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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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다시 루이스 세풀베다를 읽었다. 어제 새로 오픈한 북수원홈플러스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서 모두 4권의 책을 샀다. 원래 계획했던 책 2권 그리고 즉석에서 산 2권. 후자의 두 권의 책 중의 하나가 바로 루이스 세풀베다의 <핫 라인>이었다. 물론 <핫 라인>은 오래 전에 읽은 책이다. 하지만, 당시에 책을 사진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던 것 같다. 나의 몇 안되는 전작주의 작가 목록에 당당하게 올라 있는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이니 당연히 컬렉션에 추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보니 간간히 소개되는 그의 책을 읽고서도 리뷰를 쓰지 않은 것 같다. 다시 읽고 쓰지 못한 리뷰를 써야지 싶다.

 

세풀베다의 <핫 라인>은 2002년에 발표된 책으로 흑색 소설 계로 분류된다는 역자 후기를 읽었다. 1973년 아옌데 인민연합 정부가 극악한 피노체트 일당의 쿠데타로 전복된 이후, 칠레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사그라 들어 버렸다. 소설에서는 마누엘 칸데라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군부독재의 대표선수가 자그마치 16년 동안이나 나라를 통치하면서, 칠레의 자유를 짓밟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조국이 지상천국이라는 선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씁쓸하게도 어느 나라의 현재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그리고 보니 군부와 결탁해서 독재의 과실을 즐긴 기득권층에게 조국은 지상천국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그런 나라 칠레의 오지 파타고니아, 아이센 해협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양갈비를 뜯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가축 도둑들을 잡는데 매진하는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 형사다. 참고로 조지 워싱턴 형사의 형제 이름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라고 한다. 어느 날,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지역 사람들의 가축을 훔친 가축 도둑들에게 어김없이 정의의 총질을 해댔다. 문제는 그 중 하나가 국가 최고 권력자 칸데라스 장군의 아들이었다는 점이다. 카우카만을 지도하는 서장은 자기 휘하의 유능한 형사의 파멸을 두고 볼 수 없어, 수도 산티아고에서 성범죄를 담당하는 부서로 전출시키기에 이른다.

 

카우카만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음습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소설의 프롤로그에서 화자가 만난 카우카만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안 좋”다는 예감을 충분히 받았다. 그의 말대로 고약한 냄새가 나는 쓰레기 천지에, 파타고니아와는 달리 자연친화적이지 않은 수도의 분위기가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존재는 택시운전사 아니타 레세스마 뿐이다. 둘의 나이가 합쳐 여든이 넘어가는 두 남녀는 중간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빠르게 사랑에 돌입한다.

 

새 부임지의 동료 형사들은 최고 권력자 아들의 엉덩이를 날려 버린 마푸체 인디오 출신 카우카만 형사에게 아무 일도 주지 않겠노라고 선언하지만,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국가의 녹을 축낼 수는 없지 않은가. 혹독한 군사독재를 피해 칠레를 떠났던 배우 커플이 조국으로 돌아와 새로 시작한 사업은 바로 핫 라인을 이용한 폰 섹스 비즈니스였다. 어떤 미치광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업은 나름 호조였던 모양이다. 우리의 주인공 파타고니아의 카우보이 카우카만 형사는 바로 무언가 안 좋다는 느낌을 확연하게 받는다. 과연 주인공 카우카만 형사는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협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라틴 아메리카 문학 씬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이 횡행하던 시절에도 루이스 세풀베다는 추세를 따르지 않고, 현실도피 대신 정면승부를 택했다. 비록 군부에 의해 추방되어 독일과 스페인을 전전했지만 필생의 업이었던 문학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글을 써댔다. 16년 기나긴 피노체트 독재를 끝내고 마침내 민주화를 이루어 냈지만, 피노체트 시절 군사독재에 협력했던 기득권 우파 세력의 벽은 강고했다. 그런 칠레의 현실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환경파괴를 소재로 삼아 다양한 글을 세풀베다는 발표해왔다. 누가 봐도 누아르 계열의 소설이라는 점을 <핫 라인>에서 느낄 수 있는데, 어둠을 어둠으로 제압하겠다는 설정이었을까. 마지막 칸데라스 장군과의 대결에서 카우카만은 인디오는 지난 수백년 동안 패배를 거듭해 왔지만, 우이냐(아라우코 산맥에 사는 작은 고양이)가 승부가 뻔히 보이는 개들과의 대결에서 그랬던 것처럼 적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칠레 민주화 투사로 투쟁하던 배우 커플이 귀국해서 에로틱한 전화 사업자로 변신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칠레가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올곧은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사업에 종사했을까? 법 위에 무소불위의 권력이 횡행하는 비정상 국가에서 정의와 불의의 경계는 모호하기만 하다. 국가만이 행사할 수 있는 폭력을 개인적 원한 때문에 사적으로 전용하고, 형사를 죽이기 위해 고용된 킬러가 자신을 제압한 인디오 형사에게 뇌물을 주겠다고 제안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실소가 터져나왔다.

 

리얼리즘에 기반한 소설이지만, 결말은 지극히 판타지에 가깝다. 어쩌면 현실세계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설정을 한 걸까. 마지막 문단에서 수도 산티아고의 쓰레기 수거차량들이 자기 본연의 임무를 위해 부지런히 도심을 누비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정말 대가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어주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이지만, 잊어서도 안 되고 용서할 수도 없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게 해줬다.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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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오공훈 옮김 / 그러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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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발굴해냈다면,
2016년 로베르트 제탈러의 <한평생>도 버금가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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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 - 최민석 초단편 소설집
최민석 지음 / 보랏빛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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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가 돌아왔다. 희대의 걸작이라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풍의 역사>에서 영화 <국제시장>에 버금갈 만한 스케일로 독자를 현혹하던 최민석 혹은 개민석이라고 자칭하는 작가가 이번에는 이기호의 작가의 뒤를 이어(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려나) 초단편 소설집에 실린 42개의 이야기를 자크 라캉, 레비스트로스, 사르트르, 하이데거 등등의 철학적 사고와 구조주의 어쩌구와는 전혀 상관 없이 글발 내키는 대로 창조해냈다. 그러니 이 어찌 읽지 않고 배길 수가 있으리오. 냉큼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읽어냈다.

 

묘하게도 최민석 작가의 <시티투어 버스를 탈취하라> 이래로 그의 팬이 되어버린 듯 싶다. 그가 그렇게 절절하게 하소연해대는 저주받은 걸작 <풍의 역사>도 읽었고 <쿨한 여자> <능력자>까지 모두 섭렵했으니 말이다. 그 정도 읽었으면 이 작가의 뻔뻔한 스타일이 어떤지 그리고 어떤 재미를 전달해 줄지 대충 어림짐작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다니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작가가 난데없이 스페인어 학원에 다니다 만난 맥주 1,000cc 원샷녀 이리네와 썸을 타는 이야기를 보면서 문득 우리 독서모임에 출몰하는 어느 남정네가 바로 연상됐다. 그 친구도 다니엘하고 참 비슷한데,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그 친구가 글을 쓰면 다니엘 수준 정도의 글을 뽑아 낼 수 있으려나 하는 엉뚱한 상상에까지 도달했다. 어쨌든 제목만큼이나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은 뻔뻔하고, 군데군데 야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재밌다.

 

몇몇 이야기들이 서로 교차하는데 가운데 소설집은 앞으로 내달린다. 아주 뻔뻔하게 동경에서 하이볼을 탐하는 김평관이 쫓는 진범으로 말더듬이를 등장시켜 ㄱㄱㄱ를 늘어뜨리며 원고분량을 뽑아내는 태업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작가 내공이 대단하군. 생뚱맞게 미시시피에서 달려온 모기떼가 전국을 엄습해서 도시가 죽어가고 좀비들을 양산해 낸다는 설정은 또 어떤가. 약쟁이 그레고리가 알고 보니 고아원에서 천사로 위장한 이사장에게 돌아가신 어머니가 유물로 남겨주신 소중한 목걸이를 뺏긴 지질한 영철이었다니. 우리에게는 영화 <라 밤바>로 널리 알려진 리치 발렌스가 남긴 몇 안되는 곡 중의 하나인 <다나>로 숱한 염문을 만들어내고, 교도소에서 철사장으로 익힌 기타 주법으로 그야말로 세상을 평정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들이 왜 이렇게 난 재밌는지 모르겠다.

 

전 여친 소피아가 마치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천의 얼굴을 가진 이선 호크처럼 마스크를 벗어대며 다양한 인물로 등장해서 노벨문학상을 받을 작가를 괴롭히는 장면은 또 왜 이렇게 유쾌하던지. 물론 이번 봄에 동료작가 한강 씨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본상이 아니란다, 아카데미로 치면 외국어영화상 정도 되겠다. 작년 아카데미 외국어상 수상작이 어떤 영화인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과연)을 받았다는 사실에 매우 자극을 받은 모양이다. 자신의 소설집에 계속해서 노벨문학상 타령을 해대는 걸 보면 말이다. 어쩌면 스스로 “난 그래 속물이다, 어쩔래!”라고 악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 소설에 등장하는 중요한 사이드킥 한 명을 빼놓았구나.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이재만. 작가가 서식하는 서울 M동에서 자동차 수리센터를 운영하는 양반이라고 하던가. 작가에게 고통을 안겨준 죄 때문에 수리센터 사장님 이재만 씨는 계속해서 그의 소설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또다른 마장동에 사는 수리센터 사장님의 귀여운 항의문도 게시하는 친절함도 잊지 않는 귀요미 같은 작가의 소심한 복수극을 응원할 수밖에. 작가가 맡긴 차의 수리를 불친절하게 해주었다는 이유로, 고양이로 변신해서 거세를 당하는 수난극에 시달리는 장면은 정말 최고였다. 술만 마시면 개로 변신한다고 해서 스스로 개민석이라고 부르는 서술 앞에서는 자학적 쾌감의 일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소설 제목에 문득 미국의 그 수많은 주 이름 중에서 하필이면 미시시피 주를 골랐을까라는 궁금증이 유발됐다. 아니 주 이름 미시시피가 아니라 강 이름 미시시피였던가. 뭐 아무래도 상관 없을 것 같다. 거짓말을 전문으로 하는 업자의 흥겨운 일상사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막판에 기록하기 위해 글을 썼노라는 선언 앞에서는 정말 숙연해 지기도 했다. 그렇다, 모름지기 업자라면 그렇게 흥겨운 이야기 속에서도 감동의 쓰나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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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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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 산 제임스 설터의 책을 이제야 다 읽었다. 옆지기에게 보라고 권해 주기도 했었는데 나는 이제야 읽었다. 지난주에 다녀온 서천, 변산 그리고 군산을 도는 여정 도중에 이제는 작고하신 분의 책을 읽는 기분은 묘했다. 그 때 <스포츠와 여가>도 함께 데려 갔었는데 그 책은 어제 새벽부터 읽기 시작했다. 역시 설터 작가의 책도 전작 섭렵의 길에 들어섰는가.

 

40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이지만 설터의 대표작 <가벼운 나날>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블라디미르(비리) 벌랜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네드라의 결혼생활에 관한 이야기다. 유대계 미국 작가인 설터만큼 삶의 미세한 균열이 붕괴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을 예리하게 짚어내는 작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변하는 계절, 항상 벌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기들과의 사교모임 그리고 사소한 대화들을 통해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댄다.

 

성공한 건축가인 벌랜드 부부는 뉴욕 허드슨 강 계곡 부근의 우아한 빅토리아 스타일의 집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게 고객들과 지인들이 모이는 사교모임은 일상이다. 네드라는 맨해튼으로 차를 몰고 가서 고급 백화점인 블루밍데일에서 쇼핑을 즐기고, 친구들과 담소를 나눈다. 비리와 네드라에게는 프랑카와 대니라는 어여쁜 딸들도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삶이야말로 모두가 추구하는 이상이 아닐까. 게다가 비리와 네드라에게는 각자의 애인도 있다. 이게 뭐지? 이야기의 시작은 아마 1958년이었던 것 같은데 거의 이십여 년에 달하는 그들의 결혼생활을 작가는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예리한 시선으로 글로 옮긴다.

 

가족에 헌신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인 비리,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파티를 위해 직접 고급스러운 식재료들을 장보고 준비하는 아내 네드라 그들의 일상은 정말 완벽해 보인다. 그들 부부에게 서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지향점은 서로 달라 보인다. 냉소적으로 표현하자면 서로의 필요에 의해 굴러가는 부부였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미국 상류계층의 문명화된 부부는 결혼생활 유지를 위해 전력을 다하면서 동시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톨스토이 소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모든 가족은 나름의 문제를 가지고 있긴 마련이 아니었던가.

 

비리와 네드라 역시 서로 다른 이성이 함께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들을 모두 겪는다. 아이들의 성장, 생일파티, 크리스마스 선물교환과 부모의 죽음 같은 일상사가 다채롭게 전개된다. 그리고 설터의 다른 소설들처럼 그들이 아는 친구들과 지인들이 끊임없이 등장해서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아낌없이 나누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그들은 네드라가 준비한 음식을 들며 뉴욕 연극무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루머와 가십들을 공유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삶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자신들의 결혼생활도 언젠가 호사가들의 요릿감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더 놀라운 일 중의 하나는 오쟁이진 남편인 비리가 아내 네드라의 애정행각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감아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결혼생활을 유지해 가는 배짱이 대단하다. 또 한편으로 자신의 애인이자 비서였던 카야를 그리워하는 이중적인 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뉴욕의 사교계도 비좁은 모양이었던지 곳곳에서 카야의 흔적을 찾는 비리의 심리에 대한 묘사도 뛰어나다. 사랑의 감정인지 그도 아니면 젊음에 대한 막연한 동경인지 모를 그런 감정들이 부유한다. 책이 출간된 다음, 설터도 비리와 네드라처럼 이혼했다고 하는데 비슷한 결혼의 위기를 경험해서인지 벌랜드 부부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남다르다고 해야 할까.

 

부산한 삶의 와중에 그들은 삶이 권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고 네드라는 비리에게 어느날 이혼을 선언한다. 언제나처럼 아내의 의견에 절대적으로 따랐던 남자는 고분고분하게 이혼에 동의한다. 네드라는 자신을 걱정하는 지인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또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선다. 뭐 삶이란 그런 거지. 네드라가 떠나고 나서야 비리는 그녀가 없는 자신의 삶은 실패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게 된다. 어쩌랴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것을 정리한 비리 역시 유럽행 여객선에 오른다. 네드라와 딸 프랑카의 환송을 받으면서. 그리고 로마에서 또다른 연인 리아를 만나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새로운 출발에 나선다. 네드라는 그녀의 아버지처럼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 <가벼운 나날>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집단주술처럼 되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행복은 행복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댓가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모든 것을 품에 안고 행복할 수는 없던 모양이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아니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했는데, 하나씩 내려놓다 보니 정작 그것들이 행복을 이루는 결정적인 요소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리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아니 믿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작가는 대답한다. 그러기에는 우리는 너무 멀리 왔노라고.

 

군데군데 책에 보이는 제임스 설터 작가가 창조한 문장들이 빛을 발한다. “권태로운 일상에 묶여 있는 이들 옆으로 진실이 헤엄쳐 지나”간다(320쪽), “어떤 사건에는 전조가 있고, 파멸에도 시작이 있다”(315쪽)거나, “대화가 보이기만 하고 들리지는 않았다”(196쪽), “서로에게 줄 것이 없옸고, 이 순수하고 불가사의한 사랑으로 묶”여(188쪽) 있다는 표현들은 정말 원서로 다시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쉴 새 없이 다른 책들을 읽어 대는 바람에 지금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내년쯤 다시 만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설터 씨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시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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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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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세월호, 메르스 그리고 얼마 전 발생했던 5.8짜리 강도의 경주 지진까지. 내가 사는 아파트는 24층인데, 그런 강도의 지진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중요시되어야 할 안전보다 빨리빨리 속도전과 천박한 물질만능주의 때문에 소중한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시절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데 이미 지금으로부터 69년 전에 이미 이런 사태를 예견이라고 한 듯,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에서 각자도생의 살풍경한 모습들을 스케치해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오랑에 어느 날 쥐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페스트(흑사병)가 도시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다. 누구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페스트라고 명명된 공포는 시시각각 도시를 그리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위협한다. 서사를 이끌어 가는 서술자는 객관적 시각에서 오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연대기처럼 기술한다. 그는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냉정하게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해서 기록한다.

 

여느 소설처럼 <페스트>에도 몇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죽은 쥐를 발견한 베르나르 리외는 의사다.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리외는 도시에서 페스트라는 공포에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우는 전사다. 리외는 사랑하는 아내를 요양하기 도시 밖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수위 미셸의 죽음, 도시의 놀라움이 공포로 변하는 순간이 도래한다. 서술자의 기록대로, 유감스럽게도 전쟁만큼이나 많이 발생한 페스트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었고 속수무책이었다. 어떻게 작년에 많이 본 장면이 아니던가. 메르스가 전국을 강타하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병마의 위세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던 어느나라의 이야기가 아니였던가. 컨트롤타워의 부재는 말할 것도 없고. 1부의 엔딩을 보자,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

 

이쯤에서 리외와 주변 인물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리외의 늙은 동료의사 카스텔은 혈청을 제조해서 도시를 집어 삼키고 있던 페스트 균에 맞선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장 타루는 오랑에 휴가 왔다가 도시가 폐쇄되면서 머물게 된 이방인으로 도덕적인 인도주의자다. 그는 리외를 도와 자원보건대를 조직해서,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리외를 돕는다. 코타르는 자살을 시도한 범죄자였지만, 페스트가 초래한 도시의 혼란이 반가운 처지다. 누군가의 불행이 또 어떤 이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조제프 그랑은 시청의 비정규직 보조 직원으로, 페스트에 관련된 통계 업무 자원봉사에 나서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레몽 랑베르를 오랑에 갇힌 신문기자로 꼼수를 동원해서 오랑을 탈출하고자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개심해서 보건대에 지원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페스트에 잃은 오통은 수사검사로 규제보다 처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관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늘루 신부는 열렬한 강론을 통해,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도시가 죄값을 치르고 있는 중이니 반성하라고 대중에게 통렬하게 외친다. 하지만, 죄없는 오통 검사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에 쓰러지는 것을 보며 페스트 사태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일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이 도시를 휩쓰는 동안에도 복원되는 일상의 놀라운 항상성에 놀랐다. 되돌아보면 작년에 메르스가 전국을 강타했을 적에도 누군가는 아이의 돌잔치를 했고, 커플들은 꾸준히 결혼식을 올렸고 하객들은 그들을 찾아 아낌없이 축하해줬다. 그 즈음에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셔서 두려운 마음에 손소독을 하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으면서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를 찾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와서는 아마 뜨거운 육개장을 먹었지 아마. 그렇게 질병과 고통의 시간들을 이겨낸 우리들처럼 오랑 사람들도 식량과 와인의 결핍 속에서도 일상을 즐겼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연극 관람을 했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어쩌면 페스트가 상징하는 건 파늘루 신부의 강론처럼 일상에 파묻힌 우리들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메멘토 모리, 죽음이 일상화되었지만 의도적으로 그 죽음을 무시하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리외와 타루 그리고 그랑 그룹은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페스트가 휩쓰는 오랑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카뮈의 조국 프랑스의 모습으로 비친다. 한때 전 유럽을 휩쓴 나치 독일의 위세에 눌려 협력하던 꼴라보들은 조국의 위기가 오히려 그들에게는 기회인 것 마냥 설쳐댔지만, 조국해방을 위해 그리고 한 명의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가며 싸운 전사들을 정의는 외면하지 않았다. 계절이 겨울로 접어 들며, 그렇게 위세를 부리던 페스트는 마침내 소멸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대로 갈 수 없다는 듯 의사 카스텔, 파늘루 신부 그리고 타루의 생명을 앗아간다. 그것은 마치 마지막 번제물을 요구하는 것처럼 야속하기만 하다.

 

죽음의 공포가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보건대의 용사들인 리외와 타루 사이에 피어나는 인간 우정에 대한 작가의 스케치가 돋보인다. 우정을 위해 함께 해수욕을 하자는 제안이 엉뚱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일상의 놀라운 복원력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질병이 영원하지는 않으니, 그렇게 질병(페스트)이 물러가면 우리는 또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암시일까. 소설에서 페스트라는 질병은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어하는 인간의 갈망에 대한 장애물이자 억압을 상징한다. 예의 억압은 우리 주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던가. 불의에 의거하는 시위를 막는 억압, 정당한 파업권을 주장하는 금융노동자들의 파업참가를 교묘하게 방해하는 억압, 귀족노조라는 프레임으로 내가 가진 권리를 조롱하는 언론의 억압 같은. 그런 억압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니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다.

 

지난 경주 지진 때,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노부부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억압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역시 연대 뿐이라는 위기 상황 속의 계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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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건물 2층 이상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지진 흔들림에 공포감을 많이 느낀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은 지역에 사는 친구의 집이 아파트 5층에 삽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건물의 흔들림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저는 빌라 1층에 사는데,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서 건물 파편에 깔려 죽는 상황이 생길까봐 무서워요. 그래서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면 안심할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진 대처 매뉴얼에서는 책상 밑에 숨으라고 지시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