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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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에 익숙한 세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가 되었고 그 뒤에는 사실 잘 모르겠다. 이제 젊은 세대들은 애도 낳지 않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정부는 인구절벽이 가까워져 온다며 호들갑을 떨며 엄청난 규모의 예산을 저출산 대책을 세운답시고 쏟아 부었지만, 출생인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중이다. 언제는 인구폭발 때문에 철저하게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며 난리를 칠 적은 언제고 지금은 ‘다둥이 출산이 애국이다’라며 출산을 장려하는 쪽으로 전환됐다. 그런다고 해서 저출산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는데, 정부는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보다 먼저 아이를 낳기 위한 최적의 환경이 마련되어 있는지 묻고 싶다. 살인적인 주거비, 점점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 천문학적 사교육비 그리고 어린이집과 유치원 보내기 같은 보육문제 등등. 살기 좋은 사회라면 애를 낳지 말라고 뜯어 말려도 애를 낳으려고 하지 않을까. 저출산 이슈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언제나처럼 사설이 길었다. <편의점 인간>(아직 읽지 못했다)으로 이름을 알린 일본 출신 작가 무라야 사야카의 <소멸세계>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에 대해 사유할 수가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 사카구치 아마네는 부모가 ‘교미’해서 태어난 별종인간이다. 미래 가상의 공간 일본에서는 전통적 가족 개념이 붕괴된지 오래다. 결혼해서 섹스하고,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쳐 아이가 태어난다는 전통은 이제 부부관계를 근친상간이라며 비하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은 죄다 인공수정을 통해 ‘생산’된다. 사랑과 성욕은 가족 바깥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모두 각각의 애인들을 가지고 있다. 어때 상상이 가는가?

 

이미 태생부터 인공수정이 아닌 교미를 통해 태어난 아마네는 첫 번째 결혼에서 실패하고 단체 미팅을 통해 두 번째 남편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물리적 관계라고 수 있는 섹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신인류와 달리 아마네는 만나는 애인들과 반드시 관계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예전 가족제도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아마네의 엄마는 그것을 아마네에 대한 저주라고 명명한다.

 

연인의 자살시도에 충격을 받은 남편 아마미야 사쿠와 역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인연으로 만나게 되어 육체관계까지 맺게 연인 미즈토와의 관계가 붕괴되면서 아마네와 사쿠 부부는 신인류에 대한 실험이 시행되고 있는 지바로 이주를 결심한다. 인공수정으로 ‘생산’된 아가들이 보편 인류의 모습이라는 실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남편 사쿠의 생각과는 달리, 아마네는 그렇게 태어난 아가들이 인공사육되는 애완동물들과 무엇이 다르냐며 경악한다. 자궁이 없는 남자도 아이를 낳을 수 있게 인공자궁을 매달고 무사히 출산에 성공한 사쿠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며 작가는 과연 우리 인류는 어떤 식으로 앞으로 진화하게 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 일부일처제의 가족 시스템은 현대 자본주의의 부산물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현재 노동을 제공하는 역할을 가장에게 맡기고, 미래의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한 일꾼인 아이들의 육아부담과 가사노동을 여성에게 지우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바로 지금의 결혼제도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자본이 자본을 낳는 무한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가장은 쉼 없이 돈벌이에 매진해야 하며,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다시 말해 재생산은 모두 개인에게 떠넘기는 작금의 결혼제도야말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주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구태의연한 결혼제도에 무라야 사야카 작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남녀 간의 사적 결합인 결혼제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기존 가족제도의 해체를 통해 도대체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이냐는 가치판단 기준을 허문다. 모든 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고통 없이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지고, 비슷한 시기에 출산해서 공동육아에 나서는 모습은 마치 붕어빵틀에서 붕어빵을 찍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물론 모든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 나아가 인류의 아이라고 생각하며 공동육아하는 장면은 조금 이해가 됐지만, 그런 반방식으로 몰개성한 아이들을 생산해내는 것은 두렵기까지 했다. 하긴 우리의 오랜 선조가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현재의 결혼제도를 보면 또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 소설 <소멸세계>에서 무라야 사야카 작가가 그리는 대로 우리 인류가 앞으로 진화하지 않는다는 그리고 남자가 애를 낳는 시대가 오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문득 소설의 어디선가 읽은 과연 ‘사랑이 고통이라는 발작의 공유’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아마네는 ‘바깥 세상’에 존재하는 라피스 같은 인간이 아닌 존재와도 사랑에 빠지곤 한다. 아마네는 인간을 포함한 40여명에 달하는 무생물 애인들을 파우치에 넣어 다니며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이 아닌 일방통행식 사랑 그리고 신도시 지바로 이사해서는 ‘클린 룸’에서 욕망을 해소하곤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마저 일회용이 되어 버리는 마당에 그 다음 단계에 이루어지는 결혼과 출산 같은 가치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난 여전히 다가올 미래가 디스토피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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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8-21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덕분에 <편의점 인간>까지 섭렵하며, 도대체 작가는 어떻게 이런 비타협적인 전복을 상상해낼까 신기했어요

레삭매냐 2017-08-22 08:56   좋아요 0 | URL
전 아직 <편의점인간> 읽어 보지 않았는데
이번 가을에 한 번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

어떤 전복이 또 담겨 있을지 궁금하네요.

2017-08-21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2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가 사는 집
정정화 지음 / 연암서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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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 그리고 소설도 우리는 너무 서울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 등장하는 일단의 공간들은 익숙하다. 인문서적을 중심으로 출판하는 연암서가에서 나온 소설집 <고양이가 사는 집>의 정정화 작가는 공간의 중심을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전한다. 그래서 언양이니 태화강, 희락공원, 작괘천 그리고 자수정동굴 같은 실존하는 지명들은 외국 소설을 읽는 것처럼 낯설기까지 하다. 내가 만약에 소설을 쓰게 된다면 관심을 지방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고양이가 사는 집>은 포인트 하나.

 

모두 10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고양이가 사는 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일상밀착형이다. 러시아 여행을 떠나 만난 사람 듬직해 보이는 가이드가 사실은 여행객의 돈을 훔친 범인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화자가 추궁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신산했던 삶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질 않나,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골인해서 아이를 낳고 작은 행복이나마 이어가고 싶어했던 주인공 엄마의 바람은 가장으로서 책임보다는 게임에 중독되어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은 이야기들의 모체는 이미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대중에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자극적 현실이 쉬르리얼리즘의 영역을 훨씬 뛰어 넘은 모양이다.

 

<불맛>에서는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둬준 은인 아저씨의 젊은 부인 수진을 은근히 사모하는 청년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묘목 납품 경쟁에서 자신보다 젊고 능력 있는 석규에게 진 아저씨는 엉뚱하게 수진에게 화풀이를 하고, 낫을 들고 석규의 묘목들이 심겨진 밭으로 가 화풀이를 한다. 그 장면에서는 경영을 잘못해서 기울어진 사업탓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정부 들어 교정에 들어간 갑질제거 작전의 대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정작 균열과 붕괴는 외부의 화마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모두가 아는 사실을 아저씨만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로 보인다 내게는.

 

흑색 토마토라고도 불리는 <쿠마토>는 도망간 엄마의 자리를 대신한 외국 출신 새엄마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중학생 딸이 기술한 이야기다. 쿠마토 농장으로 먹고 사는 아버지에게 잰 솜씨로 수분작업을 하고 익숙하지 않지만 한국음식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고, 한국어 배우기에도 열심인 새아내는 과분할 따름이다. 문제는 그놈의 의처증과 딸내미의 음모로 시작된 가정폭력의 수준이다. 폭력의 단초를 제공한 딸은 불길이 자신에게 닥치는 걸 원하지 않으면서도, 잘못된 것을 교정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불의가 만연했던 지난 9년의 세월 동안 당신을 도대체 무얼 했냐는 작가의 힐난처럼 다가왔다. 더 큰 비극이 발생하기 전에 새엄마의 새출발을 응원했고, 결말은 그렇게 됐다.

 

<뻥튀기 먹는 남자>도 재밌게 읽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춘복은 미꾸리와 메뚜기를 잡아 팔아다가 가족을 봉양하고, 동생들을 교육시켰다. 어린 나이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된 춘복은 어쩌다 보니 마흔을 훨씬 넘긴 노총각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외국 며느리라도 들이라고 성화인데, 그것이 매매혼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정식으로 결혼할 수도,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봐야 남 좋은 일 시키는 거라며 어머니의 지청구 따위는 잔소리일 뿐이다.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한 동생들이 우연히 만나 살림을 차린 수희보다 나은 게 무엇이란 말인가. 춘복의 속마음을 작가는 한 편의 르포처럼 추적한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중요한 법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이 안돼 할아버지의 가업인 뻥튀기 장수로 나선 성수는 저마다 튀기는 시간이 다른 곡류를 다루는 노하우를 몰라 태워 먹기가 일쑤다. 작가는 사카린을 넣어 튀기는 달달한 뻥튀기 만들기와 춘복이 원하는 사랑의 궤적을 투트랙으로 추적한다. 개인적으로 열 개의 소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두 편의 외국소설을 읽었는데, 나는 이렇게 정감이 넘치는 우리 소설을 읽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대로 씹지도 않은 채, 맛난 꿀떡을 삼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외식을 오래 하다 보면, 구수한 된장국이 먹고 싶어지는 그런 심정이려나.

 

희락공원의 건강음료 파는 아줌마에게 속아 죽은 아내의 기일날 금가락지 해줄 돈 40만원을 털린 김 노인의 스토리는 또 어찌나 애잔하던지. 그러게 살아 있을 적에 잘할 것이지. 아내의 죽음이 아버지 탓이라는 아들의 말에 김 노인은 제대로 대거리도 못한다. 사실이니까. 김 노인의 처지를 동정해 주던 멋쟁이가 알고 보니 사기꾼 아줌마와 한통속이었다는 사실은 아예 놀랍지도 않다. 하긴 그녀의 사정도 들어 보면 그럴 만하구나 싶을 정도니 말이다. 울산에서 부산에 둥지를 튼 오빠네 집에 놀러 갔다가 멋진 드레스 한 벌 얻어 입고, 못볼 꼴을 보고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동생의 사연은 또 어떤가. 임신까지 한 동거녀를 제자라고 소개하는 품새도 그렇지만, 우유부단한 오빠에게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하는 초등학교 교사 올케가 있다는 건 반전이었다. 오빠의 신세는 동생이 잡으려고 놓은 쥐 끈끈이에 잡혀 허덕이는 신세와 묘하게 오버랩이 된다.

 

농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담장>에서는 어디선가 읽은 구제역에 걸린 동물들을 산 채로 파묻는 장면이 그래도 떠올랐다. 그나마 소는 죽여서 묻었는데 돼지들은 산 채로 묻었다고 했던가. 수입쇠고기 때문에 솟값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데 왜 우리 소비자들은 여전히 떨어진 쇠고기값을 체감할 수가 없는 걸까? 도대체 중간 유통에서 챙기는 우리의 이익이 얼마란 말인가 따위은 소소한 질문은 대처에서 들어온 이웃집 형의 아내가 기왓집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으면서 땅문제로 유발된 갈등에 파묻힌다. 그렇지 언제나 땅이, 내가 가진 알량한 재산이 문제로구나. 사료값도 되지 않는 소를 위해 녀석의 분뇨를 치우며 1시간이면 할 수 있는 일을 4시간 걸려 하니, 짜증이 나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었겠지. 엉성한 봉합으로 땅문제는 해결되고 막걸리로 대동단결한 불콰해진 얼굴들을 생각해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

 

표제작 <고양이가 사는 집>에서는 실직한 가장이 등장한다. 지난 주말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쓴 <액스>에서는 실직한 가장이 냉혹한 연쇄살인마로 변신하는 과정에 대해 열띤 토론을 가졌었는데 대한민국의 실직한 가장은 신자유주의의 세련된 세뇌를 받아, 구조적 사회모순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는 대신 모든 성공과 실패를 내 탓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금이나마 가사에 보태겠다고 고무 패킹 끼우는 부업을 하는 아내에게 차마 실직했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 우리의 가장.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킨 엄혹한 시절, 실업이 곧 가정의 파탄선고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나도 내 일자리를 잘 지켜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문학계의 변방에서도 독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내러티브를 가진 소설가가 열심히 글을 짓고 있다는 사실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때로는 나 자신을 이야기에 투영시켜 비교해 보기도 하고, 나만의 고민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고민이 될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 진지한 사유도 해볼 수가 있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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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장 - 미국 산 육류의 정체와 치명적 위험에 대한 충격 고발서
게일 A 아이스니츠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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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발 살충제 계란 파문으로 보수언론이 힘차게 견인하던 8월 전쟁발발설이 고개를 수구렸다. 사실 공장식 축산의 병폐가 지적된 게 어제 오늘이 아니건만,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어린 시절 계란 하나 먹기가 쉽지 않았는데 요즘 계란은 너무 흔하고 저렴하다. 그렇다면 그 연원에 대해 고민해 봐야 했을텐데, 그냥 편하고 싸니 생각 없이 계란을 소비하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관리감독을 맡은 정부당국의 행정편의적 전수조사 이야기를 들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오래 전에 쓴 리뷰를 다시 한 번 찾아봤다.

 

예전에 한 동안 미국에 살면서 버거킹에서 파는 99센트짜리 햄버거를 즐겨 먹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도 우리나라 버거킹에서도 와퍼 세트 메뉴가 45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값싼 햄버거를 먹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싼 햄버거를 매장에서 팔수가 있는 거지?’ 바로 오늘 읽은 게일 A. 아이스니츠의 르포르타주인 <도살장>을 통해 그 진실을 알 수가 있었다.

 

작가는 미국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대형도축업체인 카플란 인더스트리에서 장장 20여년에 걸친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린다. 가뜩이나 풍성한 식탁을 선호하는 미국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그 수많은 붉은 살코기들이 어디서 올까? 농장에서 길러진 소, 돼지 그리고 닭들이 도축업체를 통해 제품화되어져서 몇 단계의 유통단계를 거쳐 소비자들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고 생각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자, 그럼 다음의 질문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그럼 그 도축되어지는 동물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안전한 위생관리를 통해 도축이 되고, 포장이 되는가. 바로 여기에 작가 게일 A. 아이스니츠 여사의 핵심적인 질문이 존재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렇지 않다고 작가는 선언한다. 그 사실은 카플란 인더스트리나 존 모렐 앤 컴퍼니와 같이 미국 도축업체를 대표하는 초대형기업들의 현실에서 바로 들어나게 된다. 수많은 수의 직원들, 검사관들 그리고 수의사들의 양심선언에 의해 우리는 진실로 나가는 어려운 발걸음을 시작한다.

 

미국 연방법에 따르면 1958년에 통과된 <자비로운 도살법>에 의해, 가금류를 제외한 소, 돼지, 양 그리고 말과 같은 식육으로 사용되어지는 동물들은 도살 및 가공 처리에 앞서 전기 충격기나 노커(강철못 발사기: 영화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예의 킬러가 살인무기로 사용하던 바로 그 장치!)를 통해 의식을 잃게(죽이게) 하게끔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의 상황에서 죽지 못한 동물들이 산 채로 사지가 절단되고, 온갖 학대를 당하면서 가죽을 벗겨지면서 그렇게 잔혹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보다 더한 사실은 너무나 열악한 작업환경 때문에, 오로지 기업의 이윤추구만을 외쳐대는 작업 현장의 실무책임자들은 작업반원들에게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강요를 해대면서 오직 신속하게 작업라인을 돌려서 끝도 없이 밀려오는 동물들을 도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미연방법을 위반하는 상황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할 연방 식육 검사관과 수의사들마저 기업과의 매우 긴밀한 유착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이 수수방관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상황에 더해 온갖 동물들의 배설물, 사체조각들, 가죽, 기생충, 구더기, 바퀴벌레들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화장실에 가지 못한 직원들이 용변물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열거되고 있었다. 결국 내가 그렇게 싼 값에 맛있게 먹었던 햄버거의 정체는 이런 전근대적이면서도 반동물적인 노예시스템 하에서 저렴한 값에 생산된 식육이었던 것이다.

 

주로 햄버거 패티에 들어간다는 소머리 살도, 그렇게 도살당한 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결한 작업장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소머리에서 그라인더로 갈아져서 패스트푸드 체인점으로 직행하곤 했다는 사실 앞에선 정말 다시는 햄버거를 입에도 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국 농무부가 198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도축업체와 식육가공업체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오면서 미국 내에서 리스테리아(Listeria)와 치명적인 O157:H7 대장균과 같은 박테리아로 인해 발병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국민의 건강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정부 단체가, 자신의 본연의 임무 대신 기업의 이윤추구만을 묵과하면서 벌어진 참으로 불행한 사태인 것이다.

 

작가 게일 A. 아이스니츠는 이런 사실을 정부와 언론에 알리고자, 숱한 스트레스에 싸우다가 결국 자신이 암에 걸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 책 <도살장>을 써냈고,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많은 부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미국 농무부로 대변되는 정부와 카플란-모렐 사로 대변되는 이익단체들의 정경유착을 통해, 무고한 소비자들의 건강을 볼모로 해서 이런 엄청난 집단사기극이 발생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것은, 결국 어느 정부도 우리의 건강을 지켜 주지 못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비자 주권의식을 각성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어느 위정자가 언급한대로 그렇게 ‘미국의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의 정체를 알고 싶다면 바로 읽어야 할 책이 이 <도살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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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8-18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으.. 리뷰만 읽어도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히네요.. 햄버거 미친듯이 좋아하는데 이런 책들 볼때마다 정말 자아분열의 고통을 느낍니다.

레삭매냐 2017-08-18 10:57   좋아요 0 | URL
저는 워낙에 햄버거를 좋아해서 요즘 그 사단
이 났는데도 여전히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ㅠㅠ

그나저나 공장식 축산을 정상화할 수 있는 방법
에 대해 고민해 봤으면 좋겠네요.

2017-08-18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18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17-08-18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판이라니 더욱 읽어야겠다는 도전의식이 불끈^^;;

레삭매냐 2017-08-18 16:36   좋아요 0 | URL
그래도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에서는 구할
수가 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는 게 어떨실런지요.

cyrus 2017-08-18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과 같이 읽어봐야겠군요. ^^

레삭매냐 2017-08-18 23:23   좋아요 0 | URL
싱클레어의 <정글>도 진짜 백만년 전에 사긴
했는데 여전히 안 읽었네요. 이젠 어디에 두었는
지조차 모르겠더라는.
 
세상의 끝
폴 서루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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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시탈라 : 사모아 말로 ‘이야기꾼’라는 뜻이다.

 

어제 폭우를 뚫고 시흥 아웃렛에 갔다가 들린 북스리브로에서 벼르던 폴 서루의 <세상의 끝>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단박에 절반 정도를 읽고 나서, 왜 내가 진작에 이런 작가를 몰랐나 하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국내에 모두 5권의 폴 서루 작가 책이 출간되었는데 <아프리카 방랑>은 절판되어서 구할 수가 없게 되었고, 한 권은 읽고 있는 중이며 나머지 3권을 차례대로 읽을 계획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여행작가로 활동했다는 폴 서루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메드퍼드에서 이태리계 문법 학교 선생님이었던 어머니 앤과 프랑스계 캐다다 출신이었던 아메리칸 레더라는 소파 회사 세일즈맨 아버지 앨버트 슬하에서 태어났다. 메인대학교화 유매스 애머스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말라위에 교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말라위 수상이었던 헤이스팅스 반다의 정적들을 이웃 우간다로 피신시키는 일을 돕다가 말라위에서 추방되고, 평화봉사단에서도 퇴출되기에 이르렀다. 이 일화를 훗날 자신의 소설 <정글 러버스>에서 다루기도 한 폴 서루는 우간다에서 V.S. 나이폴과 교류를 하기도 했다. 우간다에서 성난 시위대가 폴 서루의 아내가 탄 차를 전복시키려는 사건을 겪은 뒤, 폴 서루 가족은 아프리카를 떠나 싱가폴에 체류하기도 했다. 그 뒤, 런던 남부의 도셋에 정착했고 지금은 하와이와 케이프 코드를 오가며 살고 있다고 한다.

 

모두 14편 그리고 에필로그 같은 이야기가 담긴 <세상의 끝 그리고 다른 이야기들>(원제)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저자 폴 서루와 함께 런던으로, 코르시카로, 열기가 피어오르는 푸에르토 리코로 그리고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부는 보스턴 혹은 하이애니스로 그렇게 공간이동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여행자의 기록이라기 보다 세계 어디에서고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을 채집해서 한 데 모아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빈 비빔밥 같은 글들이라고나 할까.

 

영국 모처에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의 끝>에 사는 미국 남자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그의 가정은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세상의 끝’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모르는 엄마 친구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갔던 박스힐로 연을 날리러 가는 장면 그리고 이어지는 고통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작가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모국 영국에서처럼 차가운 음료를 마시겠다는 일념으로 수레에 얼음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벌어진 일을 담담하게 묘사한 <임피리얼 얼음 상점>도 음산한 잔영을 뿜어낸다. 과연 네 명의 남자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문학산업에 기생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한 폴 서루가 구사하는 조롱과 해학도 소설집의 곳곳에서 번득인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들였지만, 지금은 예민한 인종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점점 술에 취해 가는 브리스토 양에게 소설집에서 제외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 출판사 직원과의 대화. 괴짜 시인의 습작을 손에 넣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접근했다가 호되게 당하고 물러났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시인의 잡역부를 매수해서 마침내 시인의 습작 원고를 손에 넣는데 성공했지만, 육필원고가 아니라 잡역부가 정성스레 타이핑한 서류였다는 반전에서는 정말 빵 터져버렸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

 

하바드 경영대학원 출신으로 파리에서 부정한 사업에 개입하게 된 남자는 아내에게 부끄러울 만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데카당스한 분위기에 젖어 외도에 돌입하게 된다. 하긴 파리에 가게 된 시작부터 외화를 몰래 반입하는 배달꾼의 역할이었지 아마. 낯선 곳에서 휴식일인 일요일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보니 나도 할슈타트 여행에서 비슷한 체험을 했었다. 무언가 굉장한 볼거리 혹은 경험을 원하는 여행객에게 현지인들에게 휴식을 주는 주말은 따분하고 볼거리가 없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사람들이 쉬고 있는 시간은 나같이 기대에 부푼 관광객에게는 그저 따분한 시간들이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푸에르토 리코로 도망간 여인들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부모의 보살핌도 경제력도 없는 이들에게 ‘꽃의 섬’은 어쩌면 막다른 골목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성장해온 공간에서 분리된 이들에게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식료품비와 방세를 낼 수 있는 경제력이었다. 남자는 현지 레스토랑에 취업해서 돈을 벌면서, 원치 않는 출산으로 남은 삶이 파괴되는 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런 예측가능한 미래를 잘 아는 여자는 남자에게 어서 자신을 떠나라고 부추긴다. 어쩌면 앞으로 닥칠 결혼생활에 대한 전조처럼. 어쩌면 그 순간 소설집의 처음에 등장한 <세상의 끝>으로 돌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순환이라고나 할까. 코르시카에서는 처음 만난 유부녀에게 도망가자는 즉흥적인 제안을 던진, 이제 막 아내로부터 결별을 선고받고 상실감에 시달리던 미국 교수가 등장한다. 그런 즉흥적인 감정이 휘발해 버리고 나면 남은 것은 어떤 감정일지 폴 서루는 아주 잠시 맛만 보여준다.

 

소설집 <세상의 끝>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단편은 바로 <야드 세일>이다.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했던 폴 서루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일까. 소설의 주인공 플로이드 역시 폴리네시아 서사모아에 가서 2년간 평화봉사단으로 지내면서 현지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을 보여준다. 플로이드는 미국으로 돌아와 이혼한 부모 대신, 소설의 화자인 프레디 이모네 얹혀 지내면서 침대 대신 해먹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히피 스타일의 청년이다. 청바지 대신 라바-라바라는 이름의 사롱(치마)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조카는 프레디 이모 앞에서 구운 박쥐 요리에 대해 떠들어 대고, 사모아에 두고 온 유사가족에 대해 사자후를 토해낸다. 미국식 관습 대신 사모아에 설교를 늘어놓는 조카 앞에서 프레디 이모는 코코넛 열매로 쉴새없이 종알대는 플로이드의 입을 명중시키는 상상에 젖는다. 어쩌면 사모에 대해 모르는 이모와 세상을 보고 배운 조카 세대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런 부분들을 유머스럽게 짚어낸 폴 서루의 글에 흠뻑 매료되어 버렸다 나는.

 

그동안 모르고 지내온 폴 서루 작가의 매력에 반한 나는 곧바로 중고서점에 달려가 1980년대 1년간 작가가 중국을 여행하고 남긴 <폴 써로우의 중국 기행>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여행작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정작 소설가로 먼저 작가 이력을 시작했다. 꽤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지만 국내에 소개된 책들은 극히 일부분이다. <아프리카 방랑>도 읽어 보고 싶은데 절판의 운명인지라 애석하게도 구할 수가 없구나. 폴 서루는 국외거주자(expatriate)로 다년간의 해외 생활과 여행을 자신의 소설 속에 온전하게 녹여 내고 있다. 모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자신만의 문학세계로 구현하는 특출한 저자의 능력이야말로 소설 <세상의 끝>에서 내가 만난 즐거움이었다. 모름지기 소설이라면 이런 맛이 있어야지. 올해 내가 만난 최고의 소설 중의 하나로 꼽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뱀다리] 배곧 프리미엄 아웃렛 3층에 있는 북스리브로 그리고 스타벅스 콜라보는 지금까지 내가 방문한 서점과 커피숍의 조화 중에 정말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좀 더 선선해지고 시간 여유만 있다면, 책을 보따리로 싸들고 가서 몇 시간이고 따뜻한 라떼를 곁들여 마시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정말 필요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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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kim 2017-08-17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글 때문에 더욱더 읽고 싶어지네요.

레삭매냐 2017-08-17 17:11   좋아요 0 | URL
읽게 되신다면 후회하시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

사마천 2017-08-18 0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리뷰만 봐도 참 재밌네요. 감사 ^^

레삭매냐 2017-08-18 15:4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너무 재밌어서 새벽까지 읽었네요.
 
장거정 평전 - 과연 시대는 개혁을 바라는가
주둥룬 지음, 이화승 옮김 / 더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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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은 어느 시대에서나 꼭 필요한 시대의 요구였다. 우리도 현재 9년간 보수정권 치하에서 쌓여온 적폐청산을 시대구호로 정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개혁만큼 어려운 과제도 없을 것이다. ‘지금 이대로’를 외치며 앙지앵 레짐을 옹호하는 기득권 세력에게 개혁이란 단어만큼 불편한 말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기득권 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제압하고 중단없는 적폐청산과 개혁을 이루기 위해선 개혁을 주도할 뚜렷한 신념을 가진 인사들과 개혁의 대의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여론이 필수일 것이다. 우리는 현재 그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앞으로 개혁성공의 귀추가 주목되는 시점이다.

 

최근 역사 속에서 그런 개혁을 주도한 인물들에 대한 평전을 중점적으로 읽고 있는 중이다. 송나라 시절 신법을 실시한 왕안석 평전 그리고 중종 시대 조선 사림의 기수 조광조의 개혁에 대해 읽었다. 다시 무대를 중국으로 옮겨 우리나라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명나라 시절 신종 만력 연간에 개혁을 주도했던 한림원 내각대학사 수보 장거정에 대한 평전을 읽었다.

 

역시 역사에 문외한인 독자를 위해 주둥룬 교수는 명나라 건국까지 거슬러 올라가 상세한 설명을 해준다. 태조 주원장의 건국으로 시작된 명나라는 문민독재, 관료가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국가였다. 홍건적 군벌이었던 주원장이 남긴 수많은 왕자와 공주들로 이루어진 종실에 대한 봉록은 후대로 갈수록 명 조정에 재정압박을 가했다.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세입보다 세출이 더 많은 만성화된 재정적자로 기인한 경제문제가 발생했다. 명나라의 세 번째 황제 성조 영락제는 수도 북경을 중심으로 80만 대군을 배치해서, 북방의 몽골족 혹은 타타르로 대변되는 오랑캐 세력에 대한 대비를 굳건하게 갖추었다. 하지만 전성기를 지나 명나라 쇠퇴기로 접어들면서 경제력의 약화로 군비확충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으로 전락했다.

 

 

형주 출신 수재로 어려서부터 방명을 떨친 장거정은 선대에게서 물려받은 호방한 기개에, 유년 시절에 갈고 닦은 문재를 발휘해서 16살에 향시에 합격하고, 약관에 즈음해서 회시를 통과해서 진사가 되어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명조정의 인재풀에 한림에 들어가게 되면서 미래 국가지도자의 자리를 예약해 둔 셈이었다. 한편, 장거정이 조정에 출사해서 섬기기 시작한 세종 가정 연간은 북로남왜 그리고 조정 대신간의 소모적인 정쟁으로 그야말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무능했지만 조정에 대한 지배권을 잃지 않았던 가정제는 간신 엄숭을 총애하면서 북방의 알탄 칸과의 전쟁 와중에 비교적 총명했던 대학사 하언과 총독 증선을 파직하고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 황실 출신 황제들의 무능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부리는 신하들조차 제압하지 못하는 상황은 암담했다. 그나마 서계와 장거정 같은 명신들이 국정을 운영하면서 망국을 늦출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장거정이 만력 연간에 집권하게 되면서 명나라의 망국을 70년 정도 늦추었다는 표현이 빈 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쟁쟁한 조정의 중신들 간에 펼쳐지는 권력투쟁이었던 엄숭과 하언, 엄숭과 서계 그리고 서계와 고공 간의 치열한 정쟁을 현장에서 목격한 장거정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웠다. 언관들을 동원해서 치르는 일종의 언론플레이였던 탄핵으로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서계가 실각하는 과정에서 장거정은 큰 교훈을 얻었다. 3년간의 낙향이라는 정치적 휴지기를 거쳐 중앙 정계에 복귀한 장거정은 정치적 스승이자 동지였던 서계가 정계에서 물러난 이후, 당시 명나라가 처해 있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상소를 올리면서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직 고공이라는 현직 수보대학사가 버티고 있는 내각에서 장거정의 행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부와 내각을 장악한 고공은 최고 권력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지만,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고공도 전임자 서계의 길을 걷게 된다. 태감 풍보와 황제의 생모 자성황태후 그리고 장거정이 연합해서 고공을 내각에서 축출하기에 이른다. 비로소 소년황제의 스승으로 최고권력을 행사하게 된 장거정은 신종과 자성황태후 그리고 환관 풍보의 지원 아래 자신이 꿈꾸어 오던 부국강병책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경술지변 이래, 명나라 국방의 화근이었던 타타르족에 대해 기미정책과 강경책을 구사하면서 북방의 요충지인 계요지역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양광 지역에서 왜구 축출에 탁월한 실력을 보인 척계광을 기용해서 북방수비를 강화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고성법을 필두로 해서, 세금과 부역을 일원화한 일조편법의 실시, 전국적인 토지조사를 강행해서 국가의 세수를 확장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황실에서 소요되는 경비를 줄이는 긴축재정도 엄격하게 시행했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집권 10여 년 동안 명나라 재정은 급속도로 반전되기에 이르렀다. 치열한 권력투쟁의 과정을 직접 목격한 장거정은 내각과 육부 그리고 언론을 주도하는 어사들을 자기 사람들로 채워 놓고, 소년황제를 직접 지도하면서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오로지 사직을 위한다는 일념 아래 국가와 황제에 충성을 다했다. 문제는 소년에서 어느덧 성년으로 성장한 황제가 총명했다는 점이었다. 훗날 아예 정치를 놓게 되는 만력제가 촉나라의 후주 유선처럼 자신의 무능함을 알고 제갈무후가 후사를 맡긴 인재들을 연달아 등용하면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면 좋았으련만, 그 정도로 만력제는 무능하지 않았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명나라 멸망의 치명적인 원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세종과 아버지 목종처럼 오만하고 향락적인 취향을 지녔던 만력제는 국사를 좌지우지하던 장거정이 지병으로 세상을 뜨자 곧 자신의 스승이자 노충신이었던 장거정이 시도했던 개혁을 되돌리기에 이른다.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제국을 미래의 멸망으로 인도한 황제가 바로 만력제였던 것이다.

 

최고 결정권자가 무능하더라도 뛰어난 재능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가진 관료들을 등용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했더라면 국가의 멸망 같은 환란을 겪지 않게 되었겠지만, 만력제는 물론이고 뒤를 이은 희종과 사종 숭정제 같은 황제들은 간신 위충현 같은 이들에게 휘둘리다가 그만 276년 사직을 이자성의 농민반란군과 만주의 여진족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만력제가 자신의 치세 초기 부국강병책과 개혁을 구사한 장거정의 정치적 유산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면 명나라의 망국을 피할 수가 있지 않았을까. 역사의 가정법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력제가 장거정이 공들여 다진 국가재정을 말아 먹는 건 시간문제였다. 내부로부터는 농민반란, 외부로부터는 임진왜란 개입과 만주에서 발흥한 여진족을 상대하느라 만력 연간 말기는 정신이 없었다. 황실의 긴축재정을 펼치면서까지 국가재정을 염려한 내각대학사의 개혁 의지는 그렇게 보람도 없이 끝나 버렸다. 만력제는 장거정의 후사를 돌보겠다는 약속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장거정들의 아들들을 박해했으며 국가의 반란을 일으킨 인사들의 처벌에 해당하는 재산몰수까지 시행했다. 황제는 충신과 그의 자손들을 배신했지만 장거정의 손자 장동창은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도 국가에 끝까지 충성으로 보답했다.

 

왕조의 창업자라 아닌 이상, 제국의 수성을 위해서는 언제나 개혁이 시대정신이었다. 관습이라는 미명 아래 기득권층은 법제화되지 않은 특권을 유지하는데 전력을 다했고, 그 부작용은 적폐라는 이름으로 다수 민중의 이익을 침해했다. 우리도 지금 지난 9년간의 보수정권에서 쌓인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치열한 기억의 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 아닌가. 단기간에 대중의 환호를 얻을 수 있는 속도감 넘치는 가시적인 개혁도 물론 중요하지만, 세대를 아우르고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점진적이면서도 장기적인 차원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장거정 평전>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왕안석 같은 이상주의자라기 보다, 현실정치가로서 부국강병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인내심으로 무장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장거정의 전기를 통해 배울 수가 있었다. 물론 봉건질서 아래 행해진 개혁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민중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전력투구했던 노련한 정치인의 삶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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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4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15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