 돼서 출간될 날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도착했고 난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소설의 제목으로 나와 있듯이 소설의 화자는 글쓰는 여자 루시 바턴이다. 일리노이 주 앰개시라는 촌동네 출신의 루시는 차고에서 자랐다. 텔레비전 한 대 없이 유년시절을 보낸 그녀는 추운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따뜻한 학교 교실에 남아 숙제를 하고, 책을 읽으면서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진학하고, 그렇게 진학한 대학에서 현재의 남편 윌리엄을 만나 결혼해서 뉴욕에 정착했다. 크리스티나와 베카라는 어여쁜 딸을 낳은 루시는 맹장수술 때문에 입원한 크라이슬러 빌딩이 보이는 뉴욕 병원의 1인실에서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가가 병원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바로 병원이라는 장소가 치유와 회복의 장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수술에 의한 육신의 회복 뿐, 아니라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병원에 입원한 딸의 병간호를 위해 뉴욕이라는 대도시에 도착한 루시의 엄마의 모습에서 화해가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도 독자의 착각일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화해라기보다 어쩌면 갈등의 심화가 벌어질 수 도 있지 않을까.

 

소설은 마치 영화의 시퀀스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한 컷에서는 1980년대 중반 뉴욕의 병원을 무대로 하다가, 또 한 편에서는 화자 루시 바턴이 생각하는 과거의 이야기들에 포커스를 맞춘다. 독일군 포로 출신으로 메인 주의 농장에서 일하다 농부의 아내와 눈이 맞아 자신의 남편 윌리엄을 낳은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기묘한 러브스토리와 뉴욕에서 포닥 과정을 밟게 된 윌리엄이 35살의 나이에 독일에 사는 조부모로부터 상당한 양의 유산을 받게 된 이야기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뜻하지 않았던 유산은 전쟁 중에 조부모가 번 돈이라고 하는데, 나치의 부정한 축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시는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딸들이 가스실로 끌려간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정치적으로 아주 중립적인 입장이라고 해야 할까.


독자가 대면하게 되는 루시네 집안의 가난은 상상을 초월한다. 겨울에 실내에서도 코트를 입을 정도로 추웠다고 했던가. 너무 추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더니 엄마는 루시에게 핫보틀을 데워줘서 껴안고 잤다고 했지 아마. 루시네 가족이 다니던 교회에서도 차별은 만연했고, 사람이 많아서 바닥에 앉으라고 했다는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에 교회에서 나눠 주는 풍족한 음식을 만끽했다는 이야기도. 나도 언젠가 얻어먹은 상상을 초월하는 터키 생각이 났다. 문제는 어떻게 먹는 줄 몰라서 그대로 상온에 방치했다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더라는 이야기도. 참고로 미국 추수감사절을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칠면조는 닭고기에 너무 뻑뻑했다.

 

유년 시절 지긋지긋했던 가난에 대한 안 좋은 생각들을 모두 지워 버리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작가로 새출발을 하려는 루시 바턴에게는 그 일화들도 어쩌면 이렇게 소설에 담을 수 있는 좋은 글감들이 아니었을까. 뉴욕의 첼시에서 우연히 만난 세라 페인과의 인연은 글쓰기 워크샵으로까지 이어지고,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라는 그리고 독자들이 저자의 약점을 파악하기 전에 담대하고 결연하게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작가로서도 충고도 빠지지 않는다.

 

투펠로 출신의 엘비스 프레슬리를 루시의 어머니가 사랑했다면, 루시는 자신의 이웃에 사는 예술가 제러미를, 병원에서 자신을 담당했던 과묵한 의사를 사랑했다. 신의 형벌이라던 AIDS가 만연하던 1980년대 중반에 대한 기술도 눈길을 끈다. 그리고 보니 루시의 오빠도 게이가 아니었던가. 대학 교육을 받은 루시는 고향을 탈출해서 뉴욕에 거주하는 성공한 작가가 되었지만, 언니 비키와 오빠는 그러지 못했다. 어엿한 도시인이 되었지만, 도시 생활 초기만 하더라도 루시는 도시인의 시골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녀도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엄마의 예언대로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기면서 주변의 관조하게 되고, 그런 민감한 감정들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가난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예술 문화에 대한 상식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는 루시의 고백에서 외로움과 슬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가가 200쪽 남짓한 짧은 이야기 속에 시대를 관통하는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찬란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행운의 번호 추첨으로 베트남전에 가지 않은 오빠 이야기로부터, 엄마가 전해준 고향에 사는 이들에 대한 최신 정보들, 병원과 주변에서 접하게 된 AIDS라는 무서운 질병에 대한 단상들, 대학교육을 통한 일련의 성공과 신분 상승,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 자녀양육과 위기에 빠진 결혼생활 등 대가의 면모가 보이지 않는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동안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썼다면 이제는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듯한 인상을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통해 받았다.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싶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에밀리 블런트가 루시 바턴 역을 멋드러지게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지금까지 모두 6편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국내에 소개된 책은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 세 번째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세 권이 더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올해 나왔다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가 신작의 조속한 국내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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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0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0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9-22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처럼 영화화하기 딱 좋은데 아직 안 만들어진 게 더 이상합니다-.-?

레삭매냐 2017-09-22 09:55   좋아요 1 | URL
아마 한창 시나리오 작업 중에 있지 않을까요?
<올리브 키터리지>는 텔리비전 드라마로 만들
어졌는데, 루시 바턴은 영화화되었으면 하네요.
 
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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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폭탄, ICBM, SLBM 같은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한반도 상공을 날아다니는 가상의 무대를 상정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어제 독서 모임에서 만난 미국 친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공포를 안고 50년도 살았다고 대답했지만, 되돌아온 그의 대답은 북한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자기네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 때문에 무섭다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독서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의 역사사회학자 이반 자블론카가 쓴 <레티시아>를 읽었다. 서두에 말한 폭력이 국가를 상대로 한 거시적 차원의 접근이라고 한다면, 이반 자블론카의 르포르타주 <레티시아>2011118~19일에 벌어진 레티시아 페레라는 개인에게 벌어진 폭력적 비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전 프랑스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사건의 단면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구조적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이 완벽할 순 없겠지만, 저자의 이런 시도로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의 전개는 이렇다. 프랑스 낭트 근처 포르닉이라는 마을에 사는 이제 막 성인이 된 18세 소녀 레티시아 페레가 실종, 납치 그리고 살해되었다. 범인은 곧 잡혔는데 32세의 누범자 토니 멜롱이었다. 문제는 유력한 용의자인 토니 멜롱의 비협조로 시신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건의 담당건사 자비에 롱생을 필두로, 프랑스 전역에서 동원된 유능한 헌병대(우리와 달리 헌병대가 사건의 중심에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를 필두로 해서 과학수사팀이 나서서 납치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레티시아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21일 시신의 일부분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저자 이반 자블론카는 교차방식으로 사건의 전개와 등장인물들의 삶의 배경을 동시에 추적한다. 실비 라르셰와 프랑크 페레 사이에서 태어난 제시카와 레티시아는 아버지의 프랑크 페레의 부인 실비에 대한 폭력 문제로 불우한 유년 시절을 겪게 됐다. 아버지는 전과자가 되었고, 엄마 실비는 정신병원에 수용되게 된다. 어쩔 도리 없이 위탁가정에 맡겨진 제시카와 레티시아에게 행복이 드리워졌으면 좋겠지만, 그녀들의 아버지를 대신하게 된 질 파트롱 또한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였다.

 

위탁을 맡은 파트롱 씨는 소녀들에게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엄격하게 규칙을 준수할 것을 명령했다. 본색을 드러낸 악마는 손녀벌 되는 소녀들을 성추행했다. 저자는 19세기 이래 공화국 프랑스에서 시행되어온 불우한 가정 출신 청소년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 제도가 과연 그들을 가난과 불행에서 구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지 묻는다. 또 한편으론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혹은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엘리트 교육이 그들에게 제공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질문한다. 가난한 가정 출신 아이들에게 가난의 대물림이 되는 건 아닌지, 그들을 미래에 사회 하부 구조 노동을 담담할 그런 노동자로 재생산하는 게 아닌지에 대한 보이지 않는 계급제도에 대한 의문은 저자가 역사사회학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 타자는 가해자이자 어려서부터 각종 범죄를 섭렵해온 누범자 토니 멜롱이다. 그 역시 불우한 가정 출신으로 절도와 폭행으로 교정시설을 들락거리며 수년간 동네 악당으로서의 이미지를 착실하게 쌓아왔다.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추적하겠다는 저자의 결심대로 미디어에서 자극적으로 묘사한 대로 냉혈하고 악랄한 살인범으로 그리는 대신 중립적인 입장으로 그를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떻게 한 명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그런 악랄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지 저자가 전개해가는 기술을 도저히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리고 엄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범죄에 대한 가혹한 형벌과 교정 제도가 사회 도처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증가하는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이것 역시 돈 그러니까 정부 예산 집행의 문제겠지만, 낭트 지역 사법과 교도행정을 맡은 절대 인력의 부족으로 재판을 맡은 판사들과 보호감찰관들의 살인적인 업무과중으로 토니 멜롱 같은 누범자에 대한 감찰이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회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어쩌면 레티시아 같이 억울한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중요한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건 바로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다. 강경 보수주의자로 내무장관 출신 사르코지는 낭트 지역 사법관들에게 레티시아 사건의 책임을 돌렸다. 공화국 프랑스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관용과 화합 대신 증오와 분열의 씨앗을 국가지도자가 정치적 이유로 뿌린 것이다. 이제 전대미문의 파업으로 사법관들의 저항이 시작됐고, 레티시아 사건은 전국적인 이슈가 되기에 이르렀다.

 

레티시아 사건이 진행되던 와중에 질 파트롱의 파렴치한 범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성범죄자들을 가혹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가 알고 보니 불쌍한 소녀들을 오랜 시간 동안 착취해온 포식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들이 복잡하게 얽힌 간단치 않은 사건이기에 어쩌면 이반 자블론카가 오랜 시간을 들여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데 뛰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반 자블론카는 우리 지구별에서 18년이란 짧은 시간을 살다 간 레티시아에게 온갖 종류의 고난을 안겨 준 같은 성()의 남자로 실로 부끄럽다는 기록도 빠트리지 않는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혼자 세상을 날게 되었지만 불행한 사건으로 세상을 떠나게된 소녀의 삶을 애도하며 홀로 남아 열심히 살고 있는 쌍둥이 언니 제시카 페레를 응원한다는 저자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반 자블론카가 사건에 연루된 워낙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정보들을 다루다 보니, 몇몇 부분에서는 일반독자로서 흥미를 잃기도 했다. 하지만 르포르타주의 후반으로 가면서 저자가 세심하게 다룬 포르닉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의 재구성을 통해 감정이 마치 흡입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방대한 작업을 훌륭하게 마무리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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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 황금부엉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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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강서구에 자리 잡은 공진초 자리에 장애학우들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 건으로 자신과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장애친구를 둔 어머니가 무릎을 꿇는 장면을 보고 울컥한 적이 있다. 자기 자식이 다니지도 못할 학교 설립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은 어머니의 위대한 모습에 그만 숙연해졌다. 그 반대편에서는 자기네들의 소중한 아파트값이 떨어질까봐 쇼라고 하면서 무릎을 꿇는 기가 막힌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 찰리 고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앨저넌에게 꽃을>이 출간된 지 자그마치 58년이나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네 인식은 그 시절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 놀랄 따름이다.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은 어릴 적에 페닐케톤뇨증이라는 희귀병을 앓아 지적장애를 안고 살게 된 도너 사장님의 빵집에서 일하는 방년 32세의 청년 찰리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1960년 휴고어워드에서 최고의 SF소설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인체에 대한 임상실험에 대한 엄격한 도덕윤리가 적용되지 않던 시절, 찰리처럼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들에게 뇌수술과 약물치료를 해서 지능을 높이겠다는 매우 위험한 시도가 이루어진다. 유년 시절부터 지적장애아라는 이유 때문에 주변 친구들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엄마 로즈와 여동생 노마에게까지 차별과 업신여김을 받은 찰리에게 비크맨 대학교의 정신과 및 뇌과 전문의 니머 박사와 심리학 권위자 스트라우스 박사의 뇌수술 제안은 그야말로 어둠 속의 한줄기 빛 같은 소식이었다.

 

3월 3일부터 시작된 찰리가 직접 쓴 경과보고서를 따라 가다 보면 여러 가지 단상들의 부침을 경험할 수가 있다. 우선 처음 60페이지까지는 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찰리의 글쓰기에 눈이 다 피곤할 정도였다. 나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곤욕일지 모르겠지만 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워렌 주립보호소에서 찰리와 같은 친구들을 24시간 지켜봐야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맴돈다.

 

현대 첨단뇌과학의 도움으로 찰리의 지능시주슨 68에서 185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특별한 교육 없이 자력으로 사어를 포함한 20개 언어를 독학으로 깨우치고, 대학의 저명한 교수들과 토론을 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그런 실력을 갖추게 된 찰리는 차별과 놀림을 받는 지적장애인에서 천재가 되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민을 마주하게 됐다. 그전에는 장애 때문에 외로웠다면, 이제는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능력 때문에 역차별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남들보다 부족해도 차별을 하지만, 그 반대로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이들에게도 아낌없이 차별을 하는구나 싶었다.

 

어릴 적 엄마 로즈에게 받은 성적 억압 때문에 여성들과의 정상적 교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찰리는 비크맨 대학교에서 처음에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 주던 앨리스 키니언 선생님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뛰어 넘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자신과 비슷한 뇌수술을 받은 생쥐 앨저넌에게도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문제는 일정 이상의 지능을 갖게 된 후의 피실험자에 대한 결과가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예상대로 화려했던 비상을 뒤로 하고, 퇴행이 시작된다. 미로찾기 테스트에서 생쥐조차 이길 수 없었던 우리의 주인공 찰리는 도너 빵집에서 마음씨 착한 도너 사장님 몰래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동료에 대한 도덕적 갈등을 하게 되는 찰리.

 

 

찰리는 앨저넌처럼 자신도 같은 과정을 겪게 될 것라는 사실을 자신이 직접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앨저넌-고든 효과라는 걸출한 논문을 발표한다. 그야말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대니얼 키스의 SF적 상상력은 지적 발달이 인격의 수양과 연계되지 않을 수 있다는 가설을 통해 어쩌면 전세계 지적장애친구들에게 그들도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희망을 전파하려고 했던 걸까. 마음씨 착한 주인공 찰리는 천재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바보라고 놀림을 받던 시절 아무도 자신을 인격적으로 대해 주지 않았다는 점에 절규한다. 그런 점에서 리뷰의 소제목으로 단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됐다.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에서 또다른 흥미로운 점은 과연 어린 시절 구박덩어리였던 찰리 고든이 놀라운 변신을 한 후에 과연 고든 패밀리가 보이는 반응은 어떠할까였다. 대니얼 키스 작가는 브롱크스 이발사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가고, 여전히 쇠락한 고향에서 사는 엄마 로즈와 여동생 노마를 찾아가 대면한다. 분노조절 장애를 경험한 것 같은 찰리는 자신의 새로운 창조주를 자임하는 니머 박사와 대등하게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천재가 된 찰리는 지식의 전문가들이라고 떠들어대는 이들의 수준을 파악하고 냉소주의를 선보이기도 한다. 뭐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 그렇지.

 

작가가 되고싶었던 대니얼 키스는 자신을 약대에 보내려고 하는 아버지와 겪은 불화를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1945년부터 구상한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은 장장 15년 동안 무르익은 다음, 1959년에 비로소 단편으로 빛을 보게 되었고 1966년에 장편소설로 재탄생했다. 뇌수술로 지적장애를 치료하겠다는 당대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에,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고뇌라는 인문학적 사고를 멋지게 결합한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이 주는 감동은 앞으로 다가올 가을날 마주하게 될 국화꽃 향기처럼 그윽한 여운을 남겨주었다.

 

[뱀다리] <앨저넌에게 꽃을>은 2004년에 동서문화사에서 <빵가게 찰리의 행복하고도 슬픈 날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는데, 역시 최신판이 훨씬 더 세련되게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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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9-15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작권 무시하기로 악명 높은 동서문화사가 자랑할만한 에이스 중 하나가《앨저넌에게 꽃을》입니다. 동서문화사를 까는 사람들도 대체적으로 이 책을 좋게 봅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으니 인지도가 밀릴 수 있겠어요.

레삭매냐 2017-09-15 23:1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랬었군요...
아직도 그런 출판사가 있다니 놀랍네요.

이참에 새로 나왔으니 다행이네요.
그리고 보니 아까 예스24 중고서점에서
본 책도 동서문화사 책이었네요.
 
시를 읽는 오후 - 시인 최영미, 생의 길목에서 만난 마흔네 편의 시
최영미 지음 / 해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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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최영미 시인에 대한 기사 하나가 온라인을 강타했다. 아주 오래전 군대에 있으면서 시를 읽던 고참이 사온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고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었지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시를 읽진 않지만 베스트셀러 시집의 위용은 대단했다. 시를 잘 안 읽는 나도 읽어볼 정도면 말이지. 지난 주말 해프닝은 이제 막 최영미 시인의 <시를 읽는 오후>를 펼치려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예술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는 자본주의 3.0 시대 집 한 채 없는 시인의 비루함(물론 집 없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보다 많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으로부터 시작해서, 척박한 메세나 시스템의 부재 같은 우리네 실정 등등. 그래도 말미에 쓴 “아무 곳에서나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났다”는 건 너무 나간 느낌이다. 나중에 위트를 이해하지 못하냐고 눙치는 해명은 더더욱 그랬고. 암튼 작가가 자신의 글에서 언급한 도로시 파커가 책에 등장하기에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일단은 반가웠다.

 

역시 작가의 작품을 읽어봐야 그가 어떤 사유를 하면서 사는지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무엇이든 원서로 읽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만, 에코마냥 언어능력이 특출하지 못하다 보니 번역서를 주고 보게 된다. 소설도 그렇지만, 시는 정말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정말 느낌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가가 시인이다 보니 가능한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글을 통해 시에도 논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여전히 시에 문외한이다 보니 리듬 따위는 파악하지도 못하겠다. 영어 원문도 고어까지 섞여 있다 보니 쉽다는 예이츠 시의 원문도 건성으로 보게 된다.

 

블랙리스트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문화계, 문단에 대한 준엄한 비판도 눈길을 끈다. 대중의 기호에 맞는 시를 발표했다면 지금처럼 집도 없이 서울에 가서 살까, 월세가 서울보다는 상대적으로 싼 고양에 가서 살까하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누구라도 문화예술을 한다는 게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예술을 하면서 궁핍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나도 내가 좋아서 밥벌이의 비루함을 이겨내면서 사무실에 앉아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모름지기 삶에는 그에 맞게 견디어야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밥 딜런이 반해서 자신의 예명을 바꿨다는 딜런 토머스에 대한 글을 읽다가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에 온전한 번역이 가능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어디까지나 소비하는 독자의 온전한 몫으로 남아 있으리라. 이제 다시 노벨문학상 예측의 시절이 성큼 다가왔고, 작년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밥 딜런의 노래를 탁월하게 현재에 비유한 글을 참 멋졌다. 다만 밥 딜런의 가사에 나오는 대로 “시대가 변하고 있”는데 1920년대 뉴욕의 호텔에서 살다가 영면했다는 도로시 파커의 케이스로 변명하는 작가는 그 시절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시를 읽는 오후>를 다 읽고 난 후의 소감은 호(好)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나같이 시에 대한 문외한들에게 주로 영시(英詩)들로 구성된 44편의 주옥같은 시들에 대한 소개는 과분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번 스캔들로 부정적인 시선도 조금은 씻겨 나갔다고 해야 할까. 그중에서 그리스 시인 사포나 페르시아 시인 그리고 벵갈 출신 타고르의 시들은 어땠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영어로 번역된 작품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다. 작년부터 서울신문에 연재된 시들을 고루 엮어서 만들었다는 기사도 찾아 읽었다. 원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호 헤밍웨이의 시 대신 찰스 부카우스키의 시를 사용하려고 했으나 저작권 이슈로 아쉽게도 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는 무엇이었을까? 나에게는 괴짜 소설가로만 인식되어 있는 부카우스키가 또 시도 썼었지 참. 사실 술고래 난봉꾼에 가까운 소설가의 시는 궁금하지 않지만.

 


<3월의 바람과 4월의 비>를 아베 리만이 흥겹게 부른 노래는 유튜브로 직접 찾아서 들어 보기도 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압운을 이용한 두운, 요운 그리고 각운이 주는 리듬감에 대해 감을 잡은 것도 개인적 소득이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읽는 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느 인터뷰에서 시인은 이 책을 살인적인 교육 시스템 속에서 허덕이는 청소년들에게 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네들이 시인이 원하는 대로 시를 감상할 여유가 있을 지 난 궁금하다. 예전에 하바드 스퀘어에서 들렀던 레스토랑 <파이어 앤 아이스(Fire + Ice)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서 따온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가게 이름을 시에서 인용해서 명명하는 레스토랑 주인장의 풍류가 멋지다. 역시나 아는 만큼 보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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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은행나무 블로그에서 이번에 퓰리처상 수상작인 콜슨 화이트헤드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소개하면서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에서 강력추천한다는 소설 5를 소개 받았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처음 들어보는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이었다. 나름 책 좀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책의 세계는 일개독자에게 역부족이었다. 다시 겸손해져야겠다. 알라딘 중고서점을 검색해 보니 마침 인근 서점에 있어서, 냉큼 달려가 사서 읽기 시작했다. 사실 벽돌 사이즈만한 두께 때문에 사기 전에 1초 정도 망설였다. 하지만 책에 대한 궁금증이 그런 외향적인 부담감을 충분히 이겨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고, 벽돌 두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극복해냈다. 아마 올해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두꺼운 책이며, 그만큼의 충분한 성취감으로 나에게 보상해 주었다. 아 참 그리고 콜슨 화이트헤드 신간 서평단 신청한 건 보기 좋게 미역국을 먹었다. 그럼 어떠랴 사서 읽으면 될 것을.

 

뭐 언제나 그렇지만 또 시작하기도 전에 사설이 길었다. 로힌턴 미스트리 작가는 인도 뭄바이(구 봄베이) 출신의 파르시(인도에 사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 사람으로 지금은 캐나다에 정착해서 글을 쓰고 있는 디아스포라 작가 중의 한 명이다. 어때 바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줌파 라히리. 로힌턴 미스트리보다 훨씬 더 자자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비슷한 삶의 유형을 겪은 작가다. 그런데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을 읽으면서 어느 매체에서 왜 줌파 라히리가 과대평가된 작가라고 혹평을 했는지 바로 알 수가 있었다. 로힌턴 미스트리가 구사하는 전통적 리얼리즘은 줌파 라히리가 체험한 피상적 인도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었다. 국내에 출간된 로힌턴 미스트리의 나머지 책들 가운데 데뷔작 <그토록 먼 여행>은 이미 읽기 시작했고, <가족 문제>도 이번 가을에 읽을 계획이다.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즐거움과 그것이 주는 쾌락은 무엇에 비할 바가 없을 것 같다.

 

아직도 <적절한 균형>에 대한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구나. 이제 시작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75년. 네루의 딸로 인도 총리가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인디라 간디가 집권한 시기가 겹친다. 당시 인도 정세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다. 인디라 간디의 부정선거 개입으로 인도 고등법원의 최종심에서 유죄를 받으면서 총리직이 박탈됐다. 영국의 오랜 압제에서 해방된 조국 인도에 민주주의를 심고, 모든 국민들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독립운동 세대의 취지는 이미 바랜지 오래다. 평화의 여신이라기 보다, 조국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빈민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파괴의 여신 칼리를 닮은 독재자에 가깝게 로힌턴 미스트리 작가는 인디라 간디를 묘사한다. 국가비상사태와 국가보안법으로 시민들을 억압하던 시절이 우리나라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동시대 남부 아시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소설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정치현실은 암살당해 죽은 독재자에 대한 냉소적 오마주라고나 할까.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뭄바이행 야간기차에서 만난 세 사람의 이야기로 소설 <적절한 균형>은 시작한다. 지긋지긋한 차마르(무두장이) 카스트를 벗어나 도시에서 재봉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상경한 이시바와 옴(프라카시) 다르지에게 도시는 그렇게 만만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그들이 상경하게 된 배후에 도사린 카스트 제도가 빚은 비극에 대해서는 천천히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다른 17세 소년 마넥 콜라는 콜라 가문의 기대주로 뭄바이에서 기술을 배울 계획이다. 이들은 모두 청상과부 디나 달랄의 집에 모이게 된다. 로힌턴 미스트리는 기구한 운명을 진 네 명의 주인공들과 그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얽힌 이들을 차례로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소설을 전개한다.

 

우선 뭄바이 파르시 집안 출신의 디나는 의사였던 아버지가 봉사활동에 나섰다가 코브라에게 물려 죽으면서(지극힌 인도스러운 설정이려나) 삶이 예상치 못한 변곡점을 그리지 시작한다. 폭군 오빠 누스완에 함께 살던 디나는 가난하고 젊은 약제사 러스텀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곧 결혼에 골인한다. 비록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은 오래 가지 못하고, 자전거를 타고 조카들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던 러스텀이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디나에게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자존감 강한 디나는 죽을 만큼 재가하라는 오빠 누스완의 잔소리가 듣기 싫지만, 매달 호랑이처럼 집세를 걷으러 다니는 집주인의 하수인 이브라힘의 독촉에 오빠에게 돈을 빌린다. 그러던 중, 학창시절 친구 제노비아의 제안으로 옷을 만들어 수출하는 오레보아 사장 굽타 부인의 발주를 처리하게 된다. 문제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눈이 안좋아진 디나 혼자만으로는 밀어 닥치는 굽타 부인의 발주를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고용하게 된 재봉사들이 바로 이시바와 옴이다.

 

디나 달랄 아주머니의 케이스에서 인도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젠더 이슈를 표명했다면, 이시바와 옴의 경우에는 카스트 제도에 대한 매서운 비판을 담고 있다. 불가촉천민 달리트 출신의 이시바와 나라얀은 무두장이 아버지 묵히 모치의 현명한 판단으로 읍내의에서 무자파 재봉사를 운영하던 이슬람교도 친구 아시라프 휘하에서 재봉 기술을 배워 성공하게 된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없는 사이에 칠판에 장난하던 형제를 선생이 혹독하게 매질한 사건을 마을에서 인정받는 브라만 판디트 랄루람에게 항의하러 갔던 둑히는 그의 처분에 분노하고, 법으로 폐기되었지만 여전히 민중들 사이에서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카스트 제도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 분리독립 와중에 분노한 힌두교 신자들에게 학살당한 뻔한 아시라프 씨를 이시바와 나라얀이 나서서 재치를 발휘해서 구해 내기도 했다. 이성이 마비된 광신적인 행동이 어떤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서도 로힌턴 미스트리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묘사로 처리해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행복하게 진행되었으면 좋겠지만, 평소에 읍내에서 재봉사로 성공한 나라얀이 고향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모습에 불만을 품고 있던 타쿠르 다람시의 잔혼한 린치로 다르지 가족은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이런 디나와 다르지 가족의 비극에 비하면 분리독립으로 막대한 재산을 잃었지만 그런 대로 먹고 살만했던 마넥 콜라는 행복한 편이 아니었을까. 콜라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비급으로 만들어진 청량음료 케이시의 수효는 아버지 파록과 어머니 아반 그리고 어린 마넥이 먹고 살기에 충분했다. 물론 평안했던 마을에 도로가 뚫리고 미국의 진짜 콜라가 들어오면서 콜라 가문이 휘청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마넥은 자신이 나고 자란 그 땅을 그렇게 사랑했고,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을 꿈에 젖어 있었지만 모름지기 남자는 도회에 나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설득으로 뭄바이에 오게 되었고, 기숙사 생활에 지친 마넥 역시 아반의 친구 디나 아주머니의 거처에 둥지를 틀게 된다.

 

이렇게 제각각의 사연을 안고 디나의 거처에 모인 이들의 속셈을 제각각이다. 디나는 더럽고 불결한 재봉사들의 자신의 일감을 언제 빼앗을 지 모른다는 그런 위협에 시달린다. 옴은 디나 아주머니가 자신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불만을 표출한다. 사람 좋은 이시바는 어떻게든 돈을 부지런히 모아서 조카를 장가 보낼 계획에 여념이 없다. 옴과 동갑내기 마넥은 학업에는 관심이 없고 현재에 만족하는 삶을 보내고 있다. 기숙사 시절 만난 학교 선배 아비나시는 학생운동을 하면서 그에게 체스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나중에 밝혀지게 되자만 아비나시도 국가비상사태 와중에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빨리 학교를 졸업해서 돈을 벌어 세 명이나 되는 여동생들의 지참금을 마련해야 한다고 노래하던 청년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로힌턴 미스트리는 다시 이시바와 옴이 겪게 되는 상상을 초월한 사건들을 소설이라는 무대에 올린다. 우선 빈민가에 살던 그들은 출근하던 어느 날, 경찰들에게 잡혀 총리 연설장에 끌려 가게 된다. 과자와 돈을 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간 사람들도 있겠지만, 강제로 끌려간 것이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이 머물던 판자촌은 도시미화라는 미명 아래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어 버린다. 이 때 알게 된 머리털 수집가 라자람과의 질긴 인연도 주목할 만하다. 옆에 살던 원숭이 키우던 아저씨 얘기도 그렇고. 책의 표지에 실린 <사비타, 장대 위의 소녀> 사진에서 영감을 얻었던 게 아닐까.

 

인도 각지에서 밀려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거주공간이 전무했던 1970년대 중반 뭄바이의 실태를 이보다 더 세밀하게 묘사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살 곳을 잃은 이시바와 옴의 거주문제는 더 큰 문제를 낳게 된다. 거리에서 노숙하던 그들은 이번에도 경찰에도 포획(?)되어 공사장에 끌려가게 된다. 노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부당한 일을 당해도 된단 말인가? 연설장에서 총리는 가난한 인민들을 위해 복무하는 하인이라고 말했지만, 그놈의 잘난 총리는 공사다망한 국가의 막중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빠, 정작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는 비극이 어떤지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공사판에 같이 끌려간 거지, 일명 지렁이라 불리는 샨카와 서로 도와 가며 고난을 이겨내던 와중에 공사장에 우연히 들른 거지 왕초의 도움으로 공사장을 탈출하는데 이시바와 옴은 성공한다.

 

이런 우역곡절 끝에 디나, 마넥, 이시바와 옴은 마침내 서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그동안에 작은 장애물들이 끝없이 등장했지만,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이시바는 고향으로 돌아가 옴의 색시를 찾아 주겠다는 자신의 마지막 임무에 나서게 되는데 이게 또 마지막 비극으로 귀결된다. 사실 어느 정도의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독자의 계산을 로힌턴 미스트리 작가는 산산조각내 버린다. 뭐 다 그렇게 가는 거지.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1984년, 인디라 간디가 시크 교도의 총탄에 쓰러지고 폭동과 학살의 유혈이 인도를 휩쓸던 시간에 아버지가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8년 만에 두바이에서 인도로 돌아온 마넥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설의 어딘가에 나온 문장처럼, 시간은 누군가에게 힘센 고문 기술자다. 어느새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염세주의자가 되어 버린 청년 마넥은 신이 있다면 파면시켜 버리겠다고 했던가. 인도에 존재한다는 수많은 신 중에 어느 신에게 해당하는 말인진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끝없이 벌어지는 비극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다가 든 생각 중의 하나. 카스트 제도는 이슬람 교도나 파르시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오로지 힌두 교도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개인적으로 아시라프 아저씨와 이시바-나라얀 그리고 옴의 이상적 관계를 통해 인도에서도 타종교인들과의 공존도 가능한 게 아닐까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봤다. 종교가 가진 특성 중의 하나가 관용일진대,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기술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다 뻐근해져 올 지경이었다.

 

개인의 삶에서 출발해서 정치와 사회경제, 종교 그리고 계급제도까지 아우르는 로힌턴 미스트리 작가의 대작에 다시 한 번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책 두 권 분량에 해당하는 엄청난 분량이었지만 네 명이 주인공이 빚어내는 말빚에 그만 매혹되어 생각보다 금세 읽을 수가 있었다. 도저히 손에 책을 뗄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왜 이제야 이런 멋진 작가의 글을 읽게 되었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이 책을 다 읽기 전에 주만한 데뷔작 <그토록 먼 여행>이 도착해서 그 책도 읽기 시작했다. 가족 3부작을 다 읽고 나서 아쉽다면 어쩌면 아직 국내에는 출간되지 않은 로힌턴 미스트리의 원서를 주문할 지도 모르겠다. 디아스포라 작가의 한계가 있을 진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아, 소설에서 이시바가 말한 대로 모든 풍상을 겪고 난 뒤에도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살 만하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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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05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마어마하게 알찬 리뷰네요.... 감사합니다. 어쩐지 감사하네요.

레삭매냐 2017-09-05 11:57   좋아요 0 | URL
감히 올해 읽은 책 중에 최고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런 작가의 책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니...

오늘부터라도 주변에 책읽는 분들께 알리려고요.
이번달 독서모임에 가서도 신나게 떠들 생각입니다.

잠자냥 2017-09-05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벽돌만큼 긴(?) 리뷰군요! ㅎㅎ 저도 겸손한 마음가짐으로(이런 책이 있었군요;;)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17-09-05 12:04   좋아요 0 | URL
정말 후회하시지 않으실 거라고 장담합니다.

너무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들입니다.

coolcat329 2017-09-06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읽어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17-09-11 09:16   좋아요 0 | URL
강추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