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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산으로의 귀환 - 장다이가 들려주는 명말청초 이야기 ㅣ 이산의 책 50
조너선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10년 7월
평점 :
얼마 전 뉴스에서 학계의 교수님들이 품이 많이 들고 노력 대비 비생산적인(?) 교양서보다는 논문 위주의 집필활동에 전념한다는 말을 듣고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미국 출신의 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책들을 읽어 보면, 일반 독자가 원하는 수준의 역사교양 서적 저술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좀 연식이 되긴 했지만, 비교적 근간에 속하는 조너선 스펜스의 <룽산으로의 귀환> 역시 예의 범주에 속하는 걸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동안 대개의 역사 저술은 왕조교체나 어떤 특정 인물이 역사를 주도했다는 양식의 거시사 위주였다. 그런 연유로 우리의 역사의식 역시 거개가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예전에도 그런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서양 역사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보통 사람들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개인의 수기나 연대기, 소송과 재판기록, 출생증명서 또는 다양한 방식의 교회 기록을 바탕으로 한 미시사가 대세인 모양이다. 마오쩌둥이나 강희제, 옹정제(반역의 책) 같은 주요한 역사 인물에 그동안 초점을 맞췄던 조너선 스펜스는 <룽산으로의 귀환>에서 17세기 명말청초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어느 부잣집 도련님이 남긴 각종 기록에 눈을 돌린다. 거시에서 미시로의 귀환이라고나 할까.
중국 저장 성 사오싱 출신의 장다이가 바로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룽산으로의 귀환>의 주인공이다. 삼대에 걸쳐 그 어렵다는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지역 유지인 장씨 집안의 장손이었던 장다이 역시 어려서부터 독서인으로 출발해서 과거를 통한 중앙 진출을 꿈꿨다. 하지만 조상이 그랬다고 해서 후손 역시 똑같은 길을 걸을 순 없었나 보다. 나중에 다양한 수기와 역사 서술을 거뜬하게 소화해낼 정도의 학식은 갖추었지만 아쉽게도 과거와는 운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신 장다이는 부유한 집안의 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취미활동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역사 전공 분야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명나라 시대 후반에 이르러 급격하게 진행된 부재지주 현상에 대한 경제사학적 분석이 마음에 들었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의 예술인들에 대한 풍족한 지원이 르네상스 문예부흥의 단초를 제공했듯이, 부유한 문화자본이야말로 명대 강남 지방에서 등불놀이, 가극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가 발전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룽산으로의 귀환>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조금 의아했던 점 중의 하나는 명말청초라는 그야말로 천지개벽하는 내우외환의 시대에 장다이가 살던 강남의 사오싱/항저우 지방은 어쩌면 그렇게 천하태평했을까라는 점이다.
보통의 저술 같았다면 바로 그런 시대상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갔을 텐데 역시 고수는 달랐다. 탐미적인 경향의 심미주의자였던 장다이의 실체에 좀 더 독자를 인도하기 위해 <쾌락동호회>라는 제목으로 첫 장을 시작한다. 학업으로 성취를 이루지 못하자 장다이는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려 많은 돈을 들여 형형색색의 등을 수집하고, 음주와 가무를 즐기는 그야말로 강남 한량의 생활을 만끽한다. 다양한 경력의 친구들과 숙부와 함께 만든 차 동호회에서는 난설차 끓이는 법을 연구하고, 민물 게를 시식해 보기도 하고, 사비를 들여 가극단을 조직하는 시세말로 하면 연예기획사를 차려 다양한 문화활동에 전념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모두 만력, 천계 그리고 숭정 연간에 명나라가 북쪽에서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부흥하여 명나라의 국경을 위협하고, 남동 해안에서는 일본 왜구와 해적이 출몰하여 국가가 비상시기로 돌입하는 과정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환관 정치로 인한 부정부패, 과중한 세금으로 국가 재정은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고, 북서 지방의 농민반란, 각종 전염병의 만연으로 국가는 망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문화 중심이었던 남부 사오싱에서 백성들은 장다이가 공을 들여 기획한 가극과 등불 잔치를 즐겼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장다이는 후세가 기억할 만한 출중한 기록 작업에 착수했다. 한 가지는 전란기에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도암몽억>이었고, 다른 하나는 명조 17대 황제의 역사를 다룬 <석궤서>였다. 수도였던 베이징은 물론이고 결국 강남의 사오싱까지 휩쓴 전란의 후유증은 부잣집 도련님인 장다이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렸다. 명나라 멸망 후, 잠시 아버지가 모셨던 노왕의 후예를 따르기도 했으나 조정에 출사하지도 않은 일개 유생이 다른 명조의 유신들처럼 절개를 지키며 왕조와 운명을 함께 한다는 설정은 한량 장다이의 품성과는 맞지 않았던 걸까. 장씨 집안의 모든 재산과 3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모두 잃고, 도망자 신세였던 47세의 중년의 장다이는 노년을 보내기 위해 자신이 아는 유일한 세계였던 사오싱 룽산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서의 전범을 제시한 태사공 사마천 선생의 전례를 따라 기전체 방식으로 필생의 역작으로 자부할 만한 <석궤서> 집필에 여생을 바치게 된다. 본기보다 열전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역사 서술 방식 때문에 장다이는 자기 집안의 출중한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도 넉넉하게 넣을 수 있었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조금은 야박하게 그의 역사 서술 방식의 단점을 꼬집기도 하지만, 장다이가 국가의 지원을 받아 역사를 쓴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궁핍한 경제상황 속에서 어디까지나 자비를 들여 쓴 역사 저술에 대해 조금은 너그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나저나 장다이는 그 어려운 시기에 상당한 비용이 드는 지필연묵을 도대체 어떻게 조달했을지 궁금하다. 하긴 전란의 위기 속에 원고 뭉치를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다닌 위인에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려나.
그렇다고 조너선 스펜스가 장다이의 저술에 대해 비판만 하는 것은 또 아니다. 비록 장다이가 취사선택과 편집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기 가문 출신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회피한 것도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상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게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의문점에 대해서도 기술한 점에 대해서는 또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오리고기 먹자판’(115쪽)을 벌였다가 고생한 장면을 시시콜콜하게 설명해주는 장면에서 장다이의 유머가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 장다이는 <석궤서>와 <석궤서후집>을 저술하는 가운데, 당대에 다루기 미묘한 주제였던 권력주체 청조(淸朝)와 오삼계 같은 인물의 기술에 대해서도 신중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룽산으로의 귀환>은 확실히 역자의 유려한 번역 덕에 읽는데 부담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 중의 하나는 지명이야 그렇다 치고 저술에 등장하는 중국 역사 인물에 대한 현지식 표기가 좀 불편했다. 오월시대의 명재상이었던 범려는 판리로, <귀거래사>의 주인공 도연명의 본명인 도잠은 타오첸으로 하니 한 번에 탁하니 닿지가 않는다.
잘 나가던 청장년기에 비해, 망국의 유민 장다이의 말년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국가를 비롯한 모든 사물의 흥망성쇠가 있듯 개인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우한 시기가 개인의 성찰을 일구듯, 전란기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 다니던 중에 쓴 도암의 “꿈같은 기억”이야말로 부잣집 도련님으로 평생을 살았던 장다이 삶의 압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자칫하면 영원히 잊혔을 17세기 중국 강남 지방에 살던 장다이의 삶을 그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재창조해낸 서양 학자 조너선 스펜스의 놀라운 저술에 감복할 따름이다. 아직 읽지 못한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다른 저작들을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