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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 - 조선을 흔든 개혁의 바람
이종수 지음 / 생각정원 / 2016년 3월
평점 :

침묵은 폭정의 그림자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조광조 평전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책에서 가장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문장이 아닐까 싶다.
촛불선거로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적폐청산, 개혁을 표방하고 있다. 프랜차이즈와 군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갑질 천태만상에 대한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오백년 전 조선을 살았던 사대부이자 특출한 학자 지식인이었던 조광조 역시 비슷한 상념에 빠지지 않았을까 싶다. 조선 건국 한세기 정도가 흐르면서 조선의 권력층은 필연적으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고, 수양대군의 쿠데타, 연산군의 폭정 기간 동안 벌어진 두 번의 사화 그리고 마침내 신하들이 일어나 군주를 몰아낸 반정에 이르면서 그동안 쌓인 적폐들이 비등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평전은 기세등등하게 개혁과 혁신을 주도하던 대간 조광조의 실각이 벌어진 기묘년의 친위쿠데타로 시작한다. 조선의 11번째 군주였던 중종의 치세를 함께 했던 풍운아 조광조가 실제적으로 활약했던 시기는 고작 4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사림은 조광조가 총애를 입던 군주 중종에게 사약을 받은 뒤,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조광조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당시 국립대학 격인 성균관에 진입한 후, 천거로 조정에 출사하게 되는 순간부터 그를 반대하는 정적들의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연산군 시절 사화로 유배 중이었던 사부 김굉필을 17세의 나이에 찾아 사사 받은 후, 너무나 학문을 사랑한 나머지 광자(狂者)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까지 들어야 했던 희대의 지식인은 꿋꿋하게 군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사장(문학)을 멀리하는 후생철학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사장으로 승부를 걸어 1510년 진사시에 합격하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지 않았던가. 책을 통해 온전하게 성리 철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조광조는 실천을 통해 요순시절의 군주와 백성을 재현하겠다는 정치적 포부를 안고 있었다.
한편, 명군 성종의 왕자로 연산군 치하에서 숨죽여 지내던 진성대군 중종은 반정으로 일약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자그마치 38년 동안이나 왕위를 지킨 중종은 치세 10년간은 반정 삼대장이라 불리는 박원종, 성희안 그리고 유순정을 비롯한 공신들의 위세에 못이겨 허수아비 임금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군주의 권위를 넘어설 정도로 위풍당당하던 공신들이 사라지면서 청년 군주는 자신만의 정치를 펼쳐 보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거에 빚지지 않은 신진 세력이 필요했다. 이미 기득권 세력으로 안착한 공신 그룹에서는 그런 인재를 찾을 수가 없었으리라. 그런 와중에 사림의 기대주였던 원론주의자 조광조야말로 적합한 인재였다.
굳이 과거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1515년 알성시 급제로 자신의 정치적 포부와 앞으로 펼칠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힌 조광조는 천거로 등용되었다는 핸디캡을 털어내고 마침내 정6품의 사간원 정언(정원 5명)으로 중앙 정계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혁신가의 등장은 시작부터 순탄치가 않았다. 자신이 몸담은 사간원과 사헌부의 수장들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주상에게 올리면서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중종은 반정세력에 의해 원래 부인이었던 신 씨와 강제이혼 당한 슬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후 장경왕후 윤 씨가 사망하면서 새로운 왕비 간택을 앞두고 구언을 받는 와중에 담양 부사 박상과 순창 군수 김정이 올린 신씨복위상소가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군주에게 올린 구언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중종은 자신의 무능력함을 지적한 당사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양사 수장들의 의견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광조는 구언 상소를 올린 이들을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원론에 입각한 ‘사림의 공론’이라는 주장으로 양사의 수장들을 파직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폭군 시절이었던 폐주 연산 시절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지식인의 기백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전 권력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했던 중종 연간에 비약적으로 성장한 사림세력으로서는 언로를 탄압하는 것을 묵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접한 침묵은 폭정의 그림자라는 표현은 지난 정부에서도 이미 우리는 목격하지 않았던가.
이듬해인 1516년(35세) 홍문관 수찬으로 임금의 공부시간인 경연에 참여하게 된 조광조는 자신이 꿈꾸는 도학정치의 전개에 앞서 군주 교화작업에 착수한다. 왕위계승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중종은 어린 시절 학문을 가까이할 겨를이 없었다. 왕이 되어서도, 근 십년간 경연은 형식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광조라는 엄격한 가정교사의 등장으로 국왕의 경연시간은 전혀 이전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조광조는 조강, 주강, 석강의 기본 경연 시간외에도 야대라는 야간공부 과정을 통해 28세 청년군주의 학문적 성취를 지도했다. 여러 서책 중에서도 그는 특히 <근사록>과 주자가 편찬한 <소학>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조광조와 신진사류가 꿈꾸던 요순시대 왕도정치의 도래를 위한 군주와 백성의 교화에 <소학>은 필수요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읽어야 할 텍스트와 사상을 장악하는 쪽이 승자가 된다는 역사적 사실을 개혁가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 이어진 전광석화 같은 개혁조치들은 다음과 같다. 내수사 장리와 기신재 혁파, 소격서 혁파 등을 통해 흐트러진 유교국가 조선의 기상을 세우고 했다. 조선 사림의 영수라는 사대부 여론의 지지를 업고, 현량방정과까지 신속하게 실시한 정암 조광조는 세부적인 사항보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점이다. 소격서 혁파 논쟁 가운데, 임금의 역린을 건드린 탓일까? 정암이 보다 신중한 자세로 중간점검을 하면서 자신의 지지세력은 물론이고 반대세력까지 끌어안는 정치력을 구사했다면 중종연간 그가 주도한 개혁은 어쩌면 성공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짜 반정공신들에 대한 정국공신 개정과 위훈삭제라는 그야말로 기득권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남곤, 홍경주와 심정 등으로 대변되는 반대파들과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연출된다.
결국 중종이 석연치 않은 붕비의 죄를 물어 조광조를 비롯한 8명의 신하들을 파직하고 사형과 유배형을 선고하는 기묘사화로 정국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반대파들의 명백한 상소도 보이지 않았으며, 중종은 자신을 믿고 따르던 신하들에게 해명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속전속결로 개혁세력을 조정에서 일소해 버렸다. 의정부의 수장이었던 영의정 정광필이 조광조가 구사한 모든 정책을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선비로서 정암 선생의 구명에 나선 것도 주목할만하다. 붕비의 죄 정도로 사형에 처할 정도는 아니라며 자신의 소신에 따라 조광조를 변호하는 장면에서는 조선 선비의 기개를 엿볼 수도 있었다.
송나라 시절 왕안석의 신법처럼 조광조와 소학일파가 구사한 개혁 역시 거기까지가 한계였던 것일까. 군주제 국가에서 국왕과 정부를 위한 개혁은 가능할지 몰라도, 밑바닥 백성들이 체감할 수 있는 개혁까지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조광조가 강조하는 도학정치는 국왕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신의 곁에서 사사건건 조종조의 예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며 결단력 없는 군주에게 항상 결단을 요구하는 강직한 신하가 주는 피로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중종의 친위쿠데타가 기묘사화로 이어지지 않았나 추론해 보게 된다.
일세를 풍미한 개혁가가 죽은 뒤, 조선은 명종 연간 외척의 발호 그리고 선조 연간의 임진왜란으로 국가 부도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중종 연간에 이미 조광조를 제외한 나머지 개혁 인사들의 복권은 마무리되었으나 자신이 죽음을 명한 개혁의 영수에 대한 사면은 끝내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조선 사림의 대표선수로 각인된 조광조는 후대에 사면 복권되었고 선조 대에는 문묘에 종사되는 유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문득 죽음 뒤에 그런 영예 보다 살아서 중종 연간의 긴 치세 기간에 개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면 문정공 조광조에게 보다 큰 영예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야사에서나 등장할 법한 조작설인 주초위왕(走肖爲王) 스토리는 저자가 아예 배제한 모양이다. 매 장마다 작가의 상상력을 덧입힌 도입부도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98년 전에 일어난 사건(기묘사화)과 인물을 평전에 등장하는 정암문집이나 중종실록 같은 기록만으로는 독자에 대한 호소력이 떨어질 거라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기록에는 충실하되, 상당한 공백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하면서도 합리적인 추론으로 채워 넣은 저술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또다른 개혁가 장거정 평전을 읽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