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The Complete Maus 합본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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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정말 오랜 만에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다시 읽었다. 만화로 미국의 저명한 문학상인 퓰리처상 수상을 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예술성은 담보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의 편린 정도가 남아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 다시 읽어 보니 나치의 잔혹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비애에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었다.

 

아트 슈피겔만의 그래픽노블 <쥐>는 두 가지 이야기를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작가의 아버지 폴란드 출신 유대인이었던 블라덱 슈피겔만이 아냐 질버베르크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다가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고 게토에 거주하며 쫓기던 가운데 결국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로 끌려 갔다가 살아남게 되는 이야기 하나 그리고 그렇게 살아 남은 아버지 블라덱이 스웨덴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여전히 아우슈비츠 시절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 자신과의 불화를 그린 이야기 둘.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자란 아트 슈피겔만의 눈에 반평생을 외국에서 보낸 아버지 블라덱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던 모양이다. 아우슈비츠의 후유증을 결국 극복하지 못한 작가의 어머니 아냐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아버지 블라덱은 같은 수용소 출신 말라와 결혼했지만 인색한 유대인 구두쇠의 이미지를 문자 그대로 보여준다. 후반에 블라덱이 보여주는 흑인에 대한 지독한 인종차별은 나치의 인종차별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 모습은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탄압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그래픽노블에 담은 이미지들이 반유대주의를 부상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포스트홀로코스트 진실을 알리겠다는 사명감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전달하고 있다고 강변한다. 자신이 구입한 식료품을 상점에 가서 반납하겠다고 고집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에 넌더리를 내기도 하고, 가스를 켜기 위한 성냥을 아끼기 위해 호텔에서 제공하는 종이성냥을 슬쩍하기도 하고 집세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루종일 가스를 켜둔다는 말에서는 정말 질려 버렸다. 하지만 블라덱이 보여주는 이 모든 근검절약 정신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아우슈비츠에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전략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해못할 바도 아니었다. 블라덱 슈피겔만 역시 시대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다고 진술한 블라덱 슈피겔만은 젊은 시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호남자였다고 한다. 진지한 교제를 하기도 했지만, 부유한 집안의 여성과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던 그에게 직물공장으로 백만장자였던 질버베르크 집안의 아냐야말로 이상적인 배우자였다. 처갓집의 후원 덕분에 잘 나가던 블라덱은 첫아들 리슈를 낳고 그야말로 꿈같이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웃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 이래 점증하던 유대인 박해는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독일이 폴란드가 침공해서 제국령과 보호령으로 나누면서 폴란드 유대인들에게 현실이 되었다. 폴란드군으로 징집되어 전투에 나섰지만 전쟁포로가 되어 집으로 무사히 귀환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가혹했다.

 

전 유럽의 유대인들을 절멸시키겠다는 나치 독일의 최종해결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비록 유대인으로 박해를 당했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블라덱 가족은 뿔뿔히 흩어지고 차례로 가스실로 실려 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교묘하게 위장된 벙커와 가지고 있던 금품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수차례나 운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1944년 마지막으로 헝가리로 탈출하려던 계획이 실패하면서 블라덱과 아냐는 한 번 들어가면 굴뚝으로만 나올 수 있다던 아우슈비츠, 폴란드 이름으로는 오시비엥침으로 끌려 간다. 역시 수용소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가 그의 저서에서 알려 주었듯이, 젊은 블라덱이 가지고 있던 건강과 기지 그리고 언어능력은 그가 수용소에서 살아남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에 비하면 허약하고 의지도 부족했던 아냐가 리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정말 기적이었다.

 

블라덱은 수용소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과 운을 총동원했다. 아첨을 해야 할 때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아첨을 했고, 말단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카포에게도 영어를 가르쳐 준다는 빌미로 호감을 얻은 정보로 가스실로 향하는 선별작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직물상인으로 함석장이나 제화공 기술은 하나도 모르면서, 남보다 기술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블라덱은 기지를 발휘해서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미국에서 다이아몬드 상인으로 풍족해진 다음에도, 땅에 떨어진 전선 조각 하나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음식은 모두 소비해야 한다는 철두철미한 절약정신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트 슈피겔만이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어른들은 모두 자면서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줄 알았다고 했던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련군의 진격으로 아우슈비츠가 무사하게 해방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다수의 유대인들이 다시 독일내로 수용되었다는 점은 미처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사리 살아남았지만 또 그 와중에 어이 없이 죽어 갔다는 점도 다시 알게 됐다. 도대체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들만이 “마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래픽노블 <쥐>는 블라덱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 남아 사랑하는 아냐와 다시 만나는 장면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슈피겔만 작가는 아버지의 기억을 토대로 해서 자신만의 그래픽노블을 완성시켰다. 나치에게 핍박당하는 유대인은 쥐로, 유대인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치는 고양이로, 폴란드 사람들은 돼지로(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미국인들은 개로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은 개구리로 묘사했다. 개인위생과 청결을 중시하는 그들의 눈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미키 마우스라는 캐릭터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나치는 인류에게 해만 끼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유대인을 쥐에 비유했다. 전쟁 전에는 그렇게 친절하던 폴란드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나치에 쫓기는 존재가 되자, 박정하게 대하는 장면도 그렇고 전쟁이 끝난 뒤에 자신의 재산을 되찾기 위해 찾아온 유대인을 폭행하고 심지어 살해하는 장면은 정말 끔찍했다. 어렵사리 회복한 자신들의 땅인 팔레스타인에서 악착같이 정착촌을 세우고, 다수의 아랍민족에게 포위된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점은 이해하면서도 과연 평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한지 다시 묻게 된다.

 

블라덱 슈피겔만의 생존기만큼이나 아들 아티와의 지난한 갈등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1970년대 뉴욕 퀸즈 레고 파크에 거주하는 블라덱은 자신의 기준에서 보기에 제멋대로인 아들 아티를 이해할 수가 없다. 보다 실용적인 직업 대신 만화가의 길을 걷는 아들 아티를 그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래픽노블의 시작에서 등장한 친구에 대한 개념에 대해 아들에게 실질적인 조언을 하는 아들과 아버지와의 간극만큼이나 어쩌면 홀로코스트는 우리에게 실제 경험자들과 거리가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아들 아티 역시 홀로코스트의 악몽으로부터 평생 벗어날 수 없었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의 뇌리에 각인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영원히 제거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추체험에 불과한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체험의 기억을 아티의 말처럼 없었던 것으로 하기도 불가능했으리라. 이런 세대 간의 간극이야말로 갈등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유서 한 장 없는 어머니의 죽음도 역시나 아트 슈피겔만에게 트라우마였으리라.

 

아마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은 친구의 추천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아트 슈피겔만의 <쥐>와 만나게 됐다. 클래식은 시공을 초월해서 읽어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지난 주말에는 예전에 읽었던 책들과 다시 만나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지금 다시 읽게 된 커트 보네거트(보니것보다 보네거트가 왜 더 마음에 드는걸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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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 타이 생활기 - 쾌락의 도가니에서 살다
다카노 히데유키 지음, 강병혁 옮김 / 시공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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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빠져서 국내에 출간된 다카노 히데유키 작가의 모든 책을 구해서 읽은 적이 있다. <극락 타이 생활기>도 역시 그 시절에 읽었던 책이다. 거진 십년이 다 되어 가는 마당에 다시 한 번 읽게 되었다. 작가가 사회 초년병 시절인 26세 때, 치앙마이에 있는 대학으로 일본어 강사로 취직이 되어 인연을 맺게 된 타이라는 나라에 대한 개인적 보고서라고나 할까. 포스트 콜로니얼적인 시선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의 저력을 읽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사실 동남아는 일본의 경제적 무대가 되지 않았던가. 소니를 필두로 한 전자제품을 비롯해서 일제 자동차들이 동남아 시장을 석권한 것은 비밀도 아니다. 그런데 그 배경에는 누가 봐도 분명 괴짜인 다카노 히데유키 같은 작가들이 문화 선봉대로 나서 현지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일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희색시킨 결과가 아닐까. 물론 필리핀 같은 나라는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호되게 당해 여전히 반감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타이는 또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작가에 따르면 타이에서는 세 가지 터부가 존재한다고 한다. 하나는 푸미폰 국왕(재작년에 사망했다), 둘째는 불교 그리고 나머지는 타이를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군부다. 진짜 타이 사람들이 경영하는 타이 레스토랑에 가보면 푸미폰 국왕은 물론이고, 왕족이 한 번이라도 방문했다면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 자랑스럽게 전시한다. 일본 사람에게 혼네와 다테마에가 있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타이 사람들 역시 자신의 본심을 외지인에게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이주가 잦다 보니, 꾸준한 교우 관계를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휴대전화 보급률도 상당히 높아서 우리처럼 같은 번호를 십수년씩 유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대신 수시로 바꾸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연락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고 작가는 분석한다. 어쩌면 그런 점이 가벼운 인간관계의 본질 아닐까. 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뒤에서 하는 격렬한 험담도 한몫할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술버릇도 나쁘다고 하니 거 참. 일본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비로소 본심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타이에서는 반대로 본심을 드러낼 정도가 되어야 술을 같이 마시게 된다고 했던가. 역시 나라마다, 민족마다 개성이 다른 모양이다.

 

어쩌면 타이에 진출하려는 기업들이 꼭 알아 두어야 하는 괜찮은 정도도 상당하다. 동남아 각국에서는 경제를 주무르는 중국계 화교에 대해 일종의 제약을 두고 있는 현실인데, 타이에서는 그런 것이 일절 없다고 한다. 다만, 언어에 대해서만큼은 무조건 타이말을 고집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언어로 민족간 동질성을 확보한다고 가정한다면, 적어도 타이에서는 타이말을 할 줄 안다면 같은 사람들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이에서 토지를 구입하려면 외국인 신분으로는 토지 구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자유롭지만 또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타이는 왕국답게 철저하게 신분제가 고착화된 계급사회라는 점도 놀랍다. 인근 미얀마만 하더라도, 사회주의 독재 덕분에 그런 계급은 사라지지 않았던가. 이웃 말레이시아 역시 무슬림 국가이다 보니 그런 철저한 신분제를 유지할 수 없을 텐데 또 타이는 상대적인 모양이다.

 

타이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게이다. 일본처럼 천황을 필두로 한 국가주의가 성행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철저한 개인주의가 중심에 서 있다.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성 정체성이나 성적 기호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침략전쟁을 일으켜거나 다른 민족의 혹독한 식민지배를 받지 않은 탓이지 않을까. 아시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과 더불어 외국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라는 설명이 눈길을 끈다.

 

섹스산업 역시 관광대국 타이의 현주소를 드러내는 타이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돈을 벌어 가슴을 갖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게이에서부터 시작해서, ‘팟뽕쇼’라고 알려진 방콕의 환락가 이야기는 또 어떤가. 그런데 여전히 다카노 히데유키 작가가 전하는 모든 리포트의 본질은 바로 타이 사람들의 품성에 관한 이야기다. 무더운 열대의 기후 덕분인지, 서늘한 곳을 좋아하고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게으른 천성 그리고 모두가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부자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허세를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국민 대다수가 불교도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인 이중적 모습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타이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아닐까 싶다.

 

타이하면 역시 식도락 이슈가 빠질 수 없을 것 같다. 일본 잡지에서는 한때 타이의 특이한 음식들에 대한 기사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모양이다. 타이 동북부 이산 지방의 ‘올챙이 요리’를 먹어 보겠다고 먼 거리를 달려 갔지만, 이미 올챙이들은 다 자라 개구리가 되었고 대신 논바닥을 긁어 잡은 이상야릇한 식재료들에 작가와 작가의 지인 Y씨가 도전하는 장면은 <극락 타이 생활기>에서 최고로 손꼽고 싶다. 나라면 아무리 현지 음식에 도전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못할 듯 싶은데, 정말 눈 딱 감고 “빠직”하는 소리와 함께 개구리를 씹어 먹는 장면에선 정말 폭소가 터져나왔다. 날로 먹는 것이 아닌데, 시장통에서 어떤 벌레를 무턱대고 씹은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또 한편으로는 1세계에 사는 이들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체험에 대한 리포트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기도 했다. 우리라면 그런 풍습이 없겠지만, 단백질 섭취가 원활하지 않은 타이의 오지에선 벌레를 먹는 것이 일상일 수도 있지 않은가. 다름에 대한 주관적 평가가 과연 옳은 가에 대해선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엄청나게 큰 메콩강의 자이언트 메기를 먹어 보겠다고 불원천리를 마다하고 달려 가는 작가의 노고도 칭찬할 만하다. 하긴 요즘 우리네 인스타그램에도 먹부림 사진이 난무하는 걸 보면, 굳이 다카노 히데유키 작가만 탓할 것도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예전처럼 3미터나 되는 메기는 아니었지만, 적당한 사이즈의 녀석을 찾아 똠양꿍(토무야무쿤) 요리와 매운볶음 요리 맛을 봤다고 하는데, 결코 ‘혐오 식품’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진미도 아니었다는 보고다. 생선살보다는 육식성 메기의 특성상 육류에 가까운 맛이었다나. 기회가 된다면 나도 한 번 먹어 보고 싶은 생각이 잠시 들긴 했다.

 

그리고 보니 다카노 히데유키의 이 재기발랄한 타이 리포트는 20년 전 그야말로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다.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이 또한 농촌문화가 여전히 존재하던 시절의 타이 이야기일진대 지금은 또 타이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또 한편으론 이런 괴짜 작가들의 진짜 타이 리포트의 도움을 받아, 동남아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일본 국가의 저력을 엿볼 수 있기도 했다. 우리네 정서상 일본 출신 돌아이 작가의 책이 우리나라에선 인기가 없는 모양이다. 계속해서 절판 품절이 되어 가고 있는데, 새로운 책은 나올 조짐도 안보이고. 한 시절 팬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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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디파지토리에서 주문한 폴 비티 작가의 <셀아웃>이

드디어 도착했다.

 

맨부커 프라이즈에(사실 맨부커 수상작이 재미 없더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혹해서 그리고 5% 할인에 전세계

무료배송이라는 유혹에 못이겨 구매하긴 했지만 원서를

내가 과연 다 읽어낼 수 있을 진 모르겠다.

 

작년에 미쿡인 친구 브랜던에게 추천받은 탐 드루리의

소설도 읽느라 얼마나 악전고투를 했던가. 학습효과가

전혀 없는 모양이다.

 

 

같이 주문한 모신 하미드의 신간은 따로 오는 모양이다.

전세계 무료배송을 해도 남는 장사일 테니 대체 원가가

얼마나 하는 걸까.

 

폴 비티 씨는 미쿡인으로, 맨부커 상이 미국에게도 개방

되면서 첫 수상자의 영예를 안았다고 한다.

 

아마 곧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돼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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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 졸업을 앞둔 너에게
커트 보니것 지음, 김용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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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다, 한 때 커트 보니것의 팬이라고 자처하면서 책을 사 모았던 적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책을 안 읽을 거야 아마라고 생각하고 다 처분해 버렸으니. 더 이상 그의 책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오판했던 걸까? 이번에 <제5도살장>이 새단장을 하고 나오기 시작하면서 절판된 보니것 작가의 다른 책들도 계속해서 출간될 거라는 소식에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아니 그럼 다시 그의 책을 사서 모아야 한단 말인가? 웃기는 건 아직도 샀지만 읽지 않은 그의 책 <타임웨이크>와 <갈라파고스>가 책장에서 다소곳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마더 나이트>도 다시 읽어 보고 싶어졌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는 보니것의 대학졸업식 연설문과 다양한 연설들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그의 다른 소설들도 그렇지만 부담 없이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그의 연설을 추적하다 보니, 이 양반 삶의 굴곡이 참 많았구나 싶더라. 우선 2차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 대폭격의 와중에 살아 남았고, 전후에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예일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자그마치 7년 동안이나 수학했지만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원하는 교사직을 얻지 못했다고. 그리고 제네럴일렉트릭 같은 대기업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일찍 세상을 타계한 누이의 자식들을 맡아 기르기도 했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그가 체험한 모든 일들이 바로 그에게는 좋은 글쓰기 소재감이었고, 자못 딱딱해지기 쉬운 졸업식 연설장에서 유머의 원동력이 되었다. 마약 중독에 빠지기도 했던 아들 이야기도 등장하는 걸 보면 참으로 대단한 양반이 아닐 수 없다.

 

대학 과정이 하나의 통과의례로서 성인이 되는 마지막 관문이라고 한다면, 보니것의 주장대로 오랫동안 미뤄온 하나의 사춘기 의식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 싶다. 아울러 모든 미국인들이 사춘기 의식을 치러야 한단다. 그들에 앞서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 방식을 채택하려나. 언뜻 듣기에 엄청 무섭고 끔찍한 방식으로 어른이 되던데 말이다. 물론 보니것 특유의 냉소와 블랙 유머도 빠지지 않는다. 이미 신체적으로는 어른이 되었지만, 세상을 알려면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시간과 절대적 “비용”이 필요하다고 어른들이 규정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보면,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어른이 되는게 아닐까? 보니것 작가 자신은 전쟁을 통해 어른이 되지 않았던가. 요즘 그런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지만, 보니것의 시절에는 누구나 전쟁터에 나가 어른이 되고 싶어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으로 무장했다는 21세기 한국 청년들이 과연 세계무대에서 어떤 경쟁력을 가졌는지 말이다.

 

아, 그의 연설문 중에서 절실하게 공감한 것 중의 하나는 아이를 키우기에 지금의 핵가족 시스템이 너무 부실하다는 지적이었다. 예전에 대가족 제도에서 자란 나로서는 주변에 사촌 누이와 형들의 보살핌 속에 혹은 무관심과 다툼 속에 무탈하게 성장했던 것 같다. 지금 같으면 어림 없는 말이겠지만,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시절에 돈벌이 나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지금처럼 애정을 쏟을 시간과 재력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애정결핍 문제로 시달리진 않았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21세기 한국이 물리적 결핍의 시대는 아니지만, 정서적 결핍은 그 시절보다 증폭된 느낌이다. 한 여자에게 한 남자만으로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로 한 가족만으로 가족 제도를 이끌어 가려다 보니 결혼 제도가 박살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보니것 연사는 목청을 높인다. 내가 직접 결혼생활을 해보니 너무나 절실하게 느낀 점들이다. 그건 마치 결혼식 주례사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 되돌아 보면 구구절절히 옳은 말씀인 것이다. 졸업식 축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보니것이 커버하는 장르는 참으로 다양하다. 음악에서부터 시작해서, 비록 자신은 무신론자이자 휴머니스트라고 자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 등장하는 팔복을 비롯한 좋은 말씀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한다. 내가 타인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나도 그렇게 대접하라고 주문한다. 공화당 강령과 똑같지는 않다고 주의하라는 말도 빼먹지 않는 센스란. 오직 미치광이만이 반장 선거에 나가고 대통령이 되고 싶어한다는 말은 또 어떤가. 우회적으로 당대 대통령을 풍자하는 보니것의 실력은 발군하다. 우리가 빠져들 수 없는 탐닉에 대한 경고에서도, 코카인이나 LSD 마약이나 보다 훨씬 강력한 화석연료 중독을 으뜸으로 친다. 하긴 화석연료 중독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들이 현대 미국인들이 아니었던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아무레에게도 피해주지 않을 음악 중독이 나은 게 아닌가.

 

새해 다시 만난 보니것의 연설문과 에세이집을 읽으면서 즐거웠다. 이제 더 이상 지구별에 거주하지 않고, 어쩌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트랄팔마도어 행성으로 귀환했을 지도 모를 위대한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이 어서 쏟아져 나오길 희망한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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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필립 지앙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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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틀만에 다 읽은 필립 지앙의 <파문>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을 연상시킬 수 밖에 없었다. 필립 로스 소설에 등장하는 데이비드 케페시 교수는 <파문>의 주인공 마르크와 판박이다. 프랑스 모처의 고향 마을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53살난 마르크는 특별한 매력도 없이 문학을 다루면서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들과 거리낌 없이 섹스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문제는 자신의 학생인 바르바라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죽어 있더라는 사실에서 소설은 출발한다.

 

자 우리의 지성인 교수님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경찰에게 신고할 것인가? 아니다. 마르크는 죽은 바르바라를 끌고 자신이 예전에 발견한 구덩이로 밀어 넣는다. 교수라는 박봉에 다 낡은 피아트를 끌면서, 같은 대학 행정처에 근무하는 누이 마리안과 사는 마르크. 어째 불편해 보이는 삶의 편력이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은가? 정확한 판단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모진 학대와 매질, 감금을 당한 두 오누이는 가족을 넘어 야릇한 관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실종된 바르바라를 찾아 경찰이 나서지만, 대학교수 출신 마르크가 사체유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경찰의 접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바르바라의 계모라는 미리암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잔잔한 호수에 인 파문이 소용돌이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자신보다 훨씬 여학생들과 관계를 맺어온 마르크에게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미리암은 색다른 도전이었던 모양이다. 어린 여학생들이 줄 수 없는 무언가를 미리암이 자신에게 준다는 확신에 빠진 마르크는 비록 계모지만 제자의 어머니와 부적절한 관계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든다. 물론 대학 사회에서 제자들과 성관계 그리고 학부모와의 관계를 엄금하고 있지만 유년시절의 상상을 초월하는 삶의 도전과 위기를 체험한 마르크에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모양이다. 말초적 여흥거리 정도로 생각했던 일탈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다는 정말 몰랐단 말인가? 이런 위험을 감수한 스릴이야말로 일별 파렴치해 보이는 교수님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라고 마르크는 생각한 게 아니었을까.

 

동시에 마르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뛰어난 후광과 명성을 얻게 될 그런 작가가 되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은 모양이다. 그나마 죽은 바르바라가 재능이 있었지만 이미 죽은 상태였고, 새롭게 자신에게 접근해온 지역 유지의 딸 아니 에그바움의 육탄공세는 피곤할 따름이다. 자신의 마음속을 온통 미리암이 뒤흔들고 있는데 치기 어린 불장난을 상대할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마르크의 실존적 위기는 다른 곳엣 찾아온다. 문학강의가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대학에서 그의 정리해고를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는 누이 마리안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 중인 학과장 리샤르 올소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제되기에 이른다. 시류에 편승해서 학과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리샤르 올소를 맹목적으로 경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런 그와 만나는 누이 마리안에 대한 애증을 필립 지앙은 그대로 잡아내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 마르크가 집요하게 집착하는 흡연은 말미에 등장하게 될 비극적 결말에 대한 암시였을까? 흡연이 더 이상 쿨한 행동이 아닌 세상에서 번갯불을 맞은 것 같은 허리통증에 시달리는 중년 남자에게 담배는 유일한 구원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이 산책하기 좋아하는 숲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자 피난처였다. 아프간에 파병한 미리암 남편의 부재를 틈타 그녀의 애인이 된 마르크는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처럼 그녀의 매력이 빠질수록 헤어나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과연 몰랐을까? 사체유기에 이어 자신을 도우려던 경찰이 죽은(그가 직접 경찰을 죽였던가?) 뒤에 그 역시 바르바라의 경우처럼 처리한다. 욕실에서 피범벅이 된 그를 목격한 마리안의 반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싶다.

 

 

될대로 되라는 방식의 삶을 사는 그에게 거절당한 아니 에그바움의 물리적 복수는 위협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저러다 큰 일나지 하는 걱정을 뒤로 하고, 우리의 주인공 마르크는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한다. 죽은 바르바라의 관계가 끝에서부터 시작했다면, 아니 에그바움과의 관계는 그동안 마르크가 어떤 방식으로 학생들을 유혹하고 관계를 유지해 왔는지 자세히 설명해준다. 금융 사기꾼처럼 생긴 그의 아버지가 어깨들을 동원해서 무력시위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에게 미리암의 정체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오누이간의 비밀이 밝혀지고, 파국이 이어진다.

 

소설 <파문>의 몰입도는 정말 대단했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 마르크가 바르바라나 경찰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 명확하진 않지만, 쥐꼬리만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명백한 범죄(사체유기)를 저지르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유년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다고 하지만 5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한다는 점이 사실 좀 이해가 가진 않았다. 범죄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고, 추후에 벌어질 또다른 범죄의 전주곡처럼 다가왔다.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들과의 섹스도 범죄는 아니지만, 대학사회에서 용인받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쾌락을 탐닉하는 장면도 불편했다. 어쩌면 더 이상 도덕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타락한 시대의 초상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이 계량화되어 평가받고 금전적 가치로 치환되는 시절에 한 지식인의 일탈로 간주하기엔 마르크는 너무 많이 나간 게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는 결말에서 그런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파문>은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향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지극히 탐미적인 소설이다. 다양한 층위의 사연들이 중첩되면서 이야기를 섬광 같은 파국으로 인도한다. 마치 숲 속에서 니코틴이 절실하게 필요한 마르크가 정신을 잃은 채 맞이한 몽롱한 감정의 전이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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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3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비흡연자라서 흡연자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잘 알지 못합니다. 제 생각인데 불안한 감정에 휩싸이면 그걸 어떻게든 잊으려고 담배를 찾는 것 같습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불안하고 힘들 때마다 술을 찾는 심리와 비슷한 거죠.

레삭매냐 2017-03-30 13:38   좋아요 0 | URL
저도 비흡연자라 흡연하는 심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싸이러스님 말처럼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술은 그나마 제약이 있지만 흡연에 대해서는
그나마 관대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