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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정 평전 - 과연 시대는 개혁을 바라는가
주둥룬 지음, 이화승 옮김 / 더봄 / 2017년 7월
평점 :

개혁은 어느 시대에서나 꼭 필요한 시대의 요구였다. 우리도 현재 9년간 보수정권 치하에서 쌓여온 적폐청산을 시대구호로 정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개혁만큼 어려운 과제도 없을 것이다. ‘지금 이대로’를 외치며 앙지앵 레짐을 옹호하는 기득권 세력에게 개혁이란 단어만큼 불편한 말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기득권 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제압하고 중단없는 적폐청산과 개혁을 이루기 위해선 개혁을 주도할 뚜렷한 신념을 가진 인사들과 개혁의 대의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여론이 필수일 것이다. 우리는 현재 그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앞으로 개혁성공의 귀추가 주목되는 시점이다.
최근 역사 속에서 그런 개혁을 주도한 인물들에 대한 평전을 중점적으로 읽고 있는 중이다. 송나라 시절 신법을 실시한 왕안석 평전 그리고 중종 시대 조선 사림의 기수 조광조의 개혁에 대해 읽었다. 다시 무대를 중국으로 옮겨 우리나라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명나라 시절 신종 만력 연간에 개혁을 주도했던 한림원 내각대학사 수보 장거정에 대한 평전을 읽었다.
역시 역사에 문외한인 독자를 위해 주둥룬 교수는 명나라 건국까지 거슬러 올라가 상세한 설명을 해준다. 태조 주원장의 건국으로 시작된 명나라는 문민독재, 관료가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국가였다. 홍건적 군벌이었던 주원장이 남긴 수많은 왕자와 공주들로 이루어진 종실에 대한 봉록은 후대로 갈수록 명 조정에 재정압박을 가했다.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세입보다 세출이 더 많은 만성화된 재정적자로 기인한 경제문제가 발생했다. 명나라의 세 번째 황제 성조 영락제는 수도 북경을 중심으로 80만 대군을 배치해서, 북방의 몽골족 혹은 타타르로 대변되는 오랑캐 세력에 대한 대비를 굳건하게 갖추었다. 하지만 전성기를 지나 명나라 쇠퇴기로 접어들면서 경제력의 약화로 군비확충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으로 전락했다.

형주 출신 수재로 어려서부터 방명을 떨친 장거정은 선대에게서 물려받은 호방한 기개에, 유년 시절에 갈고 닦은 문재를 발휘해서 16살에 향시에 합격하고, 약관에 즈음해서 회시를 통과해서 진사가 되어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명조정의 인재풀에 한림에 들어가게 되면서 미래 국가지도자의 자리를 예약해 둔 셈이었다. 한편, 장거정이 조정에 출사해서 섬기기 시작한 세종 가정 연간은 북로남왜 그리고 조정 대신간의 소모적인 정쟁으로 그야말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무능했지만 조정에 대한 지배권을 잃지 않았던 가정제는 간신 엄숭을 총애하면서 북방의 알탄 칸과의 전쟁 와중에 비교적 총명했던 대학사 하언과 총독 증선을 파직하고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 황실 출신 황제들의 무능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부리는 신하들조차 제압하지 못하는 상황은 암담했다. 그나마 서계와 장거정 같은 명신들이 국정을 운영하면서 망국을 늦출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장거정이 만력 연간에 집권하게 되면서 명나라의 망국을 70년 정도 늦추었다는 표현이 빈 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쟁쟁한 조정의 중신들 간에 펼쳐지는 권력투쟁이었던 엄숭과 하언, 엄숭과 서계 그리고 서계와 고공 간의 치열한 정쟁을 현장에서 목격한 장거정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웠다. 언관들을 동원해서 치르는 일종의 언론플레이였던 탄핵으로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서계가 실각하는 과정에서 장거정은 큰 교훈을 얻었다. 3년간의 낙향이라는 정치적 휴지기를 거쳐 중앙 정계에 복귀한 장거정은 정치적 스승이자 동지였던 서계가 정계에서 물러난 이후, 당시 명나라가 처해 있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상소를 올리면서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직 고공이라는 현직 수보대학사가 버티고 있는 내각에서 장거정의 행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부와 내각을 장악한 고공은 최고 권력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지만,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고공도 전임자 서계의 길을 걷게 된다. 태감 풍보와 황제의 생모 자성황태후 그리고 장거정이 연합해서 고공을 내각에서 축출하기에 이른다. 비로소 소년황제의 스승으로 최고권력을 행사하게 된 장거정은 신종과 자성황태후 그리고 환관 풍보의 지원 아래 자신이 꿈꾸어 오던 부국강병책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경술지변 이래, 명나라 국방의 화근이었던 타타르족에 대해 기미정책과 강경책을 구사하면서 북방의 요충지인 계요지역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양광 지역에서 왜구 축출에 탁월한 실력을 보인 척계광을 기용해서 북방수비를 강화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고성법을 필두로 해서, 세금과 부역을 일원화한 일조편법의 실시, 전국적인 토지조사를 강행해서 국가의 세수를 확장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황실에서 소요되는 경비를 줄이는 긴축재정도 엄격하게 시행했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집권 10여 년 동안 명나라 재정은 급속도로 반전되기에 이르렀다. 치열한 권력투쟁의 과정을 직접 목격한 장거정은 내각과 육부 그리고 언론을 주도하는 어사들을 자기 사람들로 채워 놓고, 소년황제를 직접 지도하면서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오로지 사직을 위한다는 일념 아래 국가와 황제에 충성을 다했다. 문제는 소년에서 어느덧 성년으로 성장한 황제가 총명했다는 점이었다. 훗날 아예 정치를 놓게 되는 만력제가 촉나라의 후주 유선처럼 자신의 무능함을 알고 제갈무후가 후사를 맡긴 인재들을 연달아 등용하면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면 좋았으련만, 그 정도로 만력제는 무능하지 않았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명나라 멸망의 치명적인 원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세종과 아버지 목종처럼 오만하고 향락적인 취향을 지녔던 만력제는 국사를 좌지우지하던 장거정이 지병으로 세상을 뜨자 곧 자신의 스승이자 노충신이었던 장거정이 시도했던 개혁을 되돌리기에 이른다.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제국을 미래의 멸망으로 인도한 황제가 바로 만력제였던 것이다.
최고 결정권자가 무능하더라도 뛰어난 재능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가진 관료들을 등용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했더라면 국가의 멸망 같은 환란을 겪지 않게 되었겠지만, 만력제는 물론이고 뒤를 이은 희종과 사종 숭정제 같은 황제들은 간신 위충현 같은 이들에게 휘둘리다가 그만 276년 사직을 이자성의 농민반란군과 만주의 여진족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만력제가 자신의 치세 초기 부국강병책과 개혁을 구사한 장거정의 정치적 유산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면 명나라의 망국을 피할 수가 있지 않았을까. 역사의 가정법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력제가 장거정이 공들여 다진 국가재정을 말아 먹는 건 시간문제였다. 내부로부터는 농민반란, 외부로부터는 임진왜란 개입과 만주에서 발흥한 여진족을 상대하느라 만력 연간 말기는 정신이 없었다. 황실의 긴축재정을 펼치면서까지 국가재정을 염려한 내각대학사의 개혁 의지는 그렇게 보람도 없이 끝나 버렸다. 만력제는 장거정의 후사를 돌보겠다는 약속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장거정들의 아들들을 박해했으며 국가의 반란을 일으킨 인사들의 처벌에 해당하는 재산몰수까지 시행했다. 황제는 충신과 그의 자손들을 배신했지만 장거정의 손자 장동창은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도 국가에 끝까지 충성으로 보답했다.
왕조의 창업자라 아닌 이상, 제국의 수성을 위해서는 언제나 개혁이 시대정신이었다. 관습이라는 미명 아래 기득권층은 법제화되지 않은 특권을 유지하는데 전력을 다했고, 그 부작용은 적폐라는 이름으로 다수 민중의 이익을 침해했다. 우리도 지금 지난 9년간의 보수정권에서 쌓인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치열한 기억의 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 아닌가. 단기간에 대중의 환호를 얻을 수 있는 속도감 넘치는 가시적인 개혁도 물론 중요하지만, 세대를 아우르고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점진적이면서도 장기적인 차원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장거정 평전>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왕안석 같은 이상주의자라기 보다, 현실정치가로서 부국강병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인내심으로 무장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장거정의 전기를 통해 배울 수가 있었다. 물론 봉건질서 아래 행해진 개혁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민중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전력투구했던 노련한 정치인의 삶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