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리커버 특별판, 양장)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컬렉션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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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책을 읽게 된다. 유시민 선생의 <청춘의 독서>에서 독일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알게 됐고, 연쇄사슬처럼 또 그렇게 책을 사들였다. 아, 책을 보기 전에 1975년에 역시 독일 출신의 영화감독 폴커 슐렌도르프가 원작을 각색해서 만든 동명의 영화를 먼저 봤다. 그래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원작 읽기는 마치 바둑의 복기를 연상시킨다.

 

하인리히 뵐은 전후 독일 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실제 지식인의 삶이 어떡해야 된다는 전범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1917년생으로, 2차 세계대전을 병사의 신분에서 몸소 체험한 뵐은,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전후 독일의 모습과 세계를 놀라게 한 경제성장에 따른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자신의 펜 끝에 담아냈다. 특히 1974년에 출간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1968년을 기점으로써 서구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학생운동과 1970년대 독일의 고도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계급적 갈등이 첨예하게 충돌하면서 파생된 바더마인호프 그룹(RAF 일명 적군파)의 활동을 그 사실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도 보여 주다시피, 주인공은 27살 난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미모의 가정관리사다. 일단의 사건을 통해 그녀가 검찰과 경찰로 대표되는 권력과 황색 언론의 선정주의적 보도 행태로 말미암아 개인의 사적 생활이 침해되고, 개인의 명예가 훼손되는 비극적 사건을 보고서라는 형식으로 철저하게 객관적 견지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요소로 부제로 따라붙은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간과할 수가 있는데, 이 부제 역시 제목만큼이나 중요하게 작동을 하니 책을 읽으면서 꼭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라인 지방의 여성 카니발이 벌어지던 2월의 어느 날,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은 자신의 대모 볼터스하임 여사 집에서 벌어진 댄스파티에서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남성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서로 운명적인 이끌림을 느끼고, 카타리나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무장경찰들이 카타리나의 안온한 일상 속으로 뛰어든다. 괴텐은 은행강도로 아주 흉악한 현상수배범이며, 그를 숨겨준 혐의로 카타리나를 경찰서로 연행한다.

 

사건 발생에서부터 경찰은 그녀가 무슨 혐의로 체포되었는지 그 이유도 알려 주지 않으면서 최초의 인권 유린을 시작한다. 경찰은 그녀에게 수색영장 같은 공식문서도 제시하지 않은 채, 수배 중인 범인의 도주를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피의 사실이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조자로 몰고 간다. 게다가 그 시점에서 선정적 보도 형태로 유명한 <차이퉁>지에서는 은행강도의 정부(情婦)가 체포됐다는 기사에 카타리아를 실명으로 보도하면서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한 채, 비윤리적인 황색 보도의 열풍을 당긴다.

 

이미 카타리나의 체포 과정에서 그녀의 인격과 사생활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던 사건 담당 바이츠메네 수사과장은 물론이고, 사건을 맡은 하흐 검사 역시 그녀에게 적대적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진술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들은 어김없이, <차이퉁>지의 퇴트게스 기자에 의해 윤색과 재가공의 과정을 거쳐 자극적으로 공개된다. 이 과정에서, 과연 어느 특정 계급과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이 다루는 사실이 과연 진실일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차이퉁>과 퇴트게스는 카타리나와 관련된 이들이라면 전 남편은 물론이고, 암 수술을 받고 회복하고 있는 중인 카타리나의 어머니 마리아에까지 찾아가 자신들이 필요한 정보를 캐낸다. 절대 면회가 금지되어 있는 환자의 병세 따위는 퇴트게스에게 중요하지 않다. 국민의 알 권리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초법적 언론의 비윤리적 행태는 그 위악을 발휘한다. 개인의 사적 범위에 들어가는 이성관계는 물론이고, 도로주행 거리와 재정 상태는 물론이고, 그녀를 가정관리사로 채용한 현 고용주 블로르나 변호사와 그 가족은 물론이고 전 고용주들까지 모두 경찰의 수사 선상에 오르게 된다.

 

검경과 언론의 이런 마녀사냥은 오래전 우리가 목격했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이들의 공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국민이 정작 알고 싶어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눈을 감던 이들이, 마치 하이에나처럼 은퇴한 전직 대통령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생채기를 내는 모습에서 사회적 공기(公器)로서의 제 본분을 망각한 족벌언론의 모습은 영화와 책을 통해 만난 <차이퉁>의 재현에 다름이 아니었다.

 

사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바더 마인호프 그룹의 테러 용의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자신의 사회적 명예의 추락을 경험했던 페터 브뤼크너 교수의 실화를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언론재벌 악셀 슈프링거 그룹의 일간지 <빌트>가 바로 <차이퉁>의 롤 모델이라고 한다. 책의 서두에서 뵐이 밝히듯이, 실제의 <빌트>와 유사성은 ‘불가피’하다는 선언을 한다. 올해 개봉된 울리 에델 감독의 영화 <바더 마인호프>에서 청년들이 습격해서 불태우는 언론사가 바로 예의 <빌트>지였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뵐이 왜 카타리나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았는지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됐다. 여성에 대한 일반적 동정심과 사회적 약자를 소설의 전면에 내세운 작가의 결정에 저절로 수긍이 갔다. 가정관리인으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던 이혼여성이 어느 날 자신에게 닥친 이 불행한 사태 가운데서, 검경으로 대변되는 권력의 무자비한 사생활 침해와 보이지 않는 언론의 폭력에 사실 효과적으로 대항할 방법은 전혀 없다. 더 무서운 것은 그녀가 살던 아파트 주민들과 익명의 전화 편지 등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폭력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조용한 성격의 카타리나는 이 시련을 통해, 국가가 자신을 전혀 보호해줄 의지도 그리고 그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게 된다. 이야기는 다시 처음에 잠깐 언급했던 폭력의 발생과 결과로 돌아간다.

 

사실 다른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의 글을 읽어 보았는데, 너무나 자의적인 그들만의 문학세계가 선뜻 마음속으로 파고들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다분히 현실참여적인 문제작들을 펴낸 것으로 유명한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새로운 천 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개인의 자유와 명예에 대한 이야기와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저널리즘의 윤리와 방향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하여준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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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1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앞으로 노벨상 수상작품 위주로 리뷰를 하실 예정인가요? 과도한 부탁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레삭매냐 2017-10-11 14:41   좋아요 1 | URL
아니 그런 건 아니구요 :>

이번에 하인리히 뵐의 소설이 리커버링
돼서 나왔다고 해서, 예전 리뷰를 개작
해 봤습니다.

후반기에는 볼라뇨와 로힌턴 미스트리를
중심으로 한 인도문학에 집중해 볼까
합니다.

sprenown 2017-10-11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인도문학까지? 기대됩니다

레삭매냐 2017-10-11 16:02   좋아요 0 | URL
요즘 세계 문학의 끝장은 인도문학
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시류에 편승해서 인도문학
을 좀 파볼까 합니다.

sprenown 2017-10-11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대단합니다. 저는 워낙 문외한이라서 인도하면 철학과 발리우드 영화밖에 생각나는게 없는데, 덕분에 인도문학에 대해서도 알수 있게 되었네요.. 얼핏, 신화와 엮이면서 복잡한 인간과 세계에 심오한 탐구? 어렵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좋은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레삭매냐 2017-10-12 09:37   좋아요 1 | URL
최근 인도 문학을 보면 다이아스포라와
극도로 절제된 현실주의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카스트 제도와 종교갈등에 대한 부분도
빼놓을 수 없구요.
신화적인 요소들은 다소 배제된 느낌이
라고나 할까요.

cyrus 2017-10-11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이 눈길을 줬거나 주고 있는 외국 작가들 중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올 것입니다. 유력 후보는 줄리언 반스. ^^

레삭매냐 2017-10-12 09:38   좋아요 0 | URL
ㅋㅋ 오해십니다 -

전 줄리언 반스 책은 제대로 읽은 게
없는 것 같아요.

<시대의 소음>도 지금 못 다 읽고 있
습니다. 아무래도 저하고는 맞지 않는
다고나 할까요.

문득 예전에 밀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
사 생각이 나는군요. 노벨문학상 특수
반짝하고는 신작은 아예 출간도 되지
않고 있네요. 냄비근성입니다...

sprenown 2017-10-11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cyrus님. 정말 다들 대단하세요, 이 무식에서 벗어나는 길은 열심히 읽는길 밖에 없네요

cyrus 2017-10-12 12:46   좋아요 1 | URL
책 많이 읽는 사람들과 어울리면 주워 들은 정보도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책을 안 읽어도 아는 척할 수 있습니다. ^^;;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민음사 모던 클래식 75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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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노벨문학상 발표를 듣고 나서 집 안에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려 가면서. 분명 몇 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모두 해서 어섯 권의 책을 찾아냈다. 그 중에 네 권을 읽지 않았더라. 좋아해야 하나. 그중에서 모던클래식 중에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인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골랐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약 다른 책으로 읽기 시작했다면, 그렇게 열심히 장기간에 걸친 연휴 기간 동안에 이시구로 선생의 책에 몰입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리고 모던클래식은 왜 지난 2년 동안 멈춰 있는 거지. 민음사는 자신들이 이시구로 선생을 발굴해서 번역해 냈다고 자랑하면서 노벨문학상 특수를 맞아 증쇄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반성 좀 하시지. 자본이 모든 것에 우위를 차지하는 도금주의 시대에 출판사 탓만 할 건 아니겠지만.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이번에 새로 읽어낸 다섯 권의 책 중에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맨부커상에 빛나는 <남아 있는 나날>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이 좋다. 남태평양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패전한 지 어언 3년이 흐른 1948년 10월, 소설은 시작된다. 화단에서 은퇴한 오노 마스지 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스기무라 아키라의 대저택을 인수해서 조용하게 은퇴해서 살던 오노 씨의 숨겨진 비화들을 하나둘씩 밝히는 방향으로 소설은 흘러가기 시작한다. 결혼으로 출가한 세쓰코가 아들 이치로를 데리고 친정을 방문한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혼기에 다다른 둘째딸 노리코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상인 집안 출신의 오노 씨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주판알 튕기는 일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그림 그리기가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그 분야에 투신하기에 이르렀다. 다케다 장인 밑에서 거의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 그림 찍어내는 속도로 작업을 하며 도제 생활을 하던 오노 씨는 서양화를 일본화에 도입하려는 노력에 맹진하던 스승 세이지 모리야마의 휘하에서 새로운 출발을 도모한다. 술과 여흥 그리고 쾌락으로 점철된 ‘부유하는 세상’을 그리던 시절도 있었다.

 

이시구로 선생이 즐겨 사용하는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 기법이 소설의 전반을 아우른다. 자신이 이룬 성취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며 지내오던 오노 씨는 어느 순간, 그런 삶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계기는 혼기에 다다른 둘째딸 노리코의 혼담이 깨지면서였을까. 인근 가와카미 여사의 주점에서 쟁쟁한 후학들을 거느리고 잦은 술자리를 가지던 오노 씨의 주변인사들도 하나둘씩 존재를 감추기 시작했다는 것도 잊지 말자. 전후 구질서의 해체를 목도하게 된 은퇴한 거장은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면서 기묘하게 생각했던 점 하나는 고풍스러운 스기무라 저택에 왜 대단한 성취를 이룬 오노 씨의 그림이 하나도 없을까하는 점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그런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솟기 시작한다. 혼담을 진행하는 가운데, 탐정을 고용해서 상대방 집안에 대한 조사를 하는 장면도 좀 우스웠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는 맏딸 세쓰코가 상대방 쪽에서도 탐정을 고용해서 자기 집안 내력을 조사해 볼 것을 고려해서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이시구로 선생은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오노 씨의 미심쩍어 보이는 과거행적에 대한 이런 갖가지 복선 같은 장치들을 배치하는 섬세함을 구사한다.

 

잠복해 있던 갈등은 전쟁 중에 만주에서 전사한 맏아들 겐지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면서 구체화되기에 이른다. 전전세대를 대표하는 오노 씨와 전후세대의 상징으로 직접 불의한 전쟁에 참여했던 사위 슈이치가 정면충돌하는 장면은 그래서 흥미롭다. 노리코와의 혼담이 깨진 미야게 청년과의 대화도 같은 연장선상에 서 있다. 여전히 다수의 일본인들은 태평양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오노 씨의 주장은 조국이 벌이는 전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자기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 절반이 전사했다고 말하는 슈이치는 어리석은 대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정작 죄인들은 무사태평하게 새로운 시절을 맞아 호의호식하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세대들이 목청껏 외쳤던 대의에 의거한 정의란 말인가. 일본계 이시구로 선생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많은 나가사키 시민들에게 과연 이시구로 선생의 책은 읽어 보았는지 묻고 싶어졌다. 슈퍼마리오 코스프레 아베는 물론이고.

 

소설은 중반을 넘어가면서 오노 씨가 전쟁 중에 어떤 일을 하면서 성취를 이루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은 인사가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독자에게 알려주기 시작한다. 마쓰다 치슈에서 포섭되어 국무성의 예술 위원회 일원으로 만주 위기에 즈음해서 퇴폐적인 성향의 그림을 그리던 모리 스승의 곁을 떠나 본격적으로 부역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일왕에게 충성하고,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활약을 고무하는 예술이라기보다 추악한 정치적 선전선동에 가까운 그림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모든 이들의 칭송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부역 예술가는 전쟁이 끝나면서 반강제로 은퇴를 하게 된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위대한 조국의 예술혼으로 떠받들어지던 화가가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물론 <창백한 언덕 풍경>에서도 비슷한 정황이 등장한다. 전작에서 오가타 상이 반성하지 않는 일본 구세대의 대변인으로 등장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좀 더 나아가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오노 씨는 어떻게 해서든 자기 딸 노리코의 혼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상견례장에서 억지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이 소설의 핵심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같은 패전국이지만 독일과 상반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본의 오늘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 강요에 의한 억지 사과, 이런 자세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아베 정권의 일본이 경제적 풍요 덕분에 부러움을 살지 몰라도, 존경받는 나라는 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 과거는 잊고 미래로 나가자고 외치고 있지만, 그 미래는 과거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제대로 된 과거청산 없이 미래만 외쳐대는 게 얼마나 허망한지 우리는 누구보다 역사를 통해 혹독하게 배우지 않았던가.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읽다 보니 문득 이모 작가의 <고시조>가 연상됐다. 예전에 참 그 소설을 좋아했었지. 순수한 예술에 목말라 하던 예술가가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그렇게 애타게 찾던 가릉빈가를 만나게 되었던가. 지금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그런 작가가 되어 버렸지만. 그의 영락한 모습에서도 보듯이 모름지기 예술가로서 진정한 용기란, 과거의 시대착오적인 행적과 잘못된 판단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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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7-10-11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기사단장도 화가가 나오는데 전쟁 끝난뒤부터 본격 활동해서 대가가 되더군요. 이어지는 듯한 일본역사네요 ^^

레삭매냐 2017-10-11 14:37   좋아요 0 | URL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하루키 신작 소설에서도 오스트리아 유학
길에 나섰던 화가가 등장하죠!

결은 좀 다르지만, 이시구로 선생이 그전
에 이미 다뤘었네요.

sprenown 2017-10-11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에 대한 성실하고, 알찬 리뷰 잘 읽었습니다.님의 리뷰를 참고해서 좋은 독서 해 보렵니다.

레삭매냐 2017-10-11 14:37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이시구로 선생 최고작은
<네버 렛 미 고>라고 생각합니다.

작품마다 다른 스타일을 시전하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akardo 2017-10-11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인공 직업도 그렇고 전개도 그렇고 흥미롭네요. 읽어보고 싶습니다.

레삭매냐 2017-10-11 14:40   좋아요 0 | URL
이번 연휴 때 읽은 이시구로 선생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입니다.

AgalmA 2017-10-14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오르한 파묵도 그렇고 노벨문학상 받을라믄 조국의 예술과 전통적 생활상을 심도깊게 소설로 써 내라우~ 일까요ㅎ 고은 선생은 받기 어려운 거 같아 기대도 안 하는데...이번엔 이시구로가 일본인이기도 해서 하루키는 의문의 2패;

레삭매냐 2017-10-14 23:54   좋아요 1 | URL
지적하신 대로 세계문학의 정수는 가장 자기
조국의 전통적인 모습에 충실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춘수 씨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가망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봅니다.
해외문학에 경도된 작가를 선정할 리가
없겠죠.

춘수 씨가 정치적 이슈들을 교묘하게 피해
간다면, 이시구로 선생은 상대적으로 민감
한 주제들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1승.
 
녹턴 -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36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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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산 지가 벌써 만 3년이 되었구나. 도서정가제 시행 전 막바지 광풍이 불던 시절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유일한 소설집 <녹턴>을 샀다. 그리고 읽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묵혀 두었다가, 이시구로 선생의 노벨문학상 발표가 난 뒤에 열심히 찾아 얍삽하게 읽어내렸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참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아는 ‘녹턴’이라고는 쇼팽의 야상곡으로 대니얼 바렌보임이 연주한 op.9-2가 유일했다. 이제 나의 녹턴 리스트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모두 5개의 음악과 해질녘에 관한 단편소설들이 <녹턴>을 장식한다. 개인적으로 누군가 이 소설집의 특징을 잡아내는 키워드를 말해 보라고 한다면, 유머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동안 내가 읽은 이시구로 선생의 책들에는 유머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십년에 한 편 꼴로 소설을 발표하는 진지모드의 과작(寡作) 작가에게 유머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을까. 아무래도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에 이런 색다른 시도가 용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시작은 베네치아다. 동구권 폴란드 출신의 기타리스트 야네크는 어릴 적 자신의 우상 토니 가드너와 아주 우연히(소설에서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 어렵고 암울하던 시절을 야네크의 어머니는 토니 가드너가 불러제끼는 아름다운 노래들을 들으면서 버틸 수 있었다고 했던가. 공산주의 동구권과 자본주의 서방을 이어주는 가교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는 점에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그것으로 끝일까? 아니다. 토니 가드너는 모종의 계획을 위해 자신의 아내 린디에게 세레나데를 들려 주기 위해 야네크를 초빙해서 곤돌라 위에서 크루너(crooner)로서 공연을 계획한다. 다들 ‘한물간 딴따라’라고 치부하는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아내 린디와의 27년 간의 결혼생활을 접고 새로운 출발, 컴백을 위해 이혼 이벤트를 거행하려고 한단다. 인간사 모든 것이 금전으로 계량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대한 문학가의 저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가는 거지.

 

슬슬 발동을 건 이시구로 선생의 유머는 두 번째 에피소드인 <비가 오나 해가 뜨나>에서 폭발한다. 사반세기 전 대학동창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세 명의 대학동창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어떤 점에서는 슬랩스틱 스타일의 미국식 코미디가 연상되기도 했다. 스페인과 이태리에서 영어교사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던 레이(먼드)는 여느 때처럼 런던의 찰리와 에밀리를 방문하지만 예전과 같지 않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눅이 든다. 레이의 예상대로 찰리는 바람이 났고, 자신이 프랑크푸르트에 가 있는 동안 아내 에밀리의 화를 삭여 달라는 분부대로 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이 꼬여만 간다. 어쩌면 런던 금융계에서 성공한 이들 부부는 레이에게서 자신들과는 다른 패배자의 모습을 원했던 게 아닐까. 우리 출발은 같았지만, 2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다음 우리는 이렇게 달라졌다라고. 레이가 찰리의 지시대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인공적으로 개냄새를 만들기 위해 찰리의 낡은 신발을 삶는 동안 나타난 에밀리에게 무슨 말을 해도 과연 먹혔을까. 소설집 <녹턴>에서 가장 재밌는 이야기였다. 한편으로는 친구들에게 이용당하는 레이의 모습이 슬프기도 했던. 여기서 얻은 교훈 하나, 타인의 삶에 개입하려고 하지 말 것이니.

 

<말번 힐즈>는 다섯 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내레이터는 기타리스트로 런던에서 음악가로서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 중이다. 성공이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었다.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 주겠다는 매기 누나의 제안에 그녀와 매형이 말번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빌붙는다. 그는 철저하게 이상주의자다. 매기 누나가 그를 그냥 먹여 주고 재우고 싶어서 불렀을까? 아니다. 여름철 손님들이 늘어나니 일손이 부족해서 그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가하게 음악이나 만들면서 보내고 싶은 주인공의 심리와 매기 누나의 현실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누나가 빚어내고 자신이 ‘새로운 분노’라고 명명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분노는 시간이 지나도 다시 그렇게 샘솟는 법이지. 예전 자신의 학창시절을 악몽으로 만들었던 프레이저 선생님에 대한 증오감과 매기 누나네 카페에서 서비스에 대해 혹평을 하던 스위스인 부부를 골탕 먹이려던 시도는 그들을 알게 되면서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한다. 연주 혹은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청자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는,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청중이 주는 긴장감에 대한 묘사 등은 정말 탁월했다. 한 때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기도 했다는 이시구로 선생의 음악에 대한 사랑이 담뿍 담긴 그런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다.

 

표제작 <녹턴>에서는 <스쿠너>에서 등장했던 토니 가드너의 전처 린디 가드너가 주인공 스티브처럼 얼굴이 붕대를 친친 감고 등장해서 멋진 호흡을 맞춰준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누구인가? 붕대감은 세션 연주자로 뛰어난 테너 색소폰 주자이지만, 실패자형 추남(원서에는 어떻게 표현이 되어 있는지 너무 궁금하다)이라 성공 가도를 달리지 못하는 남자 스티브다. 이 남자는 아내 헬렌을 뺏아간 샛서방의 제안으로 그리고 매니저의 강권에 못이겨 할리우드에서 성형수술이라면 둘째라면 서러워할 전문의 닥터 보리스에게 자신의 미래를 내맡긴다. 그것 참,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일이 아닌가. 닥터 보리스의 걸작품으로 재탄생하길 원하는 스티브의 바람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연상되기도 했다. 재능을 가지고 정상을 향해 달리길 원하다면, 마케팅 전략(성형수술)이 있어야 한다는 주변의 설득에 줏대 없는 실패자형 추남은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과 동병상련에 있는, 천박함의 대명사지만 할리우드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린디 가드너와 의기투합해서 한바탕 헛소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부와 명예를 위해 내달리는 스티브와 린디의 조합이야말로 한밤의 ‘야상곡’ 같다는 의미에서 이시구로 선생은 과감하게 <녹턴>이라는 제목을 붙인 게 아닐까. 그 또한 작가가 던진 유머로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대미를 장식하는 <첼리스트>에서 저자는 다시 독자들을 최초로 소설이 시작된 베네치아로 다시 인도한다. 시작한 곳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번에는 집시처럼 베네치아에서 음악으로 밥벌어 먹고 사는 연주자들의 눈에 들어온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티보르에 대한 이야기다. 저명한 스승에게 사사 받은 것을 자랑으로 삼는 티보르지만, 정작 밥벌이의 지겨움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광장의 카페에서 값비싼 커피를 마시는 그를 보고 다른 연주자들은 ‘낭만적 바보’라고 폄하한다. 그런 그가 미국 오레곤 출신으로 스스로 저명한 첼로 주자라고 주장하는 중년의 엘로이즈 매코믹 양을 만난 것은 불운이었을까? 아니면 앞으로 스승의 대를 이어 저명한 첼리스트가 될 티보르의 행운이었을까? 그들은 아마 전자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해 본다. 엘로이즈 양의 티보르에 대한 개인교습이 진행되는 가운데, 과연 그녀가 진짜 첼로를 켤 줄 아는 사람이었나하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동시에 사기꾼 명연주자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시구로 선생의 소설집 <녹턴>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어떤 이들에게는 밥벌이의 수단이 될 것이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고된 삶을 이겨내는 힘을 주는 원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이별의 노래로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된다. 변형(성형수술)을 통한 성공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치유제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바로 그런 음악의 효용성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인연의 매개체로 음악을 그리고 해질녘의 순간들을 절묘하게 포착해내고, 휘발시켜 버린다.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리는 음악처럼 그렇게 소설 <녹턴>도 독자의 가슴 속에 잔영을 남긴 채 사그러지는 것이다. 뭐 음악이 원래 그런 게 아니었던가. 남은 것은 그런 음악에 대한 자신만의 기억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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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0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숨어서 지냈던(?) 이시구로 덕후들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되는군요. ^^

레삭매냐 2017-10-11 09:02   좋아요 0 | URL
노벨상 받기 전까지 꼴랑 이시구로 선생
의 책 두 권만 읽어서 덕후 인증이 쉽지
않을 듯 합니다 :>

이젠 덕후라도 해도 괘않겠네요...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파묻힌 거인>은 2015년에 발표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7번째 소설이자, <나를 보내지 마> 이후 자그마치 10년 만에 나온 최근작이다. 국내에서는 이시구로 선생의 다른 모든 작품들이 민음사에서 나온 반면, 이 책만 시공사에서 출간됐다. 게다가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결을 자랑한다. 무려 판타지 소설이라는 사실이다. 아마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이 책을 읽는다면, 가즈오 이시구로 선생의 책이라는 사실을 과연 알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동시에 조금 우려가 되기도 했었다. 영국 작가들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전통의 소재(우롱차처럼 한껏 우릴 수 있는) 아더 왕의 전설이 등장한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나의 노파심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독후감상은 대만족이었다.

 

소설은 현재로부터 자그마치 1,500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후 5세기말에서 6세기 초,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작가가 전간기나 패전 뒤의 시간적 배경을 장기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 또한 파격이 아니겠는가. 우매한 독자는 어쩔 수 없이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게 된다. 십대 소년으로 보이는 프로도 일행이 반지원정대를 구성해서 세상을 구하는 대원정에 나섰다면, 소설 <파묻힌 거인>에서는 액슬과 비어트리스 노부부 원정대가 등장한다. 기억이 상실된 시대, 잉글랜드에 사는 브리튼족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이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던 간에 기억과 상실은 소설의 주요한 소재로 인식된다.

 

번역서에서는 도깨비라고 되어 있는데 오거(ogre)가 더 맞는 표현이 아닐까. 안전한 마을 밖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악령과 오거가 날뛰는 험악한 시절에 액슬과 비어트리스 노부부는 왜 위험한 여행길에 나서려는 걸까. 그것은 어딘가에서 둥지를 틀고 있을 아들을 찾기 위함이다. 심지어 노부부는 마을에서 어둠을 밝히는 초사용을 금지 당하지 않았던가. 깨달음과 계몽을 위한 불빛이 상징하는 빛[lightment]의 사용이 금지된 이유에 대해 이시구로 선생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과거에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는 점 정도.

 

노부부 원정대에 오거에게 잡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색슨족 소년 에드윈과 역시 같은 색슨족 출신 전사 위스턴이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아, 그전에 어느 섬에 가기 위해 뱃사공에게 도강을 의뢰했다가 낭패당한 이야기가 등장했던가. 아마 이쯤에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 노부부의 여정이 아들을 찾기 위함이라는 명목상의 이유가 아니라,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사공은 바로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이 아니었던가. 뒤에 등장하는 뒤에 연이어 등장하게 될 아더왕 전설과 더불어 기존의 문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재창조(re-creation)이야말로 어쩌면 문학의 본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시구로 선생은 능수능란하게 서사 구조를 이어간다. 단단한 스토리 구성에 노년과 청장년을 아우르는 캐릭터 구성에까지 그리고 곳곳에서 원정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등장하는 사이드킥들까지 그야말로 부족함이 없어 보일 지경이다.

 

브리튼족과 색슨족의 대결 구도는 정착민과 이주민 간의 갈등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그 내면에는 브렉시트로 귀결된 이슬람 난민 문제에 대한 문학적 은유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모두가 두려워하는 아더왕 시대의 암용은 입김을 뿜어 사람들의 망각을 유도한다. 과거의 기억들이 사라져 버리는 건 아쉬울 지 몰라도, 인간에게 망각이란 또 필요악이 아니었던가. 위대한 전사 위스턴은 브리튼족 사이에서 전사로 성장했지만, 그들이 색슨족의 원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미래의 전사이자 사냥꾼 에드윈에게 각인시킨다. 이렇게 구전되는 분노와 증오에 대한 망각이야말로 암용의 입김이 만들어낸 선효과가 아닐까. 비어트리스가 험난한 여행 중에 말한 것처럼, 좋지 않은 기억조차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저자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파묻힌 거인>은 판타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로드무비 같은 원정대의 여정,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 그리고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망각에 대한 저주 등. 게다가 무서운 암용과 오거들이 출몰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위대한 기사의 등장, 브리튼족과 색슨족의 대를 이은 갈등 구조만으로도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시구로 선생은 이제 자신의 커리어에 노벨문학상이라는 타이틀까지 얹었으니 영화 마케팅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 비어트리스를 공주라 부르면서 여정에 나선 액슬의 과거 역시 흥미진진하다. 신사협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색슨족을 학살한 아더왕의 결정에 분연히 반대한 유능한 외교가였지만 이제는 한낱 이름 없는 농부로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액슬(러스)가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마주하게 될 삶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에 소설의 방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독자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사 위스턴의 활약상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과거의 회상, 부조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냉정한 비판 그리고 관계의 회복을 위한 시도 등을 자신의 저작들에서 주로 다룬 이시구로 선생이 이렇게 멋진 히어로 캐릭터를 만들어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원정대의 험난한 여정을 헤쳐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캐릭터라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표면적으로 사람들을 해치는 암용을 처치하라는 아더왕의 밀명을 받았다는 기사 가웨인 경의 등장도 흥미롭다. 아더왕의 조카로 수많은 세월을 경험한 노련한 기사는 때로는 원정대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는 입체적 면모를 선사해준다. 말미에서 반드시 암용 케리그를 처리해야 하는 위스턴과 벌이는 건곤일척의 대결은 소설의 하일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전투 씬 역시 영화화된다면 가장 흥미로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바로 연상되는 수도원은 <파묻힌 거인>에서 신에게 서약한 수도사들이 묵언수행을 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니다. 온갖 비밀과 음모 그리고 협잡이 넘실거리는 공간으로 치부된다. 물론 선을 위해 원정대에게 도움을 주는 일단의 수도사들도 있지만, 다수의 수도사들은 반대의 길을 걷는다. 위스턴의 숙적 브레누스 경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과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는 장면이 영화화된다면 얼마나 스펙터클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될 지경이다.

 

이시구로 선생의 <파묻힌 거인>을 읽으면서 죽음과 망각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유해 보게 되었다. 우리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고, 죽음은 곧 망각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이런 망각의 일상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또 무엇을 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 깨달음이 있을 지어다.

 

49-50p 액슬은 말한다.

 

 

“사라져서 좋은 것도 많지만 이렇게 소중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 잔인한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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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7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7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일시품절


 

문학상이란 작가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 받는 노벨문학상이라고 한다면. 지난 35년 동안, 7편의 장편과 1편의 단편소설집을 발표한 일본 출신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금년도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작년 밥 딜런의 문학상 수상에 이은 설화를 단박에 제압해 버리는 그런 의외의 결과였다고 해야 할까. 노벨문학상이 무척이나 정치적인 결과들을 도출해 낸다고 하지만, 처음으로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작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로 기억될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듯 싶다. 최소한 적어도 하루키보다는 나은 선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연휴는 이시구로 선생의 책읽기에 온전하게 투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원래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 완독에 목표를 두었지만, 지난 목요일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가 나면서 나의 연휴 독서 계획은 오롯하게 이시구로 선생 읽기로 수정되었다. 그리고 모두 5권의 책을 읽었다. 만족할 만한 수작도 있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판타지와의 만남도 있었으며(<파묻힌 거인>),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유머에 대한 일격(<녹턴>)도 대면할 수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그가 35년 전에 처음으로 발표한 <창백한 언덕 풍경>이다. 아무래도 이십대 청년 시절에 발표한 작품이다 보니 솔직하게 말해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작가의 문학적 시원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이시구로 선생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창백한 언덕 풍경>에서 저자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에츠코 상에게 투영한다. 영국의 시골마을에서 조용하게 살고 있는 에츠코 셰링엄 부인은 최근 딸 게이코의 장례식을 치렀다. “자살 본능”이라는 말이 섬뜩하게 다가오는 가운데 멀리 떨어진 맨체스터에 사는 딸 게이코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로에 이은 자신의 두 번째 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 니키가 엄마를 찾아와 위로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이시구로 선생은 플래시백으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 일본 나가사키로 무대를 옮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일억총옥쇄를 주장하던 일본 군부의 주장은 그야말로 분쇄되었고,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항복이라는 패전의 치욕을 감내하던 시절로 저자는 독자를 인도한다. 전쟁 중에는 원수였지만, 패전 뒤에는 국가의 생존을 위해 남기 위해 미군정이 지도하는 방향으로 재벌을 해체하고, 기존 질서들을 뒤엎는 전복이 진행 중이다. 에츠코는 전자 회사에 다니는 전도유망한 지로 군과 신접살림 중이며, 현재 첫째 아이인 미래의 게이코를 임신 중이다.

 

에츠코는 남편 지로와 함께 새로운 주거 공간인 현대식 아파트에 살고 있다. 반면, 그녀와 우정을 쌓게 되는 사치코 씨는 딸 마리코와 황무지 오두막에 살고 있는 중이다. 이런 공간의 분리는 마치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은 신세대 일본과 제국주의 시절 구세대 일본의 단절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마치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을 연상시키는 그런 삶을 걷는 사치코와 전쟁 와중에 딸을 살해한 여인이 언제 자신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리는 마리코를 에츠코는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이십대의 이시구로 선생은 소설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처리하고 있다. 아마 기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두 번째 영국 남편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일본 나가사키 시절 권위적인 남편상을 보여 주었던 지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들이 누락되어 있다. 물론 영국에서 패전국가 출신 동양 부인이 셰링엄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리는 점도, 남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저택에서 사는 기이한 모습들에도 설명이 빠져 있다. 이런 점을 신예 작가의 문학적 시도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나같이 무지한 독자는 그런 사소한 디테일에 대한 해명을 원한다.

 

사치코가 에츠코를 통해 일자리를 얻은 후지와라 부인의 국숫집에 대한 은유도 주목할 만하다. 전쟁 전, 그러니까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모든 것을 상실하기 이전 그녀의 집안은 한 자락하는 유지였던 모양이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의 생존만이 패전 국가 일본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래서 후지와라 부인의 국숫집을 방문한 오가타 상은 안타까워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후지와라 부인은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시대를 건너 뛰어, 특별할 일도 하지 않은 채 런던에서 거주하고 있는 막내딸 니키의 모습이 미군정 아래 자주적으로 세운 어떤 국가적 목표 없이 부유하던 시절의 일본과 닮았다고나 할까. 삶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는 변주야말로 청년 작가 이시구로가 목표로 삼았던 지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시구로 선생은 프랭크 상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사치코와 에츠코의 시아버지 오가타 상을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취한다. 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일본에 주둔한 정복자 미군들과 교제하는 사치코를 주변인들이 좋게 볼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우리가 마치 예전에 그녀들과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을 양공주라는 이름으로 비하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시선들이 참으로 불편하게 다가왔다. 미국이 딸 마리코에게 더 나은 환경을, 미래를 보장해 줄 거라며 프랭크 상을 기다리지만 그녀의 미래는 보지 않아도 뻔할 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이시구로 선생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사치코와 마리코에게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과감하게 생략해 버린 것이 아닐까. 그런 생략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미래에 대해 유추해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좀 더 본질적인 신구세대 간의 갈등은 전직 교장선생님인 오가타 상과 아들 지로 군의 친구 마쓰마 시게오 군 사이에서 벌어진다. 교원들이 보는 잡지에서 자신이 추천한 마쓰다 시게오가 기고한 구시대 교육인들(엔도 박사와 자신 같은 제국주의 교육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읽은 오가타 상은 분노한다. 새로운 전쟁국가 일본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는 아베 신조를 보는 듯한 기시감에 놀랄 정도였다. 제국주의 일본이 전쟁에 진 것은 총칼 같은 무기가 부족해서였지, 자신들의 시스템이나 과오 탓이 아니었다는 말은 정말 오랫동안 들어온 말이 아니었던가. 규율과 충성 그리고 조국에 대한 의무감을 강조하는 구세대를 대변하는 언사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아울러 미국식 민주주의 이식에 대한 불신과 우려도 동시에 보여준다. 이런 장면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한 시절을 장식했던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기묘한 이데올로기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렇게 반성할 줄 모르는 오가타 상의 모습에서 탈아입구 방식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나섰던 제국주의 일본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수많은 가해자의 모습들을 단 두 방의 원자폭탄 투하와 피폭으로 피해자의 모습으로 탈바꿈시켜 가치전도의 장면도 더 이상 낯설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시구로 선생은 일본인이면서도 지극히 일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패전국가 일본의 모습을 자신의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을 통해 그려보겠다는 시도를 한 게 아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멋진 시도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 연장선상에서 봤을 때, <남아 있는 나날>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 대한 저자의 저술은 한층 성숙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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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7-10-10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휴를 온전히 채운 독서 덕분에 이렇게 노벨상 작가의 세계를 알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레삭매냐 2017-10-10 13:35   좋아요 1 | URL
너무 멋진 작가입니다...

<나를 보내지 마>를 보고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골 국물처럼 우려나온다고나
할까요.

stella.K 2017-10-10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유독 별점이 짜네요.ㅋ
하루키 보다 나은 선택이란 말씀에 한표요!
전 매년 하루키가 되면 어쩌나 그게 걱정이어요.
그럴 바엔 쿤데라가 받는 게 50배쯤 낫다고 봅니다.ㅋ

이번 연휴는 정말 알차게 보내셨네요. 부럽습니다.
저도 분발해야겠습니다.ㅠ

레삭매냐 2017-10-10 14:48   좋아요 1 | URL
별점에 대해서는 다른 작품들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랍니다 :>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날들> 그리고 <녹턴>에
별점을 더 후하게 줘야 해서요 ~ ㅋㅋ

전 이제 이시구로 선생의 마지막인
<위로받은 사람들> 읽기에 돌입합니다.

cyrus 2017-10-10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로 이시구로의 책을 소개하는 포스팅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그중에는 리뷰라고 보기 힘든 글도 있어요. 레삭매냐님처럼 책을 읽고 쓰는 리뷰를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이 글에 땡스투 적립금을 받아야 하고요.

레삭매냐 2017-10-11 09:06   좋아요 1 | URL
과찬의 말쌈이십니다.

그나저나 예전의 땡스투 시스템에 좋았는데
지금도 작동하고 있나요?
서로 윈윈이 되는 것으로 가면 좋은데 받는
분에게만 지원이 되니.

아직도 이시구로 선생의 책 리뷰를 두 개는
더 써야 하네요 :>

shuai 2017-10-26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다시 보는 레삭매냐님의 이 리뷰가 정말 좋군요. 저는 더 보탤 말이 없네요.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7-10-26 20:25   좋아요 0 | URL
부족하기 짝이 없는 리뷰를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