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무게
에리 데 루카 지음, 윤병언 옮김 / 문예중앙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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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에리 데 루카의 <나비의 무게>란 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내 기억의 창고 속에 책 제목을 넣어 두었다. 그러다가 지난주에 중고서점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급한 불을 어느 정도 끄고 나서 엊저녁부터 읽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내 감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책이구나라는 것이었다. 고대 히브리 어를 연구하는 성서학자이자 등반가이기도 하다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 에리 데 루카는 이탈리아의 국민 작가라고 하는데 의외로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런 작가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새로운 작가와의 만남, 언제나 대환영이다.

 

위대한 산양 왕과 그를 추격하는 사냥꾼, 스스로는 비루한 산짐승도둑이라고 부르는 사냥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연년에 읽은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이 떠올랐다. 호랑이와 인간의 대결이 <위대한 왕>의 내용이라면, 산양의 뿔과 등갈기 가죽을 탐하는 인간 사냥꾼에게 어미와 수많은 자식들을 잃은 산양왕의 대결이 <나비의 무게>의 근간을 이룬다.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다룰 수 없는 세심한 부분들을 읽으면서 한 작가의 지극한 자연사랑이 이렇게 문학적 승화라는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냥꾼의 총에 어미를 잃고, 허공을 나는 독수리에게 누이를 잃은 산양왕은 때가 되매 무리의 왕에게 도전장을 내고 당당하게 결투를 통해 자신의 예리한 뿔로 상대방의 배를 가르고 승리를 쟁취해서 위대한 왕이 되었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과정을 통한 대자연의 섭리를 작가는 담담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20년 간 그렇게 무리의 위대한 왕으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묘기에 가까운 절벽타기를 선보이며, 자신의 뒤를 추격하던 사냥꾼을 농락해 왔던 산양 왕은 자신의 시간이 다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마치 만물이 변화하는 계절의 순환과 맞아 떨어지는 그런 오묘한 이치였던가. 아, 그전에 산양 왕은 자신의 누이를 잡아 갔던 배부른 독수리에게 한 차례 통쾌한 복수를 선보여 주기도 했다.

 

자연을 벗삼아 사는 산양 왕의 이야기가 <나비의 무게>의 한 트랙이라면, 그런 산양 왕에게 도전장을 들이민 사냥꾼의 이야기가 나머지 한 축이다. 예순의 나이에 가까운 밀렵전문가 사냥꾼은 자신을 붙잡기 위해 혈안이 단속반을 비웃으며 산골짜기를 산양 왕 못지않은 날랜 솜씨로 누비며 수백 마리의 산양을 총으로 사냥해 왔다. 자신의 사냥감인 산양에게 접급하기 위해 인간의 냄새를 감출 줄 아는 능력까지 겸비해서 자그마치 300마리에 가까운 산양들을 사냥했다. 소설에서 이 선수는 마치 인간의 탐욕을 빗댄 그런 캐릭터로 형상화되었는데, 수십년간의 산생활을 통해 산양 왕처럼 산에 적응된 인간으로 그려진다. 산양 왕과 사냥꾼 모두 언젠가는 시간에 굴복하게 된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라는 점을 작가는 냉철하게 지적한다. 자신에게 철두철미한 유신론을 신봉하는 성서학자다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어느 순간 독자는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처럼 <나비의 무게>의 두 주인공 역시 결말을 함께 공유하리라는 예상을 하게 된다. 그 둘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사건의 곳곳에 등장해서 산양 왕의 뿔 위에 사뿐히 앉거나 혹은 사냥꾼의 총구를 노니는 한 마리의 나비다. 종이처럼 가벼울 나비의 무게는 60여년에 가까운 한 남자의 삶을 그리고 위대한 리더로 20년 넘게 산양 무리를 이끌어 온 산양 왕의 육신을 창조주에게 재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냥꾼은 한 때 혁명가들과 함께 하기도 했다. 정의란 것이 사라진 시대에 밀렵이 무어 대수란 말인가. 받은 만큼 정직하게 돌려주는 자연과 달리 인간세계는 배신과 협잡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냥꾼의 배에 난 칼에 찔린 흉터가 그 증거이리라.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여성에게서도 마치 깊숙한 산속에서 산양을 대하듯이 그렇게 바투 선 긴장감을 표현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자신에 대한 기사를 쓰겠다고 나선 여성 기자와의 마지막 인터뷰는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사냥꾼이 겨울의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해 가을에 장작을 패면서 남겨둔 나무꼭대기의 이파리들은 산양 왕이 즐기던 별미가 아니었던가. 서로 적대적인 모습의 존재들이 어떤 의미에서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무한한 자연의 순환을 우리 미약한 인간이 어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최근 벌어진 살충제 계란 사태를 보면서, 자연과 인간이 조화로운 삶을 살 수는 없는 걸까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동물의 생존 공간인 자연을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볼 게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상대방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는 걸까하고 말이다. 조금 덜 소비하고, 조금 더 지불하고, 조금 더 기다릴 줄 아는 미덕을 갖춘 사회였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살충제 계란 사태는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다.

 

말미에 실린 <나무를 보다>에서는 에델바이스의 이탈리아 이름 알프스 별, 혹은 스텔라 알피나를 하나 배웠다.

 

자연소설 <나비의 무게>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 정도 내공을 담은 글을 쓰려면 얼마만큼의 자기수련 그리고 자연에 대한 사랑과 관찰이 필요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에리 데 루카 작가의 다른 책들을 한 번 읽어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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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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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에 익숙한 세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가 되었고 그 뒤에는 사실 잘 모르겠다. 이제 젊은 세대들은 애도 낳지 않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정부는 인구절벽이 가까워져 온다며 호들갑을 떨며 엄청난 규모의 예산을 저출산 대책을 세운답시고 쏟아 부었지만, 출생인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중이다. 언제는 인구폭발 때문에 철저하게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며 난리를 칠 적은 언제고 지금은 ‘다둥이 출산이 애국이다’라며 출산을 장려하는 쪽으로 전환됐다. 그런다고 해서 저출산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는데, 정부는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보다 먼저 아이를 낳기 위한 최적의 환경이 마련되어 있는지 묻고 싶다. 살인적인 주거비, 점점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 천문학적 사교육비 그리고 어린이집과 유치원 보내기 같은 보육문제 등등. 살기 좋은 사회라면 애를 낳지 말라고 뜯어 말려도 애를 낳으려고 하지 않을까. 저출산 이슈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언제나처럼 사설이 길었다. <편의점 인간>(아직 읽지 못했다)으로 이름을 알린 일본 출신 작가 무라야 사야카의 <소멸세계>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에 대해 사유할 수가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 사카구치 아마네는 부모가 ‘교미’해서 태어난 별종인간이다. 미래 가상의 공간 일본에서는 전통적 가족 개념이 붕괴된지 오래다. 결혼해서 섹스하고,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쳐 아이가 태어난다는 전통은 이제 부부관계를 근친상간이라며 비하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은 죄다 인공수정을 통해 ‘생산’된다. 사랑과 성욕은 가족 바깥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모두 각각의 애인들을 가지고 있다. 어때 상상이 가는가?

 

이미 태생부터 인공수정이 아닌 교미를 통해 태어난 아마네는 첫 번째 결혼에서 실패하고 단체 미팅을 통해 두 번째 남편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물리적 관계라고 수 있는 섹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신인류와 달리 아마네는 만나는 애인들과 반드시 관계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예전 가족제도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아마네의 엄마는 그것을 아마네에 대한 저주라고 명명한다.

 

연인의 자살시도에 충격을 받은 남편 아마미야 사쿠와 역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인연으로 만나게 되어 육체관계까지 맺게 연인 미즈토와의 관계가 붕괴되면서 아마네와 사쿠 부부는 신인류에 대한 실험이 시행되고 있는 지바로 이주를 결심한다. 인공수정으로 ‘생산’된 아가들이 보편 인류의 모습이라는 실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남편 사쿠의 생각과는 달리, 아마네는 그렇게 태어난 아가들이 인공사육되는 애완동물들과 무엇이 다르냐며 경악한다. 자궁이 없는 남자도 아이를 낳을 수 있게 인공자궁을 매달고 무사히 출산에 성공한 사쿠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며 작가는 과연 우리 인류는 어떤 식으로 앞으로 진화하게 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 일부일처제의 가족 시스템은 현대 자본주의의 부산물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현재 노동을 제공하는 역할을 가장에게 맡기고, 미래의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한 일꾼인 아이들의 육아부담과 가사노동을 여성에게 지우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바로 지금의 결혼제도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자본이 자본을 낳는 무한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가장은 쉼 없이 돈벌이에 매진해야 하며,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다시 말해 재생산은 모두 개인에게 떠넘기는 작금의 결혼제도야말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주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구태의연한 결혼제도에 무라야 사야카 작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남녀 간의 사적 결합인 결혼제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기존 가족제도의 해체를 통해 도대체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이냐는 가치판단 기준을 허문다. 모든 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고통 없이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지고, 비슷한 시기에 출산해서 공동육아에 나서는 모습은 마치 붕어빵틀에서 붕어빵을 찍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물론 모든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 나아가 인류의 아이라고 생각하며 공동육아하는 장면은 조금 이해가 됐지만, 그런 반방식으로 몰개성한 아이들을 생산해내는 것은 두렵기까지 했다. 하긴 우리의 오랜 선조가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현재의 결혼제도를 보면 또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 소설 <소멸세계>에서 무라야 사야카 작가가 그리는 대로 우리 인류가 앞으로 진화하지 않는다는 그리고 남자가 애를 낳는 시대가 오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문득 소설의 어디선가 읽은 과연 ‘사랑이 고통이라는 발작의 공유’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아마네는 ‘바깥 세상’에 존재하는 라피스 같은 인간이 아닌 존재와도 사랑에 빠지곤 한다. 아마네는 인간을 포함한 40여명에 달하는 무생물 애인들을 파우치에 넣어 다니며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이 아닌 일방통행식 사랑 그리고 신도시 지바로 이사해서는 ‘클린 룸’에서 욕망을 해소하곤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마저 일회용이 되어 버리는 마당에 그 다음 단계에 이루어지는 결혼과 출산 같은 가치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난 여전히 다가올 미래가 디스토피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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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8-21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덕분에 <편의점 인간>까지 섭렵하며, 도대체 작가는 어떻게 이런 비타협적인 전복을 상상해낼까 신기했어요

레삭매냐 2017-08-22 08:56   좋아요 0 | URL
전 아직 <편의점인간> 읽어 보지 않았는데
이번 가을에 한 번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

어떤 전복이 또 담겨 있을지 궁금하네요.

2017-08-21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2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가 사는 집
정정화 지음 / 연암서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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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 그리고 소설도 우리는 너무 서울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 등장하는 일단의 공간들은 익숙하다. 인문서적을 중심으로 출판하는 연암서가에서 나온 소설집 <고양이가 사는 집>의 정정화 작가는 공간의 중심을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전한다. 그래서 언양이니 태화강, 희락공원, 작괘천 그리고 자수정동굴 같은 실존하는 지명들은 외국 소설을 읽는 것처럼 낯설기까지 하다. 내가 만약에 소설을 쓰게 된다면 관심을 지방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고양이가 사는 집>은 포인트 하나.

 

모두 10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고양이가 사는 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일상밀착형이다. 러시아 여행을 떠나 만난 사람 듬직해 보이는 가이드가 사실은 여행객의 돈을 훔친 범인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화자가 추궁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신산했던 삶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질 않나,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골인해서 아이를 낳고 작은 행복이나마 이어가고 싶어했던 주인공 엄마의 바람은 가장으로서 책임보다는 게임에 중독되어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은 이야기들의 모체는 이미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대중에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자극적 현실이 쉬르리얼리즘의 영역을 훨씬 뛰어 넘은 모양이다.

 

<불맛>에서는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둬준 은인 아저씨의 젊은 부인 수진을 은근히 사모하는 청년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묘목 납품 경쟁에서 자신보다 젊고 능력 있는 석규에게 진 아저씨는 엉뚱하게 수진에게 화풀이를 하고, 낫을 들고 석규의 묘목들이 심겨진 밭으로 가 화풀이를 한다. 그 장면에서는 경영을 잘못해서 기울어진 사업탓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정부 들어 교정에 들어간 갑질제거 작전의 대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정작 균열과 붕괴는 외부의 화마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모두가 아는 사실을 아저씨만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로 보인다 내게는.

 

흑색 토마토라고도 불리는 <쿠마토>는 도망간 엄마의 자리를 대신한 외국 출신 새엄마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중학생 딸이 기술한 이야기다. 쿠마토 농장으로 먹고 사는 아버지에게 잰 솜씨로 수분작업을 하고 익숙하지 않지만 한국음식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고, 한국어 배우기에도 열심인 새아내는 과분할 따름이다. 문제는 그놈의 의처증과 딸내미의 음모로 시작된 가정폭력의 수준이다. 폭력의 단초를 제공한 딸은 불길이 자신에게 닥치는 걸 원하지 않으면서도, 잘못된 것을 교정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불의가 만연했던 지난 9년의 세월 동안 당신을 도대체 무얼 했냐는 작가의 힐난처럼 다가왔다. 더 큰 비극이 발생하기 전에 새엄마의 새출발을 응원했고, 결말은 그렇게 됐다.

 

<뻥튀기 먹는 남자>도 재밌게 읽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춘복은 미꾸리와 메뚜기를 잡아 팔아다가 가족을 봉양하고, 동생들을 교육시켰다. 어린 나이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된 춘복은 어쩌다 보니 마흔을 훨씬 넘긴 노총각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외국 며느리라도 들이라고 성화인데, 그것이 매매혼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정식으로 결혼할 수도,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봐야 남 좋은 일 시키는 거라며 어머니의 지청구 따위는 잔소리일 뿐이다.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한 동생들이 우연히 만나 살림을 차린 수희보다 나은 게 무엇이란 말인가. 춘복의 속마음을 작가는 한 편의 르포처럼 추적한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중요한 법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이 안돼 할아버지의 가업인 뻥튀기 장수로 나선 성수는 저마다 튀기는 시간이 다른 곡류를 다루는 노하우를 몰라 태워 먹기가 일쑤다. 작가는 사카린을 넣어 튀기는 달달한 뻥튀기 만들기와 춘복이 원하는 사랑의 궤적을 투트랙으로 추적한다. 개인적으로 열 개의 소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두 편의 외국소설을 읽었는데, 나는 이렇게 정감이 넘치는 우리 소설을 읽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대로 씹지도 않은 채, 맛난 꿀떡을 삼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외식을 오래 하다 보면, 구수한 된장국이 먹고 싶어지는 그런 심정이려나.

 

희락공원의 건강음료 파는 아줌마에게 속아 죽은 아내의 기일날 금가락지 해줄 돈 40만원을 털린 김 노인의 스토리는 또 어찌나 애잔하던지. 그러게 살아 있을 적에 잘할 것이지. 아내의 죽음이 아버지 탓이라는 아들의 말에 김 노인은 제대로 대거리도 못한다. 사실이니까. 김 노인의 처지를 동정해 주던 멋쟁이가 알고 보니 사기꾼 아줌마와 한통속이었다는 사실은 아예 놀랍지도 않다. 하긴 그녀의 사정도 들어 보면 그럴 만하구나 싶을 정도니 말이다. 울산에서 부산에 둥지를 튼 오빠네 집에 놀러 갔다가 멋진 드레스 한 벌 얻어 입고, 못볼 꼴을 보고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동생의 사연은 또 어떤가. 임신까지 한 동거녀를 제자라고 소개하는 품새도 그렇지만, 우유부단한 오빠에게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하는 초등학교 교사 올케가 있다는 건 반전이었다. 오빠의 신세는 동생이 잡으려고 놓은 쥐 끈끈이에 잡혀 허덕이는 신세와 묘하게 오버랩이 된다.

 

농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담장>에서는 어디선가 읽은 구제역에 걸린 동물들을 산 채로 파묻는 장면이 그래도 떠올랐다. 그나마 소는 죽여서 묻었는데 돼지들은 산 채로 묻었다고 했던가. 수입쇠고기 때문에 솟값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데 왜 우리 소비자들은 여전히 떨어진 쇠고기값을 체감할 수가 없는 걸까? 도대체 중간 유통에서 챙기는 우리의 이익이 얼마란 말인가 따위은 소소한 질문은 대처에서 들어온 이웃집 형의 아내가 기왓집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으면서 땅문제로 유발된 갈등에 파묻힌다. 그렇지 언제나 땅이, 내가 가진 알량한 재산이 문제로구나. 사료값도 되지 않는 소를 위해 녀석의 분뇨를 치우며 1시간이면 할 수 있는 일을 4시간 걸려 하니, 짜증이 나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었겠지. 엉성한 봉합으로 땅문제는 해결되고 막걸리로 대동단결한 불콰해진 얼굴들을 생각해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

 

표제작 <고양이가 사는 집>에서는 실직한 가장이 등장한다. 지난 주말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쓴 <액스>에서는 실직한 가장이 냉혹한 연쇄살인마로 변신하는 과정에 대해 열띤 토론을 가졌었는데 대한민국의 실직한 가장은 신자유주의의 세련된 세뇌를 받아, 구조적 사회모순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는 대신 모든 성공과 실패를 내 탓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금이나마 가사에 보태겠다고 고무 패킹 끼우는 부업을 하는 아내에게 차마 실직했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 우리의 가장.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킨 엄혹한 시절, 실업이 곧 가정의 파탄선고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나도 내 일자리를 잘 지켜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문학계의 변방에서도 독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내러티브를 가진 소설가가 열심히 글을 짓고 있다는 사실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때로는 나 자신을 이야기에 투영시켜 비교해 보기도 하고, 나만의 고민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고민이 될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 진지한 사유도 해볼 수가 있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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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장 - 미국 산 육류의 정체와 치명적 위험에 대한 충격 고발서
게일 A 아이스니츠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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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럽발 살충제 계란 파문으로 보수언론이 힘차게 견인하던 8월 전쟁발발설이 고개를 수구렸다. 사실 공장식 축산의 병폐가 지적된 게 어제 오늘이 아니건만,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어린 시절 계란 하나 먹기가 쉽지 않았는데 요즘 계란은 너무 흔하고 저렴하다. 그렇다면 그 연원에 대해 고민해 봐야 했을텐데, 그냥 편하고 싸니 생각 없이 계란을 소비하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관리감독을 맡은 정부당국의 행정편의적 전수조사 이야기를 들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오래 전에 쓴 리뷰를 다시 한 번 찾아봤다.

 

예전에 한 동안 미국에 살면서 버거킹에서 파는 99센트짜리 햄버거를 즐겨 먹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도 우리나라 버거킹에서도 와퍼 세트 메뉴가 45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값싼 햄버거를 먹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싼 햄버거를 매장에서 팔수가 있는 거지?’ 바로 오늘 읽은 게일 A. 아이스니츠의 르포르타주인 <도살장>을 통해 그 진실을 알 수가 있었다.

 

작가는 미국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대형도축업체인 카플란 인더스트리에서 장장 20여년에 걸친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린다. 가뜩이나 풍성한 식탁을 선호하는 미국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그 수많은 붉은 살코기들이 어디서 올까? 농장에서 길러진 소, 돼지 그리고 닭들이 도축업체를 통해 제품화되어져서 몇 단계의 유통단계를 거쳐 소비자들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고 생각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자, 그럼 다음의 질문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그럼 그 도축되어지는 동물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안전한 위생관리를 통해 도축이 되고, 포장이 되는가. 바로 여기에 작가 게일 A. 아이스니츠 여사의 핵심적인 질문이 존재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렇지 않다고 작가는 선언한다. 그 사실은 카플란 인더스트리나 존 모렐 앤 컴퍼니와 같이 미국 도축업체를 대표하는 초대형기업들의 현실에서 바로 들어나게 된다. 수많은 수의 직원들, 검사관들 그리고 수의사들의 양심선언에 의해 우리는 진실로 나가는 어려운 발걸음을 시작한다.

 

미국 연방법에 따르면 1958년에 통과된 <자비로운 도살법>에 의해, 가금류를 제외한 소, 돼지, 양 그리고 말과 같은 식육으로 사용되어지는 동물들은 도살 및 가공 처리에 앞서 전기 충격기나 노커(강철못 발사기: 영화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예의 킬러가 살인무기로 사용하던 바로 그 장치!)를 통해 의식을 잃게(죽이게) 하게끔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의 상황에서 죽지 못한 동물들이 산 채로 사지가 절단되고, 온갖 학대를 당하면서 가죽을 벗겨지면서 그렇게 잔혹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보다 더한 사실은 너무나 열악한 작업환경 때문에, 오로지 기업의 이윤추구만을 외쳐대는 작업 현장의 실무책임자들은 작업반원들에게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강요를 해대면서 오직 신속하게 작업라인을 돌려서 끝도 없이 밀려오는 동물들을 도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미연방법을 위반하는 상황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할 연방 식육 검사관과 수의사들마저 기업과의 매우 긴밀한 유착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이 수수방관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상황에 더해 온갖 동물들의 배설물, 사체조각들, 가죽, 기생충, 구더기, 바퀴벌레들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화장실에 가지 못한 직원들이 용변물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열거되고 있었다. 결국 내가 그렇게 싼 값에 맛있게 먹었던 햄버거의 정체는 이런 전근대적이면서도 반동물적인 노예시스템 하에서 저렴한 값에 생산된 식육이었던 것이다.

 

주로 햄버거 패티에 들어간다는 소머리 살도, 그렇게 도살당한 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결한 작업장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소머리에서 그라인더로 갈아져서 패스트푸드 체인점으로 직행하곤 했다는 사실 앞에선 정말 다시는 햄버거를 입에도 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국 농무부가 198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도축업체와 식육가공업체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오면서 미국 내에서 리스테리아(Listeria)와 치명적인 O157:H7 대장균과 같은 박테리아로 인해 발병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국민의 건강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정부 단체가, 자신의 본연의 임무 대신 기업의 이윤추구만을 묵과하면서 벌어진 참으로 불행한 사태인 것이다.

 

작가 게일 A. 아이스니츠는 이런 사실을 정부와 언론에 알리고자, 숱한 스트레스에 싸우다가 결국 자신이 암에 걸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 책 <도살장>을 써냈고,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많은 부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미국 농무부로 대변되는 정부와 카플란-모렐 사로 대변되는 이익단체들의 정경유착을 통해, 무고한 소비자들의 건강을 볼모로 해서 이런 엄청난 집단사기극이 발생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것은, 결국 어느 정부도 우리의 건강을 지켜 주지 못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비자 주권의식을 각성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어느 위정자가 언급한대로 그렇게 ‘미국의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의 정체를 알고 싶다면 바로 읽어야 할 책이 이 <도살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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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8-18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으.. 리뷰만 읽어도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히네요.. 햄버거 미친듯이 좋아하는데 이런 책들 볼때마다 정말 자아분열의 고통을 느낍니다.

레삭매냐 2017-08-18 10:57   좋아요 0 | URL
저는 워낙에 햄버거를 좋아해서 요즘 그 사단
이 났는데도 여전히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ㅠㅠ

그나저나 공장식 축산을 정상화할 수 있는 방법
에 대해 고민해 봤으면 좋겠네요.

2017-08-18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18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17-08-18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판이라니 더욱 읽어야겠다는 도전의식이 불끈^^;;

레삭매냐 2017-08-18 16:36   좋아요 0 | URL
그래도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에서는 구할
수가 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는 게 어떨실런지요.

cyrus 2017-08-18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과 같이 읽어봐야겠군요. ^^

레삭매냐 2017-08-18 23:23   좋아요 0 | URL
싱클레어의 <정글>도 진짜 백만년 전에 사긴
했는데 여전히 안 읽었네요. 이젠 어디에 두었는
지조차 모르겠더라는.
 
세상의 끝
폴 서루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 투시탈라 : 사모아 말로 ‘이야기꾼’라는 뜻이다.

 

어제 폭우를 뚫고 시흥 아웃렛에 갔다가 들린 북스리브로에서 벼르던 폴 서루의 <세상의 끝>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단박에 절반 정도를 읽고 나서, 왜 내가 진작에 이런 작가를 몰랐나 하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국내에 모두 5권의 폴 서루 작가 책이 출간되었는데 <아프리카 방랑>은 절판되어서 구할 수가 없게 되었고, 한 권은 읽고 있는 중이며 나머지 3권을 차례대로 읽을 계획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여행작가로 활동했다는 폴 서루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메드퍼드에서 이태리계 문법 학교 선생님이었던 어머니 앤과 프랑스계 캐다다 출신이었던 아메리칸 레더라는 소파 회사 세일즈맨 아버지 앨버트 슬하에서 태어났다. 메인대학교화 유매스 애머스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말라위에 교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말라위 수상이었던 헤이스팅스 반다의 정적들을 이웃 우간다로 피신시키는 일을 돕다가 말라위에서 추방되고, 평화봉사단에서도 퇴출되기에 이르렀다. 이 일화를 훗날 자신의 소설 <정글 러버스>에서 다루기도 한 폴 서루는 우간다에서 V.S. 나이폴과 교류를 하기도 했다. 우간다에서 성난 시위대가 폴 서루의 아내가 탄 차를 전복시키려는 사건을 겪은 뒤, 폴 서루 가족은 아프리카를 떠나 싱가폴에 체류하기도 했다. 그 뒤, 런던 남부의 도셋에 정착했고 지금은 하와이와 케이프 코드를 오가며 살고 있다고 한다.

 

모두 14편 그리고 에필로그 같은 이야기가 담긴 <세상의 끝 그리고 다른 이야기들>(원제)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저자 폴 서루와 함께 런던으로, 코르시카로, 열기가 피어오르는 푸에르토 리코로 그리고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부는 보스턴 혹은 하이애니스로 그렇게 공간이동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여행자의 기록이라기 보다 세계 어디에서고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을 채집해서 한 데 모아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빈 비빔밥 같은 글들이라고나 할까.

 

영국 모처에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의 끝>에 사는 미국 남자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그의 가정은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세상의 끝’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모르는 엄마 친구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갔던 박스힐로 연을 날리러 가는 장면 그리고 이어지는 고통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작가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모국 영국에서처럼 차가운 음료를 마시겠다는 일념으로 수레에 얼음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벌어진 일을 담담하게 묘사한 <임피리얼 얼음 상점>도 음산한 잔영을 뿜어낸다. 과연 네 명의 남자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문학산업에 기생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한 폴 서루가 구사하는 조롱과 해학도 소설집의 곳곳에서 번득인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들였지만, 지금은 예민한 인종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점점 술에 취해 가는 브리스토 양에게 소설집에서 제외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 출판사 직원과의 대화. 괴짜 시인의 습작을 손에 넣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접근했다가 호되게 당하고 물러났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시인의 잡역부를 매수해서 마침내 시인의 습작 원고를 손에 넣는데 성공했지만, 육필원고가 아니라 잡역부가 정성스레 타이핑한 서류였다는 반전에서는 정말 빵 터져버렸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

 

하바드 경영대학원 출신으로 파리에서 부정한 사업에 개입하게 된 남자는 아내에게 부끄러울 만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데카당스한 분위기에 젖어 외도에 돌입하게 된다. 하긴 파리에 가게 된 시작부터 외화를 몰래 반입하는 배달꾼의 역할이었지 아마. 낯선 곳에서 휴식일인 일요일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보니 나도 할슈타트 여행에서 비슷한 체험을 했었다. 무언가 굉장한 볼거리 혹은 경험을 원하는 여행객에게 현지인들에게 휴식을 주는 주말은 따분하고 볼거리가 없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사람들이 쉬고 있는 시간은 나같이 기대에 부푼 관광객에게는 그저 따분한 시간들이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푸에르토 리코로 도망간 여인들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부모의 보살핌도 경제력도 없는 이들에게 ‘꽃의 섬’은 어쩌면 막다른 골목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성장해온 공간에서 분리된 이들에게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식료품비와 방세를 낼 수 있는 경제력이었다. 남자는 현지 레스토랑에 취업해서 돈을 벌면서, 원치 않는 출산으로 남은 삶이 파괴되는 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런 예측가능한 미래를 잘 아는 여자는 남자에게 어서 자신을 떠나라고 부추긴다. 어쩌면 앞으로 닥칠 결혼생활에 대한 전조처럼. 어쩌면 그 순간 소설집의 처음에 등장한 <세상의 끝>으로 돌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순환이라고나 할까. 코르시카에서는 처음 만난 유부녀에게 도망가자는 즉흥적인 제안을 던진, 이제 막 아내로부터 결별을 선고받고 상실감에 시달리던 미국 교수가 등장한다. 그런 즉흥적인 감정이 휘발해 버리고 나면 남은 것은 어떤 감정일지 폴 서루는 아주 잠시 맛만 보여준다.

 

소설집 <세상의 끝>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단편은 바로 <야드 세일>이다.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했던 폴 서루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일까. 소설의 주인공 플로이드 역시 폴리네시아 서사모아에 가서 2년간 평화봉사단으로 지내면서 현지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을 보여준다. 플로이드는 미국으로 돌아와 이혼한 부모 대신, 소설의 화자인 프레디 이모네 얹혀 지내면서 침대 대신 해먹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히피 스타일의 청년이다. 청바지 대신 라바-라바라는 이름의 사롱(치마)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조카는 프레디 이모 앞에서 구운 박쥐 요리에 대해 떠들어 대고, 사모아에 두고 온 유사가족에 대해 사자후를 토해낸다. 미국식 관습 대신 사모아에 설교를 늘어놓는 조카 앞에서 프레디 이모는 코코넛 열매로 쉴새없이 종알대는 플로이드의 입을 명중시키는 상상에 젖는다. 어쩌면 사모에 대해 모르는 이모와 세상을 보고 배운 조카 세대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런 부분들을 유머스럽게 짚어낸 폴 서루의 글에 흠뻑 매료되어 버렸다 나는.

 

그동안 모르고 지내온 폴 서루 작가의 매력에 반한 나는 곧바로 중고서점에 달려가 1980년대 1년간 작가가 중국을 여행하고 남긴 <폴 써로우의 중국 기행>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여행작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정작 소설가로 먼저 작가 이력을 시작했다. 꽤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지만 국내에 소개된 책들은 극히 일부분이다. <아프리카 방랑>도 읽어 보고 싶은데 절판의 운명인지라 애석하게도 구할 수가 없구나. 폴 서루는 국외거주자(expatriate)로 다년간의 해외 생활과 여행을 자신의 소설 속에 온전하게 녹여 내고 있다. 모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자신만의 문학세계로 구현하는 특출한 저자의 능력이야말로 소설 <세상의 끝>에서 내가 만난 즐거움이었다. 모름지기 소설이라면 이런 맛이 있어야지. 올해 내가 만난 최고의 소설 중의 하나로 꼽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뱀다리] 배곧 프리미엄 아웃렛 3층에 있는 북스리브로 그리고 스타벅스 콜라보는 지금까지 내가 방문한 서점과 커피숍의 조화 중에 정말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좀 더 선선해지고 시간 여유만 있다면, 책을 보따리로 싸들고 가서 몇 시간이고 따뜻한 라떼를 곁들여 마시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정말 필요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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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kim 2017-08-17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글 때문에 더욱더 읽고 싶어지네요.

레삭매냐 2017-08-17 17:11   좋아요 0 | URL
읽게 되신다면 후회하시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

사마천 2017-08-18 0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리뷰만 봐도 참 재밌네요. 감사 ^^

레삭매냐 2017-08-18 15:4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너무 재밌어서 새벽까지 읽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