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라스 캐슬
저넷 월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북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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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출신 저널리스트 저넷 월스의 <더 글라스 캐슬>을 읽었다. 예전에 한 번 <유리 성>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왜 다시 이 책이 출간되었나 싶어서 위키피디아의 도움을 받아 검색해 봤더니 올해 여름 저넷 월스의 이 특별한 원작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개봉됐기 때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리 라슨, 네이오미 와츠 그리고 우디 해럴슨이 열연한 영화의 트레일러를 보니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책을 읽다 보니 프로스펙터라는 장비로 금을 찾겠다는 허황된 꿈을 좇는 캐릭터로 렉스 월스 역에 우디 해럴슨만한 배우가 없겠구나 싶었다. 적어도 캐스팅은 완벽했다.

성공한 저널리스트로 뉴욕에 거주하는 화자는 이스트빌리지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어머니 로즈메리를 보고 외면한다. 왜 성공한 딸은 노숙생활을 하는 어머니를 외면하는 걸까? 저자는 모든 것이 시작된 사막에서의 유년 시절로 독자를 인도한다. 세상에 두려울 게 하나 없는 저넷의 아버지 렉스 월스는 와이프 로즈메리와 운명적 만남 끝에 결혼한다. 월스 가족에게 방랑은 천명 같은 것이었을까. 애리조나 피닉스를 필두로 해서, 캘리포니아의 숱한 탄광들, 배틀마운틴(네바다) 그리고 마침내 웨스트버지니아 웰치에까지 이르는 여정이 월스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

 

저넷의 부모는 로리와 저넷, 브라이언 그리고 모린까지 네 명이나 되는 자식들에게 안정된 가정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렉스와 로즈메리에게 세상은 너무 넓고 할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모양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유한 로즈메리의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겠지만, 자존감 하나로 세상과 맞짱 뜨는 아버지 렉스(라틴어로 왕을 뜻한다)는 신명 나는 욕설 배틀을 장모님에게 선사한다. 물론 간단치 않은 성격의 장모님도 불같은 성격으로 배틀에 나선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무려 네 명의 아이를 거느린 가장으로 렉스는 정말 무능했다. 아니 천성적으로 타고난 방랑벽 때문일까? 한 직장에 오래 버틸 수가 없는 숙명을 타고난 모양이다. 집에서 자신이 벌어올 일용할 양식을 기다리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성질을 죽이고, 다달이 월급을 집에 가져다 바치는 일 따위는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로리와 저넷, 브라이언과 갓난 모린은 숱한 날들을 굶주림으로 보내야만 했다. 삶이 모험이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친환경적인 삶에 대한 적확한 삶의 방식을 아이들에게 가르친 점은 부모로서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시달리게는 하지 말아야 하지 않았을까. 렉스가 어디서 가져온 마가린을 그대로 먹는 로리와 저넷의 모습에서, 그리고 이웃집에 먹을 걸 도둑질하러 들어갔다가 1갤런에 해당하는 피클을 강제로 먹고 토하는 브라이언의 모습은 참담하게 다가왔다.

 

또 한편으로 가장 사랑하는 딸 저넷에게 금성을 선물해 주고,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알려 준다며 총쏘기를 가르쳐 주는 아버지 렉스. 자신의 자식들에게 손끝 하나 대면 용서하지 않을 거라던 아버지는 사랑한다고 말하던 딸 저넷을 이용해서, 술집에 가서 내기당구로 돈을 벌기도 한다. 그러다가 큰일이 날 뻔도 하지만, 저넷에게 수영을 가르쳐 줄 때처럼 스스로 환난을 벗어나올 줄 알았다고 했던가. 도대체 오락가락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종잡을 수가 없다. 빌리 딜에게 진짜 총을 쏴서 다시 야반도주에 나서게 되는 월스 가족들. 그나마 안식처로 보이던 애리조나 피닉스를 떠나 안착한 렉스의 부모님이 사는 동네 웨스트버지니아의 웰치에서도 그들의 생활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안정을 찾나 싶었던 웰치에서 저넷을 비롯한 아이들은 굶기를 그야말로 밥먹듯 하고, 쓰레기통을 뒤져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미국이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의 악몽에서 벗어나 한창 신자유주의에 세례를 받고 있던 시기에도 월스 가족은 이런 극심한 차원의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천장에서는 비가 줄줄 새고, 혹독한 겨울에는 난방을 위해 석탄을 살 돈이 없어서 그대로 추위에 노출되고, 중고할인점에서 산 싸구려 옷들을 입고 지내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성공을 구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결국 저넷은 언니 로리와 결탁해서 가난으로 점철된 지긋지긋한 웰치를 떠나 뉴욕으로 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들이 돈을 모으는 저금통에 오즈라는 이름을 붙인 사실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브라이언까지 합세한 돈모으기 운동은 아버지 렉스의 약탈로 종언을 맺는다. 생전 아버지에게 화를 내지 않던 로리 언니조차 분노에 휩싸여 아버지에게 막말을 내뱉지 않았던가. 아버지 렉스와 웰치에서 사는 동안 더 이상의 비전이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은 저넷은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뉴욕으로 가서 새출발을 결심한다. 렉스가 꿈꾸던 유리성 역시 말 그대로 글라스 캐슬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로리와 저넷, 브라이언 그리고 모린이 순서대로 뉴욕에 둥지를 틀고, 저넷은 버나드 대학에 진학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꿈꾸어 오던 저널리스트의 꿈을 이어간다. 월스 가족에게 뉴욕은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 시작되는 그런 장소였던 모양이다. 물론 모린이 엄마 로즈메리를 칼로 찌르는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월스가의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어엿하게 성공을 거둔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귄 잘 나가는 중소기업가 에릭 골드버그와 결혼한 저넷은 엄마와 아빠는 뉴욕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는데 자신만 호화호식하면서 사는 게 아닌지 양심을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 동시에 엄마가 외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텍사스에 100만 달러에 달하는 땅이 있다는 사실에 좌절하기도 한다.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그만한 재산이 있었다면 그동안에 자기 형제들이 가난으로 고통받은 건 다 무엇이었던가. 개인적으로 저넷 월스가 아버지 렉스와 엄마 로즈메리와 의절하지 않고 끝까지 잘 지낸 점이 그저 놀라웠다. 내가 그녀였다면...

 

에릭과의 8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낸 저넷은 자신을 알아주는 소설가 존 테일러와 새출발에 나선다. <폴링>이라는 자신의 첫 번째 결혼생활에 대한 글을 쓴 존 테일러는 미국 문단에서 그렇게 유명한 작가가 아닌 모양이다. 댓글을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넷 월스의 <더 글라스 캐슬>을 읽고 나서 호기심에 그의 책을 찾아 읽은 모양이다. 그리고 대개가 부정적인 리뷰였다.

 

개인적으로 무책임했던 아버지 렉스보다, 화가이고자 했던 자유인 로즈메리에게 연민이 갔다. 자신의 인생을 추구하고자 했지만,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은 그녀로 하여금 화가의 꿈을 쫓는 대신 어머니의 유산으로 취득한 교사자격증을 가지고 렉스를 대신해서 가장이 되어 교사가 되어 돈벌이에 나서야했다. 가톨릭 교도로 뚜렷한 주관과 신념을 가지고 있던 로즈메리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추구하는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물론 그녀와 남편 렉스가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자식들을 돌보았다면 좋았으련만 그들은 균형을 몰랐던 것 같다. “인생은 비극과 코미디로 점철된 드라마라는 멋진 말도 그녀가 하지 않았던가.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칼럼니스트로 성공한 저넷 월스의 솔직담백한 회고록에 대중은 엄청난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회고록 <더 글라스 캐슬>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자그마치 260만부나 되는 책이 팔리고, 이어 영화화까지 되었다. 어쩌면 숨기고 싶은 지난날의 과거사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책으로 만들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높이 평가해야할 것 같다. 자기 내면의 고통들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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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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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 마침내 도착했고, 기갈한 것 같은 느낌으로 그렇게 읽어 내려갔다. 오늘 받았는데 벌써 다 읽어 버렸다. 그것은 마치 이 책을 다 읽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2016년 맨부커상 롱리스트 후보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보고나서부터, 원서라도 주문해서 읽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 정도 실력이 되지 않으니 그저 번역이 돼서 출간될 날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도착했고 난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소설의 제목으로 나와 있듯이 소설의 화자는 글쓰는 여자 루시 바턴이다. 일리노이 주 앰개시라는 촌동네 출신의 루시는 차고에서 자랐다. 텔레비전 한 대 없이 유년시절을 보낸 그녀는 추운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따뜻한 학교 교실에 남아 숙제를 하고, 책을 읽으면서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진학하고, 그렇게 진학한 대학에서 현재의 남편 윌리엄을 만나 결혼해서 뉴욕에 정착했다. 크리스티나와 베카라는 어여쁜 딸을 낳은 루시는 맹장수술 때문에 입원한 크라이슬러 빌딩이 보이는 뉴욕 병원의 1인실에서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가가 병원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바로 병원이라는 장소가 치유와 회복의 장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수술에 의한 육신의 회복 뿐, 아니라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병원에 입원한 딸의 병간호를 위해 뉴욕이라는 대도시에 도착한 루시의 엄마의 모습에서 화해가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도 독자의 착각일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화해라기보다 어쩌면 갈등의 심화가 벌어질 수 도 있지 않을까.

 

소설은 마치 영화의 시퀀스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한 컷에서는 1980년대 중반 뉴욕의 병원을 무대로 하다가, 또 한 편에서는 화자 루시 바턴이 생각하는 과거의 이야기들에 포커스를 맞춘다. 독일군 포로 출신으로 메인 주의 농장에서 일하다 농부의 아내와 눈이 맞아 자신의 남편 윌리엄을 낳은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기묘한 러브스토리와 뉴욕에서 포닥 과정을 밟게 된 윌리엄이 35살의 나이에 독일에 사는 조부모로부터 상당한 양의 유산을 받게 된 이야기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뜻하지 않았던 유산은 전쟁 중에 조부모가 번 돈이라고 하는데, 나치의 부정한 축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시는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딸들이 가스실로 끌려간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정치적으로 아주 중립적인 입장이라고 해야 할까.


독자가 대면하게 되는 루시네 집안의 가난은 상상을 초월한다. 겨울에 실내에서도 코트를 입을 정도로 추웠다고 했던가. 너무 추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더니 엄마는 루시에게 핫보틀을 데워줘서 껴안고 잤다고 했지 아마. 루시네 가족이 다니던 교회에서도 차별은 만연했고, 사람이 많아서 바닥에 앉으라고 했다는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에 교회에서 나눠 주는 풍족한 음식을 만끽했다는 이야기도. 나도 언젠가 얻어먹은 상상을 초월하는 터키 생각이 났다. 문제는 어떻게 먹는 줄 몰라서 그대로 상온에 방치했다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더라는 이야기도. 참고로 미국 추수감사절을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칠면조는 닭고기에 너무 뻑뻑했다.

 

유년 시절 지긋지긋했던 가난에 대한 안 좋은 생각들을 모두 지워 버리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작가로 새출발을 하려는 루시 바턴에게는 그 일화들도 어쩌면 이렇게 소설에 담을 수 있는 좋은 글감들이 아니었을까. 뉴욕의 첼시에서 우연히 만난 세라 페인과의 인연은 글쓰기 워크샵으로까지 이어지고,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라는 그리고 독자들이 저자의 약점을 파악하기 전에 담대하고 결연하게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작가로서도 충고도 빠지지 않는다.

 

투펠로 출신의 엘비스 프레슬리를 루시의 어머니가 사랑했다면, 루시는 자신의 이웃에 사는 예술가 제러미를, 병원에서 자신을 담당했던 과묵한 의사를 사랑했다. 신의 형벌이라던 AIDS가 만연하던 1980년대 중반에 대한 기술도 눈길을 끈다. 그리고 보니 루시의 오빠도 게이가 아니었던가. 대학 교육을 받은 루시는 고향을 탈출해서 뉴욕에 거주하는 성공한 작가가 되었지만, 언니 비키와 오빠는 그러지 못했다. 어엿한 도시인이 되었지만, 도시 생활 초기만 하더라도 루시는 도시인의 시골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녀도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엄마의 예언대로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기면서 주변의 관조하게 되고, 그런 민감한 감정들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가난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예술 문화에 대한 상식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는 루시의 고백에서 외로움과 슬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가가 200쪽 남짓한 짧은 이야기 속에 시대를 관통하는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찬란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행운의 번호 추첨으로 베트남전에 가지 않은 오빠 이야기로부터, 엄마가 전해준 고향에 사는 이들에 대한 최신 정보들, 병원과 주변에서 접하게 된 AIDS라는 무서운 질병에 대한 단상들, 대학교육을 통한 일련의 성공과 신분 상승,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 자녀양육과 위기에 빠진 결혼생활 등 대가의 면모가 보이지 않는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동안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썼다면 이제는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듯한 인상을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통해 받았다.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싶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에밀리 블런트가 루시 바턴 역을 멋드러지게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지금까지 모두 6편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국내에 소개된 책은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 세 번째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세 권이 더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올해 나왔다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가 신작의 조속한 국내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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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0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0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9-22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처럼 영화화하기 딱 좋은데 아직 안 만들어진 게 더 이상합니다-.-?

레삭매냐 2017-09-22 09:55   좋아요 1 | URL
아마 한창 시나리오 작업 중에 있지 않을까요?
<올리브 키터리지>는 텔리비전 드라마로 만들
어졌는데, 루시 바턴은 영화화되었으면 하네요.
 
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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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폭탄, ICBM, SLBM 같은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한반도 상공을 날아다니는 가상의 무대를 상정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어제 독서 모임에서 만난 미국 친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공포를 안고 50년도 살았다고 대답했지만, 되돌아온 그의 대답은 북한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자기네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 때문에 무섭다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독서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의 역사사회학자 이반 자블론카가 쓴 <레티시아>를 읽었다. 서두에 말한 폭력이 국가를 상대로 한 거시적 차원의 접근이라고 한다면, 이반 자블론카의 르포르타주 <레티시아>2011118~19일에 벌어진 레티시아 페레라는 개인에게 벌어진 폭력적 비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전 프랑스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사건의 단면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구조적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이 완벽할 순 없겠지만, 저자의 이런 시도로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의 전개는 이렇다. 프랑스 낭트 근처 포르닉이라는 마을에 사는 이제 막 성인이 된 18세 소녀 레티시아 페레가 실종, 납치 그리고 살해되었다. 범인은 곧 잡혔는데 32세의 누범자 토니 멜롱이었다. 문제는 유력한 용의자인 토니 멜롱의 비협조로 시신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건의 담당건사 자비에 롱생을 필두로, 프랑스 전역에서 동원된 유능한 헌병대(우리와 달리 헌병대가 사건의 중심에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를 필두로 해서 과학수사팀이 나서서 납치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레티시아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21일 시신의 일부분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저자 이반 자블론카는 교차방식으로 사건의 전개와 등장인물들의 삶의 배경을 동시에 추적한다. 실비 라르셰와 프랑크 페레 사이에서 태어난 제시카와 레티시아는 아버지의 프랑크 페레의 부인 실비에 대한 폭력 문제로 불우한 유년 시절을 겪게 됐다. 아버지는 전과자가 되었고, 엄마 실비는 정신병원에 수용되게 된다. 어쩔 도리 없이 위탁가정에 맡겨진 제시카와 레티시아에게 행복이 드리워졌으면 좋겠지만, 그녀들의 아버지를 대신하게 된 질 파트롱 또한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였다.

 

위탁을 맡은 파트롱 씨는 소녀들에게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엄격하게 규칙을 준수할 것을 명령했다. 본색을 드러낸 악마는 손녀벌 되는 소녀들을 성추행했다. 저자는 19세기 이래 공화국 프랑스에서 시행되어온 불우한 가정 출신 청소년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 제도가 과연 그들을 가난과 불행에서 구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지 묻는다. 또 한편으론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혹은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엘리트 교육이 그들에게 제공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질문한다. 가난한 가정 출신 아이들에게 가난의 대물림이 되는 건 아닌지, 그들을 미래에 사회 하부 구조 노동을 담담할 그런 노동자로 재생산하는 게 아닌지에 대한 보이지 않는 계급제도에 대한 의문은 저자가 역사사회학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 타자는 가해자이자 어려서부터 각종 범죄를 섭렵해온 누범자 토니 멜롱이다. 그 역시 불우한 가정 출신으로 절도와 폭행으로 교정시설을 들락거리며 수년간 동네 악당으로서의 이미지를 착실하게 쌓아왔다.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추적하겠다는 저자의 결심대로 미디어에서 자극적으로 묘사한 대로 냉혈하고 악랄한 살인범으로 그리는 대신 중립적인 입장으로 그를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떻게 한 명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그런 악랄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지 저자가 전개해가는 기술을 도저히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리고 엄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범죄에 대한 가혹한 형벌과 교정 제도가 사회 도처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증가하는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이것 역시 돈 그러니까 정부 예산 집행의 문제겠지만, 낭트 지역 사법과 교도행정을 맡은 절대 인력의 부족으로 재판을 맡은 판사들과 보호감찰관들의 살인적인 업무과중으로 토니 멜롱 같은 누범자에 대한 감찰이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회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어쩌면 레티시아 같이 억울한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중요한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건 바로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다. 강경 보수주의자로 내무장관 출신 사르코지는 낭트 지역 사법관들에게 레티시아 사건의 책임을 돌렸다. 공화국 프랑스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관용과 화합 대신 증오와 분열의 씨앗을 국가지도자가 정치적 이유로 뿌린 것이다. 이제 전대미문의 파업으로 사법관들의 저항이 시작됐고, 레티시아 사건은 전국적인 이슈가 되기에 이르렀다.

 

레티시아 사건이 진행되던 와중에 질 파트롱의 파렴치한 범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성범죄자들을 가혹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가 알고 보니 불쌍한 소녀들을 오랜 시간 동안 착취해온 포식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들이 복잡하게 얽힌 간단치 않은 사건이기에 어쩌면 이반 자블론카가 오랜 시간을 들여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데 뛰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반 자블론카는 우리 지구별에서 18년이란 짧은 시간을 살다 간 레티시아에게 온갖 종류의 고난을 안겨 준 같은 성()의 남자로 실로 부끄럽다는 기록도 빠트리지 않는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혼자 세상을 날게 되었지만 불행한 사건으로 세상을 떠나게된 소녀의 삶을 애도하며 홀로 남아 열심히 살고 있는 쌍둥이 언니 제시카 페레를 응원한다는 저자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반 자블론카가 사건에 연루된 워낙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정보들을 다루다 보니, 몇몇 부분에서는 일반독자로서 흥미를 잃기도 했다. 하지만 르포르타주의 후반으로 가면서 저자가 세심하게 다룬 포르닉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의 재구성을 통해 감정이 마치 흡입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방대한 작업을 훌륭하게 마무리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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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 황금부엉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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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강서구에 자리 잡은 공진초 자리에 장애학우들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 건으로 자신과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장애친구를 둔 어머니가 무릎을 꿇는 장면을 보고 울컥한 적이 있다. 자기 자식이 다니지도 못할 학교 설립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은 어머니의 위대한 모습에 그만 숙연해졌다. 그 반대편에서는 자기네들의 소중한 아파트값이 떨어질까봐 쇼라고 하면서 무릎을 꿇는 기가 막힌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 찰리 고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앨저넌에게 꽃을>이 출간된 지 자그마치 58년이나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네 인식은 그 시절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 놀랄 따름이다.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은 어릴 적에 페닐케톤뇨증이라는 희귀병을 앓아 지적장애를 안고 살게 된 도너 사장님의 빵집에서 일하는 방년 32세의 청년 찰리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1960년 휴고어워드에서 최고의 SF소설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인체에 대한 임상실험에 대한 엄격한 도덕윤리가 적용되지 않던 시절, 찰리처럼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들에게 뇌수술과 약물치료를 해서 지능을 높이겠다는 매우 위험한 시도가 이루어진다. 유년 시절부터 지적장애아라는 이유 때문에 주변 친구들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엄마 로즈와 여동생 노마에게까지 차별과 업신여김을 받은 찰리에게 비크맨 대학교의 정신과 및 뇌과 전문의 니머 박사와 심리학 권위자 스트라우스 박사의 뇌수술 제안은 그야말로 어둠 속의 한줄기 빛 같은 소식이었다.

 

3월 3일부터 시작된 찰리가 직접 쓴 경과보고서를 따라 가다 보면 여러 가지 단상들의 부침을 경험할 수가 있다. 우선 처음 60페이지까지는 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찰리의 글쓰기에 눈이 다 피곤할 정도였다. 나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곤욕일지 모르겠지만 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워렌 주립보호소에서 찰리와 같은 친구들을 24시간 지켜봐야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맴돈다.

 

현대 첨단뇌과학의 도움으로 찰리의 지능시주슨 68에서 185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특별한 교육 없이 자력으로 사어를 포함한 20개 언어를 독학으로 깨우치고, 대학의 저명한 교수들과 토론을 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그런 실력을 갖추게 된 찰리는 차별과 놀림을 받는 지적장애인에서 천재가 되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민을 마주하게 됐다. 그전에는 장애 때문에 외로웠다면, 이제는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능력 때문에 역차별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남들보다 부족해도 차별을 하지만, 그 반대로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이들에게도 아낌없이 차별을 하는구나 싶었다.

 

어릴 적 엄마 로즈에게 받은 성적 억압 때문에 여성들과의 정상적 교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찰리는 비크맨 대학교에서 처음에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 주던 앨리스 키니언 선생님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뛰어 넘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자신과 비슷한 뇌수술을 받은 생쥐 앨저넌에게도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문제는 일정 이상의 지능을 갖게 된 후의 피실험자에 대한 결과가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예상대로 화려했던 비상을 뒤로 하고, 퇴행이 시작된다. 미로찾기 테스트에서 생쥐조차 이길 수 없었던 우리의 주인공 찰리는 도너 빵집에서 마음씨 착한 도너 사장님 몰래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동료에 대한 도덕적 갈등을 하게 되는 찰리.

 

 

찰리는 앨저넌처럼 자신도 같은 과정을 겪게 될 것라는 사실을 자신이 직접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앨저넌-고든 효과라는 걸출한 논문을 발표한다. 그야말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대니얼 키스의 SF적 상상력은 지적 발달이 인격의 수양과 연계되지 않을 수 있다는 가설을 통해 어쩌면 전세계 지적장애친구들에게 그들도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희망을 전파하려고 했던 걸까. 마음씨 착한 주인공 찰리는 천재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바보라고 놀림을 받던 시절 아무도 자신을 인격적으로 대해 주지 않았다는 점에 절규한다. 그런 점에서 리뷰의 소제목으로 단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됐다.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에서 또다른 흥미로운 점은 과연 어린 시절 구박덩어리였던 찰리 고든이 놀라운 변신을 한 후에 과연 고든 패밀리가 보이는 반응은 어떠할까였다. 대니얼 키스 작가는 브롱크스 이발사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가고, 여전히 쇠락한 고향에서 사는 엄마 로즈와 여동생 노마를 찾아가 대면한다. 분노조절 장애를 경험한 것 같은 찰리는 자신의 새로운 창조주를 자임하는 니머 박사와 대등하게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천재가 된 찰리는 지식의 전문가들이라고 떠들어대는 이들의 수준을 파악하고 냉소주의를 선보이기도 한다. 뭐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 그렇지.

 

작가가 되고싶었던 대니얼 키스는 자신을 약대에 보내려고 하는 아버지와 겪은 불화를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1945년부터 구상한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은 장장 15년 동안 무르익은 다음, 1959년에 비로소 단편으로 빛을 보게 되었고 1966년에 장편소설로 재탄생했다. 뇌수술로 지적장애를 치료하겠다는 당대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에,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고뇌라는 인문학적 사고를 멋지게 결합한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이 주는 감동은 앞으로 다가올 가을날 마주하게 될 국화꽃 향기처럼 그윽한 여운을 남겨주었다.

 

[뱀다리] <앨저넌에게 꽃을>은 2004년에 동서문화사에서 <빵가게 찰리의 행복하고도 슬픈 날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는데, 역시 최신판이 훨씬 더 세련되게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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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9-15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작권 무시하기로 악명 높은 동서문화사가 자랑할만한 에이스 중 하나가《앨저넌에게 꽃을》입니다. 동서문화사를 까는 사람들도 대체적으로 이 책을 좋게 봅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으니 인지도가 밀릴 수 있겠어요.

레삭매냐 2017-09-15 23:1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랬었군요...
아직도 그런 출판사가 있다니 놀랍네요.

이참에 새로 나왔으니 다행이네요.
그리고 보니 아까 예스24 중고서점에서
본 책도 동서문화사 책이었네요.
 
시를 읽는 오후 - 시인 최영미, 생의 길목에서 만난 마흔네 편의 시
최영미 지음 / 해냄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지난 주말 최영미 시인에 대한 기사 하나가 온라인을 강타했다. 아주 오래전 군대에 있으면서 시를 읽던 고참이 사온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고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었지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시를 읽진 않지만 베스트셀러 시집의 위용은 대단했다. 시를 잘 안 읽는 나도 읽어볼 정도면 말이지. 지난 주말 해프닝은 이제 막 최영미 시인의 <시를 읽는 오후>를 펼치려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예술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는 자본주의 3.0 시대 집 한 채 없는 시인의 비루함(물론 집 없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보다 많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으로부터 시작해서, 척박한 메세나 시스템의 부재 같은 우리네 실정 등등. 그래도 말미에 쓴 “아무 곳에서나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났다”는 건 너무 나간 느낌이다. 나중에 위트를 이해하지 못하냐고 눙치는 해명은 더더욱 그랬고. 암튼 작가가 자신의 글에서 언급한 도로시 파커가 책에 등장하기에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일단은 반가웠다.

 

역시 작가의 작품을 읽어봐야 그가 어떤 사유를 하면서 사는지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무엇이든 원서로 읽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만, 에코마냥 언어능력이 특출하지 못하다 보니 번역서를 주고 보게 된다. 소설도 그렇지만, 시는 정말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정말 느낌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가가 시인이다 보니 가능한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글을 통해 시에도 논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여전히 시에 문외한이다 보니 리듬 따위는 파악하지도 못하겠다. 영어 원문도 고어까지 섞여 있다 보니 쉽다는 예이츠 시의 원문도 건성으로 보게 된다.

 

블랙리스트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문화계, 문단에 대한 준엄한 비판도 눈길을 끈다. 대중의 기호에 맞는 시를 발표했다면 지금처럼 집도 없이 서울에 가서 살까, 월세가 서울보다는 상대적으로 싼 고양에 가서 살까하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누구라도 문화예술을 한다는 게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예술을 하면서 궁핍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나도 내가 좋아서 밥벌이의 비루함을 이겨내면서 사무실에 앉아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모름지기 삶에는 그에 맞게 견디어야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밥 딜런이 반해서 자신의 예명을 바꿨다는 딜런 토머스에 대한 글을 읽다가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에 온전한 번역이 가능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어디까지나 소비하는 독자의 온전한 몫으로 남아 있으리라. 이제 다시 노벨문학상 예측의 시절이 성큼 다가왔고, 작년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밥 딜런의 노래를 탁월하게 현재에 비유한 글을 참 멋졌다. 다만 밥 딜런의 가사에 나오는 대로 “시대가 변하고 있”는데 1920년대 뉴욕의 호텔에서 살다가 영면했다는 도로시 파커의 케이스로 변명하는 작가는 그 시절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시를 읽는 오후>를 다 읽고 난 후의 소감은 호(好)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나같이 시에 대한 문외한들에게 주로 영시(英詩)들로 구성된 44편의 주옥같은 시들에 대한 소개는 과분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번 스캔들로 부정적인 시선도 조금은 씻겨 나갔다고 해야 할까. 그중에서 그리스 시인 사포나 페르시아 시인 그리고 벵갈 출신 타고르의 시들은 어땠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영어로 번역된 작품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다. 작년부터 서울신문에 연재된 시들을 고루 엮어서 만들었다는 기사도 찾아 읽었다. 원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호 헤밍웨이의 시 대신 찰스 부카우스키의 시를 사용하려고 했으나 저작권 이슈로 아쉽게도 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는 무엇이었을까? 나에게는 괴짜 소설가로만 인식되어 있는 부카우스키가 또 시도 썼었지 참. 사실 술고래 난봉꾼에 가까운 소설가의 시는 궁금하지 않지만.

 


<3월의 바람과 4월의 비>를 아베 리만이 흥겹게 부른 노래는 유튜브로 직접 찾아서 들어 보기도 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압운을 이용한 두운, 요운 그리고 각운이 주는 리듬감에 대해 감을 잡은 것도 개인적 소득이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읽는 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느 인터뷰에서 시인은 이 책을 살인적인 교육 시스템 속에서 허덕이는 청소년들에게 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네들이 시인이 원하는 대로 시를 감상할 여유가 있을 지 난 궁금하다. 예전에 하바드 스퀘어에서 들렀던 레스토랑 <파이어 앤 아이스(Fire + Ice)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서 따온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가게 이름을 시에서 인용해서 명명하는 레스토랑 주인장의 풍류가 멋지다. 역시나 아는 만큼 보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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