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알레르기
고은규 지음 / 작가정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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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의 시대다. 언제는 소통이 시대의 키워드였었는데 이제는 힐링에 자리를 내주었다. 카카오스토리나 인스타그램을 보면, 힐링 여행의 흔적들로 도배가 되어 있다. 삶에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힐링들이 필요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은 <오빠 알레르기>의 작가도 누군가에게 위로, 힐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글을 서두에 남겼다. 나도 힐링이 되었을까?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다. 평소처럼 꾸역꾸역 그렇게 글을 읽었을 뿐인데.

 

모두 7개의 이야기를 품은 <오빠 알레르기>를 살펴 보자. 남녀 구분 없이 학형이라 부르던 시절에 학교를 다닌 내가 복학생이 되었을 때, 오빠라고 불리던 그런 이물감을 고은규 작가가 창조한 <오빠 알레르기>의 주인공도 비슷하게 느꼈던 걸까. 청청패션이 어색하지 않던 시절, 운동과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이 살아 숨쉬던 학창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표제작을 통해 되살아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선배 언니의 장례식장에서 옛 사랑을 만난 감정 그리고 술에 취해 미처 부조를 해지 못해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작년에 읽은 권여선 작가의 <안녕 주정뱅이>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 다음 두 이야기는 좀 임팩트가 약해서 패스. 비틀즈 노래 제목을 차용한 <맥스웰의 은빛 망치>가 주는 교훈 하나는 그러니까 남의 일에는 참견하지 말 것. 선의로 개입했지만 결과는 보장할 수 없으니 말이다.

 

<엔진룸>은 소설집 중에 가히 최고로 꼽을 만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퇴직하고 운영하시던 치킨 집을 빈대들의 습격으로 말아 먹고 수술 중에 돌아가셨다. 이혼한 강철 캥거루 언니는 화자와 우연히 갔던 콘서트 무대의 주인공 아이돌 가수에 미쳐 금벌(golden bee)과 화자 은주의 돈을 튀고 대부도로 그리고 대공원으로 튀었다. 그날은 날이 좋아 언니 잡기에 안성맞춤인 그런 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살림을 줄여 이사간 집은 도무지 세간살이를 버릴 줄 모르는 엄마 덕에 아수라장이다. 그런 자신의 집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를 기어 다니며 산다고 수군거리고. 우리에게 어쩌면 가족은 바로 그렇게 “발에 맞지 않는 구두”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닐까.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고 받는 우리네 삶에 대한 초상을 작가는 직격한다.

 

다음 작품 <급류 타기> 역시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매일 같이 지나는 현실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지연과 영훈이 사는 집은 새로 지은 빌라지만 부실공사로 금이 가고, 정전이 다반사다. 문제는 지연을 누나를 뉴욕에서 지하철 사고, 아이를 임신한 지연은 오빠를 엘리베이터 사고로 잃었다는 것이다. 아내에게 죽은 오빠의 시신을 보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엄습한다. 이렇게 위험한 세상에 아이를 내놓는 게 두렵다는 지연은 유산을 결심한다. 아내의 우울증을 달랠 길이 없는 가운데, 농약회사에 다니는 영훈은 자살을 결심하고 농약을 들이부은 이들에게 해독제 처방을 그리고 농약사용을 잘못해서 손해를 입게 된 학교 후배의 아버지의 피해보상을 다뤄야 하는 곤란한 업무에 시달린다. 농약복용이 되돌릴 수 없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왜 사람들은 불가역한 상황에 그렇게 자신을 내던지는 걸까.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혀 맴도는 햄스터 같다는 느낌이 위로보다는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우리네 삶이 마치 거친 물결에 내던져진 보트 같다고나 할까.

 

시위에 참여했다가 돌아오지 않는 오빠에 대한 기억을 안은 화자가 등장하는 <딸기> 그리고 악성종양으로 다리를 절게 된 이복언니를 가족으로 둔 주인공 <명화>가 등장하는 이야기로 소설집 <오빠 알레르기>는 막을 내린다. 고은규 작가가 쓴 소설집에 등장하는 핵심 주제 중의 하나는 바로 가족이다. 닭 소 보듯이 하고 있어도 가족은 가족이다. 가족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최소 전투단위다. 살기 위한 발판이 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을 가두는 족쇄나 질곡이 되기도 한다. 내가 가족을 고를 수 없듯이, 가족도 나를 고를 수 없다. <엔진룸>에서 이혼한 언니를 강철 캥거루라고 부르면서 독립을 꿈꾸는 와중에 언니가 꼬불쳐둔 상여금을 들고 튀었다. 이 원수를 어쩌란 말인가. 이런 원수 같은 언니에 대한 분노감은 허세를 부리며 부동산을 통해 구경하러 간 집의 주인이 직장동료라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세상은 참 요지경이다.

 

표제작에서 술에 취해 신참내기들한테 남자 직원들에게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는 꼰대 상사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도 멋지다. 원칙을 내세우다 보면,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규정에 걸리기 마련이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이다. 내가 구축한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화를 내보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저 히스테리로 치부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또 직장에서 타인에게 어떤 존재로 각인되고 있는지 묻게 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오빠 알레르기>의 소설들은 재밌는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었다. 모든 작품을 평등하게 좋아할 수는 없겠지 아마도. 난 재밌고 내 마음에 드는 좋은 작품만 기억하련다. 다가오는 봄에 소품으로 읽기에 아주 부담 없는 그런 소설집이다. 아, 사족으로 고은규 작가도 블랙리스트 명단에 있다고 한다. 자랑스러운 훈장 같은 블랙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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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5 16: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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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5 17: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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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5 17: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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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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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천년의 마지막 여름이었던 7월 4일, 메인에 있는 웰즈 비치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한가롭고 고즈넉한 웰즈 비치는 그 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닷가로 기억하게 됐다. 시원한 바닷가 바람을 맞으며, 여름철 휴가객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가게에서 종이봉투에 담아 파는 고소한 칼라마리 맛은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직접 수조에서 살아 움직이는 바닷가재를 골라 먹는 레스토랑,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철모와 환타병 같이 자질구레한 소품들을 파는 골동품 가게를 품은 곳이 바로 메인이다. 유에스 루트 원을 따라 북쪽의 아케이디어로 가는 바닷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퓰리처상에 빛나는 <올리브 키터리지>에서 크로스비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13개의 우리가 모르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낸다.

 

7년 만에 다시 만난 <올리브 키터리지>는 역시나 재밌었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소설의 제목을 장식한 까탈스럽고 온갖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올리브 키터리지 여사가 등장한다. 대학에서 차석으로 졸업했고 수십 년 동안 수학교사로 활동한 덕분인지 ‘선생질’이 인이 박힌 72세 할머니다. 소설답게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 누비며 타인의 삶에 개입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삶의 본질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는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그렇게 재밌었다. 그동안 세월의 더께가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라도 한 걸까. 타인의 고통의 바라보는 시선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건 싫어하면서, 전지적 차원의 선생님으로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마다 빠지지 않고 까탈스러운 올리브 여사가 등장한다. 메인주 바닷가 마을 크로스비는 작은 만큼 주민들 사이에 비밀이 없는 곳이다. 족부의학 의사로 어엿하게 성장한 아들 크리스토퍼와 빌리지 약국을 수십 년 동안 운영하다가 거대 약국 체인에게 가게가 팔려 조기은퇴한 사람 좋은 남편 헨리와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면 좋으련만 어디 인생사가 그렇게 쉽게 흘러가던가. 유대인이자 의학 박사 학위를 두 개나 가지고 있는 수전 번스타인과 결혼한 크리스토퍼는 부모의 곁에서 손자들을 키울 거라는 올리브 여사의 바람을 저버리고 나라의 반대편 캘리포니아로 떠나 버린다. 아들의 결혼식에서 상실감에 젖어 며느리 방에 들어가 스웨터에 매직을 죽죽 긋는 커다란 덩치의 올리브 여사를 상상해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이는 이 작은 바닷가 마을에 웬 놈의 사연들이 그리도 많은지. 어쩌면 그런 평온이야말로 사람들이 지닌 고통을 가리는 커튼 같은 게 아니었을까. 이웃의 라킨네 아들 도일은 여자친구를 자그마치 29번이나 찔러 멀리 코네티컷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알게 모르게 마을의 죄인이 된 부모는 살아있는 유령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남편 헨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문안카드를 보낸 인연으로 그 집을 우리의 올리브 여사는 방문한다. 타인의 깊은 고통 속에서 위안을 얻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어쩌면 속으로만 생각하고 절대 내뱉을 수 없는 그런 표현들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가감없이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런 점이야말로 이 소설을 더 특별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어떤 사람은 날마다 바에서 실연의 상처를 안고, 가족에 특히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피아노 연주를 하지만 무대공포증에 시달려 거의 알코올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헨리의 빌리지 약국에서 일하는 새댁 데니즈 시보도는 총기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묘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 좋은 헨리는 괄괄하고 최근 무신론자라고 천명한 올리브 여사로부터 과부 위로꾼이라는 빈정거림을 듣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뉴욕에서 정신과 의사로 성공한 올리브 여사의 제자 케빈은 덧없는 생에 대해 오랜 만에 찾은 고향 크로스비에서 번민에 사로잡힌다. 그러다 바다에 빠진 어린 시절 친구 패티를 구하는 와중에 저승의 문턱을 거의 넘을 뻔한 사람에게서 느낀 강렬한 삶의 애착의 본질을 깨닫기도 한다. 놀랍군 놀라워.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삶으로부터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건져 올릴 수 있는지 경탄할 따름이다. 작년에 읽었던 탐 드루리의 소설에서처럼, 특별한 이야기보다 모든 이에게 호소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미국 평론가들과 독자들에게 어필하고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방인으로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재미가 유별나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주목한 점의 하나는 어디에서고 죽음이 불청객처럼 찾아 든다는 점이다. 늙은이들은 심장발작이 와도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지만, 젊은이들에게 죽음은 도둑처럼 갑자기 들이닥치는 법이다. 전혀 대처할 시간이나 준비할 새도 없이 그렇게 말이다. 이제는 하도 많이 사용해서 식상해져 버린 표현인 ‘메멘토 모리’야 말로 어쩌면 <올리브 키터리지>의 진짜 주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기쁨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플라톤이 말했다고 했던가. 엄격한 방식으로 자식을 양육했지만, 자식의 기억 속에 수학선생님 출신의 올리브 키터리지는 꼰대에 지나지 않았다. 아들 크리스토퍼에게 엄마 올리브는 사과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도대체 대화가 통하지 않는 그런 인물로 각인된 모양이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각각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이번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브루클린으로 삶의 공간을 옮겨 심리치료를 받으며 다시 한 번 엄마와의 화해를 시도해 보지만 자기 주관대로 사는 올리브에게 아들이 사는 방식은 그저 못마땅할 따름이다. 이렇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정말 섬세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우리네 삶의 방식은 참으로 다양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비밀을 품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진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끝나 간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말이다. 최근에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 헨리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성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헌신적인 올리브도 한 때, 이 남자를 떠날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같은 학교 교사인 짐 오케이시와 사랑에 빠졌을 때였던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줬던 남편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부부간의 그 은밀하고 오묘한 진실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어쨌든 헨리는 세상을 뜨고 홀로 남아 과부가 된 올리브는 역시 최근에 상처한 부유한 잭 케니언의 고통으로부터 새로운 위안을 얻는다. 참으로 이기적인 발상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보다 더 불행한 이로부터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을 작가는 예리하게 타격한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장례식에서 타인의 고통을 통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는 지도. 그동안 훈련된 예의와 도덕 때문에 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말과 표현들을 우리는 까탈쟁이 올리브 키터리지의 좌충우돌 삶을 통해 구현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통령 아버지를 둔 부잣집 도련님이자 개과천선한 마약쟁이 대통령을 정신지체라고 부르는 장면은 정말 통쾌했다. 하바드 스퀘어에서 현직 대통령의 이름 밑에 “thug"이라고 쓴 팻말을 걸고 다니는 노인장을 목격했을 때, 정확하게 느꼈던 바로 그 카타르시스였다. 이런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해 주다니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다.

 

기분 좋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HBO에서 만든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를 구해서 봤다. 드라마는 소설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했다. 주연을 맡은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소설 속 거구의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까탈쟁이 올리브 키터리지 역할이 요구하는 감정선을 충실하게 수행해냈다. 그 덕분에 영화 <파고>로 아카데미상에 에미상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드라마는 소설과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re-creation의 힘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중에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만나도 좋을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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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역사가 바뀌다 - 세계사에 새겨진 인류의 결정적 변곡점
주경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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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을 즐겨 읽는 편이다. 작년에 주경철 교수님의 <일요일의 역사가>를 사서, 프리울리 지방의 물레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에 대한 글을 읽고 나서 원작인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글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정작 주경철 교수님의 책은 마저 읽지 못했다. 그러다 올봄에 다시 주 교수님의 책을 만나게 됐다. 이번에는 이틀만에 완독의 쾌거를 이뤄냈다. 역시나 역사책 읽기는 즐거운 모양이다. 내가 모르고 있던 사유에 접속하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해, 역사가 바뀌다>의 시작은 중세 여명의 시기였던 1492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첫 번째 주자는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이전에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이미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지만, 아직까지도 신대륙 발견의 영예는 후발주자이자 이탈리아 출신 콜럼버스에게 주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 콜럼버스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고 유럽인들의 숙원이었던 레콩키스타에 성공한 카스티야 이사벨라 여왕의 물질적 후원으로 신대륙의 황금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신대륙 탐험에 나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저자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 당대에 지식인 사이에서 지구구형설은 상식이었다는 것이다. 신대륙에서 부를 창조하겠다는 세속적 열망 외에도, 컬럼버스는 자기 이름이 유래한 크리스토퍼 성인의 예에서 보듯 그리스도의 세계를 확장하겠다는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아울러 컬럼버스는 독학으로 신대륙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 역시 당시 세계관(이마고 문디:Imago Mundi)으로서는 파격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가 논리대로 움직인다면 재미 없을 지도 모르겠다. 인도 대륙을 찾아나선 컬럼버스는 네 차례의 항해에서 유럽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있는 새로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를 건설하여 온갖 영예와 부를 얻는데 성공했지만 그의 성공이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특히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에게는.

 

다음 꼭지는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와 인도의 생산성을 따라잡지 못하던 후발 주자 유럽이 산업혁명이라는 획기적인 생산양식의 도약을 통해 마침내 세계의 패자가 된 과정을 추적한다. 기존의 동서양의 정보와 물자의 유통방식은 캐러반, 수레 그리고 배였는데 기존의 두가지 요소가 대륙적인 측면이 강하다면 후자는 원천적으로 해양적 요소를 담보하고 있었다. 명나라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영락제는 환관 정화로 하여금 대원정이 가능한 선단을 꾸릴 정도였지만, 정화의 원정 이후 내륙개발에 치중하면서 바다를 저버리게 된다. 저자는 이유를 유럽의 분열과 중국의 통합에서 찾게 되는데 유럽 대륙에서는 산업혁명이 발생한 시기에 분출한 국가민족주의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내부의 힘을 외부로 향하는 중상주의에 기반한 제국주의 정책이 발호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그 기점을 1820년으로 잡고 있는데, 그후 200년 동안 기술과 자본을 축적한 유럽과 신대륙의 미국이 전 세계 패권을 장악해 왔다고 분석한다.

 

저자가 아무래도 경제학 전공 출신의 역사학자이다 보니 기존의 정치사 중심의 역사보다는 경제사적 역사발전의 차원에서 역사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유행하는 미시사에 대해서도 지엽적인 부분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역사에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러다 보니 주석 부분에서 옥의 티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일본 전국시대 영주였던 오나 노부나가에 대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가 아닐까.

 

세 번째 꼭지에서 환경 문제를 결부시킨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인간 중심의 인류세 시기에 인간은 바야흐로 자연을 지배하고 나아가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인구 증가에 비해 생산성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지구는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중이다. 역사적으로 지구의 총생산의 일정 부분을 담당해왔던 중국의 역할에 대해서도 1820년 이래 한차례 주춤한 적이 있지만, 중국 경제가 안정되면서 다시금 원래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노라는 부분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과연 다음 세기는 팍스 시니카의 시대가 되는지, 현재 싸드 배치 문제로 무역보복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채 새우등이 터지지나 않을지 우려가 앞선다.

 

모리셔스섬의 살지 못하는 새 도도 같은 경우 멸종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개체수가 수입억 마리에 달하던 나그네 비둘기의 멸종 같은 경우는 정말 궁금했다. 지금도 지구상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들이 인간의 난개발로 시시각각 멸종해 가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 인류도 어쩌면 어이 없이 멸종한 나그네 비둘기의 뒤를 따를 수도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마지막 주제는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끈다.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는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는 내재된 폭력성을 길들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가령 에티켓을 예로 들어 보자. 지금은 보편적인 상식이 되었지만, 중세시대 혹은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기간 인류의 폭력성은 순치되었을 뿐 어느 계기를 통해 분출할 수 있는 그런 활화산 같았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전쟁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역사를 20세기 인구로 조정한 대전쟁에 대입해 볼 때 몽골의 세계정복과 중국 안사의 난이 당시 인구대비 더 큰 인명피해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엄청난 살상무기를 동원한 섬멸전을 수행하는 현대판 전쟁이 과거의 비해 덜 야만적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인간이라는 대상을 물질화시켜서 섬멸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중세시대 십자군 전쟁과 다를 바가 없다. 현대에도 나와 다른 상대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제노사이드라는 형태의 비인간적인 대량학살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 현대의 전쟁이 문명보다는 더 야만에 가깝다는 역설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건명원에서 행해진 강의를 책으로 엮어서 그런지 가독성이 매우 뛰어났다. 게다가 경제사학자의 이야기라 그런진 몰라도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정치사적 차원의 접근보다 흥미로운 주장들도 많아서 독서의 재미를 한층 더 느낄 수가 있었다. 자, 다음에는 읽다만 <일요일의 역사가>를 읽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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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루미늄 오이
강병융 지음 / 뿌쉬낀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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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다양한 루트를 통해 책에 대해 알게 되는데 이번에는 인터넷 카드뉴스를 통해 아마 이 책에 대해 알게 된 것 같다. 이 책과 고은규 작가의 <오빠 알레르기>(오늘 아침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탁명주 작가의 <도마뱀이 숨 쉬는 방>, 두 권은 빌렸고 한 권은 샀다. 제목부터 특이한 <알루미늄 오이>부터 먼저 읽었는데, 예상한 대로 그리고 제목처럼 흥미로운 책이었다.

 

미사일을 의미한다는 소설 <알루미늄 오이>는 구 소비에트 시절 소련의 전설적인 록스타였던 빅따르 쪼이(소설에선 빅또르 최라고 명명된다)의 삶과 그가 죽은 날 한국에서 태어난 찐따 소년 최승자(소멸과 생성의 방식으로 작가는 둘을 이어 붙인다)에 관한 소설이다. 소년 승자의 엄마는 영화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트를 미치게 하는가>에 등장하는 고래 엄마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끊임 없이 무엇을 먹어대는 욕구불만의 상징, 아버지는 작가로 그저 아들에게 세상에 적응해서 조용하게 살라는 무능력한 인텔리겐차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이름과는 전혀 상관 없이 학교에서 악마들에게 시달리던 아들이 벽돌을 들었을 때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저 세상에 순응하려고 왜곡되고 굴절된 세상의 적응을 주문하는 그런 아빠다.

 

 

2002년 한국의 월드컵 즈음해서 한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면, 대략 12년 정도 전에는 고려인 3세로 뻬쩨르부르그(구 레닌그라드) 출신 미술학도였던 빅따르 쪼이는 보일러공으로 일하면서 록그룹 끼노의 일원으로 록스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영화배우로 그리고 불세출의 전설적인 모스끄바 공연으로 전설의 탄생을 알렸던 뮤지션은 1990년 8월 15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말 그대로 전설이 되어 버렸다. 그의 열혈 팬 중에 정말 5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고 했던가. 둘의 접점을 이으려는 강병융 작가의 노력은 찐따 소년에게 구세주 사촌누나 승희를 붙여 주고, 느닷없이 악마들이 승자에게 외국 노래를 부르라는 정언명령을 내림으로 약간 판타지 스타일로 치닫기 시작한다. 어쩌다 빅따르 쪼이의 팬이 그의 무덤가에서 삼년상을 치른 러시아 출신 올가가 필승, 코리아가 난무하던 시절에 한국을 찾아 경복궁 근처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승자가 러시아말로 부른 빅따르 쪼이의 <혈액형>을 부른 장면은 이런 판타지의 정점이라고나 할까.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리얼 월드에서 출발한 스토리텔링은 판타지로 치닫는다. 빅따르 쪼이의 20주기 콘서트에 찐따 소년이 공항에서 그의 노래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구름 같은 관중이 운집한 무대에 선다. 상상만으로도 이제 더 이상의 찐따세상에서 탈출해서 그야말로 전설이 된 기분이려나.

 

작가 개인에게는 의미 있는 소설일지 모르겠지만, 소비에트 출신 록스타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독자로서는 출발점을 ‘코다’에 대입하려고 하니 과부하가 걸리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최근에 읽다만 <스파링>에도 등장하는 찐다 소년이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일종의 이물감이 들었다.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이 그보다 더 강력한 폭력으로 위기를 극복하던가, 그도 아니면 그저 때리는 맞는 그런 상황이 현실세계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현실에 문득 숨이 막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얼마 전에 영화 <로건>에서 또 역시 영화 <셰인>의 대사를 차용한 그대로 인간의 본성이란 바뀌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소설의 출발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미약하였더라고 말하고 싶다. 재미는 있었지만, 승자가 판타스틱한 무대에 서는 결말은 받아 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내게 1990년 모스끄바 록페스티벌 주인공은 빅따르 쪼이가 아니라 머틀리 크루였다. 난 아마도 알아 듣지도 못할 빅따르 쪼이의 노래 <혈액형>을 유튜브에서 찾아듣는 수고는 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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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 파리 코뮌 - 민중의 함성
자크 타르디 지음, 홍세화 옮김, 장 보트랭 / 서해문집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자크 타르디의 <그래픽노블 파리 코뮌>을 읽으면서 훗날 레닌이 말한 것처럼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연습”으로서 파리 코뮌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을 기대했다. 하지만 내가 그래픽노블로 만난 파리 코뮌은 예상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나폴레옹 3세라는 이름으로 제2제정을 열었던 권모술수에 능했던 얼치기 황제는 삼촌이 제시했던 영광스러운 프랑스 대신 조국을 치욕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처절하게 패배하고 그야말로 나라를 말아 먹어 버렸다. 헤겔의 말처럼 역사는 희비극으로 반복된다고 했던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희극이었다면, 뒤이어 벌어진 파리 코뮌은 비극이었다.

 

프랑스 최고의 영예를 자랑하는 레종도뇌르상 수상을 거부한 무정부주의자 자크 타르디는 장 보트랭이 1999년에 발표한 소설 <민중의 함성>을 각색해서 새로운 스타일의 <그래픽노블 파리 코뮌>을 창조해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제2제정은 힘없이 무너지고 임시정부는 루이 아돌프 티에르를 행정장관으로 임명해서 알자스로렌 영토를 할양하고 50억 프랑에 달하는 전쟁배상금을 요구하는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추진했다. 도저히 이런 강화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프랑스 민중들은 조직적인 반항을 시작한다. 그래픽노블에 나오는 알마 다리에서 신원미상의 시신을 발견된 1971년 3월 18일을 시작으로 장장 72일에 걸친 코뮌의 역사가 불타 오른다.

자크 타르디는 여성혁명가 루이즈 미셸이나 저널리스트 쥘 발레스 혹은 귀스타브 쿠르베 같은 실존 인물들도 등장시키지만, 코뮌을 폭도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진압을 시도한 정부군의 총칼 앞에 수없이 스러져간 무명의 코뮌 전사들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원래 프로이센군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민중의 세금으로 구입한 대포가 시민군의 수중에 두려워한 베르사유에 근거한 티에르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왕당파들은 정부군을 파견해서 대포를 회수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극을 이끌어 가는 주역을 오라스 그롱댕이라는 이름의 비밀경찰 그리고 자신의 딸을 잔혹하게 죽인 범인으로 그가 믿는 앙투안 조제프 타르파냥이라는 정부군 출신이었지만, 시민군에 총을 겨눌 수가 없어 시민군에 투신한 장교가 차례로 등장해서 첨예한 갈등에 선봉에서 이야기를 힘차게 이끌어 간다.

 

모든 혁명이 그렇듯,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같은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다양한 이유에서 혁명에 동참한 구성원들의 이야기가 그야말로 파노라마처럼 벌어진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정치적인 면면을 기대했지만 소설을 바탕으로 한 그래픽노블에서 다루기엔 너무 거대한 담론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마 저자 자크 타르디는 당시 시대상을 참조하고 고증하는데 지대한 공을 들였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프랑스 문화에 대해 문외한인 이방인의 눈에는 버거울 따름이었다.

민중에 의해 선출된 정부를 지향하던 코뮈나르들도 정부군 못지않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동안 민중을 억압해온 사제 계급에 대한 증오로 마구잡이식 보복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사제 중의 한 명이 그롱댕이 그렇게 복수하고 싶었던 진범이라는 사실은 허탈하기만 하다. 물론 코뮌이 끝난 뒤, 사실을 알게 된 경찰총수가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다는 이유로 사실을 덮는 장면은 세월호 사건을 처리한 어떤 정부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한편, 티에르 휘하 마크마옹 원수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무능한 군인었지만 시민군을 상대로 한 내전에서는 유능한 실력을 발휘해서 잔혹한 방식으로 코뮌을 무력화하는데 마침내 성공한다. 어떤 경우에라도 의기만으로 잘 조직되고 훈련받은 정부군을 상대로 코뮌을 유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티에르와 마크마옹의 정부군이 사방에서 코뮌을 포위하고 진격해 오는 가운데 마지막 “피의 일주일” 동안 수많은 코뮈나르들이 학살당하고, 투옥되는 것으로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꿈꾸었던 대동세상은 스러지고 말았다.

 

코뮌 기간 동안 숨죽이고 있던 우파들이 정부군이 진압에 나서자 본색을 드러내고 코뮈나르들에게 총질을 하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부군에 대항했다는 흔적으로 간주된 어깨에 집총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집단공개 처형을 당하는 기록사진을 보고서 그렇게 질서와 안녕을 외치던 이들의 위선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하고 힘없는 거리의 여인들, 젖먹이 아이들까지 껴안고 코뮌을 위해 싸우던 코뮈나르들의 최후는 결연하고 장엄하게 다가왔다.

 

프랑스 신미년의 혁명이 실패한 혁명이었다면, 정유년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촛불혁명은 권좌에서 헌법을 농간하며 노욕을 부리던 지도자를 마침내 끌어내리는데 성공했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시대였던 1832년 6월항쟁을 상징하는 <민중의 노래>가 다시 광장에 울려 퍼지는 이유를 다시 되새겨 보게 된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리고, 지난한 과정이 있다 하더라도 절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PARK OUT! 다음 과제는 새로운 공화국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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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10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극기와 촛불 간의 대립이 생각보다 오래갈 것 같아요. 차기 정권은 국민 통합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서로 다른 진영 간의 갈등 폭을 줄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역 갈등‘보다 더 위험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이념 갈등‘입니다.

레삭매냐 2017-03-10 17:35   좋아요 0 | URL
지금 시절이 어느 시절인데 이데올로기 타령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유신의 잔재를 청산하고 미래로 나가야 하는데
앙시앵 레짐이 구축한 분열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