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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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장르의 글을 잘 쓴다는 박연선 작가의 한국형 코지 미스터리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를 읽었다. 여름에 자고 나니, 아침에 가을이 되었더라는 날씨치럼 그렇게 푹푹 찌던 폭염이 드디어 물러가고 가을이 도래했다. 그렇게 계절의 전환기로 접어드는 늦여름에 딱 맞는 재밌는 미스터리 소설로 폭염을 몰아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네 소녀 실종사건이라는 15년 전, 운산면 두왕리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파헤치는 수사관 역할을 방년 21세 처녀이자 삼수생 강무순 씨가 캐스팅됐다. 그녀를 서포트하는 조연 역에는 종갓집 소년 꽃돌이(유창희)와 무슨의 할매이자 폭력노파 홍간난 여사를 배치했다. 장르물이라고 해서 굳이 심각할 필요가 없다고 박연선 작가는 선언한다. 얼마든지 유쾌할 수 있다는 가능성애 도전했다는 느낌일까.

 

드라마와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일가를 일군 작가답게 마치 드라마 대사를 치는 듯 호흡이 빠르고 경쾌하다. 누군가에게는 비극으로 기억될 네 소녀 실종사건을 다임개술(타입캡슐)이라는 지난 시절에 유행했던 소재를 이용해서 외부에서 투입된 강무순이가 느슨해 보이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구성지게 파헤친다. 무순 역시 15년 전에, 비극의 현장에 가찹게 존재할 수 있었던 그런 상황이었지만 위기를 모면하고 할아버지의 상을 당해 홀로 계신 홍간난 여사를 위무하고 보필하라는 특명을 받고 두왕리에 잔류하게 되었다.

 

무순과 꽃돌이는 팀을 이루어 보물상자이길 바랐던 다임개술 안에 들어있던 몇 가지 단서들을 빌미로 네 소녀 실종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의 운명을 한 꺼풀씩 차례로 벗겨낸다. 첫 번째 주자는 종갓집 아기씨로 만인의 연인이었던 유선희, 마을의 소문난 말썽꾼이었던 유미숙, 목사관의 둘째딸이자 무순을 잘 챙겨 주던 조예은 마지막으로 효녀로 유명했던 황부영의 과거와 현재에 박연선 작가는 소설의 포커스를 정조준한다. 문득 누군가의 생과 사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희비가 교차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매 챕터의 끝에 주마등이라는 코너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독백도 등장한다. 아무래도 네 소녀 실종사건의 키를 쥔 것으로 보이는 신원불명의 캐릭터의 이야기는 코지 미스터리 소설의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역할을 무난하게 수행한다. 꽃돌이 소년이 진중하게 무게를 잡는 역할을 해냈다면, 폭력노파 홍간난 여사는 그 반대편에 서서 가볍지만 두왕리 대소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오지라퍼로 종횡무진 활약한다. 다수의 작품활동을 통해 캐릭터의 밸런스에 대한 감각을 익힌 덕분이라고나 할까.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경계선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코지 미스터리답게 어쩌면 그런 균형감각이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눈여겨 본 점 중의 하나는 다른 건 몰라도 드라마 시작하는 시간 하나는 칸트 뺨치는 정확도를 자랑하는 드라마교의 열혈신자인 홍간난 여사를 앞세운 드라마 비판이다.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드라마 전개를 예상하는 홍간난 여사의 숭악한 손녀 무순도 예외는 아니다. 빤한 소재를 반복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제작진의 시청률 타령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다시 네 소녀 실종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 두왕리를 습격한 언론에 작태에 대해서도 작가의 비판은 냉정하고 준엄하다.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알 권리를 두왕리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큰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과 기업인들에게 추상같이 적용시키기만 해도 우리의 국격이 상승하지 않을까?

 

후반으로 갈수록 작가는 소설 곳곳에 깔아둔 밑밥에 걸린 이야기들을 주낙 낚듯이 수확한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원인과 결과 그리고 범인 설정이야말로 모든 미스터리가 갖추어야할 기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꼭 꼬집어 이야기할 수 있는 결핍도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참을 만한 소설의 가벼움 때문이라고 한다면 과언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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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뒷조사 복음서 뒷조사
김민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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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물결플러스에서 <마태복음 뒷조사>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검색하다 보니 그 전에 이미 <마가복음 뒷조사>라는 책이 먼저 출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침 구할 수가 있어서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기독교 복음서를 웹툰으로 구현하려는 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들 진중한 책읽기를 싫어하는 세대에, 웹툰이라는 접근방식이 신선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역시나 성경이라는 큰 틀의 텍스트 안에서 맴돌기라는 전형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신약 복음서에 대한 전거를 전승과 구약에 의해 해석하다 보니 생길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구성은 불신자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는 사판 검사가 대중을 미혹시킨다는 이유로 복음서를 고발한다. 그러자 사판 검사의 맞수이자 예수 그리스도 시대를 증언할 수 있는 유력한 용의자로 예수 그리스도가 탔던 나귀의 68대손 하몰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초반에 등장했던 스튜어트 변호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취약 포인트가 드러나기도 한다. 아마 <마태복음 뒷조사>에 등장하려나.

 

독자는 <마가복음 뒷조사>를 읽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사판 검사는 불신자치고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상당한 지식과 교리의 핵심을 찌르는 의구심을 가진 캐릭터로 등장한다. 사판 검사가 예리한 공격수라면, 성서동물원을 탈출한 나귀 하몰은 사판 검사의 예리한 창을 교묘하게 방어해내는 소방수 역할이다. 김민석 작가가 구상한 취조 스타일도 마음에 들었지만, 법정 드라마로 엮어냈어도 재밌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기 기독교의 두 스타였던 바울과 베드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바울 서신보다 뒤늦게 쓰인 복음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와중에, 로마의 통치에 대항해서 일어난 유대전쟁이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후에 특별히 기록된 문헌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이적이 자세하게 전해지게 되었느냐는 사판 검사의 초반 공격에 나귀 하몰은 당시 유대에서 행해지고 있는 공동체 구전전승이 해결책이었다고 답한다. 기록문화에 앞서 구전전승의 신빙성에 무게중심을 두었다고 해야 할까. 요즘 같이 디지털 문화가 발전한 시대라면 각종 동영상들이 대신하겠지만 말이다.

 

<마가복음 뒷조사>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 생존 당시에도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비유(parable)의 현대판 해석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보여주는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바빌론 유수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의 모습이 궁극적으로 가르키는 지점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설명한다. 기존의 기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기독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기독교 웹툰은 기독교 초심자라기 보다 만화 후반에 소개되는 아련한 과거를 가진 사판 검사처럼 가나안 성도들을 위한 게 아닐까.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통치로부터 유대를 해방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정치적 해방 곧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을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구원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민족으로부터도 그리고 당연히 로마 황제의 버금가는 세속의 권력을 가진 ‘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개념 때문에 로마인들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고,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제사장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처형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십자가 처형과 이어지는 부활이야말로 기독교 구속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저자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 다시 (구약)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문제점을 가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성경, 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인용해야 한다는 점이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읽기 전에는 공관복음 중에 가장 먼저 저술된 <마가복음> 저술에 관련된 무언가 새롭고 파격적인 이야기들을 기대했었는데 그런 부분 대신 교리와 비유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좀 지루해졌다. 사판 검사가 저명한 유대 랍비 저리가라할 정도로 신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나귀 하몰의 이야기에 교화감동될 거라는 클리셰이에 가까운 설정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 않았던가. 뭐랄까 ‘복음 전파’라는 작가의 기획의도와 취지를 따르지 못하는 무언가 부족한 구성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복음서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고민과 오늘날 교회가 반성해야 할 지점 등에 대한 부분이 너무 간략하게 처리된 것 같아 아쉽다. 그런 점에서 스튜어트 변호사와 콩이 등장하는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태복음 뒷조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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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2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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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아는 지인에게 부탁을 해서 마누엘 푸익의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의 영문 번역판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물론,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로 된 책을 읽기는 쉽지 않았고 도중에 포기해 버렸다. 지난주에 마누엘 푸익의 이 쎅시한 제목을 가진 책이 출간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심히 기뻤다. 그래서 작가의 바이오그래피를 정리해 봤고 그가 쓴 8편의 소설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이 몇 권이나 되는지 봤더니 <거미여인의 키스>가 전부였다. 그래서 중고서점으로 달려가 <조그만 입술>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 역시나 매혹적이었다. 한 때 할리우드 키즈로 영화감독을 꿈꾸던 작가의 소설을 읽는 재미는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오늘 지난 주말에 주문한 책이 도착했고, 기갈 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책에 몰입했다.

 

푸익의 대표작 <거미여인의 키스>처럼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에도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부유한 노인네 라미레스 씨와 그를 간호하는 36세의 남자 래리(로런스 존)가 주연을 맡았다. 작가가 사랑한 영화처럼 수많은 다이얼로그로 이루어진 소설은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상대를 알아가고 이해해 가는 과정이 느릿한 속도로 전개된다. 어쩌면 이 소설도 연극 무대에 올리기에 아주 적합한 그런 작품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년시절부터 할리우드 영화를 즐겨본 푸익은 비록 자신의 꿈처럼 영화 연출을 담당하는 감독은 되지 못했지만,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에 영화기법을 담아내는 것으로 자신의 꿈을 이뤘다. 뉴요커답게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노인 요양사 래리는 대화를 통해 무시로 자신의 개인영역에 침입하려는 라미레스와 충돌한다. 하지만 수년간의 실업자 생활 때문에 살인적인 뉴욕의 물가를 감당할 수 없었던 래리는 라미레스의 휠체어를 밀어 주고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로 수다를 떠는 손쉬운 돈벌이를 마다할 수가 없었고,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온 두 개인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푸익은 허위와 진실이 교차하는 래리와 라미레스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 주인공들의 면면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엇이 과연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시대적 배경은 1978년, 라미레스의 고국 아르헨티나에서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가혹한 군부통치가 진행 중이었고 투옥과 연이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라미레스는 부유한 형의 후원으로 석방된 뒤 뉴욕에서 고문 후유증을 치료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며느리는 군부의 폭탄 테러로 모두 죽었다. 아니 그런 것으로 보인다. 기억상실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라미레스의 말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두서없이 이어지는 두 주인공들의 대화는 종교와 권력, 연애, 사랑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를 아우른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라미레스가 래리가 들려주는 대화의 디테일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도대체 무슨 피자를 먹었는지가 왜 중요하다고 생각한 걸까.

 

라미레스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뉴욕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박사로 역사학 교수 자리도 지냈다는 래리의 진술은 더 오락가락한다. 미국 역사상 첫 패전으로 기억될 베트남전이 끝난지 고작 3년 밖에 안된 상황에서, 래리는 양심적 병역기피자였노라고 또 어떤 날에는 해병대로 2년간 베트남에 파병되었다는 말로 독자를 현혹시킨다. 라미레스를 추잡한 관음증 환자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성생활에 관련된 이야기를 서슴지 않기도 한다. 라미레스를 간호하는 미모의 간호사와의 썸타는 관계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실패한 결혼생활, 아버지와의 불화에 이르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늘어놓지만 어디까지나 사실인지 래리가 전달하는 주관적이고 파편화된 정보만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이 지점이야말로 푸익이 소설의 제목에 언급한 것처럼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가 되는 게 아닐까.

 

 

래리와 라미레스의 대화에 주목하다 보면 한 가지 두 사람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지식인으로 각자의 고국에서 망명자 신세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노동조합 지지자인 라미레스의 처지야 이해할 수 있지만, 미국에 사는 뉴요커 래리의 경우는 어떨까? 아무런 명분도 없던 베트남전에 대한 격렬한 반전운동으로 결국 철군에 성공했지만 1970년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미국 사회의 냉담한 반응을 래리를 통해 푸익은 재현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가오고 있던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를 앞두고 보수화되고 있던 미국 내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노조활동가 출신 교수는 어디에서고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 래리는 실업자나 바텐더, 정원사, 웨이터나 노인 요양사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소설 속에서 래리와 라미레스의 대화는 두 개인이 그리는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퍼즐 게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푸익 작가가 심리상황극과 유사한 상황을 매개로 방어기제가 작동 중인 상대방의 심리 저변을 돌파해 보려고 노력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래리와 라미레스의 비등해가는 갈등을 변주하며 긴장을 유도했다면, 후반부에서는 좀 더 중요한 래리의 프로젝트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라미레스가 옥중 수기라는 메모를 통해 비밀리에 수행한 작업을 해독하는 과정이다. 어쩌면 이 프로젝트를 통해 래리는 자신이 원래 속해 있던 대학사회로 복귀를 도모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소설을 읽다가 래리가 라미레스가 철저하게 방어기제를 발휘해서 숨기고 있는 어떤 비밀을 밝히려고 투입된 CIA의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요즘 스릴러 비밀첩보물을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그리고 또 라미레스의 과거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래리의 대사에서는 문득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이 연상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전반에 비해 후반으로 갈수록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내려질 저주를 추동하는 원심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누엘 푸익의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은 제목만큼이나 매력적인 소설이지만, 텍스트 자체에 대한 해석은 정말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난해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다. 동시에 자신의 작품세계 완숙기에 접어든 작가의 자신감이 엿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최대의 내공을 시전해서 쓴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 여름에 프리모 레비를 읽은 것처럼, 이번 가을에는 마누엘 푸익에 도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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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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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쥐 한 마리로부터 시작됐다. 소설 속 주인공은 방역업체의 약품개발원이었다. 그랬던 그가 상사의 집에서 쥐 한 마리를 용감하게 잡았다가 역병이 창궐하는 C국으로 파견근무를 나갔다가 기이한 삶의 궤적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 편혜영 작가의 <재와 빨강>의 주된 내용이다. 다음 주로 예정된 독서모임에 최근작 <홀>을 다 읽고 나서, 서가를 살펴 보다 보니 예전에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은 <재와 빨강>이 눈에 띄어서 광복절 연휴 기간 동안 읽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작년 초여름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메르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중동 지방에서 건너온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한 사회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아무런 조치도, 고지도 않은 채 그저 역병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리던 정부의 무능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우리는 역병의 시대를 헤쳐 나온 용사들인 셈이다. 그 역병이 발생하기 전, 5년 전에 이런 작품을 발표한 작가의 혜안을 높이 사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소재와 우연으로 보아야 하는 건지 잠시 헷갈렸다.

 

<홀>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파탄난 가정의 생존자로 등장한다. 방역회사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으며 파경으로 끝난 결혼생활에서 C국으로 망명에 성공하지만, 온갖 쓰레깃더미와 역병 그리고 역병을 옮기는 주범으로 지목된 쥐들이 창궐하는 망명지 역시 그에게 안식처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국에서 가져온 트렁크를 숙소에서 털리고 감염자로 지목되어 격리조치까지 당하는 처지에 몰린다. 새출발을 위해 파견근무에 지원했지만, 일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열흘 간의 휴가를 받게 된 주인공의 암울한 미래의 고난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전처의 살해범으로 C국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자,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주인공은 숙소 밖에 쌓여진 쓰레깃더미로 투신을 감행한다. 뭐 이 정도라면 스릴러 영화로 만들기에 전혀 손색이 없지 않은가.

 

문득 자신이 기르던 개를 방치해 두고 왔다는 생각에 어렵사리 친하지도 않은 유진-전처와 재혼한 동창이다-에게 전화를 해서 개를 부탁한다는 말을 전한다. 유진이 전하는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전처가 자신의 집에서 기르던 개와 함께 죽은 채 발견한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범행이 자신의 출국 즈음에 벌어졌다고 하니,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그런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노숙생활을 하면서 얻게 된 날카로운 칼날의 실감만이 그의 잠재된 죄의식을 자극할 따름이다. 과연 주인공이 진범이라는 말일까.

 

남들이 부러워하는 번듯한 파견근무 사원에서 졸지에 타국의 노숙자로 변신한 주인공은 쓰레깃더미가 지천으로 널린 공원에서 기이한 새출발을 시작한다. 편혜영 작가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비참함의 밑바닥을 그대로 제시한다. 돌아갈 곳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모국에 대한 기억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의 노숙자 생활이라는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적응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대로 저격한다. 그것은 그가 가진 유일한 쓸모 있는 기술인 사냥의 대상인 쥐의 그것과 다를 게 없노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는 것. 치명적인 역병에 감연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노숙자를 바디백에 넣어 소각장으로 보내 처리한 그와 동료들의 무감각한 양심에 대한 인과응보는 자신에게도 예외일 수 없는 모양이다. 구사일생으로 바디백에서 탈출한 주인공은 자신의 전공(?)인 쥐 사냥꾼으로 거듭나게 된다.

 

 

편혜영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재와 빨강>에서도 전통적인 기승전결의 내러티브를 기대할 수는 없는 듯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가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작가는 아마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배송 레이블이 붙은 관작처럼 포장이 되어 모국으로 밀항하는 방법에 잠시 귀가 솔깃하지만 돌아가봐야 자신을 기다리는 가혹한 운명을 떠올리고는 잔류를 선택한다. 작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역병이 창궐하는 가운데서도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일상의 놀라운 항상성에 주목한다. 어쩌면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역병조차도 일상의 위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역병에 대처하는 파편화된 우리 공동체의 민낯을 우리는 불과 1년 전에 이미 목도하지 않았던가. 개인의 안위를 무엇보다 우선하는 모습에서 공동의 위협에 우리 공동체와 국가가 얼마나 허약한지 정확한 시선으로 목격할 수가 있었다.

 

다시 주인공 개인의 고독을 분석해 본다면, 전처의 죽음 앞에서 그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진범일지도 모른다는 엄혹한 현실보다 다시는 전처와 함께 했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고독을 다스릴 수 없다는 초현실주의에 가까운 자기인식이었다.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료 노숙자를 바디백에 담아 소각장에 내던질 수 있을 기백의 부메랑이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주인공의 그런 모습은 얼마 전 본 영화 <부산행>에서 자신만 살겠다고 다른 탑승객들을 좀비떼의 먹이로 던져주며 도생을 추구하는 중년남자의 저열한 생존욕망을 연상시켰다. 동시에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우리네 모습과 다를 것도 없다는 점에서 정말 씁쓸함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제목에 들어가 있는 재는 모든 것이 소멸된 후 흩날리는 소각장의 재를 의미하고, 빨강은 주인공이 연루된 두 번의 죽음이 의미하는 피를 지칭하는 게 의미하는 게 아닌가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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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푸익 (1932-1990)

 

<작품 연보>

 

1. 리타 헤이워드의 배반 (1968) : 국내미출간

2. 조그만 입술 (1969) : 책세상 2004년 송병선 역

3.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 (1973) : 현대문학 2005년 송병선 역 / 절판

4. 거미여인의 키스 (1976) : 민음사 2000년 송병선 역

5. 천사의 음부 (1979) : 을유문화사 2008년 송병선 역

6.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 (1980) : 문학동네 2016년 송병선 역

7. 보답받은 사랑의 피 (1982) : 국내미출간

8. 열대의 밤이 질 때 (1988) : 국내미출간

 

마누엘 푸익 바이오그래피 (위키피디아, 파리스 리뷰, 기타 온라인 자료 참조)

 

후안 마누엘 푸익은 1932년 12월 28일, 아르헨티나 팜파스에 자리잡은 헤네랄 비예가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 헤네랄 비예가스는 안데스 산맥과 대서양의 중간에 자리 잡은 15,000명 정도의 평범한 마을이었다. 푸익은 어머니 마리아 엘레나와 아버지 발도메로의 첫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푸익은 어머니와 함께 매일 오후 미국 영화를 보기 위해 열 살 때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푸익이 어려서 본 1930년대와 194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은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일 끼치게 된다. 1946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미국 보딩스쿨에 들어갔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 입학해서 문학과 심리학 그리고 철학에 대한 자신의 관심영역을 넓혀갔다. 하지만 그의 최대관심사는 영화 연출이었다. 1955년 장학금을 받으며, 이탈리아 영화 학교에 진학했다. 영화학교는 푸익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고, 그는 런던과 파리를 전전하게 되었는데 영화 각본 작업을 하면서 어학선생과 접시닦이 같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964년에서 1967년까지 미국 뉴욕의 JFK 공항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마누엘 푸익은 자신의 유년시절에 대한 자전적 소설이었던 <리타 헤이워드의 배반>을 탈고했다. 첫 소설의 출간을 위해 부에너스 아이레스로 돌아온 그는 두 번째 소설 <조그만 입술>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푸익의 귀향은 오래 가지 않았다. 세 번째 소설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가 아르헨티나에서 금지되면서 1973년 멕시코로 망명했고 3년을 보낸 뒤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푸익의 최고작이라고 할 수 있는 <거미여인의 키스>를 발표했다. 훗날 헥토 바벤코 감독과 1985년 제작된 영화의 각색을 위해 협력하기도 했다.

 

대부의 푸익의 작품들은 팝아트처럼 보인다. 그의 저작 기법은 몽타주나 다중 시점의 사용 같은 방법을 다수 채용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영화와 텔레비전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영화에 나올 법한 대화에 강하게 기반한 내러티브 스타일과 화려하고 이상화된 영화세계 캐릭터 등이 그의 작품에 특징을 이루고 있다. 푸익은 또한 통속 드라마 같은 대중 문화의 상당 부분도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사에서, 푸익은 포스트붐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스트에 속한 작가로 구분되고 있다.

 

푸익은 대부분의 삶을 망명자로 살았다. 1989년 그는 멕시코 시티에서 자신이 죽을 때까지 산 멕시코 쿠에르나바카로 이주했다. 그의 공식 전기인 <마누엘 푸익:그의 삶과 소설>의 작가이자 친한 친구인 수전 질 리바인에 따르면 병원으로 이송되기 며칠 전에 담낭에 생긴 염증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수술 뒤 회복하는 기간에 호흡곤란이 시작되었고, 의료진은 푸익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그의 폐는 액체로 가득 차 있었고, 1990년 7월 22일ㄹ 오전 4시 55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평론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마누엘 푸익의 초기 작품들은 내러티브들을 대중문화의 하부구조에 도입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후기 작품들은 우울하고 불유쾌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임시처방적인 요소들로 채워지면서 대중적 호소력을 잃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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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국내에 마누엘 푸익이 쓴 8편의 소설 중에서 4편이 소개되었다. 아무래도 가장 대표작인 <거미여인의 키스>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팬임을 자처하면서도 정작 완독한 책은 <거미여인의 키스>가 유일하다. 이 소설 제목 정말 멋지지 않은가? 또 하나 특이한 점 중의 하나는 푸익의 모든 소설은 울상대학교 송병선 교수가 번역을 맡았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송병선 교수의 번역을 선호하는 편이다. 어쩌면 스페인어 번역에 관해서는 송병선 교수가 독보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서 문학동네에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푸익의 여섯 번째 소설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놀랍군! 사실 이 책이 너무 읽고 싶어서 오래 전에 지인에게 부탁해서 영문판 번역으로 구해서 좀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완독은 하지 못했고 여전히 서가 어딘가에 내 양심을 긁으면서 자리하고 있겠지.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천사의 음부>도 물론 샀지만 역시 읽지는 않았다. 이번에 출간된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은 당연히 구입해야겠지만 당장 수중에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아서 망설여진다. 최소한 일주일은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다. 폭염이 달구는 2016년 여름을 마감하는 책으로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지 않을까 싶다.

 

아, 중고서점을 검색해 보니 책세상에서 나온 <조그만 입술>이 있다고 하는데 점심 때 나가서 사와야겠다. 정말 차 한 잔 값도 안되는 2,300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주 얇은 책인가 싶었는데 348쪽이라고 하네. 당장 사러 가야겠다.

 

 

점심시간이 나가서 바로 데려왔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모두 16개의 이야기 중에서 우선 1개 다 읽었다. 가을엔 푸익을 읽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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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2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믿고 보는 중남미 문학 번역자는 송병선 님이 짱입니다. ^^

레삭매냐 2016-08-12 13:49   좋아요 1 | URL
격하게 동감하는 바입니다.

rendevous 2016-08-13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미여인의 키스 정말 좋죠 ㅎㅎ 영화도 좋았어요~ 내용이 조금 달랐던 것 같긴 한데. 문동세계문학전집 번역이 꽤 좋은 수준이라 느껴져 호감인데 마누엘 푸익이라니.. 읽고 싶어집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6-08-16 11:32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소설을 그대로 영화로 옮길 수가 없었겠죠.
대본에 작가가 직접 헥터 바벵코 감독과 협업을 했다고
하죠.

뭐 번역은 송병선 교수가 계속 맡아 주시니 번역의 연속
성이라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고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