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디파지토리에서 주문한 폴 비티 작가의 <셀아웃>이

드디어 도착했다.

 

맨부커 프라이즈에(사실 맨부커 수상작이 재미 없더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혹해서 그리고 5% 할인에 전세계

무료배송이라는 유혹에 못이겨 구매하긴 했지만 원서를

내가 과연 다 읽어낼 수 있을 진 모르겠다.

 

작년에 미쿡인 친구 브랜던에게 추천받은 탐 드루리의

소설도 읽느라 얼마나 악전고투를 했던가. 학습효과가

전혀 없는 모양이다.

 

 

같이 주문한 모신 하미드의 신간은 따로 오는 모양이다.

전세계 무료배송을 해도 남는 장사일 테니 대체 원가가

얼마나 하는 걸까.

 

폴 비티 씨는 미쿡인으로, 맨부커 상이 미국에게도 개방

되면서 첫 수상자의 영예를 안았다고 한다.

 

아마 곧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돼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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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 졸업을 앞둔 너에게
커트 보니것 지음, 김용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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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다, 한 때 커트 보니것의 팬이라고 자처하면서 책을 사 모았던 적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책을 안 읽을 거야 아마라고 생각하고 다 처분해 버렸으니. 더 이상 그의 책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오판했던 걸까? 이번에 <제5도살장>이 새단장을 하고 나오기 시작하면서 절판된 보니것 작가의 다른 책들도 계속해서 출간될 거라는 소식에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아니 그럼 다시 그의 책을 사서 모아야 한단 말인가? 웃기는 건 아직도 샀지만 읽지 않은 그의 책 <타임웨이크>와 <갈라파고스>가 책장에서 다소곳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마더 나이트>도 다시 읽어 보고 싶어졌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는 보니것의 대학졸업식 연설문과 다양한 연설들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그의 다른 소설들도 그렇지만 부담 없이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그의 연설을 추적하다 보니, 이 양반 삶의 굴곡이 참 많았구나 싶더라. 우선 2차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 대폭격의 와중에 살아 남았고, 전후에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예일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자그마치 7년 동안이나 수학했지만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원하는 교사직을 얻지 못했다고. 그리고 제네럴일렉트릭 같은 대기업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일찍 세상을 타계한 누이의 자식들을 맡아 기르기도 했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그가 체험한 모든 일들이 바로 그에게는 좋은 글쓰기 소재감이었고, 자못 딱딱해지기 쉬운 졸업식 연설장에서 유머의 원동력이 되었다. 마약 중독에 빠지기도 했던 아들 이야기도 등장하는 걸 보면 참으로 대단한 양반이 아닐 수 없다.

 

대학 과정이 하나의 통과의례로서 성인이 되는 마지막 관문이라고 한다면, 보니것의 주장대로 오랫동안 미뤄온 하나의 사춘기 의식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 싶다. 아울러 모든 미국인들이 사춘기 의식을 치러야 한단다. 그들에 앞서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 방식을 채택하려나. 언뜻 듣기에 엄청 무섭고 끔찍한 방식으로 어른이 되던데 말이다. 물론 보니것 특유의 냉소와 블랙 유머도 빠지지 않는다. 이미 신체적으로는 어른이 되었지만, 세상을 알려면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시간과 절대적 “비용”이 필요하다고 어른들이 규정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보면,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어른이 되는게 아닐까? 보니것 작가 자신은 전쟁을 통해 어른이 되지 않았던가. 요즘 그런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지만, 보니것의 시절에는 누구나 전쟁터에 나가 어른이 되고 싶어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으로 무장했다는 21세기 한국 청년들이 과연 세계무대에서 어떤 경쟁력을 가졌는지 말이다.

 

아, 그의 연설문 중에서 절실하게 공감한 것 중의 하나는 아이를 키우기에 지금의 핵가족 시스템이 너무 부실하다는 지적이었다. 예전에 대가족 제도에서 자란 나로서는 주변에 사촌 누이와 형들의 보살핌 속에 혹은 무관심과 다툼 속에 무탈하게 성장했던 것 같다. 지금 같으면 어림 없는 말이겠지만,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시절에 돈벌이 나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지금처럼 애정을 쏟을 시간과 재력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애정결핍 문제로 시달리진 않았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21세기 한국이 물리적 결핍의 시대는 아니지만, 정서적 결핍은 그 시절보다 증폭된 느낌이다. 한 여자에게 한 남자만으로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로 한 가족만으로 가족 제도를 이끌어 가려다 보니 결혼 제도가 박살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보니것 연사는 목청을 높인다. 내가 직접 결혼생활을 해보니 너무나 절실하게 느낀 점들이다. 그건 마치 결혼식 주례사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 되돌아 보면 구구절절히 옳은 말씀인 것이다. 졸업식 축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보니것이 커버하는 장르는 참으로 다양하다. 음악에서부터 시작해서, 비록 자신은 무신론자이자 휴머니스트라고 자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 등장하는 팔복을 비롯한 좋은 말씀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한다. 내가 타인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나도 그렇게 대접하라고 주문한다. 공화당 강령과 똑같지는 않다고 주의하라는 말도 빼먹지 않는 센스란. 오직 미치광이만이 반장 선거에 나가고 대통령이 되고 싶어한다는 말은 또 어떤가. 우회적으로 당대 대통령을 풍자하는 보니것의 실력은 발군하다. 우리가 빠져들 수 없는 탐닉에 대한 경고에서도, 코카인이나 LSD 마약이나 보다 훨씬 강력한 화석연료 중독을 으뜸으로 친다. 하긴 화석연료 중독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들이 현대 미국인들이 아니었던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아무레에게도 피해주지 않을 음악 중독이 나은 게 아닌가.

 

새해 다시 만난 보니것의 연설문과 에세이집을 읽으면서 즐거웠다. 이제 더 이상 지구별에 거주하지 않고, 어쩌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트랄팔마도어 행성으로 귀환했을 지도 모를 위대한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이 어서 쏟아져 나오길 희망한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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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필립 지앙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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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틀만에 다 읽은 필립 지앙의 <파문>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을 연상시킬 수 밖에 없었다. 필립 로스 소설에 등장하는 데이비드 케페시 교수는 <파문>의 주인공 마르크와 판박이다. 프랑스 모처의 고향 마을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53살난 마르크는 특별한 매력도 없이 문학을 다루면서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들과 거리낌 없이 섹스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문제는 자신의 학생인 바르바라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죽어 있더라는 사실에서 소설은 출발한다.

 

자 우리의 지성인 교수님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경찰에게 신고할 것인가? 아니다. 마르크는 죽은 바르바라를 끌고 자신이 예전에 발견한 구덩이로 밀어 넣는다. 교수라는 박봉에 다 낡은 피아트를 끌면서, 같은 대학 행정처에 근무하는 누이 마리안과 사는 마르크. 어째 불편해 보이는 삶의 편력이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은가? 정확한 판단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모진 학대와 매질, 감금을 당한 두 오누이는 가족을 넘어 야릇한 관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실종된 바르바라를 찾아 경찰이 나서지만, 대학교수 출신 마르크가 사체유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경찰의 접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바르바라의 계모라는 미리암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잔잔한 호수에 인 파문이 소용돌이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자신보다 훨씬 여학생들과 관계를 맺어온 마르크에게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미리암은 색다른 도전이었던 모양이다. 어린 여학생들이 줄 수 없는 무언가를 미리암이 자신에게 준다는 확신에 빠진 마르크는 비록 계모지만 제자의 어머니와 부적절한 관계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든다. 물론 대학 사회에서 제자들과 성관계 그리고 학부모와의 관계를 엄금하고 있지만 유년시절의 상상을 초월하는 삶의 도전과 위기를 체험한 마르크에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모양이다. 말초적 여흥거리 정도로 생각했던 일탈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다는 정말 몰랐단 말인가? 이런 위험을 감수한 스릴이야말로 일별 파렴치해 보이는 교수님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라고 마르크는 생각한 게 아니었을까.

 

동시에 마르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뛰어난 후광과 명성을 얻게 될 그런 작가가 되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은 모양이다. 그나마 죽은 바르바라가 재능이 있었지만 이미 죽은 상태였고, 새롭게 자신에게 접근해온 지역 유지의 딸 아니 에그바움의 육탄공세는 피곤할 따름이다. 자신의 마음속을 온통 미리암이 뒤흔들고 있는데 치기 어린 불장난을 상대할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마르크의 실존적 위기는 다른 곳엣 찾아온다. 문학강의가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대학에서 그의 정리해고를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는 누이 마리안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 중인 학과장 리샤르 올소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제되기에 이른다. 시류에 편승해서 학과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리샤르 올소를 맹목적으로 경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런 그와 만나는 누이 마리안에 대한 애증을 필립 지앙은 그대로 잡아내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 마르크가 집요하게 집착하는 흡연은 말미에 등장하게 될 비극적 결말에 대한 암시였을까? 흡연이 더 이상 쿨한 행동이 아닌 세상에서 번갯불을 맞은 것 같은 허리통증에 시달리는 중년 남자에게 담배는 유일한 구원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이 산책하기 좋아하는 숲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자 피난처였다. 아프간에 파병한 미리암 남편의 부재를 틈타 그녀의 애인이 된 마르크는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처럼 그녀의 매력이 빠질수록 헤어나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과연 몰랐을까? 사체유기에 이어 자신을 도우려던 경찰이 죽은(그가 직접 경찰을 죽였던가?) 뒤에 그 역시 바르바라의 경우처럼 처리한다. 욕실에서 피범벅이 된 그를 목격한 마리안의 반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싶다.

 

 

될대로 되라는 방식의 삶을 사는 그에게 거절당한 아니 에그바움의 물리적 복수는 위협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저러다 큰 일나지 하는 걱정을 뒤로 하고, 우리의 주인공 마르크는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한다. 죽은 바르바라의 관계가 끝에서부터 시작했다면, 아니 에그바움과의 관계는 그동안 마르크가 어떤 방식으로 학생들을 유혹하고 관계를 유지해 왔는지 자세히 설명해준다. 금융 사기꾼처럼 생긴 그의 아버지가 어깨들을 동원해서 무력시위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에게 미리암의 정체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오누이간의 비밀이 밝혀지고, 파국이 이어진다.

 

소설 <파문>의 몰입도는 정말 대단했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 마르크가 바르바라나 경찰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 명확하진 않지만, 쥐꼬리만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명백한 범죄(사체유기)를 저지르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유년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다고 하지만 5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한다는 점이 사실 좀 이해가 가진 않았다. 범죄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고, 추후에 벌어질 또다른 범죄의 전주곡처럼 다가왔다.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들과의 섹스도 범죄는 아니지만, 대학사회에서 용인받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쾌락을 탐닉하는 장면도 불편했다. 어쩌면 더 이상 도덕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타락한 시대의 초상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이 계량화되어 평가받고 금전적 가치로 치환되는 시절에 한 지식인의 일탈로 간주하기엔 마르크는 너무 많이 나간 게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는 결말에서 그런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파문>은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향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지극히 탐미적인 소설이다. 다양한 층위의 사연들이 중첩되면서 이야기를 섬광 같은 파국으로 인도한다. 마치 숲 속에서 니코틴이 절실하게 필요한 마르크가 정신을 잃은 채 맞이한 몽롱한 감정의 전이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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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3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비흡연자라서 흡연자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잘 알지 못합니다. 제 생각인데 불안한 감정에 휩싸이면 그걸 어떻게든 잊으려고 담배를 찾는 것 같습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불안하고 힘들 때마다 술을 찾는 심리와 비슷한 거죠.

레삭매냐 2017-03-30 13:38   좋아요 0 | URL
저도 비흡연자라 흡연하는 심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싸이러스님 말처럼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술은 그나마 제약이 있지만 흡연에 대해서는
그나마 관대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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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시 나의 루이스 세풀베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칠레 출신으로 환경문제, 정치적 이슈 그리고 마푸체 인디오들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아낌 없이 시전하고 있는 동시대 작가의 새로운 동화책을 만나볼 수가 있었다. 이번 동화를 닮은 소설의 주인공은 마푸체 인디오 말로 충직을 의미하는 아프마우다.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고나 할까. 채 100쪽이 되지 않는 동화는 정말 심오하면서도 현재를 사는 우리가 생각해 볼 주제들로 가득했다.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는 우선 인디오 사냥에 나선 윙카(외지인들)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선봉장에는 추적을 위해 우리의 진짜 주인공 아프마우가 서 있다. 이제 시간의 흐름 속에 늙어가는 아프마우는 정글과 드넓은 강을 넘나드는 고된 추적 가운데, 자신의 삶을 반추해본다. 강아지 시절, 자신을 실어 나르던 말에서 떨어져 얼어 죽을 위기에 처해지지만 재규어 나웰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과정은 정말 동화적 상상의 극치를 달린다. 재규어 나웰은 어린 강아지 아프마우를 마푸체 인디오들의 삶의 터전인 왈마푸로 데려다 준다. 거기서 어린 아우카만과 걱정 없이 살던 아프마우에게 윙카들이 들이 닥치면서 그네들의 삶은 풍지박산이 난다.

 

그것은 마치 500년 전, 스페인 정복자들의 침략처럼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졌다. 총칼을 앞세운 폭력 앞에 아우카만의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마을 사람들은 윙카들을 피해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주인고 아프마우 역시 윙카들에게 사로잡혀 고단한 삶을 시작한다. 이 무람없는 윙카들은 대지의 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응구네마푸에 대한 존경심 따위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방인들이다. 응구네마푸를 믿는 이들이라면, 모든 삶이 순환이라는 개념에서 자신이 생존을 위해 먹는 것도 모두 대지의 거대한 순환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인데, 이 무법자들에게 대지는 그저 약탈의 대상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아마 이 심오한 주제에서는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생활의 편리라는 점 때문에 미래의 심각한 환경오염과 재앙을 유발할 수도 있는 난개발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훗날 이러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른 채 말이다. 지금 당장 우리네 삶을 심각한 수준으로 위협하고 있는 황사나 미세먼지를 연상해 보면 무슨 말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푸체 인디오들을 내쫓아 버리면서도 윙카들은 독일산 셰퍼드(아프마우)가 인디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자신들이 거둬간다. 어쩌면 이런 설정도 계급착취의 일환으로 순치되어 동화 속에 등장한 게 아닐까. 마푸체 인디오들의 삶의 터전은 토지는 물론이고, 그들이 보유한 보잘 것 없는 재산조차 약탈의 대상으로 간주한 윙카들에 대한 고발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 윙카들의 사고가 생성과 소멸이 응구네마푸, 다시 말해 대지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마푸체 사람들의 믿음과 상충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동화 속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윙카들과 아프마우가 쫓는 대상을 처음에는 그저 부상당한 인디오라고만 설정해서 작가의 무슨 꿍꿍이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의 인디오는 아프마우와 오랫동안 헤어졌던 옛 친구(페니) 아우카만이었다. 마푸체 사람들의 땅을 노리는 윙카들에게 글을 깨우치고, 마푸체 사람들을 조직해서 대항하려는 아우카만이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윙카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에게 두려운 것은(동화 속에서 아프마우는 수시로 두려움의 냄새를 인지한다) 바로 그런 자각과 연대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그러니 그의 할아버지를 총으로 죽였던 것처럼 윙카들은 또다른 폭력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의 충직한 아프마우의 태업이 작가가 동화 후분에 배치한 놀라운 만남과 슬픈 결말을 예비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지식인의 시점을 개에 투영해서 동화 스타일로 풀어낸 작가의 시도에 경의를 표한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우리에게는 정말 생소한 마푸체 언어로 독자를 그네들의 세상으로 인도한다. 나와는 다름이 어느덧 불편함을 그리고 나쁘다는 선동이 난무하는 시절에, 세풀베다처럼 그런 불편함을 견디며 사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고 쓸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고 독서야말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그런 간접체험을 할 수 있는 최고의 효용을 담은 선물이라는 작은 생각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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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크
존 버거 지음, 셀축 데미렐 그림,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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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중고서점에 존 버저의 책이 있다는 걸 알고선 그야말로 한 걸음에 달려가 책을 사왔다. 제목은 <스모크>. 무슨 내용의 책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도, 오로지 존 버저의 책이라는 사실 때문에 샀다. 그리고 읽었다. 그전에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려고 했으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사서 읽는 수밖에 없었다.

 

책을 정말 얇았다. 그리고 그림이 많았다. 제목처럼 스모크, 담배 연기 그러니까 흡연에 관한 아주 짤막한 글이었다. 한참 금연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던 무렵, 유럽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그야말로 아무데서고 담배를 피워 대는 거였다. 작가에 의하면 기차는 물론이고 심지어 비행기에서도 담배를 피웠단다. 놀랍군.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예전에 교무실에서 남자 선생님들이 피워 대는 담배연기로 자욱할 지경이었단다.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나는 흡연가가 아니라 그네들의 심정을 잘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흡연자들을 악마로 만드는 전투적인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그들은 코너에 몰린 소수자가 되었다. 자신만의 건강을 해치는 게 아니라 타인의 건강까지 해치는 이들로 지탄받게 된 것이다. 아, 그리고 보니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담뱃세를 거의 두 배 가까이 올려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사용한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저 가난한 보통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부족한 세수확보를 위해 정책이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어쩌면 흡연자들은 조국의 재정을 위해 오늘도 비흡연자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 가며 구석지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존 버저 작가에 의하면 예전에 사람들은 인심 좋게 나눠 담배를 나눠 피우며 서로의 견해를 나누며, 여행에 대해 그리고 계급투쟁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니 모르는 이들하고 술 마시는 경우는 드물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흡연하는 소수자들의 끈끈한 그런 유대가 있었던 게 아닐까.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 배기가스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로 지구가 뜨끈뜨끈해졌지만 그런 거대한 차원의 담론보다 당장 내 호흡을 불쾌하게 주변의 흡연자들을 악마로 만들었다는 거다. 한 때 재떨이는 호의의 상징이었지만, 이제 흡연은 공공의 적이자 사회악이 되었다.

 

어쩌면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하나의 멋진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서 흡연자들은 악마가 되었고, 흡연은 사회악이 되었는가에 대한 하나의 고찰 대충 뭐 이런 제목으로 말이다.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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