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 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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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언제 다시 읽어도 좋은 법이다. 언제고 나는 <싱글맨>이 재출간될 줄 알았다. 새로운 출판사에서 새로운 옷으로 입고 나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원서로도 사서 대조해 보고, 영화도 구해서 본 기억이 난다. 탑게이 패션 디자이너 출신 감독 톰 포드의 연출작이었다. 대단히 탐미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콜린 퍼스 그리고 그의 제자로 등장한 니콜라스 홀트에 대한 짧은 기억 정도.

 

어떤 책을 다시 읽는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이제는 예전에 읽었던 기억에 영화를 보고 느낀 점들, 그리고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느낀 점들이 채색되는 게 아닌가. 소설의 주인공 조지는 올해 58세로 최근에 애인 짐을 교통사고로 잃은 영문학 교수님이다. 아마 주변인들은 퀴어라는 그의 성적 취향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역시나 보헤미안 유토피아 캘리포니아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62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자그마치 16년이나 파트너로 같이 살아온 짐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조지의 하루가 소설 <싱글맨>이 그리는 내용이다.

 

미국의 개척자들처럼 전쟁이 끝난 뒤, 자손을 번창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꿈과 희망의 나라 남가주, 캘리포니아로 몰려온 모양이다. 조지와 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 출신의 조지는 새로운 개척자들의 뒤를 따라 바닷가 근처에 근사한 집을 마련했다. 아이들을 좋아했던 짐과는 달리 아이들로 벅적대는 이웃과 친근하게 지내지는 못한 모양이다. 짐이 죽은 다음, 그가 기르던 구관조를 비롯한 동물들도 생전에 약속대로 처분했다. 전쟁이 끝나고 휘발유 배급이 끝나자, 좋은 시절이 왔다. 그리고 미국의 번영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는 미끈하게 닦인 고속도로를 달려 출근하는 조지의 모습을 통해 팍스 아메리카나 시절의 자신감과 번영을 엿보게 된다.

 

아, 정치적인 이야기 하나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1962년 가을부터 비롯된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전 미국을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거대한 악의 제국 소련이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은 미본토에 사는 이들에게 악몽이었다. 당장에라도 지구가 멸망한 것 같은 위기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파티를 벌이고, 사랑을 나누며 음주를 즐겼다.

 

소설 <싱글맨>에서 저자 크리스 아이셔우드는 마치 카메라 앵글을 조지의 일상에 들이댄 것처럼 그렇게 정밀하게 추적한다. 카메라가 느린 속도로 주인공의 이미지를 잡아낸다면, 작가는 조지의 감정까지도 카메라에 담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스스로를 추잡한 늙은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 중년의 교수는 테니스장에서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청년들의 모습에 매혹당하기도 한다. 강의실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작품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기도 하고, 죽은 애인과 바람이 났던 도리스의 병문안을 가서 자신의 살아있음에 위로를 받기도 한다. 또 처음에 선약이 있다며 거절했지만 같은 영국 출신 친구 샬럿을 방문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영화에서도 비중있게 다룬 제자 케니 포터와의 만남, 영화에서는 케니의 역할을 아마 니콜라스 홀트가 맡았었지. 그의 젊음을 부러워하면서, 살짝 유혹에 가까워 보이는 전개는 소설의 후반을 장식하는 투어 드 포스가 아닐 수 없다.

 

누가 봐도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는 설정부터 시작해서, 캘리포니아의 나른한 분위기, 유혹을 넘어서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계를 누비는 주인공의 절제된 감정선의 표현은 확실히 대가다운 면모라고 생각한다. 소설이 보다 주인공 조지의 감정에 치중했다면, 아무래도 톰 포드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화는 그런 감정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의 재현에 충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탐미적인 영상은 또 어떤가. 영화가 소설의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라는 점을 보았을 때 결말 부분 또한 충분히 이해가 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싱글맨’ 조지에게 캘리포니아가 천국일 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상실에 대한 묘사도 일품이었고, 체육관에서 운동을 통해 비록 예전만한 몸매는 아니지만 강단 교수라는 일자리와 경쟁을 통해 동년배들보다 우월하다는 자의식의 발로는 역시나 인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케니에 대한 감정은 고대 플라톤 시절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그 접점을 찾아보려고 했던가.

 

소설 <싱글맨>은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펼쳐지는 사랑과 죽음, 질투 그리고 유혹에 이르는 개인의 다양한 감정들을 그야말로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수작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좋은 책은 두 번 읽어도 역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나저나 새로 나온 책의 표지는 정말 화끈하구나.

참고로 역자는 구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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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02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창비 세계문학에서 나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작품 두 권 읽고 이건 아직 아껴두고 있었는데 아껴두길 잘했군요. 창비에서 개정판 나온 것으로 읽어야겠어요. ㅎㅎ

레삭매냐 2017-08-02 10:02   좋아요 1 | URL
그러셨군요 !
전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베를린이여 안녕
이 예전에 독서 모임 책이어서 바로 두 권
모두 주문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 크리스 아이셔우드 판권을 창비가
가지고 있는 모양이네요 :> 다른 책들도
신속하게 출간해 주시길.

cyrus 2017-08-02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 속 인물이 소설 주인공 조지를 의미하겠죠? 벌거벗은 여성을 거인으로 묘사하고, 그걸 지켜보는 남성이 있는 구도가 마그리트의 그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레삭매냐 2017-08-02 11:35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도 그렇게 보입니다.

영화에서 콜린 퍼스가 연기한 조지 교수님
의 이미지를 그대로 따온 게 아닌가 싶네요.

AgalmA 2017-08-03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싱글맨> 소설 너무 빨리 품절된 거 같아 저도 기다리던 참였는데^^ <에브리맨> 호평일 때도 늑장부리다 뒤늦게 보고 감탄했는데 이 책도 그럴 거 같아요ㅎ
<싱글맨> 영화 보고 콜린 퍼스 다시 봤어요^^

레삭매냐 2017-08-03 14:18   좋아요 1 | URL
저도 예전에 구할 수 있을 적에는 거들떠도 안보고
있다가 절판 품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구했지요. 낙서가 여기저기 있는 중고책이었지만
나름 정겨운 느낌이어서 그대로 소장했습니다.

영화에서 콜린 퍼스, 말씀대로 정말 대단했습니다.
 
일요일들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10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북스토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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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작가의 책을 세 권 정도 읽으면 그의 스타일이 보인다고나 할까. 지난 주부터 읽기 시작한 요시다 슈이치의 경우가 그랬다. 그리고 보니 그전의 이언 매큐언도 그렇지 않았던가. 무더운 여름을 나기에 정말 적합한 작가의 책읽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의 두 권은 사서 읽었는데, 이번에 읽은 <일요일들>은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사랑에 난폭>도 빌려다 봐야지.

 

내가 가본 도시 도쿄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메트로폴리스답게 무채색의 도시였다. 하긴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그렇게 큰 도시를 본다는 건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르겠지. 인구 천만을 자랑하는 도시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우리네 드라마에 등장하는 서울처럼 그렇게 멋지고 휘황찬란한 이야기들만 품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구질구질한 그런 이야기들도 숨어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 일류 대 학벌을 가지고서도 특별한 직업 없이 홀서빙을 하는 호스티스로 산다던가, 의사 여친과 사귀었지만 결국 지금은 외로운 솔로가 되어 매식 대신 스스로 밥 해먹겠다는 결심을 한 그런 청춘들의 이야기 정도.

 

사람은 어떨 때 외롭다는 느끼게 되는 걸까? 주변에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 그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나의 외로움은 좀 덜어질까. 그렇지도 않을 듯 싶은데. 외로움은 어쩌면 오롯하게 내가 스스로 지고 가야하는 그런 운명적인 게 아닐까. 그래도 친구가 있다면 좀 덜 외로울 지도 모르지. 반듯하게 사는 친구 치카게가 강도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자친구의 집으로 찾아가는 나츠키의 경우를 살펴보자. 나와 다른 점이 친구들과의 관계를 윤택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런 너무 다름이 관계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오사카로 떠난 여행길에서 삼총사 중의 한 명이 아야와 겐지의 오붓한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다가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장면을 보면서 단합여행이나 어떤 선의가 좋은 결과만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었다.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것도 보통 관계는 아니겠지. 물론 용기도 필요하겠고. 하지만 그 피해자가 내가 될 수 있다면 이건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나와는 신분이 맞지 않는 여자친구는 의사가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녀는 한국인이다. 같이 하는 시간이 점점 더 사라져 가고, 어렴풋이나마 이별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순간의 나.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지만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져 버린다. 미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이라고 해야 할까.

 

규슈 시골에서 친구 아들의 결혼식 참석차 도쿄에 올라온 김에 시내 구경이 하고 싶다고 상경한 아버지를 바라보는 화자의 이야기도 외로움의 다름이 아니다. 아들 게이고는 사람이 북적대는 게 싫다. 그래도 어쩌랴, 하나 뿐인 아버지와의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은가. 언젠가 가족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하다는 대학친구의 말을 듣고 당시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나중에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그런데 요시다 슈이치 작가는 어쩌면 그렇게 밍밍해 보이는 이야기들에 한 가지 요소를 첨가한다. 문학적 MSG라고 해야 할까? 엄마를 찾아 나선 두 명의 형제들 이야기다. 모든 에피소드에 이 둘은 빠짐없이 등장하고, 외로움이라는 정체 불명의 감정과 경주하는 주인공들의 삶에 개입한다. 이 둘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등장한 거지?라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가의 실력이 역시 대단하다. 뭐 이 정도 실력이 되니 일본 문학계 유수의 상을 섭렵한 거겠지만.

 

어른들은 자신들만의 고민에 빠져 있으면서도, 엄마 찾아 삼만리에 나선 형제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타코야키와 초밥 그리고 음료수를 사주고, 무엇하나 제 힘으로 이룬 게 없다는 고민을 안고 사는 청년은 아이들을 데리고 그들의 엄마가 이사간 곳까지 데려다 주기도 한다. 클럽 사사유리에서 일하던 청년 다바타는 매니저 대신 애인을 따라 과연 상파울루에까지 갔을까?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된 것처럼, 자신에게 오는 여자들과의 인연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허우적대는 삶에 빠진 청년이 삶을 허비한 이야기가 자못 흥미진진하다.

 

이야기는 그렇게 흐르고 흘러 나고야 출신으로 동거남의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던 후쿠다 노리코 씨는 15년 도쿄 생활을 마무리짓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이다. 최근 사회적 이슈로 급부상한 데이트 폭력에 대한 작가의 스케치가 자못 놀랍기까지 하다. 왜 때리느냐는 노리코의 항의에 “때릴 이유가 없어서 때린다”는 말이 담은 폭력성에 그만 나는 놀라 버렸다. 강자와는 살 수 없고 오로지 약자를 핍박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교이치 속에 숨은 비겁함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단순한 업무를 반복하는 파견 근무직을(비정규직) 전전하며 살아온 지난 시간을 뒤로 하고, 가정 내 폭력 상담소를 찾아 마침내 자신감을 회복한 노리코는 나고야에서 새로운 출발을 결심한다. 노리코가 두 형제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은 물론이다. 형제 역시 가정 폭력의 희생자로 엄마에게까지 버림 받았지만 꿋꿋하게 잘 살아 나가고 있다. 어쩌면 노리코 역시 형제를 거두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는데 성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면 그렇게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결말 부분에서는 기대 이상의 짜릿함마저 느낄 수가 있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이런 멋진 이야기를 뽑아내는 이야기 장인 요시다 슈이치의 실력에 그만 반해 버렸다. 자꾸만 읽고 싶어지니 걱정이다. 걱정도 팔자라고? 다음엔 <사랑에 난폭>을 읽을 것이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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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17-08-01 1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요시다 슈이치는 정말 반해요
전 다리를 건너다 읽기직전이라 반가워서 ㅋ

레삭매냐 2017-08-01 13:49   좋아요 0 | URL
저도 일단 요시다 슈이치의 책들 좀 읽고 난
다음에 신간에 도전해 볼까 생각 중이랍니다.

무더운 여름에 가볍게 읽기에 아주 부담이
없어 좋은 것 같아요.

ICE-9 2017-08-01 1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슈이치 전작에 들어가시는 겁니까?
저는 사랑에 난폭 재밌게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7-08-02 09:02   좋아요 0 | URL
전작까지는 몰라도 꾸준하게 읽어 볼랍니다.

<사랑에 난폭> 읽고 있는데 역시나 재밌네요.
 
히틀러의 하늘의 전사들 - 제2차 세계대전 독일 공수부대 팔쉬름얘거의 신화 KODEF 안보총서 4
크리스토퍼 아일스비 지음, 이동훈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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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HBO 전쟁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101공수사단의 가너리아는 자신의 형이 이탈리아 몬테카지노 전선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해서 프랑스 주둔 독일군을 마치 자기 형의 원수처럼 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전에 컬렉션에 나섰던 한국일보사에서 나온 <WWII>의 이탈리아 전선 편에서도 몬테카지노 전투는 2차세계대전 사상 격전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방어를 맡은 독일군 주력부대가 바로 크리스토퍼 아일스비가 기록한 <히틀러의 하늘의 전사들>의 주인공 독일공수부대, 팔쉬름예거다.

 

20세기 초, 잠수함과 동력 항공기의 등장은 전쟁의 모습을 바꿀 정도의 충격을 유럽에 전해줬다. 구식 전쟁만 경험해 왔던 구세대 장성들에게 전선을 돌파하는 전차를 필두로 한 기갑부대의 진용도 수용할 수가 없었겠지만, 공간에 수직이라는 개념을 추가한 항공전 그리고 항공기에 병사들을 탑승시켜서 전쟁에 사용한다는 방식은 아예 듣도 보도 못한 그런 새로운 형태의 전술이 아니었을까.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와 붉은 군대가 가장 능동적으로 공수부대의 효용성을 깨닫고 도입하기 시작했지만, 정작 실전에 배치하고 놀라운 전과를 거두게 된 주체는 후발주자였던 독일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엄격하게 재무장에 금지된 독일이었지만 루프트한자라는 민간항공사에 조종사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훗날 전선에서 활약할 항공기 조종사들을 양산하는데 전력했다. 물론 제3제국의 2인자인 공군원수 헤르만 괴링의 전폭적인 지원도 독일 공군 양성에 한몫했던 사실이다. 처음에는 육군에서 공수부대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수대대 편제를 시도했지만, 괴링의 개입으로 육군 소속으로 맹훈련을 받아 오던 독일공수대대는 공군에 통합되어 편입되기에 이른다.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완편 사단은 없었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지원병으로 구성된 공수사단이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지상에서 4주, 공수훈련으로 4주 합해서 모두 8주간의 훈련과정을 거쳐 6번의 낙하훈련을 완수하면 공수휘장이 지급되었다.

 

독일 공수부대 팔쉬름예거는 처음부터 전술적으로 두 가지 임무를 축으로 삼았다. 첫째, 소수정예 낙하산부대로 적진 후방에 깊숙이 침투해서 통신선을 교란하고, 다리 같은 중요한 거점을 점령하고 보급을 저지하는 임무다. 문제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지는 군사행동이기 때문에 대포나 전차 같은 중화기를 보유할 수 없다는 맹점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무장한 채 아군의 주력 부대가 정해진 기간 내에 작전을 완수할 때까지 적진에서 거점을 사수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여차하면 적의 대규모 부대에 포위되어 전멸할 수도 있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철저한 작전의 보안 유지와 신속한 후속부대의 진출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전쟁 중에는 주로 7공수사단이 이런 임무를 맡았다.

 

두 번째로는 강습병으로 구성된 완편 보병사단을 글라이더를 이용한 대규모 전개를 하는 작전이다. 22사단이 주축이 되어 비행장에 착륙해서 신속하게 화포와 같은 중화기를 산개시키는 훈련을 반복 숙달했다고 한다. 낙하산부대에 비해 기습능력은 떨어지지만, 적의 후방에서 대등한 화력으로 싸울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었다. 전자에 공군이 매료되었다는 후자는 육군이 선호하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정예 팔쉬름예거는 두 가지 모두 가능하다는 점을 실전에서 증명해 보였다.

 

육군 기갑부대 중심의 폴란드 전격전(블리츠크리크)에서는 공수부대의 활약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쾌속의 진격으로 폴란드 전역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다음해 덴마크와 노르웨이 전역에서 비로소 공수사단의 활약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으며, 서부전역을 전세를 판가름한 1940년 5월 10일 시작된 프랑스 전투에서 발터 코흐 대위가 소속된 공수부대가 벨기에 에벵 에마엘 요새를 순식간에 장악하면서 연합군 기동부대의 시선을 벨기에쪽으로 돌리는데 성공하면서 독일군의 주공인 아르덴 공세를 성공하게 만드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지난 주에 개봉해서 한창 인기몰이 중인 <덩케르크> 바로 전의 역사를 팔쉬름예거가 만들어낸 것이다.

 

도이치 팔쉬름예거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은 여세를 몰아 대소전쟁에 앞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다음, 영국 해군의 준동을 막고 루마니아 플로이예슈티 유전을 연합군 폭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팔쉬름예거에 의한 크레타 침공, 메르쿠르 작전을 시도한다. 작전은 결과적으로 성공하긴 했지만, 방어군의 격렬한 저항과 작전상의 여러 가지 오류 때문에 막대한 인원 피해가 발생하면서 제국총통 히틀러는 향후 다시는 이런 대규모 공수부대 작전을 기피하게 된다.

 

크레타 작전 이후 공수부대는 러시아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어 맹위를 떨치기는 했지만, 본연의 임무인 낙하산부대원으로서의 임무보다 정예 소방수이자 방어임무를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북아프리카 전역의 튀니스 전투에서 람케 여단은 거의 전원이 생포되기도 했다. 영국이 주축이 된 연합군은 북아프리카 승전의 여세를 몰아 시실리에 상륙하면서 추축국의 일원인 이탈리아 침공에 나선다. 이탈리아 전선을 책임진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는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방식으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로마를 향해 북쪽으로 진격하는 연합군을 가로 막는 도상에 바로 몬테카지노가 있었다.

 

결국 연합군의 막대한 물량공세와 노르망디에서 시작된 제2전선으로 이탈리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긴 했지만, 유럽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막아내는데 몬테카지노 전선에 투입된 도이치 팔쉬름예거 부대의 활약은 눈부셨다. 막강한 공중지원을 받는 영국군, 뉴질랜드, 인도군, 폴란드군과 미군으로 구성된 엄청난 부대를 상대로 몬테카지노의 폐허 속에서 팔쉬름예거 정예사단들은 그동안 실전과 훈련을 통해 단련된 초급장교들의 창의적인 작전으로 효율적으로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시간을 번 케셀링 원수는 후방에 좀 더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가 있었다. 팔쉬름예거 부대는 크레타에서 벌어진 실수를 바탕으로 실전에서 보다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배양한 셈이다.

 

전역을 이동해서 노르망디 상륙 이래 북프랑스 특유의 산울타리 빌라 보카쥬 지형에서도 팔쉬름예거 부대원들은 탁월한 전투 능력을 보여 주었다. 도처에 산개한 독일군 부대들이 쏘아대는 총탄에 연합군의 전진 속도는 지지부진했다. 성공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유럽에서의 전쟁이 곧 끝나리라는 전망은 엄청난 상륙작전 뒤에 카랑탱과 캉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이 시작되면서 무산되었다. 연합군 역시 전쟁을 이른 시기에 끝내기 위해 네덜란드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로 진입하겠다는 영국 몽고메리 원수의 원안을 바탕으로 한 마켓가든 작전을 시행하지만, 아른헴 인근에서 재편 중이던 독일 기갑부대의 활약으로 처참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1944년말 전개된 벌지 전투에서 최후의 공수작전을 시도해 보지만, 이미 전쟁의 귀추가 결정된 마당에 의미없는 작전이었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팔쉬름예거가 투입된 가장 성공한 특수 작전의 하나는 무장친위대(Waffen SS) 소속 오토 스코르체니가 지휘한 그란삿소에 유폐된 무솔리니 구출작전이었다. 추축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이탈을 막기 위해 총통은 정예 특공대를 투입해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을 성공시켰다. 한 때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스코르체니를 전설로 만든 구출작전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 원수를 체포 혹은 사살하기 위한 제500친위공수대대의 <나이트 무브>는 거의 무모해 보이는 그런 작전이었다. 600명 남짓한 공수부대원들이 1만 2,000명 이상의 빨치산 부대가 집결한 드르바르 소읍을 공략한다는 거의 자살공격에 가까운 작전으로 공수부대의 손실은 막심했고, 고작 건진 거라고 티토의 원수 정복이 전부가 아니었던가.

 

독일군 전문가 크리스토퍼 아일스비 작가는 도이치 팔쉬름예거의 유래와 발전 그리고 종결에 이르는 전 과정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공수부대원들의 활약상을 담은 사진부터 시작해서, 팔쉬름예거의 명암을 그리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 저술 그리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는 저널리즘의 원칙에 충실한 저작이라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팔쉬름예거 신화는 또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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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7-08-01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레삭매냐 2017-08-01 14: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 내게 왜 여행하느냐 묻는다면
박세열 글.그림.사진 / 수오서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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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고 나서 회사 동료들하고 이야기하는 도중에 지인이 여행작가인데 돈을 엄청 많이 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무엇이 부러웠을까? 돈을 많이 벌어서? 아니면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어서? 글쎄 대신 나는 내가 하는 여행 대신 타인의 여행기록을 읽으면서 내가 추구하는 방랑을 타인의 추체험을 대신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이제 고생하는 여행은 그만이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노라고 고백하고 싶다.

 

여기 또다른 여행작가의 책을 읽었다. 박세열이라는 건축을 전공한 청년(?)의 여행 기록을 마주했다. 여행책에 빠질 수 없는 사진이 그리고 감수성 넘치는 문장으로 단장한 글들이 나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문득 어떻게 하면 정말 다양한 스타일의 여행책들로 넘실대는 출판계에서 독보적인 컨텐츠로 승부를 내야 할까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도달하기도 했다. 이미 오기사 양반이 스케치 여행기를 선보이지 않았던가. 어느 출판사 모임에서 오기사 양반의 여행기록에 대한 강의를 들었던 생각이 절로 피어오른다.

 

박세열 작가의 글은 어떤 차별성을 가질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과 함께 한 추억에 대한 기록이 아닐까 싶다.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을 단순히 사진찍기를 위한 피사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구별에 사는 동종의 호모 사피엔스로서 느끼는 연대감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작가는 부러 시간을 내서 그들의 이미지를 그려 나눠 주기도 하고, 즉석사진을 찍기도 하고 휴대용 인화기로 그들의 사진을 뽑아 주기도 한다. 당연히 그에 따른 상호반응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 모든 것이 작가의 글감으로 훌륭한 소재가 된다. 스토리와 관계가 있는 여행의 기록이야말로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의 강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가 벽화도 그린다는 점이다. 장기 여행자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고민이 바로 숙박과 비용의 문제다. 단기 여행자라면 상대적으로 비용 면에서 걱정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장기 여행의 경우 오늘밤 어디에서 묵어야 하나가 큰 걱정거리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행여라도 어떤 마음에 드는 곳이 생겨 오래 묵을 경우가 생긴다면 그만큼의 비용을 치러야 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호스텔이나 민박 벽에 멋진 벽화를 그려 주고, 그 대가로 무료 숙박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좀 뻔뻔하기도 해야겠고, 작가만큼 실력도 갖추어야 하겠지. 그런 기술이 없는 보통의 여행자는 꿈도 꿀 수 없다는 것이 맹점이겠지. 또 한편으론 돈 때문에 자신의 자유로운 여행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 과연 옳은가하고 고민하는 지점도 마음에 들었다.

왜 우리는 여행을 떠나는 걸까? 일상을 함께 하는 주변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여유도 없이 지내면서, 모든 것이 낯선 여행길에서 만난 이방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후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그건 아마도 같은 여행을 한다는 일종의 동질감 때문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그네로서의 사물을 대하는 감정의 전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서일까. 나는 모르겠다. 여행길의 나그네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한 장소에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그 장소가 지옥이 될 수도 천국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호주 케언즈에서 꽤 오래 머문 적이 있는데, 케언즈 야시장에서 두 번이나 강도를 당한 일본 친구에게 케언즈는 정말 끔찍한 장소였다. 같은 곳에서 지냈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케언즈는 남국의 환상적인 도시가 아니었던가. 앙코르와트를 보기 위해 찾았던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가이드분은 버스에 올라탄 우리에게 여러분은 앞으로 며칠 동안 “원달러”의 환청에 시달리게 될 것입이다라는 경고를 해주셨고, 캄보디아는 처음인 우리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같은 체험을 했지만 박세열 작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작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를 찾아다니는 장면에서는 왜 이렇게 찡하던지. 인도에서 만난 솜사탕 파는 소년과의 에피소드도 마음에 들었다.

 

장시간에 걸친 여행이 그대를 지치고 힘들게 만들더라도, 여행길에 나서면서 작심한 별 것도 아닌 일에 웃고 떠들고 장난치리라는 초심은 부디 잊지 마시길.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일상에 돌아와서도 여행길에 다른 나그네들과 함께 만들었던 소중한 추억을 그리며, 평상시에도 그런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품을 수 있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다시 나서게 될 다른 여행길도 한층 더 기대가 되고, 넉넉한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여행책을 읽고 나면 언제나 그런 것처럼 그런 여행에 나서고 싶다. 여전히 세상은 넓고,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이들과의 인연이 기대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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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래 책은 사서 읽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책 중에서 읽는 법이지. 소설가 김영하 씨가 인문 예능프로그램을 표방하는 <알쓸신잡>에서 한 말쌈이다. 게다가 그가 프로그램 중에서 언급한 프랑수아 사강의 케이스를 들며 말한 자신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내가 마침 서가에 가지고 있어서 집어 들었다. 그게 딱 한 달 전이었다. 백쪽 조금 넘는 분량이라 금방 읽겠지 하는 얄팍한 계산으로 달려들었는데, 조금 읽다 말고 완독에는 실패해서 어제 새벽에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를 읽고 나서 재도전에 나섰다. 읽은 지점부터 읽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래봐야 처음부터 읽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아 부담이 적어 다행이었다.

 

소설의 스토리보다 나는 소설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에 관심이 갔다.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 클림트의 <유디트> 그리고 백제 의자왕 혹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와 비슷한 경로를 겪은 바빌로니아 왕 사르다나팔의 이야기에서 작가는 죽음의 페이소스를 뽑아낸다. 소설 속 화자는 죽음의 안내자다. 오독이어도 상관 없다면 읽은 책을 다시 펴보지 않고 리뷰를 써보련다. 항상 하는 말처럼 책은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에게 읽히는 순간, 또다른 항해를 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소설 속 화자는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의뢰인들을 찾아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는 그들을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킬러인가? 직접 행위에 나서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를 킬러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 다음 그는 의뢰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여행을 떠난다고 했던가. 탄생이 내 의지는 아니지만, 그 반대인 소멸 다시 말해 죽음은 얼마든지 선택가능하다는 점에서 김영하 작가가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나”의 파괴할 권리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했다. 물론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는 아니지만. 죽음에 대한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 들여야 할까.

 

비디오 아티스트로, 그리고 총알택시 운전사로 일하는 형제의 갈등에 끼어든 한 명의 여자 유디트(세연)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요란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유미미 모두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에게 의뢰를 맡긴다. 내게도 익숙한 과천-의왕 고속도로를 바람을 나는 듯이 달려가는 트랙의 레이서를 능가하는 실력의 총알택시 운전사의 고독과 회한 그리고 잘난 형에 대한 시기와 질투 등 다양한 감정이 날것 그대로 숨쉬는 것을 나는 느끼기도 했다. 형이 소중하게 여기는 나비 컬렉션을 태우다가 집에 불을 낸 것도 동생이었다. 형은 동생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생각 없이 앗아간다. 형제에게 팜므파탈처럼 보이는 유디트, 세연 역시 마찬가지다.

 

생일날 폭설이 쏟아지는 고속도로를 달려 주문진으로 향하는 길에 나선 형과 유디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을 능가하는 낯설음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개별 캐릭터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극한의 속력까지 내달리는 총알택시를 운전하는 동생, 형제라는 관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유디트, 섬망 같은 이미지를 좇는 비디오 아티스트 형,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유미미 그리고 의뢰를 마치고 나선 비엔나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홍콩에서 온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는 화자에 이르기까지. 삶도, 죽음도 그들에게는 단지 선택의 문제였을까. 화자의 비엔나 에피소드는 영화 <비포어 선라이즈>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또 어느 장면에서는 최근에 읽고 있는 춘수 씨 장편소설이 떠오르기도 했고. 적어 놓았어야 했는데 미처 그러지 못해 망각 속으로 휘발해 버렸다.

 

엉뚱하게도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자신을 파괴할 혹은 소멸시킬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면 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그건 아니라며 결사반대에 나서야 할까? 나는 잘 모르겠다. 짧지만 강렬한 반향을 일으키는 그런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읽게 된다면 또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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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7-31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속에 마라, 유디트, 백제 의자왕 그리고 사르다나팔루스까지 언급되는 걸 보면 역시 김영하 작가가 ‘알쓸신잡‘에 캐스팅된 이유가 있군요. 김영하 작가는 낯선 주제에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17-08-01 10:08   좋아요 0 | URL
전 사실 책 팔러 나온 줄 알았어요 :>
뭐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 않을까요 ㅋㅋ

의자왕 이야기는 제가 넣은 거랍니다.
그림에서 소설 하나를 뽑아내는 실력이란
정말 대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