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류진운 지음, 김태성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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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빚이 많은 시절이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핸드폰이다. 예전에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도 약속해서 만나고, 소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생활 속에 핸드폰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그만큼 말빚이 는 기분이다. 소통의 수단인 핸드폰, 아 이제는 진화해서 모바일 폰 시대라고 해야 하나, 같이 있어도 대화를 나누기보다 온갖 정보와 놀거리, 볼거리들을 제공하는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마치 이런 세태를 예언이라도 하듯 중국 당대 작가 류전윈은 손전화를 매개로 한 멋진 소설을 탄생시켰다.

 

<나는 유약진이다>라는 책의 제목은 그전에 알고 있었다. 웅직지식하우스에서 꼴랑 5권 발표되고 시리즈가 중단된 중국 당대 작가선 중의 하나였는데, 원래 출간예정 중이라고 했던 나머지 두 권은 아예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 알라딘에서 로쟈 선생의 중국 당대 작가 포스팅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해서 집에서 잠자고 있던 옌롄커 작가의 <풍아송>을 필두로 해서 몇 권의 책을 구해다 읽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시장 논리는 엄정해서 안 팔리는 책들은 바로 품절 절판의 운명이다. 류전윈 작가의 <핸드폰>도 마찬가지다. 다행이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가 있었다. 아마 난 또 옌롄커 작가와 류전윈 작가의 책사냥에 나서게 될 것 같다. 아니 이미 나서고 있을지도.

 

역시나 서론이 길었다. 중국에서 발표되었을 당시, 많을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갔다는 그런 후문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파급력을 가진 소설이라는 광고 카피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 그래? 역시 이 정도는 돼야 호기심을 자극한다. 작가도 한국판 서문에서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의견을 피력했던가. 중국에서 만큼 인기가 없어서 아마 그럴 일은 없었겠지. 암튼 소설 <핸드폰>에서 잘 나가는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이자 인기스타 옌셔우이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전개된다.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건의 발단이 옌셔우이가 핸드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기분에 못 이겨 말을 함부로 내뱉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 후반으로 갈수록 그게 아니라 어려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옌셔우이의 성정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1950년대 말 마오쩌둥은 서방 공업국가들을 따라 잡기 위해 중공업위주의 경제부흥운동인 대약진운동을 무리하게 전개했다가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내는 처참한 실패를 불러왔다. 주인공 옌셔우이의 어머니도 이런 대약진운동의 직접적 피해자였던 것이다. 시골 마을에서 그렇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수하에서 자라 도시에서 방송국 PD로 그리고 다시 방송 사회자로 성공한 옌셔우이는 아내 위원지엔과의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팜므 파탈 같은 출판사 편집자 우유에와 불장난을 하다가 그만 그 사실이 아내에게 발각되고, 연쇄적인 거짓말 때문에 파경에 이른다. 다시 문제들을 되짚어보면, 옌셔우이의 부주의한 핸드폰 관리가 문제가 아니라 반복되는 그의 부정(不貞)과 거짓말이 진짜 문제였다.

 

옌셔우이의 방송 프로그램인 <진실을 말한다>의 중심을 잡아주는 교수 페이모 역시 선의(?)로 옌셔수이의 거짓말 작전에 참가했다가 문제를 최악으로 치닫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항상 느끼는 점이지만, 소설 같은 문학세계에서 거짓말이 종국에 가서 가져올 파국은 언제나 예상 가능한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다. 한편,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옌셔우이는 지식인 페이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자신은 광대고, 라오페이(페이모) 선생은 공자라는 설명에서 그들의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은 방송에서 진실을 말한다고 하는데, 그의 일상은 순 거짓말로 점철되어 있지 않았던가. 류전윈 작가는 이런 역설적인 메시지를 작가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핸드폰>으로 류전윈 작가의 책은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소설 작법이 특이하고 작가의 흥미를 자극하는데 있어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 어떤 결정적 사건을 독자 앞에 툭 던져 놓고, 이미 벌어진 사건의 전개를 어떻게 해서 주인공이 알게 되었는지를 풀어가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주인공의 입장에 독자를 대입해서 객체와 주체의 일원화를 추구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현재는 도시사람이 되었지만, 출발은 농촌이었던 중국 사람들의 현실을 전달하는데 있어서도 출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성공해서 모두가 꿈꾸는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뿌리는 시골 고향에 가 있다고 해야 할까. 옌셔우이가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위해 담장을 새로 쌓고 집을 수리하는 장면은 고대 이래로 이어져온 금의환향의 개발시대 버전이지 싶다.

 

소설 <핸드폰>은 마지막 장에서 산시 성 옌씨 마을에 살던 옌셔우이의 할아버지 옌바이하이가 고향에서 2천여 리나 떨어진 내몽골 커우와이에서 거세일을 하게 된 저간의 사정과 고향에서 보낸 혼인하라고 메시지를 수년 만에 듣게 되어 한달음에 집으로 뛰어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며 막을 내린다. 그전에 고향의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은 옌셔우이는 자동차로 단박에 달려가지 않았던가. 비록 임종은 못했지만. 할아버지와 손자 시대의 간극은 그만큼 엄청나다는 방증일까.

 

예전 농경사회에서는 생활에 꼭 필요한 말들만 하며 살았는데, 현대사회에서는 하루에 수천 마디의 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류전윈 작가는 냉정하게 현 세태를 꼬집는다. 예전에 비해 말의 가치를 따지자면, 우리가 구사하는 언어에는 너무 불필요한 말들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예전과 달리 사회가 확장되고, 우리생활의 접촉면이 다양해지고 많아져서 상대적으로 많은 말을 하게 된 것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말이 많아져서 삶의 피로도도 높아진 게 사실이 아니던가. 스마트폰이나 이메일을 통해 전달되는 원하지 않는 수많은 메시지의 홍수는 이제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 지경이다. 대화와 소통도 좋지만, 모름지기 우리의 선인들은 과유불급이라는 말로 매사에 과함을 경계하라고 말했다. 물론 삶에서 처신을 올바르게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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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중국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시는군요.

스마트폰에서 나누는 대화는 사실 진심까지 표현하는 게 어렵고 불가능해요. 스마트폰에서의 언어는 문자와 기호(이모티콘)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언어의 의도를 읽을 수 없어요.

레삭매냐 2017-02-13 15:12   좋아요 0 | URL
네... 지난 주엔가 로쟈 선생의 당대 중국문학
포스팅을 보고서 열심으로 옌롄커 작가와
류전윈 작가 위주로 읽고 있답니다.

게다가 품절/절판된 책들도 많아서 사냥하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물론 책의 완성도도 상당하구요.
 
침묵 다시 읽고 싶은 명작 2
엔도 슈사쿠 지음, 김윤성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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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추위를 피해 아무 것도 소비하지 않고, 잠시 조용하게 책을 보러 극장에 갔다가(?)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연출한 영화 <사일런스>의 트레일러를 보게 됐다. 그리고 영화 <사일런스>가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영화화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고, 곧바로 읽던 책을 다 읽고 나서 이미 한 번 읽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 읽었을 적에는 솔직하게 말해서 그 무거움 때문에 리뷰를 쓰지 못했다. 두 번째 도전에서 책에 대한 잔상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남겨 본다.

 

17세기 도쿠가와 막부가 전국을 통일한 시절, 막부는 서구에서 유입된 기독교 전파를 금한다.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기독교 사상이 사무라이가 신분제의 최상위를 차지하는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개항장이었던 나가사키의 수령 이노우에 지쿠고노가미는 외래 종교가 일본에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해외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의 활동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기존 신자들을 박해하기에 이른다. 특히 “후미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배교와 구덩이에 매다는 형벌로 배교를 강요하는 이노우에의 악명은 소설의 주인공 세바스티안 로드리고의 조국 포르투갈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다.

 

한 때 수십만 명의 신자를 자랑할 정도로 동방의 모범 선교지역이었던 일본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게다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신념의 사나이였던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문에 충격을 받은 세 명의 청년 신부들이 기독교 신앙이 소멸해 가고 있던 일본을 향해 목숨을 건 항해에 나서게 된다. 동방 선교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 고아와 중국 마카오를 거쳐 정크선을 타고 로드리고와 프란치스코 가르페 신부는 일본 도모기 마을에 도착하기에 이른다. 원래 의기투합했던 세 명 중, 호안테 신부는 병으로 마카에오 잔류하게 되었다.

 

소설 초반에 작가가 저술한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가 단순한 선교 활동의 위축이나 개인의 좌절이 아니라, 동양에 대한 “유럽 전체의 신앙과 사상의 굴욕적인 패배”로 받아 들여졌다고 기술되어 있는 특히 눈길을 끌었다. 지배계급에 대한 과다한 연공과 부역에 시달리는 일본 민중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기독교의 본질적 구원에 대한 이슈가 아니라 거의 종교적 이데올로기 수호를 위해 세 명의 신부들이 파견되었다는 것이 위험천만한 파견의 진짜 목적이 아니었을까. 로드리고 신부의 갈등의 원인은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문제점을 안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목적으로 살아온 신부들에게 배신자 가룟 유다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 기치지로의 존재는 그저 귀찮을 따름이다. 도모기 마을에 은신하며, 6년의 박해기간 동안 아무도 받지 못한 세례며 고해성사 같은 가톨릭 제의를 집전하며 신부들은 자신들을 종교적 불모지에 파견한 그리스도의 가늠할 수 없는 은혜에 감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곧이어 벌어지는 일본 민중들에 대한 끔찍한 박해(수책형)를 직접 목격하면서 이 모든 사건에 침묵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며, 심지어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신이 부재할 지도 모른다는 궁극적 두려움이라고나 할까.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며, 도모기 마을 부근의 오두막에 은신해 있던 로드리고와 가르페 신부는 옥죄어 오는 관아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지만 결국 체포되고, 주인공 로드리고는 한 때 자신들을 따르던 신자들의 죽음과 그들의 죽음을 만류하려던 가르페 신부가 물에 빠져 죽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도 한다. 은전 300냥에 자신의 팔아먹은 기치지로에게 끝없는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배교한 신자 기치지로는 자신을 약하게 만들어 놓고, 순교자의 길을 따르라는 건 무리라며 로드리고 신부를 쫓아다니며 괴롭힌다.

 

관아에 체포된 로드리고 신부는 일본에 도착하기 전부터 각오한 대로 일본 위정자들의 요구대로 배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를 각오한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자신의 스승이자 믿고 따랐던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면서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쩌면 아직 보지 못한 영화에서도 마틴 스코시지 감독이 가장 주목한 부분이 이 지점이 아닐까 싶다. 선배 배교자는 기독교가 일본에 들어와서, 본질을 잃고 일본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구덩이에 매달린 가혹한 형벌을 받으며 죽어가고 있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하라는 설득을 계속한다. 신자들에게 복음과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왔다는 로드리고 신부의 존재 자체가 길 잃은 양을 위협하는 형세가 된 것이 아닌가. 이런 역설 가운데, 한 때 죽어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로드리고 신부의 양심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순교하는 것이 최선일까? 아니면 구덩이에 매다는 형벌을 받고 있는 신자들을 구하기 위해, 페레이라라는 이름 대신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아내와 자식까지 하사 받은 사와노 추안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

 

소설에 등장하는 일본에서 가톨릭이라는 뿌리를 뽑아내기 위해 교묘한 방식을 동원해서 신부들을 배교시키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이노우에 지쿠고노가미도 주목할 만한 캐릭터다. 그는 신자들을 마구잡이로 처형하는 박해방식이 오히려 기독교 포교를 순교차원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해외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을 배교하게 유도하는 혁명적 방식을 채택했다. 단순히 성화를 밟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성화에 침을 뱉고 성녀 마리아를 모욕하는 행동으로 신자들로 하여금 다리를 끊고, 배를 불살라 되돌아갈 곳을 원천봉쇄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영주 이노우에는 일본을 네덜란드와 영국,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등 서구 열강에 열렬한 구애를 받는 남자라는 묘한 비유를 들면서 서구의 문물이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화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기도 한다. 이 지도자를 통해 보여지는 모습이야말로 개항 이래, 일본 국가가 가진 정체성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엔도 슈사쿠는 예리하게 짚어냈다.

 

같은 책을 두 번 읽었어도 대가의 걸작은 역시나 리뷰로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느낌이다. 그래도 일단 영화를 보기에 앞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됐다고 위로하고 싶다. 다만, 영화가 선전하는 대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아니고 실화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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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03-15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 배경이 제가 좋아하는 쪽이라서 꼭 읽어봐야 겠어요 . 바다와 독약 먼저 읽고나서요 . 좋은 책 추천 감사해요!^^

레삭매냐 2017-03-16 09:38   좋아요 1 | URL
<바다와 독약>도 대단히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침묵>이 엔도 슈사쿠의 대표작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장소] 2017-03-16 16:08   좋아요 0 | URL
우와~ 알겠습니다. 바다와 독약이 책이 두껍지 않으니 후딱 끝내고 침묵으로 쓩 해보겠습니다~^^ 추천 , 조언 감사해요!^^
 
나의 형, 체 게바라
후안 마르틴 게바라 & 아르멜 뱅상 지음, 민혜련 옮김 / 홍익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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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에 대한 이런저런 글들을 읽어 왔다. 전설적 게릴라 체 게바라의 정전처럼 되어 버린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볼리비아 일기까지. 그는 생전에 남아메리카 혁명의 전진기지로 생각했던 볼리비아 냥카우아수 라 이게라에서 볼리비아 정부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기 전까지 불의에 고통 받는 인민들의 해방을 꿈꾸는 혁명가였다. 39살의 나이로 지상에서 영원으로 떠난 혁명가의 이야기는 당연히 전설이 되었다. 과연 그는 전설에서처럼 완전무결한 인간이었을까?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친동생이었던 후안 마르틴은 영원이 된 혁명가를 다시 지상으로 소환한다. 가족이 쓰는 게바라 전기는 죽음에서 출발해서 몰락한 부르주아 출신으로, 유년 시절부터 심각한 천식을 앓았던 에르네스토의 삶을 관조적 시각으로 추적한다. 탱고 무용수였던 게라바의 아버지는 천생 한량이었다. 항상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돈벌이에 나섰지만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서는 부적격한 남자였다. 대신 유복한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자 수녀원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은 게바라의 어머니는 훗날 혁명가로 성장하는 아들에게 지대한 미쳤다고 동생은 증언한다.

 

대학에서 원래 공학도였던 에르네스토는 22살에 처음으로 떠난 남아메리카 방랑에서 “양키” 미국제국주의의 주변국가로 전락해서 신음하는 동포들의 참담한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의 조국 아르헨티나 역시 군사독재와 횡행하는 매판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남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에르네스토는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이 미국 CIA의 공작으로 전복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혁명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그의 혁명 활동은 망명지 멕시코에서 쿠바 출신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1959년 1월,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의 지난한 무장투쟁 끝에 악랄한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키는데 성공한 삼십대 초반의 에르네스토는 일약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외국인이라는 신분으로 신생 쿠바의 산업부장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그는 콩고에 잠입해서 게릴라 활동에 참가하기도 했고, 무대를 볼리비아로 옮겨 남아메리카 해방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던 중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됐다.

 

이 정도가 대략적으로 동생 후안 마르틴이 증언하는 에르네스토에 대한 초상이고, 후반부는 불순분자로 찍혀 조국 아르헨티나에서 장장 8년에 걸친 옥살이를 한 후안 마르틴의 증언이 이어진다. 혁명가의 가족에겐 독재정권에 부역하거나 아니면 먼저 간 혁명가의 길을 따르는 선택 밖에 없었던 걸까? 개인적으로 문득 왜 에르네스토는 조국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잘 알면서도 조국보다 쿠바나 멀리 콩고 혹은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시도하려고 했던 걸까? 청렴결백했던 에르네스토는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아바나에서 가족들과 재회를 만끽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럼주를 제조하는 바카디 사와 특혜를 이용해서 사업을 시도하려고 하자 단칼에 아버지를 본국으로 소환시키기도 했다. 한편,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로 “추악한 전쟁”이라 불리던 암울한 군사독재를 종식된 아르헨티나 옥살이에서 석방된 후안 마르틴은 쿠바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도 했지만, 모든 게 일장춘몽으로 끝나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원에서 지상으로

 

과연 혁명가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피델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의 남은 가족들을 확실히 후대했다. 저자인 후안 마르틴은 한사코 허망하게 죽은 형의 죽음을 상업화하는데 반대했지만, 자본주의 3.0 시대에 볼리비아 라 이게라가 관광지가 되고, 그동안 환대받지 못했던 조국 아르헨티나에서도 전설적 게릴라의 자취를 따라가는 관광상품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볼리비아 정글에서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과연 죽었는지 유족들이 시신을 확인하지 못한 점도 체 게바라가 “성 에르네스토”가 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이 목숨을 바친 쿠바 혁명대의는 어떨까? 구 소련이 붕괴하면서 공산권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세계 초강대국 미국와 1962년 이래 반세기 넘게 엄정한 대결구도를 보이던 쿠바는 마침내 오바마 정부 시절에 미국과 화해하기에 이른다. 작금의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그런 밀월관계가 지속될 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들지만, 미국을 괴롭히던 눈엣가시 쿠바가 드디어 자본주의에 대한 문호를 개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억압구조를 후안 마르틴은 비판하면서, 오늘날에도 죽은 형의 사상과 그가 유산으로 남긴 이미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역설적으로 그의 이미지들이 상업적으로 왜곡되어 소비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거리에서 저항의 상징이 된 체의 이미지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체 게바라가 권력의 횡포와 자본의 착취에 맞서 무장투쟁에 나선 반세기 전 혁명가이자 완전에 가까운 세계인이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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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이야기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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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만난 노숙인 양반의 다리를 주물러 드린 적이 있다. 밤이 늦도록 무언가 오래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그놈의 블랙아웃 덕분에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 무슨 이유 때문인진 몰라도 서로 유쾌해 했던 잔상만 남아 있다. 그게 내 인생의 유일한 노숙인과의 접점이었다 지금까지는.

 

지난 설날 연휴 기간에 존 버저의 <킹>을 읽었다. 존 버저는 평생 모두 8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그 중에 7번째 작품으로, 노숙인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나는 다시 소설로 그렇게 노숙인을 만났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는 공항의 경비견 출신의 이름도 멋진 “킹”이다. 소설리스트 추천으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리긴 했지만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반납했고, 새해 들어 존 버저의 부고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역시 책읽기에는 강력한 동인이 필요한 모양이다.

 

유럽의 모처에 생 발레리란 이름을 가진 곳에 킹과 그의 주인인 비코와 비카가 살고 있다. M.1000 도로가 지나가고 도처에 쓰레기가 널려 있으며 공해와 소음으로 범벅이 된 곳이 바로 그네들 삶의 안식처다. 우리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 생 발레리 쓰레기산에 사는 이들도 제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아무 일도 안하는 거에는 반대하는 유일한 규칙이 있었노라고 거리의 철학자 킹은 조용한 목소리로 되뇐다. 아무 것도 안할 수 있는 자유는 그네들에게도 허용되지 않는구나. 뤼크와 함께 한 에피소드에게 킹은 파트너로 정육점에서 큼지막한 스테이크 고기를 훔친다. 누군가의 물질적 손해가 다른 이들에겐 저녁 한때의 무용담과 유쾌함 그리고 포식으로 전환된다. 물론 노숙인들의 삶이 모두 그렇게 유쾌한 에피소드로 가득한 건 아니다. 앙팡테리블을 능가하는 꼬마 악당들은 거리의 노숙인에게 불을 붙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끔찍하다.

 

킹의 주인 잔니 비코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으로 한때 발명가이기도 했고, 공장을 소유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쓰레기산에 오두막을 짓고 잭에게 자릿세를 내며 살아간다. 가수 출신으로 보이는 파트너 비카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으로 한 때 화려한 미모를 자랑했지만 역시 형편은 비슷하다. 그들은 아무도 사고 싶어 하지 않는 밤을 구워 팔고, 남의 집 정원의 수선화를 캐다가 거리에서 판다. 노숙인들에게 겨울 추위야말로 가장 무서운 존재다. 판지로 만든 지붕을 이고 사는 비카와 비코 그리고 킹은 잠이 최고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상시적인 식수난은 문젯거리도 아니라고 한다.

 

소심해서 거리에서 팔려고 내놓은 무나 밤을 사라고 제대로 외치지 못하는 비코 아저씨에게 쾌활한 성향의 비카 아줌마는 즉석에서 벨리니 공연을 하겠다고 협박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걸하는 비코 아저씨. 그녀의 목소리를 파는 게 싫다며, 거리의 생활을 접고 암스테르담의 오빠에게 돌아가라는 비코의 간절한 부탁에는 어쩌면 곧 일어날 파국에 대한 예지가 숨어 있었던 걸까.

 

열댓명 남짓한 노숙인들이 거주하는 잭의 코트에 확성기와 탐조등으로 무장한 전경들이 들이 닥친다. 어디서 많이 목격한 장면이 아니던가. 개발과 이윤추구 그리고 재산권행사라는 자본의 무지막지한 논리 앞에 이들의 생존이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궤도 차량과 립헬 기중기로 깨끗하게 코트를 밀어버리고, 집행에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러운 노숙인들을 시설로 보내기 위해 야만적인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결말은 묘한 기시감을 자아낸다.

 

존 버저의 글들은 상대적으로 짧아서 술술 익히는 편이다. 어쩔 땐 마치 산문이라기 보다 하나의 운문을 대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가 다루는 주제들은 가볍지 않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실제로 저자는 스페인 알리칸테 지역의 노숙인들의 삶을 바탕으로 해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피상적 관찰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에까지 도달한 마르크스주의자의 깊은 성찰이 곳곳에서 돋보이는 작품이다. 단지 그들의 삶을 문학적으로 다룰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각에서 보이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일까? 자본의 소유 유무, 불안정한 거주 문제 그리고 가난이 불러온 인간 존엄성 상실 같은 문제들은 최근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간접 체험하지 않았던가. 소설 <킹>의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경비견 킹의 시선으로 치환돼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같은 인간도 아닌 개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간들의 이야기라니. 어쩌면 그러한 존재의 가치는 동물이 인간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작가는 던지고 싶었던 걸까? 어떤 존재의 우월성에 대해 따지기보다 상대적 시선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고 믿고 싶다.

 

소설 <킹>을 통해 나와 다른 존재를 내가 사유하는 바운더리에 넣는 게 얼마나 난망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그들은 내 삶의 바운더리에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실천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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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03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겉모습에 대한 편견 때문에 타인을 나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대합니다. 사실 레삭매냐님이 들려준 경험담을 보면서도 ‘술 취한 상태에서 노숙인을 만나면 위험하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이 생각 속에 ‘노숙인은 위험한 존재‘라는 선입견이 있었어요.

레삭매냐 2017-02-03 16:52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다 가물가물하네요 -
지난 달에 열심으로 존 버저의 책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중고서점에 잘 나오지 않는 책이라 하는 수 없이
사서 읽었네요...
 

 

감상일 : 2017년 1월 30일 월요일

 

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감상했다. 감상에 대한 단평을 남기자면, 명불허전이었다.

 

영국 출신의 노장 켄 로치 감독은 서구사회에서 가장 선진적인 복지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조국 영국의 현실에 대해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분)의 일상에 대한 카메라 리포트로 대신한다. 영화의 시작은 꼬장꼬장한 노친네 댄이 실업수당(의료 수당)을 받기 위해 속칭 의료 전문가와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미 국가가 맡아서 해야 할 사회복지도 민영화돼서 미국 회사가 도맡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댄의 입을 통해 알게 된다. 마이클 무어의 <식코>를 통해 알고 있는 것처럼, 건강보험회사가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보험금 지급을 막으려는 것처럼 의료 전문가 역시 댄의 담당의사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당신은 아직 일할 수 있으니, 실업수당 받아먹을 생각을 하지 말고 일자리를 구해 일하라!

 

시작부터 자본주의 시스템의 냉혹한 현실은 관람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국가에 기댈 생각은 하지 말고 스스로 자력갱생하라. 그 뒤에는 어처구니 없는 사회복지 시스템의 현실이 줄줄이 등장한다. 담당자와 통화하기 위해 자그마치 1시간 58분이나 자신의 비용을 들여 대기해야 하는 현실. 참다 못한 우리의 용사 댄이 복지부를 찾아 갔지만, 온라인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면담조차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무조건 온라인으로 신청서를 작성하란 전형적인 공무원 스타일의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그런 그를 도우려는 앤을 갈구는 상사. 그렇다, 우리가 신봉하는 자본주의 3.0의 시스템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능률을 가장한 자본의 확대와 이윤 추구일 뿐이다.

 

평생 목수일만 해오면서 살아온 노친네가 어찌 온라인 신청서를 작성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와중에 댄은 역시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왔다가 정시에 출석하지 못해 제재대상에 오른 미혼모 케이티 모건(헤일리 스콰이어 분)과 그녀의 딸 데이지 그리고 딜런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상식적인 항의는 깔끔하게 무시되고, 오로지 원칙만을 주장하는 슈퍼바이저에 의해 내쫓긴다. 케이티를 도우려는 댄의 노력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직장도 없이 런던의 방 한칸짜리 노숙인 쉼터에서 살다가 뉴캐슬로 이주한 케이티의 앞날은 암담하기만 하다. 당장 자신의 앞가림도 어려운 댄은 그런 케이티네를 돕는다. 돈없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적선보다 이웃의 그렇게 따뜻한 연대라고 감독은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강압적 조언에 댄은 도서관에 가서 컴퓨터로 온라인 신청서를 작성하는 법을 배우고, 이력서 쓰는 강좌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삶의 대부분을 오프라인 스타일로 살아온 남자에게 이런 온라인 환경은 폭력적이고 적대적일 따름이다. 댄이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이는 동안, 케이티는 아들 딜런의 스트레스 증후군을 달래야 하고 신발 깔창이 떨어져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는 데이지의 고충도 해결해 줘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댄과 함께 찾은 무료식품보급소에서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깡통음식을 그 자리에서 까먹기도 한다. 우리네 깔창 생리대처럼 그녀도 생리대가 필요하지만, 살 돈이 없다. 결국 마트에서 생리대를 훔치다가 잡히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도대체 참을 수 없는 가난의 끝은 어디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렇게 모욕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켄 로치의 카메라는 집요하게 추적한다.

 

미혼모에 무학력 그리고 부모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케이티는 결국 마트에서 자신을 잡은 아이반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몸을 팔기에 이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댄이 그녀를 찾아가 억장이 무너진다며 호소한다. 정말 이게 비극의 끝일까 싶을 정도다.

 

한편, 댄의 이웃 청년 차이나가 세계화와 관련된 돈 버는 방식에 대해서도 감독은 예리한 비판의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중국 광저우에서 스탠 리를 통해 시내에서 팔리는 150파운드짜리 운동화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 입수해서 절반 정도인 80파운드에 팔겠다고 한다. 자신의 집 쓰레기조차 제대로 치우지 않는 차이나(세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막스 밀리언이라는 가명을 사용한다)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 안착한 댄의 선배로 그려진다. 그런 차이나가 고지식하고 꼬장꼬장한 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여기서도 없는 사람들끼리의 연대는 착실하게 이루어진다. 며칠 동안 온라인 신청서 때문에 앓던 골치를 차이나는 단박에 해결해 준다.

 

100분 남짓한 짧은 영화 속에서 켄 로치는 상상 이상의 많은 이슈들을 끌어 들여 영화를 보는 이에게 묻는다. 이게 정녕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이냐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21세기에 창궐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모두를 위한 공존의 시스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 도태된 이들은 모두 배제시키는 그런 냉혹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이 아닌가. 디지털 시대에 낙오된 다니엘 블레이크의 모습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래 우리의 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만 아찔해져 버렸다. 지금도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가 미래 세계에 획기적으로 생긴다는 보장도 없지 않는가. 자본주의 순환을 위한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신화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빚으로 늘린 가계부채가 결국 언젠가 모두가 감당할 수 없는 시한폭탄이라는 걸 알면서도 개선에 나설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이 순간만을 모면하려는 우리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다니엘 블레이크나 케이티 모건의 모습이 저 멀리 영국에서 벌어지는 일만은 아닐 거라는 점에서 비극의 확장은 그만큼 공감대를 형성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영국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아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이 생기고, 21세기 서울의 한복판에서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작가가 나오는 마당에 아직도 자력갱생을 해야 한다는 타령의 칼럼을 생산해내는 현실에 나는 절망한다. 내가 이 영화를 통해 얻은 메시지는 간단하다. 바로 없는 사람들끼리의 각성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댄과 케이티, 차이나 그리고 상사에게 갈굼당하는 앤 같이 힘없는 다수의 연대야말로 우리를 개가 아닌 인간답게 만들어줄 마지막 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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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7-01-3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bbc 다큐를 보는 느낌은 <스틸 라이프> 마찬가지였습니다. ^^

레삭매냐 2017-02-02 15:03   좋아요 0 | URL
오오 지금 막 <스틸 라이프> 트레일러를 봤습니다.
이 영화도 찾아서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