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읽는 동안 오래 전에 본 영화가 계속 떠올랐다. 그 영화의 제목은 바로 <미저리>. 스티븐 킹의 걸작 중의 하나로 원서로 구입했지만 정작 읽을 기회는 없었다. 편혜영 작가의 <홀>을 읽으면서 <미저리>의 기시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강원도로 가는 짧은 여행길에 비극적인 교통사고가 났다. 동승했던 아내는 즉사했고, 남편 오기는 척수가 마비되고 턱이 부서졌으며 안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의사는 오기가 살아난 것은 의학의 힘이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편혜영 작가는 사고를 전후해서 오기 부부에 있었던 일들을 오기의 플래시백을 통해 독자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도대체 15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부부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천운으로 살아난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가혹한 운명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미시적 접근을 시도한다.

 

오기는 사고가 복기하는 와중에 자신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두 명의 여성을 회상한다. 한 명은 자신이 열 살 때, 치사량의 약물복용으로 죽은 어머니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 두 사람 모두 이제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거동조차 할 수 없고 의사소통도 불가능한(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가운데 아무데도 의지할 데 없는 오기에게 또 한 명의 여성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바로 외동딸을 잃은 장모였다. 핵가족제도가 일상화된 현대가족 시스템에 전신마비가 된 사위를 돌보는 장모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파국의 전조를 슬쩍 내비친다. 사위 오기를 돌보는 와중에 장모는 오기 부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하게 기록한 딸의 기록을 보게 되고, 그 순간부터 오싹한 영화 <미저리>의 장면들이 중첩되기 시작한다.

 

동경과 욕망을 구별하는 법을 서서히 익혀나가는 것 같았다. (19쪽)

 

조선소와 부품생산업체를 통해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지리학을 전공하겠다는 아들 오기의 미래를 비웃는다. 하지만 오기는 아버지의 예상과는 달리 석사와 박사 과정을 차례로 밟아 마침내 모교의 정교수의 자리를 성취한다. 오기는 대한민국 대부분의 중년들이 밟는 코스대로 성공하기 위해 우연과 술수 그리고 부도덕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타인이 보기에 강단에 서는 멀쩡한 교수님의 내면세계가 그렇게 도덕적으로 우월하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를 작가는 세밀하게 파헤친다. 반면 오기의 아내는 처음에는 저명한 저널리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녀의 의도대로 일이 되지 않자 쉽사리 포기하기를 반복한다. 오기는 그녀가 정말 되고 싶은 게 그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 자기도 속물이라 세상 사람들을 비딱한 시선으로 보는 걸까. 평소라면 난치병 완치를 희망하는 장모의 발언에 이기죽거렸을 거라는 부분에선 아내만큼이나 남편 오기도 냉소주의자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거린다.

 

이어지는 오기의 플래시백은 마당이 넓은 집을 아내의 주장으로 매입하고, 친구들을 불러 바비큐 파티도 하는 유쾌한 시절로 돌아간다. 오기의 동료들이 와서 파티를 하고 돌아간 뒤, 아내는 갑자기 마당을 온통 뒤엎고 지렁이가 살 수 있는 토양으로 정원가꾸기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동료 제이와의 관계를 의심하던 아내의 의부증은 현실이 되고, 연이은 임신을 위한 인공 수정과 시험관 시술의 실패로 부부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들의 마지막 강원도 여행은 이별여행이 아니었을까.

 

오기의 플래시백이 그의 내면세계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이끌어 가는 하나의 트랙이었다면, 또다른 트랙이자 그의 삶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현실적인 위협은 장모의 기이한 행동이다. 편혜영 작가의 전작 <아오이 가든>이나 <사육장 쪽으로> 등에서 등장했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홀>에서도 동의반복된다. 평생 윤리선생으로 살아온 잔소리쟁이 남편을 잃고, 사랑하는 외동딸마저 잃은 장모는 사위의 운신과 재활 돕는다는 명목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오기 간호에 나선다. 하지만 그것은 외견상 보이는 것일 뿐이고, 실제로는 수술과 재활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강단에 복귀하겠다는 오기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거듭한다. 일탈적 행동을 일삼는 입주 간병인과 재활을 돕는 물리치료사를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내친 장모의 행동은 과연 그녀가 사위의 회복을 바라는 것일까라는 궁극적 질문을 하게 만든다. 어쩌면 장모의 일탈적 행동은 일종의 복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무언가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 것도 작가의 스타일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대충 윤곽이 잡히기도 한다.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학문적 성취에 대해 기술하는 부분에서는 현실세계에 복귀하겠다는 오기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도 있었다. 자신이 지리학 교수였지만, 지도로 삶의 궤적을 살피는 일은 아예 불가능한 미션이었노라는 고백이 이어진다. 지리학이 세계를 그리는 과학이라면, 사람들이 지리학과 헷갈리는 역사학에 대해서는 세계에 대해 쓰는 문학의 일종이라는 간단명료한 정의로 두 학문을 구분하기도 한다. 한 때 지리학을 꿈꾸던 역사학도로서 이보다 명쾌한 정의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최고다 정말. 삶은 실패가 쌓일 뿐이지, 그 실패의 누적으로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들려주기도 한다. 한편, 어려웠던 임용 전 시절에 대해서도 희망이 없어서 우정이 번성하던 시기였노라고 정리한다. 이어지는 장모과의 비극적 관계의 전개보다도 이런 부분들이야말로 소설의 보석 같은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도 여행길에서 아내가 발표하겠다고 공언한 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은 명백하게 남편 오기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아내는 비슷한 고발문으로 성취를 이루지 않았던가. 우연과 술수로 타락해 가는 사십대 중년에 대한 리포트는 도덕적 해이와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질타로 이어졌고 그 순간 벌어진 사고로 아내는 죽었고, 오기는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살아남았다. 편혜영 작가의 소설 <홀>은 어떤 교란도 없는 무사태평한 세상을 꿈꾸지만, 자신이 행한 업(karma) 때문에 스스로 판 구덩이(hole)에 빠진 남자에 대한 고발문이다.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일상은 또 어떠냐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6-08-12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척 재미있게 읽고 많이 권한 소설예요!^^ 반갑네요!^^

레삭매냐 2016-08-12 10:36   좋아요 1 | URL
어제 빌려서 단박에 읽었답니다 -
아주 오랜 만에, 그것도 다시 독서모임으로 만나는
편혜영 작가라서 그런지 옛 기억이 다시 나는 그런
느낌이었답니다 :>

[그장소] 2016-08-12 10:39   좋아요 0 | URL
덕분에 저도 제가 쓴 홀 ㅡ리뷰 찾고있어요.ㅎㅎㅎ 이게 원래 식물애호˝라는 단편을 장편화 한 거거든요! 짜릿한 맛이 있어요~^^

레삭매냐 2016-08-12 11:06   좋아요 1 | URL
미처 몰랐네요 :>
외국에선 그렇게 자신이 처음에 쓴 단편을 확장해서
장편으로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더라구요.

아마 편혜영 작가도 그런 시도를 한 모양입니다.

[그장소] 2016-08-12 11:23   좋아요 0 | URL
그런 작품들이 꽤 있어요. 확장판 같은! 우리 작가들도 더러 더러 있더라고요~^^ 그런걸 찾음 또 재미있고 유쾌하죠!^^( 이 글 이전에 어떤작가였나 몇몇 알던 이름은 생각안나서 ..기억나면 알려드릴게요! )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탐 드루리의 데뷔작 <반달리즘의 종언>이 도착했다. 작가 고향 아이오와 주 가상의 공간인 그라우즈 카운티가 배경이라고 했던가. 책을 손상시킬 수 없어 온라인에서 찾은 지도를 복사해서 보고 있다. 소설은 작은 도시 그래프턴에서 헌혈행사로 시작한다.

 

역시 책읽기에는 강력한 동기가 필요한 모양이다. 지난달 독서모임에서 브렌던이라는 미국 친구에게 탐 드루리와 스탠퍼드에서 크리에이티브 라이팅 강의를 맡고 있는 토바이어스 울프에 대해 듣고는 후자의 단편도 찾아 읽고 나서 책구매를 결정했다. 울프의 책 두 권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가 있었지만 역시 탐 드루리의 경우에는 램프의 요정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원서 구입을 결심했다. 내가 그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보다 소장과 시도에 의미를 두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보니 울프의 <이 소년의 공간>도 읽기 시작했으나 지지부진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진도가 번역서보다 잘 나가지 않아 잠시 미뤄뒀다고나 할까.


 

탐 드루리의 두 번째 소설 <꿈 속의 사냥>은 북디파지토리를 통해 주문했다. 알라딘하고 거진 차이가 없어 잔뜩 가지고 있는 네이버페이를 이용해서 <반달리즘의 종언>을 주문했는데 영국에서 나온 책이 미국에서 나온 책보다 페이지 수는 많고 가격은 저렴하네. 알라딘에서 도착한 책도 영국에서 출간된 책이다. 책 맨 끝을 보면 마치 영화에 엔딩 크레딧처럼 등장하는 인물 순서대로 캐릭터들이 죽 소개되어 있다. 주인공 댄 노먼(보안관)과 보조사진사 루이즈 달링 그리고 도둑 찰스 타이니 달링 이렇게 세 명이 차례로 등장한다. 어느 기사를 보니 유머가 넘치는 소설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지 기대가 된다.

 

급한 마음에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상황설정과 대화로 풀어나가는 내러티브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다. 모두 세 장(three chapter)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미국 소설들처럼 그 안에서 또 20개의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이제 막 첫 번째 이야기를 읽었고 앞으로 19개가 남았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모든 이야기를 다 읽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거서 2016-08-09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읽기에 강력한 동기가 필요하다는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레삭매냐 2016-08-09 17:14   좋아요 1 | URL
언제 완독이 가능할 진 모르겠지만
꾸역꾸역 읽다 보면 언젠가 다 읽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

다 읽고 나면 나머지 2부작에도 도전해 보려구요.

오거서 2016-08-09 17:23   좋아요 0 | URL
강력한 동기에 꾸준한 책읽기까지 책읽기의 시금석이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완독하는 즐거움이 보상이 되겠군요! 부럽습니다. ^^
 
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4년 전에 나온 은희경 작가의 장편소설 <태연한 인생>을 다 읽었던가. 아마 읽기는 시작했던 것 같은데 마무리지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읽기 시작한 <중국식 룰렛> 보다 그 책부터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뭐 상관 없겠지, <중국식 룰렛>을 다 읽고 나서 읽는 것도 말이다.

 

바로 전에 읽은 김금희 작가의 소설집의 소설들은 시간의 연대순에 따라 배치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은희경 작가의 <중국식 룰렛>에 실린 6편의 작품들은 모두 발표된 순서대로 빼곡히 들어 앉아 있었다. 표제작인 <중국식 룰렛>은 어느 술집에 모인 화자인 나를 포함한 네 명의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세 잔의 싱글몰트 위스키를 서비스하는 바텐더 K가 운영하는 바에 모인 이들은 언제나처럼 모두 사연을 지니고 있다. 위스키 맛을 아는 자만이 제대로 된 서비스를 마실 수 있다는 걸까? 독주를 즐기지 않는 독자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체리오크향이 배인 위스키 맛에 대해서도. 그저 오래전 친구의 졸업식 때, 한자락 하시는 요리사인 친구 어머니가 대접해 주신 인삼 뿌리와 자니워커 블루의 인연 정도. 위스키를 즐기는 게 고상한 취미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소설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맥캘란 55년산 위스키 맛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그리고 작가가 처음부터 행운과 불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나누어질 수도 있다고 설계한 전개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파경을 앞둔 주인공이 라가불린을 좋아한다는 아내와의 호시절을 기억하며 점점 술에 취해가는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리송한 K와의 관계는 위스키가 증류되면서 천사들에게 나눠준다는 몫으로 남겨 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다 보면 정작 ‘중국식’ 룰렛이 어떤 룰렛인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어진다. 아직도 중국식 룰렛이 무엇인지 난 모른다.

 

그 다음 이야기 <장미의 왕자>는 졸면서 읽어서 그런지 도무지 맥락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내러티브가 중요하지 않아서 그런 진 몰라도. <대용품>에서는 어린 시절 함께 지내던 동네 천재 소년들의 이야기다. 시골 수재들의 상경길에 교통사고로 친구를 잃은 남자의 이야기다. 모든 게 심드렁한 남자는 매뉴얼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욕망과 거짓을 능숙하게 잘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욕망을 위해 거짓도 서슴지 않는다는 말이겠지. 어린 나이에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도 슬픈 일이지 않을까. 그렇게 적당 자기 일을 하면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어 삶을 살던 중에, 어느 결혼식에서 어린 시절 좋아하던 고향 여자친구를 만나 그 시절을 회상해 본다. 독자는 새로운 로맨스가 시작되는가 조심스레 기대해 보지만 아련한 봄밤의 추억처럼 그렇게 이야기는 스러져 갈 따름이다. 무언가 화끈한 결론이 없는 싱거움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불연속선>에서도 사진가로 살아가는 남자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드라마 속 재벌가의 상속자처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이 많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빼어난 재주를 지닌 전문가가 아니라면 이 세상살이는 그저 시큰둥한 모양이다. 주인공 남자는 이제는 철지난 습식사진을 찍는 사진가다. 책을 읽다 보니 예전에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현상하고 인화하던 시절의 생각이 났다. 흑과 백 그리고 농담으로 세상이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지 아마. 사진촬영 제반에 걸친 모든 것을 스스로 준비하는 남자는 파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뱅뱅 도는 컨베이어 벨트에 토해져 나오는 가방이 바뀌어 낭패를 당한 상황이다. 아, 그전에 그릇과 가방 혹은 삶을 담보하는 보따리 이야기가 있었지. 미혹과 욕망에 시달리던 여자가 다들 꺼려하는 작업대 위에 올라 사진촬영을 감행하게 되는 사연을 풀어가는 솜씨가 역시나 걸출한 작가답다. 그리고 보면 삶은 연속적이지도 그렇다고 해서 불연속적이지도 않은 그런 게 아닐까. 어쨌거나 그래도 모두의 삶은 계속되지 않은가. 그렇다면 삶은 연속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걸까, 모르겠다.

 

모두 6개가 실린 소설집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이 바로 <별의 동굴>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의 동굴이라고 불러도 아쉽지 않은 그런 소설이다. 치열한 신자유주의 경쟁에 밀려나 먹고살기가 캄캄해져 자신의 울타리를 정리하려는 시간강사 이야기가 씁쓸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보니 <중국식 룰렛>에 등장하는 주인공 남자들의 초상은 하나 같이 적당히 살자주의로 무장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하긴 치열한 삶이 내일의 성공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과연 오늘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부정맥으로 어쩌면 내일 삶을 마감한다해도 보호자 하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참 그럴 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이 주변의 울타리를 정리하기 위해 한 첫 번째 행동이 부동산에 나가 자신의 전세를 월세로 바꾸는 시도였다. 거기서 만난 염색머리 여자와의 인연이 무언가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가 하지만 그것도 역시나 여의치 않더라. 두 번째로 주인공은 자신이 그동안 애지중지 모은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이미 이런 책정리를 해본 것처럼 작가는 냉정하게 필요해서 남길 책 그리고 이제는 소용이 없어져 처분해야 하는 책으로 이분한다. 모든 책에는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삶을 정리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주인공은 책에 얽힌 사연을 캐내는 작업에 몰두한다. 어쩌면 그리도 공감이 가던지 책 속으로 그야말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한 때는 없으면 죽을 것 같이 애정하던 책도 시간이 가고, 무언가를 알게 되면 그 시절의 아우라를 잃기 마련이던가.

 

마지막 <정화된 밤>의 어떻게 해서 오늘의 다니엘이 생기게 되었는가에 대한 분석은 흥미진진하다. 일상에 심드렁한 남자 버전인 젬마는 어느날 가톨릭에 귀의해서 교회오빠 아니 성당오빠 가브리엘에게 호감을 갖지만 엉뚱한 인연으로 요셉의 아내이자 다니엘의 엄마가 된다. 종교모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패한 로맨스와 가십이 등장하고, 다니엘이 잉태되던 밤이야말로 정화의 시간이 아니었나 하는 추정으로 소설집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책이 처음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평단을 신청했지만 보기 좋게 탈락했다. 그래도 인연이 되었는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소설집을 모두 읽었지만 다 읽고 리뷰를 쓰다보니 읽는 순간 만큼의 열정은 식어 버린 듯한 느낌이다. 이래서 리뷰는 책을 읽는 대로 바로바로 써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벼락맞는 듯한 깨달음을 책에서 캐냈을 때, 바로 메모를 했다면 괜찮은 리뷰가 되었을까? 그것도 모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 만나는 김금희 작가가 소설에서 펼쳐 보이는 그녀의 생각은 무엇일까하고 생각해본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다른 시선으로 만난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나와 그들이 느끼는 간극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 게 아닐까. 그 간극이 가까워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가, 너무 차이가 났을 적에는 깜짝 놀라 털어낼 수 있는 그 정도의 간극이라면 참 좋을 것 같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쩌면 트라우마가 되어 마음 한 구석에 고이 모셔둘 지도.

 

폭염주의보가 내린 어느 주간에 만난 <너무 한낮의 연애>에는 모두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맨 끝에 실린 작품 발표 연보를 보니, 발표 순서대로 수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제작으로 <너무 한낮의 연애>를 실은 것을 보면 작가의 대표선수이기 때문이겠지 하고 추측해 본다. 평소라면 느낌 가는 대로 읽고 싶은 단편을 읽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무덥다. 출판사와 작가가 잘 차려준 밥상을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소설의 내용은 필용과 양희의 철 지난 러브스토리다. 직장에서 잘 나가던 필용은 어느새 구조조정의 문턱에 서 있다. 청춘이 아직 빛을 발하던 시절, 양희의 뜬금없는 사랑 고백으로 필용의 생활이 엉망이 되어 버렸던 것처럼 좌천을 가장한 인사이동이라는 형태의 구조조정 역시 필용의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랑과 먹고사니즘의 평행 변주곡이라고 해야 할까. 헛헛한 마음에 양희가 무대에 올리는 연극을 찾아나선 중년 남자의 정처 없는 여정이 그저 애처롭기만 하다.

 

일상화된 구조조정 이야기는 맨 끝의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의 ‘고양이 탐정’ 모과장에게 스트레이트로 달려간다. 1971년 이래, 세계화(globalization)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노동의 불안정성고 느슨한 연대를 먹이로 삼아 성장해왔다. 자신의 외로움을 구원해준 고양이를 찾는 일에서 직장의 노동에서 느끼지 못하는 성취를 느끼는 남자 이야기는 쓸쓸하기만 하다. 그것은 마치 보통의 일상에서는 허접하지만, 롤플레잉 게임 세계에서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찬란한 영웅으로 변신해서 미진한 성취를 극복하는 현대인의 초상처럼 다가온다. 그 와중에서도 직능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끝없는 스펙을 쌓아야 하는 현대판 시시포스의 형벌을 보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기도 했고.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조중균의 이름에서 맥락 없이 조중동이 떠올랐고, 읽다 보니 허먼 멜빙의 필경사 바틀비가 생각나더라. 두 작품 사이의 무언가 연관성을 찾아보려 하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하는 외톨이 같은 부적응자가 전면에 나선다. 자기 일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닌가? 일도 잘하면서 직장상사의 비위도 잘 맞추고, 동료들과도 화합하는 팔방미인 스타일의 인재를 원하는 시대에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화자는 역시 신자유주의 경쟁의 참가자로, 상대적으로 나은 스펙을 바탕으로 일자리에 천착하는 인턴사원이다. 어디에서고 실패한 사람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려야 한다는 자본주의 정글 속 게임의 법칙을 목격한 것 같은 느낌이라 기분이 그랬다.

 

암 진단을 받고 어쩌면 곧 죽을 지도 모르는 큰오빠의 진두지휘를 받아 사남매와 제자 한 명이 평생 부모님을 죽인 원수라고 생각해온 노숙자를 찾아가 복수극을 벌인다는 이야기도 황망스럽다. 살인 및 방화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람도 그렇지만, 큰오빠가 진짜 삶의 원수인지 아니면 그 큰오빠가 원수로 지목한 엉뚱한 사람이 원수인지 모를 그럴 웃픈 상황 가운데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려서 모두 날려 버리는 방법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소비자가 왕이다’라는 아주 비현실적 구호로 무장한 소비자(물론 진상고객은 아니다)와 다툼을 벌이는 와중에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꾸역꾸역 돈을 물어다 주는 남편의 행적이 중첩되는 <고기>도 흥미롭다. 대개의 검사장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능력에 벗어나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다 줘도 묻지 않고 소비에 전념하는 그 가족의 도덕적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 낯설지도 않은 그런 이야기였다. 그래도 내 작은 항의의 행위가 다른 이에게 밥줄이 달린 문제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긴 했다.

 

이 소설집의 타이틀은 <너무 한낮의 연애>가 가져갔지만, 개인적으로 최고작은 <세실리아>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 고향 이야기가 등장해서인지도 모르겠고,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대학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게 해주는 구조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송년회나 이혼 같은 삶의 파편화된 조각 속에서 과거를 소환하는 일탈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내가 체험해 보지 못한 타인의 이야기에 조금의 돈과 시간을 투자해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오락은 없지 않을까. 일견 교활해 보이는 독자의 이러한 소비심리를 김금희 작가는 예리하게 후빈다. 전 남편에게 칼국숫집에서 받은 청사초롱이 그려진 청첩장을 하수구에 흘려버린 주인공 정은은 대학 동아리 친구 세실리아를 찾아나선다. 긴 시간 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지만, 너털웃음으로 그녀가 자신을 언젠가는 찾아올 줄 알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세실리아.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도, 다시는 자신을 찾지 말라는 말은 한 순간에 피고 지는 얼음꽃처럼 차갑기만 하다. 어쩌면 우리가 맺는 관계의 본질은 모두 그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냉담한 결말.

 

솔직히 말하면 책을 읽는 동안 내공을 집중하지 않고, 마치 여름휴가를 즐기듯 그렇게 즐겼다. 날씨 탓인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심각한 내용이 등장할라치면, 내부 방어기제가 작동해서 알아서 차단해 버렸다. 아주 내 마음대로 독서였다고나 할까. 내가 읽고 싶은 부분만, 읽고 해석을 붙여봤다. 언제나 그렇듯, 책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오롯이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니까. 문득 김금희 작가의 장편소설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곧 장편으로 만나게 되길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달에 그동안 미뤄두고 있던 프리모 레비를 읽었다. 죽음의 절멸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의 비애를 담담하게 소회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의 책과 블로그들을 통해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점령군에 봉기한 바르샤바 시민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가 있었다. 이제 맨부커상을 빼놓고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는 작가가 된 한강이 폐허가 된 도시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흰>을 읽었다.

 

시인지 소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흰>의 영어 제목은 <The Elegy of Whiteness>란다. 그냥 <흰>으로는 무슨 뜻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는데 영어제목 <흴 수밖에 없는 비애>라고 해석을 하니 좀 더 그 의미가 명징해진다고 할까. 소설의 서두에 흰색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을 하나씩 나열한 다음, 본론에서 차례로 풀이하는 방식이다. 전통적 서사구조는 단호하게 배격해서, 독자는 내가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시를 읽고 있는 건지 알 도리가 없다. 그게 정확한 저자의 의도일진 모르겠지만, 심술쟁이 독자는 독자만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오독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흰색하면 빼놓을 수 없는 눈도 등장한다. 차가움의 상징이지만 또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존재인 눈, 눈으로 덮인 세상에 대한 동경의 이면에는 검은색 발자국으로 훼손될 가련한 운명에 대한 감상이 살포시 지나간다. 어쩌면 폐허에서 다시 수도를 재건한 바르샤바의 이미지가 그것이려나. 밥을 짓기 위해 스페인에서 난 흰쌀을 사러 마트에 들르는 일상의 스케치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먹는다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것이고,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부지런히 무언가를 살 수 있는 재화를 벌기 위해 매일매일의 윤회를 거듭한다.

 

배내옷에서 출발해서, 자기 삶에 앞에 존재했던 부모님의 첫 번째 아이를 앗아간 가혹한 운명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녀가 살았다면 자기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 이야기는 바르샤바 출신으로 벨기에로 입양되었지만, 6살 아이 때 죽은 형의 혼과 대화하는 어느 소년의 이야기와도 묘한 접촉점을 이끌어낸다. 신비하기도 하여라. 극도의 리얼리즘에서 갑자기 신비주의로 전환하는 이 당황스러움이란.

 

각기 다른 맛을 대표하는 선수인 소금과 각설탕의 대조는 또 어떠한가. 요리하다가 칼에 손을 베이고 또 소금을 집다가 더 큰 쓰라림을 느끼게 된 심정을 이럴 때 상처에 소금 뿌린다라는 표현을 절실하게 배웠노라는 고백이 귓가를 스쳐간다. 지금은 설탕이 흔해빠졌지만, 예전에 물자가 귀할 시절에는 각설탕 하나만 있으면 남부럽지 않은 그런 시절도 있었다. 장방형 안에 숨어 있는 아찔하게 달콤한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아이들이 있을까? 조금만 할짝여도 자극적인 달콤함이 입 안 한가득 퍼져나가는 순간의 쾌락이란 앞서 등장한 순백색 소금의 쓰라림과 그 결을 달리한다.

 

책에 나오는 글들에 동감하는 편이지만, 어떤 기억들을 훼손되지 않는다는 작가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못할 것 같다. 세상에 훼손되지 않는 게, 변하지 않는 영원에 근접한 게 존재했던가. 그런 건 유토피아에나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더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지도. 또 한편으로는 시간의 훼손이 모든 걸 블루어(blur)하게 만들고 망가뜨린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에는 또 동감하고 싶어지고. 이래서 인간은 양가적 감정의 존재인 모양이다.

 

한소끔 떨어져서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저자의 글을 읽으니 상쾌한 기분이다. 열광과 환호가 잦아진 자리를 채우는 꾸준한 글쓰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