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 일기에 나타난 어느 독일인의 운명
파울 요제프 괴벨스 지음, 강명순 옮김 / 메리맥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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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심쩍었다. 역사상 최악의 선전선동의 대가라 불리는 나치 제3제국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쓴 소설이라니. 하도 가짜뉴스가 세상을 속이니, 그가 이십대에 발표했다는 소설 <미하엘>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괴벨스의 주군 히틀러에게 <나의 투쟁>이 있었다면, 괴벨스에게는 <미하엘>이 있었다.


이 소설을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의 하나는 괴벨스가 처음부터 국가사회주의(나치즘)에 경도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가 문헌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문학에 대한 조예도 남달랐지 않았을까. 문제는 그렇게 학문적으로 갈고 닦은 재능을 인류사에 저해되는 방향으로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요란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두 물질의 융합반응처럼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와 그의 수하 괴벨스 박사는 제3제국과 독일민족을 전쟁이라는 파멸로 몰아넣은 주범이었다.


일기소설 <미하엘>의 모델은 광산 노동자로 일하던 괴벨스의 지기 리하르트 플리스게스다. 실제 전쟁에서 전투를 못해서 진 것이 아니라고 믿는 대다수 독일인들에게 1차세계대전의 패배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흔이었던 모양이다. 패전의 치욕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국건설이야말로 일생의 과제라는 선전이 소설의 전반부를 장식한다.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투쟁과 결단’이라는 “살벌한” 단어로 애정을 표현하다니, 그 시절을 정녕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나레이터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저 믿는 것이 중요하단다. 훗날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자신의 선전기술에 대한 예고편 혹은 왜곡된 신념의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건 정치나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 종교의 경지에 도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문헌학도 출신 대학생답게(소설에서는 법학과 예술 전공이었던가) 여행길에서 만난 러시아 출신 대학생 이반 비누로프스키와 러시아 출신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이하 도끼 선생)에 대해 화자가 토론하는 장면은 또 어떤가. 도끼 선생의 대표작 <백치>의 주인공 미쉬킨 백작의 예를 들어 다짜고짜 러시아인들은 모두 백치이며, 변덕스러운 성정을 가진 영혼들이라는 일반화의 오류를 서슴지 않는다. 도끼 선생의 작품을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부실한 싸구려 장식품”이라고 폄하하고 조롱한다. 동시에 아직 모습을 갖추지 않은 사회주의 러시아의 잠재적 가능성을 두려워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현명한 인재가 왜 히틀러의 파멸을 불러온 바르바로사 작전의 재고를 요청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들에겐 동방정복을 통한 레벤스라움의 조성이라는 허황된 이상이 현실을 무시한 군사작전보다 더 중요했던 것일까. 반유대주의, 볼셰비즘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드는 건 남성이라는 남성우월주의에 이르기까지 편협한 사고의 전개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것이 논리나 이성보다 그저 개인의 직관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더 놀랍다.


이어지는 연인 헤르타 홀크와의 대화에서도 여성을 독립적인 개체가 아닌 아이를 낳은 그릇 혹은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일기의 주인공 태도에서는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비논리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따르라는 주장에서는 훗날 제3제국에서 독일 민족을 파멸 근처에까지 몰아넣은 저돌적 맹신이 느껴지기도 했다. 노동, 희생 그리고 정신을 강조하면서 뮌헨에서 우연히 만난 지도자(아돌프 히틀러)야말로 독일 민족의 메시아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러시아 대학생 이반으로 대표되는 범슬라브주의에 대한 대결구도와 독일 패전의 주범이 자본가 계급과 유대인이라는 비논리의 전개에서는 치기어린 학자의 생각으로만 볼 수 없는 악의 본질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미하엘은 하층 계급의 노동이야말로 무엇보다 신성한 국가의 이상이라는 신념 아래 자발적으로 탄광으로 돌입해서 탄광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신뢰를 쌓아 나간다. 전문교육을 받은 대학생이 자신들과 같이 어울려 석탄 캐는 노동을 하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미하엘의 동료들은 그를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노동자 조직에 침투시킨 프락치라고 의심하지만, 결국 각고의 노력 끝에 그들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한다. 아니 이 소설이 과연 나치 천년제국의 신념을 가진 희대의 선전상이 쓴 소설이 맞단 말인가? 역자 후기에서 왜 번역자가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차가운 가슴으로 읽으라는 당부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괴벨스의 소설 <미하엘>을 다 읽고 나서 허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때 희곡과 시를 쓰며 아리따운 아가씨를 사랑하던 문학청년이 어떤 과정을 거쳐 편견과 왜곡된 신념으로 무장한 관료가 되어 독재자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독일 시민들을 파멸로 몰고 가게 되었는지 말이다. 소설 <미하엘>은 그런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특별한 반면교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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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23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괴벨스가 쓴 반자전적 일기라니.. 놀랍습니다. 괴벨스 평전에 이 책이 언급되는지 살펴봐야겠어요. 재미있는 점이 히틀러나 괴벨스나 오독을 잘하는군요. 유유상종이라는 사자성어가 어울립니다.

레삭매냐 2017-05-23 21:55   좋아요 0 | URL
청출어람 청어람이라는 말이 딱
들어 맞는 셋트 구성이지요.

일기소설체인데, 어쩌면 이렇게 터무니
없는 편견과 왜곡된 사고를 할 수 있을
지 궁금해지더군요.

하긴 먼나라 먼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만.

AgalmA 2017-05-24 0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를 꿈꿨던 히틀러가 좌절먹고 정치선동가가 된 것과 비슷하지 않을지. 예술적으로 두 사람 참 통했겠구나 싶네요.
제 아무리 뛰어난 천재도 시대통념을 벗어나기 어려웠으니 그보다 못한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역사의 바퀴는 참 가혹하기만 합니다. 한국은 촛불의 힘이 이 정도나마 잡아준 게 다행인지도요.

레삭매냐 2017-05-24 10:33   좋아요 1 | URL
돌아이의 영희 철수 크로스라고나 할까요...

그나마 독일 사람들은 철저한 반성으로
다시는 그런 시절이 돌아 오지 않도록
하고 있지만, 가혹한 역사가 반복되는 걸
사전에 예방하지 못해 그 추운 겨울날
촛불이 나섰어야 했다는 게 비극입니다.
 
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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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부지런을 떨어서 현대 영문학을 대표하는 영국 출신 작가 이언 매큐언의 <칠드런 액트>를 다 읽었다. 사실 그의 책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몇 개 소장하고만 있었다, 물론 읽지는 않고. 그중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칠드런 액트>는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했지만 역시나 읽지 않고 반납한 기억이다. 이번에 신간 <넛셸>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지난 금요일날 냉큼 서점에 달려가서 <칠드런 액트>를 사왔고 주말 동안 다 읽을 수 있었다.

 

디테일에 강한 작가라고 하는데 책을 읽다 보니 충분히 그런 점들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올해 59세의 가족법 전문가로 고등법원 가사부에서 맹활약 중인 35년 경력의 피오나 메이 판사다. 그녀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법원에서 다뤄야 할 다양한 형태의 쟁송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겠다고 선언한 역사학 교수 남편 잭의 개방결혼에 가까운 공식적 외도선언이다. 내세가 있지 않을 거라며, 죽기 전에 불타는 사랑 한 번 해보겠다는 남편의 폭탄선언에 피오나 판사는 그야말로 멘붕에 빠질 지경이다. 남편이 외치는 사랑타령의 본질은 성행위, 다시 말해 섹스다. 고작 섹스 때문에 조강지처를 버리고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여자를 찾아 나서겠다니. 바로 이 지점에서 이언 매큐언 선생은 사랑에서 시작해서 공격적 혐오로 끝난 그 무엇의 실체(결혼제도)에 그렇게 문학적 도전장을 날린다. 커리어 여성으로 일에 전념하다 보니 아이를 가질 기회도 없었고, 무엇보다 노년을 앞둔 자신의 여성으로서 매력없음을 자각하게 된 사실이 주인공에게는 가장 뼈아프지 않았을까.

 

가사법원에서 정말 다양한 이혼 소송을 체험한 그녀에게 닥친 시련은 곧 이어질 소설의 핵심과제와 기묘하게 중첩된다. 실제 사건 판결문을 읽고,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이언 매큐언의 말대로 작가는 처음부터 치밀한 구성을 전개한다. 주인공 판사에게 닥친 가정 위기는 곧 누구를 살리고 죽이느냐라는 고대 솔로몬왕의 재판 같은 샴 쌍둥이 이슈로 전이된다. 작가는 마치 소설의 서두에서 영국 관습법체계에 문외한인 독자를 위해 배려하는 차원에서 친절한 설명을 빠뜨리지 않는다. 기존의 판례를 중시하는 피오나 판사의 명쾌하고 논리적인 법조문 설명에 독자는 자연스레 동화된다.


 



자, 이제 이번 소설에서 정말 다루게 될 진짜 이슈에 해당하는 관문을 열어 보자. 애덤 헨리, 이제 만 18세 성인을 고작 3달 앞둔 상황에서 법적으로 아동에 해당하는 청소년 애덤이 덜컥 백혈병에 걸려 버렸다. 수혈을 해서 치료를 하게 되면 완치의 가능성이 높다는 병원 측의 주장에 반해 종교적 이유 때문에 애덤의 보호자인 부모와 본인은 수혈치료를 거부한다. 이런 방식으로 작가는 도덕, 법 그리고 의학이라는 트라이앵글에 독자를 가두어 버린다. 물론 독자에게 해결책은 없다, 다만 작가가 인도하는 대로 장님처럼 따라갈 뿐.

 

애덤의 부모는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으로 피는 하나님에게 받은 신성한 것이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며 수혈치료를 거부한다. 아마도 그런 부모와 장로 그리고 다수 회중의 영향 탓에 애덤 역시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 수혈을 원치 않는다고 한다. 가정이 부서지고 와중에서도, 법 전문가 피오나는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사회복지사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한 판단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애덤 헨리를 직접 만나 판단하겠다고 선언한다. 논란의 중심에는 어떤 경우에도 “아동의 복지”를 최우선해야 한다는 칠드런 액트가 자리하고 있다. 합리적인 피오나 판사가 어떤 판결을 내릴지 짐작이 간다.

 


소년이 입원한 병원에서 그를 만난 피오나 판사는 애덤이 훨씬 더 다루기 힘든 존재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챈다. 병실에서 피오나와 애덤의 나누는 대화야말로 소설 <칠드런 액트>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언 매큐언 선생은 자신의 장기인 화려하면서도 균형 잡힌 디테일을 최대한으로 구사한다. 애덤은 피오나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총명하고, 성숙한 사고의 소유자였으며, 배움과 감수성에서도 일가견을 보여주는 그런 소년이었다. 종교적 교리 논쟁에서도 다년간 법정에서 경력을 쌓은 베테랑 판사에게 뒤지지 않는, 어쩌면 감정적으로 우세한 입장에서 멋진 대화를 이끌어 간다. 아마 이 소설이 영화화된다면, 이 부분이 어떤 식으로 영화화될지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지경이었다. 길지 않은 대화를 마치고 법정으로 돌아온 피오나 판사는 강제 수혈로 소년의 생명을 구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소설이 모두가 그렇게 행복했더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을까? 어떤 획기적인 반전을 예상한 독자들의 기대를 이언 매큐언 선생은 저버리지 않는다. 남편 잭의 또다른 사랑을 찾아나선 가출과 애덤 헨리의 생명구하기 재판이라는 투트랙 가운데 후자가 먼저 매듭을 지은 것처럼 보이자, 집나간 남편도 새로운 애인에게 바람이라도 맞았는지 꼬리를 내리고 집으로 귀환한다. 그동안 성취한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았던 노부부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고, 상처를 보듬기 시작한다. 아, 부부관계 역시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던 걸까.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부르주아지 가정의 한계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잭의 사면을 위해 피오나가 제안한 식사 자리에서 소리 없이 치르는 전쟁 그리고 동료 마크 버너와 함께 한 아마추어 콘서트에 앞서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고 감정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장면 등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가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도덕적 딜레마, 종교, 가족법 그리고 의학에 이르는 다양한 소재들을 가지고 황홀한 맛의 문학적 비빔밥을 창조한 이언 매큐언 선생에게 경의를 보내고 싶다. 새로 만난 이언 매큐언 선생의 작품은 내게는 너무나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신간 <넛셸>에서도 못지않은 탄탄한 구성과 고전과 영화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디테일 최강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하는데 기대가 크다. 뒤늦게 이언 매큐언 선생의 팬이 되어 하나씩 그의 전작들을 섭렵해 나갈 계획이다. 오래 전에 입수해서 고이 모셔 두었던 <이노센트>는 바로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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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7-05-22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언 매큐언 월드에 발을 들이신 건 완전 환영합니다. ㅎㅎ
신간 나오기 전에 <이노센트>도 다 읽으실 것 같은데요. ^^

레삭매냐 2017-05-22 14:05   좋아요 1 | URL
<칠드런 액트> 너무 재밌었어요.
<이노센트> 바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문동 이벵으로
받아 두었었거든요.

갠적으로 <토요일>이 질로 땡기는데 아직 구하지
못해서 아쉽네요 ~

<넛셸> 빠이팅!!!

대장물방울 2017-07-26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크, 저도 집에 모셔두고만 있었는데 이제 읽어봐야겠군요!

레삭매냐 2017-07-26 11:32   좋아요 0 | URL
강추합니다.
이번에 영화화된다고 하니 그전에 미리
읽어 보심이 어떨런지...
 
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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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감회가 새롭다는 말을 하고 싶다. 세 번의 도전 끝에 결국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다 읽을 수가 있었다. 그것도 단 3일 만에. 완독하고 나서 왜 두 번이나 실패했는지 되짚어 보니, 독서의 맥을 끊는 어려운 각주들을 모두 읽겠다고 설친 것과 메노키오의 신앙 부분에 관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장애물이었던 것 같다. 전자는 패스하고, 후자는 유시민 선생의 충고를 따르면서 읽으니 금세 다 읽을 수가 있었다. 또 하나 자극점은 얼마 전부터 읽고 있는 제임스 레스턴이 저술한 <밧모섬의 루터>와 주경철 선생의 <일요일의 역사가> 덕분이라고 해두자.


서구 미시사의 신호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는 16세기말 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 지방의 몬테레알레에 살던 도메니코 스칸델라(1532~1599), 다른 이름으로 메노키노라 불리는 방앗간 주인의 이단 재판 기록에서 출발한다. 1584년 2월, 메노키오는 이단적이고 불경한 발언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종교 재판소에 출두하게 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전수 받은 지식이 아니라, 독자적인 공부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과 마리아의 처녀성 그리고 교황과 사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메노키오의 발언은 종교가 지배하던 시기에 이단으로 몰리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게다가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체제 질서가 흔들리던 시기에 정통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은 종교당국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진즈부르그 교수는 실제 역사와 문학을 넘나드는 아주 흥미로운 진술을 이어간다. 그의 주된 사료는 메노키오의 이단 재판 기록이다. 몬테레알레 마을 촌장과 행정관을 역임한 메노키오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글쓰기와 읽기를 할 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으로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이 이탈리아 민간에도 유포되고 있던 시기에, 메노키오는 <성서의 약술기>, <맨더빌 여행기>, 검열받지 않은 <데카메론> 그리고 <코란> 등과 같은 서적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하면서도 독자적인 창조론과 우주관을 성립하기에 이른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삼위일체를 부정하면서 하나님은 공기며, 그리스도는 흙 그리고 성령은 물에서 온 것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펼친다. 나머지 하나의 원소는 원(圓)이라는 주장을 자신의 운명에 대한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릴 수도 이단 심문관 앞에서 거리낌 없이 전개한다.


메노키오의 이런 주장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던 이단 심문관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다. 그들은 1584년 메노키오의 첫 번째 재판에서 촌부 방앗간 주인의 모순과 왜곡으로 가득한 주장들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 종교 재판 기록을 바탕으로 현대의 인문학자 카를로 진즈부르그는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추리소설에 버금갈 정도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메노키오가 재판 과정에서 보여주는 논리학과 수사학적 전개는 비록 자기모순적이고 텍스트에 대한 왜곡으로 논점에서 벗어난 부분들도 상당 부분 눈에 띄기는 하지만,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즈부르그는 교수는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메노키오의 사례가 당시 민중 문화와 상당부분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메노키오가 프로테스탄트 루터파와 직접적으로 접촉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기존 가톨릭의 부패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했던 루터의 영향력이 곳곳에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고위층의 엘리트 문화과 변별되는 구전 문화 전승에 입각한 민중 문화는 현실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보다는 물질주의(주경철 선생이 표현한 머티리얼) 혹은 유물론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종교재판소에서 메노키오가 거듭해서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이단 심문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 실제로는 유물론자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간이 죽으면 영도 마찬가지로 죽는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영혼불멸을 부정하는 것이며, 마리아에게서 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그가 주장하는 천국의 모습은 기독교 세계의 천국이라기 보다 마호메트가 보여준 천국에 더 가까웠다. 지옥과 연옥은 사제들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 역시 루터파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아울러 세계인은 모두 자신만의 종교를 가질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점도 기독교 이단 심문자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기존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이단 심문자들은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 보면, 공안 검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이단적 주장을 펼치는 방앗간 주인의 모습을 보면서 메노키오의 이런 주장이 기존의 종교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자연적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메노키오의 이런 주장이 독자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기존 질서의 수호자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 배후에 있다고 생각하고 두 번째 재판에서는 그를 고문하기에 이른다. 물론 자기 신념에 가득찬 메노키오는 시간끌기 전략과 부인으로 자신의 독자적 창조론과 우주관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자제할 수 없었던 메노키오가 동향인 다니엘 야코멜에게 “심문관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첫 번째 재판에서 메노키오는 보석으로 주기적인 고해 성사와 이단자를 상징하는 하비텔로를 입고, 주거지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조건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5년이 지났지만, 독서와 사유를 통해 자신이 스스로 창조해낸 신념을 버릴 수 없었던 이 방앗간 주인은 이단으로 고발되어 다시 한 번 종교 재판정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시절과는 달리 사랑하는 아내와 믿음직한 아들을 잃어버린 탓에 유능한 변호사를 구할 수 없었는지 혹은 같은 죄목(이단)의 재범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이번에는 종교당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처형당하고 만다.


메노키오의 종교 재판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여백에는 어김없이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상상력이 개입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지 않았을까하는. 기존의 거시사에서라면 보잘 것 없는 역사의 편린으로 치부되었을 사건 하나가 동시대의 어느 보편적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가정이야말로 미시사의 핵심요소라는 작가의 주장에 공감한다. 엘리트 교육을 받지 않은 일개 농민이자 방앗간 주인이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제들과 이단 심문과들을 상대로 당당하게 법정에서 철학자, 천문학자 그리고 선지자를 자처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정말 흥미진진했다.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는 진실을 추구해 가는 과정을 그린 한편의 스릴러면서, 동시에 중세에서 근대로 가는 이행기에 벌어진 법정드라마기도 하면서, 종교개혁과 인쇄술 혁명의 가져온 한 개인의 사유의 극적 발전과 비극을 그린 그야말로 파노라마 같은 삶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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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larosa 2017-05-18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과 흔적> 힘들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오랜 시간이 흘러 내용이 뭐였는지, 읽을 당시에도 내공부족으로 ㅠㅜ 레삭매냐 님의 글 읽고 힘내서 저도 <치즈와 구더기> 도전해볼까 합니다. ^^;

레삭매냐 2017-05-18 17:47   좋아요 1 | URL
미시사 연구자들의 글이 좀 어려운 것 같긴 합니다. 진즈부르그의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도 읽고 싶은데 품절 책이라 구할 수가 없네요.
 
제5도살장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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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8년 만이다. 자그마치 8년 만에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다시 읽었다. 빌리 필그림, 엘리엇 로즈워터 그리고 킬고어 트라우트까지. 이후에도 보니것 작품들에 등장하게 될 익숙한 이름들이 줄 지어 등장할 때, 짜릿한 전율까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지. 뒤늦게 보니것 바람이 분 모양이다. 그의 미발표 유작도 곧 도착할 예정이니 보니것 풍년이 아닐 수 없다.


커트 보니것은 이 소설을 발표하기 전까지 몇몇 장르소설을 발표하면서 인지도를 쌓아 왔지만, 요즘은 한국 드라마에서조차 클리셰이가 된 시공을 오가는 타임슬립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뉴욕주 일리엄 출신 검안사이자, 분명 자신의 페르소나가 분명한 빌리 필그림이라는 전쟁터에서 정말 어릿광대 뺨치는 ‘소년병사’의 좌충우돌 체험을 바탕으로 시대의 걸작 소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커트 보니것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바로 반전 메시지다. 이미 13세기 성직자들의 선동으로 시작되어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뿌리 깊은 반목의 원인이 되었던 십자군 원정에도 등장한 어린이 십자군이 현대에도 모습을 바꾸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단적 나치 파시즘을 박멸하는 정의로운 전쟁에 동원된 미국 젊은이들의 현실은 우스꽝스러운 토가를 걸침 빌리 필그림의 이미지로 정확하게 치환된다.


군종병으로 독일군의 마지막 공세에서 전쟁에 숙련된 독일군 베테랑에게 포로가 된 일단의 미군들은 독일 영내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된다. 그리고 히로시마 원폭 이상의 끔찍한 희생자를 낸 1945년 2월 13일에서부터 15일까지 3일간 계속된 공중폭격으로 ‘엘베 강의 피렌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고도 드레스덴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과연 이 폭격이 의미가 있었을까? 자크 파월은 800여대의 폭격기가 동원된 드레스덴 대폭격의 진정한 목적은 동쪽으로 베를린을 향해 맹렬하게 진격해 오고 있던 스탈린의 적군에 대한 미영의 강력한 무력 시위였다고 하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20만명에서 25만명의 희생자를 인류 역사상 최악의 폭격이자 ‘인간 도살’이었다고 그는 규정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수용되었던 <제5도살장>은 단순하게 드레스덴 폭격만을 주된 소재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육체파 여배우 몬태나 와일드핵과 함께 가공의 행성 트랄파마도어의 동물원에 수용되어 손에 눈이 달린 외계인들의 구경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오가는 시간여행 그리고 못생긴 아내 발렌시아와의 결혼생활, 아내가 죽은 뒤 외계인과의 접촉사실을 사방에 알리다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1968년 현재의 모습 등이 뒤죽박죽으로 전개된다. 필라델피아에 사는 드레스덴 시절 전우를 찾아가는 장면 등 그야말로 백화점 같은 이야기를 죽 전시하는 가운데, 진짜로 전쟁을 체험한 베테랑 병사의 강력한 메시지를 훗날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블랙유머로 잘 포장해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솜씨가 그야말로 압권이다. 과거 전우의 아내가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 후 그녀와 반전을 공감대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했던가.


무기를 팔아먹는 군산복합체 말고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전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됐다. 애국심에 호소해서 전쟁을 부추기는 정치인, 우리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며 본질을 왜곡하는 전쟁상인 그리고 이미 전쟁을 겪은 세대의 선동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한다고 저자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들의 현실에서 벗어난 선전선동이 트랄파마도어 행성과 지구별을 오가며 다양한 체험을 했다는 빌리 필그림의 허무맹랑한 주장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빌리 필그림이 열렬하게 추종하는 SF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에 대한 빌리의 딸이 가진 적개심은 보니것 특유의 블랙유머가 돋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거의 어릿광대 같은 모습을 한 미군 전쟁포로 빌리 필그림에게 독일군이 던진 한 마디다. 전쟁이 장난인 줄 아냐고. 피와 살이 튀는 그야말로 끔찍한 전쟁을 빌리 필그림 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병사들이 수행했다는 것이야말로 희비극이 교차하는 전쟁의 실체가 아니었을까.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다수의 미군 포로들을 호송하는 독일 병사들 역시 어린이 십자군과 퇴역한 노병이 아니었던가. 엄청난 물자가 약탈당한 전시에 고작 드레스덴 폭격 후에 교사 출신 노병 에드가 더비가 찻주전자를 훔쳤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장면도 어처구니가 없긴 마찬가지다.


보니것의 전작 <마더 나이트>의 주인공이자 이번에는 카메오로 출연한 하워드 W. 캠벨 2세에 대한 에피소드도 빼놓을 수 없다. 나치의 부역자 캠벨 씨(사실은 이중스파이)가 미군 포로들의 행태에 대한 논문이라는 형식의 글을 한 번 살펴보자. 미국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지만, 그 나라 국민들은 누구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파괴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가난뱅이들이며 포로로 잡힌 병사들에게서는 어떤 연대나 형제애도 기대할 수 없노라는 냉소 섞인 분석을 시도한다. 한 다미로 말해 ‘인간다운 존엄성을 상실한 대량의 빈곤층’이란다. 저자가 구사하는 씁쓸한 진실에 입맛이 쓰다. 너무나 리얼해서 트랄파마도어 외계인도 믿어 버릴 정도로 말이다.


시간여행, 지구별과 트랄파마도어라는 외계 행성을 오가는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설정과 어릿광대에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빌리 필그림이라는 인물을 통해 커트 보니것은 전쟁국가 미국의 실체를 고발한다. 2차 세계대전의 진짜 목적은 독일 파시스트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미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의 전세계화 그리고 미국 기업이 추구하는 이윤의 극대화였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 와중에 작가가 직접 체험한 드레스덴 폭격은 미영의 동유럽을 집어 삼키려는 스탈린에 대한 냉혹한 경고장이었고,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수많은 독일 시민들이 도살된 것이다. <제5도살장>이 발표된 즈음, 미국은 아픈 상처로 기억될 베트남 전쟁의 진창 속으로 뛰어 들고 있는 중이었다. 21세기에도 전쟁국가 미국은 여전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포의 일상화 그리고 ‘상상된 위험’으로 수지맞는 장사가 성업 중이다. 미국 문단의 이단아 혹은 현자 커트 보니것이 다룬 전쟁에 대한 우화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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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 중세에서 근대의 별을 본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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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네이버 파워라이터 코너를 통해 소개되어 오던 주경철 교수님의 <유럽인 이야기> 그 첫 번째 이야기가 드디어 책으로 엮어 나왔다. 모바일 시대가 드디어 코덱스(책)이라는 구세계의 체험을 능가해 버린 마당에, 요즘 청년들에게 역사 지식도 재밌을 수 있다는 발상에서 글을 쓰셨다고 했던가. 나도 저자의 근대세계를 연 유럽인들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군더더기를 빼고 핵심적인 내용을 저술한 내용이 아주 섹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 왔지만, 이번 책은 정말 재밌게 느껴졌다. 앞으로 주경철 교수님의 역사저술 항해가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란다.

 

저자의 역사평설에 등장하는 첫 번째 주자는 잔다르크다. 아쉽게도 밀라 요보비치가 주연을 맡은 지난 밀레니엄 시절의 블록버스터는 물론이고, 고전 칼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도 보지 못한 무지한 독자에게 신의 목소리를 듣고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느닷없이 나타난 시골처녀의 무용담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시대전환기를 상징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잔다르크가 무용을 떨친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두 국가 모두 중세에서 벗어나 민족국가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였다. 잉글랜드군의 파상공세에 밀리던 프랑스 샤를 7세는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마침내 대륙에서 잉글랜드군을 소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렇게 샤를 7세는 자신과 자신의 왕국을 회복하는데 헌신적이었던 남장 소녀 잔다르크가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되어 화형에 처할 위기에 처했어도 소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다시 한 번 정치의 세계가 얼마나 냉혹하다는 사실을 잔다르크의 수난을 통해 체험할 수 있었다.

 

프랑스 방계 가문으로 플랑드르에서 지금의 룩셈부르크 그리고 부르고뉴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4대에 걸친 부르고뉴 공작들의 활약을 저자는 무협지에 비유하기도 한다.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면서도 독립을 추구하며, 백년전쟁에서는 잉글랜드 편에 서기도 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물론 현재 민족국가 개념으로 볼 때, 적군 편에 붙은 민족배신자 개념은 아닐 거라고 저자는 설명을 붙인다. 무수한 정략결혼을 통해 영지를 넓히고, 프랑스 국왕의 섭정도 경험했으며 정적을 암살하는 등의 모습은 격동의 시절을 보는 듯한 기시감을 보여 주기도 했다. 마지막 공작이었던 담대공 샤를이 영지 통합을 위해 로렌공략에 나섰다가 전투에서 패배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는 장면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힐러리 맨틀의 <울프홀>에 등장하는 잉글랜드 국왕이자 6명의 왕비를 들인 호색한 헨리 8세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튜더 가문 출신으로 십대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무소불위한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이야말로 최고 권위를 지닌 왕이라는 자부심으로 권력의 힘을 마구 휘두른 철혈독재자의 이미지를 엿볼 수 있었다. 원래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는 차자였지만 형의 죽음으로 왕세자가 되고, 형수취수까지 하면서 왕이 되어 자신의 왕위를 이을 후사를 기대했건만 왕자 생산에 실패하면서 그야말로 엽기적인 엽색행각을 마다하지 않은 난봉꾼에 가까운 왕이 바로 헨리 8세였다. 순전히 자신의 이혼 문제 때문에 자신의 잉글랜드 교회조직의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발표하고,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서 벗어나 신교개혁에 착수하기도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잉글랜드 각지에 산재해 있는 수도원이 보유한 막대한 재산을 국고로 돌리기 위한 음흉한 계책이 숨어 있었다. 자신이 총애하던 신하들도 하루아침에 대역죄인 신세가 되어 참수되기도 했다. 하긴 왕비도 대역죄인이 되어 참수 되는 마당에 무얼 더 바라겠는가. 어쨌든 그의 통치 시간을 거쳐 유럽의 이류국가에서 훗날 제국주의 최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저자의 평가가 마음에 들었다.

 

우연이 겹치는 상속으로 유럽대륙 서쪽의 스페인 국왕이자 동쪽의 합스부르크 가 출신으로 거대한 제국이 카를 5세에 수중에 들어갔다. 어마어마한 영지를 상속받은 카를 5세의 치세는 격동과 난제의 연속이었다. 광녀 후아나의 아들로 태어난 제국의 상속자는 그야말로 동분서주하면서 제국 통치에 여념이 없었다. 광활한 제국의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진압과 전쟁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신구교의 대립이라는 심각한 문제도 해결해야만 했다. 고귀한 귀족혈통 보존을 위한 근친결혼의 유전자 폭발이라는 부정적 면도 있었다는 점을 꼬집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재벌도 피곤할 수 있다는 역사의 방증이라고 해야 할까나. 한편, 저자는 중국식 제국이 아닌 느슨한 유럽식 제국의 분열과 경쟁이야말로 오히려 유럽사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카를 5세의 방대한 제국도 결국 서로 이질적인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으로 갈라지지 않았던가.

 

지난 3월에 읽은 <그해, 역사가 바뀌다>에서도 소개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야기는 이제 익숙하기까지 하다. 카스티야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받아 서쪽 아시아로 가는 대서양항로를 개발하겠다고 나섰다가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목숨을 건 모험에 나서게 된 이유를 경제적 이익이나 신분 상승 같은 성공보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풀어낸 저자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종교계에서는 인정할 수 없었지만 지구구형설은 이미 당대 지식인들에겐 상식이었고, 독학으로 학문을 접한 이들이 흔히 그렇듯 콜럼버스 역시 아집에 사로 잡혀 있었다고 한다. 정작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개척에서는 소외되고, 스페인 왕실에 외면을 받은 그가 말년을 점성술이나 이슬람 세력이 특정 시기에 멸망할 것이라는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혀 보낸 점도 특이할 만하다. 같은 맥락에서 콜럼버스에 이어 후발 식민주의자로 아즈텍 제국 정복에 나선 코르테스와 그의 통역사 말린체의 협력이 신세계에서 벌어진 폭력적 방식의 결합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즈텍 인들의 인신공희가 그들만의 우주관에 입각한 종교 철학이었다고 한다. 인신공희에 필요한 전쟁 포로와 노예를 마련하기 위한 “꽃 전쟁”을 유럽 기독교인들이 야만적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런 점에서 말린체는 수많은 인간의 피를 접수한 케찰코아틀 신보다 에스파냐인들의 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라이벌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진정한 의미에서 르네상스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우리에게는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린 화가로 유명한 다빈치가 사실은 문화 및 예술은 물론이고 군사기술과 교량건축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였다고 저자는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경건한 결혼생활이 아닌 자유로운 연애에서 태어난 사생아 출신이라는 점도 그의 천재성을 설명해 주는 한 가지 요인이었을까. 피렌체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운영하는 보테가(공방) 출신 레오나르도는 출중한 데생 실력을 바탕으로 스승보다 뛰어난 실력의 회화기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저자가 <최후의 만찬>에 대해 말했듯이, 우리가 흔히 컴퓨터 화면이나 화보로 보는 것과 웅장한 사이즈의 오리지널 감상은 확실히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압도적이라고나 할까. 그의 동성애 애인이 그린 짝퉁 <모나리자>의 오리지널리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또다른 시대의 천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나 체사레 보르자와의 특이한 인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남긴 수많은 스케치들을 담은 코덱스들에 대한 가치는 경매장에서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팔리고 현실이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 중에 하나는 빌 게이츠가 소장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스포르차 가문이 지배하는 밀라노에서 활약하고 말년에는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와 1세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에서 죽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야말로 르네상스 시대 세계인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경철 교수님이 마지막에 배치한 마르틴 루터야말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올해에 가장 적합한 시대인물이 아닐까 싶다. 가톨릭 수사 출신의 종교개혁가가 처음부터 가톨릭 질서를 위협하는 ‘멧돼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 건축되고 있던 거대한 베드로 성당과 독일내 주교들의 짬짜미로 이루어진 면죄부 판매가 시행되면서,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엄격했던 수도사는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다. 가톨릭 내부개혁을 위한 비판은 1세기 전에도 교황청에 이단으로 화형당한 얀 후스의 전례가 있지 않았던가. 왜 얀후스는 실패했고, 루터의 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결정적 차이 중의 하나는 바로 인쇄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있었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보급으로 지식인은 물론이고 대중까지도 좀 더 체계적인 방식으로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 파문당한 루터가 현명공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거하는 동안 독일어로 저술한 성경 그리고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칭의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야말로 종교개혁의 분기점이 되었다. 물론 종교개혁에 대한 촉발은 루터가 시작했지만, 나머지 시대적 흐름은 그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독일 농민들에게 루터의 종교개혁은 가톨릭 종교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지만, 루터가 주창하는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엄격한 개인의 수양은 또 다른 족쇄에 불과했다. 그 결과 루터는 농민반란에서 귀족 편에 서게 되었고, 반유대정서를 부추기는 저술까지 발표하는 반동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던 건 간에 종교개혁은 시대의 대세가 되었고 근대로의 전환기를 상징하는 일대 사건으로 자리매김에 이르렀다.

 

숨 가쁘게 오늘날의 유럽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혹자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전쟁터와 바닷길을 누볐고, 엄청난 규머의 대제국의 상속자는 동분서주하며 통치를 했고, 어떤 공작들은 자신의 영토를 넓히고 왕국으로 승격하기 위해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무려 6명의 왕비를 둔 국왕은 무자비한 통치를 일삼았지만 궁극적으로 제국의 초석을 닦는데 성공했다. 어떤 르네상스 지식인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위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종교개혁에 나선 수도사가 과연 천국에 갔을까하는 저자의 마지막 질문아 갖는 함의의 무게는 적지 않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다양한 군상들의 총합이 오늘날 세계를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오늘의 세계를 만든 또다른 이들의 이야기들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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