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그 거대한 행보 - 레이 황의 거시중국사
레이 황 지음, 홍광훈. 홍순도 옮김 / 경당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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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를 전공했다. 특히 어려서부터 중국 역사책을 열심히 읽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그런 열악한 상태의 조악한 번역물이었지만, 그래도 태사공 선생이 기술한 <사기> 같은 명저를 읽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뿌듯한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 많이 시간이 흘러 전공하고는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역사책 읽는 즐거움은 여전하다. 작년말부터 읽기 시작한 레이 황의 중국 거시사 책인 <중국, 그 거대한 행보>를 빨강원숭이해 벽두에 다 읽었다.

 

중국 역사시대의 돌입이라고 할 수 있는 은나라 시대를 필두로 해서 현대 중국에 이르는 유구한 세월을 거시사적 측면에서 망원경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최근 아날학파를 중심으로 한 현미경으로 역사를 관찰하는 미시사가 트렌드가 되었는데,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중국사에 관한 이야기들은 역사를 좀 접해본 독자들이라면 거의 모를 정도가 없으니, 생략하고 경제적 측면에서의 접근이 아주 신선했다. 서양에 비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이 비교적 일찍 들어선 진한제국을 통일 1제국으로 그리고 수당을 2제국으로 마지막으로 명청을 통일 3제국으로 분류하고 간기에 만이융적(아마 남만, 동이, 서융, 북적의 분류로 보인다)으로 대표되는 이민족 세력의 중원 정복을 도전과 응전의 역사가 되풀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특이한 사항이 별로 없어 보인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원동력이었던 중앙집권제와 특유의 관료제도가 오히려 중국의 역사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예리한 지적이다. 게다가 맹자가 일찍이 설파한 만백성을 즐겁게 하는 왕도정치 이데올로기는 어떤 왕조가 들어서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전통적 화이관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비록 통일제국이 설립되긴 했지만, 근대적 화폐환산시스템과 신용거래 그리고 서비스 제도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규모 자영농 중심의 농촌경제에서 이룩된 잉여생산물을 통한 자본축적은 난망했고, 수량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근대국가로의 발전이 어려웠던 점을 계속해서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초기에는 능률적인 시스템이었던 관료제도 역시 새로운 혁신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점에 수긍이 갔다. 한나라 시대에 도입된 대규모 교육 시스템 역시 새로운 개혁과 혁신을 담보하는 대신 왕조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역할에 머물렀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레이 황은 또한 최고권력자에게 일반적 시선의 도덕률을 요구하는 편견에서 벗어나라는 주문도 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다른 저서인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에서도 저술했듯이, 형과 아우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당태종 이세민의 경우에서 보듯 혈육과도 나눌 수 없는 최고권력 경쟁의 비정함을 볼 수 있긴 하지만 현대의 기준에서 골육상쟁이라는 도덕률을 절대군주시대에 적용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이긴 한 것 같다. 중국에서도 명군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당태종이 정착시킨 율령격식과 조용조 같은 시스템은 당시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제도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피해만 없다면, 최상위 권력층의 쟁투는 물론이고 이민족의 지배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한 왕조에서 다른 왕조로 바뀌는 과정에서 순국하는 케이스는 송나라나 명나라의 경우처럼 사대부 계층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집중했던 부분은 명청시대와 민국 시대의 이야기인데, 저자 레이 황 교수는 우수한 자원과 충분한 노동력을 가졌던 명제국을 비경쟁적이고 내향적인 제국으로 부르고 있다. 개국을 주도했던 태조 주원장에 대해서도 지독한 독재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해서 원나라 말기의 전란을 경험하고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에 대해 냉철한 분석을 시도한다. 수차례에 걸친 명태조의 숙청작업은 왕조의 기반을 닦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그의 뒤를 이은 영락제가 정복사업에 나서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급자족형 농촌경제에 만족하는 관료들은 기존질서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태생적으로 새로운 발전을 위한 중추역할을 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스템은 결국 부패할 수밖에 없었고 환관들의 발호가 이어지면서 왕조는 멸망의 수순을 밟게 됐다.

 

중국의 근대화는 아편전쟁 이후 숱한 외세의 침입에 시달리며 정체되었고, 결국 제국의 해체와 중일전쟁이라는 전국적 규모의 전란과 국공내전이라는 폭력적 방식으로 오늘날의 중국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때 국민당군 장교였던 레이 황 교수는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투쟁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균형감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구한 장강의 물결 같은 역사의 흐름 속에, 등장한 역사인물들에게는 저마다의 역할이 주어져 있었고 역사발전은 지체될 수 있어도 결국 제 갈 길을 가는 법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 와중에 역사를 퇴행시키는 문화대혁명이나 천안문 사태 같은 반동적 체험이 빠질 수 없겠지만 말이다. 레이 황 교수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한 세기에 걸친 외세침탈로 인한 굴욕에서 벗어나 대국굴기에 나선 현대 중국의 미래전망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 특히나 인접국가로 하루가 다르게 중국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가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불투명한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 이웃나라 중국의 거시역사를 비교적 객관적 시각에서 다룬 레이 황 교수의 중국대역사는 일독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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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흩날리는 밤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김미림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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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제나 그렇듯 나의 뒤죽박죽 독서 때문에 내가 2016년 빨강원숭이해에 처음으로 읽은 책은 레이황 교수의 <중국, 그 거대한 행보>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정말 올해 처음 읽은 책으로 그리고 첫 번째 리뷰로는 당당하게 작고한 기타모리 고 작가의 책 <벚꽃 흩날리는 밤>으로 기억되게 될 것 같다. 지난해 여름에 구입한 책인데, 참 오랜 시간 끝에 읽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할까. 램프의 요정 100자평인가에서 보고 기억해 두었다가 망각 속에서 소환시켜 만나게 된 그런 책이기도 하다. 아마 그 책은 <맏물 이야기>였지.

 

그런데 시대만 <맏물 이야기>의 에도시대와 현대만 바뀌었을 뿐이지 서사의 구조는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어느 책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내 개인적인 느낌은 그렇다. 도쿄 산겐자야의 어느 골목에 있다는 맥주바 가나리야의 명물은 맛있는 네 가지 다른 종류의 맥주도, 그 집에서 나오는 기가 막힌 요리도 아닌 바로 주인장 구도 데쓰야라는 존재다. 맥주의 시원한 맛에 어울릴 만한 그리고 단골손님들이 물어오는 희한한 이야기 거리라는 안줏감 말고도 마스터 구도가 제깍제깍 만들어내는 퓨전 요리의 향연에 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다. 우리 동네 근처에 이런 바가 있다면 어쩌면 나는 알코올 중독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망상이 불쑥 들었다.

 

소설은 페이지터너라 불릴 정도로 재밌고 맛깔스럽다. 고향 요릿집의 데릴사위로 찍혀 가게 십오 주년 행사에 소환되어 결국 그 인연으로 도쿄에서의 택시 기사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필두로 시작해서, 벚꽃이 필 때마다 ‘교이코’라는 기묘한 이름의 벚나무를 찾게 형사와 그의 죽은 아내가 조종하는 일종의 복수극 그리고 버블경제 시대를 마감하고 장기불황에 접어든 일본 사회에서 종신고용이라는 신화를 마감하고 구조조정을 맞이한 세대를 모욕하는 개를 이용한 해고 통보라는 기발한 착상까지 이야기는 숨차게 달려간다.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마스터 구도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눈치로 손님이 필요한 순간에 미지근해버린 맥주잔을 시원한 맥주로 갈아 치우고, 궁진한 입을 달래줄 기가 막힌 요리들을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제공하는 천상의 서비스를 손님들에게 대접하니 어찌 맥주바 가나리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개인적으로 비슷한 서비스를 몬트리올 여행 당시 생캐서린 스트릿의 어느 바에서 오래 전에 경험했었던가.

 

나머지 두 이야기인 황금 칵테일을 찾는 <나그네의 진실>과 <약속>에서 기타모리 고 작가는 깊숙한 인간 내면세계 탐험에 나선다. 빈타운이라 불리는 도시에 있는 칵테일 바에 갔었는데 칵테일 메뉴가 없어서 바텐더에게 메뉴가 없냐고 물었더니 자신만만한 태도로 어느 칵테일이든 만들어 준다고 해서 ‘싱가폴 슬링’을 주문했던 기억이 난다. 황금 칵테일을 찾는 나그네의 이야기에서 바로 개인적 체험이 연상됐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가나리야의 손님과 마스터 구도 그리고 또 다른 오지랖 넓은 손님들이 가세해서 이런 저런 의견을 내며 미스터리의 종착점에 도달해 가는 과정이 너무 재밌게 다가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까지 꿰뚫는 마스터 구도의 정체가 자연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 작가는 도대체 뭐 하던 사람이람. 물론 기타모리 고 작가는 아직까지 천기누설을 할 시점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아직 출간되지 않은 네 번째 시리즈로 미루고 있다.

 

마지막 이야기인 <약속>은 십년 전 약속을 지키려는 헤어진 연인들의 슬픈 로맨스라는 느낌으로 시작했는데, 역시 예상을 깨는 반전이 숨어 있었다. 단 한 번의 시위 체험으로 사회부적응자라는 낙인이 찍힌 남자 히지카타는 온갖 연쇄불행을 겪고 밑바닥에서 드디어 치고 올라와 베스트셀러 작가로 승승장구하는 시절이지만, 그 반대의 길을 걷던 유키에는 가정과 직장 모두에서 파탄 직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자신의 불행을 옛 애인에게 모두 떠넘기려는 그녀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행복의 총량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려면 누군가 내 불행의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극단적 방법마저 동원하려는 계획을 세우다니. 물론 유키에가 행동에 옮기기 전에 우리의 마스터 구도에게 적발되어 무산된 것이 다행이었다. 전에 그녀가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떤 행동에 대한 의심을 돋게 하는 것이야말로 기타모리 고 작가가 독자에게 선물한 회심의 일격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가나리야 시리즈는 모두 세 권이 피니스 아프리카에를 통해 소개되었는데 나는 그 두 번째 인스톨부터 읽게 됐다. 새해 처음으로 만난 책이 이렇게 재밌어서 참 기분이 좋았다. 바로 전에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거시사적 차원의 역사서를 읽어서 그런 진 몰라도 중량감이 달라서였을까. 그리고 보니 책을 계속해서 읽다 보면, 앞뒤로 읽는 책이 어떤가도 연쇄독서에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며칠 전에 읽기 시작한 코니 윌리스의 단편집을 펼쳤는데, 사실 생각보다 별로여서 덮어 버렸다. 앞으로 남은 가나리야 시리즈 두 권도 마저 읽어야겠다.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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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양을 잃다 - 책과 인간의 운명을 탐구해온 한 편집자의 동서고금 독서 박물지
쓰루가야 신이치 지음, 최경국 옮김 / 이순(웅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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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건 정민 선생의 <책벌레와 메모광> 덕분이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는 정말 즐겁다. 아마 선생도 당신의 책에 실린 글 중에 쓰루가야 신이치의 신세를 진 부분도 있지 않을까? 그럴 정도로 책모퉁이에 새겨진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독서 박물지라는 주석이 바로 와 닿는다.

 

이 책을 지난달 30일에 사서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하도 다른 책들을 읽어 대는 바람에 무려 한 달이나 걸려서 읽게 됐다. 사실 이런 에세이류의 책들은 마음먹고 읽기 시작하면 금세 다 읽을 수도 있지만 또 그렇게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생각 같아서는 아무 때나 죽 펼쳐서 궁금한 것부터 읽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완독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이번에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었다.

 

쓰루가야 신이치라는 분은 아마 일본의 저명한 독서가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만큼 동서를 아우르는 박학한 지식을 바탕으로 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책 사이에 은행나무 이파리를 끼워 놓아, 책벌레를 쫓아다는 이야기는 이미 정민 선생의 책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꽤 오래 전에 중국 당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명판관 디 공> 시리즈 중의 한 권인 <황금살인자>를 읽은 적이 있는데 네덜란드 출신 로베르트 반 훌릭에 대한 소개도 이 책에 실려 있다. 나가사키를 통해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일본에 전파해준 화란(네덜란드)에 대한 후의가 담뿍 담겨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치기현에 있었던 화적상이 알고 보니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만들어진 에라스무스의 목상이었노라는 기원을 찾는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바다 건너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목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신묘한 힘을 발휘했다는 설화까지 곁들여져 지금은 일본의 국보가 되었다고 하던가.

 

사실 저자만큼 일본 고전문학과 데라다 도라히코 같은 문인들의 이름이 낯설어서 그런 진 몰라도 숱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주석이 없다면(사실 주석을 읽느라 시간이 많이 소용됐다) 이 박물지는 좀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는 김소월이나 박목월 같은 시인들 그리고 최치원이나 설총 같은 당대의 석학들의 이름을 어떻게 알겠는가 말이다. 지식의 모자람 때문에 책에 몰입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오래 전에는 책을 읽을 적에 음독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근대로 넘어오면서부터 묵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설명도 재밌다. 하긴 요즘에는 책 자체를 대하는 이들이 적어져서 묵독이건 음독이건 간에 지하철에서 독서하는 사람을 찾는 놀이까지 생겼다고 하지 않던가. 책 읽는 것을 사명으로 여겨 하루에 9센티미터씩 책을 읽었다고 하는 다독가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이렇게 책을 사랑하던 이들이 존재하던 시절 이야기는 이제 전설처럼 아련할 따름이다. 책이 귀하던 시절에는 책이 너무나 소중해 책읽기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근대가 되면서 대량생산과 교육의 결과로 누구나 책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책읽기에 무관심하게 된 건 아닐까. 하긴 니체의 말마따나 책을 소장하는 것과 읽는 행위 그리고 그 책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16세기 말, 명나라 시대 남창에서 예수회 수도사였던 마테오 리치가 기발한 기억술을 선보였다는 사실도 쓰루가야 신이치는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 전에 특별한 연관성을 사물에 부여해서 기억하면, 아무리 양이 많더라도 수월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말도 있는데 나같이 만날 깜빡깜빡 하는 사람에겐 그 방법이 통할지 모르겠다. 미국 예일대 출신의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쓴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이란 책을 무려 5년 전에 읽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허망할 따름이다. 그 책을 읽느라 제법 고생한 기억만 남아있다. 함께 소개된 고대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의 일화도 어디선가 읽었는데 당최 기억이 나지 않아 안타까웠다.

 

<정독>편에서는 책을 무게로 달아 읽었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무식하다고 핀잔을 주며 단 몇 권의 책이라도 바르게 읽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그 글을 읽으며 난삽한 독서를 하는 나같이 우매한 독자에게 훈계하는 고수의 죽비 같이 들렸다고 하면 과언일까. 자기변명 같지만, 세상은 넓고 읽어야할 책은 너무 많기에 한 권의 책을 꾸준하게 몇 번씩 읽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다. 도대체 쓰루가야 신이치 같은 고수들은 어느 시간에 그렇게 많은 독서를 한 걸까. 책읽기가 업이 아닌 바에야 도무지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유시민 선생은 자신에게 흥미롭지 않은 책은 과감하게 던져 버리라고 했는데, 쓰루가야 신이치 작가는 다른 방식의 독서를 후기에서 권하고 있다. 지금 읽는 책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내던져 버릴 것인가. 저자는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꾸준하게 독서하라고 충고해주고 있다. 인생을 살며 체험이 쌓이고, 독해력이 향상되면(그러기 위해선 독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변용시키는 과정이야말로 우리 독서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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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병사와 함께한 여름
베티 그린 지음, 권혜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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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인데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있다. 공쿠르 수상작인 리디 살베르의 <울지 않기>를 필두로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등등해서 이책저책 참 많이도 읽는구나.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베티 그린의 <독일병사와 함께한 여름>을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읽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주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소설 역시 전쟁 중에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해서 그런지 더 재밌게 읽을 수가 있었다. 예전에 중원문화에서 <독일포로와 소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새로운 제목과 번역으로 출간된 모양이다.

 

1940년대 어느 날, 주인공 퍼트리샤 앤 버건이 사는 1,200명 남짓한 사람들이 사는 아칸소 주 젠킨스빌에 일단의 독일군 포로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미국 남부 아칸소는 지독한 인종차별과 가부장적 시스템이 정착된 곳이다. 주인공 패티가 아버지 해리로부터 무자비한 가정폭력을 당하는 장면들이 소설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딱히 맞을 만한 이유도 없는데,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해리는 작은딸 샤론을 편애하면서 큰딸 패티에게 폭언과 매질을 해댄다. 올해 열두 살 난 소녀 패티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침례교 수련회에도 가지 못하고, 도서관도 여름방학을 맞아 문을 닫았기 때문에 마땅히 읽을 책도 없이 그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버지 해리가 운영하는 잡화점에도 자주 들르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귀찮아할 따름이다. 어머니 역시 딸에게 그다지 애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집안일을 도와주는 흑인 아줌마 루스뿐이다.

 

그렇게 외로운 생활을 하던 패티에게 잘 생기고 친절한 독일군 포로 프리드리히 안톤 라이커의 등장은 일종의 구원 같은 메시지였다. 농장에서 목화 딸 때 쓰기 위해, 밀짚모자를 사러 상점에 들른 독일군 포로들의 통역을 맡은 라이커와 이야기를 나누며 어린소녀는 그만 첫사랑에 빠져 버린다. 언어의 장벽을 피하기 위해 안톤 라이커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설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독일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던 시기라 보수적인 미국 남부 사람들에게 독일군 포로들은 그저 사악한 나치로 보일 뿐이다. 게다가 미국 해안에 특수임무를 띤 독일비밀공작원들이 상륙해서 비밀조직과 접선을 시도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도는 판국이었다. 미국 법무부에서는 적군을 도와주는 이들을 반역죄로 처벌하겠다는 공표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괴팅겐 대학 의과생 출신의 안톤 라이커는 기지를 발휘해서 포로수용소를 탈출하고 패티의 도움을 받아 패티네 버려진 차고에 은신하게 된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가족으로부터 사랑도 받지 못하는 소녀에게 은밀한 비밀이 생긴 것이다. 패티는 적극적으로 라이커를 돕기 시작한다. 아버지에게 선물했던 고급셔츠를 건네주고, 집에서 음식을 몰래 빼돌려 라이커에게 전달해준다. 나치와 상극일 수밖에 운명의 유대인 소녀가 동정과 연민에 젖어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위험한’ 적국 병사를 돕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이었을까. 전시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철부지 소녀의 인도주의 정신의 발로라고 여길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FBI 수사관까지 동원돼서 심문에 나선 것을 보면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안톤 라이커의 운명도 그렇고, 나이 어린 패티가 그를 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 해리가 그녀에게 가할 폭력의 수위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호기심 많은 우리 꼬마 숙녀는 지나가는 자동차에 돌멩이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깨는 사고를 내고, 아버지가 같이 놀지 말라는 프레디와 어울리다가 그만 사단이 나고 만다. 패티에게 행해지는 아버지 해리의 무자비한 폭력을 목격한 안톤 라이커는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패티를 구하러 나와 그만 신분을 노출시킬 뻔한다. 그 모든 것을 목격한 경험 많은 루스는 근사한 아침식사로 안톤 라이커를 대접하고, 더 이상 위험해지기 전에 떠나겠다고 선언한 안톤 라이커를 말리지 않는다. 아침식사를 하던 식탁에서 흑인이 없으면, 청소는 누가 하느냐는 루스 아줌마의 질문에 답하는 안톤 라이커의 대답은 인상적이었다. 라이커는 떠나면서 패티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남겨준다. 그렇게 홀로 남은 패티를 찾아온 운명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베티 그린 작가는 전쟁 중에 적국 병사와 자아도취적 사랑에 빠져 그를 적극적으로 도운 유대인 소녀의 이야기를 <독일병사와 함께한 여름>을 통해 비극적으로 풀어냈다. 주류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유대인 가정 내의 불화를 바탕으로, 전쟁이라는 큰 형태의 폭력을 가정폭력과 비교하면서 어떤 것이 더 문제일까 하는 문제의식에 도달한다. 안톤 라이커는 패티에게 히틀러와 그녀의 아버지 해리가 본질적으로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다만 누가 어떤 종류의 권력을 더 가지고 있냐에 차이일 뿐이라는 지적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소설에 등장하는 가정폭력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KKK단이 암약하던 시기 미국 남부에 살던 흑인들에게 공손함과 복종만을 요구하던 지독한 인종차별과 더불어 시대상을 보여주는 좌표로 작동한다.

 

개인적으로 주인공 패티 버건이라는 소녀의 철없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걱정이 됐다. 안톤 라이커에 대한 아련한 사랑을 그저 마음에 담아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가 떠나기 전에 준 반지에 대해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는 파커 언니에게 자랑한 것이 화근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빚게 된다. 열두 살짜리 소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걸까. 어린 소녀에게 반역죄를 물어 소년원에서 교화시키는 결말 부분은 정말 끔찍했다. 비이성적 애국주의의 광풍이라고 해야 할까. 고향에 남은 부모님과 그들이 운영하는 상점에 가해지는 린치도 인종주의 이슈와 결합되면서 인종차별과 역인종차별을 당하게 되는 케이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노출시킨다.

 

소설에 대한 상상력을 좀 더 확장해 본다면, 과연 6년이 지나 법적 성년이 된 패티는 바람대로 대학에 진학해서 기자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이뤘을까. 그리고 괴팅겐에 산다는 안톤 라이커의 부모님을 찾아가 그의 최후에 대해 어떻게 전해 주었을 지 궁금해졌다. 이 책의 후속작으로 <오랜 시간 뒤에 온 아침(Morning Is a Long Time Coming)>이라는 작품이 있다고 하는데, 그 책에 집으로 돌아간 패티의 또 다른 이야기들이 실려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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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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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독서모임에서 내년 첫 번째 독서모임 책으로 김숨 작가의 신간 <바느질하는 여자>를 골랐다. 그러다 나온 책의 제목 이름이 바로 중국 출신 작가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라는 책이었다. 같은 모임에서 헬렌님이 이 책 정말 좋다는 말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인근 램프의 요정 서점에서 거의 새책 같은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를 발견하고 데려왔다. 이미 읽고 있던 리디 살베르의 신간을 읽고 나서 바로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를 집어들었다. 250쪽 남짓한 분량이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이틀 만에 다 읽었다. 고마워요 헬렌님.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72년 중국의 어느 시골마을이다. 중국 대륙의 수령 마오쩌둥의 영도 아래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그야말로 야만의 기록이자 퇴행의 역사였다. 역설적으로 마오 주석의 명령을 치열하게 수행했던 바로 그 홍위병들이 인민의 적으로 몰려 숙청되고, 하방되어 시골마을로 내려가 기약 없는 농촌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소설의 주인공 (화자인) 나와 뤄가 홍위병이었다는 건 아니다. 그들은 지식인 계급의 자식들로 이제 겨우 열여덟 살 먹은 청년들이다. 마오 주석의 어록을 기록한 책 외에는 모든 서방 부르주아 세계를 그린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고, 그런 책을 읽는 건 반동분자들의 파렴치한 행위로 치부되던 그런 중세 암흑기 같은 시절을 소설은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때 아편농사를 짓던 하늘긴꼬리닭마을의 촌장은 나와 뤄가 마을에 도착한 첫날, 소지품 검사를 하던 중에 생전 처음 보는 바이올린을 부르주아의 장난감이라며 불살라 버리려고 하지만, 타고난 이야기꾼인 뤄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 이후는 언제 재교육에서 벗어날지 모르는 기약없는 나와 뤄의 하방생활 생존기가 이어진다. 영화상영 시설이 부족했던 그 시절에, 나와 뤄는 촌장이 영화를 보고 나서, 구전영화를 상영하라는 기상천외한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단순하게 영화의 상황과 대사를 외우는 것만으로 영화 상영 시간을 맞출 수 없었으리라. 그렇게 다이 시지에 작가는 상상력과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피어나는 유머를 통해 이야기를 훌륭하게 전개해 나간다. 이즈음에 바느질 처녀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도 투입된다. 제목에 등장하는 바느질하는 중국소녀가 바로 바느질 처녀다.

 

나와 뤄처럼 하방된 안경잡이가 가지고 있는 금서가방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그들의 운명은 급속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하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아줄의 방법으로 방앗간 노인의 민요수집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잡지만,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안경잡이는 나와 뤄에게 모종의 거래를 성사시키고 마침내 비밀의 금서를 획득하게 된다. 발자크의 <위르쉴 미루에>를 필두로 해서,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고전 걸작들을 그야말로 수백 페이지의 강물처럼 주인공을 덮쳤다. 재교육이라는 비참한 상황 가운데, 세계에 맞설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그 책들이 주는 위안은 대단했을 것이다.

 

화자가 고전문학 세계에 온전하게 정신이 팔린 동안, 뤄는 나름대로 사랑하는 바느질 처녀를 자신이 상상하는 문명인으로 교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그녀에게 전달하기 위해 고소공포증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을 찾은 바느질 처녀의 아버지 재봉사에게 자신들이 읽은 소설을 구전으로 전달해 주던 나와 뤄는 집 밖에서 엿듣고 노회한 마을 촌장에게 발각되어 공안부에 끌려갈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렇지 이렇게 이야기가 이렇다 할 위기 하나 없이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갈 리가 없지. 그 위기를 한때 아편재배로 생계를 꾸려가다 골수공산당으로 변신한 촌장은 자신의 충치를 저명한 치과의사 아들인 뤄가 치료해 준다면 무마해 주겠다는 거래를 시도한다. 그리하여 재봉틀을 이용한 촌장의 썩은 치아 치료 과정에서 저자는 이 소설 최고의 희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앞서 말라리아에 걸린 뤄를 치료하기 위해 바느질 처녀가 소환한 네 명의 무당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 유물론이 지배하는 중국사회가 가진 이중성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안경잡이가 어렵사리 구한 민요 가사가 너무 저속하다며,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맞게 표절하는 장면처럼 공산주의 시스템의 허위와 위선을 고발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뤄와 바느질 처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화자 나에 대한 심리묘사가 돋보인다. 나는 뤄 못지않게 바느질 처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기존의 도덕률 때문인지 나의 행보는 갈지자처럼 엇갈린다. 나는 무의식의 세계를 대변하는 일련의 개꿈을 통해 미래에 대한 예시 혹은 징조를 엿보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도리가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야만의 시대를 사는 청년의 불안감을 형상화한 나의 꿈은 암울하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금서에 대한 유혹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현실이 암울할 때, 이상적인 탈출구로서 고전문학은 도피할 수 있는 강력한 이상향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다이 시지에 작가는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해준다. 프랑스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영미문학의 저자들보다 상대적으로 프랑스 독자들에게 좀 더 쉽게 어필할 수 있는 발자크를 선택한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 되기도 했다.

 

이 소설에서 하일라이트는 발자크 문학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깨달은 바느질 처녀는 고향마을을 떠나기로 결정하는 장면이다. 그녀를 무식한 시골처녀로 인식하고 재교육의 대상으로 여긴 사이비 지식인 뤄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하방 중인 두 명의 청년들에게 무한한 사유와 상상력의 자유를 주었던 문학의 힘은 바느질 처녀에게도 마찬가지로 작동했고, 발자크 덕분에 그녀는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의 비밀을 깨달았던 것이다. 어쩌면 혁명이 이루지 못한 사고의 혁신적인 전환을 문학 혹은 문화예술이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상징이었을까. 대단히 멋진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다이 시지에 작가가 직접 연출한 동명의 영화도 있다고 하는데(그런데 자신이 직접 이 이야기만큼은 영화로 다루고 싶지 말하지 않았었나) 그 영화도 한 번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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