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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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롄커 작가의 <사서>를 읽었다. 적잖은 분량에 조금 버겁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지만 읽기 시작하니 기우였다는 게 드러났다. 2월 동안 중국 당대 작가들의 책을 섭렵하다 보니 내공이 쌓여서 그런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기를 다룬 <사서>가 그다지 낯설지 않았고, 특히나 원래 중국 사서와 다른 구성의 <하늘의 아이>, <죄인록>, <옛길> 그리고 <시시포스의 신화> 네 편 이야기로 구성된 옌롄커판 <사서>는 가독성이 뛰어났다. 다만 후반의 등장하는 살인적인 기아와 추위의 공포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신구 지식인들이 벌이는 쉬르리얼리즘 행각은 읽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작가는 서문에서 그동안 자신의 스타일과 반대되는 작법으로 <사서>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 내용 때문인지 아마 중국 본토에서는 아예 출판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금서는 아니고, 출판사가 알아서 출판을 거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 창세기를 떠올리는 시작으로 우선 르포르타주에 가까운 소설 <사서>는 하늘의 아이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총 127명의 지식인들이 거주하게 된 99번째 위신구를 다스리는 아이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의 내전을 끝낸 신중국 시대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이 아닐까.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동원한 친위쿠데타로 자신에게 반감을 품은 구세대를 축출하고, 권력유지를 위해 새로운 세대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했다. 중국 공산당이 혁명 과정에서 외쳤던 자유, 평등, 민주주의는 오로지 권력쟁취를 위한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지식인들을 옥죄는 족쇄는 풀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구체제를 상징하는 지식인 계급인 작가, 학자, 교수, 연구원, 음악 그리고 종교를 필두로 한 일단의 무리들이 옌롄커 작가 고향인 황허 언저리 위신구에 배치되었다. 사상과 노동개조를 통해 하늘의 아이가 주는 다섯 개의 오각별을 받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지식인들은 전혀 지식인답지 않은 행동을 일삼는다. 소설 <사서>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는 위신구에 갇힌 이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가정하고 그들의 행태를 고발하는 죄인록을 작성한다. 당과 상부에 반대하는 모든 적대행동을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작성하면 그 부상으로 종이꽃이나 오각별을 부여 받는 밀고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에 반감을 품은 동료 ‘죄인’들의 테러로 그동안의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작가의 위신구 탈출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아이를 필두로 한 위신구 대표들은 생산성 향상경쟁에 나서 경작지에 할당된 생산량을 엄청나게 초과하는 양을 생산하겠노라고 공언한다. 진짜 생산량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상부에 보고하는 양이 중요할 뿐인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옌롄커식 비판이라고 해야 할까. 설상가상으로 생산량 증대경쟁에 강철 제련 붐이 불면서, 강철 생산을 위한 또다른 경쟁이 불붙는다. 모든 쇠붙이들이 공출되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간다. 이렇다할 쇠붙이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미래의 작물 생산을 위한 필수 농기구를 제외한 모든 쇠붙이들이 수거된다. 99위신구에서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다른 위신구를 능가하는 강철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위신구 소속 죄인들이 오각별을 쟁취해서 위신구에서 탈출을 꿈꾼다면, 한 번도 대처에 나가본 적이 없는 아이는 죄인들을 닦달해서 초과 생산량 혹은 특별한 생산물을 가지고 성도에 나갈 꿈을 꾼다. 그 와중에 죄인들이 획득한 별들이 기록된 아이의 숙소에 불타면서 99위신구는 다시 한 번 대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작가는 콩알만 한 크기의 밀알을 생산하겠다고 외진 곳을 찾아 자신의 피로 밀재배에 나선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책을 잠시 덮어 두기도 했다. 동시에 동료들을 고발하는 내용의 죄인록과는 다른 내용의 옛길을 저술하기 시작한다. 전자가 밀고의 기록일하고 한다면, 후자는 진실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오로지 글을 써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 작가의 이중적 행적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비극의 시대에 살아남은 이들의 변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비극은 이제 시작이다. 강철 제련을 위해 전국의 나무들이 베어져 용광로를 달구기 위해 사용되자, 가뭄과 홍수가 연이어 발생했다. 인재 때문에 발생한 자연재해로 위신구에 사는 죄인들에 대한 식량배급이 점점 줄어든다.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현실을 무시한 중공업 위주 정책으로 대약진운동 기간 발생한 대규모 기아사태의 단면을 옌롄커 작가는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쓰고 있다. 굶주림과 추위로 잇따라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그야말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이다.

 

그 와중에 음악은 다른 위신구 군인에게 성을 팔아 생존을 도모한다. 작가를 사랑한 음악이 몰래 그를 위해 마련한 볶은 콩과 만터우를 훔쳐 먹는 작가의 모습에서 비루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현실세계에서는 무능했지만 밀고와 도둑질로 자신의 연명에는 능했던 지식인의 초상을 엿볼 수가 있었다. 매춘으로 연명하던 음악 역시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된다. 그전에 한사코 성모 마리아의 초상에 대한 모욕을 거부하던 종교 역시 혹독한 굶주림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배신하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게 된다. 개체의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추락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옌롄커 작가는 냉정하게 그려냈다.

 

옌롄커 작가는 마지막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무한한 고통의 시간 가운데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 시시포스에 참혹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 지식인들의 모습을 투영시킨다. 고통에 무감각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옛길>과 <죄인록> 사이에서 번뇌하는 작가의 그림자는 옌롄커 자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고통의 시간이 지나갔다고 해서, 고통과 현실의 비극을 외면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이들에 대한 화해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떤 리뷰를 보니 옌롄커가 역사를 팔고 있다는 혹평을 읽었다. 우리에게 그렇게 청산되지 않은 영사를 옌롄커처럼 일관되게 다루면서 파는 작가가 있었던가. 엄정한 역사의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그처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면, 역사를 문학으로 파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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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비벤덤 북스토리 아트코믹스 시리즈 6
니콜라 드 크레시 지음, 이세진 옮김 / 북스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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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북플 이웃님의 글을 보고서 부랴부랴 도서관에 가서 <천상의 비벤덤>이라는 책을 빌려다 읽었다. 그래픽노블인데, 이건 내 수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의 책이었다. 도대체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뭐였지? 동물애호?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는 기득권층에 대한 조소? 선과 악으로 나뉜 세상에 대한 신랄한 하이킥? 난 모르겠다.

 

그래픽 노블 <천상의 비벤덤>의 내레이터는 교통사고로 죽고 머리만 남게 된 롬박스 교수다. 그의 이미지는 수년 전에 본 캐롤라이나 뱅이 주연으로 나온 에스파냐 영화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를 연상시켰다. 분명 밀레니언 캐피탈 뉴역을 떠올리게 하는 땀과 고철의 도시 뉴욕쉬르루아르에 이제 막 도착한 바다표범 디에고에 관한 이야기다. 뉴욕쉬르루아르의 지배자들은 순진무구한 청년 바다표범 디에고에게 선택되었다는 전언과 함께 문화버스에 올라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게 만든다. 체육을 제외한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이는 디에고에게 현대 젊은이들의 정신 개조 가능성을 발견한 걸까? PDG(대통령-회장-장군)와 그의 추종자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여기 세상에 홍보를 위해 디에고가 노벨사랑상을 받기를 원하는 PDG의 계획에 초를 치는 존재가 등장하니 그는 바로 악마였다. 악마의 하수인 세라팽을 홍보전문가로 위촉한 PDG, 그리고 불의 교통사고로 학장 롬박스 교수는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머리만 남기고 죽는다. 일반적 스토리텔링을 무시한 전개인가, 부족한 나의 견해로는 도저히 이야기의 맥을 따라 잡을 수가 없다.

 

사랑을 통한 행복 기법이라는 기이한 방식을 외치는 뉴욕쉬르루아르 시청 직원들에게 잡힌 디에고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어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무대에 올라 대중들을 상대로 난장을 한 판 벌인다. 그런데 디에고를 조종하는 것이 악마였던가.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워, 도무지 이야기의 맥을 잡을 수가 없다.

 

이야기는 이제 마지막 에피소드로 접어든다. 롬박스 교수는 자신이 죽었을 때, 사랑에 빠진 암퇘지의 등에 타고 뉴욕쉬르루아르를 누비며 내레이션을 이어간다. 바다표범 디에고의 정체는 진짜 동물이 아니라 폐타이어의 변신이라고 해야 할까. 새로운 시대의 현대적 메시아는 산업적 요소와 수생적 요소의 결합이었다고 증언한다. 뉴욕쉬르루아르의 PDG는 사랑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있지만, 노벨사랑상에 빛나는 디에고의 실체는 우리가 믿는 신 안에서(In God We Trust)라는 표현으로 위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돈주머니와 직결된 문화상품들을 가득 채운 터보디젤 엔진”이란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신은 맘몬이었는지도. 그렇다면 중반에 등장한 악마라는 존재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전반적인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되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개들의 도시 뉴욕쉬르루아르에서 사탄에 빙의된 디에고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다시 부활하는데 성공했던가.

 

니콜라 드 크레시는 <천상의 비벤덤>에서 초절기교를 사용한 다양한 화법으로 실험적인 작풍을 보여 주기는 했지만, 독자로서 내가 그의 스토리텔링을 제대로 따라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도대체 이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오독을 하려고 해도 주어진 소재가 오독에 닿을 수 있게 충분해야 하는데 이미지컷으로 생략된 부분들을 채우기엔 나의 독서 능력과 사유가 아무래도 역부족이라는 느낌이다. 아니면 포스트모던 그래픽노블에 대한 나의 몰이해 탓을 해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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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02-2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상당히.난해하고 복잡한 접근 방식이었죠 . 이 책을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은 작가 뿐일지도 몰라요 .

레삭매냐 2017-02-27 22:29   좋아요 1 | URL
말씀 그대로이십니다. 너무 어려웠습니다.
제 수준으로는 아무래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그런 독서였죠.

[그장소] 2017-02-28 02:11   좋아요 0 | URL
으흣 ~ 저만 그런게 아니라니 , 이 안도감 ㅡ 레삭매냐 님 덕에 구원된 기분!!^^ ㅎㅎㅎ

cyrus 2017-02-27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소설, 영화하면 먼저 떠올리는 느낌이 ‘어렵고 난해함’입니다. 프랑스의 그래픽 노블마저도 어려우면, 할 말이 없습니다. ㅎㅎㅎ 좋게 말하면 프랑스 문화는 개성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요? ^^;;

레삭매냐 2017-02-27 22:31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익숙한 앵글로색슨 계열의 영미문화
와는 다른 라틴 문화여서 그럴까요?

프랑스 문화/문학은 잘 와닿지 않는 듯한 그런 느낌입니다.
 
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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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후 세계가 어떤지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다. 아무도 돌아온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대드 루이스의 경우는 어떨까? 소설 <축복> 속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드 루이스는 폐암 말기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다. 이제 여름인데 가을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55년 동안 철물점 주인으로 모든 이들에게 완고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으로 인정받은 그는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다.

 

미국 출신 켄트 하루프 작가는 생전에 모두 6편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축복>은 그 중에 다섯 번째 작품으로 콜로라도 주의 가상의 공간 홀트(Holt) 카운티를 배경으로 한 홀트 3부작 중에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기존에 출간된 <플레인송>이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두 번째 작품인 <이븐타이드>는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대드 루이스의 사랑하는 아내 메리는 대처에 나가 있는 큰딸 로레인을 소환한다.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가족들이 준비를 시작한다. 다만, 동성애자로 보이는 아들 프랭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족을 떠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대드 루이스의 환상으로 간간히 아들과 대면할 따름이다. 77살의 생을 마감하면서 결국 아버지는 아들과 화해하지 못할 운명이다. 대드 루이스가 힘겹게 온몸에 퍼지고 있는 암세포와 싸우고 있었다면, 옆집 버타 메이의 손녀 앨리스는 이미 유방암으로 젊은 엄마를 잃고 할머니 집에서 지내고 있다. 홀트 카운티의 과부 윌라 존슨과 에일린은 특히 그런 앨리스에게 관심을 가진다. 소녀를 데리고 외출해서 햄버거와 예쁜 옷을 사주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고 여자들끼리 발가벗고 가축수조에 들어가 한 여름을 즐기기도 한다. 버타 메이 할머니는 손녀딸에게 그들이 외로워서 그런 거라고 설명한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루이스 가족사의 한 꺼풀을 들춰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다. 아들 프랭크와의 불화에 이은 방황, 씩씩한 큰딸 로레인은 외동딸 레이니를 교통사고로 잃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대드 루이스는 오래전, 자신의 가게에서 횡령을 일삼던 클레이턴을 징벌했는데 파국적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의 아내 타니아를 몰래 돕기도 하는 인 정많은 사나이였다.

 

아마도 목사였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따온 듯한 롭 라일 목사의 일화는 또 어떤가. 덴버에서 동성애자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시골 마을로 쫓겨온 라일 목사의 주일 설교에서 한창 이라크, 아프간에서 전쟁을 치르던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설교를 하고 신도들은 박차서 교회 문을 나서기도 한다. 그의 아내는 가는 곳마다 분쟁을 조장하냐고 남편을 비난하고, 아들 존 웨슬리는 홀트 마을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자신에게 접근한 여자친구와 불장난을 하기도 하지만 그게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불장난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라일 가족의 파국도 대드 루이스의 죽음 진행 과정만큼이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엔딩 부분에 등장한 존 웨슬리의 자살소동에는 할 말이 없었다.

 

지역 교사였던 에일린도 다른 학교 교장이자 유부남이었던 어떤 남자와 로맨스를 경험했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엄마 윌라에게 남자를 소개했지만, 윌라 존슨은 면전에서 해서는 안될 말로 그를 불편하게 만든다. 과연 그런 사랑이라면 하지 않는 게 나을지 아니면, 나중에 가서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사랑을 하는 게 나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남편을 오래 전에 잃은 엄마 윌라에게 외로움을 어떻게 이겨 냈냐고 묻는 모녀간의 대화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죽을 것처럼 힘들고 외롭지만 그것 역시 다 지나가고 받아 들이게 된다고 윌라는 조용하게 말했던가. 결말에서 대드 루이스가 마침내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상심해서 슬퍼하는 메리 루이스를 유경험자로서 위로하는 심정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용감한 존슨 모녀는 라일 목사가 위원회로부터 징계를 받아 해임되고 마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과감하게 등장해서 변론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항의가 라일 목사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용감하게 항의한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에도 그리고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때도 그러지 않았느냐고 말하면서. 언제나 예언자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성경이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에 입각한 설교를 했지만 그 설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에겐 짜증나는 소리일 뿐이다. 심지어 라일 목사는 산책 중에 테러를 당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대드 루이스가 죽어가는 한가하고 조용한 한 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인간들의 갈등은 끝이 없었다.

 

켄트 하루프의 소설은 처음인데, 그는 마치 이야기의 주술사처럼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을 탁월하게 엮어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영원한 소멸인 죽음을 반주로 해서, 엄마를 잃은 소녀에 대한 주변인들의 넘치는 사랑, 가족 간의 해결되지 않는 불화, 설교로 사람들에 대한 교화를 시도했다가 낭패를 당한 목사의 이야기 등등 잔잔하면서 마음을 끄는 이야기들이 <축복>에는 가득하다. 작년에 지인의 추천으로 읽은 탐 드루리의 <반달리즘의 종언>하고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르는 시골 마을을 공간적 배경으로 해서 다양한 인물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아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름지기 가장 기본에 충실할 때, 스토리텔링도 빛을 발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축복>을 읽고 나니 그의 다른 작품 <플레인송>도 읽고 싶어졌다. 지난달에 읽다만 존 버저의 소설 그리고 로맹 가리의 소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홀트 마을 포치에 앉아 시원한 아이스티를 마시며, 해질 무렵 여름 저녁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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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22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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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강력한 결말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히틀러의 부상, 나치의 참혹한 홀로코스트를 다룬 많은 책들을 읽어 왔지만, 오늘 읽은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처럼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책은 그동안 만나 보지 못한 것 같다. 중편 수준의 분량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천페이지 짜리 소설을 능가한다고나 할까.

 

시대는 1932년, 독일 슈바벤 지방의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16세 한스 슈바르츠는 대대로 독일에서 살아온 유대인 집안의 소년이다. 괴테보다도 횔덜린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문학소년은 으레 그렇듯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고, 우정에 대한 로맨틱한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중이다. 정말 마음에 맞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노라고. 물론 본격적인 세상살이를 해보지 않은 소년의 치기 어린 상상일지도 모르겠지만, 히틀러의 집권과 동시에 벌어질 비극과 대비된 순수함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심한 소년 한스의 조용한 세계는 어느 날, 콘라딘 폰 호엔펠스라는 동갑내기 백작 가문의 후손이 전학을 오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바바로사와 마르틴 루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수한 가문의 후예는 범접할 수 없는 우아함을 배경으로 ‘선천적 자부심과 후천적 오만함의 참호’ 속에 버틴 거인 같은 존재였다. 당연히 학급에서 잘 나가는 캐비어 패거리는 콘라딘에게 접근했고 보기 좋게 거절당하는 장면을 한스는 유심히 지켜보면서 콘라딘과의 아직 시작되지 않은 우정에 대해 상상한다. 그랬으니 콘라딘이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 마치 첫사랑의 짜릿한 감정의 교류만큼이나 외톨이 한스를 자극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한스가 자신의 집에 초대했을 때, 제국 철십자 훈장 수상에 빛나는 의사 아버지가 아들 뻘 콘라딘에게 쩔쩔 매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 순간, 콘라딘과 동등한 우정을 쌓으려고 했던 한스의 동심에 쩍쩍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어쨌든 유대인 소년 한스와 귀족 출신 콘라딘의 우정은 순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문제는 한스의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의 개’라고 불렀던 총통의 등장이었다. 총통의 등장에 이어 나치즘의 세뇌작업과 선전선동이 다른 곳도 아닌 신성한 교육의 현장인 김나지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역시 큰 의미로 다가왔다. 아리아인의 한 갈래인 그리스 도리아인의 도래 이래 본격적인 그리스 문명이 시작되었고, 르네상스 역시 게르만족의 황제들의 등장에서 비롯되었다는 프로이센 출신 역사 선생님의 견강부회에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하긴 21세기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도 국정교과서 문제로 필요없는 사회적 비용을 소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현재진행형으로 말이다.

 

아직 크리스탈나흐트(수정의 밤)나 홀로코스트 같은 본격적인 유대인 박해가 시작된 건 아니지만, 순진했던 한스의 주변에 어둠의 세력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아무런 차별 없이 지내던 한스의 동급생들은 소년에게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고 결국 주먹다짐과 난투극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보니 한스의 아버지는 유대인이면서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에 대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했던가. 어떻게 보면 홀로코스트 이전에 한가한 타령일 지도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합리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다툼의 원인제공자였던 동급생을 나무라지 않고, 한스에게 유대인으로 인내를 기르라는 폼페츠키 선생의 말에 소년은 좌절한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콘라딘에게서 위로와 도움을 바랐지만, 이미 히틀러에 경도된 친구는 곁에 없었다.

 

점증하는 독일내 유대인의 압박에 심각성을 느낀 한스의 부모님은 한스를 미국의 친척에게 보내기로 결정한다. 아들을 참화가 닥치기 전에 피신시킨 대처는 옳았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 독일을 위해 싸운 당신들에게는 다른 피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한스 아버지의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 한스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동급생들로부터 두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하나는 터무니 없는 모욕적인 편지로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지만 콘라딘이 보낸 편지는 로맨틱한 우정을 이상으로 삼은 한스에게 큰 상처를 남겨 주었다.

 

미국으로 건너나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한스는 과거에 집착하는 대신 현재와 미래를 위해 살았다. 자신의 조국 출신 사람들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모국어인 독일어 대신 제2의 모국어가 된 영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의 삶이 어땠을까.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고, 독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다고 했던가. 자신이 나고 자라 그렇게 사랑했던 슈투트가르트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웃고 또 웃는 남자의 비애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렇게 나름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한스에게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독일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으로부터 도착한 인명부의 한 이름을 확인하는 것으로 소설 <동급생>은 막을 내린다.

 

다시 한 번 어떻게 해서 괴테와 횔덜린의 조국이, 그렇게 빛나는 인문정신을 담은 나라가 파멸적인 전쟁을 일으키고 인류사에서 지울 수 없는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을 창조해냈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그 바탕에는 프레드 울만이 주목하는 대로, 교육의 현장 그리고 우정 같은 밑바닥 인성을 파괴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1930년대 독일의 십대 소년들이 유신론에 대해 논쟁하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리의 교육현장에서도 그런 의제에 대한 토론이 있었던가.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32년으로부터 자그마치 85년이 지났지만, 그런 모습은 볼 수 없는 삭막한 교육현실에 한숨부터 나올 따름이다.

 

한스의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의 개’라고 부르는 희대의 독재자를 발할라에서 부활한 위대한 조국의 영도자라고 생각하고 러시아의 대초원에서, 열사의 아프리카 사막에서 수없이 죽어간 수백만 독일 청년들에 대한 모습과 홀로코스트를 진행한 수많은 아이히만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나만의 상상이려나. 스탈린 대신 히틀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하는 콘라딘의 입장은 선거라는 방식으로 독재자를 선출한 독일 시민의 원죄에까지 다다른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 한스 슈바르츠가 알게 된 결말의 진실은 작가가 준비해둔 회심의 카드였다.

 

<동급생>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도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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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읽고 싶은 모든 책들을 다 살 수가 없어 지난 토요일날 도서관에 가서 류전윈 작가과 옌롄커 작가의 책들을 네 권이나 빌려 왔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품절, 절판되어 도서관이나 중고서점 말고는 구할 수가 없는 책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책을 구할 수 있을 때 사야겠다는 자기합리화가 작동되기도 한다. 사실 옌롄커 작가의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이마 사둔 책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되어 도무지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도서관에서 빌렸고, 작가의 말대로 그다지 많은 분량이 아니라 하룻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다 읽은 옌롄커 작가의 책이다. 읽게될 책은 언제고 읽게 되는구나 싶었다. 참고로 <풍아송>은 한 절반 가량 읽었다. 소장한 책이다 보니 독서순위에서 좀 밀린 느낌이라고나 할까.

 

소설의 제목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국 말로는 “웨이 런민 푸우”라고 했던가. 그 유명한 마오쩌둥 주석의 연설에서 따온 제목으로, 소설의 표지가 암시하듯 혁명과 정치와는 상관없는 두 남녀 간의 상열지사를 주로 다룬 소설이라 상당 부분 삭제되어 출간되었음에도 단박에 판금조치를 받은 악명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판금조치에 고무받은 이들에게 더 큰 사랑을 받았음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올해 28세 우다왕은 사단 중대 소속 취사원이자 공무원으로 사단장과 사단장의 가정에 복무 중이다. 농촌 출신으로 성공의 사다리를 밟기 위해 군을 선택한 이 청년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성실함을 상부로부터 인정받아 고달프기는 하지만 성공이 보장된 사단장 취사원으로 맹렬하게 오늘도 밥을 짓고, 채소밭에서 채마를 기르기에 여념이 없다. 문제는 사단장의 사모이자 양저우 출신으로 군병원에서 간부였던 류롄의 존재다. 우다왕보다 고작 4살 많은 미모의 사단장 사모는 사단장이 사용하는 고배율 망원경으로 취사원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한다. 뭐 이 정도면 대충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 지는 다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게다가 사단장이 장기간에 걸친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니 스파크만 당기면 불이 활활 타오를 것 같은 두 남녀에게 만반의 준비가 다 된 것처럼 보인다. 말하지 말 것을 말하지 않으며, 묻지 말아야 할 것도 역시 묻지 않는 그야말로 충성스러운 남자 우다왕은 자신을 누님이라고 부르라는 류롄의 파상적 육탄공세에 도저히 이겨낼 방법이 없다. 그나마 남은 충성스러운 사회주의 혁명전사의 패기를 가동해서 유혹에 간신히 저항해 보지만, 류롄이 자신을 해고시키겠다는 협박에 못이겨 결국 누님의 구애에 넘어가고 만다. 아니, 그게 아니라 옌롄커 작가가 구성한 대로 모든 것이 준비된 배우로서 철저하게 예비된 무대에 오를 태세를 마친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에게 도래한 류롄과의 성애는 과연 축복이었을까. 미래에 대한 혼돈과 무지 속에서도 우다왕과 류롄은 거침없이 쾌락 속으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쩌면 금지된 것에 대한 격정이 폭발했을지도.

 

마오주석이 남긴 어록을 모두 외울 정도로 철저한 당성을 자랑하는 사단장 사모 류롄도 침대에서는 한 명의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혁명정신이나 정치도 남녀 간의 불꽃 튀는 상열지사를 막을 수 없다는 본성에 기인한 작가의 에로틱한 서술은 작년에 읽으면서 낯이 뜨거울 정도였던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의 그것을 능가한다. 여전히 관제 하에 있는 중국에서 왜 이 소설이 판금조치를 받았는지 바로 이해가 갔다. 소설에서 우다왕은 입버릇처럼 자신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겠노라고 주절거리는데, 왜 사단장의 사모라는 특정 인민을 위해서는 (성적인 서비스로) 봉사할 수 없냐고 매혹적인 류롄이 묻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해방군 출신 작가 옌롄커는 이런 역설적 방식으로 개인의 욕망을 얽매는 사회주의 본질을 겨냥한 강속구를 투구한다.

 

또 한편으로, 작가는 우다왕의 존엄성에 초점을 맞춘다. 허난성 시골 마을 우자거우 출신으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전사 우다왕은 위중한 어머니의 바람대로 아내를 얻기 위해 사랑 없는 결혼에 골인하게 되고, 첫날밤의 방사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군 간부가 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마치 아내와 아이를 도시인으로 만들기 위한 결혼생활에 사랑이 존재할 리가 만무하다. 우다왕이 군에서 당원가입과 간부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에 대한 댓가에 대한 조건으로 몸을 허락하는 아내는 남편의 존엄을 가열차게 짓밟는 것이다. 반면, 류롄 누님과의 격정적인 사랑은 어떠한가. 그것은 마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릭 데커드와 레이철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지 않은가.

 

옌롄커 작가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지엄한 마오주석의 말이 담긴 팻말을 두 남녀가 그야말로 짐승 같이 원초적 성애의 시그널로 사용하는 엄청난 패러디를 작성했다. 한술 더 떠서, 우다왕과 류롄이 서로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사단장 거처인 원자 1호에 진열된 마오 주석의 석고상을 부수고, 초상을 찢고 훼손하고 심지어 못질까지 마다하지 않고, 마오어록을 갈기갈기 찢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인다. 이 정도면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런 격정이 지나간 후에, 도래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은 서글프다. 류롄과의 격렬했던 사랑이 한단지몽 같은 부질없는 꿈이었다면 우자거우에 있는 아내와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남자의 운명은 엄존하는 현실이다.

 

나에게 옌롄커 작가는 광장에서 사람들을 상대하는 저글러(juggler, 곡예사) 같다는 느낌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거창한 구호로 무장한 사회주의 혁명이나 정치도 사랑과 존엄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능가할 수 없다는 걸까. 평생 잊을 수 없는 가히 충격적인 체험을 한 우다왕과 류롄은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리라. 위정자나 기득권층은 분명 이런 위험한 곡예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같은 독자 친구들로서는 이런 저글링이야말로 최음제 같은 책읽기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놀랍다. <풍아송>을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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