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이사카 고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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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작곡한 이른바 “소야곡”이라 알려진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란 곡을 아주 좋아한다. 애청하는 몇 안되는 클래식 곡이라 그런지 다작으로 유명한 이사카 고타로 작가의 연작소설집의 제목을 보고 마음이 이끌렸다. 그리고 보니 한동안 이사카 월드 방문이 뜸했던 것 같다. 한참 책을 읽던 시절, <골든 슬럼버> 그리고 <그래스호퍼> 등을 읽었었 것 같은데, 세밑에 만난 이사카 월드는 바지락 칼국수 같이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라고나 할까.

 

역자 후기에서 소설의 키워드를 “만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충분히 공감이 간다. 우리는 만남이 없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어떤 관계든 만남이 있어야 출발이 되고, 지속적인 만남으로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가. 그런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만남의 중심에는 헤비급 복싱 챔피언 윈스턴 오노라는 인물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밴텀급이나 라이트급 챔피언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동양출신 헤비급 챔피언이 있었던가? 하긴 요즘은 격투기 같은 종목이 예전 권투의 인기를 빼앗는 바람에 권투 경기에 대한 열기가 예전 같진 않지. 뭐 그래서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매사에 무심한 남편에 질려 딸아이를 데리고 가출한 아내 때문에, 회사에서는 유능한 시스템 엔지니어로 알려진 남자가 홧김에 서버를 걷어차서 수하 직원이 데이터 수집을 위해 온라인 방식 대신 거리에 나가 설문조사를 하게 되었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아마 인터뷰를 진행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걸 잘 알지 않을까? 그래서 개인적으로 누군가 인터뷰를 요청해 온다면 빙빙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횡설수설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렇게 남녀관계에서 극적인 만남을 꿈꾸는 남자에게 찬스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자신의 일터인 미용실 손님으로 만난 이로부터 남동생을 소개 받고, 무려 일 년 동안 전화로만 일상을 나누는 커플 이야기도 새로운 천년의 세태인가 싶기도 하다. 가끔씩 일 때문에 남자로부터 오는 전화가 뚝뚝 끊기기도 하지만 편안한 만큼 그 정도의 두절은 감수해야 하지 싶은 여자의 속마음. 그런데 반전은 따로 있다. 그렇게 숫기 없어 보이는 남자가 바로 헤비급 챔피언이었다니, 놀랍군.

 

영화 <민 걸즈>의 연상시키는 학창시절 여왕 같은 존재가 어느날 느닷없이 자신이 다니는 화장품 회사 광고를 따내야 하는 을로 등장하다니, 인간사 요지경이라는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군. 직장 동료는 가혹한 복수를 종용하지만 미운 오리 새끼마냥 예전의 모습에서 탈피한 주인공에게 그럴 마음은 없어 보인다. 오래된 네메시스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관계를 파탄시킬 수도 있는 공작을 벌일 충분한 기회가 있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역시 여기에도 반전이 숨어 있다. 네메시스가 공들이는 남자가 유부남이라니! 무겁지 않고 서로 얽히고설킨 이야기에 제각각 연관 있는 인물들의 관계도를 그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헷갈릴 수도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아,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에 등장하는 수많은 범상치 않은 인물 중에 최고는 역시 미래가 궁금한 이들에게 짧은 음악으로 100엔(샤쿠엔) 짜리 점을 쳐주는 기타리스트 사이토 씨가 있었던가. 아니면 사이토 씨는 이미 어떤 결정을 내릴 지 의뢰자의 방향성을 읽고서 그 결정을 촉발시키는 서비스를 해준 게 아닐까? 수많은 인생의 결정 앞에서 아무리 갈팡질팡한다고 하더라도, 갈등하는 사람은 이미 어떻게 할 것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 같은 삶을 살기는 싫다고 하면서, 짝꿍 친구를 흠모하는 고등학생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침몰해 가는 일본 경제에 대한 식견은 과연 고등학생이 하는 생각일까 싶기도 하고. 모두가 한 번 사귀어 보고 싶은 짝꿍과 자전거 주차딱지를 훔친 도둑을 잡아 응징하겠다고 나선 모험담도 귀엽다. 위기의 순간마다 등장하는, “이 분이 누구의 따님인 줄 아시고 그러시는 겁니까?”라는 질문은 좀 구식이긴 하지만, 기세등등하게 날뛰는 이들을 위협하는 용도로는 그만이다. 작가의 스타일이 올드스쿨이구나 싶다. 요런 발칙한 카드가 먹힐 거라고 생각하다니 말이다.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이나 교향곡 같은 대작도 훌륭하지만, 이사카 월드의 주인장처럼 다작으로 유명한 대작곡가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나 디베르티멘토 같은 소품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한다. 한동안 이사카 월드를 떠나 살았는데 다시 궁금증이 생겼다. 우선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부터 구해다 봐야겠다. 그때까지 이사카 월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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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29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노래 멜로디는 친숙한데, 제목이 좀 길고 어려워서 외우기 힘들었던 적이 있어요. 지금도 헷갈리곤 합니다.. ㅎㅎㅎ

연말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레삭매냐 2016-12-29 13:3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영어도 아닌 독일어라 더 그런 것 같더라구요.

싸이러스님도 해삐 뉴 이얼~하세요.
 
고래도 함께
존 아이언멍거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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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고래와 함께>는 다분히 성경에서 연유한 이야기라는 느낌이다. 우선 요나와 고래에 대한 이야기가 그리고 욥기에도 등장하는 토마스 홉스의 그 유명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주인공 조 학(Joe Haak)이 세인트 피란(St. Piran)의 307명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은 노아의 방주의 그것과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IT 컨설턴트 출신 존 아이언멍거의 세 번째 소설이라는 <고래와 함께>는 콘월 지방의 세인트피란이라는 가공의 마을에 벌거벗은 주인공 조 학과 고래 리바이어던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물론 인정 많은 시골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낯선 이방인을 살리는데 성공하고, 뒤이어 위기에 빠진 고래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는데 전력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기에 빠진 공화국을 구하기 위해 오늘도 촛불을 들고 추운 겨울바람에 맞서 광장에 나서는 우리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지는 그런 느낌이다.

 

단박에 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사면서 세인트피란에 연착륙한 조 학의 정체는 바로 시티(런던) 출신 통계와 수학에 정통한 애널리스트다. 공매도라는 희한한 방법으로 레인 코프먼 투자은행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벌어들이던 조 학은 자신이 개발한 캐시라는 덫에 걸려 그만 급전직하하고 만다. 우리도 최근에 신약개발회사의 주가농단으로 촉발된 사례를 통해 공매도 작전세력의 실체를 알게 되었는데, 주가가 뛴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주가 하락을 전제로 해서 마치 망하는 회사에 달려들어 수익을 내는 그야말로 정글 자본주의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존 아이언멍거 작가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지구 종말로 치닫는 미래 예측 프로그램으로 우리가 얼마나 에너지 자원에 매달려 있는지, 공동체가 파멸로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이기주의에 입각한 수익 창출 모델에 매달려 있는지 조 학의 연대기를 통해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었다.

 

레인 코프먼의 살인적인 스트레스 환경 속에서 장장 8년을 일하면서, 창의적인 발상을 바탕으로 캐시라는 인공지능적인 미래 예측 프로그램을 개발해낸 조는 다가오는 미래의 네 가지 시나리오 중 최악의 시나리오가 자신이 사는 영국을 비롯해서 전 세계를 덮치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잘 돌아가던 캐시에 오류가 생겼다고 판단되는 순간 레인 코프먼 은행은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기록하게 되고, 성서에도 등장하는 폭풍우에 휘말린 요나가 탄 배의 승객들처럼 모든 책임을 희생양에게 돌리기 위해 제비뽑기가 시행된다. 알다시피 그 희생양은 바로 캐시의 개발자였던 조였다.

 

소설 <고래와 함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예언했던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고래로 상징하면서, 조 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엇갈리게 배치하는 방식으로 갈수록 과연 세인트피란 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친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게 될 것인지 그리고 조 학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언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 것인지에 주목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 혹은 예언자의 말을 무시하지만 사람 좋은 세인트피란 사람들은 아마 예외였던 모양이다. 8천만 원 가까운 자신의 전 재산을 동원해서 자신과 고래의 목숨을 구해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식료품을 저장하는 그의 모습은 지구 종말을 의미하는 대홍수를 대비해서 묵묵하게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는 노아의 노고를 연상시킨다.

 

물론 그 와중에 이루어지지 않는 교구 목사의 젊은 아내 폴리 호킹과의 로맨스도 등장하고,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는 세인트피란 사람들의 이야기도 꾸준히 등장한다. 시티에서 짧았던 클레어와의 인연도 그리고 상사이자 감출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재니 커버데일과의 불같은 사랑도 쉴 새 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져 간다. 하지만 이야기의 모든 중심에는 홉스가 예언한 광폭한 환경에 대항하기 위해 권력의 상징으로서 리바이어던보다 한 마음이 되어 생존을 위해 투쟁에 나서는 공동체의 협력에 존 아이언멍거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어떤 영웅의 초인적인 능력과 예지로 공동체를 살릴 수도 있겠지만, 보잘 것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합심이야말로 우리가 삶의 터전을 마련한 공동체를 살리는 바로미터라는 것이야말로 소설 <고래도 함께>를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에너지 고갈과 독감 같은 유행성 전염병이 지구 종말을 촉발시키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다. 당장 세 끼만 굶게 되면 인류의 위대한 문명이 붕괴될 수 있다는, 모든 것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전기 에너지와 식수 공급이 중단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이미 오래 전에 미국에서 발생했던 블랙아웃으로 증명된 바 있다. 글로벌리즘으로 지구촌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게 되지 않은 현실에서,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아시아 독감이 전 세계를 휩쓸고 에너지 자원의 유통을 마비시키고 순차적으로 네트워크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은 낯설게 들리지 않았다.

 

또 하나 아이언멍거 작가의 놀랍고 탁월한 솜씨 중의 하나는 바로 성경에서 가져온 텍스트를 이용해서 현대문명의 취약점을 짚어내면서도, 공동체와 인류에 대한 따뜻한 사랑, 그리고 과거의 어느 순간에 대한 추억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원동력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새로 시작하기 가장 좋은 시점이라고 피력하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모름지기 영웅은 떠나야 하는 법인가.

 

초반의 느린 진행에 비해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갈수록 과연 세인트피란 마을의 생존기가 어떻게 귀결될 지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문학적 클리셰이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정도야 옥의 티 정도로 봐줄만 했다. 좀 더 역동적인 고래의 모습이 그려져 원서 표지를 봤는데, 개인적으로 그 표지가 더 마음에 들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읽기에 부족함이 없는 <고래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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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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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발표된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을 읽었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작가의 세 번째 소설 <마더 나이트>(1961)를 읽으면서 커트 보네거트의 팬이 되어 버렸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징집되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그 유명한 벌지전투(1944년 12월 22일)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작센 지방의 드레스덴 남부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같은 해 5월, 보네거트는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생을 마감한 어머니의 비보를 전해 듣기도 했다.

 

아마 작가의 본능과도 같은 경험으로 자신의 드레스덴에서의 체험이 창작의 소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후 거의 20년간 준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류역사상 히로시마의 원폭투하보다도 더 많은 인명피해를 낸 드레스덴 공습을 글로 표현해 낸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 스스로도 정신분열증적인 소설이라는 말을 책의 서두에 적어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제5도살장>의 구성은 참으로 독특하다. 자전적인 이야기의 재구성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내면서도, 빌리 필그림이라는 얼치기 사병을 내세워서 커트 보네거트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투영시킨다. 전혀 전쟁과는 맞지 않는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에나 들어맞을 인물이 삶과 죽음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전장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아수라장 같은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빌리 필그림은 내노라할만한 집안 출신의 발렌시아와 결혼하고, 검안사가 되어 풍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간다.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 구조라면 얼마나 좋겠으련만, 보네거트는 SF 작품을 다룬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의 사실과 트랄팔마도어라는 외계행성에 납치된 빌리 필그림의 시간여행을 뒤죽박죽으로 솜씨 좋게 버무리기 시작한다. 하긴 전쟁이라는 광기를 단순하게 기술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기분열적 망상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빌리 필그림을 세상에서는 구제불능의 미치광이라는 판정을 내린다. 아내 발렌시아는 비행기 사고가 난 자신을 보러 오는 도중에 일산화탄소로 사망하고, 시집간 딸조차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트랄팔마도어 타령을 하지 않았더라도 빌리 필그림을 이해할만한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리라.

 

블랙유머의 대가답게, 빌리 필그림을 따라가는 작가 커트 보네거트의 시선은 건조하고 냉랭하기만 하다. 특히 전장에 투입된 병사처럼 보이는 않고, 전쟁을 희화화하는 것 같은 빌리 필그림의 옷차림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포로수용소의 연극무대에서 신데렐라가 신었던 은색 장화를 신고, 여자들이 하는 외토시에 커튼을 로마시대 토가처럼 두른 어릿광대 빌리 필그림의 모습은 “웃기지도 않는 전쟁”에 대한 보네거트의 조롱 섞인 저격으로 다가온다. <제5도살장> 읽기는 책의 어느 부분에서 나온 것처럼, 경이로운 순간들을 한 순간에 보는 그런 경험이었다. “반전(反戰)”이라는 빤한 주제를 과연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독자들의 예상을 단박에 부숴버리는 작가의 어마무시한 파괴력이 느껴졌다. 유사 이래 인류와 함께 해온 전쟁이라는 현실이,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역설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해내고 있었다.

 

전작 <마더 나이트>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의 카메오 등장 또한 주목할만하다. 전쟁포로로 도급노동을 위해 드레스덴의 시럽공장에 끌려와 있던 빌리 필그림은 나치의 선전요원으로 포로들의 생활에 대한 논문도 쓴 적이 있다는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와 만나게 된다. 자신이 개발해낸 캐릭터를 이렇게 유용하게 사용을 하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미국의 소설가, SF작가, 에세이스트, 풍자가, 불가지론자, 유니테리언, 포스트모더니스트 등 다양한 타이틀을 가진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 세계에 너무 늦게 발을 들여 놓게 돼서 아쉬울 따름이다. 개인적 취향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비꼬는 그의 작법 스타일이 아주 마음에 든다.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거나 절판 혹은 품절의 운명에 처한 그의 작품들이 계속해서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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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02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동 피아노》, 《챔피온들의 저녁식사》가 재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헌책방에 구하기 힘들고, 도서관에도 없습니다. 도서관에 있어봤자 보존서고 같은 곳에 보관되어 있죠.

레삭매냐 2016-12-29 13:33   좋아요 0 | URL
아마 문동이 커트 보네거트의 판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말씀하신 대로 다른 책들도
속히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패권 쟁탈의 한국사 - 한민족의 역사를 움직인 여섯 가지 쟁점들
김종성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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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역사학도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랑케 실증사학이 아니면 다른 역사적 접근방식은 사문난적으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정도에서 벗어난 해석은 받아 들일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 학문적 방식이 너무 마음에 안들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시간이 지나, 전공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역사서적을 읽다 보면 그 시절의 유산과 사유가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번에 읽은 김종성 작가의 <패권 쟁탈의 한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의 서두에서 작가는 이 책을 이해하는 기본 세 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기후 변화와 무역로 그리고 사상 혁신이다. 정치사가 예전 역사학계의 주된 연구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미시적인 접근 차원에서 다양한 방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 중에서 지구의 기후 변화가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꽤나 흥미롭다.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물자와 사람 그리고 정보의 교류는 초원길에서 시작되어,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중국의 세계의 중심이 되는 혁신적인 기회였던 비단길의 개발 그리고 19세기 이해 바닷길을 이용한 해양세력 세계적 패권을 쥐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초원길이 융성하던 상고사 혹은 고대사 시절에 고조선이 중국에 비해 월등했다는 주장은 다시 한 번 랑케 실증사학 때문인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과연 그것이 모두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성을 띠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에 빙하기가 오면서 북방의 흉노족이 생존을 위해 농경민족이 주를 이루던 중원 지방으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2류였던 중국의 한족(漢族)이 춘추전국시대에 발생한 사상 혁신을 통해 통일제국을 완성하면서 비로소 세계사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원이 통일이 되면, 이웃한 한민족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오호십륙국 시대나 10세기 오대십국 같은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중원 공략에 나설 정도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는 가설은 공감할 수 있었다.

 

시대의 추세에 맞춰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서진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다음 군주였던 장수태왕은 안정세에 접어든 남북조시대에 맞춰 남진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중원경영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저자는 보고 있는 것 같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분열과 통일의 순환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원에 통일제국이 들어서는 것이 반가운 현상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중원의 제국정부가 외세에 시달릴수록 우리에게는 유리하다는 걸까?

 

이웃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는 한반도 남동부의 신라는 가야연맹을 병합하고, 신선교에 불교 세계관을 도입한 사상 혁신을 이루면서 자력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았기에 중원의 당나라와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복속시키기에 이르렀다고 작가는 <패권 쟁탈의 한국사>에서 분석해냈다. 그 점 역시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2류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려는 보수 기득권 세력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극적인 방식이 필요한데, 2류국가 신라의 비주류였던 김춘추는 가야 출신 김유신과 의기투합해서 반쪽짜리 통일이긴 했지만, 통일에 성공했다. 이후 대동강 이북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구성된 발해가 세워지면서 다시 한반도는 남북조 시대를 맞이하기도 했다. 한 때 강성한 영역을 자랑하던 발해는 서쪽 중원으로 진출할 생각을 하는 대신 같은 민족인 남방의 신라와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결국 다수의 피지배 민족이었던 거란족에게 멸망당한다.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송나라가 통일하고, 동북 국경의 만주지방을 거란족의 요나라가 지배하게 되면서 동아시아는 다시 한 번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는 당시 한반도의 자리잡은 고려가 동아시아 질서유지의 균형추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요나라의 배후에 고려가 있었기 때문에, 요나라가 중원의 지배자였던 송나라에 대한 군사행동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란족의 요나라는 배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세 차례나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단다. 그렇다면 거란족의 뒤를 이은 여진족의 나라 금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금나라는 요나라처럼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강의변으로 북송을 멸망시킬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유목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금나라는 어쩌면 중원경영에 뜻이 없었던 게 아닐까? 게다가 다시 불어온 지구 빙하기 시대에 몽골 초원의 원나라의 침공에 금나라는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

 

수십 년간 몽골족의 침공에 저항한 고려 무신정권을 저자는 높이 평가하는 것 같은데, 아무런 정당성 없이 무단통치를 해온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권유지에만 관심이 있었지 전화를 직접 감당해야 하는 백성들의 삶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지 않았던가. 몽골의 속국이 되어 버린 고려는 공민왕의 개혁정치로 부흥의 계기를 마련하는가 싶었지만, 공민왕이 키운 신진사대부에 의해 멸망을 재촉하게 되기도 했다. 이성계로 대표되는 군부와 결탁한 신진사대부의 대표주자 정도전은 신라에 이은 두 번째 사상 혁신으로 조선 개국에 성공하지만, 이방원과의 사활을 건 권력투쟁에 패배하면서 그가 품었던 웅대한 아이디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개국 이래 200년간의 태평성대를 누리던 조선 역시 이웃 해양세력이었던 일본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백여 년간의 전국시대라는 대혼란기를 통일하고, 일찍이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전수 받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은 대마도주를 포섭하고 정명가도라는 허황된 구호를 앞세워 대륙진출이라는 미명 아래 대대적인 조선침략에 나선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여진 전선에 전력을 다하던 조선군은 기병 위주로 전략을 구사하다, 장비와 훈련에서 앞선 일본 보병과의 전투에서 족족 패전을 기록했다. 근왕군이라는 이름으로 호국을 위해 일어선 의병과 해상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 그리고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이미 조선은 이전의 조선과는 다른 나라가 되어 버렸다. 흐트러진 신분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조선후기에 예학과 보학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세계 최악의 신분제 국가의 탄생은 그런 연유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을까.

 

수세기 동안 유지되던 비단길 패권은 역시 세계사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서유럽의 모험가들에 의해 바닷길이 개발되면서 대륙세력이 아닌 해양세력에 넘어가게 되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서유럽 유력층들이 선호하던 금값과 같은 값으로 거래되던 후추를 찾아 나선 탐험가들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동남아 후추 산지를 찾았고(아울러 흑인 노예 노동력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아메리카에서 착취한 은광으로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산업혁명으로 확고부동한 세계적 패권을 장악했다. 서세동점의 시대에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였던 고종은 서구제국을 이용하겠다는 판단착오로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그의 선택은 나당연합군의 침공 앞에서 장기전을 도모하는 대신, 건곤일척의 승부로 국가와 왕조의 안위를 보존하겠다는 도박 같은 전략으로 패망했던 백제 의자왕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패권 쟁탈의 한국사>는 참신하면서도 기존의 역사관과는 다른 접근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주관적인 주장이 너무 강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치밀한 고증을 통한 검증을 해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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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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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반빌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바다>에 앞서 <닥터 코페르니쿠스>를 먼저 읽었다. 천동설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시절, 지동설로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제의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의외로 소설은 인간 코페르니쿠스의 내면세계에 방점을 찍고 있어서 조금 당황했다. 이게 과연 존 반빌 작가의 스타일인가. 사실 작년에 이 책을 읽고 나서 무언가 거창한 리뷰를 쓰겠노라고 작정했지만 리뷰는 아직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존 반빌의 그 유명한 부커상 수상작인 <바다>를 읽기 시작했다.

 

참 오래 걸린 독서였다.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위키피디아와 타 블로그의 도움을 받아 처음 읽었던 98쪽의 이미지들을 되살려냈다. 그러자 어렴풋이 떠돌던 기억의 잔재 속에서 주인공이자 소설의 화자 미술사가 맥스 모든이 기억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소설 <바다>는 세 가지 층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주인공 닥터 맥스가 11살이던 시절 아일랜드 바닷가의 여름휴양지에서 선망하던 그레이스 가족과 함께 보낸 추억들, 다른 하나는 아내 애나가 시한부선고를 받고 죽음과 사투를 벌이던 시절에 대한 기억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을 회상해내고 글로 적어 내려가는 현재의 이야기. 원서로는 200쪽도 안되는 짧은 분량의 책이 생각처럼 쉽게 소화해낼 수가 없었다.

 

<닥터 코페르니쿠스>에서도 그랬지만 존 반빌은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그려내는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잡아낸 단초들을 바탕으로 문장을 재단하고, 단정하게 정리해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당시의 감정들을 생생하게 담뿍 담아낸다. 내가 만약에 글을 쓴다면 존 반빌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상상에 도달하자 피식하고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수십 년간 대가가 쌓아온 내공을 욕심내다니. 문득 이 소설에서 내가 중점을 두고 있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 닥터 맥스가 들려주는 정확하지 못한 과거에 대한 기억의 내러티브일까? 아니면 주인공의 변화무쌍한 심리상태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주인공 맥스의 코니 그레이스에 대한 찰나적 사랑, 그녀의 딸인 클로이로 급속하게 옮겨간 배신적 사랑? 그것도 아니라면 죽은 아내 애나에 대한 애도? 외동딸 클레어와의 끊이지 않는 불화? 닥터 맥스가 논문을 쓴다는 피에르 보나르에 대한 아카데믹한 열정? 존 반빌의 글은 거친 물길을 유연하게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이렇게 숱한 이야기 사이를 넘나든다. 그의 문장에서 빛나는 찰나 같은 아름다움은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쉬 빠져 나가 버리는 모래 같다. 오래전 아마 난 그 아름다움에 미혹당했으면서도 동시에 잡히지 않는 그 무엇에 책읽기를 포기한 모양이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구사하는 문학적 난해함 때문이지 않을까.

 

소설의 전반주에 해당하는 1부가 피상적인 접근이라면, 2부에서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결국 우리 독자는 클로이와 마일스 쌍둥이 남매가 어떤 오해에서 비롯된 다툼 끝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어려서부터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무언가 되고 싶어하던 맥스 모든이 런던의 어느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부유층 출신의 애나와 가정을 꾸려 원하던 계급적 상승을 이루는 일련의 과정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내의 죽음보다 수십년 전 한 여름을 같이 보냈던 쌍둥이들의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미술사가의 고뇌에 찬 이야기는 어차피 우리 인간은 숙명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근원적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작가는 ‘만약에’라는 가정으로 현재 삶의 좌표를 수정하려는 사고 자체를 부정한다. 만약에 쌍둥이들이 그 파도에 휩쓸려 가지 않았더라면 닥터 맥스는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만약에 딜레당트한 딸 클레어가 좀 더 격에 어울리는 남자를 만났더라면? 아내 애나의 암을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할 수 있었다면? 이 모든 가정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무의미한 공상일 따름이다. 존 반빌은 겨울 바닷가의 풍경을 관조하는 것처럼 고달프거나 괴롭기 짝이 없더라도 삶 그 자체를 받아들이라고 주문한다.

 

맥스 모든은 스스로를 늙은 원숭이라 자조하며 로즈 바버수어 양이 여전히 지키고 있는 시더스로 돌아가 아내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는 아내가 죽은 현재와 그레이스 가족과 보내던 뜨거웠던 여름의 과거 그리고 아내가 죽음을 기다리던 순간의 과거를 반복해서 넘나든다. 가까스로 그렇게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죽음이었노라고 닥터 맥스는 온몸으로 증명에 나선다. 결국 바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바다에서 끝낼 수밖에 없었나 보다.

 

책을 어렵게 다 읽고 나니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광휘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를 발굴해 내기 위해 혹은 마음에 드는 문장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나. 모르겠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우리네 인생처럼 문학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마음에 사유의 파도를 일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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