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는 곳간, 서울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동서남북 우리 땅 4
황선미 지음, 이준선 그림 / 조선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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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평생 서울에서 살아본 건 딱 2년 남짓한 군생활이 전부였다. 그것도 경복궁과 백악산에서. 외국친구들을 만나 조선왕조의 정전이었던 경복궁에서 살았다고 하면, 그럼 니가 프린스냐라는 우스갯소리도 많이 들었었다. 우리에게는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황선미 작가의 <어울리는 곳간 서울>은 바로 그런 나의 추억이 어린 공간, 서울을 그리고 있다.

 

아직도 옛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서울 북촌 마을에서 게스트하우스와 공방을 겸하는 명인당 집 딸 미래의 눈을 통해 본 21세기 서울의 모습은 호기심을 자아내기 충분한 서사를 담고 있다. 능라장의 후예답게 각종 장신구들을 만드는 실력을 가진 어머니와 매일 여는 포목점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미래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서울의 옛 모습들을 상징하는 대표선수 같다고나 할까. 서울이나 도쿄 그리고 뉴욕 같은 대도시들을 가볼 때마다 메트로폴리스가 가진 그런 특징 없는 모습에 실망하곤 했는데, 미래가 들려주는 서울의 숨겨진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세계에 가장 자랑할 수 있는 그런 관광명소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와서 관광객을 위해 파리의 에펠탑이나 뉴욕의 록펠러 센터 같은 랜드마크들을 만드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다.

 

콘크리트 정글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자연미가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 가는 서울에서 곳곳에 숨겨진 텃밭으로 농사를 지러 가는 미래와 친구들의 이야기도 자못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보니 일전에 텔레비전 방송에서 도심농부를 컨셉으로 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지 않았던가. 관심을 가지고 보진 않아 잘 모르겠지만, 그런 참신한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굳이 스티븐 호킹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하찮게 보이는 꿀벌이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면 당장 인류가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말이 다시 한 번 환경보존이라는 과제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준다. 서울도심에서 양봉한 꿀로 만든 과자나 빵이라는 제품홍보가 엮인 상품이라면 소비자들이 더 호응을 하지 않을까?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제품 하나에도 스토리가 있는 그런 제품들이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시대가 아닌가 말이다.

 

미래네 게스트하우스에 묻게 된 미국 친구 조셉의 할아버지와 미래네 할아버지의 인연을 한국전쟁이라는 과정으로 엮는 과정은 좀 무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전쟁 베테랑이 손자에게 이제는 말라 버린 우물이 있는 집을 찾아 전쟁터에서 무훈으로 받은 훈장을 전해 달라는 설정 말이다. 맥아더가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궁전들을 전쟁 중에 지키는데 한몫했다는 훈훈한 이야기는 그가 중공군의 개입 때문에 한반도를 핵전장의 아수라장으로 만들 수 있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 앞에서 그 빛을 발해 버리지 않았던가. 한용운이나 윤동주 같은 독립운동가와 친일문학가인 노천명, 이광수를 같은 반열에 올리는 구성도 그랬고. 하긴 삐딱하게 보기 시작하면 한이 없이 이 정도에서 그만 두자.

 

<어울리는 곳간 서울>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전개는 괜찮았다. 이준선 씨가 맡은 일러스트도 과하지 않고 도시의 특색을 잘 잡아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스토리가 배어 있는 공간이야말로 세계인들에게 가장 호소력 있는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새겨들을 만했다. 좀 아쉬운 점들도 있었지만, 모름지기 세상사가 “칼레파 타 칼라”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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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중력가속도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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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이나 걸려서 배명훈 작가의 신작 소설집 <예술과 중력가속도>를 다 읽었다. 사실 마음 먹고 읽었다면 사나흘이면 다 읽었을 책을 도중에 이책저책 잡독을 하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바람에 좀 늦어졌다. 모두 10개로 이루어진 이야기 중에 초반이 좀 지루했다. 어느 순간, 독서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재미가 느껴졌고 단박에 읽을 수가 있었다.

 

작가의 전작들에도 SF 장르적인 담론들이 배어 있긴 했지만, 데뷔 11년차 작가답게 이제 연륜이 쌓일 걸까? 이야기 속에 밴 SF 코드들이 칼집을 잘 낸 생선살에 양념이 배듯 그렇게 부드럽게 재어져서 감칠맛이 났다. 그리고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소설집에서 대표선수를 꼽자면 아마 고래와 초원이 아닐까. 아, 작품 중에도 작가가 설명하듯 여주로 “은경”이라는 이름을 즐겨 쓰는 것도 배명훈 작가의 스타일이라면 스타일이지 싶다.

 

조개를 읽는 사내의 이야기는 인류보다 더 오래된 조개의 대화라는 기묘한 설정을 앞세운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구글에서 본 인도 출신 과학자 찬드라 보스가 주장한 식물도 자신을 키워주던 사람과 감정을 교류한다는 동비증 이야기가 연상됐다. 식물은 물론이고 금속도 그런 반응을 보인다고 하니 놀랍다. 수학 과외를 해주던 누나가 주고 떠난 조개가 물경 700억이나 된다는 물신주의에 접신한 생각이 둘 사이의 애련한 감정에 우선하는 걸 보니 독자가 분명 속물임에 틀림 없는 것 같다.

 

핵전쟁으로 인류 멸망을 앞둔 상황에서, 돌아갈 모국이 사라져 버린 것이 분명한 핵잠수함에 탑승한 화자가 신성한 푸른고래 “흰수염”을 범고래의 잔혹한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이는 혹등고래 무리의 노래에 빗대어 전개하는 이야기도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핵탄두가 자위적인 차원이 아니라, 서로 파멸에 이르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마지막 순간까지 승무원들을 이끌어야할 함장의 자살이라는 형태의 절망으로 현실화된다. 바로 위쪽에 있는 북한에서 수차례에 걸친 핵실험으로 핵무기 개발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는 뉴스가 들리는 상황에서 파멸적 핵전쟁에 대한 우화가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신성한 우두머리가 결국 최종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예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혹등고래의 이야기부터 믿었던 숨을 쉬지 않는 검은고래(핵잠수함)가 결국 모든 것을 끝내는 종결자라는 설정, 현실계에서 결코 떠나지 않는 탈장르적 소재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어지는 <티켓팅 & 타겟팅> 역시 고래와 관계되었으면서도 오늘날 음악산업을 지배하는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에 참가하기 위해 티켓팅에 전념하는 세 명의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 전에 시즌 오픈에 즈음해서 좋아하는 야구팀의 시즌 패키지를 사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 생각을 나게 만들어주는 체험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수많은 결제창들을 띄워 놓고 계속해서 F5 키를 누르던 기억이 마지막 완료 순간에 소설 속 주인공이 느꼈던 희열과 묘하게 동조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표제작인 <예술과 중력가속도>가 가장 재밌었던 것 같다. 잘 사귀던 여친과 절교를 선언하고 달에서 온 현대무용가의 기묘한 매력에 쏙 빠져 불같은 사랑에 빠져 버린 남자 주인공. 사실 현대무용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없지만 순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지구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쩌면 좌절에 빠져 버린 그녀를 사랑하는 일념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장면이 어찌나 그렇게 애절하던지. 그녀의 부모들도 손사래치는 공연에 참가했다가 거의 심장과 뇌를 쏟아낼 것 같은 그런 체험 끝에 그녀와 결혼에 골인한다. 그 모든 과정을 배명훈 작가는 아주 유머넘치는 그런 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SF 장르의 매력과 특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도 인간 간에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을 유려하게 소화해내는 실력이 역시 베테랑 작가답구나 싶었다.

 

이 매력적인 소설집을 특징짓는 키워드 중의 하나가 고래라면 다른 하나는 초원이다. 개인적으로 게르와 양떼가 넘실거리는 초원이 어떻게 해서 SF 장르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배명훈 작가는 공간적 배경으로 초원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고래가 현대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은유적 상징물이라고 한다면, 광대하게 펼쳐진 초원은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간적 배경이라는 걸까.

 

한 영혼에 대한 구원이 천하보다 소중하다는 기독교 교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전쟁이 한창 중이던 초원에서 타임머신을 개발하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가진 천재 소녀 구하기작전의 엔딩에서 보여주는 짜릿한 기시감은 어쩔 것인가. 수십 년 전, 눈 나쁜 여자와의 인연을 잊지 못하는 양치기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행 역시 양떼자리란 매개체를 통해 과거의 인연이 한 개인의 삶에서 소중한가에 대해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주기도 한다.

 

<예술과 중력가속도>는 다양하면서도 기대 이상을 보여준 소설집이었다. 소설 편식가로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책을 만나 봐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그런 독서 체험이었다. 배명훈 작가의 계속되는 SF 오딧세이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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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락모락 펭귄의 부엌 in the UK
펭귄 지음 / 애니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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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하고 만날 운명이 있는 모양이다. 이 책과 만나기 얼마 전, 웹툰으로 펭귄이라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영국남자 메브와 사는 펭귄 작가는 아마 지금 영국에 가 있는 모양인데 브렉시트 건으로 모두가 걱정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웹툰으로 소개했다. 사실 영국 사람들 말고 모든 이들이 우려과 걱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정작 본국에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렇군 싶었다.


그리고 이번에 영국남자 메브의 아내가 된 펭귄 작가가 소개하는 영국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만나 보게 됐다. 한국에서 지낼 적에는 알콩달콩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한국말 배우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는데 본격 요리책인 <모락모락 펭귄의 부엌>에서는 영국 음식은 정말 맛이 없어라는 기존의 편견을 깨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그녀가 소개하는 영국 요리들은 큰 어려움 없이 준비할 수 있는 거란 생각에 요리라면 정말 문외한인 나조차도 한 번 시도해 볼까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 정도였다. 친절도 하셔라. 원래는 요리까지 도전한 기록을 담는 그런 리뷰를 쓰고 싶었으나 타고난 게으름 덕분에 그 시도는 미처 못하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음식의 세계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 같다는 펭귄 작가 권두언이 계속해서 잔상을 남긴다. 그렇지 요리의 세계에 정답이 어디겠는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레시피는 정말 각양각색이 아닐까. 그 멋진 요리를 마다하고 현란한 음식의 향연이 펼쳐지는 뷔페에 가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수프를 주저하지 않고 퍼담는 메브의 모습을 보며 웃음꽃이 절로 피었다. 영국 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는 캐나다에서 한동안 살았던 옆지기에게 물어 보니,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육수에 해당하는 아주 다양한 스톡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선보인 양송이 수프에서는 아마 치킨스톡을 사용했었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소시지롤, 보기만 해도 절로 군침이 넘어가는 스코치에그, 간편가정식처럼 보이는 코티지파이 같이 간단하면서도 식감을 자극하는 사진들을 보니 당장 마트에 달려가 식재료들을 장만해서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요리를 먹고 싶은 마음이겠지. 토드인더홀처럼 기괴한 이름의 요리는 또 어떤가. 만화의 말미에 펭귄과 메브 모두 두꺼비킬러라는 컷은 정말 최고였다.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인 피시앤칩스도 당연히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칩숍이라고 해서 피시앤칩스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 사진을 보니 바삭하게 구워져 전통적 방식으로 신문지 같은 데 둘둘 말려져 나오는 피시앤칩스에 시원한 에일 맥주 한 잔 마시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오 지상천국에 온 기분이려나. 언젠가 영국에 가게 된다면 꼭 칩숍에 들러서 피시앤칩스를 먹어 볼테다. 마지막으로 삼색으로 장식된 디저트 코너의 트라이플도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어졌다. 아무리 간단하다지만 내가 그런 요리를 할 수 있을 진 정말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난 만드는 것보단 먹는 데 소질이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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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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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여전히 <고래>는 한국 최고의 데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 소설 한 편으로 나는 천명관 작가의 팬이 되었노라고 자부한다. 문제는 그 후의 행적이다. 야구로 치면 클리이튼 커쇼 급의 신인투수가 혜성처럼 등장해서 리그 MVP, 사이영상 그리고 팀을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려 놓을 정도의 활약으로 타자들을 씹어 먹었다. 그런데 2년차부터 서포머 징크스에 시달리다가 그저 그런 투수로 전락해서 저니맨이 되었노라는. 그런데 되짚어 보면 천명관 작가의 출발부터 B급 정서의 유전자가 그의 작품 곳곳에 잠재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애정이 <고래>시절 만큼은 아니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마음으로 읽은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에서는 정말 싸이의 <강남 스타일> 저리가라할 정도의 B급 정서가 폭발한다.


우선 내고향 인천의 지명이 숱하게 등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애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핵심적인 주인공 인천 연안파의 때깔 나는 보스 양석태 사장이 산 채로 묻혔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해서 복수극에 나선다는 건달전설로 시작되는 소설의 책장은 정말 쉴 새 없이 넘어간다. 그 와중에 한 껀 크게 잡아서 건달로 성공해 보겠다는 야심만만한 청년 건달후보 울트라(리스크)가 등장하기도 하고, 한탕 크게 사기 치고 베트남으로 튄 뜨끈이가 등장하며, 에로 영화계의 신화 박 감독이 가세하며, 안산 아웃소싱 인력업계의 거물 장대리, 빼어난 미모로 양 사장을 현혹시키는 연변 출신의 안마사 연희 아니 지니라는 아가씨, 20억 짜리 다이아몬드 강탈사건에 연루된 삼 대리의 출현, 영암출신 조폭으로 국회의원 도지사를 거쳐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며 시베리아 호랑이를 사겠다고 덤벼드는 시골촌닭 남 회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35억 짜리 종마 천둥이를 도둑맞은 부산 손 회장까지 악머구리 끓듯 욕망의 행성이 대충돌하는 난장이 벌어진다. 그런데 물론 소설은 그만큼 재밌다.


건달세계도 신자유주의 영향을 받아 꼭 필요한 인원만 챙기고, 일이 있을 때마다 동네에서 건달을 꿈꾸는 비정규직 선수들을 수급하는 아웃소싱 시대라는 말에 실소가 터졌다. 전세계를 정복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느 순간 건달업계에도 그 마수를 미쳤구나 싶어서 말이다. 헬조선의 대표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는 울트라와 깡구 그리고 공업용은 건달업계에서도 밑바닥 인생이다. 아, 조 위에 목록에서 양 사장의 오른팔이자 브레인으로 활동하는 형근에 대한 이야기가 빠졌구나. 빵에서 알게 된 동생 루돌프와 야릇한 관계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 참말로 눈물겨울 지경이다. 마초 중에 마초일 수밖에 없는 건달이 호모라는 설정은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기발하면서도 해괴한 발상인지 웃음이 빵빵 터진다.


업계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관심법의 명수로 알려진 양 사장이 자신이 원래 슈킹하려고 계획했던 20억 다이아먼드를 털리고, 괘씸하게 자신의 재산을 털어갈 만한 이들의 목록을 주욱 작성해서 궁예를 능가하는 신기의 기술로 마침내 범인을 지목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느닷없이 베트남에서 어렵게 모셔온 뜨끈이를 자기네 물건이라며 강탈해간 영암 남 회장과 일당의 호랑이 사랑은 또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호랑이 대신 고양이로 바꿔치기하려고 했다가, 족보도 모르는 무지렁이 건달들에게 다구리 당하고 동네 건달에게 접촉사고 때문에 두들겨 맞은 망신은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지 답이 없어 보인다. 우리 헬조선 삼총사들은 마떼기 작업에 나서서 부산까지 원정가서 말 무르팍을 조지라는 명령을 받고 갔다가, 양 사장보다 한 수 위인 손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35억짜리 종마 천둥이를 무슨 옆징 똥개 훔치듯 그렇게 탈취한다. 하지 말라는 짓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라고 하고, 하라는 짓은 당최 관심없는 이들이 건달계를 평정하겠다고 나섰으니 그 바닥이 엉망진창이 되는 건 시간문제가 아닐까. 어설픈 투시법이 종국에 가서 성공한다는 만화 같은 설정 역시 최고다.


이 시점에서 천명관 작가는 코믹활극 장르 정도로 해서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의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쓴 게 아닌가 하는 미필적 고의에 해당하는 의심이 불쑥 튀어나온다. 건달세계에조차 청년실업 문제를 갈음하는 아웃소싱이라는 노동의 양극화 현상이라는 현실 비판에서부터 사회에 독버섯처럼 퍼지는 사행성 성인게임방이 유원지에까지 등장할 수 있다는 가설, 밀수와 해외도피, 에로 영화 촬영 등 하류사회의 꿈틀거리는 욕망을 저인망식으로 긁어내는 솜씨가 가히 일품이지 않은가. 역설적으로 그것은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코리언 드림을 이룰 수 없다는 사회구조적 병리현상에 대한 찌질한 수컷들의 눈물겨운 투쟁의 기록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헬조선 삼총사들은 부의 상징인 BMW나 아우디, 벤츠 같은 고급차량을 자신도 언젠가는 몰 수 있는 착각에, 그런 차에 늘씬한 미녀를 태우고 도로를 질주하는 판타지를 적절하게 배합한 비현실적인 황홀경에 젖는다. 업계 뒷면에 도사린 누군가의 조종과 보호를 받고 배분의 법칙이 냉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는 엄혹한 현실은 뒤로 한 채.


양 사장은 또 어떠한가. 시대의 로맨티스트답게 연희 아니 지니를 업계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박 감독을 통해 에로영화 데뷔를 도모하고, 그녀의 과거를 덮어줄 줄 아는 그런 호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연안파의 전설로 불리는 그도 알고 보면 어린 시절 어창에 갇혀 죽을 뻔한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의 입지전적 인물이 되었단다. 어떻게 보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당한 학대와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살다 보니 오늘의 자리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할 게 공부 밖에 없어서 공부로 성공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또 누군가는 할 게 소위 뜻이 하늘에 통해 건달이 되었다는 식의 등치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을 쉴 새 없이 읽다 보면, 한 무리 건달들이 각종 연장을 들고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분탕질을 치고, 2미터 장신의 용가리와 폐유를 뒤집어 쓴 루돌프라는 이름의 애인을 둔 형근이 슬로모션으로 싸우는 장면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베레타를 들고 다이아몬드와 종마 천둥이를 모두 거머쥐고 튀다가 호랑이 밥이 되어 버리는 어느 건달의 최후는 너무 황망하니 이쯤에서 마무리짓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는 정말 뛰어난 페이지 터너라는 데 의견이 없다. 아울러 영화로 만들어도(흥행은 보장할 수 없다) 괜찮은 수작이라는 느낌이다. 다만 문학적 완성도에서 본다면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재밌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너무 가벼워서 탈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가볍게 읽기에는 정말 최고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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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29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명관 작가의 소설을 이 작품으로 처음 읽었어요. 너무나도 유명한 《고래》는 아직 안 읽어봤어요. 독서모임 시절 때 형님, 누님들이 《고래》를 호평했던 것이 기억나요. 이번 천 작가의 신작 소설은 가벼워 보였습니다. 《고래》를 인상 깊게 봤던 독자라면 신작 소설의 가벼움을 참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16-11-29 14:42   좋아요 0 | URL
정말 기대를 많이 하게 되고 <고래> 때문에 놓지
못하게 된 그런 작가인데,,, 그 후의 족적은 데
뷔작을 능가하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너무 뛰어난 데뷔작을 쓴 덕분일까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내가 주로 이용하는 알라딘 중고서점은 산본점과 수원점 그리고 분당점이다. 산본점이야 걸어서 바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자주 가지만 수원이나 분당은 생각보다 좀 더 멀다. 그래도 필요한 책이 있다면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 가는 편이다. 가기 전에 검색을 해서 책 소장유무를 확인하고 간다. 그래야 가서 헛걸음을 하지 않으니까. 가는 도중에 누군가 책을 사간 경험도 있다. 그리고 매장에 가서 돌아다니며 책을 구경하다가 미처 몰랐던 책을 만나는 경우도 많다. 알라딘 중고서점의 강점 중의 하나는 매일 같이 스캔해서 책 위치를 파악해 주는 서비스가 아닐까. 내가 가장 최근에 방문한 북수원홈플러스 4층에 자리잡은 알라딘 서점도 새로 오픈해서 직원분들이 스캔작업을 하느라 분주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단독매장으로 자리잡은 다른 알라딘 중고서점과 달리 북수원홈플러스 알라딘 중고서점은 팝업스토어 개념으로 다른 매장들과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바로 옆에 상상노리라는 키즈카페가 있는 걸 봐도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저층에는 먹거리를 파는 푸드 스토어와 홈플러스가 입점하고 있어서 장 보고 책 읽는 시스템도 구축되어 있다는 점이 강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경우 알라딘 매장들은 대부분 지하에 자리잡고 있는데 북수원홈플러스 매장은 지상 4층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리고 좀 더 넓은 연면적을 임대해서 그런지, 매장 내 공간이 다른 매장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넓고 이동이 용이했다. 평일 낮시간에 방문해서 그런지 몰라도 고객들이 비교적 적은 편이어서 마음껏 책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 시간만 좀 더 충분했다면 더 둘러보고 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출발하기 전에 검색한 책들의 위치가 인쇄된 종이를 들고 가서 서가에 비치된 책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사고 싶은 단 한 권 밖에 없다면 책의 퀄러티는 중요하지 않겠지만, 두 권 이상의 책이 있다면 퀄러티 비교는 필수다. 물론 퀄러티에 따라 가격 차가 발생하는 건 당연히 감수해야할 사항이다.



책을 둘러 보다 보니 집에 사서 모셔 두고 아직까지도(!!!) 읽지 않은 책들을 중고서점에서 만나 당황한 기억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 출신 작가 마틴 에이미스의 <누가 개를 들여놓았다> 역시 그런 책이었다. 나의 서가 정중앙에 떡하니 꽂혀 있는데 이렇게 중고서점에서 만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나 그래. 대산세계문학 전집으로 출간된 에른스트 윙거의 <대리석 절벽 위에서>도 서가에서 발견하고는 “음~”하는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윙거의 책을 중고서점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보유하고 있는 책이라 차마 살 수가 없었다.



아직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손님들이 거의 없었다. 나로서는 한가롭게 서가를 마음대로 구경할 수가 있어서 좋았지만, 종로나 강남 알라딘처럼 손님들로 벅적댔으면 하는 그럼 바람이 들었다. 책을 저렴하게 만날 수 있는 나로서는 책의 주요 수급처가 늘어나는 현상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책의 유통과 순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름 이해하지만 책의 소비자의 입장도 생각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원래 준비해간 자료를 보고 선정한 네 권의 책을 독서대에 두고 찬찬히 살펴 보는 중이다. 창비 세계문학 전집 시리즈로 나온 요제프 로트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제일 먼저 골랐는데, 생각보다 두꺼워서 깜짝 놀랐다. 맨 위에 놓은 루이스 세풀베다의 <핫 라인>은 한 때 전작에 도전하느라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고는 사지 않은 기억이 난다. 세풀베다의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생각보다 인기가 없어서 예전에 나온 책들이 소리 소문 없이 품절, 절판되고 있는지라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책 바구니에 담았다.


다음은 밀로라드 파비치의 <하자르 사전>으로 역시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책을 득템했다. 그리고 보니 파비치의 <바람의 안쪽>도 중고서점에서 샀는데 아직 안 읽고 버티고 있는 중인가 보다. 마지막으로 피터 니콜스의 <록스 호텔>은 오늘 아침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 생각 이상으로 재밌다.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에서부터 시작해서 루루와 제랄드 두 남녀 사랑과 이별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가는 기술이 남다르다. 왜 이렇게 좋은 작가들의 책은 우리나라에 드문드문 소개가 되는 걸까. 피터 니콜스의 다른 책도 만나 보고 싶다.



이제 진짜 레어 아이템이 된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도끼 전집의 레드정장본을 수 권 목격할 수 있었다. 이미 <죄와 벌> 그리고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입수를 했지만 미처 읽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라 선뜻 구매할 엄두를 내지 못하겠더라. 모름지기 책은 사서 읽어야 하는데 사는 속도를 읽는 속도가 도저히 따라 잡지 못하니 책 사는 행위가 점점 마음 한 구석의 부담이 되는 듯한 그런 느낌이어서 적절하게 구매를 자제하게 되었다.



서가의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문득 오래 전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을 한 권 만났다. 내가 수년 전에 서평계에 처음으로 입문하면서 만났던 책이 <달라이 라마 자서전>이었고 두 번 째 책이 바로 이날 다시 만난 <만사형통>이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힘을 잔뜩 들여서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것 같다. 다 지나고 나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지만, 또 그땐 그랬으니까. 그 시절을 되돌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직 도서 분류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발터 뫼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가 영미문학으로 분류가 되어 있더라. 책에 대해 조금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직 훈련과 교육이 부족한 모양이다. 그 외에도 그런 부분들이 많이 눈에 띄었지만 그런 점들을 다 꼬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나의 마지막 장바구니는 처음에 골랐던 대로 채워졌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핫 라인>, 밀로라드 파비치의 <하자르 사전>, 피터 니콜스의 <록스 호텔> 그리고 요제프 로트의 <라데츠키 행진곡> 이렇게 네 권의 책을 골랐다. 일주일 동안 네 권의 책 중에서 가장 얇은 <핫 라인>은 이미 읽었고, 오늘부터 <록스 호텔>을 읽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출발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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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0-1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스24 중고서점 등장 때문일까요? 요즘 알라딘 중고서점이 하나씩 새로 들어서는 상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

레삭매냐 2016-10-18 11:02   좋아요 0 | URL
어디선가 들은 바로는 알라딘이 더 이상의 매장 설립은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도 우후죽순식으로
마구 생겨가고 있네요. 이젠 오프라인 수준인 것 같습니다.

한 도시에도 두 곳씩 생기고, 스타일도 점점 진화하고 있죠.
대형마트 팝업스토어는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제가 알기로는 중고서점 운영해서 벌어 들이는 수익이
제법 짭짤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점점 매장이 늘어
나는 거게죠. 장사가 안 되는데 굳이 세우겠습니까.

아마 이에 질세라 예스24도 매장을 늘리고, 인터파크
도 중고서점 시장에 뛰어들겠죠. 새책 파는 교보만
안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