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대만 출신 작가 핑루의 사회파 소설 <검은 강>을 읽었다. 한중수교 이래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가 된 대만 작가의 글은 싼마오 이래 처음으로 읽어본 것 같다. 싼마오의 책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들이라면, 핑루 작가의 글은 언론인 출신답게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들에 천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화한 <검은 강>은 그래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 옆의 신베이 시에 있는 단수이허에서 두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노년의 사업가 훙보와 중년 여교수 훙타이 부부가 피해자였다. 범인은 이내 검거됐다. 훙보가 자주 들러던 인근 커피점의 점장 자전이 피의자로 지목됐다. 핑루 작가는 일단 발생한 사건의 전후과정을 파헤치는 전형적인 미디어 스타일의 글쓰기를 도모한다. 화끈하고 자극적인 사건을 하이에나처럼 쫓는 언론에서는 자전을 사갈녀(蛇蝎女: 뱀과 전갈처럼 남에게 해를 가하는 여자를 비유한 표현)라는 레테르를 붙이고 그녀의 외모까지 범죄형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추론을 이어간다.

 

핑루 작가는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법정에서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 언론에서 떠돌아 다니는 이야기, 추리소설클럽 회원의 날카로운 지적, 변호인의 피고인에 대한 애증의 관계에 이르는 다양한 감정선을 추가한다. 중국에서 온 단체관광객들이 사건현장을 일부러 찾는다는 장면에서는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타인의 고통과 비극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구경거리가 되어 버리는 초현실적인 상황에 기가 막혔다. 그리고 법원 판결문이 모호하다는 지적도 눈여겨 볼만하다. 현재 우리도 사법개혁을 부르짖으며 그동안 누적된 적폐 청산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모두를 만족시키는 판결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기존의 상례에 비추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판결을 기대하는 것이 과연 무리일까.

 

한편, 언론에서 악랄한 범죄인으로 묘사된 자전은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딸이었다. 문제는 가난이었다. 빚더미에 오른 아버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어머니는 노점상과 가정부 생활을 하면서 홀로 남은 딸 자전이 아버지를 욕보인다며 학대를 했다. 자전은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사랑에 굶주린 인생이었고, 주변에 누구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추후에 언급되지만, 자전이 훙보의 계략에 빠져 고민하고 있을 때 주변에 절친이 있어 고민을 상담할 수만 있었더라도 일이 이렇게까지 확대되진 않았을 거라는 작가의 분석이 이어진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사람 좋아 보이는 노신사 훙보는 정말 선의의 피해자였을까? 작가는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다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 어디까지나 자전의 진술만 맹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미 언론과 사건을 담당한 검찰에서는 이번 사건을 강도살인으로 규정하고 자전을 사갈녀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작가가 보여주는 훙보의 실제 모습은 추악하기 짝이 없었다. 딸 같은 처녀에게 접근해서 약을 먹이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장면에서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남자와 결혼을 감행한 훙타이는 또 어떤가. 해외유학파 출신으로 자존감이 센 교수 훙타이는 자신의 결혼 실패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혼기를 놓쳐 어쩔 수 없이 지인의 소개로 정체가 불분명한 노년의 남자와 결혼 자체는 되돌릴 수 없는 그런 선택이었다. 아니 어느 순간에는 충분히 되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훙타이의 자존감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는 것을 부정했다. 자전이 그녀를 찾아와, 훙보의 불륜 사실을 알렸을 때 그를 감쌀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결별을 선언했다면 현재의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훙보는 무일푼이고 아내 몰래 그녀의 계좌에서 돈을 훔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허영으로 가득찬 훙타이는 노년을 함께 할 사람이라고 믿었다. 가령취에, 대머리에서 나는 냄새를 못이겨 하면서도 어느 순간 상대방을 포기해 버린 아내의 심경에 대한 기술 부분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진술이 죽어가는 순간의 훙타이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설정도 놀랍다.

 

훙타이의 선배는 그녀가 브랜드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결혼식날 입었던 그녀가 존경해 마지않는 베라 왕 드레스, 훙보가 죽으면 입어야 한다고 말했던 비비언웨스트의 상복 그리고 결혼 첫날밤을 위해 준비한 많은 란제리 등등. 역설적으로 훙타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자전이 꿈꾸던 것이었다. 카페도 아닌 커피점에서 만난 대학원생 셴밍과 새로운 출발을 꿈꿨지만 교활한 훙보는 결혼해서도 자신과의 만남을 이어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니 자전의 선택지는 하나 밖에 없었다. 훙보를 영원히 자신의 삶에서 지워 버리는 것. 사실 훙보가 아내 훙타이의 살해를 계획했다는 것은 재판과정에서 자전의 진술을 통해 드러났다. 문제는 그것을 증명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 않은가.

 

핑루 작가는 <검은 강>에서 피상적인 사건의 전개보다 그 내면에 깔린 진실의 추적에 방점을 찍는다. 자전 자신에게 악행을 저지른 훙보야 그렇다치더라도, 훙타이는 무슨 죄란 말인가. 물론 그저 부수적 피해라고 치부하기에는 자전이 지은 죄는 크다. 다만 작가가 지적한 대로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 결과 사랑에 대해 왜곡된 관념을 가지게 된 것이 자전의 잘못인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생각해 보게 해주었다. 주변에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의논할 상대가 있었다면 이런 끔찍한 파국은 최소한 피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다른 한 축에서는 사건을 자극적으로 몰고 가는 매스미디어의 부정적 영향력에 대해서도 핑루 작가는 언론인답게 매서운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진실을 알리되,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언론의 순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공영방송 불능시대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핑루 작가의 <검은 강>은 그런 점에서 대단했다. 핑루 작가는 30여년 동안 많은 작품을 발표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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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다니 라페리에르 지음, 박명숙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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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 내가 아이티 출신 작가의 책을 다 읽게 될 줄이야. 뉴욕 시의 택시업계를 주름잡는 아이티 출신 운전사들 말고는 나와 딱히 인연이 없을 줄 알았던 뒤발리에의 후손들 중에도 특출난 재능의 소설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리 쬐리는 뜨거운 남국의 태양 아래 넘실거리는 욕망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던 고수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다니 라페리에르였다. 알라딘에 유일하게 리뷰를 남긴 Falstaff님의 리뷰를 보고 이 소설의 존재를 알게 됐고, 절판되었다는 소식에 바로 인근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업어온 책이 바로 <남쪽으로>다. 아니 이렇게 재밌을 수가!!! 왜 이제야 이 책을 되었단 말인가. 그전에 읽고 있던 배명훈 작가의 신간 <고고심령학자>를 내팽겨쳐 버리고 바로 달려들었다. 다시 돌아온 무더운 밤에 도저히 마지막 장까지 넘기지 않고서는 배길 자신이 없더라. 아, 참고로 중고책 컨디션은 최고였다. 책등까지 빳빳한 것으로 보아, 아무도 읽지 않은 새책이나 다름 없는 중고였다. 이런 책이 절판이 되었다니 아쉬울 따름이로다.

 

소설의 어디선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권력, 돈 그리고 섹스라고 등장인물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물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화무쌍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너무 도식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들지만, 작가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 딱히 반박할 생각은 없다. 우리에게는 수년 전 강타했던 지진으로 수십만명이 죽어나간 카리브 해의 소국 아이티는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매력을 지닌 섬이다. 이스파뇰라 섬을 동쪽의 이웃, 우리에게는 야구 잘하는 나라 도미니카 공화국과 나눠 가지고 있다. 대부분 스페인 식민지였던 카리브 해 인접국가들과 달리 아이티는 프랑스 문화권에 속해 있다. 물론 피부색은 검은색. 세계최초의 흑인 공화국이자 미주 대륙에서는 미국 다음으로 식민모국에서 독립을 쟁취한 나라라고 알려져 있다.

 

각설하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는 다니 라페리에르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프랑스 식민지로 다시 미국의 침공을 받고 파파 독과 베이비 독 밑에서 30년간에 걸친 악명 높은 독재에 시달린 조국 아이티가 가진 관능을 소설 속에 가득 담아냈다. 까맣고 탱탱한 피부의 소유자들인 17세 꼬마 팡팡과 찰리 등등은 자신들이 가진 매력 아니 마성에 가까운 능력(?)으로 주변의 여성들을 호리는데 출중한 실력을 발휘한다. 더 노골적인 표현을 쓰고 싶으나, 19금 리뷰로 찍힐 까봐 살짝 이 정도로만 맛보기를 하자.

 

재봉사로 일하는 어머니의 고용주이자 자신의 여동생 마리즈가 다니는 부르주아 학교의 교장 프랑수아즈 생피에르 여사를 호린 17세 소년 팡팡.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남녀의 조합이 이색적인 과일이 넘쳐 나고, 뜨겁게 불타는 검은 태양 아래 딸 수 없는 금단의 열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본능에 충실한 인간군상들이 넘쳐난다. 뉴욕 출신으로 고상한 문화취향을 자랑하는 미국 영사 부인 크리스티나는 도덕군자 같은 딸 준 갤러웨이가 너무 걱정이다. 우디 앨런과 필립 로스 같은 유대계 미국인들이 발표하는 작품들을 사랑하는 크리스티나의 걱정은 어느 날 밤 무참하게 박살난다. 공부 밖에 모를 거라고 생각해 왔던 얌전한 딸 준이 하인 압살롬과 뒤엉켜 있는 장면을 목격한 크리스티나의 심정이란.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얌전한 여자애들도 할 건 다 한다’라는 표제가 전광석화처럼 이해됐다.

 

주드 미셸 혹은 도도란 이름의 음악 신동을 후원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만의 하렘을 꾸미고자 하는 노욕의 소유자로부터 시작해서, 남편과 아이 셋을 거느린 휴가여행에서 인생의 남자를 만나 아이티에 남게 된 런던 출신 여성 이야기는 도시전설에 버금가는 위력을 발휘한다. 전설은 새로운 전설을 낳는 법, 선진국 출신으로 무엇 하나 풍족한 것이 없이 살던 여성이 아이티에 쌀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고자 남았다고 했던가. 하긴 베르니사주에 참석했던 파리에서 날아온 좌파 출신 저널리스트가 부두교의 신 레그바와 부지불식 간에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은 또 어떤가. 모든 것을 다 기묘한 일이라고 치부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적마다 실패하게 되는 건 저주 탓만은 아닐 것이라는 추정에 도달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아이티의 멋진 해변가 땅에 호텔을 지은 몰레옹 아저씨는 경영난에 시달리던 중에 기발한 아이디어로 기사회생의 찬스를 잡기도 한다. 모든 것이 부족한 아이티에 넘쳐 나는 자원인 미소년을 이용한 비즈니스 말이다. 불나방처럼 사랑에 굶주여 그들에게 달려드는 ‘북쪽’에서 온 여성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게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텔 업주의 마음이겠지만.

 

나는 문득 소설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름지기 다른 곳에서라면 몰라도 아이티에서는 잠시 이성적 판단을 멈추어도 좋겠구나라고 말이다. 준 갤러웨이의 아버지 해리처럼 노골적으로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는 팡팡이나 찰리 같은 녀석들과 뒷거래로 자신이 원하는 아이티 아가씨들을 모아 주면, 미국 비자를 내주겠다는 파렴치한 제안도 마다하지 않는다. 유력한 대사의 조카딸로 기세등등하게 등장해서 찰리의 부모님들을 잔소리로 피곤하게 만들었던 도도하고 콧대 높은 미시 아벨을 찰리가 고전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은 흥미진진했다. 찰리와 아벨이 화장실에서 나누는 격렬한 정사 장면을 읽는 순간에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건만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생각만 해도 끈적거리는 습기와 열기 탓으로 돌리기에는 평소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의 현실화라고 해야 할까. 인간이란 존재는 금기 혹은 금단의 열매가 주는 유혹을 이길 수 없다는 작가의 확신에 찬 계시일까. 일상이 아닌 새로운 환경이 부여한 낯섬이 주는 파격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는 걸까. 그동안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던 이들이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인식의 전환의 순간, 그 누구도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가치관의 극적 유턴이라고 해야 할까. 남편이고 자식, 알량한 재산 따윌랑은 내 알 바 아니다라는 선언이 이어진다. 그런 선택을 한 이들을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왜 이제 <남쪽으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지 후회가 다 될 정도로 재밌는 책이었다. 바로 다니 라페리에르의 다른 책들도 혹시 국내에 출간이 되었나 수배해 봤다. 이 책에 앞서 두 권의 라페리에르 책들이 출간되었지만 역시나 절판됐다. <슬픔이 춤춘다>는 구할 수가 있었지만 관능과 에로티시즘 그리고 기묘한 열락의 세계가 넘실거리는 <남쪽으로>와는 결을 달리 하는 것 같아서 일단 패스했다. 뜨거웠던 여름날의 폭염이 가시는 무렵에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나 너무 즐거운 독서의 시간이었다. 2017년 내가 읽은 베스트 탑 10에 올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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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25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의 한 장을 영화화 한 로랑 캉테 감독의 <남쪽을 향하여>도 재미있습니다. 전 영화만 봤는데 책도 궁금해지는군요.

레삭매냐 2017-08-25 16:1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 영화가
있었네요. 한 번 보고 싶습니다 :>

책은 엄청 재밌었는데 영화는 또 어떨지
궁금하네요.

전체 책이 아니라 한 부분만 영화한 모양
이네요.

transient-guest 2017-08-29 0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적절한 줄거리 정리와 함께 감상까지 정말 잘 정리하신 리뷰..ㅎ 저는 줄거리 정리가 너무 어렵더라구요.

레삭매냐 2017-08-29 09:34   좋아요 1 | URL
감상이나 분석을 더 넣어야 하는데
줄거리 정리만으로도 버겁습니다 :>

AgalmA 2017-09-04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은 절판된 책들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참 잘 업어오신단 말이죠ㅎ 능력자!

레삭매냐 2017-09-04 17:16   좋아요 1 | URL
<남쪽으로> 같은 경우에는 절판됐지만
중고서점에 많더라구요...

왠지 절판 품절책에 더 애정이 가더라구요.
신간도 바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없다면
묵혔다가 중고서점에서 이용하게 되더라구요.

AgalmA 2017-09-04 17:19   좋아요 0 | URL
굿즈 탐욕 때문에 저도 신간을 눈물 머금고 사는데ㅎ; 지금 당장 읽지 않음 못 살겠어! 아님 좀 기다렸다 중고로 나오는 거 사는 게 낫죠^^ 중고라도 깨끗한 책이 많으니까요. 집에 읽을 책이 없는 거도 아니고ㅎㅎ;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이다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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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전에는 장기 여행을 홀로 갔었다. 그런 여행을 하다 보니 내 뜻대로 모든 일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40일짜리 첫 번째 호주과 홍콩 해외여행에서 절절하게 경험했다. 그 다음부터는 일정에 연연하지 않는 그런 초연한 여행자가 됐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는 아예 스케줄도 잡지 않고, 구름 가는 대로 발 가는 대로 가는 구도의 길에 올랐다. 내게는 떠나는 것이 중요했지, 어디에 가서 무얼 보고 먹고 자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다혜 씨의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는 나의 그런 숨겨둔 여행본색을 펌프질하는 책이었다.

 

그동안 내가 낭만의 정점은 며칠씩 걸리는 긴 버스여행 중 어느 휴게소에서 산 프렌치프라이를 먹으며(아마 맥주도 함께였겠지) 해지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참으로 영화 <베티 블루>의 어느 장면같구나 싶었다. 어쩌면 그 때 쓴 일기를 뒤져 보면, 아니면 그 때 모아둔 영수증을 찾아 보면 어디쯤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당시 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여행 중에 읽겠다고 문고본 책을 소중하게 들고 다녔다. 물론 여행 중에 다 읽지 못했다. 너무 재밌는 일들이 많아서라고 말하고 싶다.

 

그나저나 된장 맞을, 왠 놈의 책 이야기가 여행에세이에 이렇게 많은 걸까. 책 구매를 자극하는 솜씨가 북칼럼니스트답다. 에세이집에 등장하는 책들을 검색해 보느라 책읽는 속도가 거북이 걸음이다. 순간, 여행에세이를 빙자한 책 소개 에세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스물스물 피어오를 정도다. 최근에 나왔다는 하야시 후미코의 <삼등여행기> 그리고 <방랑기>가 궁금해졌다. 이 정도라면 선수로군.

 

나도 여행 좀 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다혜 작가에겐 당하지 못할 듯 싶다. 게다가 나이가 드니 예전에 하던 식의 자유여행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에 철들고 나서 처음 해본 패키지 여행은 몸은 편안할지 몰라도 심적으로는 영 마땅치 않았다. 왠 놈의 라텍스 가게와 선물샵에 그렇게 가는지. 결국 나도 라텍스 베개를 하나 사고야 말았다. 안사면 왠지 눈치가 보여서? 모르겠다. 지금도 베개는 잘 쓰고 있다. 자유여행과 현지 패키지를 겸한 여행이 최고의 조합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현지어, 작가처럼 일본어까지 능통할 순 없어도 국제공용어라는 영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어야 그나마도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책을 바리바리 싸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해외여행에 나서게 되면 자투리로 멍 때리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게 되니 그 때 책을 펼치면 아주 유용하겠지 싶지만, 동행이라도 있다면 그와 같이 이야기를 해야 하니 책 보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작가 양반은 홀로 하는 여행을 즐긴다는 것일까?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원래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는 현지 음식 맛보기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길 바쁜 여행자에게 현지 맛집을 찾아가는 건 곤욕스러운 일일 따름이었다. 지금은 모바일이 워낙에 발달해서 즉석에서 바로 바로 찾아갈 수 있지만 나의 마지막 장거리 여행이었던 비엔나 여행길에서는 민박집 주인장에게 뫄뫄해서 슈니첼 맛집을 찾아간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수십년 동안 허름한 슈니첼 하우스에서 비엔나 돈까스를 튀겨온 오스트리아 아줌마의 손님 접대는 융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원한 맥주까지 한 잔 곁들이니 사방을 돌아다니느라 고달팠던 심신의 피로가 쫙 풀리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함께 했던 이들도 모두 만족했던 것 같다.

 

로마에서 만난 어느 건축을 공부하던 커플은 하루에 쓸 비용을 50유로로 정하고 두달에 걸친 유럽 일주를 하고 있었다. 아침과 저녁을 제공하던 숙박비 20유로를 빼고 나면 30유로로 버텨야 한다는 건데, 곳곳에서 물어야 하는 박물관 입장료나 교통비, 점심값 그리고 저녁에 즐기는 맥줏값 등등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장거리 여행에서는 숙박비 부담이 많기 때문에 주로 한인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했는데, 니스에서는 이도저도 귀찮아서 그냥 하룻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알려 주는 나름 저렴한 호텔을 이용했던 것 같다. 돈이 없어서 적은 비용으로 하는 여행이나,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현지 맛집을 섭렵하고 좋은 호텔에서 지내는 여행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지어다라고 쿨하게 정의하는 작가의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제각각 여행에 나서는 목적과 이유가 다른 만큼, 여행의 방식에 대해서도 어떤게 옳고 그르다는 없지 않을까 싶다.

 

현지 빈대붙기에 대해서도 경험이 있다. 첫 번째 유럽여행에서 로마에서는 신부로 유학 중이던 사촌형이 살던 이탈리아 수도원에 가서 점심을 얻어먹기도 했다. 주방에서 일하시던 아주머니는 내 턱을 부여잡고, 신부 사촌형과 턱이 닮았다며 애정을 과시해 주시기도 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그날 저녁에 사촌형에게 공짜 맥주를 실컷 얻어 마셔서 참 좋았다. 그 다음에는 밀라노에서 성악 유학 중이던 사촌 동생네 집에 가서 밀린 빨래도 하고 덕분에 스위스 루가노 호수 구경도 했다. 녀석의 음식 솜씨가 좋았는지 처음 알았다. 그 때 잠시 들린 스위스 아웃렛에서 사촌 제수에게 뭐라도 좀 사주었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도 그 땐 돈이 없어서. 물론 나도 지인에게 부탁받은 이를 거둔 적도 있다. 어학연수 시절 알던 지인의 남자 후배가 내가 살던 도시에 들렀는데, 이성이라 같이 자기가 그래서 나한테 부탁을 했다. 일면식도 없는 타인을 나는 흔쾌히 거둬줬다. 뭐 그런 게 인지상정 아닌가.

 

언제나처럼 한 권의 여행 에세이를 다 읽고 나니 나도 그냥 떠나고 싶어져 버렸다. 목적지도 없이 여권과 비행기표 그리고 어느 정도의 돈만 있으면 어디라도 갈 자신이 있다. 여행을 하다 보니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손짓발짓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첫 장거리여행을 홀로 해서 그런지 간이 많이 부었나 보다. 물론 여행하면서 기차를 놓쳐 경찰서 앞에서 노숙도 하고 그런 고생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나의 여행들은 좋았다. 그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과의 인연도 좋았고. 예전에는 돈이 없고 시간만 많아서 고민이었는데 이젠 둘 다 없어져 버렸다. 지금으로선 어느 리조트에 가서 하염 없이 책이나 읽으면서 멍이나 때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 책은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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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23 1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돈이 없고 시간만 많아서 고민이었는데 이젠 둘 다 없어져 버렸다.‘ 이 구절 반전입니다. ㅋㅋㅋ 지금은 ‘돈은 있고 시간이 없어서‘가 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돈도 시간도 없습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죠. ㅎㅎ

레삭매냐 2017-08-23 14:09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맞고요...

원래 말쌈 대로 돈은 있고, 시간은 없다라고
쓰려고 했으나 생각해 보니 둘 다 없더군요.
그래서 솔직하게 썼답니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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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 리플리 후에 데이비드 켈시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리플리 시리즈로 유명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이토록 달콤한 고통>을 읽었다. 아마 하이스미스는 리플리가 가진 두 개의 자아, 진짜 나와 내가 되고 싶어하는 자아라는 익명성을 가진 나에 대한 문학적 탐구를 이 작품 <이토록 달콤한 고통>에서 변주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초반에는 몰입이 좀 쉽지 않았지만, 주인공 데이비드 켈시의 악마성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중후반으로 갈수록 소설의 속도감은 더해져 갔다. 말미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다.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은 1950년대 후반, 미국 뉴욕 주의 가상의 공간 프로스버그다. 능력있고 호감 가는 우리의 주인공 데이비드 켈시 씨는 체스윅 섬유공장의 화학 관련 학위를 세 개나 가진 수석 엔지니어다. 하숙집에 살면서 주말마다 차를 몰고는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을 찾는 아주 바람직한 청년이다. 서부 캘리포니아 라호이아 출신의 켈시 씨는 또래의 청년들처럼 술을 퍼마시고, 여자들과 어울려 허랑방탕한 삶을 보내는 대신 여가 시간에는 책을 즐겨 읽는다. 자, 여기서 독자는 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반전과 조우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데이비드의 어머니가 14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데이비드는 주말마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걸 알려면 데이비드의 연애사를 독자는 파악해야 한다. 그는 2년 전에 만난 애나벨을 사랑한 나머지, 발라드라는 곳에 아무도 몰래 윌리엄 뉴마이스터라는 가명으로 모기지로 집을 샀다. 정성을 들여 애나벨과의 공간을 준비한 것이다. 자, 이제 두 번째 반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시라. 그 애나벨은 다른 남자 하트퍼드에 사는 제럴드 딜러니와 결혼했다. 소설의 제목에서 가르키는 달콤한 고통은 바로 데이비드의 애나벨에 대한 열렬한 짝사랑의 고통이다. 이 지점에서 데이비드가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면 좋으련만 그는 애나벨에게 수시로 편지를 하고, 전화를 해서 현재의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끝내고 자신과 새출발하자고 이루어질 수 없는 제안을 한다.

 

문제는 애나벨은 데이비드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두 남녀의 접점은 이루어질 수 없다. 게다가 데이비드 주변에는 그를 열렬하게 사랑해 마지않는 에피 브레넌이라는 젊은 아가씨가 있다. 데이비드를 사모한 나머지 그의 초상화까지 그리는 에피, 알다시피 이 초상화가 나중에 한 몫 단단히 할 것이다. 위성처럼 자신의 주변을 빙빙 돌며 자존심을 무릅쓰고 구애하지만, 애나벨과의 상상의 사랑에 빠진 데이비드에게 그녀의 존재는 그저 유령일 따름이다.

 

짝사랑 정도라면 누구에게 해가 될까 싶었지만, 상대방에 대한 편집증적 사랑과 망상은 결국 파국을 잉태한다. 에피에게 물어 데이비드 켈시, 아니 윌리엄 뉴마이스터의 거처를 알아낸 애나벨의 무능력한 남편 제럴드 딜러니는 총을 들고 자기 아내 주변에서 얼쩡거리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 데이비드를 찾아나선다. 데이비드와 제럴드는 옥신각신하던 와중에 불의의 사고로 그만 제럴드가 죽고 만다. 자신의 진짜 이름 대신 윌리엄 뉴마이스터라는 가명으로 경찰에 출두한 데이비드는 자신을 감추고, 뉴마이스터의 정당방위였다고 경찰에게 진술한다. 그렇게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한 자아의 이중성은 이어질 더 큰 비극의 전주곡이다.

 

책을 읽는 동안, 데이비드 켈시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켈시의 애나벨에 대한 감정은 지극히 일방적이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 데이비드 켈시는 애나벨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녀가 무슨 색깔을 좋아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그저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극대화시키고 자신의 사랑을 애나벨에게 강요할 따름이다. 그러니 남편을 잃은 애나벨이 데이비드에게 갈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은 장애물이 사라졌으니 애나벨과 결혼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결정적 오산이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애나벨과 결혼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이비드 켈시는 애나벨의 주변에서 그녀를 마크하기 보다 돈을 벌기 위해 동부에 위치한 체스윅 섬유공장을 선택했다. 사실 그전에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고백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애나벨은 다른 남자와 만나 신속하게 결혼했다. 잘못된 결정이 만들어낸 후과를 뒤집기에 데이비드는 너무나 부족한 남자였다. 시간에 쫓기는 내린 결정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었고, 에피 브레넌이나 자신의 작은 아버지의 충고는 전혀 듣지 않았다. 이미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한 남자의 연이은 악수(惡手)에 한숨만 나왔다.

 

거짓말로 주변의 호감을 산 데이비드 켈시 씨의 위선이 밝혀지자, 호의적 감정들은 바로 인출된다. 그나마 에피 브레넌만이 그의 편을 들지만, 그녀 역시 비극적 희생양이 되고 만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데이비드에게 매달리는 에피 브레넌이나 애나벨 넌 꼭 나랑 결혼해야 돼라고 주장하는 데이비드 켈시 씨가 보여주는 일방적 감정의 표출은 동일했다.

 

1950년대라는 점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데이비드 켈시와 윌리엄 뉴마이스터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허둥대는 경찰 대처에 대한 묘사는 좀 아쉬웠다.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대출을 받고 집을 사는 게 그 정도로 쉽단 말인가. 아마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겠지만, 반세기도 전의 일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애나벨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데이비드의 감정을 거절했더라면 파국적 결말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어차피 그래봐야 소설에 대한 내용이겠지만 말이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 발생한다면 아마 대응하기가 쉽지 않겠지. 재밌게 읽었고, 그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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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무게
에리 데 루카 지음, 윤병언 옮김 / 문예중앙 / 2012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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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에리 데 루카의 <나비의 무게>란 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내 기억의 창고 속에 책 제목을 넣어 두었다. 그러다가 지난주에 중고서점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급한 불을 어느 정도 끄고 나서 엊저녁부터 읽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내 감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책이구나라는 것이었다. 고대 히브리 어를 연구하는 성서학자이자 등반가이기도 하다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 에리 데 루카는 이탈리아의 국민 작가라고 하는데 의외로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런 작가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새로운 작가와의 만남, 언제나 대환영이다.

 

위대한 산양 왕과 그를 추격하는 사냥꾼, 스스로는 비루한 산짐승도둑이라고 부르는 사냥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연년에 읽은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이 떠올랐다. 호랑이와 인간의 대결이 <위대한 왕>의 내용이라면, 산양의 뿔과 등갈기 가죽을 탐하는 인간 사냥꾼에게 어미와 수많은 자식들을 잃은 산양왕의 대결이 <나비의 무게>의 근간을 이룬다.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다룰 수 없는 세심한 부분들을 읽으면서 한 작가의 지극한 자연사랑이 이렇게 문학적 승화라는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냥꾼의 총에 어미를 잃고, 허공을 나는 독수리에게 누이를 잃은 산양왕은 때가 되매 무리의 왕에게 도전장을 내고 당당하게 결투를 통해 자신의 예리한 뿔로 상대방의 배를 가르고 승리를 쟁취해서 위대한 왕이 되었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과정을 통한 대자연의 섭리를 작가는 담담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20년 간 그렇게 무리의 위대한 왕으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묘기에 가까운 절벽타기를 선보이며, 자신의 뒤를 추격하던 사냥꾼을 농락해 왔던 산양 왕은 자신의 시간이 다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마치 만물이 변화하는 계절의 순환과 맞아 떨어지는 그런 오묘한 이치였던가. 아, 그전에 산양 왕은 자신의 누이를 잡아 갔던 배부른 독수리에게 한 차례 통쾌한 복수를 선보여 주기도 했다.

 

자연을 벗삼아 사는 산양 왕의 이야기가 <나비의 무게>의 한 트랙이라면, 그런 산양 왕에게 도전장을 들이민 사냥꾼의 이야기가 나머지 한 축이다. 예순의 나이에 가까운 밀렵전문가 사냥꾼은 자신을 붙잡기 위해 혈안이 단속반을 비웃으며 산골짜기를 산양 왕 못지않은 날랜 솜씨로 누비며 수백 마리의 산양을 총으로 사냥해 왔다. 자신의 사냥감인 산양에게 접급하기 위해 인간의 냄새를 감출 줄 아는 능력까지 겸비해서 자그마치 300마리에 가까운 산양들을 사냥했다. 소설에서 이 선수는 마치 인간의 탐욕을 빗댄 그런 캐릭터로 형상화되었는데, 수십년간의 산생활을 통해 산양 왕처럼 산에 적응된 인간으로 그려진다. 산양 왕과 사냥꾼 모두 언젠가는 시간에 굴복하게 된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라는 점을 작가는 냉철하게 지적한다. 자신에게 철두철미한 유신론을 신봉하는 성서학자다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어느 순간 독자는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처럼 <나비의 무게>의 두 주인공 역시 결말을 함께 공유하리라는 예상을 하게 된다. 그 둘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사건의 곳곳에 등장해서 산양 왕의 뿔 위에 사뿐히 앉거나 혹은 사냥꾼의 총구를 노니는 한 마리의 나비다. 종이처럼 가벼울 나비의 무게는 60여년에 가까운 한 남자의 삶을 그리고 위대한 리더로 20년 넘게 산양 무리를 이끌어 온 산양 왕의 육신을 창조주에게 재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냥꾼은 한 때 혁명가들과 함께 하기도 했다. 정의란 것이 사라진 시대에 밀렵이 무어 대수란 말인가. 받은 만큼 정직하게 돌려주는 자연과 달리 인간세계는 배신과 협잡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냥꾼의 배에 난 칼에 찔린 흉터가 그 증거이리라.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여성에게서도 마치 깊숙한 산속에서 산양을 대하듯이 그렇게 바투 선 긴장감을 표현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자신에 대한 기사를 쓰겠다고 나선 여성 기자와의 마지막 인터뷰는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사냥꾼이 겨울의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해 가을에 장작을 패면서 남겨둔 나무꼭대기의 이파리들은 산양 왕이 즐기던 별미가 아니었던가. 서로 적대적인 모습의 존재들이 어떤 의미에서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무한한 자연의 순환을 우리 미약한 인간이 어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최근 벌어진 살충제 계란 사태를 보면서, 자연과 인간이 조화로운 삶을 살 수는 없는 걸까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동물의 생존 공간인 자연을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볼 게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상대방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는 걸까하고 말이다. 조금 덜 소비하고, 조금 더 지불하고, 조금 더 기다릴 줄 아는 미덕을 갖춘 사회였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살충제 계란 사태는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다.

 

말미에 실린 <나무를 보다>에서는 에델바이스의 이탈리아 이름 알프스 별, 혹은 스텔라 알피나를 하나 배웠다.

 

자연소설 <나비의 무게>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 정도 내공을 담은 글을 쓰려면 얼마만큼의 자기수련 그리고 자연에 대한 사랑과 관찰이 필요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에리 데 루카 작가의 다른 책들을 한 번 읽어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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