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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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존 버저 작가가 돌아가셨다고는 소식을 듣고 나서 부지런히 그가 남긴 책들을 처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무려 9년 전에 받은 책도 있었다. <제 7의 인간>, 진작에 다 읽었는데 미처 리뷰를 작성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한 번 더 읽어야지 싶다. 1월에 읽기 시작한 존 버저의 소설 <A가 X에게>을 오늘에서야 다 읽었다. 그동안 43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의 서간소설을 왜 빨리 읽지 못했던 걸까.


한편으로는 국내에 출간된 그의 책들을 모조리 다 읽어 버리면 아쉽지 않나 하는 노파심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럴 걱정은 없을 것 같다.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그의 책들이 연달아 출간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걸 걱정도 팔자라고 한다나.


언제나 그렇지만 서설이 길었다. 소설 <A가 X에게>는 테러 조직 구성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 받아 감옥에 살고 있는 남자 사비에르와 그의 정신적 동지이자 연인인 아이다가 서로 교환한 세 뭉치의 편지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다. 감옥 밖 세상에서 약제사로 일하는 아이다가 보내는 편지가 주고, 사비에르는 답장 대신 투기 금융 자본이 지배하는 바깥세상에 대한 간략한 메모 정도로 대신하고 있다.


분명 감정의 교류는 쌍방향일 것이다. 밖에서 약제사로 일하는 아이다가 약국에서 알약을 분류하고 처방전을 조제하며, 콩을 까고, 저혈당 혹은 그 반대로 쇼크가 온 당뇨병 환자를 긴급구조로 살려 내고, 난민들을 돕고, 5천만달러 짜리 아파치와 탱크로 그녀의 동지들을 잡아 가려는 무력시위를 연대의 힘으로 막아내는 동안 사비에르는 옥중에서 가지 않는 시간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흔치 않은 서간소설 양식에서 아이다가 보내지 않은 편지를 통해 연인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마저 드러내는 반면, 사비에르의 관심은 오로지 정치적 투쟁에만 쏠려 있다는 느낌이다. 존 버저 작가는 이런 감정의 간극을 의도하며 글을 쓴 것일까? 그 점이 문득 궁금해졌다.


아이다가 옥중의 남자와 결혼을 시도했으나 아마 당국의 허락을 받지 못했던가. 두 달간에 걸쳐 책을 읽다 보니 내용마저 헷갈린다. 이것도 책읽기에 얽힌 오독의 즐거움이 아닐까. 저자가 저술한 내용과는 달리, 저자의 손에서 떠난 책은 오롯하게 오독마저 즐기는 엉터리 독자의 몫일 테니 말이다. 어쨌든 두 남녀의 편지를 통한 사랑 이야기 속에도 녹록하지 않은 우리네 현실은 전진을 계속한다. 전 세계 총 자본의 3% 정도가 생산에 재투자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그렇다면 그 많은 자본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이다와 사비에르 그리고 그들의 동지들이 저항하는 자본이 행사하는 폭력은 상상 이상이다. 일체의 저항을 허용하지 않고 중무장한 아파치와 탱크를 동원하는 ‘그들’을 상상해 보라.


존 버저 작가는 현명하게도 사비에르와 아이다가 사는 곳을 특정하지 않는다. 그곳은 스페인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터키일 수도 있다. 또 어쩌면 한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다양성을 부인하고 획일적인 질서를 구축해서 자본을 무한 증식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영속적인 지배를 위한 대전략이기 때문일까.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읽었던 이런 세상을 사는 것이 고통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렇게 세계화에 저항하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전달한 21세기 현자가 남긴 편지들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오늘까지 올해 들어 모두 6권의 존 버저 작가의 책을 읽었다. 나의 존 버저 책사냥은 계속 될 것이고, 다른 미술평론와 에세이에도 도전해 볼 생각이다.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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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22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작 읽기에 도전 중인 레샥매냐님,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스티븐 제이 굴드 읽기를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굴드, 이 사람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동안이나 오래 갈지 모르겠습니다. ^^;;

레삭매냐 2017-03-22 13:24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현암사에서 나온 굴드 씨의 책을
하나 샀는데 읽지는 않았네요.

야구 선수의 타율에 관한 부분만 읽고서 말이죠 :>

존 버저 작가의 책은 쉬엄 쉬엄 도전해 보렵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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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저의 작가 책은 그전부터 컬렉션해 왔지만, 정작 읽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초 작가가 작고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사후 그의 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출간하고 있는 열화당에서 두 권이 책이 또 나왔다. 한 권은 사진집인데 가격이 비싸서 사지 못하고 대신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에세이 모음집인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를 사서 어젯밤에 읽었다. 모두 11편의 에세이들이 담겨 있는데, 어떤 내용은 잘 몰라서 와 닿지 않는 내용도 있었고(특히 그림 부분에 대해), 또 시장을 장악한 독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는 격하게 공감할 수가 있었다. 본인은 부인했을 지 몰라도 내 눈에 그는 명백한 마르크스주의자다.

 

첫 번째 에세이가 모국어로 시작했던가. 해외에서 살아 보면 아마 모국어 말하기의 편리성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존 버저 역시 프랑스로 자발적 망명해서 살아온 이방인이니 이방인의 설움을 잘 알지 않을까하는 그런 엉뚱한 상상이 들었다. 외국인 이민자와 노동자에 대한 그의 일관된 시선과 주장을 고려해 볼 때, 아마 나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을 것 같다. 모국어에 대한 그의 단상은 에세이집의 후반부에 나오는 아랍 여성의 노래와도 일맥상통한다. 점점 더 실황연주를 듣기 어려운 자가복제의 시대에, 굳이 언어를 몰라도 눈 앞에 선 인간이 선율에 따라 부르는 노래에 대한 이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서 좀 더 확장해 본다면 휴머니스트로서 인간에 대한 사랑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에세이집에서 좌충우돌하게 되는 나의 사유는 미디어 시스템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비판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로벌리즘이라는 미명 아래, 전 세계를 석권한 투기 금융 자본의 폐해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자비한 자본의 폭력 아래, 세계적으로 3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자리와 안정적인 거주지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지적 앞에 놀랄 따름이다. 지금도 중동 지방에서 창궐하는 IS의 핍박을 이기지 못해 위험천만한 지중해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향하는 수많은 난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왜 미디어는 그런 문제들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고, 쓰레기 정보들만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자본에 종속된 미디어 현실에 대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중세 시절에는 엄격하고 무자비한 검열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중이 정보를 얻는 과정을 차단했다면, 현대에는 정보의 양으로 질을 통제하고 있다. 최근에 벌어진 탄핵정국에서 검증되지 않은 가짜뉴스들이 범람하고 재인용되는 현상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미술평론가로서 존 버저 저자는 수십년 전 대규모 푸생전에서 만난 무명의 스웨덴 미술가 스벤 블롬베리를 회고하는 글도 에세이집에 담았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피카소처럼 생전에 명성과 그에 따른 후광으로 힘입은 금권까지 누린 미술가가 몇이나 될까. 작고한 스벤 블롬베리를 추억하며,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즐거웠던 시간들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는 우리가 과연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해주는 그런 시간이 갖게 만들어 주었다.

 

폴란드 자모시치 출신으로(저자가 유럽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나라가 폴란드라고 했던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다가 우파 백색 테러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추모의 글을 한 번 살펴 보자. 인간다움 삶을 주장하던 혁명가의 삶이야말로 존 버저가 평생 동안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 한 축에 자본가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시무시한 혁명가가 존재했다면, 다른 한 편에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영화계에서 추방당한 광대 찰리 채플린이 있었다. 전자가 대중의 각성을 요구하며 변화를 강조했다면, 후자는 삶이라는 잔인한 질곡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대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자본 축적과 이윤 추구가 삶의 절대명제가 된 시절에, 서로 역설적이지만 우리네 삶의 페이소스(pathos)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소재들을 정밀타격한 작가의 글들은 정말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배어 나오는 곱창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건대 전문적으로 미술 공부를 하지 않은 미술문외한으로 저자가 에세이집의 곳곳에 새겨 넣은 회화에 대한 글들에는 공감을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권의 책을 다 읽어 내는데 급급했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존 버저의 에세이들이 주는 힘은 기대 이상이었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이런 글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다 읽고 나서도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글 말이다. 80년 필력의 힘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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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 괴물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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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주 오래 전에 임철우 작가의 <등대>를 읽었다. 절친이 선물해 준 책이었는데 이젠 어떤 내용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 신작 소설집 <연대기, 괴물>를 읽으면서 그 친구와 아우라지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보니 <연대기, 괴물>에도 뗏사공의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우리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날, 아우라지에 있었는데. 비교적 최근작인 <이별하는 골짜기>는 사서 읽지도 않은 채 책장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황천기담>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새벽에 이 책을 다 읽었는데, 예전에 기억하는 임철우 작가 특유의 글맛은 여전했다. 이러니 그의 글을 읽지 않고 배길 재간이 있나 그래. <등대>부터 다시 구해서 읽어야겠다.

 

소설집을 여는 첫 번째 이야기 <흔적>에서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이제 죽음을 준비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젊어서는 미처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질풍노도 같은 시절을 겪고, 인생의 중반전을 지나다 보면 중세인들처럼 ‘메멘토 모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죽은 아내의 망령이 찾아오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제 당신도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싸인으로 받아 들여야할까? 이미 죽음의 문턱에 두 번씩이나 다녀왔으니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사후 자신을 거두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추한 잔재를 남기느니 한줌 남은 마지막 존엄을 지키겠다는 화자의 결심이 이해가 간다.

 

표제작 <연대기, 괴물>는 아예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식민지배와 해방, 연이은 좌우대립에 민족상잔의 전쟁 그리고 용병으로 참전한 베트남전쟁까지 아우르는 한국 현대사를 오롯하게 담아낸다. 현실에서는 예의 주인공 송달규 씨가 노숙인으로 살다가 평생 자신을 쫓아온 괴물과 마지막 전투를 벌이는 장면에까지. 어쩌면 그는 태어나선 안될 그런 존재였던가. 자신의 아버지가 어쩌면 생부가 되었을 지도 모를 어머니의 남편을 죽인 몽둥이패의 우두머리였다는 사실을 송달규 씨는 받아 들일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베트남전쟁 참전용사인 그는 용병으로 참전한 불의로 점철된 전쟁에서 민간인 학살에 나서기도 했고, 그 후에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된 처지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이야기에 저자는 세월호 사건까지 겹쳐서 이야기의 전개를 그야말로 나락으로 추락시킨다. 마치 자신의 창조주를 파멸시키려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장면은 정말 섬뜩했다.

 

남도 출신 옹기장이 허만석 씨의 이야기도 구슬프기 짝이 없다. 아무런 연고 없이 쪽방생활을 하는 이들의 사연은 왜 그리도 깊은지, 이제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아우라지 뗏사공 출신 송필구 할아버지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실타래는 중후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전자가 전지적 시점에서 전개가 된다면, 후자는 방송 PD로 보이는 C라는 인물을 작가의 페르소나로 내세워 자신이 정선과 영월 일대를 돌며 수집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아 그리고 보니 <이야기 집>(단추눈아짐)의 이야기도 맥을 잇는다. 탐 드루리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같은 미국 출신 작가들이 풀어내는 미국 특유의 시골 마을 이야기들처럼, 뗏사공이나 새점을 치는 이가 등장하고 남도를 돌며 옹기를 파는 옹기장이의 한이 서린 이야기들이 과연 글로벌 시대를 맞아 세계인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고샅이나 단골(무당) 혹은 들병이 같은 우리도 사전을 찾아야 간신히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는 토속어들의 향연을 그네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가장 한국적인 세계적이라는 말은 적어도 우리말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같이 도심에 사는 이들이 과연 저자가 우리 산하를 떠돌며 채취한 시골 정경의 그 맛과 정취를 과연 제대로 짚어낼 수 있을지 나는 의심이 든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풍광을 소화해낼 소비자의 문제인 것이다.

 

작가는 소설 속의 주인공 혹은 화자들이 세상과 맺은 관계라는, 삶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간이역>에서는 췌장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아내와의 마지막 여행에서 자신의 불운에만 한탄할 뿐 자신이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인 남편의 초상을 다룬다.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군상을 저격한다. <물 위의 생>에서는 새와 대화하던 죽은 한수희의 뗏사공 인연을 찾아 나선 C의 ‘황량하고 헐벗은 시간과 기억’에 파문을 던진다. 우리는 언제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던가. 깊이 없이 형성된 피상적인 관계는 필연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고, 관계의 주체들은 그 속에서 부유할 따름이다. 그 가운데 우리는 보다 인간다워 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최근 다양한 성취를 선보이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글과는 달리 원숙미가 돋보인다는 점도 소설집 <연대기, 괴물>이 가진 경쟁력이라는 생각한다. 어쩌면 저자가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직접 체험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서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의 매 소설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죽음과 기억을 매개로 한 핍진성 넘치는 구성이야말로 임철우 작가의 소설이 가진 힘이다. 우리네 삶의 시작은 자유의지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종언은 의지의 문제라는 걸까. 어쩌다 마주친 생의 끄트머리에서 마주하게 되는 타인이 살아온 삶의 진실은 낯설 수밖에 없다. 누구나 하나쯤은 삶의 비밀이 있기 마련이고, 그 비밀에 대한 접근이야말로 우리가 그의 소설집을 읽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이다.

 

어쩌면 소설집 <연대기, 괴물>에서 임철우 작가는 우리에게 죽음 앞에서 “무력해질 줄 알기”를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망각이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누구나 꺼려하는 소재이지만, 또 피할 수 없는 소재에 정면 도전장을 낸 작가의 기백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연어가 회귀하듯, 임철우 작가의 전작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등대>부터 다시 읽어야겠다. 그리고 ‘이별하는 골짜기’로 여행을 떠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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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의 거장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전하는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는 철학 동화 그 네 번째,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가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서평을 남겨 주실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3분)


<강렬한 알레고리를 통해 우리 시대의 위기와 가치들을

은유적으로 의미심장하게 표현하는 동화를 썼다>

─ 2016 헤밍웨이 문학상 수상 당시 심사평



세풀베다가 추구해 온 문학 세계의 결정체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우정에 바치는 찬가. - 『리베르타』


세풀베다를 모르는 이들 역시 이 믿을 만하고 순수하며 강렬한

내레이터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 『엘 파이스』


세풀베다 문학이 천착해 온 새로운 삶의 전망과 형식이

아프마우라는 개를 통해 오롯이 드러나는 수작이다. - <옮긴이의 말>에서


* 서평단 신청 방법

1. 본 게시물을 스크랩해 주세요. (전체 공개)

2. 스크랩한 페이지를 본인의 SNS에 홍보해 주세요. (다양한 SNS 가능/전체 공개)

3. 스크랩 주소와 함께 서평단 신청 이유를 아래 댓글로 남겨 주세요.

4. 본인의 댓글에 대댓글로 도서 받으실

   주소/연락처/성함을 비밀 댓글로 남겨 주세요.


★ 반드시 위 네 가지 모두 지켜야 합니다.


* 모집 인원: 3명

* 모집 기간: 3월 15일~3월 20일(5일 간)

* 당첨자 발표 및 도서 발송: 3월 21일 화요일 예정


* 서평단 활동 방법

도서를 받으신 후, 3월 31일까지

알라딘 서재와 개인 블로그(또는 타 SNS: 인스타/페이스북 등)에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남겨 주신 리뷰는 당첨자 발표 페이지 아래에 댓글로 주소를 남겨 주세요.

★ 도서 수령 후 리뷰를 올리지 않으신 분들은 이후 이벤트에서 당첨 제외됩니다.




작가 세풀베다가 어릴 적 자라며 들었던 이야기이자,

실제 라틴 아메리카에서 2500년 넘게 살아온 원주민 부족인 <마푸체족>에게

잊지 않기 위해 이어온 이 이야기는 분명 지금 우리들에게도 유의미한 메시지일 것입니다.

많은 신청 기다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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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인민 3부작 1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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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학자 프랑크 디쾨터가 저술한 중국혁명 삼부작 가운데 첫 번째 <해방의 비극>을 읽었다. 오랜 세월 공산당 정부기록보관소에 잠자고 있던 자료들과 다수의 인터뷰 그리고 수많은 사료들을 기초로 해서 프랑크 디쾨터는 중국혁명의 진실을 파헤친다. 어쩌면 제목에서부터 그의 결론을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중국 공산주의 혁명으로 좋아진 것이 무엇인가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공내전에 대한 관심이 있어 2차 세계대전 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륙의 패권을 두고 다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아쉽게도 그 부분은 초반에 대략적으로 다루어진 정도가 전부다. 공산당이 대륙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둔 원인에 대한 분석보다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중국 공산당이 선전선동과 통일전선 전술로 종전 후 소련으로부터 인수 받은 만주를 발판으로 해서 국민당 정예군을 섬멸한 창춘공방전, 상징적인 베이징함락, 전반적인 전세를 가름한 쉬저우 전투 마지막으로 양쯔강 도하작전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을 섬세하게 프랑크 디쾨터는 기술했다. 특히 16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이 희생된 창춘전투는 대륙에서 국민당 패퇴를 가르키는 역사적 지표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민을 위한 계급투쟁이라는 대의명분을 중국 인민들에게 고취시킨 인민해방군이 실질적으로 그들의 보호자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만주를 정복한 린뱌오의 표현대로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라는 말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해방에 앞선 불길한 전주곡이라고 해야 할까.


대륙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을 축출한 베이지의 공산당 정권은 1세기 동안 외세의 개입과 소모적인 항일전 그리고 국민당 정권 하에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를 체험한 중국 대다수 가난한 인민들에게 새로운 역사를 가져다 준 구세주처럼 다가왔다. 문제는 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이 전후에 시급한 경제 재건보다 계급투쟁 아니 계급 전쟁을 가장 우선시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은 인민들의 복리후생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제 막 탄생한 신생정권의 보위와 요새 섬 타이완에 웅크린 장제스 정권과 가상의 제국주의 강적 미국의 침공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공산당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숙청작업과 뒤이은 공포정치는 모두가 예상하는 바가 아니었을까. 순조로운 정권 이양을 위해, 국민당 정권 아래 복무했던 과거를 가진 공무원들과 상공업자 그리고 산업가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마오 정부는 우선 그들을 안심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물론 그들의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공산당 간부들이 수년에 걸친 훈련을 거쳐 그들의 임무를 대신하게 되자 가차 없는 숙청이 되었노라고 프랑크 디쾨터는 사료를 통해 증언한다.


공산당 정부는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전국적인 차원에서 토지개혁과 지주계급 척결을 우선적으로 시행했다.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제 시스템을 파괴하면, 희망대로 농민 계급의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거라는 전망은 훗날 오산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중국 전통을 무시한 소련의 방식을 모델로 삼은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집산화 정책은 역설적으로 생산력의 감소를 초래했다. 혁명의 기운이 안정되지 않은 가운데, 무모한 도박으로 시작한 한국전쟁 개입은 1950년 초반 대기근을 불러왔다. 농민들에게 불하된 토지에 대한 막대한 세금과 연인원 300만명이 투입된 한국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병참으로 우선적으로 식량이 무리하게 공출되면서 인재에 인한 기아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이 가운데 특출난 인물로 쓰촨, 윈난 그리고 구이저우를 비롯한 서남 지역을 책임졌던 덩샤오핑의 활약이 눈길을 끈다. 골수 공산주의자로 대장정에도 참가했던 이 작은 거인은 이미 1950년대에도 당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한 지방지도자로 악명을 날렸다. 해방 초기의 사례들을 검토해 볼 때, 톈안먼 사건 당시 덩샤오핑의 무자비한 진압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모든 이들이 말렸던 한국전쟁에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이름으로 참전한 중국 인민해방군은 흔히 인해전술로 일컬어지는 막대한 인력투입으로 미국과 유엔 연합군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다. 4년의 전쟁 기간 동안 대략 40만명에 달하는 중국 병사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대다수가 국공내전에서 포로로 잡힌 국민당군 출신 병사들이었다고 전한다. 아마 순망치한이라는 원리에 입각해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겨냥한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력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세기 동안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쩔쩔맸던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대등하게 전쟁을 치렀다는 점을 지식인 계급에서는 자랑스러워 했던 모양이다. 다만 민간에서는 강제징집을 기피하려는 청년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이 역시 눈길을 끌었다.


한편 마오쩌둥이 기획한 공산당 독재의 기원은 대장정 후 적도 옌안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스파이와 간첩을 축출하겠다는 명분으로 공안과 정보기관 수장이었던 캉성을 앞세워 자신의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됐다. 해방 후에는 사상 개조라는 이름으로 전국 단위로 아예 제거할 대상을 선정하고, 제거되야할 인원들이 할당되기도 했다. 처형, 고문 그리고 노동개조의 방식으로 수백만명에 달하는 인민들이 희생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산당에 우호적이었던 종교인사들은 물론이고, 지식인 계급에 대한 숙청도 아울러 이루어졌다. 물론 1966년부터 시작되는 문화대혁명에 비한다면 해방 초기의 숙청은 그야말로 몸풀기 정도였다고 해야 할까. 해방전쟁 당시 선전되었던 자유와 평등 같은 정치적 구호는 신기루에 불과했다는 것을 지식인들이 깨닫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서로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풍조는 단기간에 중국 전통 사회질서의 붕괴를 불러왔다. 사회주의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 서구사회에서 보장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귀국한 펑유란 같은 대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이 발표한 학문적 성과를 부정하고, 치욕적인 자아비판을 해야했다. 저명한 예술 이론가 후펑이나 베이징대의 저명한 철학교수 량수밍도 마오 정부에서는 모두 환영받지 못한 인사들이었다.


토지 개혁에 이은 곡물 전매 제도 역시 대중의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은 불문가지다. 경제를 담당한 저우언라이와 류사오치 같은 온건론자들의 시간이 걸리는 점진적 개혁 대신 마오 주석은 무조건 속도전을 강조했다. 그것은 마치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오자서가 남긴 “일모도원(日暮途遠)” 같다고나 해야 할까. 공산당 경제팀의 엇박자와 괴리된 현실로 잉태된 인재의 비극은 대량 기아사태의 전조였다. 물론 그것도 1958년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이 초래한 대기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겠지만. 프랑크 디쾨터 작가는 진짜 비극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후속작으로 이어질 <마오의 대기근>과 <문화 대혁명>을 조용한 목소리로 예고한다.


공산주의 특유의 선전술에 입각한 허상에 대해서도 작가는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라는 혁명 초기의 구호들은 시간이 갈수록 그 빛이 바래지고 있었다. 대신 존재하지도 않는 지상낙원이라는 선전을 위해 서구사회에 보여주기식 전시행정 스타일의 대규모 건설공사가 시행되었고, 전국을 관통하는 도로 건설붐이 일었다. 쥐, 벼룩, 빈대 등에 대한 전국단위의 박멸작전이 마치 군사작전을 실시하듯 처리되었고, 공공을 위한 위생사업도 꾸준하게 실시된 점은 그나마 고무적이다. 엄청난 인원을 동원한 신장개발에 대해 작가는 상대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일련의 계획들이 부작용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입안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그리고 순전히 마오쩌둥 마음대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해방의 비극>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편중된 입장에서 저술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이 책을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혁명으로 인민의 삶이 나아진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공산정권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프랑크 디쾨터의 저술에 따르면 단언컨대 하나도 없다. 다만 지도자와 권력이 장제스 국민당 독재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 독재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중국 공산당이 혁명 중에 약속했던 자유, 평등, 민주주의 그 어떤 것도 지켜지지 않았으며, 민중의 삶 역시 개선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계급 간의 갈등을 부추겨서 전통 사회질서가 파괴되었고, 고발과 비난이 난무하는데 가운데 자본가 지주계급이라는 이유로 숙청당하지 않고 강제노동수용소나 한국전쟁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인민들은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연이어 실패한 경제정책과 무리한 토지 개혁으로 농업을 필두로 한 각종 생산성은 저하되었고, 그 결과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가 초래한 대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야만 했다.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신념을 가지고 혁명 대열에 동참했던 지식인들도 각종 규제를 불러온 공산독재 시스템에 넌더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과연 혁명으로 좋아진 것이 정말 하나도 없었을까.


미국 출신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는 <중국의 붉은 별>에서 1930년대 국민당 최고의 절정기 시절에 볼썽사납게 패퇴한 홍군의 장정을 기록하면서 산베이 소비에트 옌안에 자리 잡은 홍군이야말로 중국의 미래이자 희망이라고 기록했었다. 불과 12년 전의 홍군/공산당과 대륙을 패권을 잡은 1950년 중국 공산당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벌어졌단 말인가. 거대한 성취가 가져온 오만과 오판의 결과물인지에 대해 작가의 나머지 연작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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