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산으로의 귀환 - 장다이가 들려주는 명말청초 이야기 이산의 책 50
조너선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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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에서 학계의 교수님들이 품이 많이 들고 노력 대비 비생산적인(?) 교양서보다는 논문 위주의 집필활동에 전념한다는 말을 듣고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미국 출신의 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책들을 읽어 보면, 일반 독자가 원하는 수준의 역사교양 서적 저술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좀 연식이 되긴 했지만, 비교적 근간에 속하는 조너선 스펜스의 <룽산으로의 귀환> 역시 예의 범주에 속하는 걸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동안 대개의 역사 저술은 왕조교체나 어떤 특정 인물이 역사를 주도했다는 양식의 거시사 위주였다. 그런 연유로 우리의 역사의식 역시 거개가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예전에도 그런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서양 역사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보통 사람들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개인의 수기나 연대기, 소송과 재판기록, 출생증명서 또는 다양한 방식의 교회 기록을 바탕으로 한 미시사가 대세인 모양이다. 마오쩌둥이나 강희제, 옹정제(반역의 책) 같은 주요한 역사 인물에 그동안 초점을 맞췄던 조너선 스펜스는 <룽산으로의 귀환>에서 17세기 명말청초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어느 부잣집 도련님이 남긴 각종 기록에 눈을 돌린다. 거시에서 미시로의 귀환이라고나 할까.

 

중국 저장 성 사오싱 출신의 장다이가 바로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룽산으로의 귀환>의 주인공이다. 삼대에 걸쳐 그 어렵다는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지역 유지인 장씨 집안의 장손이었던 장다이 역시 어려서부터 독서인으로 출발해서 과거를 통한 중앙 진출을 꿈꿨다. 하지만 조상이 그랬다고 해서 후손 역시 똑같은 길을 걸을 순 없었나 보다. 나중에 다양한 수기와 역사 서술을 거뜬하게 소화해낼 정도의 학식은 갖추었지만 아쉽게도 과거와는 운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신 장다이는 부유한 집안의 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취미활동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역사 전공 분야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명나라 시대 후반에 이르러 급격하게 진행된 부재지주 현상에 대한 경제사학적 분석이 마음에 들었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의 예술인들에 대한 풍족한 지원이 르네상스 문예부흥의 단초를 제공했듯이, 부유한 문화자본이야말로 명대 강남 지방에서 등불놀이, 가극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가 발전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룽산으로의 귀환>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조금 의아했던 점 중의 하나는 명말청초라는 그야말로 천지개벽하는 내우외환의 시대에 장다이가 살던 강남의 사오싱/항저우 지방은 어쩌면 그렇게 천하태평했을까라는 점이다.

 

보통의 저술 같았다면 바로 그런 시대상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갔을 텐데 역시 고수는 달랐다. 탐미적인 경향의 심미주의자였던 장다이의 실체에 좀 더 독자를 인도하기 위해 <쾌락동호회>라는 제목으로 첫 장을 시작한다. 학업으로 성취를 이루지 못하자 장다이는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려 많은 돈을 들여 형형색색의 등을 수집하고, 음주와 가무를 즐기는 그야말로 강남 한량의 생활을 만끽한다. 다양한 경력의 친구들과 숙부와 함께 만든 차 동호회에서는 난설차 끓이는 법을 연구하고, 민물 게를 시식해 보기도 하고, 사비를 들여 가극단을 조직하는 시세말로 하면 연예기획사를 차려 다양한 문화활동에 전념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모두 만력, 천계 그리고 숭정 연간에 명나라가 북쪽에서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부흥하여 명나라의 국경을 위협하고, 남동 해안에서는 일본 왜구와 해적이 출몰하여 국가가 비상시기로 돌입하는 과정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환관 정치로 인한 부정부패, 과중한 세금으로 국가 재정은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고, 북서 지방의 농민반란, 각종 전염병의 만연으로 국가는 망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문화 중심이었던 남부 사오싱에서 백성들은 장다이가 공을 들여 기획한 가극과 등불 잔치를 즐겼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장다이는 후세가 기억할 만한 출중한 기록 작업에 착수했다. 한 가지는 전란기에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도암몽억>이었고, 다른 하나는 명조 17대 황제의 역사를 다룬 <석궤서>였다. 수도였던 베이징은 물론이고 결국 강남의 사오싱까지 휩쓴 전란의 후유증은 부잣집 도련님인 장다이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렸다. 명나라 멸망 후, 잠시 아버지가 모셨던 노왕의 후예를 따르기도 했으나 조정에 출사하지도 않은 일개 유생이 다른 명조의 유신들처럼 절개를 지키며 왕조와 운명을 함께 한다는 설정은 한량 장다이의 품성과는 맞지 않았던 걸까. 장씨 집안의 모든 재산과 3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모두 잃고, 도망자 신세였던 47세의 중년의 장다이는 노년을 보내기 위해 자신이 아는 유일한 세계였던 사오싱 룽산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서의 전범을 제시한 태사공 사마천 선생의 전례를 따라 기전체 방식으로 필생의 역작으로 자부할 만한 <석궤서> 집필에 여생을 바치게 된다. 본기보다 열전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역사 서술 방식 때문에 장다이는 자기 집안의 출중한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도 넉넉하게 넣을 수 있었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조금은 야박하게 그의 역사 서술 방식의 단점을 꼬집기도 하지만, 장다이가 국가의 지원을 받아 역사를 쓴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궁핍한 경제상황 속에서 어디까지나 자비를 들여 쓴 역사 저술에 대해 조금은 너그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나저나 장다이는 그 어려운 시기에 상당한 비용이 드는 지필연묵을 도대체 어떻게 조달했을지 궁금하다. 하긴 전란의 위기 속에 원고 뭉치를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다닌 위인에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려나.

 

그렇다고 조너선 스펜스가 장다이의 저술에 대해 비판만 하는 것은 또 아니다. 비록 장다이가 취사선택과 편집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기 가문 출신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회피한 것도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상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게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의문점에 대해서도 기술한 점에 대해서는 또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오리고기 먹자판’(115쪽)을 벌였다가 고생한 장면을 시시콜콜하게 설명해주는 장면에서 장다이의 유머가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 장다이는 <석궤서>와 <석궤서후집>을 저술하는 가운데, 당대에 다루기 미묘한 주제였던 권력주체 청조(淸朝)와 오삼계 같은 인물의 기술에 대해서도 신중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룽산으로의 귀환>은 확실히 역자의 유려한 번역 덕에 읽는데 부담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 중의 하나는 지명이야 그렇다 치고 저술에 등장하는 중국 역사 인물에 대한 현지식 표기가 좀 불편했다. 오월시대의 명재상이었던 범려는 판리로, <귀거래사>의 주인공 도연명의 본명인 도잠은 타오첸으로 하니 한 번에 탁하니 닿지가 않는다.

 

잘 나가던 청장년기에 비해, 망국의 유민 장다이의 말년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국가를 비롯한 모든 사물의 흥망성쇠가 있듯 개인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우한 시기가 개인의 성찰을 일구듯, 전란기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 다니던 중에 쓴 도암의 “꿈같은 기억”이야말로 부잣집 도련님으로 평생을 살았던 장다이 삶의 압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자칫하면 영원히 잊혔을 17세기 중국 강남 지방에 살던 장다이의 삶을 그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재창조해낸 서양 학자 조너선 스펜스의 놀라운 저술에 감복할 따름이다. 아직 읽지 못한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다른 저작들을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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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 2017-08-09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통사람들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미시사˝라니 신선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과거 사람들의 생활상은 거의 고전문학을 통해서 짐작만 해왔는데 미시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역사교양서를 읽으면 오히려 <토지> 같은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말씀대로 중국 역사 인물의 이름을 현지식으로 표기했다는 점은 좀 아쉽네요. 저처럼 우리 한자식 표기에 익숙한 사람은 가독성이 떨어질 것 같아요.

오늘도 좋은 글 고맙습니다^^

레삭매냐 2017-08-09 11:4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저자가 미국 사람이다 보니
현대 중국식 표기를 하게 된 게 아닌가
싶네요.

최근에 글항아리에서 명말 사대부들의
삶을 다룬 책이 나온 것 같은데 분량
이나 단가가 후덜덜해서 읽어 보고는
싶은데 망설이는 중입니다.

2017-08-09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10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액스 버티고 시리즈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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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던가? 있었다. 블로그의 리뷰를 검색해 보니 7년 전, <뉴욕을 털어라>라는 책으로 작가와 처음 만났다. 나에게는 생소한 작가지만 위키피디아로 검색해 보니 1959년부터 작고한 2008년까지 49년 동안 모두 108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사후에도 4편의 소설이 더 발표됐다. 1년에 2.2편 꼴로 마치 소설 찍어내는 기계처럼 그렇게 소설을 쓴 모양이다. 정말 대단한 작가로구나.

 

이번에 썰을 풀 <액스>는 작가가 1997년에 발표한 92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1997년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바로 IMF가 터진 그해다. 언제까지나 성장할 것만 같았던 세계가 빵하는 소리와 함께 신자유주의 시절의 붕괴를 예고한 그런 시기였다. 우리에게는 IMF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베이비 부머 세대의 미국인들에게는 사무자동화라는 이름으로 미국 중산층을 대변하는 중간관리자들의 수효가 필요 없게 됐다. 자본의 무한한 증식은 사무자동화로 필요가 없어진 노동력을 제공하는 인간을 대량 해고하고, 최대 이윤의 확장이라는 고유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 순간 우리의 주인공 버크 데보레가 등장한다. 그린 밸리의 세일즈맨으로 출발한 베이비 부머 세대의 이 남자는 할시온 밀스의 벨리알 밀에서 23년간 특수 산업 용지 제작에 자신의 청춘을 바쳤다. 그의 헌신적인 노동의 대가로 회사에서는 안정적인 직장과 급여 그리고 건강보험을 제공했고, 고용인과 피고용인은 만족스러운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할시온 밀스가 이웃 캐나다의 제지 공장과 합병 결정이 나면서 괴로운 이별의 순간이 도래했다. 2,100명에서 1,575명으로 대대적인 인원 감축을 벌이는 과정에서 버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6개월을 옛 직장에서 버텼지만 결과는 정리해고였다. 전직을 위한 카운슬링 역시 아무런 의미없는 일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과 취업전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였다.

 

버크 데보레에게 유일한 선택은 비슷한 특수 제지 업계로 전직하는 것 뿐이었다. 어,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곳에서도 중년의 중간관리자 급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해고 있지 않았나? 그렇다면 잡마켓에는 버크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구직자들이 넘쳐 나고 있다는 말 아닌가? 만약 당신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한국에서라면 얼마 되지 않는 밑천을 가지고 닭을 튀기는 ‘레드오션’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자영업자들의 무덤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버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을 선택한다. 그것은 바로 경쟁자들을 ‘클린’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소설 <액스>의 초반에서 경쟁자들을 목록에서 지우기 위한 소품으로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에서 획득한 전리품 루거 권총이 등장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북미 대륙의 어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는 그래서 추적이 전혀 불가능한 그 권총 말이다. 국가폭력을 기반으로 건국된 미국의 유산인 폭력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총기다. 불나방처럼 어떤 위험이 있는 지도 모르고, 버크가 제지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즐겨보는 주간지에 올린 구인란을 보고 연락을 취한 첫 번째 희생자 허버트 에벌리 씨를 찾아간 버크는 손쉽게 경쟁자를 처리한다. 물론 그전에 루거를 사용하기 위해 연구도 하고 직접 사격연습을 하는 정성도 보였다. 첫 번째 킬링이 힘들었다면 향후 버크의 연쇄살인은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을 지도 모르겠지만, 너무나 손쉽게 성공하게 되자 자신감이 붙은 연쇄살인범의 액션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정글 경쟁에서 도태된 실업자 버크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짤라 버린 고용주들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분노의 화살을 구조적 모순에 돌리지 않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실업자 그리고 잠정적 경쟁자인 구직자들에게 돌린다. 그것은 마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노갈등을 부추기는 기득권층의 타락한 전략이 유효하다는 방증이라고나 할까. 가장이 경제활동으로 가정의 유지를 위한 소득 확보가 되지 않으면서, 한때 윤택했던 중산층 가정생활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우선 아내 마저리가 파트타임 일자리를 얻어 생활전선에 투입된다. 아내에게 알리지 않고 경쟁자들을 죽이러 다니는 와중에, 아내 마저리와의 결혼생활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게 된다. 불행은 언제나 홀로 오지 않는 법, 집에 돈나올 구멍이 없다는 걸 잘 아는 아들은 소프트웨어 절도에 나섰다가 경찰에게 체포된다.

 

이렇게 겹겹으로 누적된 불행이 버크의 주변을 강타하지만, 신념에 불타는 연쇄살인범은 목표를 수정하지 않는다. 그가 목표로 삼은 경쟁자들 역시 자신과 같은 처지의 평범한 가장이고, 일자리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동지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차례차례 사람을 죽이는 과정에서, 버크가 자신만의 논리를 앞세워 냉혹한 사회에 맞게 자신을 변형시켜 과정은 끔찍하다. 뉴욕 주의 제지 공장 매니저로 근무 중인 업튼 랠프 팰런의 자리야말로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결정한 버크는 모든 장애물들을 처리하기 시작한다.

 

버크의 살인 행각은 그가 계획한 대로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 딸과 불륜에 빠진 교수로 착각한 두 번째 희생자 부인의 예상치 못한 닦달에 그만 희생자는 3명으로 불어난다.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모든 정황이 예의 교수를 진범으로 지목하면서 버크는 혐의에서 벗어난다. 다만, 희생자의 직업과 총의 발사 탄도 추적으로 경찰의 의심을 사게 되면서 버크는 편리하고 간편한 총기 대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희생자와 말을 섞게 되었다가 일종의 관계가 성립되면서 잠시 회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곧바로 자신의 임무를 자각하게 된 냉철한 킬러는 자동차를 이용해서 희생자를 죽이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기민함도 잊지 않는다. 이런 계획을 세울 정도로 뛰어난 브레인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이라면 버크 같은 악당은 마땅히 자신의 악행에 어울리는 결말을 맞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클리셰이를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작가는 간단하게 파괴해 버린다. 일련의 범죄를 통해 자신감이 붙은 버크는 초범이 아니라 상습범으로 중형을 구형받을 수 있었던 아들의 범죄행위를 완벽하게 무마시키는데 성공한다. 그의 킬링은 계속되고, 마침내 업튼 팰런마저 해치우고, 가스폭발로 위장한 사고로 팰런의 집마저 날려 버린 버크는 마침내 팰런이 맡고 있던 매니저 자리를 얻고야 만다. 다른 희생자에게 자신의 악행을 덤탱이 씌워 면죄부를 부여 받게된 버크 데보레는 자신이 가진 기술을 이용해서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겠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한다.

 

도대체 무엇이 평범한 가장을 이런 악의 화신으로 돌변하게 만든 걸까? 자신이 오래 몸담아 온 조직에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냉혹하게 내쳐진 버크의 내적 분노는 영민한 머리로 수립한 계획과 철저한 자기방어 기제를 가동시켜 만든 논리로 세상에서 용서 받을 수 없는 살인이라는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오로지 자신이 하는 행위들은 모두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것이라며 자위한다. 실업으로 사회에서 유리되었을 때, 개인의 재교육과 재정착을 지원하는 복지시스템의 부재가 어떤 식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는 냉혹하게 짚어냈다. 이것을 마냥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당장 버크 데보레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됐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한편 도널드 웨스트레이크는 버크의 가정 문제에도 상당한 내공을 들였는데, 정리해고와 실업이 만들어낸 이슈가 단순하게 개인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상당히 유의미한 설정이었다. 마저리는 버크의 정리해고 소식을 듣자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면서, 앞으로 다가올 냉혹한 시절을 대비한다. 아들 빌리가 절도죄로 체포되었을 때, 같은 범죄자 특유의 감각을 동원해서 빌리가 숨겨둔 장물들을 가택수색에 대비해서 모조리 치워 버린다. 어쩌면 이렇게 믿음직한 가장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면서, 다른 남자에게 향하려던 떠나려던 마저리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결말에서 범죄자가 누리게 되는 해피엔딩은 역시 불편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웃의 평범한 가장을 그런 끔찍한 범죄자로 내몬 버크의 주변상황도 못지않게 불편했다. 소재의 설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전개 그리고 얼치기 킬러에서 출발해서 모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는 냉혹한 연쇄살인범이 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정교한 저술은 탁월했다. 단선적이고 평면적이지 않은 결말에 이르기까지 이십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 코스타 가브라스가 연출했다는 영화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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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서점 동탄점 오픈

 

이웃 화성 동탄 반송동 메타폴리스에 새로운 알라딘 중고서점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재빠르게 달려갔습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메타폴리스로. 예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서 헤매지 않고 금세 갈 수가 있었죠. 평일이라 그런지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예전에 주말에 갔을 적에는 정말 고생했거든요.

 

 

주차를 A블럭에 하는 바람에 건너가야 했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조금 어리둥절해 했지만 금세 적응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봤던 대로 건너가다 보니 여전히 공사 중인 곳들이 많더군요. 아마 동탄의 핫플레이스다 보니 주차공간이 부족해서 추가 공사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알라딘은 홈플러스 매장을 좋아하는지 메타폴리스 지하에도 홈플러스가 있더군요. 인천 계산동과 북수원 홈플러스에도 아마 매장이 있었죠. 북수원에는 종종 방문하지만 계산홈플러스 알라딘에는 못가 봤네요. 개인적으로 가본 곳 중에서 최고는 구월동 알라딘 매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 드디어 도착!

어느 매장이나 동일한 디자인으로 고객을 맞이하는 간판입니다.

아무래도 신도시에 입점한 탓인지 깨끗하고 좋습니다. 문득 그 전에는 어떤 매장이 자리를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쇼핑몰의 경우, 지역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단 입점했다가 폐점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희 동네 피트인의 경우에도 1년 정도 지나 자리를 잡아 가는 분위기더군요.

 

 

오늘 들어온 책이 무려 1,602권이라고 합니다. 아마 신규 출점의 경우 갠춘한 책들을 몰아 주는 경향이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 오늘 동탄점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미 사전에 살 책들을 조사해 왔기에 다른 책들은 사지 말자는 주문을 걸었습니다.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예상에 두지 않았던 책들을 만나 사게 되거든요. 어느 분은 같은 서점에 머물면서 자신이 찾던 책을 다른 고객이 사가는 경험도 했다고 하시더군요. 전 그전에 분당 서현점에 롤랑 바르트의 <기호와 제국>을 사러 갔다가 비슷한 체험을 했었습니다. 분명 있다고 하는데 해당 서가에 없는 겁니다. 스택이 잘못 되었거나 누군가 들고 있다는 말이겠죠. 아쉬웠었는데 이젠 절판이 되어 더더욱 아쉽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다 못 읽고 반납한 기억이 납니다.

 

 

역시 신간코너가 눈에 들어옵니다. 라이벌 그래24 중고서점에서는 대부분 책들의 가격이 정가의 50% 선에서 정해져 있지만 알라딘에서는 책의 컨디션에 따라 최상, 상, 중 그리고 하급으로 분류를 하죠. 그래서 왕건이 아이템을 득템하는 그런 재미가 있습니다. 알라딘에서도 물론 최상급 컨디션의 중고는 저렴하지 않은 가격이긴 하지만 카드나 기타 등등의 혜택을 이용하면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죠.

 

 

오늘 팔고 간 책 코너입니다. 인터넷으로 조회를 해도 잘 나오지 않는 따끈따끈한 책들을 구할 수가 있는 코너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오던 레이 황 교수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도 바로 이 코너에서 데려왔습니다.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반드시 중고책으로 구하리라 결심을 하고 있던 차에 만나서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바로 산 기억이 납니다.

 

 

 

사전에 조사해 간 책 두 권부터 우선적으로 책바구니에 담았습니다. 하나는 필립 큔 교수의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이란 책입니다. 책과함께 출판사에서 아마 처음으로 나온 책이라는 칼럼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품절 책이라 구할 수가 없어서 도서관을 이용해 보려고 했으나 결국 못 다 읽고 반납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분명 예전에 한 번 산 것 같은데 어마무시한 책탑 속에서 찾기를 포기하고 마침내 수중에 넣을 수가 있었습니다. 청나라 건륭 연간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다룬 책으로 서구 지식인이 쓴 중국사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케이스로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책이 있습니다.

 

다른 한 책은 역시 역사책으로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나온 멍만 선생의 <여황제 무측천>입니다. 수많은 황제들이 명멸해간 중국 역사 속에서 유일무이하게 황제의 자리에 까지 올랐던 여황제 측천무후 무조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서적입니다. 당나라 고조 이연을 도운 개국공신의 자리에 올랐던 무사확의 둘째딸로 당태종의 후궁 재인이 되었다가 훗날 태종 이세민의 아들 고종 이치의 황후가 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팔자도 센 여인이로구만. 암튼 일단 읽기는 시작했는데 첫 번째 장 정도만 읽었다. 급한 불을 끄는 대로 읽어야지.

 

 

 

아직 문을 연지가 얼마 되지 않아 소장 도서가 꽉 차 있지는 않습니다. 주변에 입소문이 나고 그동안 쟁여 두었던 책들을 그야말로 박스째 가져 오기 시작하면 감당이 안될 정도로 그렇게 책들이 불어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는 곳만 하더라도, 차로 몇 상자씩 실어 오는 걸 많이 봤거든요. 물론 그 와중에 판매가와 매입 여부 때문에 스탭 분들과 실랑이하는 경우도 종종 있더군요. 인터넷에서 구입을 한다고 하더라도 현장에서 매입 거부를 당할 수 있다는 고지가 있는데도, 그리고 굳이 매입처에서 안 사겠다는 책을 팔겠다고 고집 부리는 모습은 보기 좀 그렇더군요. 안 사겠다면 버리거나 혹은 기증 등등의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걸 유념했으면 좋겠습니다.

 

 

역시나 신규점이라 그런지 실내가 깨끗하고 아주 좋았습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서점만큼 좋은 공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저희 동네 알라딘에 며칠 전에 들러 보니, 아이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빼곡하게 한 구석에 앉아서 열심히 책을 보는 모습이 아주 흐뭇했습니다. 물론 책읽이에만 열중마시고 필요한 책은 사주시는 센스!

 

 

자자, 다음은 이제 동탄점에서 제가 만난 책들입니다. 찰스 부카우스키의 책은 어찌어찌해서 다 구해서 읽고 있답니다. 그런데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동탄점에 가서 살펴 보았습니다. 영시를 번역한 것 같은데, 사실 시는 제가 주력하는 분야가 아니라 좀 고민하게 됐습니다. 벤 오크리의 책까지 사게 돼서 부담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 이 책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양이 관련 도서는 관심이 없어서 패스했는데 그래도 부카우스키 팬이니 사 버려?

 

 

올해 작가 전작주의를 나름 선포하고 열심히 읽은 이언 매큐언 작가의 <체실 비치에서>였습니다. 물론 다 읽은 책이고, 이미 소장까지 하고 있지만 반가워서 사진에 담아 봤습니다. 영화로도 제작되어 곧 개봉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그나저나 <속죄>는 언제 다 읽게 될까요. <속죄>만 다 읽으면 이언 매큐언 읽기는 일단락되겠죠.

 

 

올 여름에 나올 거라던 필립 로스의 <미국을 향한 음모>는 도대체 언제나 출간될지. 2년 전 겨울에 읽은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은 정말 최고로 야한 소설 중의 하나였다. 동명의 영화도 있다고 하는데 아직 감상하지 못했다. 아마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는지 책이 없어서 살까 말까 망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읽은 책은 잘 사지 않게 되더라. 아마 당장에 구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겠지. 혹시라도 절판되거나 그렇게 된다면 바로 사지 않았을까나.


이상은 짧은 나의 동탄 알라딘 방문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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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08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규출점인 경우 정말 괜찮은 책 몰아주는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바구니에 담으신 것만 봐도 득템이네요!

레삭매냐 2017-08-08 14:2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

신규 출점의 경우 기존의 다른 점포들에서 알짜배기
책들만 우선적으로 선정해서 몰아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갠춘한 책들이 있어야 고객들이 찾을 테니
까요.

cyrus 2017-08-08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동성로점, 상인점이 들어선지 얼마 안 됐을 무렵에 절판된 좋은 책들이 많이 보였고, 샀던 것 같습니다. ^^

레삭매냐 2017-08-08 14:30   좋아요 0 | URL
그렇죠 ~

그래서 새로 생기면 바로 달려 가서 쓸어와야
합니다. 라이벌들이 다 챙겨 가기 전에 말이죠 ㅋㅋ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베스트셀러의 유혹? 잘 모르겠다. 그냥 이 책이 읽고 싶었다. 언젠가 들은 문학동네 팟캐스트 채널1 문학이야기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예능 알쓸신잡 출연으로 수년 만에 발표한 소설집도 순항 중이고, 이제 곧 영화도 개봉예정이라고 하니 작가에게는 겹경사다.

 

책을 읽기 전에 팟캐스트로 책의 저간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입수해서, 사실 책읽기는 어쩌면 내가 들은 것의 점검 정도였을 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의도와 그리고 날카로운 예봉의 평론가의 포인트를 듣고 나니 책읽기의 재미가 배가 된다. 저자의 우려대로, 비슷한 제목인 아멜리에 노통브의 <살인자의 건강법>이 연상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150쪽 남짓의 경장편인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은퇴한 살인자가 마지막 살인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 김병수는 25년간 그만 둔 살인을 다시 결심하는 걸까? 은퇴를 번복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대두된 심각한 문제 하나가 있다. 그는 지금 시간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 현대적 병명으로 치환하자면,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말이다.

 

이미 이 지점에서 책은 충분히 독자로 하여금 흥미로움과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전직 수의사인 이 연쇄살인범은 아마추어 시인이자, 고전읽기를 즐기는 문인이다. 이미 십대에 폭력가장인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은퇴시켰고, 그것을 시발로 해서 킬러의 길에 들어섰다. 그가 주로 활동하던 시대인 1960~70년대는 체계적인 과학수사 따위는 없었고, 사로잡히지 않고 마음대로 무대를 휘저을 수가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매혹적인 것이 살인이었노라고 기억을 잃어가는 킬러는 담담하게 때로는 냉혹하게 기술한다.

 

작가는 초반부터 대놓고 은퇴한 살인자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치매환자라고 선포하지만, 독자들은 작가가 놓은 교묘한 덫에 바로 걸려 버린다.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오락가락하는 주인공의 정신에 대해 독자는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순간의 착란이야말로 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반전의 복선이 아니었을까. 그 어느 때보다 느리게, 그야말로 김병수가 잃어가는 기억처럼 한땀한땀 써낸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은 순수한 악의 본질을 관통한다.

 

인간이란 존재가 결코 싸워 이길 수 없는 존재인 불변의 크로노스, ‘시간’이야말로 이 소설의 중심이다. 주인공 김병수는 그리스 고전에 등장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그 사실을 잊어버린 오이디푸스를 비웃으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묻는다. 그에게 영화까지 만들어진 ‘살인의 추억’은 어쩌면 자신의 존재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사방에서 조여 들어오는 시간의 압박에 맞서 기록하고, 심지어 녹음까지 하며 필사적으로 맞서지만 한 때 무시무시했던 연쇄살인범의 승부는 이미 갈려있다. 다만 타이밍의 문제다. 그가 남긴 기록조차도 온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독자는 무시로 간과한다. 실제 생활에서라면 어림도 없겠지만 이 역시 문학이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는 재미일 것이다.

 

아직까지 김영하 작가의 다른 소설을 충분히 접해 보지 못해, 비교평가가 어렵지만 전작들에 비해 유머가 늘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이 노련한 살인자는 교양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유머도 갖췄다. 일본 방문길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는 공항직원의 질문에 그는 당당하게 “killing people"이라고 대답하고, 질문자는 ”healing people"이라고 잘못 알아듣는다. 촌철의 유머가 빛나는 장면이다. 시를 가르치는 문화센터 강사도 시원찮으면 은퇴시켜 버리겠다는 그의 독백이 농담처럼 들리지만은 않는다. 전자가 밝은 차원의 유머라면, 후자는 블랙유머 쯤 되겠다.

 

개인적으로 살인자 김병수가 살인을 그만 두게 된 계기가 마지막 살인 후, 당한 교통사고 때문이라고 했는데 소설에서 그 뒤의 삶에 대한 설명부족이 좀 아쉬웠다. 살인자는 그 뒤에 어떻게 먹고사니즘을 해결했지? 소설을 보니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어 보이는데, 궁금하다. 그리고 팟캐스트에서 신형철 평론가가 역사적 특수화라는 점으로, 한국화된 시리얼 킬러의 원형을 제시했다고 하는데 좀 더 그 부분에 대해 심도 있게 다뤘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정의를 행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천조국의 시리얼 킬러 덱스터와 김병수의 차이점은 무얼까. 그 누구도 그들에게 그럴 권리를 주지 않았지만, 체포와 처벌을 아랑곳하지 않고 목표물을 제거하는 냉혹한 시리얼 킬러가 어느새 문학에서 하나의 클리셰이(cliche)라는 전당의 주인이 된 건 아닐까.

 

 

기억을 잃어가는 이에게 두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이미 물 건너갔고, 지금인 현재도 같은 운명이다. 그에게는 역설적으로 미래기억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미래기억 역시 소멸을 전제로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렇게 존재의 소멸을 모른 채 혹은 외면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가가 던지는 짓궂은 농담이다.

 

* 다음 달에 동명의 영화가 개봉예정이라고 한다. 김병수 역은 연기라면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설경구가, 오달수와 김남길가 조연을 그리고 걸그룹 AOA 출신 설현이 출연한다고 한다. 소설은 경장편인데 영화는 두시간이라니, 아마 디테일이 많이 추가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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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8-08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내용은 가물가물 하네요.곧 영화로 나온다는데 주연이 설 씨라서 좀 망설여지네요. 오랜만에 떠올려보네요. 더운 날씨 건강 잘 챙기세요.

레삭매냐 2017-08-08 13:21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아도
영화 트레일러 덧글을 보니 흥행이 될지
궁금해 하는 글들이 있더군요.

쇼코 2017-08-08 1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영화가 개봉한다고 해서 책을 읽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레삭매냐님 글 보니 소설이 더 궁금하네요. 레삭매냐님은 팟캐스트를 듣고 책을 더 재밌게 읽었다고 하셨는데 저는 레삭매냐님 글 덕에 소설을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을.것 같습니다^^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레삭매냐 2017-08-08 13:22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내 머릿속의 지우개> 스크린
플레이 작업도 한 적이 있다는 김영하
작가가 직접 각색 작업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2017-08-08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8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리를 건너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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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기대를 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요시다 슈이치 작가의 책들을 최근에 읽기 시작했는데 신간 <다리를 건너다>에서 요시다 씨는 독자의 예상을 뛰어 넘는 그런 파격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했다. 작가 소설의 핵심요소 중의 하나는 불륜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불륜”에대한 정의를 검색해 보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데가 있음’라고 되어 있었다. 단순하게 결혼생활에서 다른 상대를 만나는 것을 불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생각과 사전적 정의는 상이했다. 물론 광의의 차원에서 본다면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작가가 그 누구보다 멋지게 잘 다루는 소재를 활용하면서 또 차원의 세계로, 다시 SF물을 연상시키는 결말에까지 도달하는 장면을 보면서 역시 작가는 이래야 하는구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자세로 새로운 도전을 마다해야 하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결혼 8년차 아이가 없는 아키라와 아유미 부부는 부모가 싱가폴로 취업해서 가족이 이사하게 되었지만 거부하고 일본에 남기로 결정한 고등학교 조카 고타로와 일상을 영위한다. 화자 아키라는 도쿄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아유미의 처조카 고타로와 함께 사는 걸 그다지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면서도, 최근에 사귀기 시작한 유카짱과의 관계를 걱정한다. 유사 아버지의 고민이라고 해야 할까? 고타로와 유카짱은 아키라의 걱정 대로 결국 모종의 사고를 치게 된다.

 

한편 갤러리 오너 아유미에게 자신의 작품을 봐달라며 일본주나 쌀을 보내오고 심지어 집에까지 찾아오는 예술가 지망생 아사히나 다쓰지의 집요함에 아유미는 진저리를 내고 있는 중이다. 아키라는 조심스럽게 아사히나 군의 가능성에 대해 전문가인 아내에게 물어보지만 아내는 단칼에 전혀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선언한다. 아유미의 판단 착오였을까? 아니면 저명한 인사의 추천으로 아유미의 예상과는 달리 아사히나 군은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이 또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이 에피소드에서 등장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언급에 마음 한구석이 저릿저릿해져 온다.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본 작가도 희대의 비극에 대해 글을 남겼구나하고 말이다.

 

다음에 등장하는 여름 에피소드에서는 아키라 스토리에서도 등장했던 도의원 성희롱 사건의 진범일지도 모르는 히로키의 아내 아쓰코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현재에서 70년이나 지난 다음의 이야기인 <그리고, 겨울> 편 전까지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묘한 접점을 가지고 있다. 내가 그동안 요시다 슈이치를 읽으면서 느낀 점인데 이 작가는 그런 접점을 묘사하고 전개하는데 있어 매우 탁월한 실력을 보여준다. 무리하지 않으면서 이어지는 부드러운 전개, 아 전의 에피소드에서 그런 장면들이 있었지 하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발군의 능력 말이다. 현대 뉴스 미디어의 활용에 있어 요시다 슈이치는 정말 뛰어나구나 싶다.

 

아내는 마초 스타일의 남편 히로키가 성희롱 사건에서 잡히지 않은 주범이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남편이 보여준 그간의 행동을 유추해 볼 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다. 아들 다이치 군이 무더운 여름날, 수영장 교습 중에 쓰려졌다는 소식에 놀라운 마음을 추스르며 아들을 절친한 아야짱 엄마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데려온다. 남편 히로키가 렌즈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 에하라 씨에게 부정한 뇌물을 받는 장면을 목격한 아쓰코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남편과 가정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충격적인 뉴스들이 연달아 등장해서 자기 남편의 스캔들이 덮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구독 중인 주간지 담당에게 전화를 해서 새로운 특종을 캐달라는 독촉을 하기도 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아쓰코의 특종 독촉은 가을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접점을 만들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자 남편의 스캔들 꼬리가 잡혔는가 긴장하지만 아야짱 엄마와 수영장 오야 코치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안도하기도 한다. 자신이 알게 된 비밀 때문에 시작된 아쓰코의 번민은 예상치 못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자, 이제 소설 <다리를 건너다>에서 가장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 번째 에피소드 <가을-겐이치로>가 등장할 차례다. 그동안 요시다 슈이치 작가는 개인의 영역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에 전력을 다했었는데 이번 소설에서는 사회 이슈들에 대한 질문들에 도전한다. 우리나라의 세월호 사건일 필두로 해서, 도의원 성희롱 사건, 파키스탄의 말랄라 유사프자이 테러사건, 2014년 홍콩의 우산혁명에 이르는 다양한 이슈들을 이번 작품에 녹여 내고 있다. 다큐멘터리 작가 겐이치로는 와타이고 동아리에서 만난 가오루코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 남자 겐이치로는 평화헌법을 지지하는 일본 국민 대신 말랄라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지지하는 가논짱을 취재하고, 홍콩의 우산혁명을 취재하는 자신의 일에 충실한 남자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겐이치로 삶의 균열은 약혼자 가오루코에게서 비롯된다. 앞선 에피소드의 주인공이었던 아쓰코 씨의 특종 독촉전화를 받았던 주간잡지 사의 친구로부터 애인 가오루코와 한때 그녀가 빠졌던 유부남 유키 씨와 함께 지하철을 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겐이치로는 가오루코가 약속을 갑자기 취소한 날 불길한 예감에 유키 씨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아, 그전에 요시다 슈이치 작가는 모든 에피소드를 종결시키는 <그리고, 겨울> 편에 대비해서 미래의 안드로이드 인간을 만들 수 있는 연구를 진행 중인 사야마 교지 교수를 등장시킨다. 자신의 세포를 이용해서 정자와 난자의 유전자 재조합 과정을 통한 복제인간 프로젝트 말이다. 이미 영화 <아일랜드>에서도 등장했던 예의 컨텐츠에 대한 기시감이 겐이치로가 말하는 “스페어” 개념과 어우러지면서 과연 요시다 슈이치 작가가 왜 굳이 이 스토리를 소설에 집어넣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궁금증은 결말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다시 겐이치로와 가오루코의 이야기로 돌아와 결국 겐이치로는 옛 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자와 그 남자가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안 본 것으로 할 수도 있었겠지만, 순수한 겐이치로의 양심은 그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세월호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의 양심 그리고 위안부가 없었다는 주장을 펼치던 아사히 신문의 추락이라는 뉴스가 자기 남편의 부정을 감추어 줄 거라는 아쓰코 같은 개인이 대변하는 일본인들의 양심을 예리하게 타격한다. 결국 가루이자와 별장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전국을 도주하던 겐이치로는 쓰시마에서 와타이고를 혼신의 힘을 다해 두드리며 삶 가운데 옳지 않은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소설 <다리를 건너다>는 결말의 수레를 굴리기 시작한다. 처음의 세 이야기들이 현재상을 다룬 거라면 <그리고, 겨울>은 70년 뒤 사야마 교지 교수가 개발한 기술이 창궐한 디스토피아 일본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어쩔 수 없이 리들리 스콧의 레플리컨트를 연상시키는 ‘사인’이 도래했다. 가사나 병간호 같이 기존의 인력이 동원되는 로봇이 대신하고, 70만 명 연구소에서 태어난 사인(복제인간)과 결혼도 하고, 군인으로 전선에 배치하기도 한다. 역시 인간과 같이 유한한 존재라는 점 그리고 생식능력이 없다는 점 등은 레플리컨트와 유사하다. 주인공 히비키와 린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릭 데커드와 레이철처럼 알 수 없는 지점을 향해 도주를 감행한다. 과거의 모든 것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게 된 70년 후 미래는 과연 교정될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을 오가는 웜홀까지 등장한 <다리를 건너다>를 확실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요시다 슈이치 작품 중에서 최고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문제는 몇 개 읽지 않았다는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복잡하면서도 또 결말이 너무 궁금하게 만드는 저력을 보여준 저자는 미래를 위해 현재에 옳은 일을 하라고 주문한다. 이 순간의 결정들은 모두 미래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무엇이 잘못 되었다면, 충분히 반성하고 고치면 될 게 아닌가. 그렇게 세상을 바꾸기 위한 고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는 열대야 속에서 눈을 비벼 가며 읽을 정도의 수고를 감내할 만한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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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7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8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