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로열 - 제149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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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즐겨 찾는 사이트가 하나 생겼다. <소설리스트>라고 몇몇 작가와 서평꾼들이 주로 새로 출간되는 소설에 대해 알려주는 그런 사이트다. 뭐 절대적인 정보는 아니라지만, 아주 유용하게 사용 중이다. 특히 지난 연말에는 올해의 베스트 3라는 타이틀로 여러 책들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책지름신이 강림하여 여러 권을 책을 사게 됐다. 쿠라하시 유미코의 <성소녀>를 필두로 해서 플래너리 오코너 그리고 사쿠라기 시노의 <호텔 로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들을 사모았다. 그리고 작년 말부터 해서 오늘까지 <호텔 로열>을 읽었다.

 

아무래도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솔직히 잘 모르는 사쿠라기 시노란 작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는 고향인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작품활동을 한다고 하는데, 관능소설 작가란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그 방면에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 역시 역자후기를 통해 알게 된 정보인데, 작가의 부친께서 진짜 <호텔 로열>이란 이름의 러브호텔을 경영했었다고 한다. 남녀관계의 궁극을 너무 일찍 깨달아서일까, 작가가 괜히 관능소설의 대가가 된 게 아닌 모양이다.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사람과 풍경이 있는 소설 <호텔 로열>은 연작소설집으로 공간적 배경은 호텔 로열과 직간접적 연관성을 이루며 역순으로 전개된다. 한창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사랑을 나눌 곳을 원하던 연인들에게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던 호텔 로열의 폐허에서 연인의 누드 사진을 찍겠다고 찾아오는가 하면, 한 때 문전성시를 영업을 마치고 폐업하던 날 그동안 성실하게 성인용품을 대주던 업자와 일탈을 감행하려던 주인장의 딸의 유혹이 배어 있기도 하다. 가족의 봉안을 맡은 주지 스님의 처는 대를 이어 가며, 사찰을 후원하는 단가의 자제와 묘한 관계를 맺는다.

 

예의 스님이 다른 곳으로 독경을 하러 가게 되어 굳은 돈으로 빡빡한 현실에서 벗어나 러브호텔을 찾은 중년부부의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자그마치 20년 동안이나 자신의 스승과 불륜 관계를 맺은 아내에 대한 실망으로 출장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제자와 어디론가 떠나 버리는 수학 선생님의 이야기는 구슬프다. 어쩌면 이 두 사람이 <호텔 로열>에서 벌어진 정사(情死) 사건의 주인공들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홋카이도 동부 지방에 위치한 구시로(釧路) 습원은 두루미와 사슴으로 유명한 명소라고 한다. 아칸 산 부근에 위치한 국제 두루미 센터는 자연생태 사진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소설의 어디선가에서도 아마 두루미가 등장하지 않았나 싶다. 푸른 녹지가 장관이라는 곳 언덕에 위치한 러브호텔, 그곳의 풍경을 바탕으로 벌어지는 사람들의 희로애락 이야기가 <호텔 로열>을 채우고 있다. 사쿠라기 시노 작가의 소설은 그렇게 풍경을 채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네 삶처럼 평범한 이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배어 있다. 그 이야기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즐겁다.

 

연작소설 특유의 서사구조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렇게 이어진다. 때로는 <호텔 로열>이라는 공간이, 혹은 전작에 등장한 캐릭터가 다음 이야기에서 접점을 이루면서 실타래처럼 얽힌 소설의 인과관계를 설명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복잡하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단순하면서도 명징함이야말로 <호텔 로열>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작가가 관찰한 그네들의 삶에 어떤 절묘한 해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정말 오랜 시간 바람을 피웠다는 무력감에도, 오래전 집을 나가 자수성가했다고 생각한 아들이 실은 조폭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어렵게 번 돈으로 분위기도 모르는 남편과 러브호텔에 가고 싶다는 아내의 바람에서도 소소한 삶의 진실이 느껴진다. 그런 삶의 진실에 관능까지 더하니 어찌 맛깔스럽지 않겠는가 말이다.

 

사쿠라기 시노 작가와의 첫 만남은 강렬하면서도 담백했다. 작년에 모두 그녀의 작품이 세 권 출간됐는데, 남은 두 편의 작품에 도전해 보고 싶다. 양양한 을미년이 이제 시작이니, 이루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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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5
정세랑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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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처음으로 읽은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읽기로 결정한 순전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나의 절친 이름과 같은 이름이 떡하니 표지에 박혀 있어서라고 한다면 너무 단순한 걸까.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나오고 있는 노벨라 시리즈, 우연한 기회에 초능력을 갖게 된 삼남매의 이야기가 쏠쏠하다.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삼남매는 서해안의 모처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길에서 먹은 형광색 나는 바지락칼국수 때문에 초능력을 얻게 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초능력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다. 어려서 슈퍼맨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면서 저런 초능력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는 그런 초능력이 허황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한 번도 초능력 타령을 한 적이 없다. 지금도 아마 그런 나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재인, 재욱, 재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초능력은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니다. 표지에 보면 손톱깎이 하나, 열쇠 한 개 그리고 레이저 포인터 이렇게 그들의 초능력을 상징하는 요상해 보이는 물건들이 나열되어 있다. 사실 레이저 포인터의 경우에는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화학과 출신으로 대전의 연구실에서 생활하는 큰누나 재인은 깎이지 않는 강력한 손톱을 자랑한다. 애걔, 이게 무슨 초능력이야 싶지만 자신의 특기인 사물에 대한 관찰과 연구를 바탕으로 같이 사는 친구 경아를 스토커 남친으로부터 구하게 된다.

 

재인의 초능력에 비하면 재욱의 그것은 좀 더 특별하다. 시야가 붉어지면서 문제가 생기는 지점을 파악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재인과 재욱에 비해 좀 더 다른 모양새의 막내 동생 재훈은 가장 먼저 자신의 초능력을 감지해 내지만 그 능력 역시 소박하기 짝이 없다. 엘리베이터와의 교감이라니. 세 남매에게 각기 다른 세 가지 물건들이 소포로 배달되면서 그들은 각각 save 1, save 2 그리고 save 3 라는 미션을 부여 받는다. 그 미션이 무엇인지는 소설을 읽어 보시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니.

 

정세랑 작가의 노벨라 <재인, 재욱, 재훈>은 최근 유행하는 경장편 소설이다. 사실 도끼 선생의 <죄와 벌> 같은 대작 장편소설을 끈기 있게 읽어낼 참을성도 생각보다 부족하니 경장편이 대세인 요즘 세태를 나무라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사람들은 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데, 독서 말고도 관심을 사로잡는 온갖 것들에 포위되어 있는 마당에 대작소설을 읽기에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무엇보다 끈기도 너무 부족하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새해 첫 독서로 <재인, 재욱, 재훈>은 나에게 안성맞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녀선발대회에 참가한 미녀들에게 희망이 무어냐고 물을 때마다 월드 피스(world peace)"라는 대답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슈퍼내추럴 파워를 가진 슈퍼히어로들 역시 세계를 구하는 것이 자신의 미션이라는 말도 새삼스럽지 않을 것 같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슈퍼내추럴 파워를 가진 재인, 재욱 그리고 재훈 역시 거창하게 세상을 구하는데 동원됐다면 비현실적이었을 것이다.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자기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구하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는 독자의 이성과 감성을 예리하게 타격한다. 그들이 구한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고 말이다. 물론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짚으면서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또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내 생각은 그렇단 말이다.

 

세 사람이 처한 상황 중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케이스가 바로 막내동생 재훈의 조지아 염소농장 이야기였는데, 작가의 친동생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엮은 이야기라고 하니 좀 얼떨떨하기도 했다. 작가의 말대로 정말 타인의 이야기를 참고만 잘하면 직접 사막에 가보지 않고서도 사막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서술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 부분은 정말 참고할 만하다. 물론 체화의 문제는 또 다른 것이겠지만 말이다.

 

<재인, 재욱, 재훈>은 은행나무의 노벨라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데, 시리즈의 전작과 앞으로 나올 작품들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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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거인 철학하는 아이 3
마이클 포먼 글.그림, 민유리 옮김, 이상희 해설 / 이마주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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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사두기만 아직도 읽어볼 생각도 못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시대를 다룬 대역사물이라고 하는데, 전쟁 뒤에 따르는 평화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을까라고 아직 읽어 보지 못한 독자의 심정으로 생각해본다. 어린이 브랜드 이마주에서 나온 마이클 포먼의 <두 거인>은 책의 뒷면에 나온 대로 전쟁의 어리석음과 평화의 의미를 다룬 책이다.

 

시간적 배경은 아주 오래전 옛날, 그리고 공간적 배경은 아름다운 나라다. 이 나라에는 샘과 보리스라는 두 명의 친한 거인이 살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아무 것도 아닌 분홍색 조가비였다. 샘과 보리스는 분홍색 조가비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움을 벌인다. 결국 싸움판 끝에 대홍수가 나고, 신발은커녕 양말도 서로 바꿔 신고 멀리 떨어진 섬으로 헤어지게 된다. 그게 끝이 아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서로에 대한 감정 때문에 큰 돌멩이를 날려 다치게 하고, 커다란 돌 방망이를 들고 쳐들어가 친구를 해칠 계획까지 세운다. 그러다 샘과 보리스는 서로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난 싸움이 모두 부질 없었노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분쟁에 대한 아주 이상적인 해결책이 아닐 수 없다. 나머지는 둘 다 행복하게 잘 지냈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전쟁/다툼의의 시초는 아무 것도 아닌 분홍색 조가비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홍색 조가비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아닐까. 다시 동화 속의 이야기로 돌아가, 현실세계의 전쟁도 그렇게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된다면 문제해결이 쉽지 않을까. 양국의 전략적 이해가 걸려 있는 영토분쟁을 필두로 해서, 자국에서는 없는 에너지 자원 확보를 위한 무력 충돌, 특정지역의 패권과 정치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부른 전쟁 등 분쟁의 원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래도 영국 출신의 노작가 마이클 포먼은 <두 거인>에서 분홍색 조가비라는 아무 것도 아닌 재화를 등장시켜 전쟁의 원인이 되는 이유가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가설을 세운다.

 

전쟁과 평화는 야누스처럼 이면을 가지고 있다. 전쟁이 시작이라면 평화는 끝을 상징한다. 어떤 전쟁도 끝이 없을 수 없고, 한쪽편이 이기든 지든 평화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작가는 두 거인이 싸움을 벌이면서도 짝짝이 양말을 신고 헤어졌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평화 대신 전쟁을 누구 원하겠는가. , 천문학적 무기 시스템을 팔아야 존재할 수 있는 다국적 군산복합체 정도가 있을까. 역설적으로 전쟁/다툼의 시작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타협을 통한 평화도 거인들의 짝짝이 양말이 가져다준 화해처럼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아이들을 위해 마이클 포먼이 그린 동화답게 정교한 그림 대신, <두 거인>은 큼지막한 글씨와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거인의 그림은 골판지 재료를 찢어 붙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의 시선으로 보면 전쟁과 평화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는 과연 철학하는 아이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자못 궁금해졌다. 그들의 생각도 들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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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0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아무것도 아니긴요..무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분홍의 조개라는 실체를 두고 전쟁..
그런 것이니..눈에 뵈지않는 이념과 사상을
놓고 싸우는 것보단 적어도 실리주의.끝이나도 양말이 짝짝이라도 곧 어깨동무 하겠지요.

그런데. 이야기라는건 다 거기서 거기인가봐요.아니면 모티프ㅡ얻어..그런건가??
이 거인족 하니..갑자기 일애니 원피스 중
거인족스토리가 상당히 비슷하다 했어요. 투박하고 단순한 그림체 맘에들어요..
처음 앞의 질문부분까지만 읽고 답을 했어요.
다 읽으면 결론을 내 놓으실 듯 해서요.
그럼 누가..이 동화를 보겠나..싶어.
서둘러 제 답을 쓰고..결론은 같더라도.
그때는
아..양말을 나눠 신자..하고..ㅎㅎ
생각하는 동화 고맙습니다. 계속 소개 부탁드려요..재미있네요..
그럼 깊은밤 ~ 굿나잇! 꿀나잇~!!
 
달과 6펜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7
서머싯 몸 지음, 안흥규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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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이제야 읽게 됐다. 하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보가 많아, 대강의 줄거리는 꿰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읽은 것하고는 또 다른 체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해 양가적 감정이 내적으로 치열하게 충돌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이 40세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열정 하나만 가지고, 그동안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훌쩍 떠난 한 남자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쏟아내는 자아와 또 한편으론 참 멋지다라는 느낌이 동시에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태어나면서부터 현실과 이상이라는 서로 상이한 두 세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성장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는 자조적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이 생활에 충분한 돈까지 벌어다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러기가 쉽지 않다. 영국 출신의 작가 서머싯 몸이 프랑스 야수파 출신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삼은 소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영국 런던에서 증권 중개인으로 활동하던 중, 어릴 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17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훌쩍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스트릭랜드 부인은 참을 수가 없다. 그녀는 찰스가 그림이 아닌 다른 이유, 젊은 여자가 생겨 떠났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때 절실하게 사랑한 사람이 자기가 사랑했다고 믿는 남자의 꿈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는 사실에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서머싯 몸은 작가의 페르소나 역할을 충실하게 대행할 인물로 화자인 나(역시 작가다)를 투입한다. 나레이터 역할의 나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행적을 쫓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캐릭터다. 찰스의 관심 분야와는 다르지만, 명확한 예술가이며 일반인들의 일상적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찰스와 그나마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에게 찰스가 이야기를 털어 놓으니 소설의 진행에 큰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하다.

 

소설 <달과 6펜스>는 크게 세 개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초반부의 영국 런던에서는 내가 어떻게 해서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에 개입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 소설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프랑스 파리가 그 무대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특정한 공간에 가야 한다는 공식이 그 시절에도 있었나 보다. 이 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하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 더크 스트로브와의 애증에 얽힌 삼각관계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왠지 초중반의 긴장감에 비해 남태평양 타히티에서의 찰스 스트릭랜드의 최후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김빠진 콜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시켜 버린 예술가에게 마지막 걸작을 남기는 것 외에 무슨 사명이 있단 말인가.

 

이상적인 도덕론자도 아니면서 독자의 양심을 건드리는 것은 17년간 함께 한 가족마저 저버린 찰스 스트릭랜드의 행동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어디까지인 걸까. 스트릭랜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의 가족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찰스는 가족 특히 아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모름지기 예술가는 이상과 현실을 병행할 수 없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서머싯 몸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프라하의 어느 천재 작가 역시 현실 속에서 창작의 고통에 괴로워하지 않았던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소설의 제목처럼 하나는 이상을 지칭하는 ‘달’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물질이라는 이름의 현실을 상징하는 ‘6펜스’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두 명의 캐릭터가 자못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스트릭랜드야 도덕성 때문에 실컷 욕을 먹었을 테니,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할 것이다. 첫 번째 인물은 바로 나레이터인 ‘나’다. 어떻게 해서 나는 계속해서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에 개입하게 되는 걸까. 그 때는 아직 인간의 본성이 모순되고, 성실성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위선이 내재되어 있는지 몰랐다는 고백에서 미생(未生)의 인격을 만나기도 했다.

 

어쨌든 런던, 파리 그리고 마지막의 타히티까지 아우르는 여정은 도저히 개연성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타히티의 숲 속에서 태고적 아름다움의 비밀을 만났게 되었다는 건 어느 정도의 개연적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타히티까지 갈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는 내가 그곳까지 가서 직접 스트릭랜드의 최후를 목격한 사람들의 전언을 듣게 된 것은 운명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소설적 장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예술가가 아닌 다른 직업군의 사람이 나레이터 역할을 맡았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불사른 천재 화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열정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물론 두 번째로 이야기할 문제적 인간 더크 스트로브야말로 그 누구보다 앞서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일찍이 인정했다. 후반에서 찰스 스트릭랜드가 죽기 전에 쉽게 그의 그림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허다했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나레이터의 말은, 예술마저 물신화되고 돈이라는 가치로 계량화된 현대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의 또 다른 문제적 인간은 바로 더크 스트로브다. 나는 그를 어릿광대라고 부르곤 하는데, 비록 그것이 그의 특징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적인 행위를 한 그에게 지나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배은망덕이라고 한다면 세계 챔피언 급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스트릭랜드는 더크 스트로브와 부인 블란치의 지극한 정성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면서도 결국 한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고야 마는 신공을 보여준다. 주변의 호의를 아무런 염치도 없이 받아들이면서, 최소한 지켜야할 인간의 도리조차 지키지 않는 것이 예술가의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냉혹한 잔인성에 그만 질려 버렸다. 어쩌면 서머싯 몸은 이런 극단적 대비를 통해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론을 터득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우리나라 방송계를 쥐락펴락하는 막장드라마의 원조격이라고나 할까.

 

더크 스트로브는 찰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팔리는 화가지만,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화가라고 생각하는 찰스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은인을 환쟁이라고 부르면서 주저하지 않는다. 창조의 재능이 없다고 해서, 그 창조력을 분별하고 비판하는 능력까지 부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더크 스트로브는 온 몸으로 대변해준다. 물론, 이런 찰스의 행동을 파악한 나레이터 나는 교묘하게 그를 자극하면서 이야기의 빠진 퍼즐 조각들을 하나둘씩 채워 넣는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에게 빠져 자신을 버린 블란치가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용서하겠노라고 나에게 선언한다. 문제는 블란치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비극의 피날레에서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가 그린 블란치의 누드화에 칼질을 하려는 순간, 영혼의 고뇌를 거쳐 정화된 예술혼의 결정체에 압도되는 장면이야말로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사족에 불과할 따름이다.

 

<달과 6펜스>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폴 고갱의 삶에 대해 호기심을 느껴 찾아보았더니 정말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나름의 논리를 갖춘 냉혹한 예술가 찰스 스트릭랜드는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란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 현실에 견주어 볼 때, 사후에 비로소 재평가를 받게 된 과정조차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원하는 달(개인의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 정도는 문제없다는 인식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달에도 가기 어렵지만, 현실세계에서 6펜스를 얻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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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의 정원 대산세계문학총서 125
바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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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에서 꾸준하게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는 대산세계문학총서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선뜻 도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때로는 엄청난 분량 때문에(최근에 출간된 벤 오크리의 <굶주린 길>) 혹은 정말 처음 듣는 생소함, 그것도 아니라면 읽기 시작했지만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하는 다양한 이유 때문이다. 최근에 실패작으로는 에른스트 윙거의 <대리석 절벽 위에서>을 꼽을 수 있다. 다닐로 키슈의 책도 호기심에 사기는 했지만 아예 펴보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니 중국 3대 문호로 손꼽히는 바진 선생의 신간 <휴식의 정원>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냉큼 사기는 했지만 독서는 요원하게만 느껴지던 차에 어제부터 읽기 시작해서 이틀 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아직까지 바진 선생의 다른 작품들과 만나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200쪽 조금 넘는 분량이라 다른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담이 없었다고나 할까. <휴식의 정원>은 기본적으로 바진 선생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문인 라오리의 시선을 통해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청두에서 있었던 몇 가지 사건들을 한 바구니에 꿰어 담아 만든 이야기다.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전쟁에 대한 일화는 공습경보 한 차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가 대후방이라고 칭하던 국민당 정부가 장악하고 있던 일본군의 침략이 미치지 못하는 쓰촨 지방의 청두가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십 수 년간을 타지에서 떠돌던 소설의 화자 리 선생은 청두에 돌아와 잠시 호텔에 머물다가 거리에서 우연히 소학교, 중학교 심지어 대학까지 동문한 친구 야오궈둥을 만나게 된다. 부친으로 받은 받은 전답이라는 경제적 바탕으로 특별한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유복한 생활을 누리던 지기에게 리 선생은 식객으로 신세를 지게 된다. 그리고 라오야오가 몰락한 양씨 일가에게 사들인 대저택에 위치한 “휴식의 정원(憩園)”에 머무르게 되면서 보고 듣고 직접 체험한 일들을 독자에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중국에서는 역사시대 이래 유력자들이 문인들을 식객으로 보호해왔다. 예나지금이나 예술가들은 예술활동과 경제활동을 더불어 할 수 없었기에, 유복한 경제력을 지닌 이들이 예술가들의 예술활동을 지원하는 식객 시스템을 유지해왔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인 우리의 리 선생은 비록 친구의 집에 얹혀사는 식객이긴 하지만, 염치를 아는 지식인으로 아랫사람들에게조차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리 선생의 인격에 대해 합격점을 주고 싶다.

 

그가 “휴식의 정원”에 들어오게 되는 첫 날, 아름다운 정원에 있던 동백꽃 가지를 꺾어 가려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 소년은 저택의 이전 주인이었던 양씨네 셋째 나리의 두 번째 아들로 이름은 한얼이다. 아직 어린 소년이지만, 당돌하게 자기주장을 펼쳐 보이는 이 소년의 가계에 얽힌 이야기가 소설의 한 축을 구성한다. 바진 선생은 조금 뜸을 들이면서 휴식의 정원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얽힌 사람들의 일상과 미스터리를 조금씩 풀어 나가는 방식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마지막으로 소설 쓰기에 매진하는 바진 선생의 페르소나 리 선생의 창작욕을 섬세한 바늘로 찌르듯 환기시키는 역할을 맡은 친구 라오야오의 새부인 완자오화가 등장한다. 조용하면서 동양적 외모를 가진 전형적 현모양처의 화신으로 등장해서, 소설가 리 선생에게 왜 좀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글을 쓰지 않느냐고 되묻는 당찬 여성상을 들어내 보이는 결기가 인상적이다. 자고로 모든 예술가에는 예술혼을 자극하는 뮤즈가 필요하다고 하던데, 그런 점에서 야오 부인은 훌륭한 독자이자 비평가가 아닐 수 없다. 첫만남에서 그녀의 웃음 덕분에 자신의 창작열의 매개였던 ‘알 수 없는 중압감’마저 덜어낼 수 있었다고 표현할 정도다. 그녀에게 들은 자아의 확장이라는 말은 큰 울림으로 작가에게 다가온다.

 

다년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청장년의 혈기를 다스려낸 중년의 바진 선생은 인생을 관조하듯 휴식의 정원이라는 공간을 채우는 동백꽃송이, 바닥에 떨어진 사기 주걱 같은 모양의 목련꽃에 대한 단상은 물론이고, 몇 마리의 귀찮은 파리와 모기에조차 섬세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작가의 타인에 대한 진정성과 인도주의 정신은 도박과 축첩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처자식에게 외면당한 양씨 집안의 양멍츠를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과 아직 자아를 이루지 못한 십대소년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한얼을 도우려는 모습에서 정확하게 포착할 수가 있었다.

 

한편, 늙은 하인에게 들은 미스터리에 대한 호기심이 야수의 날카로운 발톱처럼 생채기를 내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야오 집안의 말썽꾸러기인 샤오후의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식객인 자신의 처지를 고려해서 친구에게 말하는 수위를 조정하는 장면 또한 일품이었다. 바진 선생이 전개하는 몇 가지 이야기 군상 속에서 적절하게 자리한 균형이야말로 <휴식의 정원>의 매력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구성의 화룡점정으로 작가 개인의 일과 생활 그리고 작품마저 공허하고 허무하게 만드는 변화무쌍한 감정의 소용돌이와 싸우며 글쓰기에 매진하는 예술가(자신)의 고뇌까지 얹어 놓으니 그야말로 천의무봉이 따로 없을 지경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휴식의 정원’은 중국인들이 이상향으로 품어온 무릉도원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걱정과 근심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전쟁이라는 폭력의 극한 속에서도 그런 공간은 가정이라는 이름의 울타리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바진 선생은 한 발짝 더 나가 그런 공간이라도 모든 가정이 가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톨스토이의 예언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 주었다. 또한 작가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포기하지 않는 인도주의 이상(理想)과 희망이야말로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가치라는 사실을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핍진하게 그려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독서로 부족함이 없다.

 

[리딩데이트] 2014년 12월 21일 ~ 22일 오후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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