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들의 역사
마야 룬데 지음, 손화수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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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소설이다. 미래세계에 막시류에 속하는 벌들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가정 아래 쓰인 노르웨이 출신 마야 룬데의 데뷔작 <벌들의 역사>는 인류가 생각하는 미래가 항상 밝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어쩌면 디스토피아일 수도 있다는 가정으로 출발한다. 노르웨이에는 해리 홀레 경감으로 유명한 요 네스뵈만 있는 줄 알았는데, 마야 룬데 같이 새로운 작가도 있구나 싶었다. 새로운 작가의 책을 읽는 도전은 언제나 즐거울 따름이다.

 

<벌들의 역사>의 주인공은 다음의 세 명이 맡았다. 미래, 과거 그리고 가까운 현재 세계에서 각각 중국 쓰촨성의 인공수분 노동자 타오, 영국 하트포드셔의 학자 혹은 상인 윌리엄 그리고 미국 오하이오 오텀힐의 조지. 우선 세상에 존재하는 식물들의 수분을 그동안 도맡아 오던 벌들과 온갖 날벌레들이 전멸하자 이제 인간의 노동이 자연이 하던 일을 맡아 하게 된 시절이 됐다. 단순 반복의 노동에 시달리는 타오는 아들 웨이원에게만은 자신이 하는 일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한다. 이제 고작 세 살짜리 아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전해 주기 위해 밥풀로 숫자 세는 법을 알려 주려고 하는 그녀의 노력이 눈물겹다. 다른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인공수분) 인구대국 중국에서는 순전히 인간의 노동력을 이용해서 가능하다는 설정도 눈여겨 볼만하다. 8살 어린 나이의 어린 아이들도 노동에서 예외는 아니라는 점도.

 

다음 주자는 잉글랜드에서 병상에 누워 있는 한 때 람 교수의 촉망받는 제자로서 조교이자 동물학자였던 윌리엄이다. 하지만 아내 틸다를 만나 자그마치 8명이나 되는 자제들을 두게 되면서 학문보다 생업에 더 힘쓰게 되고, 씨앗 유통 상인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런 제자를 람 교수는 돼지 새끼라며 모욕하고 그 충격으로 조지는 자리에 눕게 된다. 마지막 세 번째 주인공은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선조 대대로 물려온 특별한 디자인으로 설계된 벌통으로 벌을 치는 양봉업자 조지다. 대학에서 잠시 집을 방문한 아들 톰과 냉전 중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톰이 마케팅과 최신 경제학을 공부해서 가업을 잇길 바라지만, 톰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보수적인 양봉업자인 아버지와 가업 대신 자신만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아들의 갈등은 그래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마야 룬데는 미래 세계에 어떤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가 무너졌고, 디지털 네트워크가 작동하지 않게 되었으며 전 세계의 인구수도 10억으로 줄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는 대신 타오와 윌리엄 그리고 조지의 삶을 통해 벌들이 자취를 감추게 된 연원을 조용한 목소리로 추적한다.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작가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비교적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자연을, 우리와 벗하여 살아가는 생태계를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꿀벌이나 날벌레하는 수분이 인류에게 어떤 혜택을 주는지 모르고 살아왔다. 그런데 막상 그런 존재들이 사라지고 나면, 자연이 하던 일을 인간이 대신해야 한다는 간단한 진리를 이 소설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문제는 그런 작은 일들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분명한 진실이다. 가령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고 있는 화석 에너지의 경우를 보자. 석유를 이용해서 발전해서 생산해내는 전기가 당장 끊어진다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될까.

 

마야 룬데가 그리는 미래의 디스토피아에는 역시 가족 간의 갈등이 빠지지 않는다. 인공수분 노동자로 근근히 벌어먹고 사는 타오는 아들 웨이원에게 그런 미래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 어린 나이에 무엇이라도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지만 결과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원인조차 알려주지 않고 소중한 아들을 베이징으로 이송해간 당국의 처사는 비인간적이다. 하긴 각자도생의 시절에 그런 것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조지와 톰의 경우를 살펴보자. 보수적인 양봉업자 아버지 조지는 아들 톰에게 자신이 하던 일을 가업으로 물려주고 싶어 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이걸 세대 간의 갈등이라고 봐야 할까? 개화된 아들은 오직 조상 대대로 물려오는 비법대로 꿀벌을 치는 것이야말로 전부라고 생각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군집 붕괴 증후군(CCD), 다시 말해 일벌들이 집단적으로 사라지는 현상 앞에 아버지와 아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웨이원의 케이스처럼 세상사가 다 그런 게 아닐까.

 

병상에서 일어난 윌리엄 새비지 씨는 꿀벌에 자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분연히 관찰과 연구에 몰입해서 획기적인 꿀벌통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것 역시 이전에 누군가 이미 개발해서 특허까지 낸 제품이라는 사실에 그는 좌절하고 만다.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 에드먼드의 끝없는 비행 앞에 아버지는 망연자실한다.

 

타오는 아들을 찾는 와중에 얻게 된 책을 통해 어떻게 해서 지구에서 꿀벌이 사라지게 되었는지 연원을 추적하게 된다. 살충제의 무분별한 사용, 이상기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양성 대신 천편일률적인 농작물재배를 선택해 재앙을 초래한 것이라는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어떻게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과 너무 닮아 있지 않은가.

 

작가는 이렇게 세 가지 시대를 관통하는 가족 간의 갈등 구조와 인류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혜택을 가져다 준 꿀벌과의 연관성을 배치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600쪽 달하는 이야기가 쉼 없이 돌아간다. 때로는 미스터리로, 때로는 가족 간의 갈등으로, 개인의 고뇌와 밥벌이의 지겨움, 인류적 재앙에 대한 경고에까지 마야 룬데는 이야기의 확장과 축소라는 상이한 방식으로 마치 아코디언을 연주하듯 <벌들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개인적으로 미래 디스토피아에 대한 엄중한 경고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법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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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아 - 어느 시골의사 이야기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김현우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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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존 버저 작가의 부고 소식을 듣고 그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행운아>는 내가 이달에 읽은 존의 세 번째 책이다. <제 7의 인간>을 먼저 읽었는데 미처 리뷰를 작성하지 못했다. 그의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리뷰로 담아내기란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67년에 발표된 <행운아>도 분량에 비해 만만치 않은 작품이었다.


존 버저는 <행운아>에서 사진가 장 모르와 협업을 통해 영국 숲속 사람들을 상대로 의료행위를 하는 의사 존 사샬의 모습을 에세이로 담아냈다. 아마 에세이의 시작은 나무에 깔린 나무꾼 아저씨를 구하러 간 의사의 시선으로 되었지 싶다. 전쟁 중에는 그리스의 어느 섬에서 해군 군의관으로 활약했던 참전용사 존 사샬이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영국 모처의 2,000명 가량이 사는 시골 마을에서 28년간 의사로 활동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이 존 버저의 철학적 손과 장 모르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부활하기에 이르렀다.


원시 시대 이래 의사란 직업은 무당이나 주술사 같은 영적 단계에 최상위층 엘리트들에게 부여되어 왔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기에, 그들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생산에서 제외되었고 일종의 특권을 부여받아왔다. 아마 그 사실은 현대사회에서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의사가 된다는 것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부여된 일이니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년간의 수련가 막대한 비용, 그리고 개인의 피나는 노력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외면해선 안될 것이다. 하지만 에세이 말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 저자가 냉철하게 짚어내듯이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금전에 우선하는 그런 가치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시키게 되면서 의사가 아닌 의료기술자들만 양산해 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그런 의구심이 자꾸만 드는 것도 배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다시 존 버저의 에세이로 들어가 보자. 의사는 환자의 치부까지 모두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는 의사 앞에서 비무장 상태로 자신의 마지막 보루인 옷가지들을 스스럼없이 벗어젖힌다. 최근에는 역시 일부 미꾸라지들이 못된 짓을 해서 다수 선량한 의사들을 욕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의사에게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바로 환자를 알아줌으로 발생하는 신뢰가 아닐까. 존 버저는 이런 신뢰야말로 치료의 과정에서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고대 파라켈루스 이래 의료 행위에 있어 불변의 조건이라는 점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존 버저는 의료 행위를 넘어 숲속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침투한 의사 존 사샬의 한계를 넘어선 좋은 의사라고 그들에게 인정받는 비결에 대해서도 남김 없이 에세이에서 밝히고 있다. 빈약한 수술대에서 온갖 수술을 집도하고, 달리는 차 안에서 아이를 받아내는 수고도 마다 하지 않고, 들어오는 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일을 찾아나서는 그런 의사를 오늘날 우리는 찾아 볼 수 있는가라고 그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낭만닥터 김사부>에 나오는 김사부처럼 사람을 치료하고 살리는 일이야말로 의사의 본업이라는 기본적인 진실조차 무시되는 현실세계가 그저 두려워질 따름이다. 아니 오죽했으면 이런 드라마가 인기를 끌 현실이라니. 드라마가 모름지기 존재하지 않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데올로기적 상식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을 치유하는 의사로 존 사샬 역시 완벽할 수 없을 것이라고 존 버저는 증언한다. 자신의 영역을 훨씬 뛰어 넘어 활동하다 보니 어쩌면 셀프 심리치표를 받아야 할 당사자는 바로 정작 의사 자신이 아니었을까. 경제 사회적으로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숲속 사람들을 위해 버려진 성의 해자를 수리해서 정원조성에 자신의 온전한 여가시간을 투자하고, 댄스파티나 마을모임 같은 것을 조직하는 그런 의사를 본 적이 있는가. 이런 의사가 존재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런 의사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단지 뛰어난 의료 기술을 시전한다는 것 말고도 온전한 인격체에 대한 인간적 존경심을 오히려 부차적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환자를 단순히 자신의 섭생과 여흥을 위한 돈벌이의 대상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받아 들이고, 진심으로 그들의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어쩌면 측은지심일 지도 모르겠다) 한 “알아줌”(이 번역어 대한 원서의 표기가 참 궁금하다)이야말로 의사와 환자 관계의 핵심이 아닐까. 에세이의 어디선가 읽은 먼저 다수의 죽음을 목도한 선배로서 숲속 사람들을 위로하는 어쩌면 종교적 경지에까지 도달한 의료인의 모습에 그저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존 버저가 글로 독자들의 가슴을 휘어잡았다면, 그의 동업자 장 모르는 카메라 렌즈를 이용해서 숲속 사람들과 존 사샬의 일상을 담아냈다. 바로 전에 읽은 <제 7의 인간>에서도 그랬지만, 존 버저와 장 모르의 협업은 정말 일품이다. 인간에 대한 고뇌를 담은 존 사샬의 이미지에서도, 그가 분주하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행운아로서의 모습들을 훌륭하게 지면에 살려 내는데 성공하지 않았던가.


현재 의료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미래의 의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을 꼭 추천해 주고 싶다. 아마 이 책을 만난 그들은 정말 행운아일 거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올해 안으로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야겠다. 그 땐 또 연초와는 다른 어떤 느낌으로 만나게 될지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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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6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저번에 레삭매냐님이 중고매장에서 구입한 버거의 책이군요. 존 버거의 책이 꽤 많은데, 중고매장에 만나기가 어려워요. 버거의 책이 너무 안 팔려서, 그 책을 사서 되파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연휴 잘 보내세요. ^^

레삭매냐 2017-01-26 21:34   좋아요 0 | URL
아 그 책은 제가 처음으로 읽은 존 버저
의 책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이란 책이구요.

이 책 <행운아>는 반디에서 사서 읽었답니다.

말씀 대로 헌책방에서 존 버저의 책 만날 수
가 없네요.

싸이러스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레드 로자 - 만화로 보는 로자 룩셈부르크
케이트 에번스 지음, 폴 불 엮음, 박경선 옮김, 장석준 해제 / 산처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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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출간 당시부터 보고 싶어하던 케이브 에번스의 그래픽노블 평전 <레드 로자>를 드디어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요즘 존 버저의 책을 한창 사서 모으면서 읽고 있는 와중인데, 도저히 다른 책을 살 여력이 없어서 이번엔 도서관 카드를 이용해 봤다. 그전에 읽던 <파리 코뮌>도 미처 다 읽고 반납을 했는데. 그런데 가만 보니 <레드 로자>의 주인공 로자 룩셈부르크가 태어난 해가 바로 그 반역의 해로 역사에 기록된 1871년이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 그래.

 

독일 사람으로 알았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당시 러시아의 일부분이었던 폴란드 자모시치에서 태어났다. 평생을 통해 지속된 비주류 역사의 시작이었다고나 할까. 우선 로자는 여성이라 당시 보통선거권이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도 아닌 폴란드 출신 유대인이었다. 유년 시절 희귀병으로 몸에 장애까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조숙했던 그녀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이주한 후, 장차 만악의 근원이라고 그녀가 주장하게 된 자본주의 시스템의 병폐를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바르샤바는 동구권에서 극심한 빈부의 차이를 상징하는 도시 중의 하나였으며, 로자가 훗날 투신하게 되는 사회주의 운동 탄압의 선두에 서 있었다. 바르샤바 상급교육기관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며, 지배국의 언어였던 러시아어, 모국어인 폴란드어, 제2의 조국이 될 독일의 언어 마지막으로 종교 언어인 히브리어까지 섭렵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여성의 대학 진학은 상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로자는 여성에게도 대학의 문호가 개방된 스위스 취리히 대학으로 진학을 결심한다. 아마 그런 배경에는 부모들의 재정적 지원에 힘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부르주아지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으면서도 엘리트 여성으로 프롤레타리아 보다 계급적으로는 부르주아지에 가깝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이 그래픽노블을 통해 읽게 됐다. 한편, 자유연애의 신봉자이자 혁명적 실천가이기도 했던 로자는 같은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이자 평생의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 요기헤스를 만나 사랑을 불태우기도 한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로자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이라는 논문으로 공법 박사 학위를 받는데 성공한다. 1898년 27세의 로자는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나라 중의 하나였던 프로이센의 심장부 베를린으로 이주해서 위장결혼으로 시민권까지 취득한다. 여전히 그녀는 선거권도 가지지 못했지만 선진 산업국가 독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한 이론가라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의 이론을 이어 받은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였다. 노동자를 착취해서 얻은 잉여생산으로 이윤을 축적해서 자본 형성에 성공한 자본가들의 멈출 줄 모르는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무한정한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소비만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본주의 모순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라고 로자는 규정했다. 아울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독일 사회민주당의 비주류를 자처하면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점진적 개혁보다 자신이 주장하는 혁명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급진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다.

 

한 세기도 전에 자본주의의 실체와 제국주의적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한 로자의 혜안은 정말 탁월했다.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의 세계화의 개념이 잡히기도 전에,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이동과 흐름이 궁극적으로 군산복합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해서 지독하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저개발국가의 원료시장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산업국가에서 생산된 재화로 그들을 자국 상품의 소비시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악순환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얼마 전 읽은 존 버저의 <제 7의 인간>에서 재화의 생산을 위해 부족한 노동력을 저개발국가에서 한시적으로 해당국가에 체류하는 이주노동자라는 방식으로 수급하는 1970년대 모습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주의자 로자의 후예답게 존 버저 작가는 유럽 노동생태계에 대한 너무나 현실적인 르포르타주를 담아냈는데, 한 세기가 지나도록 자본에 의해 조종되는 노동현실이 바뀌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로자는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아우구스트 베벨과 칼 카우츠키 등과 연대해서 베른슈타인이 주장하는 수정주의 노선에 대항해서 단호하게 맞서 치열하게 투쟁했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대로,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 때문에 붕괴하는 대신 신용제도, 독과점과 통신기술 등을 이용해서 시대에 맞춰 생존을 도모할 것이기 때문에 노조 활동이나 의회 진출 같은 온건적 방식으로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다. 로자는 이런 베른슈타인의 주장에 대해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며, 더욱 치열한 계급투쟁과 전면적인 사회혁명을 강조했다.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이런 논쟁이 가속화되던 가운데, 그녀가 예언한 대로 전대미문의 전쟁인 1차 세계대전이 전 유럽을 포화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노동자 형제들의 단결을 주창했던 인터내셔널의 목소리는 개별국가 민족주의의 목소리에 묻혀 버리고 말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로 대변되는 사민당 우파는 로자의 급진주의적 혁명노선 대신 호전적인 빌헬름 2세 황제와 협력해서 전 국가적 자원을 총동원한 전쟁을 지지했다. 전쟁비용을 추가적으로 요청하는 제국의회에서 로자의 동지였던 칼 리프크네히트는 반대표를 던지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행동하는 양심의 전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1917년 전쟁의 와중에 일어난 10월 볼셰키비 혁명으로 짜르는 퇴위되고, 1년 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군항 킬에서 수병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통치 능력을 상실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2세 황제는 사민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퇴위하기에 이른다. 독일 사민당 세력에게는 공화정을 이루기 위한 획기적인 기회였지만, 바이마르 초대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 에베르트는 생각이 달랐다. 군부와 결탁해서 급진주의 세력 박멸에 나서게 된다. 독일 우파들은 독일이 전쟁에서 진 이유를 노조와 사회주의자 그리고 유대인 탓으로 돌리면서, 1919년 1월 로자와 그녀의 동지들을 지지하는 스파르타쿠스단이 베를린에서 봉기를 일으키자 우파 의용군인 자유군단을 동원해서 무력진압에 나선다. 파멸적인 전쟁으로 조국을 몰아넣었던 황제마저도 자국 국민들에게 총구를 겨누지 않았지만, 자유군단은 반란세력에게 무력사용을 마다하지 않았다. 1월 15일,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를 분쇄하라는 제국총리 에베르트의 명령을 받은 자유군단은 로자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체포해서 처형했다.

 

47세의 나이에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를 주장하던 “붉은 장미”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의 와중에 그렇게 죽어갔다.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난 지, 9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녀의 주장은 어떤 점에서는 맞고, 또 어떤 점에서는 틀리기도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로자가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의 외형은 조금 바뀌었을지 몰라도 본질은 그대로다. 대중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오로지 자본주의 경제 순환 특히 이윤추구를 위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계속되고 있고, 경제성장 신화와 낙수효과 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선전들이 난무할 따름이다. 군산복합체는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자신의 이익을 불려줄 먹잇감을 찾고 있으며, 허울 좋은 신용사회의 허상은 비등점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1세기만에 돌아온 대혼란기에 로자의 이상적 사회주의가 제어할 수 없는 야만의 시대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주장이 낯설게만 들리지 않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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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겠습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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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서, 아사히신문사에서 잘 나가던 저널리스트의 일탈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나의 선입견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 인간이 넘쳐 나는 세상에, 대책 없이 돈보다 시간과 자유를 찾아 나선 아프로 헤어를 한 50대 중년 아줌마의 삶에 대한 초상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회사 인간일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비애를 담담하게 그려낸 한 편의 칼럼 같다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감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재밌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었고.

 

모든 일에는 발단이 있기 마련이다. 엘리트 코스를 거쳐 살아온 이나가키 씨는 비교적 안정적인 신문사 데스크 업을 과감하게 때려치우고, 아무 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거친 황무지를 선택했다. 시작은 출입처 경찰들과 동료들이 어울렸던 노래방이었다고 했던가. 가발 하나로 인생이 뒤바뀌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녀에게는 그게 반전의 기회였던 모양이다.

 

작가는 대다수 월급쟁이의 대표선수가 되어 돈과 승진이라는 두 수레바퀴 속에서 자유와 시간을 자발적으로 회사에 반납한 대신, 물질적 보상으로 받은 돈으로 흥청망청하는 소비를 즐겼노라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물론 그것도 일본 사회가 고도의 성장기를 누릴 시절에는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어디 세상사가 다 그런가. 자본주의의 기본이 불황과 호황인 것처럼 세상사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게다가 신문사에서 드문 여성으로서 승진에서 밀리다 보면 자신이 차별 받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자괴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고 전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더더욱 불필요한 소비에 매달리게 된 게 아니었을까? 다 입지도 못할 옷들을 사대고, 맛집 투어를 하는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퇴사를 결심하고 돈 없는 라이프스타일을 결정한 순간 불필요한 소비를 줄여야겠다고 결심했던 모양이다 작가는. 그 후 지은이는 소비를 줄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사용하지 않아야 아낄 수 있다는 돈오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에 굳이 없어도 되는 물건들을 생산해 내고,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이어진다. 아마 그런 돈오의 결정적 계기는 오사카 데스크에서 잘 나가다가 시코쿠의 시골로 전근하게 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우동 현에서 100엔짜리지만 행복하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다는 자족감과 더불어 모든 것의 기준이 우동 몇 그릇으로 환전되는 세상 이야기가 정말 색다르게 다가왔다.

 

대형마트에서 비용이 재래시장보다 상대적으로 더 들긴 하지만 언제나 먹을 수 있는 먹거리들을 사오는 것과 제철이 아니면 구경할 수 없는 재래시장에 대한 비교는 전해 주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어제 저녁 냉장고에서 고이 썩어가고 있던 상추에 대한 아스라한 추억이 떠올랐다. 결국 내 뱃속으로 가는 대신 음식물 쓰레기 통으로 직행하게 될 운명의 상추를 나는 왜 샀을까? 편리라는 이름으로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될 돈을 허공에 뿌리면서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찬바람이 들어야 비로소 볼 수 있다는 무느님에 대한 작가의 찬양에 그래서 더 공감이 갔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퇴사하겠습니다>에는 이상적인 이야기들만 기재되어 있는 건 아니다. 퇴사를 결정하게 되면서 부딪혀야 하는 실제적인 이야기들도 실려 있다. 우선 회사가 부담해 주던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부터 시작해 보자. 28년간 장기 근속한 덕분에 적지 않은 퇴직금을 받게 되었지만, 국가에서 세금으로 자그마치 1/7이나 띠어 간다는 이야기에 기겁했다. 회사 인간을 돌보아 주던 회사가 보호막을 거두자마자 국가가 개입하지만, 막상 그동안 꾸준히 부어온 고용보험의 혜택을 받기란 난망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지지만, 독립 후에 재취업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마 받을 수 없는 모양이다.

 

가끔 회사로 걸려 오는 신용카드 회사의 재직 확인의 경우처럼, 따박따박 월급을 받아 가는 월급쟁이 회사 인간에 대한 신용보증을 회사가 해왔지만 이나가키 씨처럼 제 발로 회사를 뛰쳐나간 사람에겐 그런 일도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퇴사하기 전에 신용카드 발급 받으라고 했던가. 살인적인 물가로 유명한 도쿄에서 방 구하기는 또 어떤가. 월세를 떼 먹힐까봐 보증인이 없는 경우에는 신용보증회사를 이용하라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비용이 든다. 이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없인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다. 돈을 회사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 같긴 하지만.

 

이나가키 씨는 회사를 그만 둔 후에 일이 하고 싶었다고 썼다. 그리고 보니 일이 싫어서 회사를 그만 둔 건 아니었다고 강력하게 어필한다. 다만 회사 소속으로 월급을 챙기면서 글을 쓰던 시절과 프리랜서 작가에게 원고 의뢰를 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라고 냉철하게 지적한다. 되짚어 보면, 자기가 데스크를 담당하던 시절에도 다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바운더리 안에서 볼 적에는 실감하지 못했던 일들이 바운더리 밖으로 쫓겨났을 때에는 더 큰 차이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그것조차도 담담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고 이나가키 씨는 회고한다. 다 맞는 말이니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어느 순간 나도 이나가키 씨치럼 돈보다 시간과 자유를 위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아마도 아니겠지. 당장 부양해야 하는 가족과 돈이 없으면 유지할 수 없는 자잘할 것들 때문에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나가키 씨처럼 신나게 돈을 쓰며 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안 그래? 문득 <퇴사하겠습니다>가 정말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읽히게 될지 궁금해졌다. 나하고는 아마도 생각이 다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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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4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우리나라에 ‘소소한 지름’, ‘탕진잼’이 유행하더군요. 저렴한 가격의 물건을 구매하는 것을 즐기는 겁니다. 저 같은 경우는 새 책보다는 출간연도가 꽤 지난 책들을 많이 샀어요. 아무래도 헌 책의 가격이 저렴하니까요.

레삭매냐 2017-01-24 17:28   좋아요 0 | URL
저도 비슷합니다... 탕진잼이라~

이번에 이사하면서 책장에 책이 한가득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으면서도, 또 책을 질렀네요.

요즘 관심있는 존 버저 아저씨의 책들을 두 권
주문했지요. 이것도 나름 탕진잼이라고 할 수 있
을까요? ㅋㅋ
 
토니와 수잔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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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가 개봉했다. 영화 <싱글맨>으로 감독 데뷔를 한 탐미주의자 톰 포드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오스틴 라이트 교수가 1993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19금 영화라 그런지 상영관 수도 다른 영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고, 상영 횟수도 적은 상영관에서는 달랑 한 번 정도다. 내가 사는 곳 근처에 있는 영화관 상영시간은 새벽 12시 반이다. 보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생전에 오스틴 라이트 교수의 <토니와 수잔>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하는데 사후에 영화화되고 다시 읽히는 걸 보면 역시 걸작은 언제라도 재평가 받게 되는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표지도 에이미 아담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포스터를 사용했다.

 

500쪽 가까운 분량이지만, 한 번 빠지게 되면 헤어날 수 없는 그런 마력을 가진 소설이다. 우선 <토니와 수잔>의 구성은 요즘 잘 볼 수 없는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다. 수잔 모로의 전 남편 에드워드 셰필드가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자신의 역작 <녹터널 애니멀스>(야행성 동물)이라는 기묘한 제목의 원고를 보내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시카고의 부유한 여피로 조용하게 살고 있는 수잔에게 에드워드는 어쩌면 찌질한 남편의 초상일지도 모르겠다. 현재 남편 아놀드는 심장전문의로 유명병원 이사 면접을 보기 위해 뉴욕 출장 중이다. 그런 그녀에게 에드워드가 보낸 원고는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수잔의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그런 평온한 일상이라면, 소설에 등장하는 토니 헤이스팅스(분명 에드워드의 분신처럼 보인다)의 재앙은 유혈과 폭력을 동반한 비극이다. 메인 별장으로 떠나던 길에 펜실베이니아 모처의 주간고속도로에서 동네 불량배 삼인조와 사소한 시비가 붙게 되고, 대학 수학교수 출신의 인텔리 가장의 아내와 딸을 불량배들에게 납치되어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과연 토니는 이런 비극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토니의 재앙이 거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면, 수잔의 삶 역시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다. 3년 전, 남편 아놀드는 올해 49세의 수잔보다 훨씬 젊은 비서 린우드와 불륜을 저질렀다. 시카고 인근의 전문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지식인 수잔은 두 번째 파경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가정을 지키겠다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걸까?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수잔과 아놀드의 가정에도 미묘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스틴 라이트 버금가게 그런 삶의 균열을 포착해 내는데 일가견을 보여 주었던 제임스 설터 작가의 문학세계가 떠올랐다.

 

수잔의 현재와 소설 속 토니의 과거가 계속해서 교차하면서 소설 <토니와 수잔>의 긴장은 고조된다. 액자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의 막간마다 현재의 수잔은 과거 자신과 토니의 러브스토리를 들려준다. 15세 때, 에드워드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고 수잔의 부모는 잠시 에드워드를 거두기도 했지만, 수잔은 자기 가정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당한다는 이유로 그를 경원했던가. 그 뒤 8년이 지나 시카고에서 영문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수잔과 로스쿨에 진학해서 인권 변호사의 꿈을 꾸던 에드워드는 우연히 만나 잠재워 두었던 사랑을 꽃피게 된다. 결국 결혼에 골인한 두 남녀에게 에드워드가 미래의 보장된 성공을 의미하는 로스쿨을 포기하고 오랫동안 꿈꿔 왔던 작가가 되겠다며, 밥벌이를 모두 수잔에게 맡기고 자아를 찾겠다며 숲 속 오두막으로 떠나면서 결혼생활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때마침 같은 아파트에 살던 유부남 아놀드 모로가 고기 써는 칼을 휘두르며 미쳐 가는 아름다운 셀레나와의 결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나머지 부분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신의 이상적 결혼을 불륜으로 망쳐 버린 수잔이 수많은 고민 끝에 결국 에드워드와의 말다툼을 꼬투리 잡아 자신의 불륜을 고백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사랑에서 비롯된 결혼이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지에 대한 오스틴 라이트 식의 전개방식이 소설의 DNA를 디테일하게 잡아내기로 유명하다는 영문학 교수님답다는 생각이 번쩍 들 정도로 말이다.

 

수잔은 자신의 불륜과 이혼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전문가적 능력을 발휘해서 애써 에드워드의 작가적 능력을 폄하한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냉혹한 비평에 에드워드가 자살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도, 한 때 자신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남자보다 현재 자신의 평온한 삶이야말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비치면서 말이다. 그런데 에드워드가 쓴 걸작 <녹터널 애니멀스>를 읽으면서,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리게 된다. 로스쿨에 다니던 미래의 촉망받는 변호사에서 작가 지망생으로 그리고 다시 생업을 위해 보험업에 투신한 자본주의자가 문학 소비자인 자신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작품을 썼다는 사실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25년 동안 갈고 닦은 교육자이자 지식인의 인지부조화라고나 할까? 수잔은 안온한 자신의 삶에 파문을 던진 에드워드의 미완성 원고를 읽으면서, 과연 “인생에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작가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소설 <토니와 수잔>은 수잔의 그런 내적 갈등을 섬세하게 다루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고 나락으로 추락한 토니 삶의 궤적도 놓치지 않고 추적한다.

 

소설 속 소설에서 토니의 조력자로 등장한 바비 안데스 부서장의 역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력한 지식인의 상징이자 수잔으로 대치해 봐도 무방할 것 같은 토니를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아내와 딸에 대한 복수를 유도하는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 <녹터널 애니멀스>의 엔딩 부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바비 안데스에 비해, 무능한 남편 에드워드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다가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정을 지키지 못한 남자의 모습이 오롯하게 구현되는 장면도 일품이었다. 한편, 로라와 헬렌을 레이 마커스 일당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수치심과 굴욕감에 시달리는 토니의 모습은 현실 세계에서 에드워드와의 파경을 막을 수 있었던, 아니 의도적으로 막지 않았던 수잔의 그것과 기묘하게 겹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의도한 이런 소설적 구도의 탁월함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역시 놀랍군. 대가라면 이 정도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소설 <토니와 수잔>은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깐 본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는 디테일에서 사뭇 소설 <토니와 수잔>과 결을 달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시카고에서 LA로 이동되었고, 주간고속도로의 재앙 역시 펜실베이니아가 아니라 텍사스였다. 수잔이 에드워드에게 받은 원고를 뜯다가 손을 베는 장면도 의미심장했지만 소설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었다. 사실 소설의 시작은 에드워드가 자신의 소설에 부족한 무엇인가를 찾아달라는 부탁으로 시작됐지만,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다지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패션 디자이너 출신 감독인 톰 포드는 탐미주의자답게 영상미 하나는 뛰어나게 연출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회가 된다면 영화도 보고 싶지만, 지금으로선 불가능하지 싶다.

 

오스틴 라이트 교수는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에 작고했다고 한다. 작가는 생전에 모두 8편의 소설들을 발표했는데 국내에는 <토니와 수잔>이 아마 처음으로 소개된 것 같다. 앞으로 작가의 다른 책들도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시나 문학의 세상은 광활하고 여전히 모르는 작가들이 넘실거리는 그런 대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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