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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 ㅣ 버티고 시리즈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던가? 있었다. 블로그의 리뷰를 검색해 보니 7년 전, <뉴욕을 털어라>라는 책으로 작가와 처음 만났다. 나에게는 생소한 작가지만 위키피디아로 검색해 보니 1959년부터 작고한 2008년까지 49년 동안 모두 108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사후에도 4편의 소설이 더 발표됐다. 1년에 2.2편 꼴로 마치 소설 찍어내는 기계처럼 그렇게 소설을 쓴 모양이다. 정말 대단한 작가로구나.
이번에 썰을 풀 <액스>는 작가가 1997년에 발표한 92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1997년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바로 IMF가 터진 그해다. 언제까지나 성장할 것만 같았던 세계가 빵하는 소리와 함께 신자유주의 시절의 붕괴를 예고한 그런 시기였다. 우리에게는 IMF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베이비 부머 세대의 미국인들에게는 사무자동화라는 이름으로 미국 중산층을 대변하는 중간관리자들의 수효가 필요 없게 됐다. 자본의 무한한 증식은 사무자동화로 필요가 없어진 노동력을 제공하는 인간을 대량 해고하고, 최대 이윤의 확장이라는 고유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 순간 우리의 주인공 버크 데보레가 등장한다. 그린 밸리의 세일즈맨으로 출발한 베이비 부머 세대의 이 남자는 할시온 밀스의 벨리알 밀에서 23년간 특수 산업 용지 제작에 자신의 청춘을 바쳤다. 그의 헌신적인 노동의 대가로 회사에서는 안정적인 직장과 급여 그리고 건강보험을 제공했고, 고용인과 피고용인은 만족스러운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할시온 밀스가 이웃 캐나다의 제지 공장과 합병 결정이 나면서 괴로운 이별의 순간이 도래했다. 2,100명에서 1,575명으로 대대적인 인원 감축을 벌이는 과정에서 버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6개월을 옛 직장에서 버텼지만 결과는 정리해고였다. 전직을 위한 카운슬링 역시 아무런 의미없는 일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과 취업전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였다.
버크 데보레에게 유일한 선택은 비슷한 특수 제지 업계로 전직하는 것 뿐이었다. 어,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곳에서도 중년의 중간관리자 급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해고 있지 않았나? 그렇다면 잡마켓에는 버크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구직자들이 넘쳐 나고 있다는 말 아닌가? 만약 당신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한국에서라면 얼마 되지 않는 밑천을 가지고 닭을 튀기는 ‘레드오션’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자영업자들의 무덤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버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을 선택한다. 그것은 바로 경쟁자들을 ‘클린’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소설 <액스>의 초반에서 경쟁자들을 목록에서 지우기 위한 소품으로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에서 획득한 전리품 루거 권총이 등장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북미 대륙의 어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는 그래서 추적이 전혀 불가능한 그 권총 말이다. 국가폭력을 기반으로 건국된 미국의 유산인 폭력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총기다. 불나방처럼 어떤 위험이 있는 지도 모르고, 버크가 제지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즐겨보는 주간지에 올린 구인란을 보고 연락을 취한 첫 번째 희생자 허버트 에벌리 씨를 찾아간 버크는 손쉽게 경쟁자를 처리한다. 물론 그전에 루거를 사용하기 위해 연구도 하고 직접 사격연습을 하는 정성도 보였다. 첫 번째 킬링이 힘들었다면 향후 버크의 연쇄살인은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을 지도 모르겠지만, 너무나 손쉽게 성공하게 되자 자신감이 붙은 연쇄살인범의 액션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정글 경쟁에서 도태된 실업자 버크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짤라 버린 고용주들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분노의 화살을 구조적 모순에 돌리지 않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실업자 그리고 잠정적 경쟁자인 구직자들에게 돌린다. 그것은 마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노갈등을 부추기는 기득권층의 타락한 전략이 유효하다는 방증이라고나 할까. 가장이 경제활동으로 가정의 유지를 위한 소득 확보가 되지 않으면서, 한때 윤택했던 중산층 가정생활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우선 아내 마저리가 파트타임 일자리를 얻어 생활전선에 투입된다. 아내에게 알리지 않고 경쟁자들을 죽이러 다니는 와중에, 아내 마저리와의 결혼생활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게 된다. 불행은 언제나 홀로 오지 않는 법, 집에 돈나올 구멍이 없다는 걸 잘 아는 아들은 소프트웨어 절도에 나섰다가 경찰에게 체포된다.
이렇게 겹겹으로 누적된 불행이 버크의 주변을 강타하지만, 신념에 불타는 연쇄살인범은 목표를 수정하지 않는다. 그가 목표로 삼은 경쟁자들 역시 자신과 같은 처지의 평범한 가장이고, 일자리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동지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차례차례 사람을 죽이는 과정에서, 버크가 자신만의 논리를 앞세워 냉혹한 사회에 맞게 자신을 변형시켜 과정은 끔찍하다. 뉴욕 주의 제지 공장 매니저로 근무 중인 업튼 랠프 팰런의 자리야말로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결정한 버크는 모든 장애물들을 처리하기 시작한다.
버크의 살인 행각은 그가 계획한 대로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 딸과 불륜에 빠진 교수로 착각한 두 번째 희생자 부인의 예상치 못한 닦달에 그만 희생자는 3명으로 불어난다.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모든 정황이 예의 교수를 진범으로 지목하면서 버크는 혐의에서 벗어난다. 다만, 희생자의 직업과 총의 발사 탄도 추적으로 경찰의 의심을 사게 되면서 버크는 편리하고 간편한 총기 대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희생자와 말을 섞게 되었다가 일종의 관계가 성립되면서 잠시 회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곧바로 자신의 임무를 자각하게 된 냉철한 킬러는 자동차를 이용해서 희생자를 죽이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기민함도 잊지 않는다. 이런 계획을 세울 정도로 뛰어난 브레인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이라면 버크 같은 악당은 마땅히 자신의 악행에 어울리는 결말을 맞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클리셰이를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작가는 간단하게 파괴해 버린다. 일련의 범죄를 통해 자신감이 붙은 버크는 초범이 아니라 상습범으로 중형을 구형받을 수 있었던 아들의 범죄행위를 완벽하게 무마시키는데 성공한다. 그의 킬링은 계속되고, 마침내 업튼 팰런마저 해치우고, 가스폭발로 위장한 사고로 팰런의 집마저 날려 버린 버크는 마침내 팰런이 맡고 있던 매니저 자리를 얻고야 만다. 다른 희생자에게 자신의 악행을 덤탱이 씌워 면죄부를 부여 받게된 버크 데보레는 자신이 가진 기술을 이용해서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겠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한다.
도대체 무엇이 평범한 가장을 이런 악의 화신으로 돌변하게 만든 걸까? 자신이 오래 몸담아 온 조직에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냉혹하게 내쳐진 버크의 내적 분노는 영민한 머리로 수립한 계획과 철저한 자기방어 기제를 가동시켜 만든 논리로 세상에서 용서 받을 수 없는 살인이라는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오로지 자신이 하는 행위들은 모두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것이라며 자위한다. 실업으로 사회에서 유리되었을 때, 개인의 재교육과 재정착을 지원하는 복지시스템의 부재가 어떤 식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는 냉혹하게 짚어냈다. 이것을 마냥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당장 버크 데보레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됐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한편 도널드 웨스트레이크는 버크의 가정 문제에도 상당한 내공을 들였는데, 정리해고와 실업이 만들어낸 이슈가 단순하게 개인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상당히 유의미한 설정이었다. 마저리는 버크의 정리해고 소식을 듣자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면서, 앞으로 다가올 냉혹한 시절을 대비한다. 아들 빌리가 절도죄로 체포되었을 때, 같은 범죄자 특유의 감각을 동원해서 빌리가 숨겨둔 장물들을 가택수색에 대비해서 모조리 치워 버린다. 어쩌면 이렇게 믿음직한 가장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면서, 다른 남자에게 향하려던 떠나려던 마저리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결말에서 범죄자가 누리게 되는 해피엔딩은 역시 불편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웃의 평범한 가장을 그런 끔찍한 범죄자로 내몬 버크의 주변상황도 못지않게 불편했다. 소재의 설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전개 그리고 얼치기 킬러에서 출발해서 모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는 냉혹한 연쇄살인범이 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정교한 저술은 탁월했다. 단선적이고 평면적이지 않은 결말에 이르기까지 이십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 코스타 가브라스가 연출했다는 영화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