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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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수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나는 춘수 씨의 팬이 아니다. 그런데 춘수 씨의 책이 출간되면 어김없이, 꾸역꾸역 그렇게 읽게 된다. 어쩌면 21세기 한국에서 춘수 씨의 책은 단순하게 베스트셀러 문학 이상의 규정할 수 없는 이데아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최근작이었던 다자키 쓰쿠루는 무슨 내용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에게는 아주 늦게 도착한 <노르웨이의 숲>이 좀 더 와 닿았다고나 할까. 질풍노도의 전공투 세대였던 춘수 씨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세상일에 무심하게 되었나는 여전히 나의 관심사다. 어쩌면 그런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오늘의 춘수 씨가 있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히 열풍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사단장 죽이기>가 도착했고, 열독에 빠졌다 나는.

 

출판사 광고를 보면 춘수 씨 문학의 집대성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오는데 책을 읽을수록 그 점에 동의하게 된다. 춘수 씨 문학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다. 주인공은 남자이고, 뭍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규정할 수 없는 그런 매력을 가지고 있다. <노르웨이의 숲>의 젊은 와타나베처럼. 춘수 씨는 자기 소설의 메인 캐릭터 설정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음을 이번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볼 수 있다. 소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 나는 미대에서 추상화를 전공했지만 생계를 위해 “사회의 기둥”들을 위해 초상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스스로 고급 창부라고 생각하는 임무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며 고생하는 대신 현실에 수긍하라는 물신주의가 팽배한 현대 자본주의 3.0 시대의 주술처럼 다가온다. 굳이 이 지점에서 ‘주술’이라는 코드를 선택한 이유는 60센티미터 정도 사이즈의 이데아 기사단장이 등장하는 소설의 전개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는 충격 타임이다. 반듯한 은행원 집안의 아내 유즈와의 6년간의 결혼생활이 아내의 외도로 일순간에 파경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한다. 결혼이라는 인연도 언제나 필요하면 사서 쓸 수 있는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는 듯, 주인공은 쿨하게 도쿄 아파트 거처를 떠나 고물 푸조를 타고 불안정한 자아를 달래기 위해 정처 없는 방랑길에 나선다. 어때 이 정도면 춘수 씨는 예전 작품들의 변주라는 지적도 달게 받아야 하지 않을까.

 

춘수 씨 문학에서 하나의 코드가 되어 버린 음악에 대한 열정도 빠지지 않는다. 책에 몰입하다 보니 어디서 읽었는가 모르겠지만 1950년대 재즈 씬을 연상시키는 MJQ(Modern Jazz Quartet)의 비브라포니스트 밀트 잭슨이 연주하는 영롱한 음색의 <피라미드>도 유투브를 통해 감상해 보기도 했다. 소설의 곳곳에 배치한 슈베르트 현악4중주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건 고작 <죽음과 소녀> 정도가 아니던가. 나중에 소설에서 주인공 버금갈 정도의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 멘시키 와타루 씨의 초대를 받아 방문한 집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발랄라이카 칵테일 제조법까지 디테일하게 알려 주는 장면에서는 정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춘수 씨의 이런 고급 취향이란. 쿠앵트로가 들어가지 않으면 발랄라이카로 인정할 수 없다고.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트리플 섹을 대체재로 사용하는 것 같더만. 어느 블로거의 글에서 춘수 씨의 이런 고급진 취향을 일본어로 제이타쿠(ぜいたく[贅沢])란 표현이 제격이라는 글을 읽었다.

 

춘수 씨 소설의 주인공들은 누구나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열다섯살 때, 심장판막 이상으로 결국 세상을 떠난 누이동생에 대한 트라우마로 폐쇄공포증이 생겼다고 했던가. 다른 여성과 교제 중에 만난 유즈 역시 자신의 누이와 비슷한 눈매에 빠져 결혼에까지 도달했다는 고백도 주목할 만하다. 이 정도의 기이한 인연들은 소설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질 내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원래 자신이 살던 도쿄의 아파트를 유즈에게 내준 “나”는 저명한 일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의 아들인 마사히코(미대 동창생)의 제안으로 도쿄 인근 가나가와 현 서쪽의 오다와라 교외 그의 부친이 살던 집에 잠시 살게 된다.

 

이야기 전개를 위한 몇 가지 장치들이 준비됐다. 우선 트라우마와 최근의 파경을 겪은 주인공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졌고,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을 위한 무대가 가설됐다. 그렇게 평안하게 질박한 삶이 전개되었다면 좋겠지만 이 모든 것은 워밍업에 불과하다. 명백하게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에서 모티프를 딴 아마다 도모히코의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을 발견하는 장면(아테네 여신 혹은 지혜를 상징하는 수리부엉이의 도움으로 아마다 컬렉션에도 등재되지 않은 비밀의 작품을 상징적으로 발견한다), 새벽만 되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방울 소리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서게 되는 장면 그리고 거액을 들여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멘시키 와타루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춘수 씨 특유의 거침없는 스토리텔링이 이어진다.

 

이제까지 피상적인 요소들이 등장했다면, 이제는 그 내면의 세계로 진입할 시간이다. 그 와중에도 나는 미술교실에서 만난 두 명의 유부녀들과 쾌락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교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이렇게 스펙터클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찾은 거장의 알려지지 않는 작품에 대한 미스터리, 밤마다 들려오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호기심, 주기적으로 갖는 섹스, 게다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남긴 독일 오스트리아 오페라 컬렉션을 탄노이 스피커로 즐기며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먹는 남자. 그야말로 춘수 씨 스타일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주인공이 열어젖힌 비밀의 문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인물인 기사단장이 튀어나온다. ‘색을 면하다’라는 뜻의 기이한 이름을 가진 멘시키[免色]의 이력도 만만치 않다. 어쩌면 주인공보다 ‘제이타쿠’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남자가 멘시키일 지도 모르겠다. 다가온 이혼이라는 절망의 늪에서 탈출하는 계기를 제공한 주인공이 바로 멘시키였다. 어느 누가 자신의 실력을 알아보고 거액의 의뢰금을 제공하면서 어떤 제약도 붙이지 않고 초상화 화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주문을 거절할 수 있을까. 그런데 소설 속 사건의 진행을 보면, 모든 것은 멘시키 씨가 설정하고 준비한 대로 진행된다. 멘시키 씨 또한 비밀을 한가득 안은 사람이고, 주인공과의 초상화 작업을 통해 베일을 한 꺼풀씩 벗겨낸다.

 

석실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초자연적 존재인 기사단장 같은 배역이 기존의 춘수 씨 작품에 있었던가 싶다. 괴이담에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목식화된 승려 미라에 대한 일본 고래의 괴담은 한 때 즐겨 읽던 교고쿠 나쓰히코가 저술한 <항설백물어>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순간 반세기 가까이 서구에 편향된 글쓰기에 전념했던 춘수 씨가 드디어 본국이 가진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이데아에 눈을 뜨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스타일이 단박에 바뀌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춘수 씨가 또 준비한 것이 바로 아마다 도모히코의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이다. 원래 아마다 씨는 서양화 전공으로 1930년대 오스트리아 유학에 나섰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이던가. 독일에서 발호한 나치즘이 안슐루스(오스트리아 합병)로 오스트리아를 집어 삼키고 이웃 체코까지 노리고 있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여기서 다시 한 번 재력과 그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시절 유럽 유학길에 나설 정도라면 상당한 재산이 필요했을 것이다. 빈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연인이 연루된 나치 고관 암살 사건으로 연루된 이들은 모두 처형 투옥되고, 아마다 씨는 그나마 추축국의 일환이었던 일본인이었다는 이유로 무사히 귀국해서 전쟁 기간 동안 쥐 죽은 듯이 지내다가 환골탈태해서 전통 일본화를 그리는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변주에 변주의 거듭이 아닐 수 없다.

 

아, 한 가지 누락된 부분이 있었던가. 추상화인지 초상화인지 모를 멘시키 씨의 초상화를 완성한 나는 예술혼이 폭발했는지, 내친 김에 방랑길에 만나 뜨거운 하룻밤을 지낸 여인과의 추억에서 파생된 스바루 타는 남자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나는 내가 지난 여름에 한 것을 알고 있다”라는 틴에이저 호러 필름을 연상시키는 그런 설정 같다고나 할까. 블랙잭 게임을 능숙하게 시연하는 딜러처럼 춘수 씨는 자신의 소설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기산단장 1편이라는 카드 테이블에 주욱 늘어놨다. 이제 2편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매듭지을 것인가.

 

다른 건 몰라도 가독성 하나만큼은 가히 최고다. 이래서 춘수 씨, 춘수 씨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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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7-07-18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는 책 읽고 나서 볼게요! 스포 안당하려고 애쓰는중입니다. ^^

레삭매냐 2017-07-18 13:29   좋아요 0 | URL
제 경험에 미루어 볼 적에 스포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리뷰를 봐도 추리소설이
아닌 이상 그닥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더라구요 :>

그래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cyrus 2017-07-18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 알라딘에서 하루키의 신작 소설을 제대로 읽고, 진지하게 리뷰로 기록한 분이 레삭매냐님이 처음입니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알라디너라면 레삭매냐님의 글을 읽어봐야 합니다. ^^

레삭매냐 2017-07-18 14:52   좋아요 0 | URL
좀 더 진지하게 춘수 씨를 까고 싶은데
실력이 부족하야 두서 없는 글이 되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춘수 씨는 그냥 그런 일본
작가 중의 하나라는 기사가 눈에 띄더군요.

지금까지도 춘수 씨의 글을 열심히 소비하는
하루키스트들의 나이도 상승하고 있다는 지적
도 주목할 만하더군요.

단도직입적으로 90년대 한국 청년들에게 먹혔
을 지는 몰라도 요즘에는 먹히지 않는다는 방증
일까요.

포스트잇 2017-07-18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권 1/3쯤 읽고 있는데 ... 1권이 ‘이야기가 폭발한다‘라는 광고문구에 어느정도 수긍할 수 있을 정도라면, 2권은 아, 좀 걸리네요.
춘수 씨(ㅋㅋ)의 ‘단편적 사고에 저항‘하기 위한 지금의 소설이란 장르의 역할에도, 이야기의 힘을 생생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옮기는 일‘에 ‘오랜 세월 나름대로 노력을 거듭해왔‘음을 인정한다 해도 롤리타증후나 꿈을 빙자한 강간을 이제는 아예 나의 예술세계로 받아들이라는 식의 능청은 좀 질리네요...


물론, 기사단장죽이기, 감탄해가면서 읽는 중이고 재밌고 끝까지 읽긴 할겁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7-07-18 16:46   좋아요 0 | URL
그래서 춘수 씨가 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
을 해봤습니다.

2권도 내쳐 읽기 시작했는데 말씀 대로라면
좀 걱정이 앞서네요.

이제 막 재밌어지기 시작하는데 말이죠 :>
 
시멘트 가든
이언 매큐언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대망의 이언 매큐언 전작 완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어제 작가의 초기작 <시멘트 가든>을 읽었다. 그리고 바로 이언 매큐언 선생 최고작이라는 <속죄>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도 역시나 재밌다. 이런 몰입도로 최근에 책을 읽은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작가의 최고 걸작이라는 아우라 때문에 내가 빨려 들어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시멘트 가든> 이야기를 하려다가 또 삼천포로 빠져 들었다. 언제나 늘 그렇듯이.

 

<시멘트 가든>은 일 년 전에 위화 작가의 책에서 영감을 얻어 중고서점에서 구입했지 아마. 구입해서 조금 읽다 말았는데, 소설의 화자 15세 소년 잭의 아버지가 정원을 꾸미려고 엄청난 분량의 시멘트를 구입하는 장면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시멘트가 과연 어떤 소재가 될지 궁금했었다.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난 5월부터 본격적인 이언 매큐언 전작 읽기에 돌입했는데, 그 중에 가장 빨리 읽은 책이 아닐까 싶다. 하루 만에 다 읽었다. 물론 짧은 분량 탓도 있겠지만, 젊은 시절의 이언 매큐언이 구사하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그만큼 강렬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소설 서두에서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잭과 줄리, 수 그리고 막내 톰의 아버지가 지병인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전언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잭의 아버지는 시멘트 포대를 엄청나게 사들여 정원을 꾸미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아버지가 정원 가꾸기에 빠져 있는 동안, 이제 막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 접어든 잭은 큰누나 줄리와 함께 여동생 수를 상대로 의사놀이라고 그들이 명명한 성적 유희에 빠져든다. 무언가 바로 폭발할 것만 상태인 잭의 가정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병으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엄마가 세상을 뜨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이제 고아가 된 십대 아이들은 위탁가정으로 뿔뿔이 흩어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머니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준비해둔 시멘트가 등장할 차례다. 아무 것도 모르는 톰을 제외한 잭과 줄리, 수는 시멘트로 어떻게 엄마의 죽음을 은폐할 것인가. 그리고 엄마의 죽음에 관한 비밀은 영원히 지켜질 것인가.

 

이언 매큐언이 전매특허로 구사하는 소설에서 어떤 결정적 사건을 전후로 한 인과관계의 전개는 초기작 <시멘트 가든>에서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평면적인 구성으로만 전개되는 건 아니다. 한 개의 트랙이 엄마의 죽음과 은폐에 관한 것이라면, 다른 한 가지 트랙은 성적으로 호기심이 충만한 소년의 상실감이 어떤 방식으로 파괴된 삶의 균질성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작가의 리포트라고나 할까.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은행 예금의 관리를 큰딸인 줄리에게 부탁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몰라도 당장의 시급한 불을 끄기 위한 재정적 장치는 마련된 셈이다. 아마 엄마가 준비한 돈이 없었더라면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그들의 가족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두려움 때문에 구축한 그들만의 세계는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세계일 수밖에 없다. 줄리의 멋쟁이 남자친구 데릭이 그들의 세계에 침입했을 때, 그들의 세계는 붕괴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잭과 줄리의 성적 호기심 혹은 충동에서 유발된 관계는 파국의 순간을 정점으로 인도한다. 이언 매큐언이 초창기에 작품을 발표하던 시절에, 문학 기자들이 그를 엽기작가로 판단한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파격적인 이야기들을 나는 <시멘트 가든>과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통해 접했다. 그런 초기 작품들에 비하면, 그 후에 발표된 작품들은 상당히 완화된 소재의 일상성을 담보한 작품들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소설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들은 예외 없이 반드시 일어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소설에서 그리는 우리 인간 삶의 진실,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건 뒤의 사후처리는 오롯하게 남겨진 자들의 몫이 아니었던가. 어머니의 죽음은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두려움에서 비롯한 상궤에서 어긋난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가는 예상했던 그대로다. 이제 30세의 나이로 첫 장편소설 <시멘트 가든>을 발표한 청년 매큐언의 출발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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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7-07-10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기작이라니 더욱 궁금하군요. 얼마나 파격적일까.

레삭매냐 2017-07-10 13:50   좋아요 1 | URL
후기에 발표된 작품들에 비해
어둡고, 소화하기가 부담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목나무 2017-07-10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런 어둡고 금기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좋아서 이언 매큐언을 좋아하게 되었네요.^^
오늘부터 다시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읽어보려구요. <넛셸>이 생각만큼 재미없어서 다시 초기작을 읽어보려 합니다. ^^

레삭매냐 2017-07-10 16:04   좋아요 1 | URL
<첫사랑, 마지막 의식> 그리고 <시멘트 가든>
이 작가가 초기에 추구한 세상의 다크 사이드
를 대변하는 그런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작가의 기질이 완전하게 변하진 않았지만,
뭐랄까 순화된 느낌 정도라고나 할까요.
 
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언 매큐언의 책 중에서 미디어 2.0에서 그동안 출간된 책들은 구할 수가 없다. 모두 절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부커상 수상작인 <암스테르담>과 <이런 사랑>은 중고서점을 통해 구했는데, 작가의 초기 소설집인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구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도서관에서도 독자들이 애정하는 책이 아니었는지 상태가 너무 훌륭해서 깜짝 놀랐다. 다른 책들은 얼마나 읽어댔는지 책장이 다 너덜거릴 정도였는데 말이다.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지만.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1975년 이언 매큐언 선생이 발표한 초기 소설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한 작가의 전작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초기작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자타가 인정하는 글솜씨이지만, 왜 작가는 이런 소재를 가지고 단편들을 지어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100쪽 : 시체란 것은 삶과 죽음이 대조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가 쓴 8편의 단편에는 결핍이라는 공통적인 요소들이 자리잡고 있다. <입체기하학>에서는 주인공 남편이 이미 아내의 제멋대로 행동에 신물이 난 상태다. 아내와의 대화를 통한 해결보다는 자신만의 연구에 몰입해 있는 화자에게서 위기에 처한 결혼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의 결핍이 엿보였다. 증조부가 남긴 타인의 24인치에 달하는 페니스 표본을 애지중지하는 장면을 도저히 정상적이라고는 볼 수가 없을 듯 싶다. 결국 증조부가 남긴 탁월한 일기에서 발견한 입체기하학 기술로 아내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남자. 이 단편은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단편영화 <사랑의 기하학>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던가. 공포와 괴기를 오가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어지는 <가정 처방>에서는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비행청소년의 성적 판타지가 등장한다. 어쩌면 이렇게 당대 비행청소년 세계를 명확하게 짚어냈는지 그저 놀랄 지경이다. 비둘기들에게 유리 조각을 먹이로 던져 주고, 산 채로 잉꼬를 산 채로 구웠다고? 1실링을 주고 그 바닥에서 소문난 룰루 랄라 양의 비밀스러운 곳을 보겠다던 주인공이 느닷없이 타겟을 바꿔 근친상간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던 소년은 비행으로 세상에 맞선다.

 

모든 상황이 비극으로 종결되는 <여름의 마지막 날>은 또 어떤가. 부모님을 잃고 나서, 형의 제안으로 하숙을 치는 것으로 연명하던 화자의 삶에 등장한 고래 같은 여인 제니. 주인공의 누나 케이트 대신 제니를 무척이나 따른 아기 앨리스와 더불어 구성된 결핍 삼총사는 비극으로의 질주를 조용히 시작한다. 열두 살배기 소년과 같이 기우뚱거리는 보트를 타는 장면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Shallow Hal, 2001) 같은 로맨스 코드를 기대해 보게도 하지만, 지금까지 작가가 구사한 전복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비극적 결말로 마무리된다.

 

정말 짧은 단편 <극장의 코커 씨>에서는 성행위에 가까운 전위연극 준비를 하는 중에 정말 불상사가 벌어지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공간 혹은 계기가 결핍되어 있었던 것일까. 게다가 주인공의 이름이 무려 코커(cocker)라니. "You Are So Beautiful"이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 조 코커(Joe Cocker)가 들으면 발작을 일으킬 지도 모르겠다. 짧은 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글이었다. 놀랍군 놀라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니 말이다.

 

<나비>에서는 천연덕스러운 소녀 살해범의 심리 묘사가 이어진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목격한 소녀의 죽음에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부터 의심은 시작된다. 누가 봐도 피의자 스타일의 인상을 가진 주인공이 부인할수록 독자의 심증은 굳어져 간다. 진짜 사건의 재구성을 통해 화자가 진범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죄책감이나 양심이 결핍된 진범은 스스럼없이 자신이 “죽인” 소녀의 부모를 만나러 간다. 일련의 과정을 무덤덤하게 수행하는 싸이코패스 킬러의 초상을 이언 매큐언 선생은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각인한다.

장어를 잡아 떼돈을 벌기 위해 어살을 만들던 남자는 애인 시셀과 함께 거주하던 방에서 소음을 만들어내던 주체가 엄청나게 큰 시궁쥐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들의 주변은 쓰레기 처리장을 방불케 하는 암울한 공간으로 변해가고, 생계를 위해 공장에 나가기 시작한 시셀은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다. 이것은 어떤 미래에 대한 꿈 결핍증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초상이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를 잃고 연극배우 출신 이모 미나의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된 소년 헨리의 이야기도 결핍으로 충만되어 있다. 우선 부모의 결핍, 영원히 무대에서의 삶을 지속하고 싶은 나머지 조카마저 배우로 만들어 자신이 상연하는 삶이라는 연극 무대에 올리고 싶어하는 미나. 조카 헨리가 싫어하는 여장을 강요하는 장면에서는 합리적 이성의 결핍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엿볼 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단편은 바로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홀로 된 “벽장 속 남자”의 엄마는 인생의 단계를 밟아 성인으로 성장해야 할 아들이 마치 귀여운 강아지가 성견으로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해 성장억제 호르몬 주사를 처방한 것처럼, 언제나 자신의 품 안의 자식으로 남아 있길 원한다. 그 결과, 언어발달도 늦은 십대 소년이 된 벽장 속 남자는 엄마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기자 정신지체아라는 모욕을 받으며 집에서 쫓겨난다. 이 또한 예정된 수순이었을까. 식당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하지만 여드름쟁이 셰프에게 구박을 받다가 펄펄 끓는 기름을 악당의 사타구니에 퍼붓는 기백을 발휘하기도 한다. 삶의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소년은 절도와 수감, 보호감찰을 차례로 경험한다.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어 벽장 안이 가장 편안하고, 엄마의 보호를 받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방문한 사회복지사에게 고백하는 캥거루족을 뛰어넘은 자라족 남자의 이야기는 서글프다. 벽장 속 남자는 그야말로 사회적 결핍이 만들어낸 결정체일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단편으로 담아낸 노작가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게 된 모양이다. 냉전시대 적에게 이미 노출된 지도 모르고 열심히 비밀공작을 수행한 스파이물에서, 엄마의 자궁 속에서 살부 음모를 알게 된 태아의 이야기로, 신혼 첫날 파경에 이르게 된 남녀의 혼돈으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의도적 자살에 이르게 된 소년 이야기로, 평온한 주말 하루가 악몽으로 변해 가는 과정에 대한 추적으로, 과거 애인의 죽음에 관련된 폭로로 관계가 틀어지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이르는 다양한 삶의 이모저모를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아냈다. 이언 매큐언 작가의 전작읽기가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 순간에 아주 적절한 초기작 읽기였다고 자부한다. 이제 <이런 사랑>, <시멘트 가든> 그리고 <속죄>가 남았다. 분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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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20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었는데... 이언 매큐언 책은 거의 그랬던 것 같아요. 절판된 책이 많다니 왠지 욕심이 나는군요. 하하.

레삭매냐 2017-07-20 10:51   좋아요 0 | URL
저는 이번에 이언 매큐언 책 읽으면서
모든 책을 다 구했는데, 이 책만 못했네요...

중고서점을 통해 구하려고 대기 중이랍니다.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
마일리 멜로이 지음, 강정우 옮김 / 책세상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한동안 영국 문학잡지 그랜타가 선정했다는 팔팔하고 전도유망하다는 젊은 미국 작가들의 책을 컬렉션한 적이 있다. 기존 작가들의 글을 읽는 것도 좋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렇게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해내는 재미가 있다고나 할까. 아쉽게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만큼, 국내에 소개되기도 어렵고 또 소개되었다고 하더라도 잘 팔리지 않아 곧 절판되곤 했다. 절판됐어도 절판본 사냥이라는 재미를 선사해 주니 이 어찌 즐겁지 않은가.


언제나처럼 서설이 길었다. 지난 주말 한겨레 사설에 등장한 켈리 리처드 감독의 <어떤 여자들>을 읽었다. 그 영화가 궁금해서 찾아봤다. 그리고 내 눈을 사로잡은 영화의 한 커트. 그것은 바로 베스 트래비스와 제이미가 말을 타고 거니는 장면이었다. 어라, 이 장면 내가 어디선가 읽은 내용인데. 위키피디아를 통해 그 단서를 찾을 수가 있었다. 바로 그랜타가 선정한 앞으로 기대되는 미국 작가 중의 한 명이 마일리 멜로이의 단편집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2009)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트래비스 B>를 각색해서 모두 세 개의 옴니버스 구성으로 영화 <어떤 여자들>은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두 편의 이야기는 마일리 멜로이의 첫 번째 소설집인 <Half in Love: Stories>(2002)에서 소환되었다.


지난 3월 13일날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말았다가 이번에 이틀 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하바드 대학 출신 마일리 멜로이는 미국 몬태나 주 출신으로, 이 소설집에 나오는 다수의 이야기들의 공간적 배경은 몬태나 깡촌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이나 시카고 혹은 로스 앤젤레스 같은 대도시의 화려한 삶이 아니라 어쩌면 진짜 미국 사람들의 평범하지만 삶의 진한 페이소스를 담은 단면을 짚어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비 대출 때문에 자그마치 9시간 운전을 해서 글렌다이브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학교법을 가르치러 오는 풋내기 변호사와 사랑에 빠지는 카우보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클라이언트와 함께 떠난 캠핑에서 성추행을 당한 소녀의 이야기, 어쩌면 자신이 애인이 될 뻔한 아리따운 아가씨의 애인이자 자신의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기 위해 자신을 상품으로 걸고 래플 게임에 나서게 되는 과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단편소설이 삶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이 바로 연상됐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다른 이들이 그리는 삶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마일리 멜로이가 구사하는 이야기들은 확실히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난 의사형과 건들거리며 스키 강사로 사는 에런과 조지 형제가 등장하는 <스파이 대 스파이> 역시 흥미롭다. 한 부모 슬하에서 자랐지만 서로가 각기 다른 상대방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 가족의 실체란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몰라라는 상상을 구체화했다고나 할까. 결국 금지된 코스에 도전했다가 심각한 부상 혹은 죽을 뻔한 사고현장에서 치고 박는 장면으로 형제는 나름대로 방식의 화해에 도달한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지. 이 단편도 눈덮인 스키 리조트를 배경으로 해서 영화화한다면 멋진 장면이 연출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에 관한 옴니버스 구성이라면 아마 안성맞춤일 것이다.


<투스텝>에서는 도무지 바람기를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남편에 대해 지청구하는 여자친구가 모르는 비밀에 대한 이야기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그렇다, 바로 화자가 욕하는 남편이 일하는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혹은 레지던트 중의 한 명이 바로 청자인 것이다. 과연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 그녀를 소환해서 이런 희비극 무대를 마련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화자는 정말 뛰어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정말 잘 조절할 수 있는. 독자는 화자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청자의 모놀로그를 통해 파악해낸다. 청자 역시 유부녀란다. 어떻게 해서든 결혼을 유지하려는 여자친구와 자신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이 도저히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속에서 과연 청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 외에도 끔찍하게 살해당한 자신의 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살인범의 고스족 여자친구를 상대하는 중년의 아버지 이야기도 등장한다. 비밀을 꼭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어쩌면 사실을 모르는 것이 현재의 행복해 보이는 현상을 유지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건 아닐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감당할 수 없는 사실에 휘청거린다. 자신이 어마어마한 상속의 주인공이 될 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심어준 <릴리애너> 할머니의 등장에 적어도 속으로는 환호작약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단편도 즐겁다. 수많은 남편들을 갈아 치우며,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축적한 할머니가 자신에게는 일전 한 푼 남기지 않고 개를 비롯한 동물들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소식에 분노하지 않을 예비상속자가 어디 있을까 싶다. 하지만 죽었다던 할머니가 멀쩡하게 등장해서 증손녀들에게 강아지 알레르기를 선사하고, 아버지의 실업과 긴축재정 때문에 피자 같은 패스트푸드 조차 마음대로 사먹을 수 없는 가장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펌프질한다. 릴리애너 할머니는 등장할 때처럼, 사라질 때도 아무런 기약 없이 떠나면서 다시 한 번 희망을 좌초시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소설의 초반에 혹시 유령이 등장했나 싶어서 잠시 긴장했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자기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던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더 어린 수영 코치와 바람이 난 아버지의 갈등을 그린 <아이들>, 딸들의 등쌀에 아내와 사별한 후 자신이 진짜 사랑한 여인과 결혼하지 못한 채 홀로 외롭게 세월을 보낸 아르헨티나 지주 <아구스틴>이 코끼리 잡는 총으로 하마터면 문제의 근원 중의 하나인 둘째딸을 쏠 뻔한 장면에서는 왜 그렇게 통쾌하게 느껴지던지. 모든 것에 마음이 후해질 수밖에 없는 미국식 명절 크리스마스에 보니와 클라이드의 히치하이킹을 받아 들였다가 곤욕을 당하게 되는 가족이 등장하는 <오 타넨바움>도 흥미진진하다. 희대의 강도들처럼 어느 순간 돌변하는 게 아닌가 하는 나의 상상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다. 딸에게 곤경에 처한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겠다는 선의가 결국 외도로 결말이 나는 장면에서는 후안무치한 남자 에버렛의 뺨을 갈겨 주고 싶었다. 뭐 삶이 다 그렇게 가는 거겠지.


전반기에 읽은 탁명주 작가의 <도마뱀이 숨 쉬는 방>과 함께 마일리 멜로이 작가의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을 감히 올해 내가 만난 최고의 책들로 손꼽고 싶다. 좋은 책이라면 동시대인이 공감할 만한 특별한 무언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두 작품 모두 자극적인 MSG를 사용하는 대신, 단백한 소재들을 재료 삼아 정말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한 그런 멋진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묘한 감정선들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내가 아는 모든 지인들에게 이 책을 소개해 주고 싶다. 왜 마일리 멜로이의 다른 작품들이 아직도 미출간의 늪에 빠져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채 출간된지 한달도 안되는 마일리 멜로이의 신간 <Do Not Become Alarmed?>는 이번 여름을 뜨겁게 달굴 책 중의 한 권이라고 한다. 원서라도 사서 읽어야 하는 걸까,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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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떨어진 폴 2 - 인간계 생활 매뉴얼
남지은 지음, 김인호 그림 / 홍익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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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2권이다. 두 번째 “인간계 생활 매뉴얼”에서는 옥황상제에게 대들었다가 화과산 아래 수백년 동안 깔려 지내야 했던 손오공처럼 그분에게 반항했다가 인간계로 추락한 넵퍼 폴이 그분과 대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분명 그분은 폴의 아버지일 텐데, 그런 암시가 조금도 주어지지 않아 궁금증이 폭증했다. 그분은 묘하게 폴을 설득해서 말 잘듣는 착한 학생으로 만들어서 본래 임무에 충실하게 만들었다. 천사도 아닌 넵퍼 쯤이야 그분께서 어련히 다루어 주실까 싶었다. 아, 지금까지 폴은 Paul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제목을 유심히 보니 Paul이 아니라 Fall이었다. 이런 심오한 뜻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간도 천사도 아닌 믹스종 넵퍼 폴은 태생에서부터 숨은 기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계로 추락한 넵퍼.


천사들의 지상 아지트이자 알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알은 자신의 카페에 등장해서 꼬장을 부리던 연극배우 시내에게 조금씩 끌려 들어간다. 천사도 인간과 사랑을 할 수 있단 말이지. 하긴 폴의 존재가 인간과 천사의 만남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작가들은 만화의 곳곳에 그런 신화적 기호들을 잘 배열해 두고 있었다. 좌절하려는 시내에게 알은 더할 나위 없는 그런 위로를 안겨 준다. 어쩌면 거친 현실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 외로운 인간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알이 선사해주는 그런 진정성이 담긴 위로가 아닐까 싶다. 꿈을 포기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한편, 어디선가 숨어서 호시탐탐 넵퍼 폴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우리의 궁 아저씨는 비밀무기를 만들어서 세상의 악을 부스트업하는 비밀병기를 만들어내는데 마침내 성공한다. 그리고 폴을 꼬드겨서 그를 소멸시키는데 성공하려는 순간, 여주 공서희 양이 짜잔~하고 나타나서 폴을 구해낸다. 서로 은혜를 입고 갚고 하면서 사랑을 맹글어 가려는 클리셰이의 전개가 흐뭇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자자 그렇다고 그렇게 마냥 이야기가 공서희 양과 훈남 폴의 연애로 이어지면 곤란하니 이쯤에서 걸출한 라이벌을 한 명 등장시킬 순서다. 그것은 바로 공서희 양이 딱 하루 동아리 활동을 하던 번역동아리 출신의 또다른 훈남 윤희산 군. 누구 못지 않게 달달하고 화끈한 연애를 꿈꾸던 공서희 양에게 윤희산의 등장은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던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운명의 파트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폴의 심장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물론 마냥 스토리가 달달로맨스로 흘러 가면 곤란하니, 이쯤에서 공서희 양과 폴의 관계를 눈치챈 궁 아저씨의 훼방작전이 무르익을 전망이다. 자, 이제 이어질 3권을 기대하시라.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웹툰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네이버가 운영하는 코미코란 사이트에서 현재 연재 중이다. 이제 무료 콘텐츠의 시대를 갔는지, 연재 만화를 보려면 돈을 내야 한단다. 내가 돈을 내고 온라인 연재 웹툰을 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 책으로 만나게 된다면 또 몰라도 온라인 연재를 돈내고 보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디지털의 아날로그화에는 대찬성이고 기꺼이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지만, 여전히 구시대 사람인지라 디지털 미디엄에 대해 페이는 좀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뭐 또 시간이 지나고 아날로그를 디지털이 완벽하게 대신하게 된다면 또 생각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잠시나마 넵퍼 폴과 고시낭인 공서희 양과 함께 하는 시간들은 즐겁고 유쾌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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